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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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光祚생몰연도 미상
전진 및 후연의 인물. 자는 불명. 기주(冀州) 청하군(清河郡) 출신.
2. 생애
환관으로 전진에서 천왕 부견을 섬기면서 용종복야(冗從僕射)를 지냈다. 전연의 모용수가 장안(長安)으로 망명왔을 때, 부견은 그와 교제하며 대화를 나누곤 하였는데, 모용수가 떠난 후 광조가 부견에게 말했다."폐하께서는 모용수가 의심스럽지 않으십니까? 모용수는 사람의 밑에 오래 있을 인물이 아닙니다."
부견은 이 말을 새겨듣지 않고 오히려 모용수에게 그대로 전하였다.건원 19년(383년) 11월, 천왕 부견이 100만 대군을 이끌고 동진을 침공할 때, 광조는 장락공 부비를 섬기며 업(鄴)을 지켰다.
건원 20년(384년) 10월, 전진군이 비수대전에서 대패하여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자, 모용수가 반란을 일으켜 연나라 부흥을 꾀하였다. 광조는 부비의 명령을 받고, 군사 수백명으로 정령족의 적진(翟真)과 합류하여 양평(陽平) 태수 소흥(邵興)을 도와 후연을 건국한 모용수의 군대과 맞서싸웠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광조와 소흥은 양국(襄國)에서 후연의 관군대장군 모용륭에게 패하여, 소흥은 도망치다가 광아(廣阿)에서 표기대장군 모용농과 조우하여 사로잡혔고, 광조는 서쪽 산을 따라 업으로 도망쳤다.
부비는 광조와 참군 봉부(封孚)를 진양(晉陽)으로 파견해 병주(幷州) 자사 왕등과 표기장군 장자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왕등과 장자는 병력이 적다는 이유로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임무에 실패한 광조와 봉부는 도망쳐 동진에 귀순하였고, 동진 조정에서는 그를 하북군수영(河北郡守營)으로 삼아, 제북(濟北)의 부양(濮陽)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후 광조는 후연을 배반하고 동진에 투항한 제북태수 온상(温詳)과 함께 활동하였다.
건흥 2년(387년) 정월, 온상이 후연군에게 패하여 도망치자, 광조는 황문시랑 봉부, 거록태수 봉권(封勸) 등과 함께 군문 앞으로 나아가 후연에 투항하였다. 성무제 모용수는 광조를 용서하여 예전처럼 대우해주고, 그를 불러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진왕(秦王: 부견)이 짐을 깊이 예우하여, 짐 또한 그에게 충성을 다하였소. 회남(淮南)에서 패배했을 때에도 짐이 그에게 충절을 보였으나, 나중에 오해와 의심을 사는 바람에 목숨을 잃을 것이 두려워 도망쳤으니 미안할 따름이오. 그 옛날의 은혜를 생각할 때면 한밤중에도 잠들지 못할 지경이오."
광조 역시 슬퍼하니, 그 애절함에 주변 사람들도 감명받았다. 이후 모용수는 광조에게 금과 비단을 하사했으나, 광조가 이를 굳게 사양하였다. 이에 모용수가 물었다."그대는 아직도 의심하느냐?"
광조가 답했다."신은 예전에 그저 충성을 다할 뿐이었고, 폐하께서 아직까지 신을 기억해 주시리라 생각지 못했습니다. 신이 감히 죽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모용수가 말했다."이는 그대의 충성심이며, 내가 바라는 바이오. 앞서 한 말은 농담이니, 두려워 마시오"
모용수는 광조를 더욱 두터이 예우하고, 중상시(中常侍)로 임명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