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22:58:00

광주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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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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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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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colbgcolor=#fff,#191919>경기도 광주시
시조 이자성 (李自成)
중시조 이당 (李唐)
집성촌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만선리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무갑리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매원민속마을)[1]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 신당리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삼신리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해리면 사반리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대곡리
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봉천리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죽림리
황해도 신계군 마서면 양곡리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 당목동
인구 181,377명(2015년) | 국내 53위
1. 개요2. 역사
2.1. 조선 이전2.2. 조선 시대
3. 분파4. 특이사항5. 인물
5.1. 전근대5.2. 근현대

[clearfix]

1. 개요

경기도 광주시(廣州市)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시조는 신라 내물왕 시절에 내사령을 지냈다고 전해지는 이자성(李自成)이며 중시조는 고려 말에 국자감 생원시에 합격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지낸 이당(李唐)이다. 그러나 광주이씨 계파 간에 시조에 대한 의견이 다른데, 석탄공파(石灘公派), 암탄공파, 율정공파는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하고 있다. 광주이씨 대동보에는 이당 이전의 계보도 소개되어 있다.

광주 이씨의 광주는 경기도 광주시(廣州市)이고, 광주광역시를 본으로 하는 이씨는 광산 이씨(光山 李氏)다.

2. 역사

2.1. 조선 이전

광주이씨족보서는 그 조상들이 남북국시대 신라의 칠원성(현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2]을 근거지로 삼았던 호족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자성을 시조로 하여 내려온 칠원성은 신라의 모든 성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뒤에도 마의태자만을 왕으로 섬길 뿐 왕건에게는 굽힐 수 없다 하여 끝까지 항거하였으므로 크게 노한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친히 성을 함락시킨 뒤 칠원성에서 이씨 성을 가진 일족들을 모두 체포하여 회안(현 경기도 광주시 경안동)[3] 지방 관헌들에게 노비로 삼도록 하였다.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광주의 노비들 중에서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재주 있고 덕망 높다고 주위에 알려지면서 이를 동정한 관리들이 그들의 신분을 높여주어 고려 말경에 이르러서는 더러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 이들 중에 이당(唐)이 고을 수령의 아전을 살고 있었는데 그 수령의 딸과 혼인을 맺어 그들 사이에서 대대로 재주 있고 덕망 높은 자손들이 번창하니, 한음 이덕형을 비롯하여 광주 이씨의 주류를 이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당의 후손들이다.

이당의 다섯 아들 이인령, 이원령(이집), 이희령, 이자령, 이천령이 다같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아전의 자식으로 오형제가 전부 과거에 급제한 사실은 온 나라 사람들에게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모두가 부러워하였다. 다섯 아들 중 둘째가 유명한 둔촌(遁村) 이집(李集, 1327~1387)으로 고려 말인 1355년 문과에 급제하면서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집이 있던 고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 서울의 둔촌동[4]이 되었다. 둔촌동에는 지금까지도 그가 살던 유적지와 그와 관련된 전설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광주 이씨의 조상 중에서 오늘날 기록이 확실히 남아있는 사람이 한음의 8대조 되는 위의 둔촌 이집이므로 대부분의 광주 이씨들은 이당(李唐)을 시조로 하고 둔촌을 광주 이씨의 제1대로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는 본관을 회안으로 칭관하다가, 940년 지명이 광주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2.2. 조선 시대

조선 시대 때는 몰락과 중흥을 반복하다시피 했다. 조선 초기때만 하더라도 이극돈, 이극균, 이장손 등으로 대표되며 가장 잘나가는 명문가 중 하나였는데 성현이 용재총화에서 지금 가문의 융성함으론 광주 이씨를 따라갈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5] 굳이 덧붙여 말하자면 왕이 집안의 기운을 부러워할 정도였다. 예종이 이인손의 묘를 이장시키고 세종대왕의 묘로 삼는다든가,[6] 성종이 아들을 낳을 때 이극배의 집에서 낳게 한다든가 할 정도였다. 이극배는 연산군 초기에 영의정으로서 섭정승을 맡기도 했다. 19살 된 연산군이 하도 똑부러져서[7] 3개월만 맡고 내려왔다고. 그러나 이극균이 왕의 횡음을 바로잡으려고 쓴소리를 하다가 그 조카인 이세좌와 함께 갑자사화 때 처형됨으로써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세좌의 죄는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갔다는 죄 아닌 죄. 무오사화갑자사화를 겪으며 그야말로 싹 다 쓸려나갔다. 그 후 이준경[8], 이덕형 대에 들어 다시 부활했지만 광해군 대의 권신 이이첨인조반정으로 몰락하면서 다시 한번 쓸려나갔다. 이이첨 이후에는 큰 몰락도 중흥도 없이 그냥 무난하고 조용하게 지낸 듯. 현종 대엔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이도빈[9]을 배출하기도 하였으며 그 아들인 우항 역시 경종대에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다. 다만 이우항은 신임사화 때 무고하게 죽었다. 숙종 대엔 대사헌을 지낸 이원록과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원정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들 경북 칠곡군에 위치한 광주이씨 칠곡파 매원마을은 경상도에서 손꼽히는 남인 양반 집성촌이었다.[10]] 그 아들인 이담명은 사노친곡십이장이란 시조로 유명한데 이는 갑술옥사로 아버지와 함께 유배당했을 때 쓴 것. 영정조대의 인물로는 영조대의 청백리 이하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의관을 부르거나 왕세손과 만나게 해주는 등의 일을 한 이광현, 정조대의 실학자 이기양 등이 있다.

조선 시대 광주이씨는 문묘 종사 대현은 배출하지 못했지만 종묘 배향공신 1명을 배출했다. 이밖에 상신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등도 나왔다. 총 문과 급제자는 188명에 달했으며[11], 무과 급제자 또한 124명이 있다.[12] 생원진사시, 역과, 음양과, 율과, 의과 등까지 모두 합쳐 총 713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다만 일제강점기 때의 유명인물은 많지 않은데, 을사늑약 후 활약했던 의병장 이백래, 이동하,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고 항쟁을 하던 이수택이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이종훈이 있다. 석공예가 이순석[13] 등도 있다.

3. 분파

  • 이자성을 비조로 하고 이익비가 중시조인 분파
    • 율정공파(栗亭公派): 파조 율정 이관의(李寬義)는 이당의 형 이한(李漢)의 현손으로, 광주 이씨 4세이다.
  • 이자성을 비조로 하고 이익비가 중시조 이당이 중흥시조인 분파
    • 십운과공파(十韻科公派): 파조 이자령(李自齡)
  • 이자성을 비조로 하고 이익강이 중시조인 분파
    • 석탄공파(石灘公派): 파조 석탄 이양중(李養中)은 이당의 종증조부 이익강(李益康)의 5대손(내손)이다.
    • 암탄공파(巖灘公派): 파조 암탄 이양몽(李養蒙)은 이양중의 동생이다.
  • 이집을 1세로 계대하는 분파: 이집을 1세로 계대한다.
    • 사인공파(舍人公派): 이장손(李長孫)은 이집의 손자이며 탄천 이지직(李之直)의 맏아들이다.
    • 광릉부원군파(廣陵府院君派) 이극배
    • 문경공파(文景公派): 이극감(李克堪)은 이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지직이며 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 연산군 재위 시절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건네어 갑자사화에 사사된 이세좌의 아버지이며 선조 때 동인과 서인의 붕당을 예고한 동고(東皐) 이준경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 광천부원군파(廣川府院君派) 이극증
    • 광원군파(廣原君派) 이극돈
    • 좌의정공파(左議政公派) 이극균
    • 참판공파(參判公派) 이극기
    •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이극견
    • 문숙공파(文肅公派) 이지강
    • 목사공파(牧使公派) 이지유

4. 특이사항

  • 광주이씨와 영천최씨(永川崔氏)의 후손들 간에는 그들의 조상인 이집(李集)과 최원도(崔元道) 사이의 우의를 상고하면서 양가가 같은 날 묘제를 지내며 서로 상대방의 조상 묘에 잔을 올리고 참배하는 풍습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광주이씨 시조 이당의 묘는 영천최씨 문중 선산에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신돈의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은 둔촌 이집(李集)이 연로한 아버지 이당을 등에 업고 최원도(崔元道)의 집을 찾아갔으나 어렵게 찾아간 친구의 집에서는 반갑게 맞아주기는커녕 매몰차게 대하며 역적이 앉은 자리라며 부자가 앉아있던 자리를 불태워버리라 지시했다.

    이집은 "이 친구가 이럴 친구가 아닌데 분명 다른 생각이 있겠지"라 생각하고 날이 어두워질 때를 기다리니 마침내 최원도가 이집과 그의 아버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서 다락방에 숨겨준다. 몇 년 후 둔촌선생의 아버지 이당이 사망하자 자신이 입을 수의를 내어주고 어머니 묘 근처에 매장하였다.

    여기서 천곡 최원도의 집에는 제비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음식을 많이 드시는 주인어른이 아닌데 어느날부터 많은 양의 음식을 내오라 하였고 이를 수상하게 여긴 제비가 문틈 사이로 방을 엿보니 주인어른과 낯선 남자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을 보고 최원도의 부인에게 말하게 된다. 이 일을 심상치 않게 생각한 부인은 혀를 깨물어 벙어리가 되고 여종은 주인가문의 멸문지화를 막기 위해 자결하였다.

    그리하여 광주이씨와 영천최씨의 제사지내는 날에는 여종 제비의 제사도 함께 지낸다고 한다. 제비의 무덤 역시 영천최씨 문중 선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비석에는 연아총(燕娥塚)이라고 새겨져 있다.

    일대 묘역은 현재 영천최씨에서 광주이씨로 소유가 바뀌어 있다고 한다.
  • 멸족에 가까운 풍파를 겪었음에도 가문 자체는 명문가로 유명했는지 본관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과거에는 광주 이씨라는 이유만으로 그 셋째 딸을 주곤 했다고 한다.[14] 아직도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일례로 광주 이씨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심지어 친일파가 없는 것까지도 자랑으로 삼을 정도.

5. 인물


5.1. 전근대

  • 이당: 광주이씨 대종의 시조.
  • 이집: 고려 말의 학자. 호는 둔촌. 현재 광주이씨 후손들의 대다수는 둔촌 이집의 직계후손들이다.
  • 이지직: 둔촌 이집의 첫째 아들. 포은 정몽주의 문인. 호는 탄천
  • 이지강: 조선 전기 문신. 문숙공. 둔촌 이집의 둘째 아들. 호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참찬 역임
  • 이장손: 조선 전기 문신. 사인공. 탄천 이지직의 첫째 아들.
  • 이인손: 조선 전기 문신. 충희공. 탄천 이지직의 둘째 아들. 우의정.
  • 이예손: 조선 전기 문신. 관찰사공. 탄천 이지직의 셋째 아들. 황해도관찰사 역임.
  • 이극배: 조선 전기 문신. 광릉부원군. 영의정
  • 이극기: 조선 전기 문신. 참판공. 이조참판, 대사헌, 경상도관찰사 역임.
  • 이극감: 조선 전기 문신. 문경공. 형조판서
  • 이극증: 조선 전기 문신. 광천군. 좌참찬,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역임
  • 이극돈: 조선 전기의 문신. 광원군. 좌찬성 역임. 무오사화 항목 참고
  • 이극균: 조선 전기 문신. 좌의정, 연산의 갑자사화 때(1504년) 화를 입었다.
  • 이극견: 조선 전기 문신. 좌통례공.
  • 이세좌: 조선 전기의 문신. 이조판서, 예조판서, 판중추부사 역임. 폐비윤씨가 사사될 당시 사약을 전달했다 하여 갑자사화때 연산군에 의해 사사되었다.
  • 이세준: 조선 전기의 문신, 남원부사, 이극균의 장남, 연산의 갑자사화로 화를 입었다.
  • 이세건: 조선 전기의 문신, 좌통례, 이극균의 차남, 부 이극균과 형 이세준과 함께 갑자사화로 화를 입었다.
  • 이연경: 조선 중기 문신. 학자. 사헌부 지평(持平) 등으로 활동하며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도왔다. 문하에 노수신(영의정), 심건, 강유선 등 당대 최고의 문신, 학자를 배출했다.
  • 이윤경: 조선 중기 문신. 호는 숭덕재. 병조판서 역임. 이준경의 형
  • 이준경: 조선 중기 문신. 호는 동고. 영의정 역임. 이윤경의 동생
  • 이광악: 임진왜란 3등공신. 김시민 장군의 부장으로 출전해 진주성을 승전으로 이끈 장본인. 김시민 장군이 적의 흉탄에 쓰러진 뒤, 흐트러진 병졸을 추스리고 선봉에서 전투를 진두지휘해 마침내 대승을 이끌었다.
  • 이이첨: 조선 광해군대의 권신
  • 이덕형: 임진왜란 때의 명 외교가, 호는 한음, 영의정 역임, 오성과 한음의 그 유명한 한음이다. 오성의 이항복과는 본관이 다르다.
  • 이윤우: 호는 석담. 공조참의 역임. 칠곡에 세거하고 있던 칠곡 광주이씨 문중을 이후 영남 남인 명문가로 성장하게 하는 데에 반석을 놓았다.
  • 이원정: 조선 후기의 문신. 호는 귀암. 이조판서, 형조판서 역임. 조선 숙종 대에 남인의 거두였으나, 삼복의 변으로 숙종에게 숙청당하고 국문을 받던 중 고문으로 인해 옥사하였다.

5.2. 근현대


[1] 2023년 6월 15일 마을 단위로는 전국 최초로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민속마을이다.[2] 신라 행정구역 기준 삽량주 칠토현, 개칭명 기준으론 양주 칠제현.[3] 설화 속에 나타나는 마한의 소국인 회안국(淮安國)에서 유래했는데, 거꾸로 ‘회안’이라는 지명에서 이 회안국 설화가 유래했을 수도 있다.[4] 이곳은 역사적으로는 광주에 포함되었다.[5] 當今門閥之盛 廣州李氏爲最[6] 이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이인손의 묘를 파보니 거기에는 연과 함께 편지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편지에는 연을 하늘 높이 날려 줄을 끊고 연이 떨어진 자리에 자기 묘를 이장하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고. 죽기 전에 이미 자기 묘를 왕에게 뺏길 것을 알았던 것. 이 일화는 여주 연하리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7] 연산군 집권 10년 가량은 나름 상당한 치세였다. 문제는 그 이후.[8] 이세좌의 손자이다.[9] 헨드릭 하멜 일행이 귀양왔을 때 공정하게 대우해 줘서 하멜도 조선에서 보기 드문 좋은 사또라고 칭찬하는 기록을 하멜 표류기에 남겼다.[10] 이 칠곡을 비롯하여 TK 출신 광주이씨 중 잘 알려진 인물들로 서울대학교 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수성, 개그맨 이윤석, 정치인 이준석 등이 있다.[11] 두산백과 기준인데 191명맞는 듯하다. 196명이라는 말도, 197명이라는 말도 있다!(...)[12] 이쪽도 246명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쪽은 사실이 아닌 듯.[13] 1905 ~ 1986. 어린이대공원의 유관순 열사, 국회의사당의 해태를 조각했다. 공예쪽에선 유명한 인물.[14] 셋째 딸은 딸들 중 가장 예쁘고 귀엽다는 이상한 속설이 있다. 거기서 나온 게 '셋째 딸은 얼굴도 안보고 데려간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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