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종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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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대도 총본원에 있는 금강도덕문(金剛道德門).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금천리에 있다.
1. 개요
금강대도(金剛大道)는 1874년[1] 이승여(李承如)[2]와 서의복(徐宜福)[3]이 창도한 종교이다.2. 상세
2.1. 역사
금강대도의 창시자인 이승여(오른쪽)와 서의복(왼쪽)의 초상
이승여는 1874년 강원도 통천군에서 태어났고, 1898년 서자암과 결혼하였다. 이후 1906년 종교적 체험을 겪게 되는데 이승여가 나무를 하고 내려오던 중 '자신이 건곤부모(乾坤父母)로서 새로운 우주를 열고, 남쪽 충청도로 거처를 옮겨서 도덕문명의 봄을 여는 만인의 스승이 된다'는 예언을 들은 것이었다. 그 후 자신은 금강도사(金剛道師)라 하고, 서자암은 연화도사(華蓮道師)라고 하면서 포교의 길에 나섰다.
이후 1910년 이승여는 제자들과 금강산을 떠나 계룡산 신도안에서 본격적인 포덕을 시작했는데 이를 금강대도에서는 남천포덕(南遷布德)[4]이라 한다. 남천포덕 이후 수천 명의 제자를 얻으며, 교세가 늘어나자 일제의 감시는 더욱 심해져 근거없는 죄목을 씌우거나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냈다며 이승여를 강제 연행하여 구금하고, 고문하였다.
이후 연기군에 법당을 건설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그 안에 단군의 성상을 비밀리에 봉안했으며, 진종동붕교(眞宗同朋敎)의 간판을 걸었다.[5] 이후 진종동붕교의 간판을 내리고 관성교 연기지부(關聖敎 燕岐支部)로 바꾸었다가[6] 금강도총본부(金剛道總本部)을 내걸었다.
이승여는 포덕을 위해 여러 방편을 사용했는데 식자층의 포덕을 위해 교유문(敎諭文) 등 한문으로 된 여러 경전을 저술했고, 비식자층의 포덕을 위해 비유나 의술을 통한 포덕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승여가 구술(口述)한 것을 십여 년간 제자들이 받아 적었는데 이를『대성경(大聖經)』[7]이라고 하며, 모두 11경 28권이었다.
1931년 서의복이 사망하자 제자들은 군사부일체의 의리로써 중복(重服)을 입고, 3년상을 치렀다. 이후 경성, 경기, 영동, 호서, 관서 등에 지부를 설치해 교세를 확장했고, 1934년 충남도청 앞 광장에서 도인들을 모아 포덕과 민족 의식 선양을 위해 흰옷을 입고 손에는 태극기와 함께 사구기(四九旗)[8]를 들고 수천 명이 광장에 모여들었으나, 내부자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때 장남인 이성직(李成稙)[9]과 여러 제자들이 옥고를 치르게 되자 이승여는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이 때에도 제자들은 중복을 입고 3년상을 치렀다.
도통을 이어 받은 이성직은 일본 불교 시찰을 나갔는데, 이는 일제가 금강대도를 일본 불교에 통합시키려 하다가 이성직이 이에 불응하자 일본 불교를 과시하고자 일본 방문을 주선한 것이었다. 일본 승려들은 참선으로 이성직을 시험하려 했는데 이성직이 12시간이나 정좌하였다고 한다. 이에 일본 승려들은 일본 불교 진언종(眞言宗)의 창시자인 홍법대사(弘法大師)의 후신이라며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성직은 교리 및 예법의 체계화에 주력하였고, 자신의 종교적 이상을 담은 흥기도덕가(興起道德歌)와 태극무(太極舞), 무극무(無極舞), 봉무(鳳舞), 학무(鶴舞) 등을 가르쳐 주었다.
금강대도의 교세가 점차 확장되자 일제는 사찰을 명령했고, 금강대도를 배일단체(排日團體)로 규정하였다. 일제는 금강대도에 대한 1차적인 억압책으로 간도 강제 이민정책을 시도했지만 도인들은 강하게 버텼고, 그 후 탄압의 명분을 찾다가 이성직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자 일본 경찰은 100명이 넘는 인원을 동원하여 이성직과 도인 53명을 연행하였다. 체포 후 경찰들은 도인들에게 고문을 가하여 도인 11명이 순도하였다. 이 1941년 신사년에 일어난 사건을 신사사변(辛巳事變)이라고 한다.
1957년 이성직이 사망하고, 1964년에 3세 도주로 장남인 이일규(李一珪)[10]가 도통을 계승하였다. 이일규는 도장의 성역화 및 종단 조직의 확대에 주력하고, 금강대도의 현대화를 위해 힘썼다. 금강대도는 현재 전국에 1백여 개의 본원, 분원 및 회관을 두고 있으며, 교세는 도인 수가 70여만 명으로 '자체' 집계되었다.
2004년 이일규가 사망하고, 2010년 이일규의 장남인 이경구(李敬求)[11]가 도통을 이어 받아 현재까지 금강대도를 이끌고 있다.
[1] 금강대도에서는 이 해를 원년으로 삼는 기년법인 개도(開道)를 쓰고 있다. 2025년은 개도 152년이다.[2] 아호는 토암(土庵)이고, 자는 현우(顯宇)이며, 사호(師號)은 만법교주 대성사부(萬法敎主 大聖師父)이다. 1874년 5월 19일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포항리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한산이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18세손이다. 부친은 이문유인데 그 부인인 전백전(全白田)의 꿈에 옥황상제가 나타나 하얀 솜을 많이 주어 품에 안았는데, 그러고는 그 달로부터 잉태하여 이승여를 낳게 되었다.[3] 아호는 자암(慈庵)이고, 사호는 만법교주 대성사모(萬法敎主 大聖師母)이다. 1884년 11월 25일 통천군 답전면 포항리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달성이며, 약봉(藥封) 서성(徐渻)의 14세손이다.[4] 금강대도에서는 교조의 탄생으로부터 계산하여 1874년을 개도 원년으로 보지만, 실질적인 포덕은 1910년 이승여가 금강산을 떠나 계룡산으로 남천포덕한 이 때로부터 시작된다.[5] 이는 당시 일제가 신종교를 사교(邪敎)로 몰아부쳐 탄압했기 때문에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한 방책이었다.[6] 이는 당시 유행했던 도교에 대한 대중적인 신앙을 이용해 자신의 가르침을 드러내려 했던 은도의 방편이었다.[7] 이승여가 대성경을 통해 도덕의 이정표를 제시하였다. 대성경은 전체 11경 28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천도론, 인성론, 수양론, 인식론 등 동양적 사유의 전반적인 사상을 섭렵하고 있고 양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720,000여 글자로 이루어져 방대하다.[8] 금강대도의 도기(道旗)이다.[9] 아호는 청학(靑鶴)이고, 사호는 동화교주 도성사부(東華敎主 道聖師父)이며,1913년 5월 5일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 황적동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민영인(閔永仁)인데, 아호는 보단(寶丹)이고, 사호는 동화교주 도성사모(東華敎主 道聖師母)이다. 1913년 5월 12일 충청북도 청원군 강서면 용정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이다 당진공(唐津公) 민재영(閔齊英)의 13세손이다.[10] 아호는 월란(月鸞)이고, 사호는 통천교주 덕성사부(通天敎主 德聖師父)이며, 1934년 4월 29일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김동윤(金東允)인데, 아호는 향련(香蓮)이고, 사호는 통천교주 덕성사모(通天敎主 德聖師母)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상촌공(桑村公)의 19세손이다. 1937년 12월 26일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에서 태어났다.[11] 호는 법산(法山)이고, 사호는 용화교주 대종법사(龍華敎主 大宗法師)이다. 1961년 1월 18일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양정숙(梁貞淑)인데 호는 도향(桃香)이고, 사호는 용화교주 대종덕사(龍華敎主 大宗德師)이다. 1959년 2월 6일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에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