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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리어타 Dál Riata | |||
달 리어타 최대 세력권 | |||
5세기 ~ 848년 | |||
위치 | 북아일랜드 앤트림주 북동부, 스코틀랜드의 아가일 등 서해안과 여러 섬. | ||
수도 | 두나드 | ||
언어 | 게일어 | ||
종교 | 켈트 신화, 기독교 | ||
종족 | 게일인, 픽트족 | ||
정치 체제 | 군주제 | ||
국가 원수 | 왕 | ||
주요 국왕 | 페르구스 1세 (5세기) 아에단 막 가브레인 (574 ~ 608) 키나드 1세 (841 ~ 848) | ||
성립 이전 | 울라 | ||
계승 | 스코틀랜드 왕국, 군도 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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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세기에서 850년까지 북아일랜드 앤트림주 북동부와 스코틀랜드의 아가일 등 서해안과 여러 섬을 지배한 게일인의 중세 왕국. 픽트족과 함께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이다.
2. 명칭
달(Dál)은 고대 게일어로 '몫'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특정 지역과 왕국에 이름을 붙일 때 흔히 사용된다. 리어타(Riata)는 부족 이름이나 신의 이름의 소유격 표현이다. 베다는 이 명칭은 레우다(Reuda)라는 이름의 창시자의 이름을 지어졌다고 기술했다. 일부 고대 게일어 연대기는 도망가르트 레티(Domangart Réti)의 후손인 레티 씨족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고 기술했으며, 또 다른 기록은 리어타 씨족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고 밝혔다.3. 게일인의 스코틀랜드 진출
달 리어타를 건국한 게일인들은 본래 아일랜드의 얼스터 지방에서 울라(Ulaid)라는 연합체 아래 여러 부족이 모여 살았다. 그러다가 5세기 즈음에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의 북 해협을 건너서 아가일(Argyll) 등 스코틀랜드 서해안과 맨섬, 스카이섬, 아이오나섬 등 여러 섬으로 확장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농업에 전념했는데, 귀리와 보리를 주요 작물로 다뤘다. 목축업도 매우 중요시했으며, 여름 방목지와 겨울 방목지 사이를 계절의 변화에 따라 왕래하는 이동 방목이 시행되었다. 스코틀랜드 이너해브리디스 제도의 남단에 위치한 아일러(Islay) 섬 등 일부 지역은 기후가 온난하고 토질도 비옥해서, 아일랜드에서처럼 1년 내내 방목할 수 있었다. 더 작고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은 양을 기르는 데 사용되었다. 어업 역시 달 리어타에 거주하는 게일인의 주요 산업이었을 것이다.10세기에 집필된 달 리어타의 왕에 대한 계보와 인구 조사를 다룬 Senchus fer n-Alban("알바 사람들의 역사")에 따르면, 달 리어타에는 아래와 같은 주요 씨족들이 있었다고 한다.
- 가브레인 씨족: 킨타이어(Kintyre) 반도에 거주. 가브란 막 도망가르트(Gabrán mac Domangart, 540년 ~ 560년 재위)의 후손을 자처.
- 옹구사 씨족: 아일러(Islay)와 주라(Jura) 섬에 거주. 옹구스 모르 막 에리크(Óengus Mór mac Eirc)의 후손을 자처.
- 로안 씨족: 멀(Mull) 섬과 아르드나무르찬(Ardnamurchan) 반도를 중심으로 북부 아가일 지역 지배. 달 리어타의 왕 로안 막 에이크(Loarn mac Eirc)의 후손을 자처.
- 콤갈 씨족: 코월(Cowal) 반도와 뷰트(Bute) 섬 거주. 달 리어타 국왕 콤갈 막 도망가르트(Comgall mac Domangart)의 후손을 자처.
또한 Senchus에 따르면, 페르구스 1세의 형제인 페르구스 베크(Fergus Becc)의 후손인 콘크라이드 씨족이 아일러 섬이 거주했으며, 로안 씨족의 방계인 바에타인 씨족은 몰번(Morvern) 반도에 정착했다. 또한 로안 씨족은 바에타인 외에도 샬라그 씨족, 캐스바스 씨족, 에크다흐 씨족, 무레르다이그 씨족으로 분리되었으며, 4개 씨족 중 가장 큰 씨족이었다고 밝혔다. 다만 아일랜드에 남은 씨족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달 리어타에는 두나드(Dunadd), 두놀리(Dunollie), 두나버티(Dunaverty), 타버트(Tarbert) 등 주요 요새 4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두나드가 가장 큰 도시로서 수도 역할을 맡았다. 고고학자들은 옛 두나드 요새에서 무기, 맷돌, 보석 제조용 틀을 많이 발견했으며, 갈리아의 유리 제품과 와인 암포라도 발견했는데, 그 양은 동시대 영국과 아일랜드의 다른 곳에서 발견된 것보다 많은 양이었다. 로안 씨족 출신 왕의 거처인 두놀리와 가브레인 씨족의 중심지인 킨타이어 반도의 남쪽 끝에 있는 두나버티 성도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 아일랜드 거점에서의 주요 중심지는 던서버릭(Dunseverick) 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달 리어타 주민들은 아일랜드 북동부와 스코틀랜드 서해안, 여러 섬에 거주하고 상호간에 교류 활동을 수행하면서, 자연해 항해 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당시 아일랜드의 주요 보트였던 커라흐(Currach)가 가장 흔한 항해 선박이었고, 내륙 수역에서는 속이 비어 있는 나무로 만든 보트인 더그아웃 카누(Dugout canoe)와 작고 둥근 가벼운 보트인 코라클(Coracle)이 활용되었다. "장선(Long Ship)"라고 불리는 대형 목재 선박도 다양한 사료에서 등장했는데, 이 선박은 먼 바다로 떠나는 용도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달 리어타에는 숙련된 선원이 탑승한 대규모 전투 함대가 있었으며, 먼 곳의 원정을 수행할 수 있었고, 함대를 배치하기 위한 조직적인 체계가 있었다. 전선 20척 당 한 그룹이 형성되었는데, 각 배는 노 젓는 사람 28명을 할당해야 했다고 전해진다.
4. 종교
달 리어타 주민들은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 켈트 신화를 신봉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들이 신봉한 교리에 대한 기록은 현존하지 않는다. 많은 달 리어타 왕들은 자신들이 켈트 신들의 후손이라고 자처했으며, 주민들은 특정한 샘과 "영혼이 사는 나무 숲"을 신성한 숲으로 여기고 숭상했다는 이야기는 전해진다. 그러다가 563년 아일랜드 수도자 콜룸바가 킨타이어 반도에 상륙한 뒤 달 리어타 전역을 돌아다니며 선교한 끝에 게일인들을 기독교로 개종하는 데 성공했고, 달 리어타의 왕 아에단 막 가브레인으로부터 아이오나 섬을 받은 뒤 수도원을 그곳에 세우고 아이오나 섬을 중심으로 삼아 선교 활동을 벌여 픽트족까지 기독교로 개종하는 성과를 거뒀다.이후 아이오나는 달 리어타의 가장 중요한 기독교 성지로 각광받았지만, 유일무이한 성지는 아니었다. 로안 씨족의 영역에 속한 리스모어(Lismore) 섬도 그곳 수도원장의 죽음이 중요하게 다뤄질 정도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으며, 애플크로스 반도와 뷰트 섬의 킹가스(Kingarth)에서도 수도원이 있었으며, 에익(Eigg) 섬과 티리(Tiree) 섬에도 수도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달 리어타의 아일랜드 거점에서는 아모이(Armoy)가 초기의 기독교 중심지였지만, 나중에 모빌라(Movilla)와 벵고르(Bangor) 수도원으로 대체되었다.
콜룸바 등 성인들이 건립했다고 전해지는 수도원들은 달 리어타의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성인의 유지를 잇는다는 명예를 누렸으며, 이를 토대로 상당한 부를 획득했다. 또한 수도원에서 교육받은 수도자들의 학습과 문해력은 군주들에게 유용한 도구 역할을 했다. 특히 아이오나에서는 800년경 신약성서의 마르코의 복음서, 마태오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 요한의 복음서 등 4개 복음서와 다양한 기독교 계열 문서들을 담은 켈스의 책(Book of Kells)이 편찬되었다. 불가타를 기본으로 삼은 이 책은 앵글로색슨족, 게일인, 픽트족의 문화 요소를 결합했으며, 인간, 동물, 신화 속 짐승의 모습 등이 담긴 삽화와 켈트 매듭, 생생한 색상이 얽힌 패턴으로 장식되면서, 화려함과 복잡성 면에서 당대의 브리튼섬 복음서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다.
한편, 달 리어타에는 아일랜드에서 흔히 세워진 하이 크로스(High Cross, 높이 세워진 십자가)가 여럿 세워졌다. 아이오나 섬에는 '성 마르틴의 십자가'(St. Martin's Cross)가 세워졌고, 아일러 섬에는 '킬달튼 십자가'(Kildalton Cross)가 세워졌다. 아일랜드 거점에서도 아헨니, 티퍼러리 일대에 유사한 십자가들이 건설되었다. 이외에도 상당수의 교회의 존재가 지명을 통해 전해졌다. 게일어 cill에서 유래한 "kil"이라는 단어는 두나드에 세워진 'Kilmartin 교회' 등 초기 교회의 명칭에 쓰였다.
5. 역사
11세기 말에 게일어 로 작성된 두안 알바나흐(Duan Albanach: 스코틀랜드의 노래)에 따르면, 에르크 막 에흐다흐(Erc mac Echdach)의 세 아들인 페르구스 1세, 로안 막 에르크, 옹구스가 서기 500년강에 알바(Alba, 게일어로 스코틀랜드를 지칭하는 용어)를 정복했다고 한다. 8세기 작가 베다는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하는데, 이에 따르면 레우다(Reuda)가 이끄는 아일랜드 출신 게일인들이 스코틀랜드 해안가와 섬들을 장악한 뒤 달 리어타를 건국했다고 한다.학계에서는 두안 알바나흐의 서술에 따라 아일랜드에서 게일인들이 빈 땅에 이주했거나 현지인들을 제압하면서 달 리어타가 탄생했다고 본다. 아일랜드 학자이자 교육부 장관, 재무장관을 역임했던 에오인 맥닐(Eoin MacNeill, 1867 ~ 1945)은 스코틀랜드의 달 리어타가 2가지 단계로 생겨났다고 가정했다. 우선 로만 브리튼이 종식될 무렵에 아일랜드에 거주하던 게일인들이 브리튼 섬을 습격할 때 아가일에서 세력을 형성했다. 그 후 아가일이 확장되면서 본거지보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더 중요해지자, 아일랜드에 있던 통치자들이 아가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고고학자 이완 캠벨(Ewan Campbell)은 저서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아일랜드 사람들이었나?>(Were the Scots Irish?)에서 게일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했다는 것을 입증할 고고학적 또는 지명적 증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아기일은 아일랜드 동북부 지역고과 바닷길을 통해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었던 반면, 스코틀랜드의 나머지 지역과는 산맥으로 차단되었기 때문에 수 세기 동안 아일랜드 동북부의 게일인들과 언어과 문화를 공유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중세에 작성된 달 리어타와 관련된 기록들은 달 리어타 군주들이 아일랜드 동북부까지 다스리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창조한 선전물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일부 학자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중세 기록들을 단지 선전물일 뿐이라고 간주하는 건 부당하다고 본다.
달 리어타는 아에단 막 가브레인의 치세(574 ~ 608)에 최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콜룸바에게 아이오나 섬을 수여했으며, 575년 콜룸바의 중재하에 아일랜드 북부 우이넬의 코네일 씨족과 동맹을 맺고 달 아리아디(Dál nAraidi)의 왕 바에탄 막 카이릴(Báetan mac Cairill)을 격파했으며, 오크니 제도와 포스 강 일대까지 무력으로 확장했다. 그러나 603년 베르니시아의 왕 애설프리트와 맞붙은 데그사스탄 전투에서 패배한 후 확장 정책을 중단했다.
629년, 달 리어타는 콩갈 카에흐 막 스칸들렌(Congal Cáech mac Scandláin)이 지휘하는 달 알리아디군에 침공에 맞서 싸웠지만, 피드 에오인 전투에서 참패하고 국왕 코나드 세르(Connad Cerr)가 전사했다. 이로 인해 달 알리아디에게 아일랜드 거점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지만, 달 리어타의 동맹 세력인 북부 우이넬의 왕 돔날 막 아에도가 같은 해 던 세틴(Dún Ceithirn) 전투에서 콩갈 카에흐를 격파하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코나드 세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돔날 1세는 콩갈 카에흐의 설득에 따라 북부 우이넬과의 동맹을 깨고 콩갈 카헤흐와 손잡기로 했다. 그러나 637년 모이라 전투에서 콩갈 카에흐와 연합해 돔날 막 아에도와 맞붙었으나 참패를 면치 못했고, 635년과 638년에 픽트족의 침략으로 큰 타격을 입었으며, 642년 스트라스카론에서 덤버튼 성을 중심지로 삼은 브리튼인의 나라인 알트 클루트 왕국의 왕 에우게인 1세에게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리하여 달 리어타의 아일랜드 거점과 달 알리아디의 동맹은 결렬되었고, 코네일 씨족이 아일랜드 북부의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다. 그 후 아일랜드의 달 리어타는 아일랜드의 아르드리 직위를 꿰찬 코네일 씨족과 재차 동맹을 맺었고 730년대까지 그들과 함께 싸웠고, 나중엔 피르 리(Fir Lí) 소 왕국의 영지가 되었다.
한편, 스코틀랜드의 달 리어타는 스트라스카론 전투 이후 노섬브리아 왕들에게 조공을 바치고 안전을 보장받는 처지가 되었다. 이 상황은 586년 픽트족의 왕 브리데이 3세가 두인 네크타인(Duin Nechtain) 전투에서 에크프리트 왕의 노섬브리아군을 섬멸하고 에크프리트를 처단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후 달 리어타는 픽트족의 압력에 시달리다가 741년 옹구스 1세에 의해 최종적으로 복속되었다. 그 후 달 리어타 국왕들은 기록상에서 전해지지 않다가, 768년 '백색의 아에드'(Áed Find)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아에드 막 에흐다흐(Áed mac Echdach)가 픽트족의 지배에 맞서 봉기해 달 리어타의 독립을 이뤘다.
그러나 독립은 오래가지 않았고, 달 리어타 왕들은 픽트족 국왕의 봉신 노릇을 했다. 픽트 국왕 카우산틴 막 페르구사는 달 리어타의 왕을 겸임하기도 했다. 그러던 9세기에 바이킹이 브리튼 섬을 대대적으로 침공했는데, 달 리어타 역시 바이킹의 공격을 받았다. 얼스터 연대기에 따르면 839년 달 리어타의 왕 아에드 막 보안타가 픽트족의 왕 에오간과 연합해 바이킹과 맞붙었으나 끝내 패하고 에오간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또한 바이킹은 9세기 중반에 맨섬을 포함한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섬들을 모조리 장악하고 "군도 왕국(Suðreyjar)"을 세웠다.
841년 달 리어타의 왕위에 오른 키나드 1세는 839년 바이킹과의 전쟁에서 왕이 전사한 후 혼란에 빠진 픽트랜드의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842년부터 전쟁을 단행했고, 6년간 이어진 전쟁 끝에 848년 드레스트 10세를 처단하고 픽트족의 왕위를 겸임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키나드 1세와 그의 후손들의 통치 하에 달 리어타와 픽트랜드가 통합되어 알바 왕국을 형성했고, 나중에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일컬어졌다.
6. 달 리어타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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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코르키(781 ~ 792): 얼스터 연대기가 전하는 달 리어타의 마지막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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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날 막 아에다인(807 ~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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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우산틴 막 페르구사(811 ~ 820): 픽트족의 왕.
- 아에드 막 보안타(835 ~ 839)
- 알핀 막 에오하이드(839 ~ 841)
- 키나드 1세(841 ~ 848): 848년 픽트랜드를 병합하면서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인 알바 왕국 창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