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07:25:09

결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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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소드 결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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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극권총 결투

1. 개요2. 역사3. 이유
3.1. 사회적 이유3.2. 문화·철학적 이유
4. 방식5. 사례
5.1. 유명인5.2. 프랑스5.3. 독일5.4. 오스트리아5.5. 일본5.6. 현대
6. 창작물 속의 결투
6.1. 영상
7.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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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결투(, duel)는 일반적인 의미로는 '승패를 결정하기 위하여 벌이는 싸움'을 말하나, 특히 서양에서는 참가자 둘의 상호 동의하에 입회자(second)가 지켜보는 가운데 벌이는 싸움을 말한다.

2. 역사

역사적으로 결투는 중세결투 재판, 아니면 기독교화 이전 바이킹 사회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정된다.

유럽의 가톨릭 교회는 중세부터 현대까지도 일관적으로 세속법과 별개로 결투와 결투 재판을 야만적인 풍습의 대죄로 보아 금지해왔다. 1215년의 라테라노 공의회에서는 결투에 참가한 사람과 협조자를 파문으로 단죄하였다. 16세기의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도 마찬가지로 결투는 파문 수준의 대죄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결투 재판을 행하는 지역이 많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13세기 이후부터는 성직자노인을 시작으로, 모든 사람이 대리인을 내세운 결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드물기는 하지만 여성끼리의 결투도 있었다. 이때도 일반적으로 검과 총을 사용했지만, 단 한 건 모래를 채운 스타킹으로 결투한 기록이 남아 있다.

18~19세기에는 보통 특히 권총이 사용되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냉병기보다 총이 다루기 쉬운 편인 만큼, 수련에 따른 실력차가 비교적 적어져서 공정성이 올라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유한 사람들은 결투용 권총(duelling pistols)을 따로 가지고 다니기도 했는데, 실제로 쓸 목적보다는 자신이 상시 결투를 통해 명예를 지킬 의지가 있음을 통해 자신을 모욕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자신의 신사다움과 결투용 권총을 따로 소지할 만큼 재력이 됨을 과시하는 목적이 더 컸다. 고급스런 가방에 자신이 쓸 것과 결투 상대에게 빌려줄 것 2정을 세트로 갖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결투 특성상 머스킷 같은 장총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 다만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영국이나 러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검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근현대로 넘어가면서 결투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영국,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중반을 전후로 결투가 거의 사라졌고, 설령 하더라도 가볍게 취급했다. 입회자로 지목된 사람이 결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화포라든가, 망치, 돼지 비료 같이 이상한 무기를 골라주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한 번 시비가 붙어 결투를 시작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무려 상한 돼지 창자로 만든 소시지로 결투를 할 뻔 했으며, 자신을 골리려는 결투임을 알자 그냥 결투에 등장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결투의 경우, 참여하지 않아도 크게 비난이나 무시가 쏟아지진 않았다.

한편 교회에서는 자살을 죄악으로 치부했기에 이를 회피하면서 자기 목숨을 저버릴 수단으로 결투를 택하는 사람도 많았다. 근대 이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런 이유의 결투가 늘면서, 교회는 결투를 금지할 것을 각국 정부에 요청하였다. 특히 가톨릭 교회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결투는 자살 못지않은 악마적 죄악임을 확인하면서, 결투자는 물론 결투를 용인하는 군주나 영주, 결투 주선자와 방조자까지 파문하고, 결투로 사망한 사람을 교회 묘지에 안장하는 것조차 금지한다고 선언했고, 이는 결투 풍습이 근절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3. 이유

인권의식이 발달한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알량한 명예 따위에 목숨을 희생시키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는 결투 문화는 대단히 야만적이고 도저히 납득될 수 없는 것이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끔찍한 풍습이 오랜 기간 인류와 역사를 함께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3.1. 사회적 이유

결투 문화는 유럽의 잉여 귀족 수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즉 시대에 따라 놀고먹으며 돈도 없는 귀족이 늘어날수록 결투가 증가했다.

18세기 이전은 전 세계의 유아 사망률이 50%가 넘었는데, 귀족들은 상대적으로 영양 수준이 높았고 청결한 환경을 유지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유아(0~5세) 생존률은 평민들보다 항상 높았다. 평균 수명도 귀족층이 훨씬 길었다. 평민들이 40~50대에 죽고 60세까지 살면 장수했다고 불리던 시절에도 귀족들은 70세 이상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늘어난 귀족들은 평소에는 놀고먹는 대신, 전쟁이 발발하면 장교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는 것으로 밥값을 하였다. 이는 사자 무리인 프라이드에서 숫사자가 평소는 놀고 먹다가, 다른 사자와의 싸움이나 다른 맹수(하이에나, 곰, 늑대, 인간)의 싸움에서 앞장서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다른 지방도 마찬가지이지만 인구 밀도가 높고 자원이 제한된 지역에서 전쟁은 끊이질 않았고,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엔 귀족의 수가 남아 돌았지만, 전쟁의 시기에는 글을 읽고 검술을 배운 귀족들이 매우 필요했다. 병력을 지휘할 장교로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장교들이 어떤 식으로건 죽어서 수가 줄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전쟁이 있다면 사회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었다. 포로로 잡힌 귀족은 역시 귀족인 상대 장교들에게 우대를 받았으나, 전쟁이라는 게 애초에 죽고 죽이는 판이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공격은 항상 지휘권을 쥐고 있는 장교, 즉 귀족에게 집중되었다.

역사적으로 항상 전쟁터에서 장교의 사망률, 특히 초급 장교의 사망률은 사병보다 높았다. 포로로 잡히면 우대받았지만, 전쟁터에서까지 사병은 사병끼리, 장교는 장교끼리만 치고받으란 법은 없었다. 게다가, 낮은 신분의 사병들이 자국 귀족 상관들에 대한 불만을 역시 귀족인 적 장교 혹은 아군 장교를 교전 중 공격하는 것으로 해소하는 일은 일상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오랜 기간 없으면? 군대가 자연스럽게 축소되고 장교 일자리가 줄어든다. 영지로 돌아가도 토지는 결국 제한되어 있고 (대체로)후계는 장자의 몫이다. 결국 많은 실업자 귀족들이 양산되었고, 실업자 처지가 된 귀족들의 불만이 커졌다. 그렇다고 생업에 뛰어들자니 귀족 체면에 평민들이 하는 일을 할 수도 없었고, 체면을 포기해도 일할 곳도 별로 없었다.

삶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던 4대 학문인 신학, 의학, 법률학, 철학 등을 배워 성직자교수 등이 되는 것은 당시에도 귀족 체면을 망치지 않는 거라 여겨졌고 힘도 없고 땅도 없는 귀족들은 대학에 가서 공부했다. 중세시대 대학의 탄생이다. 다만, 당시 대학 교육엔 돈이 매우 많이 들어서, 보통 재산이 풍족한 귀족 집안에서 차남 이하 아들들에게 지원을 해 집에서 내보내 자립시키는 용도로 많이 애용됐다. 왕 밑에 들어가 고급 관료가 되는 것은 급여를 받더라도 체면을 구기지 않았지만 자리가 적었고, 하급 관료는 귀족이 하기엔 부적합한 일로 여겨졌다. 일부 권력에 욕심없고 집안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차남 이하들 중 몇몇은 장남인 형 밑에 들어가 영지의 관리 등을 맡으며 가문에 남기도 했지만, 역시 가문에서 모든 형제들을 다 끌어안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형제간 권력 다툼이 날 여지가 컸다.

이런 길도 갖지 못한 잉여 귀족들은 당연히 반란을 모의했고, 왕은 이런 반란을 막기 위해 주기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아니면 이들의 불만을 다른 방향으로 풀어줘야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결투다.

상술한 이유로 결투가 항상 귀족들에게 유행한 것은 아니며, 시대상에 따라 유행이 되었다가, 어리석은 행동으로 비춰졌다가를 반복한다. 전쟁 중이거나, 전쟁의 위험이 심각할 때는 결투를 신청하는 것은 젊은 혈기를 제어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비춰졌고, 전쟁 영웅이나 군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것은 매우 무례한 행동으로 생각되었다. 당연히, 상시 전쟁터에 제일 먼저 나갈 준비를 하는 신분인 군 장교에게 결투를 신청한 비장교 신분의 상대도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거나 모욕해도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애초 결투의 주 유래 중 하나가 귀족의 개체수 조절(?)이었으니, 조절 대상으로 자진해서 대기 중(?)인 장교를 결투로 없애는 건 비매너에 속했다. 장교들간의 결투도 큰 싸움 앞두고 어차피 죽으러 갈 걸 뭐하는 짓이냐며 주변에서 말리는 편이었다.

사법제도도 시대 상황에 맞춰 원칙 없이 굴러가는 경우가 허다한데, 30년 전쟁 후 인력난이 극심한 때의 독일의 대부분의 주에서는 사형을 사실상 폐지하고 무기 노역형 또는 무기 군 복무형을 신설했다. 당장 일하거나 싸울 사람이 없으니 죽일 놈도 안 죽이고 죽을 때까지 부려먹겠다는 소리다. 부족한 인력 때문에 사형제도조차 폐지할 지경이었으니 결투도 당연히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그리고 전염병이 돌거나 기타 특별한 이유 등으로 귀족 인구가 부족할 경우 그리고 그 인물이 중요한 업무를 하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남자 후계자가 하나뿐인 귀족 집안에 결투를 신청할 경우, 모욕 수준이 사회적으로 도를 넘었다고 납득할 수준이거나 평소 남자 후계자의 집안이 망해도 싸단 소릴 들을 만큼 명망을 잃은 경우가 아니면, 알고도 그랬으면 미개인, 모르고 그랬으면 이제 갓 사교계에 데뷔한 뉴비 취급 받았다. 후자는 그나마 아직 신참이라 몰라서 그랬으니 서로 사과하고 좋게 끝낼 가능성이 있었지만, 전자라면 사교계에서 매장되는 걸 각오해야 했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도저히 모욕을 참을 수 없어 귀한 집 자손에게 결투를 신청했다면 이 경우 결투를 신청받은 귀한 아들은 체면상 나가더라도 주변의 다른 명망가들에게 입회인으로 나와 달라고 요청했다. 입회인들은 결투에 찾아가서 '쟤네 아들 하나뿐인 거 알지? 니가 죽이면 쟤네 집안은 어떻게 하라고?'와 같은 식으로 말하면서 어떻게든 서로 화해하도록 말렸다.

반대로 그 유일한 남자 후계자가 결투 신청자인 경우에도 신청자에게는 "너네 집안은 어쩌려고 그래, 머리 좀 식히고 말로 하자.", 결투를 신청 받은 사람에게는 "저 친구가 좀 흥분해서 그런 것 같으니 거절하고 화해해라."라고 하는 등 주위에서 최대한 말렸던 듯하다. 어차피 외아들일 경우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명분이 있어서, 이를 핑계로 결투 직전까지만 간 뒤 "내가 외아들만 아니었으면 끝까지 갔겠지만 어쩔 수 없이 참는다."라고 중간에 관두는 식으로 체면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이를 거부하고 외아들에게 계속 결투를 종용하는 상대는 대개 알아서 사교계에서 매장됐다.

이 외에 결투 신청 대상에 부적합하다 여겨졌던 유형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귀족 중에서도 특출하게 귀한 집 자손, 결투가 벌어지는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중요인물이나 존경받는 인물, 대가족의 아버지, 전쟁 영웅 등등. 그리고 전염병이나 전쟁 등 나라의 위기가 닥친 때라면 그냥 결투 신청을 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 간주되었다. 이런 때 결투 신청하는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다.

결투에서 서로 손해보는 살인을 피하는 방법은 보통 먼저 총을 쏘는 결투 신청을 받은 사람이 엉뚱한 곳에 총을 쏘거나 칼을 휘두르지 않거나 해서 싸울 의사가 없음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싸울 의사가 없는 상대편에게 공격을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또 결투 이후의 평판을 생각해서 총 안 쏘고 화해하거나 마찬가지로 엉뚱한 곳에 발포하거나 칼을 내리고 끝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런 암묵적인 룰을 처참하게 깨버려서 두고 두고 까인 게 에런 버와 알렉산더 해밀턴의 결투를 벌인 에런 버이다. 현직 부통령인 에런 버에게 결투 신청을 받은 알렉산더 해밀턴은 전직 미국 재무장관이었고, 아들을 결투에 잃은 아픈 과거도 있어서 결투를 혐오했지만 당시 신사의 체면을 위해 나갔다. 해밀턴은 이후 자신이 저지른 무례를 사과할 생각으로 총을 일부러 빗맞췄고[3] 분노심에 불타던 에런 버는 이런 거 신경쓰지 않고 해밀턴을 쏴서 죽였다. 그리고 버는 법적으로 처벌받진 않았어도 정치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했다. 결투가 흔하던 그 시대에도 충격적이고 예의없는 행동으로 남아있는 걸 보면, '중요 인물, 아들 귀한 집 자식은 결투 대상이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예의상 하는 시늉만 한다.'는 불문율로 꽤 엄격하게 지켜졌던 거 같다.

어떤 경우는 결투 당사자 모두 죽고 다치는 게 무섭긴 한데 체면상 결투를 취소할 순 없으니, 암암리에 서로 합의를 하고 결투 현장에서 적당히 싸우는 척을 한 뒤 명예가 회복됐다며 화해하고 치우기도 했다. 결투 자체에 "나는 내가 당한 모욕을 참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하는 의의가 있으므로, 승패에 따라 명예가 갈리거나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결투에서 이긴 쪽이 옳고 진 쪽이 그르다는 식으로 결론나는 경우는 결투 재판이 아닌 한 거의 없었다. 산 쪽은 산 대로, 죽은 쪽은 죽은 대로 모욕을 참지 않고 명예를 목숨을 걸고 지킨 이들로 인정받았다.

시간이 지나서 인구가 넘쳐나고, 다시 귀족도 많아지자 이젠 '낭만적'이라며 결투가 허용되었고, 재판 결과가 애매할 경우에는 결투로 재판하는 걸 권장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결투가 가장 많아진 것은 의외로 근대에 가까운 18세기 이후에서 19세기 초반인데, 이때부터는 새롭게 등장한 부르주아들도 귀족들과 비슷한 이유로 결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4]

이렇게 결투를 권장하는 정도로 통제가 안 될 만큼 내부의 잉여 귀족의 수가 많아져서 실업난이 닥칠 경우, 국가는 주기적으로 전쟁을 일으켜 이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렸다. 결투문화의 범람은 여러 가지로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성행한 것과 비슷하다. 저출산으로 해결할 수도 있으나, 의료 체계와 위생 수준 등이 미비한 시절에 영유아 사망률이 높고 기대 수명이 낮았던 시절이라 예비 인적자원 확보 차원(?)에서라도 많이 낳을 수밖에 없었고, 문화적으로도 자녀가 적거나 없는 가정 혹은 독신자들이 편견에 시달리던 때였으니 그러기도 어려웠다.

3.2. 문화·철학적 이유

결투가 벌어지는 사유의 상당수는 개개인의 명예와 관련된 문제였다. 상대방의 인신공격이나, 모함, 악행 등으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기에 그 명예를 회복하고자 당당히 맞선다는 개념이다.

이를 두고 고작 명예 하나에 목숨을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면서 비웃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결투가 유행하던 당시의 명예 개념과 오늘날의 명예 개념이 전혀 달라서 벌어지는 오해이다. 있으면 좋긴 하나 실생활보다는 정신적 가치에 국한된, 속된 말로 겉치레 정도로 취급받는 현대와는 달리 당시의 명예는 주류계층인 남성에게 있어서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이자 정체성 그 자체로 인정받았다. 쉽게 말해 사내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좇아야 할 이상이 바로 명예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른바 '남자의 로망'과 비슷한 개념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남자의 로망은 없어도 살고 꼭 못 이뤄도 문제시될 것 없지만 명예는 전혀 달랐다. 그걸 얻는 것 자체가 삶의 목표였던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던 귀족 남성들이 앞다투어 고급 장교로 군에 입대한 이유도 비슷한 선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근대 후기 이전까지만 해도 준 범법자 취급을 받던 일반 사병[5]과는 달리 장교는 열등한 병사들과 수병들을 이끌 수 있는 위대한 정신/청명한 이성의 소유자[6]로 각광받았고, 전쟁이라는 행위가 명예로운 삶의 길 그 자체로 평가받던 시절이기에 그러했던 것이다.

게다가 명예는 한번 얻으면 계속 유지되는 것도 아니었다. 명예는 얻는 것도 힘들지만 유지하는 게 더 어려운 개념이었다. 명예로운 남자로 남고 싶으면 끊임없이 행동으로 그것을 증명해야 했고,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결투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당대 정신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세기 감각주의[7]유물론, 낭만주의가 문화 전반을 파고들기 전까지만 해도[8] 영국을 제외한 유럽 전체를 석권했던 철학 사조는 바로 합리주의/이성중심주의였다.

당대엔 이성을 지닌 영혼과 정념에 지배받는 육체로 인간을 이분화하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었고, 이상적인 인간이란 이성의 힘을 강하게 발휘해 그 어떤 상황이라도 정념의 지배를 받는 육체가 멋대로 날뛰게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위험한 상황을 직면해서도 코웃음조차 치지 않는 패기, 즉 육체가 느끼는 두려움을 이성의 힘으로 짓누르고 차분함을 유지하는 행위가 명예로운 용기로 인식되었고 조금이라도 내적인 전율(공포,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자신이 겁쟁이라고 인정하는 치욕스러운 행위로 취급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진정 이 사람이 명예롭고 용맹한지를 확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육체적인 행동뿐이었다. 내면의 자질? 속으로 두려움을 느끼거나 졸렬한 생각을 했어도 얼마든지 아니라고, 그런 적 없다고 사기칠 수 있다. 고로 당면한 위협 앞에서 이 남성이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가, 이 하나의 척도에만 절대적으로 의존한 것이다.

결투 또한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어떤 형태로건, 간접적이건 직접적이건 나를 모욕했는데 내가 응하지 않는다는 건 두려워서 도망친다는 행동을 보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다시 말해 공포라는 정념에 흽싸여 이성이 육신에 대한 통제를 잃고 꽁무니를 뺀 것인데, 이런 남자가 추호도 명예로울 수 없다는 것. 반대로 당당하게 결투에 응해 용맹하게 싸우는 것은 자신이 하찮은 감정에 구애받지 않는 이성적/합리적 인간임을 입증하는 것, 그러므로 충분히 명예로운 인간임을 입증하는 셈이다.

심지어 '거짓말쟁이' 라는 말 한 마디에 결투를 신청하는 장면도 심심찮게 연출되었는데, 이것도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는 행동이다. 명예를 아는 남자는 거짓을 말하거나 신봉하지 않을 만큼 지혜롭고 자가통제력과 절제력이 충분한 사람이라는 권위를 인정받았다. 고로 거짓말쟁이라는 말은 방금 말한 모든 자질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심대한 모욕이었고, 그걸 부정하고 싶으면 결투로 매듭을 지으려는 게 비상식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그 덕분에, 앞서 얘기했든 결투에서 이기고 지는 건 자기 목숨의 문제지 명예의 문제는 아니었다. 져서 죽든 이겨서 살든 결투 당사자들은 자신의 명예를 목숨 걸고 지켜낼 의지가 있는 이들로 인정받았다. 결투에서 의도적 무승부가 매우 흔했던 이유 중 하나다. 한 마디로 "나는 내 명예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을만큼 용맹한 사람이니, 너희도 목숨을 걸 게 아니라면 나한테 시비걸지 마라." 식의 메세지를 전하는 일이었다.

4. 방식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여길 때 장갑(건틀릿)으로 얼굴치거나 장갑을 벗어 상대에게 던지는 것으로 결투를 신청한다. 이것은 중세시대 기사 서임식에서 기사가 되는 청년의 얼굴을 치는 종교적 의식에서 유래했다고 추측한다. 기사처럼 결투에 응하라는 의미다. 과거 유럽권 귀족 남성들의 주요 매너 중 하나가 장갑으로 손을 가리고 다니는 것이라 대부분의 경우에는 장갑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근대화되면서 장갑을 내던지는 것보다는 초청장(?)에 가까운 결투장을 만들어 보내서 결투 방식, 규칙, 입회인 등을 결정했다. 결투시 무기이나 중 무엇을 쓸 것인가 혹은 규칙은 언제까지, 즉 피를 흘릴 때까지 혹은 죽을 때까지 결투를 할 것인가, 따위를 합의했다. 중세에서 멀어질수록 진짜로 죽을 때까지 결투하는 경우가 줄어들었다. 중세에서 좀 격식있는 결투가 되면 누군가는 죽어서 실려나가야 하니 양자 모두 관짝과 그 위에 덮을 천을 준비해야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결투는 모욕한 사람이나 모욕당한 사람 모두 같은 신분이어야 이루어졌다. 신사가 자기보다 낮은 사람에게 모욕당했을 때는 결투를 할 필요 없이 하인을 시켜서 패면 그만이었다.[9]

한편 당시 예절에서는 신사가 공개적인 모욕을 당하고서 공식적으로 사과를 요구하거나 결투를 신청하지 않는 것이 병신으로 몰리는 지름길이었다는 풍습도 있다. 중세 시대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농노와 자유민 사이의 결투는 인정되지 않았지만, 결투를 위해 영주가 일시적으로 농노를 자유민으로 신분 상승을 시켜주는 경우는 있었다.

또 양쪽 모두가 결투를 할 만한 능력이 있어야 성립이 되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에게 모욕당했을 경우는 보통 대리인[10][11]을 시켜서 결투를 하지만, 굳이 여성 본인이 결투를 하고 싶다고 할 경우에는 남자에게 몇 가지 페널티를 주고 결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12] 일례로 구덩이를 파놓고 남자는 들어가 머리와 팔만 내놓고 싸운다든가 하는 방식을 썼다. 결투에 총을 쓰는 경우에는 여자라고 총을 못 쏘는 게 아니니 그런 핸디캡도 없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만들었지만, 새뮤얼 콜트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들었다는 말도 있다. 대신 여성이 상대라면 남성 쪽에서 결투 전까지 여성이 사격 연습을 할 수 있는 시간 정도는 주는 게 예의였다.

결투는 새벽에 하는 경우가 보통[13]이고 아침이나 오후의 결투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었다. 양쪽이 모두 신뢰하는 입회자로 하여금 장소나 결투할 무기를 선택하게 한다.

일반적인 결투의 과정은 이렇다.

먼저 결투를 신청한다면 양측 모두 입회인을 세워야 하는데, 입회인들은 대부분 이런 결투를 참관한 적이 많고 둘의 관계를 잘 아는 연장자가 선발되었다. 이들은 결투 전에 참가자들과 대화해서 분노의 수준, 복수의 정도, 그리고 이 사람들의 사격이나 검술 실력을 확인하고 무기를 결정해 줬다.

결투의 시간과 장소, 방법은 주로 결투를 신청받은 사람이 정했는데,[14] 상대를 죽일 의사가 없는 상황이면 시간을 조금 여유있게 둬서 상대의 분노가 풀리기를 기다렸다. 둘이서 확실히 서로를 죽일 생각이면 바로 다음 날 오전이 결투 시간이다.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려는 의도가 강하다면 칼을 썼고, 상처를 입힐 생각이 없으면 총, 진짜 서로 죽일 생각이면 결투 참가자들이 더 능숙한 무기를 골랐다. 입회인들 중 일부는 무기 선택권을 이용, 위에서 언급한 별의별 무기들을 제시해 원치 않는 결투를 당사자들 체면도 살리면서 중단시키기도 했다.

총의 경우 새벽녘 입회자가 지정한 공터에서 서로 등을 돌리고 있다가 입회자가 사격 표시를 하면 등을 돌리고 발사한다. 서로를 죽이려는 의사가 강한 경우 당연히 동시에 총을 쐈다. 이러면 당연히 사격 실력과 손이 빠른 사람이 이겼다, 흔히 보는 서부극에서 많이 나오는 방식이다. 하지만 보다 주로 유럽에서 이뤄진 전통적인 결투에서는 한 발씩 돌아가면서 사격했는데, 우선권은 결투를 신청받은 사람이 가졌다.

일단 처음 한 발 발사 후, 아무리 사소한 상처를 입었더라도 모욕당한 측이 자존심이 회복되었다고 만족하면 결투가 끝나지만, 반대로 어느 한쪽이 결투를 계속하지 못할 정도로 다칠 때까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계속할 수도 있었다. 다만 3발 이상 교환했는데도 결투를 계속하겠다고 하는 것은 야만적으로 보았다. 피를 보는 것보다는 모욕당한 쪽이 명예를 충족하고, 희생 없이 끝내는 것을 최우선의 결투로 쳤다.

첫 사격이 끝나고 결투를 신청한 사람이 아직 살아있다면 지향사격을 받았을 때 그 역시 복수를 하기 위해 사격하는 것이고, 상대가 허공에 쐈다면 결투 신청자는 아무리 상대를 죽이고 싶더라도 지향사격을 하면 매너가 없는 야만인 취급을 받았다.

검으로 결투를 할 경우에는 근대의 경우 입회자가 칼을 땅에 꽂는 것과 손수건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을 알린다. 중세의 결투는 그냥 평복으로 하는 경우와 갑주를 입고 하는 경우 모두 있는데, 특이하게 전신 타이츠 비슷한 결투복을 입고 하는 경우가 있었다. 옷깃이나 머리카락이 붙잡히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한 복장으로, 생사결로서의 결투를 진지하게 파고든 사례.

무구는 양자 합의 하에 대등한 무장을 가지고 하는데, 양손검, 검과 방패, 검과 곤봉 등 양쪽이 같은 무장을 지닌다. 단검 소지 여부도 합의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싸우다가 드잡이질 간격에 들어가면 단검으로 찔러죽이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기 때문. 갑주 대결은 당연히 갑주를 소지할 만한 계급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편이다. 총으로 할 경우는 별다른 방호구 없는 평복으로 하거나, 탄에 맞아 옷 조각이 총알과 함께 몸으로 들어가 곪는 것을 막기 위해 상의를 완전히 벗고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15]

일각에서는 결투의 존재로 인해 서양에서 소위 에티켓으로 불리는 예절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형법에서 말하는 위법성 조각 사유 중 정당방위의 유래가 이 결투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결투 때문에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가 뿌리박게 되기는 한다. 가혹행위를 하면서 인격 모욕을 주다가는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코난이 "문명인들은 예의없는 말을 해도 머리가 쪼개지지 않기 때문에 야만인보다 더 무례하다."고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결투 문화가 프로스포츠 문화의 탄생에도 기여했다.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역시 권투. 근대 시대에는 스포츠와 같은 개념으로로 검술과 사격 대회가 성행했고, 지역마다 챔피언이 있었다. 간혹 누가 이 챔피언 급 실력자들과 결투를 하게 되었는데 이 챔피언 급인 상대와 진짜로 싸울 생각이 없다면 상대가 능숙한 종목을 선택했다. 이 경우 이 분야의 챔피언 급인 사람은 결투를 신청하는 상태이건, 받는 상태이건, 상대를 총이나 칼로 죽이고 싶도록 열받아도 챔피언의 체면 때문에 제 실력을 다해 아마추어를 상대할 수 없었다. 결국 상대가 쏘는 헛방을 보고 억지로 웃으면서 용서해 주고, 챔피언답게 한수 가르쳐주면서 훈훈히 넘어갈 수밖에...

결국 이런 고수들이 상대를 죽이지도 못하지만 패고는 싶을 때 대안으로 택한 게 권투이다. 권투는 스포츠로 여겨져서 대결해서 패한다고 해도 아주 운이 없는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 죽는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상대가 아마추어라고 마구 두들겨 팬다고 비난받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 이래서 한국이나 동남아, 멕시코 등에서 권투가 출세하기 위한 운동이라고 인식되는 것과는 별개로, 유럽에서의 복싱은 원래 귀족들이 즐기는 스포츠로 출발했다. 프로화가 되면서 신체능력이 좋고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스포츠로 바뀌긴 했지만.

과거의 결투 문화 또한 현대 격투기에도 많이 남아 있다. 비교해 보자면…
도전자가 모두가 볼 수 있는 오픈된 장소에게 상대에게 장갑을 얼굴에 던져서 도발하며 결투를 신청한다. 이후 양측이 같은 수의 입회인을 선정하고, 그 중 가장 연장자가 책임 입회자가 된다. 도전을 받은 자가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격투의 룰을 정해서 알려주면 도전자가 받아들인다. 룰의 해석이 미묘하면 결투 신청을 받아 주는 자에게 우선권을 준다. 결투를 시작하기전 책임 입회자가 룰을 설명해 준다. 그 룰을 따르지 않고 이기면 불명예스러운 거라 여겨져서 사람 취급 안 해준다. 서로 룰을 지키며 3번 정도 서로 공격하다 서로 죽이는 데 실패하면 결투를 그만두며, 의사가 대기하고 있다가 치료를 해준다. 서로 죽지 않은 경우 서로가 격려해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끝난다. 결투의 분위기에 따라 많이 다르긴 했지만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거리가 싸움구경인지라 구경꾼이 붙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 결투한 상대와는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다시는 결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전문적으로 수십 번을 결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전자가 공개적으로 챔피언을 도발해 타이틀전을 신청한다. 이후 심판과 심사위원이 선임되며, 심판책임자가 선정된다. 도전 받은 챔피언에게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권한이 있었다. 80년대까지는 복싱에도 챔피언의 홈 어드벤티지가 꽤 있었다.[16] 도전자는 이 룰을 받아들인다. 룰이나 판정의 해석이 미묘하면 챔피언에게 우선권을 준다. 경기 시작 전 심판이 룰을 다시 설명해 준다. 룰을 어겨서 이겨도 비신사적이라며 징계를 받거나 여론의 비난을 받는다. 경기엔 라운드가 있으며 라운드가 끝나면 경기도 끝난다. 판정승으로 끝나거나 넉다운당한 경우도 서로 격려해주는 분위기로 끝나는 경우가 99%이다. 구경꾼은 아예 수만 단위로 모이며, 한번 싸운 상대와 다시 싸우는 경우는 리벤지 매치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이들은 당연히 수십 번을 경기한 프로 선수들이다.

1과 2가 단어만 바꾸면 거의 비슷하지 않는가? 결투에서 살의를 제거하고, 전문 경기장과 관객을 추가하면 현대의 프로 격투기와 놀랍도록 가깝다.

여담으로 결투의 결과는 도전자와 도전에 응한 자의 승률을 비교하자면 주로 도전자의 승률이 도전에 응한 자보다 더 높다고 한다. 아무래도 본인이 결투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고 도전에 응한 자보다 심리적 부담이 덜해서 더욱 적극적으로 결투에 임하면 그만큼 기세가 등등해진다는 심리적 요소가 작용하기 때문인 듯.

5. 사례

근대에는 결투가 법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신사가 모욕당했을 때 모욕을 씻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흔히 결투를 권장했기 때문에 19세기까지 결투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많은 국가에서는 결투가 불법이었으나, 20세기 이전까지 결투로 상대를 죽이거나 상해를 입혀도 살인죄 등으로 기소되는 일은 없었다고 봐도 된다. 러시아의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 프랑스의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 러시아 작가 미하일 레르몬토프 등이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유럽미국에서 결투로 인한 인명사고는 18세기 중반까지도 흔한 것이었다.

5.1. 유명인

유명한 결투는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과 프랑스의 장교 출신인 네덜란드 외교관 겸 남작인 조르주 찰스 데 헥케른 단테스의 결투, 러시아 시인 미하일 레르몬토프와 니콜라이 마르티노프 소령의 결투, 영국의 시인 벤 존슨[17]과 요크 공작의 결투, 영국 수상 소 피트와 조지 티어니의 결투, 앤드류 잭슨과 찰스 디킨슨[18]의 결투, 웰링턴 장군의 결투,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의 결투 등이 있다.

덴마크의 천문학자인 티코 브라헤는 젊은 시절 혈기를 이기지 못해 결투를 벌여 코의 일부가 상대의 검에 날아갔다. 결국 그는 평생 금속으로 만든 가짜 코를 붙이고 살아야 했다.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결투에서 아들을 잃고 자신도 결투에서 죽었다. 결투 상대는 당시 현직 부통령 에런 버였다. 에런 버는 결투에서 이겼지만 그의 정치가 경력은 쫑났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도 변호사 시절 제임스 실즈와 결투를 할 뻔 했으나 입회인들이 말려서 무산으로 끝났고, 러시아 차르인 니콜라이 1세도 1836년에 탐보브의 귀족인 알렉산드르 스쉬코프에게서 결투 신청을 받고 결투한 적이 있다고 한다.

마크 트웨인의 경우 자서전에 자신의 작품만큼이나 웃기는 결투에 얽힌 일화를 남긴 바 있는데 다음과 같다.
마크 트웨인이 신문 편집장으로 일하던 시기, 그 지역에서는 언론인들끼리 서로를 사설이나 논평으로 모욕하는 일종의 디스키배를 벌이는 해괴한 풍습이 유행했고, 마크 트웨인 역시 이 유행에 발맞추어 경쟁 신문사의 편집장을 약올리는 사설을 자신이 편집하는 신문에 게재했다.

하지만, 나이 지긋한 상대 편집장은 이 모욕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고, 화끈한 결투극을 기대하고 있던 친구들은 상대가 별 반응이 없자 시무룩해졌지만 마크 트웨인은 신이 나서 어그로성 논평을 계속 게재했다. 결국 참다 못한 상대 편집장이 마크 트웨인에게 결투장을 보내오자, 이젠 결투장을 받아든 마크 트웨인이 급격히 시무룩해지고 거꾸로 친구들은 그때부터 마크 트웨인의 결투 준비를 도와주겠다고 날뛰기 시작했다.

결국 결투 당일 이른 새벽, 마크 트웨인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유언장을 작성하고[19] 친구들과 함께 결투장소 근처의 숲에 나가서 사격 연습을 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마크 트웨인의 사격 실력이 하도 형편없어서 결투 상대의 덩치보다도 더 큰, 연습용 표적으로 세워놓은 널빤지조차 못 맞힐 정도였던 것. 그런데 이젠 다 틀렸다 싶을 무렵에 대반전이 일어났다. 마크 트웨인과 함께 왔던 친구 하나가 나뭇가지 위에 작은 새 한마리가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기 총으로 쏴 정확하게 머리를 맞혀서 잡은 것이었다.

그리고, 결투 상대의 친구 중 한명이 마크 트웨인 쪽의 동정을 살피러 왔다가 총에 맞아서 떨어진 새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누가 한 거냐고 묻자, 정작 새를 잡은 친구는 아주 침착한 목소리로 "클레멘스(마크 트웨인의 본명)가 했지" 라고 대답했다. 깜짝 놀란 상대측 입회자가 자기는 마크 트웨인이 헛간 문짝도 못 맞출 줄 알았다며 얼마나 잘 맞추냐고 묻자, 여섯번 쏴서 다섯번 정도 맞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그 이야기를 들은 상대측 입회자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서둘러 돌아가고, 잠시 후 다른 친구가 쪽지를 가져왔다. 쪽지의 내용은 무슨 조건이든 다 들어줄테니 결투를 중단하자는 것. 마크 트웨인은 아무 조건 없이 수락했다.

결국 결투가 중단되고 집에 돌아간 마크 트웨인은 새로운 쪽지 한 통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마크 트웨인의 친구인 주지사가 보낸 쪽지였다. 무슨 내용인고 하니, 새로이 입법한 결투금지법이 안 지켜져서 치안판사가 여러모로 불편해하는데 지역 유명인사끼리 결투를 벌였다는 이야기에 아예 빡쳐서 단단히 벼르고 있으니 빨랑 튀라는 것. 날 밝으면 보안관들을 보낼 거고, 그 때 집이 비어있으면 형식적인 가택수색이나 하고 돌아오겠지만, 집에 머무르고 있으면 체포해서 재판에 회부해 절대 안 봐주고 징역 2년 먹일 거라는 전갈이었다. 당연히 마크 트웨인은 튀었다.

그리고, 친구 잘 둔 덕에 목숨 건지고 곤란을 모면한 이 사건 이후 마크 트웨인은 결투나 그걸 하는 사람들, 하라고 남을 충동질하는 사람들 전부를 극히 증오하게 되었으며, 특히 남에게 결투 해 보라고 충동질하는 사람들은 으슥한 데로 끌고가서 쏴 죽여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앰브로스 비어스는 소설 <왼발 가운데 세 발가락>이란 작품에서 신사도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단검 가지고 싸우는 걸 남부신사라고 하던 19세기 중순 미국 남부 일부에서 벌어진 대결을 두고 살인 시도를 신사도라고 개소리로 포장한다고 깠다.

자코모 카사노바 역시 결투에 관한 일화를 남긴 바 있다. 폴란드-러시아 지역을 여행하던 당시, 폴란드의 귀족 신사와 사소한 시비끝에 결투를 벌인 것. 재미있는 점은 이 신사가 진짜 기사도에 충실한 신사였다는 것이다. 카사노바의 총에 맞아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카사노바를 패 죽이려고 드는 자기 친구들을 제지하며 "내가 죽거나 의식을 잃으면 더 이상 제지할 수 없을테니 얼른 튀어라, 지금 수중에 돈은 있냐, 혹시 숙소에 지갑을 두고 왔으면 내 지갑을 가져가라"고 챙겨주기까지 한다. 천만 다행히도 그 신사는 죽지 않았고, 카사노바 역시 그 결투 때문에 법적으로 위험한 처지가 되어 얼른 도망쳐야 했지만…대귀족 가문의 신사와 결투를 벌였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평판이 높아졌다. 당대 결투란 동등한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지 신분이 다른 사람과 벌이는 것이 아니었고, 이 때문에 대귀족과 결투했으니 카사노바 역시 귀족 신분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독일 사회민주당의 전신이 되는 전 독일 노동자협회를 창설한 페르디난트 라살도 연적과 결투를 벌이다 목숨을 잃었다.

그 밖의 사례로 1666년 잉글랜드 육군 소령인 몬트고메리와 스코틀랜드 육군 대령인 패트릭 고르돈의 결투, 1765년 예카테리나 2세와 안나 안할트의 에페 결투, 1817년 러시아의 장인 바실리 세레메테보와 황제의 종자인 알렉산드르 자바도프스키의 결투, 1818년 시인 알렉산도르 그리예도프와 알렉산드로 야쿠보비치의 결투, 1825년 러시아의 장교 콘스탄틴 체르노브와 러시아 황실의 장교인 블라디미르 노보실체브의 결투, 1841년 미하일 레르몬토프와 니콜라이 마르트노프의 결투, 1901년 알렉산드르 비트겐쉬테인 부관과 퇴역 육군 중령인 에브게니 막시모프의 결투, 1909년 알렉산드르 구츠코프 하원 위원장과 알렉세이 우바로프 의원의 결투, 1909년 시인 니콜라이 구밀료프와 막시밀리안 볼로쉰의 결투 등이 있다.

앙도슈 쥐노는 하마터면 세상에서 가장 승산없는 결투를 할 뻔했다.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가 다름아닌 카롤린 보나파르트였는데 그녀의 남편이라는 인물이 전유럽 최고의 싸움꾼이었기 때문이다.

결투 문화가 사라져가던 20세기 최고의 결투꾼 중 하나는 바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헝가리의 총리였던 티서 이슈트반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후사르 기병으로 복무하며 검을 다루는 법을 배웠고 유학하면서도 유럽 곳곳의 검술을 익혔다. 그리고 총리 재임 중이던 1913년, 그는 정적이었던 카로이 미하이와 세이버로 한 시간 동안 34합이나 맞붙는 혈투를 벌인 끝에 상대의 한쪽 팔을 잘라버렸다. 일주일 뒤에는 또다른 상대파 국회의원인 세체니 얼러다르와도 세이버 결투를 벌여 한 합만에 상대의 머리를 그어버렸다. 몇 달 후에도 그는 또다른 상대 진영 의원이었던 팔라바치니 죄르지와 맞붙어 9합 동안 승부를 펼쳤으나, 이 결투는 이슈트반과 죄르지가 결국 서로의 이마에 자상을 입히며 무승부로 끝났다.

5.2. 프랑스

프랑스에서는 결투자들이 기구에 타고 결투를 벌인 적이 있다. 리슐리외가 귀족들의 사적 결투를 금지해서 악당 취급을 받기도 했다.[20] 그런데 리슐리외가 결투를 금지한건 단순히 싸움질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결투를 할 정도의 분쟁이 있으면 제대로 된 재판을 하라는 것인데 그 재판을 하는 것은 왕실. 즉 귀족들을 왕의 통제 하에 밀어 넣으면서, 왕의 사법권을 강화하는 정책이다. 귀족들의 반발도 단순히 결투를 막아서뿐만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이였기 때문이다.

앙시앵 레짐 말기까지도 결투가 귀족 사회에서 만연했는데, 한 육군 보병연대소위가 결투를 거절한 뒤부터 동료 장교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소속 연대를 떠날 것을 강요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근대에도 이는 이어져서, 프랑스의 수학자였던 에바리스트 갈루아는 1832년 5월 30일 결투에서 총에 맞고 21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1967년엔 당시 프랑스 SFIO 소속 대통령 후보와 마르세유 시장 간에 에페 진검결투가 있었으며, 이것은 스포츠로서가 아닌 목적으로 검을 사용한 최후의 결투라고 보기도 한다.당시 사진.

5.3. 독일

독일에서는 19세기 대학에서 멘주어(Mensur)라는 결투를 하는 클럽이 크게 유행했으며, 독일의 유명인사들도 이 결투 클럽을 많이 거쳐갔다. 가능한 치명상을 입지 않기 위해 눈과 몸통에는 보호장구를 착용했으나, 얼굴에는 아무 보호조치를 하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켰기 때문에 얼굴에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상처가 나도 병원에 가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임석한 의사(학생들 간의 결투면 의대생)들이 즉석에서 알콜로 소독하고 대충 꿰메는 정도의 치료만 했으므로 흉터가 크게 남았는데, 이게 다른 학생들이나 아가씨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오히려 상처 없는 인간이 고자 취급을 당하고 얼굴의 상처가 멋의 상징이 되는 바람에 결투를 할 용기는 없지만 여자는 꼬시고 싶은 학생들이 일부러 얼굴에 칼로 상처를 냈다가 발각되어 망신을 산 사례도 있다. 결투로 인한 전형적인 상처는 오토 스코르체니 문서의 사진으로.

원래는 펜싱검이 결투의 무기였으나 보호장구를 장착하고도 사망사고가 자주 터진데다 1839년에 예나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펜싱검의 사용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이후 무기가 세이버로 바뀌었으며, 결투는 대학생의 상징이자 특권으로서 계속 존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반유대주의가 범람하였을 때 우파 학생조직이 내세운 반유대주의 실천조치 중 하나가 "유대인 학생으로부터 결투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일 정도였다.

현재도 독일 대학에 결투 클럽은 남아 있지만 예전에 비하면 훨씬 많이 온건해졌다고 한다. 막스 베버도 대학시절 결투클럽에서 활동했고 그 덕택에 소시적의 비사교적인 성격이 많이 고쳐졌다고 회상한다.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의 본문 중에 나오는 결투 클럽은 여기서 창안한 듯.

현대적인 명예훼손모욕죄의 시초가 독일이라는 설이 있는데, 상대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결투가 잦아져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늘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모욕을 법으로 다스리기 시작했고, 이는 독일의 법제를 받아들인 일본을 통해 한국과 대만에도 전해지게 된다[21]. 일본에는 실제로 결투금지법이 있다는 점[22]에서 설득력이 있다 하겠다.

5.4.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도 윗 나라 독일과 비슷하게,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도 결투가 성행했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무슨 일이 있건 간지와 체면치레를 중시하는 오스트리아 신사들이 결투를 옹호했고, 군대에서도 결투가 장교 간 분쟁 해결의 수단으로 권장되었다고 한다.

이 풍조는 스페인에서 온 어떤 여행객이 결투가 만연하는 오스트리아의 풍조에 경악하여 사회운동을 벌여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결국 의회에서 결투를 불법으로 못박았다. 하지만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결투에 연관된 사람들에게는 모두 황제가 친히 사면장을 베풀었다고 한다.

5.5. 일본

메이지22년 법률 제34호 (결투에 관한 죄)

제1조 결투에 임한 자 또는 그 결투에 응한 자는 6월 이상 2년 이하의 중금고(징역)에 처하며, 10엔 이상 100엔이하의 벌금을 부가한다.

제2조 결투를 일으킨 자는 2년 이상 5년 이하의 중금고(징역)에 처하며, 20엔 이상 200엔 이하의 벌금을 부가한다.

제3조 결투에 의하여 사람을 살상한 자는 형법의 각 본조에 비추어 처단한다.[23]

제4조 결투의 참관 하거나 참관하는 것을 약속한 자는 증인이나 개첨인 등 명의에 관계없이 1월 이상 1년 이하의 중금고(징역)에 처하며 5엔 이상 50엔 이하의 벌금을 부가한다.

제5조 결투에 응하지 않는 것을 이유로 사람을 비훼한 자는 형법에 비추어 비훼의 죄[24]로써 논한다.

제6조 전 수 조에 기재된 범죄는 형법에 비추어 무거운 것은 무거운 것에 따라 처단한다.

일본에서도 결투와 유사한 문화가 존재하긴 하지만 서양식 결투와 같은 선상에 놓고 얘기하기는 다른 점이 많다. 결투장을 보내서 신청하는 결투도 있었지만, 칼집에서 을 뽑는 것 자체가 결투신청으로 여겨졌으며 상대방이 거기에 응해서 칼을 뽑는 것으로 결투가 성립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듯.

에도 시대에는 결투를 금지하는 법령이 발표되어 개인적인 결투가 일절 금지되었으며[25] 가문 간에 쌓인 감정이 관에서 중재를 했는데도 풀어지지 않고 결국 결투로 끝을 보게 될 경우엔 관리의 입회 하에 진행되기도 했다.[26] 관에 알리지도 않고 즉석에서 칼을 뽑아 결투를 벌였을 경우엔 승패에 관계없이 쌍방 모두를 할복형에 처할 정도로 그 처벌 또한 무거웠다. 이 때문에 양쪽이 상처를 입고 끝나면 그냥 병이나 우연하게 생긴 부상으로 입을 맞추고 숨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현행법상으로도 아직 결투죄가 남아있는데, 바로 메이지 22년(1889년) 12월 30일 법률 제34호 『결투죄에 관한 건』(明治二十二年法律第三十四號(決闘罪ニ關スル件))이다. 1889년 제정되고 지금까지 그대로인 법률이라서 한자는 전부 구자체로 되어 있고 히라가나는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으며, 문법과 용어도 옛날 방식이다. 또한 벌금도 당시 물가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징역과 벌금의 무거움이 현재와의 괴리가 엄청나다…결투도응죄(결투 신청하거나 받아들이는 것)는 징역 6월 이상 2년 이하라는 중형임에도 벌금은 10엔 이상 100엔 이하에 불과하다. 결투죄는 3년 이상 5년 이하 20엔 이상 200엔 이하, 결투살상죄는 각각 형법의 살인죄와 상해죄로 처단, 결투입회·장소대공(貸供)죄(결투를 구경하거나 사정을 알면서 장소를 빌려주거나 제공하는 등 방조하는 것)는 1개월 이상 1년 이하 5엔 이상 50엔 이하, 비훼죄(결투에 응하지 않았다고 상대를 비방하는 것)는 형법의 명예훼손죄로 논한다고 되어 있다. 벌금은 다 부가하는 거다. 징역과 벌금 둘 중 하나만 하는 게 아니라 둘 다 해야 한다. 하지만 제6조에 형법과 비교해서 형량이 더 센 걸 적용한다고 되어 있어서 실제로는 몇백엔 짜리 푼돈이 아니라 적용되는 다른 경합범죄의 상한선까지 징역과 벌금을 때릴 수 있다. 예를 들어 결투에 응해 사람을 다치게 했을 경우 결투죄 제1조에 따라 6월 이상 2년 이하의 징역 및 10엔 이상 100엔 이하 벌금에 처하며, 제3조 및 제6조에 따라 상해죄의 형량 만큼 무겁게 때릴 수 있는데 상해죄가 1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만엔 이하의 벌금이므로 결투에 응해서 상해한 자는 6월 이상 15년 이하의 징역에 10엔 이상 50만엔 이하의 벌금을 부가한다.[27] 실제로 2022년에 발생한 캬바쿠라 종업원 결투 사건에서 점주는 200엔이 아니라 징역 2년6월에 벌금 50만엔 형을 선고받았다.#[28]

이 법은 당연히 사문화된 법 취급을 받아왔지만, 2000년대 들어서 동네 양아치폭주족들에게 이 법을 적용할 수 있다획기적인 발상을 한 경찰관들이 등장하여 양아치들이 '결투한답시고' 벌이는 싸움에다가 이 법을 적용하여 적극적으로 체포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지금까지 이 법이 적용된 사례는 13건으로 상당히 드물다. 일본의 래퍼 ANARCHY가 폭주족 리더였던 시절에 교토에서 저지른게 법이 만들어진 이후 3번째로,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해당 사건의 기사를 잘라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제국의 형법을 의용하는 조선형사령의 공포로 국내에 도입되었으며, 해방 후에도 군정법령 제21호에 따라 일본제국 형법의 효력을 인정하면서 대한민국 수립 후에도 구형법이라는 이름으로 효력이 남아있었다. 1953년에 현행 형법의 실시와 동시에 당연히 폐지되었다.

프로레슬링, 종합격투기, 복싱 등의 스포츠 경기는 정당행위로 인정되어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월간 순정 노자키군 코믹스 2화에서는 일본에서 결투가 금지되어 있다는 걸 보고 순정 만화 등에서 나오는 결투는 다 불법이 되는 건가하고 고민(?)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저지 아이즈에서 아몬이 의뢰랍시고 결투하자고 덤비자, 법잘알 야가미는 이 결투죄 운운하면서 불법이라고 자리를 피하려 하지만…

5.6. 현대

결투판은 1940~1950년대에 들어서서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며 경제 호황기였던 미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트렌드를 맞이하였다. 과거 검으로 하던 결투판에 총기가 등장하던 식으로, 자동차를 이용한 결투가 유행하였는데 흔히 치킨 게임이라고 하는 단어도 여기서 기원한 것이다.

이후 살상을 목적으로 한 결투는 거의 사라졌지만 스포츠라는 형태의 결투는 아직 남아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우베 볼이 자신의 영화를 깠다는 이유로 젊은 평론가들을 상대로 권투로 결투를 신청했는데 평론가들이야 나이든 우베 볼 상대로 해볼만하다고 생각했는지 결투에 응했지만 결과는 아마추어 복싱선수 경력이 있던 우베 볼이 이겼다. 그 이후 그의 작품을 깔때는 권투로 결투신청을 조심해서 작품을 평가해야 됐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 인터넷의 보급률이 높아진 대한민국에서는 현피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나타났다. 사실 이것도 진짜 결투를 하러 만나는가 하면 어찌저찌 잘 해결돼서 밥먹고 헤어지는 일도 있다. 스타나 유희왕으로 결투신청을 하는 경우가 간간히 있고, 온라인 게임을 한다면 캐삭빵을 벌이기도 한다.

2012년에 벌어진 결투 이벤트로 무한도전결투특집 하하 VS 홍철이 있으며 입회자는 3450명이다.

힙합디스 문화도 피 대신 침이 튀는(…) 버전의 현대판 결투라 볼 수 있는데, 디스전에 응하지 않으면 그 래퍼가 찌질이라고 까이는 것까지 결투와 유사하다. 다만 미국 본토 힙합에서의 디스는 실제로 피가 튀기기도 한다. 미국에서 랩을 하는 대다수의 래퍼들이 실제로 갱에 가입된 갱스터들이기에 이들간의 디스는 상대 조직간의 싸움으로 번지기도 하여 인터넷 상에선 서로 디스곡을 내고 실제 현실에선 총질을 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6. 창작물 속의 결투

80일간의 세계일주 원작 소설에서 영국신사 필리어스 포그와 미국군인 프록터 대령이 달리는 열차 안에서 권총으로 결투하는 내용이 나온다. 신사들이 결투를 하겠다고하자 다른 승객들이 군말없이 자리를 비켜주는 등 여러 부분에서 19세기 말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 소설에서 주인공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과거 약혼녀의 아들 알베르와 결투를 하게 되는데, 결투날 당일 과거 아버지가 저지른 잘못을 알게된 알베르가 스스로 결투를 포기하고 백작에게 공개 사과를 한다. 당시 사회상을 볼 때 결투를 포기하는건 명예가 엄청나게 추락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알베르는 양심이 살아있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큰 용기를 내어 이를 각오하고 백작에게 사과를 하고 새 인생을 시작한다. 소설의 명장면 중 하나.

스타워즈에는 칵가스라는 결투 의식이 있었다.

토탈 워: 엠파이어토탈 워: 나폴레옹에서 신사나 스파이 등 요원간에 결투를 치를 수 있다. 결과는 그저 확률에 따르지만 결투 진행 과정을 동영상으로 보여주는데... 웃긴게 많다.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게임에는 스타크래프트라크쉬르워크래프트막고라라는 결투 의식이 있다. 다만 라크쉬르는 결투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그 추종자들까지 참여하는 전쟁급 규모의 결투이다.

또한 하스스톤에는 결투라는 이름의 대전 모드가 존재한다.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는 결투 재판이라는 관습이 비중있게 나온다.

야인시대에서도 결투 장면이 많이 나온다.

유희왕 원작에서는 듀얼결투라고 쓰고 듀얼이라고 읽었다.[29] 실제로 어린이 카드 게임답지 않게 지는 쪽의 정신이 파괴되거나 사망하기도 하는 어둠의 게임도 있고, 이후 시리즈의 작품들에서 듀얼 만능주의가 등장함으로써 유희왕 시리즈의 세계관에서는 듀얼이 결투, 혹은 그 이상[30]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하영웅전설 OVA 외전인 "결투자" 편이 결투를 주된 소재로 한다.
그리고 은하제국의 현역 군인 사이에는 사적인 결투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암묵적으로 허용되는 경우라도 계급이 다르면 결투 불가. 오스카 폰 로이엔탈은 대위 시절에 여자 문제로 하루에 세 차례의 결투(권총, 칼, 권총)를 해서 상대 세 사람 전원을 병원으로 보내버린 전과가 있고, 그 대가로 네 사람 모두 1계급 강등을 당했다. 네 명 모두 하급장교(3명은 대위, 1명은 중위)로 계급도 비슷한 데다 신분도 모두 제국기사로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교적 가벼운 처분이 내린 것으로, 1계급 강등과 전방으로의 전출 외에는 어떤 처벌도 없었다.

반면 라인하르트는 현역 장교이면서 샤프하우젠 자작가의 대리인으로 결투 재판에 출전했으나 처벌받지 않았는데, 이는 대리인은 결투의 주체가 아닌 도구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혼블로워 시리즈의 1권에 결투 장면이 나온다. 사관후보생이던 호레이쇼 혼블로워가 같은 배의 선임 사관후보생이 자신을 포함한 후임들에게 가하는 내무부조리가 심해지자 차라리 둘 중 하나가 죽고 끝내보겠다며 폭발, 하루 날잡아 자신에게 모욕적인 말을 한 선임 사후생에게 실례되는 말 아니냐고 따지면서 꼬투리를 잡아 결투를 신청했다. 이후 권총으로 결투를 했는데, 둘 다 불발이었고 입회인인 장교가 둘 다 명예는 회복됐으니 이걸로 화해하고 끝내라고 명령해 수습됐다. 혼블로워가 함장이 권총에 장난을 쳐둔 건 아닌지 물으러 갔다가 "해군 규정에 선후임간 결투는 금지되어 있으니 이걸로 퉁쳐준 걸 다행으로 알아라"며 질책을 받지만, 그와 동시에 함장과 친한 다른 함장이 모는 프리깃으로 근무지를 옮기는 배려도 받았다.

서부극에서는 결투는 매우 중요한 클리셰 중 하나다. 서로 마주보고 일정한 순간에 순식간에 총을 빼서 쏘는걸로 유명하다.

리그 오브 레전드데마시아도 유럽을 모티브로 한 국가 답게 결투가 있다. 명예 회복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동시에 군대에 결투가라는 병과가 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서는 서부극을 좋아하는 작가의 특성상 각 부마다 한번씩은 나오는 요소. 시대나 배경 상 나오는 게 어려운 1,2부를 제외하면 주로 서부극 클리셰의 결투가 나온다. 대표적으로 3부의 폴나레프 vs 홀 호스나 4부의 죠스케 vs 키라 최종전.
특히 결투가 합법인 스틸 볼 런에서는 웨카피포의 과거, 자이로의 첫 등장 등 서부극식 결투가 자주 등장한다.
특히 링고 로드어게인은 아예 정정당당한 서부식 권총 결투이 테마인 캐릭터. 시간역행이라는 사기적 능력이 있으면서도 항상 상대보다 늦게 총을 쏘고, 기습과 치명상 외에는 시간역행을 사용하지 않는다.

원신이나즈마에서는 "어전시합"이라는 제도가 있으며, 거절이 불가능하고 패자는 쇼군에게 무상의 일태도로 신의 벌을 받아 최후를 맞게 된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도 결투에 대한 언급이 몇 번 나온다. 물론 마법사들의 결투라 총이나 검 대신 지팡이 들고 마법을 쏘는 방식. 작중 마법 세계는 배경 시대인 20세기 말보다는 중세~근대 쪽에 가까운 사고방식을 보일 때가 많은데, 결투에서도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결투를 한다'라는 언급이 있다. 하지만 작중 공식적인 결투에 관한 언급이 꽤 나오는 걸 보면 꼭 죽을 때까지 하는 결투는 아닌 듯하다. 아무래도 마법사라고 해서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건 아닐 테니까(...). 2편에서는 정체불명의 괴물이 학생들을 습격하는 사건이 이어지자 스스로 방어하는 법 배우기 위한 결투 클럽이 결성되기도 했고, 4편에서는 해리 포터볼드모트 사이에 결투가 벌어지는 등[31] 어둠의 마법과 맞서 싸우는 수단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뱅(보드 게임)에서는 결투 카드가 있으며 시전자가 대상자와 1:1 대결을 벌인다. 이 때 규칙은 시전자가 결투 카드를 내면 그 다음부터는 대상자와 시전자가 교대로 뱅 카드를 버려야 하며[32] 뱅을 더 이상 버릴 수 없는 쪽이 목숨을 1 잃는다. 일부러 포기하지 않는 한 뱅만 낸다면 계속해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에 이기더라도 카드를 너무 많이 소모해서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당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존 윅 4의 종극에서도 결투가 이뤄진다.

6.1. 영상


  • 영화 석양의 무법자 블론디(The Good)와 엔젤 아이즈(The Bad)와 투코(The Ugly)의 삼파전

7. 같이 보기



[1] 서양검술 항목에서도 찾을 수 있는 '교범'으로서의 성향이 강한 그림이다.[2] 도리어 무의미한 살생을 피하는 대신 기싸움(춤, 함성 등)으로 평화롭게 해결을 보려고 노력한(물론 해결을 못보면 얄짤없이 전투) 아프리카와 북아메리카, 오세아니아의 부족들이 그들을 그렇게나 야만족이라고 멸시한 당시의 유럽 귀족들보다 훨씬 비야만적으로 보일 정도.[3] 적어도 자신은 일부러 빗맞췄다고 주장했다. 어디까지나 해밀턴 자신의 주장이지만, 일단 당시에는 해밀턴의 주장이 사실로서 받아들여졌다.[4] 이 무렵을 배경으로 한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도 결투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다만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결투장에 나서는 것은 후반부 몽테크리스토 백작알베르 드 모르세르의 결투 단 한 번으로, 소설의 중요한 명장면이다.[5] 틀린 말도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엔 사회의 낙오자들이 주로 군대에 몰려들었고, 납치당하거나 술에 취해서 반 강제로 끌려오는 등 인선이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심지어 범죄자들에게 징역 대신 군대에서 복무하는 것으로 처벌했을 정도이다. 게다가 상기한 사회적 선입견이 이를 한층 강화시켰다. 때문에 정직하고 점잖은 남자라면 사병으로 군입대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이런 시선은 국민개병제가 도입되면서 사병을 우리의 자랑스러운 시민으로 보는 인식이 생기면서 사라졌지만, 여전히 모병제 국가에선 군인을 존중하면서도 사병 출신들을 막장 인생으로 보는 시선이 병존하고 있다.[6] 당시 유럽의 군대는 데카르트의 영혼/육체의 이원론적인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아 이성에 속하는 장교와 정념에 속하는 사병들로 직위를 구분하고, 사병들은 장교=이성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만들고자 시키는 대로 일만 하는 로봇 그 자체로 만들어 놓았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그러했다. 당시 군대는 사고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연병장에서 불필요할 정도로 세분화된 훈련 동작에 따라 움직이도록 강요받았으며, 질문을 하거나 무언가 제의만 해도, 즉 조금이라도 주도적으로 사고하려는 기미만 보여도 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다. 그나마 오래 복무하고 장교들에게 인정받은 부사관들은 제한적으로나마 이런 사고를 하는 것이 가능했고, 준사관 정도 되면 말 그대로 장교에 준하게 대우받았다.[7] 인간의 감각작용만이 외부세계에 대한 지식의 유일한 근원이라 보는 주의.[8] 이런 철학적 사조가 등장했다고 해서 이성주의/합리주의가 몰락하지는 않았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실존주의가 입지를 위협하기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오늘날까지도 이성주의를 신봉/연구하는 학자들이 산재해 있다.[9] 남북전쟁 직전 노예제 폐지론자 찰스 섬너 상원의원이 프레스턴 브룩스 하원의원의 친척을 포함한 남부 정치 지도자들을 모욕했다가 브룩스 의원에게 지팡이로 구타당한 적이 있었다. 당시 브룩스 의원은 처음에는 결투를 생각했지만, 섬너 의원이 신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질이 떨어지는 말을 해서 그냥 줘패기로 한 것이다.[10] 여성 외에 노인, 어린이, 장애인, 환자 등도 대리인을 고용해 결투를 할 수 있었다.[11] 챔피언이란 단어는 원래 결투의 대리인을 의미하는 단어였다.[12] 결투 시 여성 VS 남성의 경우 남성 쪽이 페널티를 받고 결투를 했지만 여성 VS 여성일 경우 서로 페널티나 메리트가 없는 대등한 처지에서 동일한 무기를 들고 싸우기도 했다.[13] 앰브로스 비어스도 단편 소설 <왼발 셋째 발가락>이란 작품에선 신사도라는 이름으로 새벽에 결투를 벌이는 것을 깠다. 젊은 신사들이 무뚝뚝하게 앉아있던 중년 신사에게 "당신은 여기 있을 자격이 없어보이는데?" 라는 말 한마디 한 것에 "나도 신사이니 가만히 둘 수 없다. 결투다…"라고 하여 입회인이 보는 가운데 새벽에 유령의 집이라고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은 집에선 칼로 대결을 벌이는 묘사가 나온다.[14] 다만 최근 창작물 속 결투 장면 등을 보면 오히려 결투를 신청한 쪽이 시간, 장소, 방법을 모두 결투장에 적어 상대방에게 도전할 때 한 번에 언급하기도 한다.[15] 결투에 관해 실크 재질 옷과 관련된 말이 있다. 결투에서 칼을 쓸 때 다른 옷은 손상되면서 몸에 파고들지만, 실크는 자기만 깨끗히 잘리고 몸에 파고들지 않는다고 카더라. 그러나 실크 옷은 결투를 주로 하는 상류계층도 막 입기엔 비싼 옷이긴 했다. 그리고 앞 서술에서 아예 결투하다 다쳐서 입던 옷이 파고들지 않게 상의탈의로 결투한 내용이 언급되었으므로 실크 옷이 결투 시에 그렇게까지 다른 재질 옷들에 비해 안전했다고 확정하긴 힘들다.[16] 현재는 방송판권과 티켓 판매 수입을 고려해 결정한다. 파퀴아오 같은 경우도 라스베가스에서 대부분 경기하거나, 필리핀에서 해도 시간을 엄한 시간에 해서 미국 방송시간을 맞춰 주거나 했다. 격투의 룰은 협회의 기본 룰을 따르지만 일부 룰은 챔피언이 고를 수 있었다. 지금은 복싱룰이 무조건 국제룰을 따르지만 예전엔 어느 정도 재량권이 있었다. 대표적인 게 4전 5기로 승리한 홍수환, 챔피언이 사전에 1라운드 3번 다운당하면 KO당하는 기본 룰을 없앤 덕에 우승했다.[17] 육상선수 벤 존슨과는 다른 사람이다.[18] 작가 찰스 디킨스가 아니라 유명한 듀얼리스트[19] 유언장을 작성하면서 특히 기분이 심하게 나빠졌다고…[20] 실제로 삼총사 초창기의 상황이 결투가 막 금지된 프랑스의 모습이다. 그래서 결투하고 도주하고, 다시 결투하고 잡으러와서 도주하고의 반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투가 꿋꿋하게 이어지는게 묘미.[21] 박경신, 진실유포죄. P.51[22] 그래서 일제강점기 조선 및 해방 직후 형법 의용 기간 동안에도 결투금지법이 있었으며, 이는 1953년 형법이 제정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23] 즉 결투중에 일어난 살인, 상해, 과실치사는 각 법률의 형량으로 처벌한다.[24] 한국의 명예훼손죄[25] 에도 시대에는 무사들이 함부로 칼을 쓰는 것을 금하는 규율이 많았다. 특히나 성내에서는 영주의 허락없이 칼을 뽑는 것만으로도 대역죄인이 되고 일가친척 모두가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26] 결과에 승복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관에 제출하고 날짜와 장소를 정한 다음에야 이루어졌다. 돈이나 권력이 좀 있는 가문에선 솜씨 좋은 검객을 고용해서 대리로 보낼 때도 있었다.[27] 다만, 살인죄나 과실치사죄가 적용되는 경우 살인죄에는 벌금이 없으므로 100엔을 초과하는 벌금을 부가할 수 없고, 과실치사죄는 징역형이 없으므로 6월 이상 2년 이하의 징역에 10엔 이상 50만엔 이하의 벌금을 부가한다.[28] 참고로 이 사건의 점주는 체포된 뒤에 자신은 장소만 제공했다고 발을 뺐으나(조문을 보면 알 수 있듯 장소만 제공한 경우 1월 이상 1년 이하의 징역이다), 사실상 주범으로 인정되어 제2조에 따라 2년6월을 선고받았다.[29] 그래서 정발판 유희왕에선 듀얼디스크가 결투디스크, 듀얼이 결투가 되었다.[30] 애니메이션의 오리지널 스토리를 기점으로 듀얼에 세계의 존망이 달린 상황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 유희왕 시리즈가 사실상 카드배틀물 장르의 원조여서인지는 몰라도, 다른 TCG 애니메이션 작품에서도 카드 게임에 세계의 존망이 달린 상황이 종종 등장하곤 한다. 하긴 이 모든 것이 카드 게임에서는 흔한 일이다[31] 엄밀히 말하자면 해리를 다 잡았다고 생각한 볼드모트가 그를 농락하다 죽일 생각으로 결투를 제안했다. 물론 번번이 폼 잡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볼드모트인지라...[32] 이 때의 버린다는 뜻은 discard가 아닌 use의 개념이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몰리 스타크가 자기 턴 이외에서 카드를 사용(use)한 경우 쓴만큼 덱에서 가져올 수 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