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7:03:32

루이스 엔리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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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생제르맹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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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170> 이름 루이스 엔리케
Luis Enrique
본명 루이스 엔리케 마르티네스 가르시아
Luis Enrique Martínez García
출생 1970년 5월 8일 ([age(1970-05-08)]세)
스페인국 아스투리아스주 히혼
국적
[[스페인|]][[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 / 체중 73kg
직업 축구 선수 (윙어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004170> 선수 스포르팅 히혼 B (1988~1990)
스포르팅 히혼 (1989~1991)
레알 마드리드 CF (1991~1996)
FC 바르셀로나 (1996~2004)
감독 FC 바르셀로나 B (2008~2011)
AS 로마 (2011~2012)
RC 셀타 데 비고 (2013~2014)
FC 바르셀로나 (2014~2017)
스페인 대표팀 (2018~2022)[1]
파리 생제르맹 FC (2023~ )
국가대표 62경기 12골 (스페인 / 1991~2002)
2경기 (아스투리아스 / 1999~2002)
링크 파일:트위치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평가5. 기록
5.1. 선수 기록
5.1.1. 대회 기록5.1.2. 개인 수상5.1.3. 클럽 기록
5.2. 감독
5.2.1. 대회 기록5.2.2. 개인 수상5.2.3. 리그 기록
6. 여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스페인축구 선수 출신 감독. 現 파리 생제르맹 감독. '루쵸(Lucho)'[2]라고도 불린다.

선수 시절에는 레알 마드리드바르셀로나에서 모두 뛰었으며, 불같은 투쟁심과 다양한 포지션을 섭렵할 수 있는 다재다능함으로 머무는 팀마다 많은 사랑을 받았다.[3]

선수 은퇴 후에는 바르셀로나 B팀을 시작으로 AS 로마, 셀타 비고, 바르셀로나, 스페인 대표팀의 감독을 역임하였다. 특히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에는 트레블을 달성하며 FIFA 올해의 감독을 수상하기도 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스포르팅 히혼

히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풋살로 섬세한 기본기를 익혔다. 1981년 11세 때부터 고향팀 스포르팅 히혼 유스에 소속된 이후 1984년부터 1988년까지 라 브라냐로 임대를 떠났으며, 1988년 당시 3부 리그에 소속된 스포르팅 히혼의 2군격 팀인 스포르팅 히혼 B 소속으로 데뷔했다. 이후 하비에르 만하린, 후아넬레, 아벨라르도 페르난데스 등과 함께 팀을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로 자리잡았으며, 이러한 활약으로 1989년 9월 CD 말라가를 상대로 1군 데뷔전을 치렀다. 1990-91 시즌에는 키리아코 카노 감독의 지휘하에 스트라이커로 출전해 리그 35경기에서 14골을 득점했으며, 특히 마지막 라운드에서 발렌시아를 상대로 득점에 성공해 팀이 1:0으로 승리하며 최종 순위 5위에 올라 UEFA컵 출전권을 차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히혼에서 그는 루초(루이스+마초)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2.1.2. 레알 마드리드 CF

파일:FUhAsseXEAAS9ZO.jpeg.jpg

좋은 활약을 펼친 결과 레알과 바르셀로나의 구애를 받았으나 과거 입단 테스트에서 자신을 떨어뜨린 바르셀로나를 거절하고 시즌 종료 이후 250만 페세타의 이적료에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게 되었으나, 입단 초창기에는 당시 팀의 감독이 라도미르 안티치와 베니토 플로로로 연달아 바뀌는 상황에서 본 포지션이 아닌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며 기대했던 만큼의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하지만 1994년 팀의 새로운 감독으로 호르헤 발다노가 선임된 이후에는 오른쪽 측면 공격수로 활약하며 팀의 핵심 선수로 중용되었으며, 1994-95 시즌에는 바르셀로나와의 엘 클라시코에서 1골을 넣어 5:0 승리에 일조하는 등 팀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하지만 1995-96 시즌 종료 이후 구단과의 계약 연장에 합의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계약이 만료되어 팀을 떠나게 되었다.

2.1.3. FC 바르셀로나

파일:external/esporte.ig.com.br/7730928.luis_enrique_328_499.jpg

결국, 1996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다른 팀을 알아보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더비 매치 라이벌인 바르셀로나에서 공격적인 역할을 내걸어 입단했다. 요한 크루이프는 자신의 자서전 마이 턴에 엔리케의 이적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본인이 감독 자리에서 잘리자 자기가 직접 영입을 주도했고 자기 때문에 이적한 엔리케에 대해 말하며 불만을 표시했다.

입단 이후 첫 시즌인 1996-97 시즌에는 팀의 감독인 바비 롭슨의 지휘 하에 리그에서 35경기에 출전해 17골을 넣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으며, 수페르코파, 코파 델 레이, UEFA 컵위너스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데 공헌했다.

1997-98 시즌을 앞두고 팀의 감독이 루이 판 할로 바뀐 이후에도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여전히 팀의 공격을 이끌었으며, 리그에서 34경기에 출전해 18골을 넣어 리그 우승에 크게 공헌했을 뿐 아니라 코파 델 레이에서도 6경기에 출전해 3득점을 기록해 팀의 코파 델 레이 2연패를 견인했다. 98-99 시즌 거스 히딩크가 이끌던 레알 마드리드전에서 2골을 넣어 3 : 0으로 이기게 되어 히딩크는 경질되게 되어 이후 한국행의 가교역할을 했다고 할수 있다.

입단 초창기 당시에는 숙명의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한 전력도 있었던 관계로 서포터들의 지지를 쉽게 얻지 못하고 야유도 많이 받았었지만,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하던 시절보다 더 많은 8시즌 동안 좋은 활약을 펼쳤고, 점점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신임을 얻게 되고 주장까지 선임되어 인정을 받게 된다. 그리고, 엘 클라시코에서 여러 골을 성공시키면서 레알 마드리드 킬러로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는, 레알 마드리드 시절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5-0의 홈승리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레알 홈팬들에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레알에서 좋은 기억은 없다고 인터뷰를 하게 된다. 그리고 레알을 상대로 골 세리머니까지 한다. 2004년 5월 16일 라싱 산탄데르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했으며, 당시 팀의 감독이었던 프랑크 레이카르트는 후반 14분 마르크 오베르마스와 교체시켜 벤치로 불러들이면서 서포터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2.2. 국가대표 경력

1991년 U-23 대표팀에 발탁되었으며, A매치에 데뷔했으며,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해 팀이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공헌하였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성인 국가대표팀에도 뽑혔으며, 이후 1994 미국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팀 명단에 포함되어 조별리그 첫 경기였던 한국전에도 선발 투톱으로 출장했고[4], 스위스와의 16강전에서 골을 기록하며 팀의 3:0 승리에 일조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와의 8강전 도중 마우로 타소티의 팔꿈치에 얼굴을 가격당해 출혈이 일어난 사고가 발생했으며, 결국 이는 팀의 1:2 패배로 이어졌다. 하지만 경기중에는 타소티가 주심으로부터 아무런 처분을 받지 못했으며, 경기가 끝난 이후 8경기 출전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5][6]

이후 유로 1996에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며,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조별 리그 1차전 상대인 나이지리아와의 맞대결에 선발 출장했지만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했고 팀은 나이지리아에게 이변의 2-3 역전패를 당했다. 불가리아와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1골+1어시스트+1PK 유도의 맹활약을 하며 팀의 6:1 승리를 이끌었으나, 팀이 파라과이에게 골득실로 밀려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쓴맛을 봐야 했다.

그 후 2002 한일 월드컵에도 나왔으나 8강전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대한민국을 만나 승부차기 끝에 패하며 탈락했다. 공교롭게도 월드컵 첫 경기와 마지막 경기에서 모두 한국을 상대했고, 썩 좋지 않은 결과를 얻었다. 그 스스로가 '투혼'으로 점철된 선수답게, “한국 선수들은 마지막 10분까지도 경기 시작 때와 다름없이 뛴다. 특히 끝까지 패배를 생각하지 않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라는 말로 겸허히 패배를 인정하고 한국 팀에 대한 존중심을 표현했다. 월드컵 이후 국가대표에서 은퇴했으며, 총 62경기에 출전해 12골을 득점했다.

3.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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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감독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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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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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록

5.1. 선수 기록

5.1.1. 대회 기록

  • 스페인 U-23 축구 국가대표팀

5.1.2. 개인 수상

5.1.3. 클럽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89-90 스포르팅 히혼 라리가 1 0 0 0 - -
1990-91 스포르팅 히혼 라리가 35 14 9 3 - -
1991-92 레알 마드리드 라리가 29 4 6 1 6 0
1992-93 레알 마드리드 라리가 34 2 6 0 8 1
1993-94 레알 마드리드 라리가 28 2 4 1 6 0
1994-95 레알 마드리드 라리가 35 4 2 0 6 0
1995-96 레알 마드리드 라리가 31 3 0 0 8 0
1996-97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35 17 7 1 7 0
1997-98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34 18 6 3 6 4
1998-99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26 11 3 0 3 1
1999-00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19 3 5 3 7 6
2000-01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28 9 4 1 9 6
2001-02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23 5 0 0 15 6
2002-03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18 8 0 0 8 2
2003-04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24 3 1 0 5 2

5.2. 감독

5.2.1. 대회 기록

5.2.2. 개인 수상

5.2.3. 리그 기록

연도 구단 리그 순위 경기 승점
2008-09 바르셀로나 B 세군다리가 B[9] 5 38 15 15 8 50 38 60
2009-10 바르셀로나 B 세군다리가 B 2[10] 38 22 10 6 65 35 76
2010-11 바르셀로나 B 세군다리가[11] 3[12] 42 20 11 11 85 62 71
2011-12 AS 로마 세리에 A 7 38 16 8 14 60 54 56
2013-14 셀타 비고 라리가 9 38 14 7 17 49 54 49
2014-15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1 38 30 4 4 110 21 94
2015-16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1 38 29 4 5 112 29 91
2016-17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2 38 28 6 4 116 37 90

6. 여담

  • 트레블을 하고도 MSN빨이라고 욕을 먹는 불쌍한 감독이었던 시기도 있다. 아무리 선수진이 좋아도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감독이 많아서 오히려 최고의 선수진들을 한 팀으로 융합시켜 이뤄낸 최고의 성과라고 보는 것이 무방한데, 유로 2020에서 많은 선수들이 합류하지 못한 상태에서 남은 선수들로 대표팀을 짠 뒤 4강 진출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준 이후엔 이러한 말은 쏙 들어갔다.
  • 은근히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엔리케'는 성이 아니고 이름이다.[14] 스페인어 작명법에서는 엄밀히 말하면 퍼스트 네임과 미들 네임의 구분이 없는데[15], 루초도 그래서 이름인 '루이스 엔리케'를 등록명으로 사용하다보니 '루이스'만 이름이고 '엔리케'는 성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루초의 성은 부계쪽은 '마르티네스', 모계쪽은 '가르시아'이다. 만약 일반적 케이스대로 이름 + 성으로 등록명을 썼다면 '루이스 마르티네스', 혹은 '루이스 엔리케 마르티네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을지도 모르는 노릇.
  • 슬하 1남 2녀로 첫째인 장남 파초 마르티네스(Pacho Martinez)와 둘째인 장녀 시라 마르티네스(Sira Martinez), 그리고 막내인 차녀 사나 마르티네스(Xana Martinez)가 있었으나 막내 딸이었던 사나 마르티네스는 2019년 당시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골육종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루초가 스페인 감독직을 잠시 내려놨던 이유도 딸의 투병 때문이었다. 3년 후 카타르 월드컵 때 자신의 SNS에 자전거를 타며 찍은 영상을 올렸는데, "오늘은 독일과 경기를 치르는 날이자, 사나의 13번째 생일이다. 사나가 어디에 있든 좋은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고 말해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나기도 했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기자 회견에서 사나에 관해 언급하기도 했다.#[16]
  • 선수를 은퇴한 현재도 운동을 즐기는 등 자기 관리가 굉장히 뛰어나며 50대인데도 근육질의 몸을 자랑하고 있다. 최근에는 사이클에 빠져 있는지 SNS에 관련 동영상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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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9년 6월 19일부터 동년 11월 19일까지 개인 일신상의 이유로베르트 모레노가 감독직을 맡았다.[2] 루이스의 스페인어식 애칭.[3] 주 포지션인 윙어 이외에도 미드필더 전 포지션과 세컨드 스트라이커, 최전방 공격수, 심지어 풀백도 소화했다.[4] 홍명보를 뒤에서 밀어 넘어뜨려서 경고받았다.[5] 대회가 끝난 이후 타소티는 결국 이탈리아 대표팀에 다시 선발되지 못했다. 유로 2008 당시 8강전에서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격돌하자, 루이스 엔리케는 1994년 월드컵 당시의 패배를 갚아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6] 참고로 마우로 타소티는 80~90년대 유럽을 호령하던 최고의 팀이었던 AC 밀란의 막강한 수비진 말디니-바레시-코스타쿠르타-타소티 라인을 구성하던 위대한 선수로, 밀란 올타임 레전드 라이트백이다. 그러나 국가대표에서는 동포지션에 역시 유벤투스, 인테르의 올타임 레전드인 클라우디오 젠틸레, 주세페 베르고미가 있었고, 센터백 성향도 있던 이들의 센터백자리에는 가에타노 시레아, 풀비오 콜로바티, 프랑코 바레시, 피에트로 비에르코보드, 리카르도 페리등 후덜덜한 선수들이 버티고 있었기에 이 후덜덜한 선수들의 틈에 치여 타소티는 밀란에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30줄이 넘도록 성인대표팀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불운을 겪었다. 이는 밀란 제네레이션의 동료였던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역시 마찬가지로 이들은 1980년대 중후반 밀란에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다른 팀의 명 선수들에 가려 대표팀 소집이 안되다가, 밀란에서 그들을 지도했던 은사 아리고 사키가 아주리의 수장이 되고 나서야 성인대표팀에 자리를 잡게 된다. 타소티는 1960년 생으로, 1994년 월드컵 때는 34세(...)였다. 그것도 풀백 포지션이었으니 노장 중의 상노장인 셈. 타소티의 엔리케 가격 후 징계는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사실 그 징계가 아니었어도 나이상 1994년 월드컵이 처음이자 마지막 국가대항전 대회였을 것이다.[7] 돈 발롱 어워드[8] 알프 램지 어워드[9] 스페인 3부리그[10] 3부리그->2부리그 승격[11] 스페인 2부리그[12] 세군다리가 3위까지 그 다음시즌 1부리그 승격이 되지만 B팀의 경우 승격이 되지 않고 그대로 2부리그에 잔류[13] 다른 두 명은 1905년에 바르사로 이적한 루시아노 리스 리가, 1965년에 바르사로 이적한 루시엥 뮐러.[14] 비슷한 사례로, 널리 알려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호날두가 성이 아니다.[15] 물론 등록명 등에서 이름 일부를 미들네임처럼 따로 잘라내고 쓰는 케이스도 볼 수 있지만, 법적으로는 퍼스트-미들 구분이 없다.[16] 참고로 둘째 시라 마르티네스는 자신이 국대에서 가르치기도 했던 페란 토레스와 사귀고 있는 중이다.[17] 대신 레알 마드리드 출신 선수들의 비중은 꽤 있는 편. 엔리케 본인도 레알 마드리드에 몸을 담은 적이 있지만, 알바로 모라타 등은 지속적으로 차출이 되어 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