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display: inline-table" | <tablebordercolor=#fff> | BBC 뮤직 매거진 선정 역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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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 순위 | 피아니스트 | ||
<colcolor=#000><colbgcolor=#fff> 1위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
2위 |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 ||
3위 |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 ||
4위 |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 ||
5위 | 알프레드 코르토 | ||
6위 | 디누 리파티 | ||
7위 | 아르투르 슈나벨 | ||
8위 | 에밀 길렐스 | ||
9위 | 마르타 아르헤리치○ | ||
10위 |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 ||
11위 |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 ||
12위 | 이그나츠 프리드만 | ||
13위 | 라두 루푸† | ||
14위 | 에드빈 피셔 | ||
15위 | 빌헬름 켐프 | ||
16위 | 머리 페라이어○ | ||
17위 | 글렌 굴드 | ||
18위 | 발터 기제킹 | ||
19위 | 요제프 호프만 | ||
20위 | 클라우디오 아라우 | ||
○: 생존 피아니스트 †: 목록 선정 당시 생존하였으나 나중에 사망한 경우 |
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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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브레인 | 정경화 | 아르튀르 그뤼미오 | 프리츠 크라이슬러 | 기돈 크레머 | 나탄 밀스타인 | 존 윌리엄스 | }}}}}}}}} }}} |
<colbgcolor=#000><colcolor=#fff>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Святосла́в Рихтер[1] Sviatoslav Richter | |
본명 | 스뱌토슬라프 테오필로비치 리흐테르 Sviatoslav Teofilovich Richter Святосла́в Теофи́лович Рихтер(러시아어) Святослав Теофілович Ріхтер(우크라이나어) |
출생 | 1915년 3월 20일[구력] |
러시아 제국 지토미르 | |
사망 | 1997년 8월 1일 (향년 82세) |
러시아 모스크바 | |
국적 | [[러시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 [[러시아|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피아니스트 |
학력 | 모스크바 음악원 |
수상 | 스탈린 국가상 (1950) RSFSR 인민예술가 (1955) 그래미 어워드 (1960) 레닌상 (1961) USSR 인민예술가 (1961) 레닌훈장 (1965, 75, 85) 츠비카우 시의 로베르트 슈만 상 (1968) 사회주의노력영웅 (1975)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명예박사 (1977) 10월 혁명 훈장 (1980) 레오니 소닝 음악상 (1986) RSFSR 글린카 국가상 (1987) 조국이 공로로 수여하는 훈장 (1995) 러시아 연방 국가상 (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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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우크라이나 태생의 독일계 러시아인이다.[3]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깊이 있는 해석과 바로크부터 현대에 이르는 넓은 레파토리, 피아노의 음향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굉장한 타건력으로 유명하다. 강한 집중력이 느껴지면서도 전체를 조망하는 듯한 연주는 다른 피아니스트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강점 중 하나이다.
2. 생애
리흐테르의 아버지는 우크라이나 태생이었지만, 독일 국적자였다. 한국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아마추어 음악가라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리히테르 본인은 자신의 아버지가 매우 뛰어난(excellent) 피아니스트였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세계적으로 유명한 빈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전공했다. 이후 빈에서 한때 나름 명망 있는 피아니스트가 되었지만, 결투를 하게 되어 범법자가 되어 우크라이나로 도망갔다. 이후 오데사 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그곳에서 피아니스트,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다가 레슨 제자인 지주 귀족의 딸 안나 파블로브나와 결혼했다. 리흐테르의 외할아버지는 딸이 평민 음악가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어쨌거나 둘은 결혼했다. 리흐테르는 1915년 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이 터지자 지주 귀족 출신인 어머니 집안이 소련의 숙청 대상이 되었기에 가족이 뿔뿔히 흩어지는 비운을 겪었다. 리흐테르는 네 살 때 부모와 떨어져 8살 때까지 고모 집에서 자라야만 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어린 시절 부모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한다.여덟살 때 다시 부모와 함께 살게 되면서 피아노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나 그의 아버지는 당시 여느 독일인 어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식에게 엄격한 아버지였던 듯 하다. 아버지가 피아노를 이상하게 친다고 꾸짖으면 어머니가 말리는 일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똘기 어린 행동을 해도 잘 이해해 주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래서 어릴 때 체계적으로 피아노를 배우지는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다른 선생을 주선해 주기도 했지만 역시 오래 가지는 못하고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혼자서 계속 피아노를 연습했고, 15살때 오데사에서 처음 공개 연주회를 열었고 이것이 성공을 거두자 이후 제대로 피아노를 공부해보자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해 오데사 오페라 극장에서 반주를 맡으면서 음악가로서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성악가들의 반주자로서 다른 지방으로 연주여행도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페이는 형편없어서 생활은 빈곤했지만, 리히테르 본인은 자신이 음악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어서 좋았다고 한다.
1935년경부터 시작된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에 모든 소련인들이 그랬지만, 특히 그의 가족은 독일계여서 큰 공포 속에서 지냈다고 한다.
22세에 모스크바로 상경해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 겐리히 네이가우스(Heinrich Neuhaus, 하인리히 노이하우스)[4]를 사사한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독소전쟁이 터지자 당시 오데사 주재 독일 영사에게 피아노 레슨을 했던 그의 아버지는 독일과 내통한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사망 혹은 처형되고 말았다. 오데사에 있던 그의 어머니는 삼촌과 함께 간신히 소련을 탈출하여 독일(서독)로 망명했다. 이렇게 리흐테르는 졸지에 가족과 인연이 끊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이후 소련 비밀경찰(KGB)이 그의 어머니와 친척들이 독일에 망명했다는 이유로 리흐테르를 미행하고 다녔지만, 소련은 그가 탈출할까 두려워 했는지 그에게 어머니가 사망했다고 거짓으로 알렸다.
모든 가족을 잃었다고 생각한 리히테르는 실의에 빠졌지만 피아노 연습에 전념했다. 소련에서 그의 명성은 높아져 갔으며, 에밀 길렐스와 함께 소련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1949년 스탈린상을 받으며 소련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공식 인정을 받았고, 직후부터 동구권 여러나라와 중국으로 연주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가 집권한 후 소련은 서방에 유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소련은 1955년부터 자국의 대표적인 예술가인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에밀 길렐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의 서방 공연을 허가하여 체제 선전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리흐테르는 가족사 때문에 서방으로의 연주여행이 계속 불허되었다. 그러자 이미 서방으로 연주 여행을 다니던 길렐스가 청중들에게 "저 산 넘어 제 조국 소련에는 저보다 뛰어난 리흐테르라는 피아니스트가 있습니다. 그를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1958년 차이코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소련을 다녀온 미국의 반 클라이번이 소련에 리흐테르라는 엄청난 피아니스트가 있다고 서방 언론에 전하면서 서방에서 리흐테르의 명성은 높아져 갔다.
결국 소련 당국도 리흐테르의 서방 공연을 허가할 수 밖에 없었고, 리흐테르는 1960년 첫 서방 공연을 허가받아 미국 뉴욕 카네기홀, 시카고 등에서 음악회를 열었다. 이 카네기홀 공연에서 20년만에 서독에 망명해 살고 있던 어머니와 상봉하게 된다. 이 공연 전까지 20년 동안 리흐테르는 어머니가 살아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소련은 그에게 그녀의 어머니가 전쟁 중에 사망했다고 말했었다. 서독에 정착한 그의 어머니 역시 아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1950년대 들어 라디오 등 매체를 통해 언급되는 리흐테르라는 소련의 전설적 피아니스트가 아들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1960년 그의 첫 미국 공연에서 그는 소련 당국을 의식해서인지 객석 가장 앞줄에 앉아 있는 어머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그의 어머니는 객석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5] 물론 공연 뒤에 어머니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상봉했다. 이후 1961년 런던 공연 등 서구권에서 공연을 이어가면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94년에는 한국에도 방문했으며 1995년 5월 독일에서의 마지막 연주를 끝으로 은퇴했다.
1997년 심장마비로 인해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연주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은 타연주자를 압도하는 장기를 하나씩 갖고 있기 마련이다. 라흐마니노프의 강력한 왼손, 알프레드 코르토의 루바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천둥같이 큰 소리, 글렌 굴드의 독립적인 양손 아티큘레이션[6] 등. 이에 비해 리흐테르는 연주의 변장술사였는데, 그 어떤 스타일로도 분류될 수 없는 카멜레온같은 연주자였다.
제드 디슬러 (평론가)[7]
제드 디슬러 (평론가)[7]
세상엔 두 종류의 연주가 있습니다. 하나는 연주자가 악기를 스스로를 표출하는 수단으로 쓰는 경우입니다: 파가니니와 프란츠 리스트처럼요. 그리고 나머지는 청취자를 연주자 개인의 개성이 아닌 음악 자체에 연결해주는 경우입니다. 제 생각엔 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보다 후자의 예시에 어울리는 연주자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글렌 굴드[8][9][10]
글렌 굴드[8][9][10]
생전에 그는 "연주자의 임무는 음악을 지배하는게 아니라 그 안에 녹아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11] 이처럼 개성은 배제하고 작곡가의 의도대로 치는게 그의 연주 철학이었는데, 단 하나의 음표와 악상조차도 멋대로 치는 것에 대해 치를 떨 정도로 철두철미한 악보원칙주의자였다.[12][13]
상단의 평론들처럼 뚜렷한 개성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피아노계의 정점이라는 위상과는 달리 호로비츠, 치프라, 굴드등의 문서들과는[14]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연주에 대한 항목이 빈약하다. 물론 거장 피아니스트 답게 신체스펙이 훌륭했는데, 무려 12도를 가볍게 집을 정도로 손이 컸고,[15] 덕분에 중년의 나이까지도 가히 상식을 초월하는 타건을 보여주었다.[16][17] 마음만 먹었다면 치프라나 아믈랭같은 비르투오소로 이름을 날릴 능력이 차고 넘쳤지만, 본인이 지향하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악보에 충실한 커리어를 보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그의 지나치게 빠르고 격렬한 특정 레퍼토리는[18][19] 아직까지도 호불호가 갈리는 영역이다.
그의 피아노 실력 못지 않게 회자되는 것은 레퍼토리의 방대함인데, 기인급 기억력을 토대로 실로 엄청난 수의 곡들을 섭렵했다.[20] 이는 그의 뛰어난 기억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본인 스스로 새로운 음악에 대한 열정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노년기에도 테크닉이 크게 떨어지 않아서[21][22] 새로운 레퍼토리를 끊임없이 추가했는데, 70세가 넘은 시점에서 꽤나 난곡으로 꼽히는 브람스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새로운 레퍼토리로 추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3.1. 평가
우리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연주자 중 하나.
글렌 굴드
글렌 굴드
(처음 그의 연주를 목격했을 때를 회상하며) "처음엔 특별하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눈물이 흐르더군요." "피아노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건 완전히 다른 악기였다. 리흐테르는 지성을 갖춘 거대한 음악가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23]
아르투르 루빈스타인[23]
마음에 드는 러시아인 피아니스트는 단 한명이다: 리흐테르.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3.2. 바로크
바흐, 전주곡과 푸가 BWV 881 (rec. 1972) | 헨델, 모음곡 5번 중 아리아와 변주곡 (rec. 1979) |
바흐, 듀엣 BWV 802 (rec. 1991) | 바흐, 판타지아 BWV 921 (rec. 1993) |
3.3. 고전파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Hob.XVI:24 (rec. 1984) | 모차르트, 환상곡 K.475 (rec. 1966)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Op.57 (rec. 1960)[26]]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Op.111 (rec. 1963) |
3.4. 낭만파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D. 664 (rec. 1979) | 슈만, 교향적 연습곡 Op.13 (rec. 1971) |
쇼팽, 발라드 Op.52 (rec. 1962) | 리스트, 죽음에 대한 명상 (rec. 1982) |
3.5. 20세기 음악
드뷔시, 판화 (rec. 1962) | 라벨, 거울 中 종의 골짜기 (rec. 1965) |
힌데미트, 모음곡 1922 (rec. 1989) | 시마노프스키, 가면 (rec. 1970) |
3.6. 러시아 피아노 음악
차이콥스키, 사계 중 6월 (rec. 1983) |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rec. 1956) |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Op.23-5 (rec. 1971) | 스크랴빈, 피아노 소나타 Op.53 (rec. 1961) |
쇼스타코비치, 전주곡과 푸가 Op.87-7, Op.87-2 (rec.1956) |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8번 (rec. 1961) |
3.7. 가곡, 2중주 및 실내악
슈베르트, 봄에, D.882 (피셔-디스카우) |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3번 (오이스트라흐) |
슈베르트, 환상곡, D.940 (브리튼) | 쇼스타코비치, 비올라 소나타 (바슈메트) |
드보르자크, 피아노 5중주 2번 Op.81 (보로딘 4중주단) | 베토벤, 첼로 소나타 4번 (로스트로포비치) |
3.8. 협주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 (rec. 1961) |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rec. 1959) |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rec.1960) |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rec. 1966) |
4. 여담
- 노화로 인한 청각적 문제로[27] 악보를 보는 것이 불가피해졌던 1977년 이전까지 그는 항상 모든 곡을 외워서 치곤 했는데 음감이 쇠퇴하기 전에 보여줬던 그의 기억력은 기인의 수준이였다. 한 예로 그는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7번을 나흘동안 머리속으로 연습해서 완성했다고 한다.[28] 그렇지만 기억력이 지나치게 뛰어났던 탓인지 그가 만난 모든 사람과 심지어 그들의 지인까지도 늘 머리에 맴도는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 어머니가 대단히 모험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여서 아들에게 숫기가 없다고 자주 면박을 줬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더 내성적인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29]
- 8살때 피아노를 혼자 건반을 눌러가며 시작한 첫곡이 쇼팽의 녹턴 1번과 25-4 연습곡.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는 스케일같은 기본기도 안배웠으면서 뭐하는 짓이냐고 경악을 했지만 어머니가 그냥 냅두라고 해서 본인 마음대로 즐기며 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30]
- 반권위적인 성격이었고, 정치적으로도 꽤 반골 기질이 있었던지 즈다노프 비판 등으로 찍힌 작곡가들의 곡을 보란듯이 연주하는 등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물론 그가 당대 최고의 실력을 지닌 사람이었기에 소련에서는 그에게 불이익을 줄지언정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 없었다.
- 철저한 악보원칙주의자였다. 한번은 머레이 페라이어의 공연에서 쇼팽 소나타 3번을 들었는데, 연주후 무대뒤의 페레이어를 찾아가 왜 1악장의 도돌이표를 따르지 않았냐고 따졌다는 일화가 있다.[31][32]이 외에도 도돌이표를 철저히 준수하라고 강조한 사례가 꽤 많다.
- 악보원칙주의와 까다로운 성미가 더해진 그의 평론은 실로 살벌했는데, 심사위원이었던 1958년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밴클라이번에게만 만점을 주고 그 외에는 모두 0점을 주었다는 일화가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명하다. 하지만 후대에 공개된 채점표에 의하면 이는 사실이 아닌데, 밴 클라이번에게는 25점 만점을 준 것은 사실이나, 레프 블라센코를[33] 포함한 다른 두 피아니스트에게도 24점과 23점의 고득점을 주었다.[34][35] 하지만 이야기가 완전한 창작은 아닌것이, 절대 다수의 참가자들에게 0점에 가까운 3점을 뿌린 것은 사실이다. 채점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한 자릿수로[36] 도배한 심사위원은 리흐테르가 유일하다.
- 엄청난 독설가로도 유명했으며 현재 전설로 평가받는 피아니스트들도, 심지어는 본인에게도 평가는 자비롭지 않았다. 본인이 녹음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에 대해서는 굉장히 혹평을 했으며[37],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연주를 듣고는 차가운 얼음처럼 연주한다[38]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 바흐의 이탈리안 콘체르토에서 단 하나의 음을 F샵 대신 F로 잘못알고 연주했었는데, 이후 새롭게 녹음한 음반에서 사죄문을 올린적이 있다: "매우 송구스럽게도 저 리흐테르는 그동안 이탈리안 콘체르토 2악장 마지막 부분의 F를 F샵으로 잘못 연주했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황당하게도 리흐테르는 그때까지 이 곡을 40년을 넘게 쳤는데 그 어떤 음악가와 녹음 기술자한테도 이 사항을 지적받은적이 없다고 한다.[39] 물론 이 일화의 진정한 묘미는 리흐테르가 13분을 상회하는 이탈리안 콘체르토를 40년을 넘게 악보 한번 보지 않고 암보했다는 것이다.
- 동성애자였다고 여겨진다. 지인들은 알음알음 알거나 눈치 채는 수준이었다. 그는 소프라노 니나 도를리악(1908-1998)[40]을 평생 대동하며 살았으나, 그녀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정식 부부도 아니었으며 아이도 없었다.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 공산주의 소련 체제에서 혼인 신고도 하지 않고 사는 것은 통상적이지는 않은 일이었으며, 동성애는 불법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리흐테르의 성지향에 대해서는 그의 생존 시기에도 때때로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리흐테르는 왜 결혼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힌 바가 없고, 극도로 내성적이고 조용한 사람이었기에 인터뷰 일체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죽기 직전까지 지속된 브루노 몽생종의 다큐멘터리 필름에서도 이를 공식적으로 밝힌 바가 없다. 현재는 평생 동반자였던 니나 도를레악도 사망한 이후이기 때문에 리흐테르의 성적 지향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41] 다만 니나는 평생 리흐테르에게 충실했고, 90년대에 내한 공연 때도 매니저처럼 동행하였으며, 리흐테르의 사망까지 옆을 지켰다.
- 글렌 굴드는 리흐테르의 연주에 대해 정신을 못차릴 정도의 황홀경이라고 언급했다. 굴드는 어지간하면 다른 음악가를 칭찬하지 않는 굉장히 까다로운 성격이었다.
- 쿠엔틴 타란티노와 얼굴이 닮았다는 의견이 많다. 위의 쇼팽 발라드 연주 영상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 1952년 개봉한 글린카라는 영화에서 프란츠 리스트 역할로 연기하기도 했다.
리스트가 러시아어를 한다.
[1] 우크라이나어 표기 기준 Святослав Ріхтер[구력] 3월 7일[3] 리흐테르의 아버지는 독일인이었다. 리흐테르 본인도 독일계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그의 가족들은 소련 치하에서 독일계라 탄압받아 아버지가 숨졌고, 리흐테르 본인도 독일계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KGB의 감시를 받고 서방 활동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카라얀과의 일화가 있는데, 녹음 중 잠시 쉬는 시간에, 리흐테르가 '나는 독일인이오' 라고 하자, 카라얀이 '그럼 나는 중국인이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4] 소련의 피아니스트로 명교사로 이름이 높았다. 리흐테르 외에 대표적인 제자들로는 야코프 자크, 에밀 길렐스, 아나톨리 베데르니코프, 라두 루푸 등이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네이가우스(노이하우스) 역시 독일계였다.[5] 그의 어머니는 3년 후 사망했다.[6] 양손의 역할이 고른 바흐의 건반음악의 귀재였다.[7] 출처[8] 15:15 - 16:13 #[9] 굴드는 전자에 속하는 음악을 굉장히 싫어하고 평가절하했다. 비록 굴드와 리흐테르의 연주 스타일은 다소 달랐으나, 음악의 절대적인 궁극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같았고, 나중에는 둘 모두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의 사랑을 받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버리고 야마하로 갈아탄 것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대목이다.[10] 이와 별개로 굴드 본인은 엄청난 개성의 연주로 인해 바흐를 제외하면 호불호가 극을 달리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다.[11] Sviatoslav Richter: Notebooks and Conversations by Bruno Monsaingeon (2001-03-01)[12] 그의 음악적 평론들은 '악보대로 쳐라!'라는 말 한마디로 함축 될 수 있을 정도로 일관적이다. 특히 도돌이표를 생략하지 말라고 강조했다.[13] 표준적인 연주의 정점이라는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에게 괜히 단 하나의 흠도 잡지 않은 게 아니다. 자세한 일화는 그의 항목으로.[14] 모두 개성이 넘치는 거장들이다.[15] https://www.npr.org/sections/deceptivecadence/2015/03/19/393778706/sviatoslav-richter-the-pianist-who-made-the-earth-move[16] 이는 결코 과언이 아닌데, 그의 1957년 모스크바 실황 연주에서는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8번) 피날레 부분에서 피아노를 부숴버리는 듯한 괴력을 보여준다.[17] 사실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는 리히터의 연주 대부분은 이미 중년에 들어선 혹은 노년 시기의 연주이며 젊은 시절 연주는 몇 개 없다. 리히터가 젊은 시절(1946년, 31세 때) 연주한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소나타 8번.[18] 특히 쇼팽. 보통 2분에 걸쳐 연주되는 쇼팽 에튀드 10-4를 1분 30초만에 완주한 것은 매우 유명하며 4곡의 발라드 모두(특히 1,4번) 코다에서 일반적인 연주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연주한다.[19] 혹은 그 정 반대로 너무 느린. ex) 슈베르트[20] 그의 증언: "나의 레퍼토리는 (중복되는 곡 없이) 약 80여개의 프로그램이다, 실내악을 제외하고(!)."[42][21] 73세이던 1988년에는 초절기교 연습곡 8곡(1,2,3,5,7,8,10,11번)을 포함한 리스트 리사이틀을 열기도 했다.[22] 물론 젊은 시절보다는 테크닉이 떨어진 면은 있지만 젊었을 때의 테크닉이 너무 괴수급이었다.[23] Bruno Monsaingeon, The Enigma (film biography of Richter).[24] 1958년 소련에서 그의 연주를 처음 보고 눈물을 흘렸으며, 미국으로 돌아와 한 극찬이다.[25] "Year in Review — Arts & Culture". CNN.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8-12-19[26] 특히 어렵기로 유명한 3악장 피날레를 들어보자. 엄청난 스피드와 타건이 압권이다[27] 귀에 들리는 음이 실제 음정보다 몇 도나 높게 들리기 시작했다고 한다.[28] 그의 다큐멘터리에서 본인이 증언, 48:42초: #[29] 출처: 그의 다큐멘터리.[30] 출처: 그의 다큐멘터리.[31] 페레이어는 놀라며 "다들 그렇게 하지 않나요?"라고 반문했다.[32] 실제로 현재도 조성진, 라파우 블레하츠 등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도돌이표를 따르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33] 그의 제자로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유명하다.[34] 링크1 채점표 녹색으로 하이라이트 된 것이 리흐테르가 24점으로 채점한 레프 블라센코. 좌측에서 6번째가 밴 클라이번. 보다시피 블라센코가 총점이 가장 높았지만, 심사위원들이 최고는 밴 클라이번이라고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호소했고, 이를 흐루쇼프가 쿨하게 "그가 최고인가? ("예.") 그러면 그에게 1등을 줘라"라고 대답했다. 그 살벌한 냉전시기에 적성국가 미국의 밴 클라이번이 얼마나 파격적으로 러시아 청중과 심사위원들에게 어필했는지[43] 알 수 있는 일화인데, 무려 수십년 후인 현재 21세기에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홈텃세는 악명높다.[35] 여담으로 채점표 심사위원의 3번째 인물은 에밀 길렐스이다.[36] 거장에게 사실상 빵점자리 피아니스트로 평가된 참가자들의 멘탈붕괴는 상상에 맡긴다.[37] 그와 별개로 본인이 녹음한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은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다.[38] 감정이 없다는 뜻[39] 1950년대 녹음한 이탈리안 콘체르토에 이 실수가 포함되어 있다.[40] 역시 레즈비언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동성애를 공식적으로 억압하는 소련 사회에서 이성애 부부로 행세함으로써 일종의 전략적 공생관계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41] 양성애자였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