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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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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colbgcolor=#FFFFFF,#1f2023> 위후(威侯)
작위 도정후(都亭侯) → 태향후(斄鄕候)
최종직위 표기장군(驃騎將軍) 겸 가절(假節) 영 양주목(領 涼州牧)
성씨(馬)
이름(超)
맹기(孟起)
아버지 마등
종제 마대(馬岱)
생몰 기간 176년 ~ 222년 (향년 4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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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유비) 평서장군(平西將軍) 겸 독임저(督臨沮)
좌장군(左將軍) 겸 가절(假節)
표기장군(驃騎將軍) 겸 가절(假節) 영 양주목(領 涼州牧)
후한 독군종사(督軍從事) → 편장군(偏將軍)
마초군 정서장군(征西將軍) 겸 독양주군사(督涼州軍事) 영 병주목(領 幷州牧) }}}}}}}}}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2.1.1. 평양 전투
2.2. 중기 생애
2.2.1. 동관 전투2.2.2. 기성 전투2.2.3. 장로 휘하
2.3. 유비 휘하2.4. 죽음
3. 삼국지연의4. 가족 관계5. 평가
5.1. 명성5.2. 통솔5.3. 무력5.4. 패륜아 논란?
6. 이야깃거리7. 기타 창작물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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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西川馬孟起(서천마맹기): 서천의 마맹기(마초의 자)는
名譽震關中(명예진관중): 명성이 관중을 뒤흔들었는데
信布齊誇勇(신포제과용): 한신, 영포와 같이 자랑할 만큼 용맹하고
關張可竝雄(관장가병웅): 관우, 장비와 나란히 할 수 있는 영웅이네.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 사례 우부풍 무릉현 사람이며 는 맹기(孟起). 시호는 위후(威侯).

후한의 개국공신이었던 대장군 마원의 후예이자, 관서의 군벌들을 이끌었던 맹주로서 서량에 군림하며 관중의 세력들을 위협했다. 강병들이 많았던 서량에서도 마초의 위용과 명성은 엄청난 것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성도의 유장을 항복시키거나 조조를 위협하고 주유가 유력한 동맹 상대로 인식하는 등 중국 전체에 걸쳐 크게 위세를 떨쳤다.

후세에는 천하의 조조마저 죽음 직전까지 몰고간 그의 용력과 중원을 진동시켰던 명성이 높이 평가되어 신위천장군(神威天將軍)[1], 서량의 금마초라는 이명과 함께 당대를 호령했던 영웅호걸로 전해지고 있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선 관우장비에 버금가는 관중 제일의 맹장으로 묘사된다.

유비 휘하 최고의 장수였던 오호대장군 가운데 유일하게 생몰년대가 자세한 인물이기도 하다.[2]

2. 정사 삼국지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기록한 마초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산양공재기》나 배송지가 삼국지 정사에 주석으로 달은 《전략》 등의 사료에 마초의 자세한 행적이 더 등장하는 만큼 기록이 부족하기로 유명한 촉나라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기록이 남은 인물로 전해진다.
마초의 자는 맹기(孟起)로 부풍군(扶風郡) 무릉현(茂陵縣) 사람이다. 부친 마등(馬騰)은 영제(靈帝) 말에 변장(邊章), 한수(韓遂) 등과 함께 서주(西州)에서 거사를 일으켰다.

초평(初平) 3(192)년에 한수와 마등은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향했다. 한 왕조에서 한수를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삼아 금성(金城)으로 돌아가게 했고, 마등은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삼아 미현에 주둔토록 했다. 후에 마등은 장안을 습격했지만, 패주하여 퇴각해 양주(凉州)로 돌아왔다.

사예교위(司隷校尉) 종요(鐘繇)가 관중(關中)을 진수(鎭守)하며 한수와 마등에게 글월을 보내 화복(禍福)에 대해 진언했다. 마등은 마초를 파견해 종요를 따라 평양(平陽)에서 곽원(郭援)과 고간(高幹)을 토벌하게 했는데, 마초의 장수 방덕(龐德) 친히 곽원을 참수했다. 후에 마등은 한수와 불화(不和)하여 서울로 돌아가길 구했다. 이에 그를 불러다 위위(衛尉)로 삼고, 마초는 편장군(偏將軍)으로 삼아 도정후(都亭侯)에 봉하여 마등의 부곡(部曲)을 영솔하도록 했다.

마초가 군대를 통솔하게 되자, 마침내 한수와 합종(合從)하고, 양추(楊秋) 이감(李堪) 성의(成宜) 등과도 결의를 맺고 진군하여 동관(潼關)에 이르렀다. 조공은 한수, 마초와 단기로 모여 얘기했는데, 마초가 그의 힘을 의지해 몰래 돌진해 조공을 잡을려고 했는데, 조공의 주변에 장수 허저(許褚)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니, 마초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조공이 가후(賈詡)의 모책을 이용해, 마초와 한수를 이간질하여 다시 서로 의심케 하니, (마초의)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마초는 달아나 여러 오랑캐(戎族)들을 보전하고 있었는데, 조공은 안정(安定)까지 추격해 왔지만 마침 북방에 일이 있어,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양부(楊阜)가 조조를 설득하며 말하길 "마초에겐 한신, 영포의 용맹함이 있고, 강족(羌族)과 호인(胡人)들의 마음을 깊이 얻고 있습니다. 만약 대군이 돌아가 엄정이 방비하지 않는다면, 농상의 여러 군은 나라의 소유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라 했다. 과연 마초가 여러 오랑캐(戎)를 거느리고 농상의 여러 군현을 공격하니, 농상의 여러 군현들이 이에 호응해 양주자사 위강(韋康)을 죽이고, 기성(冀城)을 차지하여 그 군대를 가졌다. 마초가 정서장군(征西將軍)이라 자칭하며, 병주목(幷州牧)을 맡아, 양주의 군사(軍事)를 감독했다.

위강의 옛 관리와 백성인 양부, 강서(姜敍), 양관(梁寬), 조구(趙衢)등은 공모하여 마초를 공격할 것을 같이 모의했다. 양부와 강서는 노성(鹵城)에서 병사를 일으키니 마초가 출진하여 공격했지만 항복시키지 못했다. 양관과 조구가 기성의 성문을 닫아 버리니, 마초는 들어갈 수 없었다. 진퇴가 어려워진 마초는 이에 한중으로 달아나 장로(張魯)에게 의지했다. 장로는 함께 일을 도모하기 부족하여, 속으로 고향으로 그리워 하고 있는데, 선주(유비)가 성도(成都)에서 유장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은밀히 항복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선주는 사람을 보내 마초를 맞이하니, 마초는 병사를 이끌고 지름길로 성 아래 이르렀다. 이에 (성도) 성 안이 모두 두려움에 떠니, 유장은 곧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여 항복했고, 이에 마초를 평서장군(平西將軍)으로 삼아 임저(臨沮)를 감독하게 하고, 예전대로 도정후로 삼았다. 선주가 한중왕이 되자, 마초를 좌장군(左將軍)으로 삼고 가절을 내려주었다.

장무(章武) 원년(221)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승진시키고, 양주목을 맡게 하며, 태향후로 봉작을 올리면서 책문을 내려 이르길 짐이 부덕한 몸으로 지존의 자리를 이어 종묘를 받들게 되었다. 조조 부자는 대대로 그 죄를 짓고 있는지라 짐은 이에 참담하여 병을 앓아 근심하게 되었다. 천하가 분하고 원통하여 정(正)에 귀의하고 근본으로 되돌아 와, 이미 저와 강(羌)족이 복종하며, 흉노도 도의를 흠모하고 있다. 그대의 신의는 북쪽 땅에 드러나고 위무(威武) 또한 빛나니, 이에 임무를 그대에게 맡겨, 용맹을 드날리며 만 리밖을 아울러 다스려 백성들의 아픔을 구하라. 조정의 교화를 밝게 펴고, 멀고 가까운 곳을 보듬어 보전하며, 상벌을 엄정히 하여, 한조의 복을 돈독히 하여 천하에 대하라고 했다.

장무 2년(222)에 죽었는데, 이때 임종을 맞이해 상소를 올려 말하길 "신의 집안에 2백여 인은 맹덕(조조)에게 거의 다 주살되었고, 오직 종제(從弟;사촌동생) 마대(馬岱)만이 남아있어, 마땅히 미약한 가문의 제사를 이을 사람이어서, 폐하께 깊이 부탁드리며, 나머지는 다시 말할 게 없습니다라 했다."

시호를 추증해 위후(威侯)라 하고, 아들 마승(馬承)이 뒤를 이었다. 마대의 관직은 평북장군(平北將軍)에 이르렀고, 작위를 올려 진창후(陳倉侯)로 삼았다. 마초의 딸은 안평왕(安平王) 유리(劉理)의 배필이 되었다.

2.1. 초기 생애

마초의 할아버지는 천수 난간현의 현위 출신으로, 그는 낙향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족 여인과 결혼해 마등을 낳았다. 마등은 후한명장이자 개국공신 마원의 후손이다. 마원의 조상은 조나라 명장 조사였다. 본래 조씨 성을 가졌지만, 조사가 마복군이란 호를 받은 후 성을 고쳐 마씨라고 칭했다.

마등이 어릴 때는 집안이 가난했는데 영제 말 양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할 때 자원해 공을 세웠으나 영제(168년 ~ 189년) 말, 변장, 한수 등과 함께 양주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192년, 한수, 마등이 무리를 이끌고 장안으로 나아가니 한나라 조정에서는 한수를 진서장군으로 삼아 금성으로 되돌려 보내고 마등을 정서장군으로 삼아 사례 부풍군 미현으로 보내 주둔하게 했는데 마초는 뒤에 남아 본거지를 지켰다. 이후 차근차근 성장해 양주의 유력한 군벌로 자리잡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마초는 자연스래 강족저족 등 서북지역의 이민족들과 가까워졌고, 이로써 그는 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애초에, 한수와 마등이 관중에서 난을 일으켜 자주 유장의 아버지 유언과 교류하여 믿었다. 그 뒤 마등이 장안을 습격했으나 패주하고 양주로 되돌아갔다. 이때 마등은 이각곽사에게 식량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 장안에서 마등과 호응하려던 세력들이 모두 숙청당했다.[3]

마등은 진서장군 한수와 결탁해 의형제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서로 매우 친했으나 뒤에 부곡(部曲)이 서로 침입하게 되자 원수 사이가 되었다. 마등이 한수를 공격하자 한수가 달아났는데 무리를 합쳐 돌아와 마등을 공격해 마등의 처자식을 죽였고 싸움이 연이어 풀리지 않았다.[4] 또 건안(196년 ~ 220년) 초, 국가의 기강이 위태롭고 느슨해지니 사례교위 종요, 양주목 위단을 시켜 그들을 화해하게 했다. 단 이 싸움이 끝난 뒤에도 마등은 한수를 비롯한 관중의 군벌들과 산발적으로 계속 대립했고 관중 군벌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196년 마등과 한수가 반목하여 싸웠고 마등의 처자식이 한수에게 살해당하였다. 마등의 아들 마초 또한 건장하다고 칭해졌다. 염행은 일찍이 마초를 찔렀는데, 가 부러지자, 부러진 모로 마초의 목을 쳐서 거의 죽임에 이르렀다고 한다.[5]

2.1.1. 평양 전투

원소의 아들 원상고간곽원에게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흉노의 선우와 하동으로 침략하려고 할 때, 마등과 한수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으려고 했다.[6] 당시 원씨 형제가 조조의 하북 진군을 일시적으로 막아내는 데 성공하여 전열을 고를 수 있게 되자, 별도의 경로를 통해 조조의 배후를 칠 계획을 세운 것이다. 마등은 몰래 그것을 허락했다.

원상의 관서 공격은 나름대로 공들여 준비한 전략인지, 먼저 남흉노의 선우 호주천을 부추겨 조조를 공격하게 했고 호주천은 평양현을 점거하고 사례교위 종요의 주력병력을 묶어두었고 이 사이 곽원과 고간은 인근의 군현들을 공략해 모두 함락시키며 하동으로 향해 그 위세가 관서 전체를 진동시켰다고 한다.[7] 곽원은 원소군 내부에서 명장으로 취급받았으며, 실제로 이때 곽원이 가한 위협은 상당한 것이었다.

종요가 아직 호주천을 격파하지 못하고 있던 상태에서 곽원이 평양[8] 인근까지 당도하자 그 전력은 매우 강해졌고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해 하동을 버리고 도망치자고 진언했으나 종요는 여기서 약하게 보인다면 관서의 제장들이 모두 원상에게 돌아설 것이라 하여 거부하였다.

한편 사예주 3군의 반란이 장기화될 것을 우려한 순욱은 두기를 하동으로 파견했는데, 순욱의 예상대로 두기는 하동군 내부에서 반고간 세력을 규합해 고간 진영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사례교위 종요가 관중을 진수하게 되자 한수, 마등에게 서신을 보내 화와 복에 관해 진술했다. 당시 종요 혼자만의 힘으로는 흉노와 곽원 양쪽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어쨌든 마등이 생각을 바꾸어 조조를 돕기로 하고 아들 마초를 보내 종요를 뒤따르게 하니 마초는 1만의 군사들로 사례교위(종요)의 독군종사가 되어 곽원을 토벌했는데 날아온 화살에 맞자 화살을 부러뜨린 후 주머니로 자신의 다리를 감싼 채[9] 싸워 강대했던 곽원의 군사를 격파하고 곽원을 참수했다.

이후 조령으로 서주자사에 임명되고 그 뒤 간의대부에 임명되었다.

2.2. 중기 생애

조조는 형주를 징벌하려고 했지만, 마등과 관서의 세력들이 아직 관중에서 할거하고 있었으므로 또 장기를 보내 마등 등을 설득하여 부하들을 해산시키고 조정에 돌아오도록 하자 마등은 이것을 허락하였지만 여전히 다시 미적미적 하고 이전과 같은 행동을 하였으므로 장기는 그가 변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해서 여러 현에 문서를 보내 식량 등을 비축하도록 준비하도록 하고, 군수에게 교외까지 나가 맞이하도록 했다. 2천석 관리가 교외까지 마중을 나가니 마등은 어쩔 수 없이 동쪽으로 출발했다.[10]

그 뒤 조조가 표문을 올려 마등을 위위로 임명하고, 마초를 편장군으로 삼고 도정후에 봉해 마등의 부곡(部曲)을[11] 거느리게 했다. 마등이 받은 위위라는 직책은 삼공 바로 아래로 매우 높은 직책이다. 그러나 마초가 받은 편장군 벼슬은 명예직에 불과하다. 마등이 입조하게 되자 마초를 편장군으로 임명해 마등의 진영을 거느리게 했다. 또 마초의 동생 마휴를 봉거도위, 마휴의 동생 마철을 기도위로 삼고 그 가속들을 모두 업으로 이주시키니 오직 마초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12]

그러나 이것은 마등의 실수라고밖에 할 수 없다. 마등은 업에 이주함으로써 조조 체제에 순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양주에 남겨둔 자신의 기반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어차피 조조가 언젠가는 이 지역을 차지하려 들 테고 관중제장들이 이에 반발할 것은 필연적이었으며 관중제장 중 하나인 마초도 어쩔 수 없이 주변 제장들에게 공격받지 않으려면 조조와 싸우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즉 마초만 양주에 남겨둔 건 사실상 마초를 조조와 싸우도록 놔둔 셈이 되어 마초의 인생이 꼬이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본인 일족의 명을 재촉한 셈이 되었다. 업에 이주할거면 깔끔하게 양주의 본거지를 포기하고 확실히 장남 마초까지 이주를 시켜서 장로처럼 한 자리를 얻게하거나 아니면 걍 계속 양주에 있는것이 차라리 나았다.[13]

무엇보다 마초의 군대, 이민족 세력은 여러 부족의 연합체였기 때문에 상부에서 통제하는 중앙 집권 체제 국가의 군대와는 거리가 있었다. 양주에서 마씨 세력의 영향력이 크다지만 한중 침공으로 인해 다른 부족들의 의견은 공격으로 결론이 난 상황에서 마초 혼자 앉아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고, 이는 훗날 마초가 조조를 공격해 마등과 일가족이 살해당하는 비극의 계기로 작용한다.

유장의 경우 마등의 아들 마초에 이르러서는, 관계를 되돌리고 서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유장은 촉의 의(意)를 이으려는 뜻이 있었다. 왕상이 유장에게 고하여 말했다.
마초는 날래지만 어질지 못하여 얻는 것에 의로운 것을 보지 않으니, 만약에 이와 같이 그(마초)를 끌어들여 가까이 하시면 말미암아 호랑이를 길러 장차 스스로 근심을 남길 뿐입니다.
유장은 그 말을 따라 이에 길을 끊어 마초와 교류하지 않았다.[14]

한편, 주유는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후방 불안 요소로 마초와 한수를 언급했으며, 죽기 직전에 언급한 자신의 대전략인 천하이분지계에서 유비의 야심을 경계한 주유는 주된 동맹의 상대로 유비가 아닌 관서의 마초를 지목하며 그와 함께한다면 조조를 압박하고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15] 주유가 몸담고 있던 강동과 마초의 세력지였던 양주는 거의 천하의 끝과 끝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유가 그를 주된 동맹 대상으로 인식하며 계획에 첨가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미 관서의 마초는 당대의 관서군벌을 대표하는 최고의 제후로 여겨졌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2.1. 동관 전투

이후 조조는 한중정벌 계획을 기획했는데 한중 정벌 계획은 유장과 그 부하들이 경계를 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헌데 유장 외에도 또 다른 세력 또한 조조의 서진(西進)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으니, 다름 아닌 관서군벌들이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조조가 강남 정벌을 단행하기 위해 남하하기 직전이었던 건안 13년(208년), 관중의 제장 중 한 사람이었던 마등은 병력을 장남 마초에게 넘기고 업성으로 들어왔다. 더불어 아들 마초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여 량주에서 마등의 세력을 이어받도록 해 준다. 즉 조조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영향력 아래 들어간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조조는 보답으로 마등에게 위위(衛尉)라는 지위를 주었는데 구경(九卿)에 속하는 고위직이다. 대군이 강남으로 내려간 뒤 관서군이 준동할 것을 두려워한 조조가 마등을 조정으로 소환한 것이다. 본래도 하동에서 곽원을 상대로 싸울 때부터 조조와 친분을 다져놓기로 방침을 정한 데다, 위위라는 높은 벼슬에 혹한 마등은 식솔들을 데리고 조조의 비호 아래 들었다. 다만 관서의 군권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마초를 남겨 휘하 부대를 통솔케 한 것이다.

마등은 조조에게 귀부할 때에도 어느 정도는 억지로 귀부한 듯한 장면이 보이고, 온전히 귀부한 것도 아니고 마초를 남겨 양주에 있는 자기 세력을 이끌게 했다. 이건 조정과 조조 세력에서 인정을 받으면서도 양주의 자기 세력은 유지하고 싶었단 건데, 이게 양립하기 어려운 목표라는 게 문제였다.[16] 마초는 조정에 있는 아버지와 일족이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참 뜻인지, 양주에 있는 마씨 세력을 지켜내는 것이 목적인지 선택해야 했다. 결국은 둘 다 이루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건안 16년(211년) 3월, 조조 휘하에서 손꼽히는 부관들인 종요하후연이 하동을 거쳐 장로를 토벌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자 마초를 비롯한 관중의 제장들은 이것이 한중 정벌을 핑계 삼아 관서을 압박하기 위한 조치가 아닌가 의심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비단 관서 현지인들만의 것이 아니었는지, 조조의 속관으로 있던 고유(高柔)가 다음과 같은 진언을 올리기도 했다.
 
대군이 서쪽으로 출병하면 한수와 마초는 자신들을 칠 것이라고 의심하여 반드시 서로를 부추기며 군사를 움직일 것입니다. 마땅히 먼저 삼보三輔(=관중)의 사람들을 불러들여 평안케 해야 합니다. 삼보가 평정되면 한중은 격문 한 장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능히 평정할 수 있습니다.[17]
 
그러나 어째서인지 조조는 고유의 말을 무시했다.

이때 관서 제장들은 겉으로는 귀부했으나 내심은 믿을 수 없었다. 사례교위 종요는 3천 병을 청해 관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겉으로는 장로를 친다고 칭했으나 내심 실제로는 그를 위협하여 인질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위기 역시 고유와 같은 의견을 냈다.
서방의 제장들은 모두 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켰으므로 천하에 웅거할 뜻이 없으니 실로 눈 앞의 안락을 구할 뿐입니다. 지금 국가에서 이들을 후하게 대우해 작호를 더해주어 그 뜻을 이루게 해 준다면 중대한 사고가 없는 한 변고를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의당 그 후에 도모해야 합니다. 만약 군사를 일으켜 관중으로 들어가 장로를 토벌한다면 장로는 깊은 산에 있어 도로가 통하지 않을 것이고 저들이 필시 의심이 품을 것입니다. 한번 놀라서 동요하게 되면 땅이 험하고 무리들이 강성하니 그 위태로움은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순욱이 위기의 의견을 조조에게 보고했다. 조조는 처음에는 그 말을 옳게 여겼으나 종요가 스스로 자신의 임무를 관장해야 한다고 하여 마침내 종요의 의견에 따랐다.[18]

결국 211년, 종요가 이끄는 부대는 계획에 따라 관을 넘어 서쪽으로 출진했고, 이 시점을 기해 마초가 무리를 통솔하게 된 후 마침내 한수와 굳게 맹세하여 서로 응하고 한수, 후선, 정은, 이감, 성의, 양흥, 마완, 장횡, 양추 등 10명의 제장들이 일제히 거병하여 도합 10부로 함께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각 부곡에서 징집된 병사가 1만 명씩은 되어 연합군의 규모는 총 10만 명을 헤아리는 어마어마한 대군이었다.[19] 종요와 하후연이 서쪽으로 기어이 출진하고 나자 그들은 더 이상 군사적 위협을 참지 않겠다는 듯 군사를 연합해 조조가 당황하게 만들 대군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들은 위수(渭水) 북단을 단숨에 가로질러 관중 지역 최고의 요새인 장안성을 그대로 통과, 그 동쪽에 있는 동관(潼關)을 점거하고 조조군과 대치했다. 이들은 하수, 동수 일대를 점거하고 진영을 벌여 세웠다. 사서에서는 군벌들의 총 병력이 10만이라고 적고 있으며 액면 그대로 믿지 않더라도 6~7만 이상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0]

당초, 한수가 서쪽에서 장맹을 토벌할 때, 염행에게 옛 영채를 지키도록 하였고, 마초 등과 결탁하여 모반할 때, 마초가 한수를 도독으로 삼았다. 마초는 한수에게 "예전에 사례교위 종요가 저 마초로 하여금 장군을 취하도록 하였으니, 관동인은 다시 믿을 게 못 됩니다. 지금 저 마초는 부친을 버리고 장군을 부친으로 삼으려 하니, 장군께서도 자식을 버리고 마초를 자식으로 삼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서로 친분관계를 요청했다. 마초의 이러한 발언은 역으로 업에 있는 마등과 일족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의견도 있다. 마등과의 표면적인 관계를 끊어 자신과 마등은 이제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 일족이 연좌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 후대의 종회가 난을 일으키자 '종회는 책략에 의지하여 뜻 밖의 것을 지키기는 어려우므로 중요한 직책에 위임될 수 없습니다.' 라고 동생 종회와 선을 그어 말한 형 종육의 자손들은 연좌를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 본다면 일리는 있는 소리. 염행이 마초와 연합하지 말라고 한수에게 간하였으나 한수는 "지금 제장이 공모하지 않았음에도 뜻을 같이 하고 있는데, 이는 타고난 수명과도 닮은 것이오."라며 그리고는 동쪽의 화음으로 갔다.[21]

이렇게 한수, 마초가 봉기한 때, 홍농 및 빙익에서는 많은 현읍이 거병하여 그들에게 호응하였다.[22] 하동은 이들에게 인접한 곳이었으나, 주민 가운데 다른 마음을 품은 자가 없었다. 유웅명은 마초 등이 모반하였을 때, 마초를 따르지 않아, 마초가 그를 격파했고 왕랑전에 따르면 나중에 마초가 반란을 일으켜 가홍을 체포한 다음에, 그를 화음으로 데려가서는 포고문을 만들게 했는데, 가홍은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23]

이에 조조는 강릉에서 돌아온 뒤 대기 중이던 조인을 안서장군(安西將軍)에 임명하여 선발대로 출진시키되, 후속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절대로 마초와 함부로 교전하지 말고 수비에만 힘쓰라는 엄명을 내렸다. 아울러 자신의 아들이자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으로 있던 조비로 하여금 업성을 지키게 하고, 분무장군(奮武將軍) 정욱을 보좌역으로 남겼다. 그 외 좌호군(左護軍) 서선(徐宣)에게는 군무를, 거부장사(居府長史) 국연(國淵)에게는 행정을 맡겼다. 이와 같이 후방의 인사를 마무리한 조조는 가후를 종군 참모로 삼고 장합, 서황, 우금, 허저, 주령 등 쟁쟁한 장수들을 참전시켜 동관으로 출진했다.
 
이 당시 관서군의 기세는 무서운 수준이었다. 뒷날 자치통감에 주를 단 호삼성은
이때 관서 지역의 군대는 (천하에서) 가장 날카롭고 강하였다

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동등한 제장들의 연합으로 형성된 군이라 효율적이고 통일된 지휘 체계가 마련되지 못했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조조는 바로 이러한 장단점에 착안하여 정면 대결을 피하고 적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릴 계책을 세워나갔다.
 
211년 7월 조조는 본대를 이끌고 동관으로 향했다. 배송지 주 위서의 기록에는 이민족과의 실전으로 단련된 관서병의 강함을 알고 있는 장수들이 "관서의 병사들은 긴 창(모)를 쓰는 데 익숙하니 선봉에 서는 군사들을 잘 선발하지 않으면 당해낼 수 없습니다." 며 관서군이 창술에 빼어난 병사들이 많다는 점을 우려하여 선봉군을 걱정했지만 조조는 이에 대해 "적이 비록 창에 익숙하다지만 장차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찌를 수도 없게 하겠다"며 오히려 호기롭게 받아 넘겼다. 애초에 그는 하루도 끊이지 않은 전투로 단련된 경험 많은 관서군을 상대로 회전을 치를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는 별동대를 파견해 적을 고립무원의 처지로 떨어뜨릴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는데, 부장 서황은 그런 조조의 생각과 꼭 들어맞는 대책을 제시했다. 조조가 동관에 도착한 뒤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 서황을 불러 물었다. 이에 서황이 말했다.
 
공의 성대한 군세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적이 포판(蒲阪)을 수비하지 않으니, 그들이 무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저에게 정예병을 빌려주시면 포판진蒲坂津을 건너 병력을 배치한 뒤 그들의 내부를 끊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능히 적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24]
 
조조는 그 말을 따랐다. 이후 조조 자신은 관서군과의 대치를 유지하면서 서황주령에게 4,000명의 병사를 주어 몰래 강을 건너게 했는데 지금의 산서 성 영제현 황하 입구인 포판을 건너 황하의 서쪽을 점거했다.[25] 관서군은 나름대로 신속히 대응하고자 했지만 서황이 그리 만만한 장수가 아니었다. 한밤중에 참호와 목책이 미처 완성되지 못했을 때 양흥이 밤중에 보기 5천여 명을 이끌고 서황에게 기습을 가해왔지만, 서황은 침착하게 대처하여 오히려 양흥을 격퇴시켰다. 이로써 조조군은 북안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 강물을 거쳐 서쪽으로 나아가면 관서군을 앞뒤에서 협공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조조군의 동향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던 마초는 즉시 조조가 어떤 주전략을 세우고 있는지를 직감했다. 그는 한수를 찾아가 위수 북안에 방어선을 마련하고 조조군의 도하를 막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조조군은 20일도 되지 않아 군량 부족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해할 수 없게도 한수는 마초의 말을 무시해버렸다.[26]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그는 되려 조조군의 도하를 방치하자는 황당한 의견을 꺼내놓았다. 한수는 조조군이 강을 건너오면 그대로 군사를 몰아 쓸어버리면 될 것이라면서 전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총사령이라고 해도 당장 서로의 발언권이 비등한 상황이라 한수나 여타 제장들의 동의 없이는 마초 혼자서 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연하지만 결국 옳게 본 사람은 마초였다. 어떤 경로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날 마초와 한수가 나눈 대화의 내용이 조조에게 입수되었는데, 마초가 이미 자신의 주전략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깨뜨릴 대안을 내놓았음을 알게 된 조조는 아찔함 반 안심 반으로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마초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도 묻힐 땅이 없겠구나![27]
 
윤 8월, 관서군을 포위하여 압박하는 전략의 마지막 단계가 실행되었다. 일부 병력만 남기고서 조조가 인솔하는 대군이 황하를 도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조조는 병력과 물자를 먼저 도하하게 하고 자신은 허저와 그 휘하의 100여 명의 호위병을 곁에 둔 채 후미에 남았다. 그러나 미처 도하 작전이 다 끝나기도 전에 조조군의 움직임을 포착한 마초의 부대가 불시에 용맹하게 돌격하여 들이닥침으로써 그 자리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조조가 동관에서 북쪽으로 강을 건너려 했는데 미처 건너기 전에 마초가 배를 향해 달려와 급박하게 싸웠고, 조조가 장차 황하를 건너려 하여 선두 부대가 막건널 때 마초 등이 돌연 당도하여 날카롭게 돌격했는데 조조는 호상(胡床)에 앉아 일어서지 않았다.

장합 등이 사태가 급박한 것을 보고 함께 조조를 이끌어 배에 타게 했다. 이때 허저전에 따르면 마초는 보병과 기병 만여 명을 이끌고 조조군을 추격하여 왔는데 (휘하부대에게 마초가 명령하여)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허저는 조조에게 적군이 너무 많이 오고, 지금 병사들은 이미 다 건넜으니 떠나야만 한다고 말하고는 조조를 부축하여 배에 태웠다. 적군은 더욱 빨리 추격하였고 군사들은 배에 오르려는 자들을 죽이고 왼손으로 말 안장을 들어 조조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사공에게 빨리 노를 저으라 재촉했는데, 설상가상으로 노를 저어야 할 사공이 그만 마초군의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이에 다급해진 허저는 말안장을 들어 조조를 가리는 방패로 삼고서는 반대쪽 손으로 직접 노를 저어 가까스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진수는 허저전에서 "이날 허저가 없었다면 (조조는) 큰 위태로움에 빠졌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헌데 당시 조조의 도주를 도운 사람은 허저만이 아니었다. 조조군의 교위로 있던 정비(丁斐)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마초군의 추격이 급박한 것을 보고는 그의 관리하에 있던 소와 말을 한꺼번에 들판에 풀어놓았다. 이에 마초군 일부가 추격을 놓아둔 채 가축을 포획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쨌건 이러한 허저의 노력과 정비의 기지로 인해 조조는 무사히 강 반대편에 진지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28] 이에 제장들이 군이 패하는 것을 보았는 데다 또한 조조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해 모두 황망하고 두려워했는데, 조조를 만나보고는 슬퍼하고 또 기뻐하며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조조가 크게 웃으며 "오늘 하마터면 좀도둑들에게 곤란을 당할 뻔 했구나!"라고 말했다.[29]

결국 마초는 조조의 전략을 파악하고 또 이를 파훼하기 위해 움직였지만, 명목상 총사령관의 직책임에도 연합군이라는 군 체계의 특성과 동료 제장들의 의견 차이로 인해 전황이 뒤집어지는 꼴을 속절없이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조조는 이후 황하를 따라 용도[30]를 건설하며 차근차근 남하한다. 마초군은 물러나 위수가 황하로 유입되는 입구(渭口)를 지켰다. 조조가 이미 도하에 성공하여 하서 일대를 장악한 이상 동관 방면에서의 교전은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이래저래 전전긍긍하는 적군의 모습을 지켜보게 된 조조는 이제 얼마든지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입장에 섰다. 이에 조조가 속이는 군사(疑兵)를 여럿 두고는, 배에 군사들을 태워 몰래 위수로 들어가 부교를 만들고, 밤중에 군사를 나누어 위수 남쪽에 둔영을 세웠다.

이렇게 관서군과 직접 대적하는 위치에 서는 것은 본래 백병전에 능한 관서군을 상대로 정면 회전은 피한다는 조조의 방침에 비추어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었을 테지만, 당시 조조에게는 참모 누규의 책략에 따라 준비한 대비책이 있었다. 강 남안이 모래밭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누규는 당시 날씨가 점차 추워지는 절기에 접어들었음에 착안, 모래로 벽을 쌓은 뒤 물을 뿌려 얼림으로써 임시로 방벽을 구축하는 책략을 내놓았던 것이다.[31] 조조가 탐색전을 겸해 파견했던 소수 부대는 도하하는 족족 마초의 기병대에 의해 격퇴당했지만, 밤을 틈타 일제히 결행한 대규모 도하와 누규의 책략을 이용한 성채 급조에 대해서는 마초는 물론이고 관중 제장들 중 누구도 방비하지 못했다. 물론 마초라고 조조가 이러는 것을 모를 리는 없어서 조조가 이렇게 나온 후에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밤중에 둔영을 공격했으나 조조는 급조한 성채와 복병으로 이를 격파했다.

마침내 조조군이 위수를 도하하자 마초를 비롯한 관서군벌들은 가능한 한 피해를 최소화한 채 근거지인 양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짜내야만 했다. 이에 그들이 어렵사리 꺼내든 패는 다름아닌 화친 요청이었다. 마초군은 한편으로는 자주 싸움을 걸고 한편으로는 연차적으로 땅을 떼어주며 화친할 것을 제안했다. 사실상 전의를 잃지 않은 유일한 제장인 마초는 몇 차례에 걸쳐 싸움을 걸었지만, 조조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응전을 거부했다. 부동의 1인자인 조조와 달리 군벌연합의 수장으로서 서로 이해가 대립되던 군벌들을 무마시키고 조정해야 했던 마초 입장에서는 이도저도 아닌 장기전만큼 위험한 것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관중 제장들은 화평 조약을 맺고 화친을 하자고 합의한 의사를 담은 편지를 조조에게 전했다. 마초 또한 달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관중 제장들의 영토를 보장할 것, 그리고 인질을 교환할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최소한 자신들을 따랐던 이민족들과 본인의 일족들의 안위만은 보장하기 위해서 짜낸 책략이었으나, 조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 조조와 휘하제장, 참모들은 이를 그냥 무시할 작정이었다. 손해를 볼 생각 따위 하지도 않았다. 특히 종군 참모로 동행한 가후의 책략은 교묘하기 짝이 없었다. 마초와 위수 남쪽에서 싸우는 사이 그는 일단 겉으로는 휴전을 받아들이는 척 넘어가되, 뒤로는 공작을 펼쳐 관중 제장들을 이간시키자고 건의했다. 조조 역시 가후의 책모를 받아들여 "한수와 마초의 동맹을 풀어 버리겠소." 라고 말하였다.[32] 당시 관서군벌을 이끄는 건 한수와 마초였다. 이들 두 사람을 이간시킨다면 나머지 떨거지들이야 제풀에 무너지고 쓰러질 게 뻔했다. 조조는 특히 한수 쪽에 의심의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하여 화평 조약을 맺을 때 양측의 수장이 직접 논의 자리를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한수와 동석할 자리를 만드는 것에서 이간책을 시작하고자 한 셈이다.
 
첫 번째 회담 자리에서 조조는 한수에게 유독 친근함을 과시했다. 조조는 한수의 부친과 같은 해에 효렴이 되었고, 또한 한수와 같은 시기의 동년배였다. 이에 말을 마주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군사에 관한 일은 말하지 않고 다만 수도에서 있었던 옛 일만을 얘기하며 손뼉을 치며 환담했다. 대화를 끝낸 뒤 마초 등이 한수에게 물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마초는 의심하여 한수를 추궁했지만, 실상 조조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기는 한수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회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조조는 5,000명의 철기(鐵騎)대를 이끌고 나와 호인들이 앞뒤로 크게 구경했다. 이때 철기 5천을 늘여 세워 10중의 진을 만드니 광채가 해처럼 빛나 적들이 더욱 놀라고 두려워했다. 조조는 "그대들은 조공을 보고 싶은가? 나는 눈이 네 개 달린 것도 아니고, 입이 두 개 달린 것도 아니다. 그대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되 다만 지모가 많을 뿐이다!"라고 외치며 위풍당당함을 과시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휴전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으니 마초 등 여타 제장들이 점차 한수가 내통 내지는 배신을 꾸미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도 당연했다.[33]

한편 허저전에는 위의 기사와는 다른 양상의 회담이 기록되어 있다. 
 
조조가 한수, 마초 등과 회담을 가질 때 아무도 따르지 못하게 하고 단지 허저 한 사람만 수행하도록 했다. 마초는 자신의 용력에 의지하여 조조를 죽이려 했으나, 평소 허저의 용맹함을 듣고 있었기에 조조를 수행하는 기병이 허저임을 의심하여 물었다.

조공에게 호후(虎侯)가 있다 하던데, 어디에 있소이까?"

조조가 고개를 돌려 허저를 가리키자 허저는 눈을 부릅뜨고 마초를 노려보았다. 이에 마초 등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곧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마초 역시 꾸미고 있는 바가 있었다. 조조가 관중의 군벌들을 이간시키려 했다면, 마초는 대담하게도 회담 중에 자신의 강력한 용력에 의지해 조조를 사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삼국지 촉서 마초전에도 조조는 한수, 마초와 더불어 홀로 말을 타고 대화했는데 마초는 자신의 힘이 강함에 의지해 돌진하여 조조를 붙잡으려 은밀히 꾀했으나 조조 좌우의 장수 허저가 눈을 부릅뜨고 (경계하면서) 노려보았고 이에 마초는 감히 실행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튼 조조가 일부러 한수와의 거짓 회담을 한 전후로 마초까지 참여하는 다른 회담이 몇차례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명색히 마초는 관서군벌을 이끄는 위치였으니만큼 조조가 마초를 무작정 배제하기는 어려웠을터이다. 또, 무작정 마초를 배제한다면 오히려 마초가 조조의 획책을 의심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고 이렇게 하는 편이 한수가 조조와 혼자 대화할때 의심하기 만들기도 좋았을 것이다.[34]

어느 쪽이든 간에, 처음부터 회담을 이간계의 씨앗으로 뿌리려 의도한 조조로서는 만족스러운 전개였다. 뒷날, 조조가 또 한수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여러 곳의 글자를 첨삭해 마치 한수가 고친 것처럼 보이게 하니, 이로 인해 마초 등은 결정적으로 한수가 조조와 내통 중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마초와 한수를 이간시키니 다시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게 되었고 군이 대패하는 원인이 되었다.[35] 다수의 제장들에 의해 운영되는 관서군의 지휘 체계상 이러한 의심은 연합 자체를 와해시킬 수 있는 치명타였음에 틀림없다. 이에 조조가 날짜를 정해 어울려 싸웠다. 먼저 가벼운 몸차림을 한 병사로 싸움을 걸고 싸움이 매우 오래 지속된 후 용맹스러운 기병을 풀어 양쪽에서 공격하여 대파하고 성의, 이감 등을 참수했다. 조조는 관중제장들에게 회전을 건 것인데 이런 회전에서는 기병의 수와 질이 싸움의 승패를 결정하는 법이다. 조조는 최소 5천명의 철갑을 입은 정예기병을 가지고 있었고 호인들 앞에서 보여주기만 한 철기가 이 정도니 그 외 기병들은 더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호인들이 이를 두려워했던 점을 봤을때 아무리 기병 전력을 양성하기 편한 관중의 이민족들이라도 두려워할 만큼의 기병의 질과 양을 조조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주동자격인 한수, 마초 등은 양주로 도주하고 양추는 안정으로 달아나니 관중이 평정되었다.

그러나 마초와의 오랜 싸움으로 조조 역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종요의 군사가 처음 진격한 이래로 관서가 그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의심해 들고 일어나 조조가 친히 정벌한 뒤에야 겨우 이를 평정할 수 있었고 전사자도 만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36] 전사자만 만 명 단위였으니 포로나 부상자들은 헤아릴수 없었을 것이다.

조조는 관중제장들이 산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대신 한꺼번에 차례대로 모여준 덕에 일거에 적군을 섬멸할 수 있었다는 말로 전장을 마무리했다.

삼국지연의를 비롯 후대의 묘사에서는 마초가 허저, 장비 등의 맹장들과 막상막하로 무용을 펼치되 지략은 휘하장수 방덕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기록을 살펴보면 마초는 오히려 개인의 무용도 무용이지만 그보다 야전에서의 지휘능력과 상황 판단력에 더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조조마저도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는 기록과 도하 작전 직전에 조조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 책략을 깨뜨리기 위해 치렀던 일전에서는 확실히 그의 비범한 면모가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관서군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게 불가했고 근본적으로는 각기 동등한 권한만을 갖춘 여러 제장들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바로 이것이 그와 조조의 결정적인 입장 차이였고, 동시에 승패가 극명하게 나뉜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자치통감에 음주를 단 호삼성은 관서군을 들어 천하에서 가장 강한 부대라고 평가했으나 동시에 이 마디를 덧붙였는데, 그 내용이야 말로 관서군벌들이 패배한 근본 원인이라고 할 만하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관서군이) 조조에게 격파당한 것은, 법제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농서에서 이민족들과 주민들의 강력한 지지와 인심을 얻고 있었던 마초를 제외한 관중의 제장들은 전부 재기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양추는 동관에서 서쪽으로 달아나 안정(安定)에 숨었으나 이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쫓아온 조조군에게 투항했고, 남전(藍田)으로 간 양흥은 한중 정벌을 중지하고 돌아온 하후연에게 토벌당했다. 그는 어찌어찌 부성(鄜城)까지는 달아났지만 결국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 외 한수나 마초를 따라 멀리 양주까지 달아난 인물이 몇몇 있기는 했으나 그들도 거의 무사하지는 못했다. 특히 마초와 더불어 관서군벌의 거두로 손꼽히던 한수는 금성으로 달아났는데 몇 년 지나지 않아 하후연을 상대로 마초와 산발적 연합하던 시절 버릇을 못 버리고 똑같은 짓을 하다가 대차게 깨지고 부하들에 의해 살해당했다.[37] 그나마 장로에게 도망친 인물들은 나중에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할 때 같이 항복하면서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211년 10월, 마초는 달아나 여러 융족들에 의지하려 했고 마초를 쫒아 북상해 양추의 항복을 받아낸 조조는 이를 추격해 안정에 이르렀으나 때마침 조조 역시 북방에 일이 생겨 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때 이 지역의 속관인 양부가 조조를 설득하며 마초는 한신, 영포의 용맹을 갖추고 강족, 호족의 마음을 심히 얻고 있으니 만약 대군이 돌아가며 이를 엄히 방비하지 않는다면 농상의 여러 군들은 국가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렸다, 물론 조조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빠른 시간에 군대를 귀환시켰으므로 수비는 주도면밀하지 못했다.[38]

이런 기록을 보면 실제로 조조 또한 이번 전쟁에서 자신을 고전케 한 인물이 오직 마초뿐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고, 마초가 여타 관중 제장들과는 달리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만만히 볼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양부의 건의가 근거 없는 우려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조조는 양부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는 있으면서도 그의 건의를 완전히 수용하지는 못했다. 당장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후방에서 전은(田銀)과 소백(蘇伯)이라는 자들이 주도한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또한 멀리 강동의 손권은 유수(濡須) 지역에 보루를 건설하여 군대를 주둔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북진을 계획하고 있었다. 덧붙여서 오랜 숙적도 힘을 기르고 있으니 이미 대패해 달아난 관서군의 동향보다는 동쪽의 일이 더 급했다.

조조는 하후연을 남겨 마초의 잔존세력을 토벌하게 했다.[39] 이렇게 조조 휘하 최고의 숙장 중 한 사람인 하후연이 장안에 남아 주둔하고, 서황과 장합 같은 일급 장수들이 하후연의 부장이 되어 역시 서부 전선에 주둔하게 된 것을 보면 조조가 마초에 대해 아무런 방지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양부전에서 이러한 조치들이 그리 주도면밀한 것이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조조가 마초에 대해 설마 다시 그가 재기해 근심거리가 되리라고는 생각치 못하고 방심한 것 또한 사실인 듯 싶다. 다른 관중 제장들은 몰락을 면치 못했으니까. 그러나 마초는 이때부터 몰락한 그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2.2.2. 기성 전투

이렇게 도주에 성공한 마초는 한양(천수) 상규(上邽)를 점거하면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비록 빈털털이가 되어 돌아온 양주였지만 어찌 됐건 그의 명망은 아직 주효했던 듯하다. 상규현의 현령 염온은 본래 조조 측 인사로서 마초를 받아줄 의향이 전혀 없었지만, 현내 사람들 중 절대다수가 오히려 현령의 뜻을 거스르고 마초에게 힘을 보태고자 했으므로 그는 공직을 포기한 채 달아나야 했다. 아직도 마초의 영향력이 죽지 않았음을 확인한 염온은 장차 관중 지역이 다시금 전란에 휩싸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기성(冀城)으로 향했다.[40]

한편 12월 중앙으로 돌아온 조조는 212년 5월, 마초의 아버지 마등의 삼족을 멸했으며 한수의 자손들도 죽였다. 아버지와 두 동생을 비롯한 마초의 일족 200여 명은 모두 이때 죽어 마초에겐 사촌동생 마대와 아내인 양씨, 아들들과 몇몇 일족만 남게 된다.

조조는 자신의 군사활동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자고 한 자의 가속을 죽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의 가속은 살려두는 이간책을 두어 본보기로 삼았다. 대표적인 예가 염행으로 조조는 염행이 한수를 말린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한수의 자손들만 죽이고 염행에게는 "그대의 부모님은 감옥에 봉양할 공간도 없고 관청에서도 이제 못 모시는데 이제 어찌되려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니 이런 조조의 이간책에 염행은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를 안 한수를 염행을 회유하기 위해 그를 사위로 삼지만 조조가 염행을 의심하자 더욱 초조해진 염행은 결국 반기를 들어 밤중에 한수를 급습하지만, 패배하자 일가를 이끌고 조조에게 의탁하고 만다.

이렇듯 조조 쪽에 우호적인 장수였기 때문에 그의 부모들은 조조에게 붙잡힌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마초와 한수 등은 이들의 수괴였고 조조는 아직 토벌되지도 않은 이런 자들에게는 전쟁 중에 그들이 먼저 화해의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선 그냥 무시하거나 이간계를 사용했고 이들을 격파한 이후에도 굳이 염행의 사례처럼 회유책을 쓰지도 않고 마등, 한수 일족을 그냥 몰살시켰다, 조조는 이들의 가솔을 죽여 자신에게 대항할 마음을 품은 자와 그렇지 않은 소극적인 자의 차이를 분명히 했다.

이로 인해 조조에게 더욱 이를 갈게 된 마초는 필사적으로 재기를 시도하여 관중 제장들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다시 세력을 정비하는 데 성공했다. 막강한 군벌들이 대부분 죽거나 투항했지만 호족들과 이민족들까지 조조에게 복종하는 건 아니었다. 거듭된 전란으로 피폐해진 서북지역의 민심은 그곳을 통제하던 군벌들이 사라지자 극히 유동적으로 변했고 조조의 영토라기보단 분쟁지역에 가까웠으며 오히려 이 지역 민심을 장악한 마초의 땅에 가까웠다. 그 예로 농상의 군현들은 거의 모두 그에게 호응했다. 이후 마초는 다시 관중 공략을 시도하는데 거의 같은 시기에 이뤄진 유비의 익주 공략과 마초의 관중 공략은 전혀 별개의 전쟁이나, 결과에 이르러 후자가 전자에게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마초는 융족(강, 저족)의 우두머리들을 인솔하고 농상의 군현을 공격하였다.[41] 이렇게 조조에게 붙은 고을들을 공격해 평정했고 마초가 강족과 호족의 군대를 규합하자 그 위명에 농서의 거의 모든 고을들이 바람에 쓸리듯 마초에게 호응해 왔다. 현지의 조조군이 뭘 어쩔 틈도 없이 양주의 거의 전 지역이 마초의 발 아래로 들어간 것이다. 조조가 임명한 양주자사 위강과 앞서 마초의 재기를 우려하며 조조의 주의를 환기시켰던 참군 양부가 지키는 오직 한 곳, 기성만은 주와 군의 관리들을 끼고 고수하며 성문을 닫고 마초에게 맞섰다. 마초는 농우의 병사들을 모두 겸병하였으므로, 심지어는 마초와 별다른 교류가 없던 장로조차 또 대장 양앙을 파견하여 그를 도왔다. 모두 만여 명이 성을 공격했다. 양부는 나라의 사대부와 종족 자제 중 전쟁에 참가한 천여 명을 인솔하고, 종제 양악에게 성벽 위에서 초승달 모양의 진영을 만들도록 하고 마초와 전투를 했다. 정월부터 8월에 이르기까지 저항하며 지켰고 거의 8개월을 버텨냈다. 그러나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42]

그들의 항전이 그리 오래갈 수는 없었다. 상규에서 마초를 피해 기성으로 왔던 염온은 몰래 포위망을 빠져나가 장안성에 주둔하고 있는 하후연에게 지원을 요청하려 하였다. 적의 포위는 몇 겹에 이르렀으나, 염온은 밤중에 물 속에 숨어 탈출하였다. 다음 날, 마초군은 염온이 포위를 벗어난 흔적을 발견하고, 사람을 풀어 그를 쫓게 하여, 현친현의 경계에서 염온을 발견하여 이를 붙잡아 마초에게로 끌고 돌아왔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기성을 빠져나가려 했던 것인지 짐작한 마초는 그 포승을 풀어주었고 다음과 같이 그를 회유했다.
이제 승패의 향방이 보이겠지. 족하는 고립된 성의 구원을 요청하고자 하였다가 우리 손에 붙잡혔는데, 어떠한가. 혹여 내 말에 따르고자 한다면 곧 성에 돌아가 올 원군이 없다고 말하도록 하라. 이리 행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대를 죽일 것이다

마초는 이렇게 그에게 구원병이 오지 않으리라고 성 안에 통보하라 지시했다. 이에 염온은 위협에 굴복한 듯 순순히 성 앞으로 가서 고할 말이 있다 외쳤으나, 그 뒤에 나온 말은 마초를 격분케 만들었다.
대군이 3일 안에 도달할 것이니 모두들 힘을 내시오!

성중에서는 이를 보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외쳤다. 절망을 사기로 바꾼 기성의 군사는 기세등등하게 마초군과 맞섰다. 딱히 승패의 결과가 바뀔 만큼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 하나, 어쨌든 마초가 단숨에 기성을 점령하기란 어렵게 됐다. 마초는 노하여 그를 책망하면서 "족하는 목숨을 어찌 이리 가벼이 여기는 것인가!"라고 화를 냈으나 사실 마초는 협박했던 것과는 달리 당장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몇 차례에 걸쳐 염온을 회유하여 자신의 부하로 만들고자 했다. 여러모로 연의에서의 화끈하고 성미가 급한 모습과 달리 정사에서 마초가 보여준 냉철한 면모를 잘 보여주는 일화인데 마초가 염온을 나름대로 존중하고 회유하려 했던 것은 호칭에서도 보인다. 마초는 염온에 대해서 '족하'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지방관 등 중급 관료나 딱히 작위나 관직은 없지만 명문가 소속의 사람을 부르는 말로 나름대로 마초가 염온을 존중해 준 것이다.

허나 염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마초는 장기간 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치 못하였기에 그를 회유하여 뜻을 바꿀 수 있을까 기대하였다. 이에 또 다시 염온에게 성중의 연고자 가운데, 자신에게 동조하려 하는 자가 있는지 없는지 물었으나 염온은 또한 답하지 않았다. 결국 엄히 그를 책하였으나, 염온은 "장부가 군주께 사관함에 이르러서는 죽어도 두 마음을 갖지 않는다 하오. 헌데 경은 장자에게 의롭지 못한 말을 하게끔 하려는 구려. 내 어찌 삶을 탐하는 자이겠소?"라고 말했다. 그러나 염온이 끝까지 마초를 따를 기색을 보이지 않자 이에 이르러 마초도 어쩔 수 없었는지 결국 마초는 그를 죽였다. 미관말직에 머물렀으되 의기만은 높았던 한 의사(義士)의 숙연한 최후였다.[43]

당연한 일이겠지만, 염온의 발언과 죽음이 기성의 전황을 크게 뒤바꾼 것은 또 아니었다. 3일의 시간이란 실상 염온이 어떻게든 기성의 군민을 분발시키기 위해 내놓은 거짓말에 불과했고, 하후연이 마초가 전격전을 벌이며 관중 지역의 수복을 꾀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은 꽤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던 것이다. 마초의 공격이 드높아지자 성안의 사람들은 배고픔에 시달렸다, 자사 위강은 원래 인자한 사람이었는데, 관리들과 백성들이 상하는 것이 두려워 마초와 화해하려 하였다. 건안(196년~220년) 연간에, 참군사가 된 조앙이 기성에 살고 있었는데 조앙은 그 의견에 반대하였다. 집에 돌아와 부인인 왕이에게도 말했는데 왕이는 스스로 궁농수(弓籠手)를 몸에 걸쳐 활을 쏘아 마초군에 대항해 싸웠고 남편 조앙 옆에서 싸우면서 귀걸이나 반지들을 조앙의 병사들에게 상으로 주었던 여장부였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주에게는 그를 충고하는 신하가 있어, 신하는 위급할 때에 독단이 인정되고 있습니다. 독단이 꼭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후연의 구원이 근처까지 와있지 않다고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병사들을 독려하고 높은 공을 위하여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모두 절개를 완수하여 죽읍시다. 항복은 안 됩니다.

조앙이 돌아가 위강을 다시 설득하려 했지만, 이미 위강은 마초와의 화해를 도모하고 있었다.[44] 이미 자사와 태수는 낯빛을 잃었고, 마초에게 항복하자고 하는 이가 있기 시작했다. 양부는 눈물을 흘리며 "저 양부 등은 부모 형제를 이끌고 대의로써 서로 면려하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두 마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항복은 성공할 공업을 버리고 의롭지 못한 이름 속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저 양부는 죽음으로써 이 성을 지킬 것입니다."라며 말하며 통곡을 했다. 결국 자사, 태수는 사람을 파견하여 화의를 요청하고, 성문을 열고 마초를 맞이하였다. 마초는 성 안으로 들어왔으며, 기성에서 양악을 구금하고, 양앙을 시켜 자사, 태수를 죽이도록 했다. 양부는 마초의 호의로 살아남았는데 관청을 차렸으니 군무를 살피고 사무를 관장할 행정관이 필요해 남겨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조가 임명한 다른 지방관을 죽일때 극렬 친조조파 속관인 양부를 죽이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45]

어쨌거나 213년, 마초는 여러 융족들을 이끌고 다시 일어나 기성을 제외한 농상의 군현들을 모두 손에 넣었다. 이후 공성전으로 기성을 장악한 마초는 정서장군(征西將軍) 병주목(幷州牧) 독양주군사(督涼州軍事)를 자칭하며 자신의 재기를 요란하게 선전했다. 그리고 이제 조조 휘하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인 하후연과 대결을 펼치게 된 것이다. 하후연은 본래 조조 휘하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특히 신속한 용병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 때문에 관도대전 당시에는 최전선에 대한 보급 업무를 총괄했고, 하북 원정 때는 '엿새에 천 리를 간다'는 명성이 돌 정도로 화려한 용병술을 구사하기도 했다. 강동 정벌에 나선 조조가 굳이 그에게 장안성을 맡긴 이유 또한 하후연이라면 충분히 관중의 소요를 제어할 수 있으리라는 신임에서 기인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번에 그가 상대해야 할 적수는 저족 반란군이나 여타 관중 제장의 잔당이 아닌 마초였다. 하후연과 마찬가지로 기병대 운용에 능숙하고 속전속결형 전법을 선호하는 무장인 그는 앉아서 공격을 기다릴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장안에 있던 하후연은 조조의 재가를 받느라 제때 원군을 대지 못했고 원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다음이었다. 마초는 농성전 대신 야전을 택했고 기성 밖 200리 지점에서 조조군에서도 손꼽히는 명장 하후연의 군세를 격파했다.

자세한 전황을 말하면 마초가 양주자사 위강을 양주 천수군 기현에서 포위하자 하후연이 위강을 구원하려 했는데, 도착하기 전에 위강이 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초는 기성에서 2백여 리 떨어진 곳까지 신속하게 진격하여 하후연과 맞서 싸웠는데 마초는 단숨에 요격전을 벌여 자신의 방식대로 전투를 끌고 갔다. 아직 기성이 함락당했음을 알지 못했던 하후연에게 이것은 불의의 기습이나 다름없었다. 뛰어난 장수답게 일격에 궤멸당하는 것을 피하고 교전 태세에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지만, 군이 불리했고 전장의 주도권은 계속 마초에게 있었다. 결국 마초에게 질질 끌려다니던 하후연은 견저가 모반하고 저족이 군사를 이끌고 마초에게 협력하려 한다는 급보를 접하자 말머리를 돌려 퇴각했다. 하후연의 퇴각으로 한동안 농서 지역에서 마초를 견제할 만한 군세는 사라지게 된다.[46] 기성을 비롯한 관중 일대의 군현이 마초의 손에 넘어가고, 이를 저지하러 온 하후연까지 패퇴당한 이상 양주는 이제 온전히 마초의 영토였다.

그러나 전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형태로 터진 반격은 이 일대의 전황을 급격하게 뒤바꿔 놓았다.

왕이는 남편에게 죽은 상관인 위강을 위해 복수하도록 권했다. 마초는 조앙의 적자 조월을 인질로 취하였는데 마초는 조앙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고 싶었지만 아직 크게 신뢰하지 못하였다. 마초가 양주 관리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인데. 왕이는 자신의 절개가 높다는 말을 듣고 자신을 초대한 마초의 아내 양씨의 환심을 사 이를 이용해 마침내 조앙도 마초의 신임을 받게 했다. 왕이는 양씨를 설득하여 조앙이 마초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려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나라가 안정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난리를 평정하는 것은 사람을 얻는 데 있습니다. 양주의 군사와 말이야 말로 중원의 나라와 싸우는 데 딱입니다.

마초의 처 양씨는 깊게 감동하였으며, 양씨는 왕이를 신뢰하게 되었고 중요한 일에 대해서 왕이를 불러 상의하고 결정하곤 했다. 조앙이 마초의 신뢰를 받게 된 것과 모두 공을 세우고 화를 면한 것은 왕이의 노력 때문이었다.[47]

한편 살아남았던 양부는 마음속으로 마초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적합한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다 양부의 아내가 갑작스럽게 죽어 장례를 치러야 할 상황이 됐다. 이를 빌미로 기성을 잠시 떠날 수 있게 된 양부는 역성(歷城)을 방문하여 강사를 만났다. 강서는 양부의 고종사촌 형으로 역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양부는 어렸을 때 강서의 집에서 성장하였는데, 강서의 어머니와 강서를 만났을 때 이전에 기성에서 발생한 일을 말하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매우 비통해 했다. 강서가 왜 우는지 묻자 양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성을 지켰지만 완전하게 할 수 없었고, 주인이 죽었는데 함께 죽을 수 없었으니 또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서 숨을 쉬며 살겠습니까! 마초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군주를 배반했으며 주의 장수들을 죽였습니다. 어찌 저 양부 혼자만이 슬퍼하며 책임을 느끼겠습니까? 한 주의 사대부들은 전부 치욕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병권을 장악하고 전권을 휘두르고 있지만, 적을 토벌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것은 조돈이 사관들에게 반역자를 죽인 것이 아닌 주군을 죽인 것으로 쓰인 까닭입니다. 마초는 강대하지만 신의가 없고, 대부분 모순되는 것이 많아 무찌르기가 쉽습니다.

이 강서라는 인물은 단순한 친인척이 아니라 역성을 지키고 있던 장군으로, 어느 정도 병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양부는 그것을 밑천 삼아 마초와 대항하고자 한 것이다. 본래 강서는 늙은 어머니의 안전 때문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 어머니가 양부에게 감동해 자신의 생사를 신경쓰지 말라고 강권하자 이에 마음을 다잡고 마초를 공격할 채비를 했다. 강서의 동향 사람들인 조앙, 윤봉 및 기성에서 기다리고 있는 양부의 동료 양관(梁寬) 등이 합류하면서 이와 동시에 외부의 고향 사람 강은, 요경, 공신, 무도 사람 이준, 왕령 등과 모의하는 한편 종제 양모를 기성으로 보내 양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거기다가 안정현의 양관, 남안의 조구, 방공과도 손을 잡아 계획은 점차 구체적으로 발전되었다.[48]

이 가운데 조앙은 아들 조월이 마초의 군영에 있다는 이유로 합류를 주저했지만, 그의 아내 왕이"군부의 치욕을 설욕할 때는 자신의 목숨조차 내놓아야 하거늘 하물며 아들 하나쯤이야 어떻단 말인가"라는 무서운 말로 설득한 탓에 조앙은 그대 말이 옳다고 하고 결국 계획을 밀어붙이게 되었다.[49]

훗날이야 어찌 됐건, 양부와 강서 등의 계획은 이랬다. 우선 계획의 주도자인 두 사람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마초의 세력권을 공격한다. 그러면 마초는 필시 직접 그들을 격퇴하러 출진할 텐데, 그 사이 기성에 있는 동료 양관이 성 안의 마초 세력을 일소하고 기성을 장악하여 마초의 근거지를 없애버린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퇴각했던 하후연이 다시 돌아와 그들을 지원한다면 군사력으로도 밀릴 게 없다. 이상의 결론을 내린 양부 등은 즉각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벌어진 전투는 그야말로 처절함 그 자체였다. 마초는 양부, 강서가 노성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직접 군대를 인솔하여 출전하였다. 이렇게 양부, 강서가 노성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마초가 출군해 이를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는데, 양관, 조구가 기성의 성문을 닫아 버리자 마초가 들어갈 수 없게 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기성은 양관에 의해 점거되었으며 조구와 양관은 양악을 풀어주었고, 마침내 조앙, 양관 등은 성 안에 머물고 있던 마초의 아내와 남은 일가붙이를 모조리 살해했다. 살아남은 건 거기 없던것으로 추정되는 사촌동생 마대나 첩실일가 정도. 그러나 전투 자체는 그리 쉽게 끝나지 않았다. 양부가 비록 직접 미끼를 자청하여 마초와 교전을 벌였지만, 본래 장수가 아닌 그에게는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양부의 형제 일곱 명이 전사했고, 양부 본인 또한 다섯 군데나 부상을 입었다. 사실상 지휘선이 완전히 붕괴된 그 상황에서 되려 마초가 물러난 것은 오직 기성이 점거당했다는 급보 때문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마초는 전쟁에서는 패한 것이었다. 결국 마초는 가족이 죽은 복수라도 할 목적이었는지 강서의 근거지 역성을 습격하여 강서의 어머니를 붙잡았다. 강서의 모친은 그에게 욕을 퍼부었다.
너는 부친을 배반한 역적 놈이고, 군주를 살해한 흉악한 적이다. 천지가 어찌 너를 오래 살려두겠느냐? 네가 일찍 죽지 않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감히 사람들을 보겠느냐!

마초는 격노하여 강서의 모친을 죽였다. 결국 기성전투는 서로가 서로의 일가를 멸한 끔찍한 전쟁으로 변한 것이다.

이렇게 본거지와 일가를 잃고 마초는 진퇴가 낭패스럽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자신의 뒤를 쫓아올 하후연을 걱정해야 했다. 이제 더 이상 관서에는 발을 붙일 수 없다 여긴 그는 멀리 한중으로 달아났다. 앞서 군사를 지원했던 장로의 호의에 기대를 걸고 몸을 의탁하러 간 것이다.

해를 지나 건안 19년(214년) 봄, 장로에게 달아났던 마초는 포기하지도 않고 끈질기게 양주의 재공략을 시도했다. 그는 한중의 군사를 빌려 기산(祁山)을 공격했는데, 마초는 한양에서 다시 강족, 호인에 의지해 군사를 일으키자 저왕 천만이 모반하고 마초에 호응해 흥국에 주둔했다. 하후연을 시켜 이를 토벌하게 했다.[50] 한편 마초의 원수인 왕이는 남편과 함께 기산에서 마초와 30일간 맞서 싸웠다. 기산이 습격당하고 나서 기산의 수비에 조앙이 낸 아홉 가지의 기묘한 꾀에는 전부 왕이의 생각이 들어 있었다.[51] 또, 당시까지 현지를 지키고 있던 장수 강서는 급히 하후연에게 연락을 보내 상황을 알렸다. 대부분의 장수들은 함부로 출진하는 것보다는 우선 업군에 있는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기를 조조의 절도(節度)를 기다려 행동에 나서자고 주장했지만, 앞서 간발의 차이로 기성을 빼앗긴 탓에 마초에게 패배한 경험을 잊지 않은 하후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보고를 받은 지금 당장 출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공께서 업에 계시니 왕복하여 4,000리 거리요. 보고가 이를 무렵이면 강서 등은 반드시 패할 터인데, 이것이 급한 상황을 구할 만한 계책은 못 되는 것이잖소?[52]

마초의 요격에 호되게 당했던 만큼 이번만은 마초에게 선수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투였다. 다만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는지, 부장으로 있던 장합에게 보병과 기병 5천을 주어 선두에 서서 진창의 좁은 길을 따라 선봉으로 진격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자신은 후방에 남아 군량을 감독하며 잠시 전황을 주시하기로 했다. 만약 장합이 마초에게 패하거나 밀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때는 하후연이 지원군이 되어 뒤따라 출진할 태세였다. 그러나 전쟁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장합이 위수 가에 도착하자 마초가 강족과 저족 수천 명을 이끌고 장합에 맞섰으나 곧 싸우기도 전에 마초가 퇴각하니 장합은 진군하여 마초군의 무기를 거두었다. 하후연이 도착했을 때는 여러 현들이 이미 다 항복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그는 하후연의 말대로 보고가 조조에게 들어가고, 또 그에 대한 지시가 장안으로 내려올 때까지는 시간이 있으리라 예상했던 듯 싶다. 그러나 작년의 전쟁을 거울삼은 하후연이 신속한 대처로 나오자 후퇴한 것이다. 이제 마초가 한중에서 더 나올 생각이 없는 듯 보이자 양주는 하후연의 독무대가 되었다. 하후연은 이후 이민족과 연합한 한수를 격파하고 양주를 종횡무진 평정하며 명장으로서 명성을 더욱 드높였다.

어쨌거나 이렇게 구원군이 오고 기산의 포위가 풀리자, 마초는 더 이상의 인질가치가 없어진 조앙과 왕이의 자식 조월을 죽이고 후퇴했다.

2.2.3. 장로 휘하

마초는 다시 농상에서 패했다. 그 뒤 한중으로 달아났는데, 장로는 본래 마초의 용맹과 명성에 반해 마초를 도강좨주로 삼고 자신의 딸 장기영과 결혼시켜 그를 자신의 사위로 삼으려 했지만, 어떤이가 말하길
이처럼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이가 어찌 남을 사랑하겠습니까?

라며 마초의 반란에 의해 그의 가족들이 희생당했음을 상기시키며 만류했다. 과연 듣고 보니 뭔가 껄끄러워지는 데가 있었는지 장로는 혼약을 없던 일로 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장로는 마초를 믿기 어려운 인물이라고 인식했는지도 모른다.[53]

이러나 저러나 마초의 생활은 불우했다. 당초 마초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 그의 첩의 동생인 동충이 삼보(三輔)에 머물렀는데 마초가 패하게 되자 동충이 먼저 한중으로 들어왔었다. 정월 초하루 아침, 동충이 마초에게 장수를 바라는 뜻으로 술잔을 올리자 마초가 가슴을 치고 피를 토하며 통곡하여 말했다.
온 가문의 근친 일족이 하루아침에 함께 죽었는데 지금 두 사람이 서로 축하한단 말인가?[54]

그 뒤 수차례 장로에게 군사를 청해 북쪽으로 양주를 탈취하려 하니 장로가 보내 주었으나 이로움이 없었다. 위에도 나왔지만 그를 바라보는 한중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 고운 것도 아니었다. 특히 장로의 부장 양백(楊白)은 마초의 재능과 명성을 시기하여 공공연히 그에게 거부감을 표했는데, 결국 장로의 부하들이 모조리 한통속이 되어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는 생각이 든 마초는 여기에서조차 달아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다시 한 번 가족들을 버리고 심복인 방덕과도 이별하게 되었다. 마초의 첩 동씨와 아들 마추는 한중에 남아있다가 훗날 조조가 한중을 차지하고 나자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된다.

마초는 마침내 무도를 따라 달아나 저족 중으로 들어갔다. 어쨌건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는 저족[55]의 부락으로 간 마초는 막막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홀연 익주에서 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면서 새로 얻은 참모 이회(李恢)였다.

2.3. 유비 휘하

2.3.1. 유비의 입촉

이회전에 따르면 유비는 이회를 한중으로 파견하여 마초와 우호를 맺도록 했다. 마초는 그래서 유비를 따랐다. 마초는 장로와 더불어 일을 도모하기에 부족한 인물이라 생각하여 내심 근심하고 번민했는데 유비가 성도에서 유장을 포위했다는 말을 듣고 은밀히 서신을 보내 항복을 청했다. 유비가 사람을 보내 마초를 영접하자 마초는 군사를 거느리고 곧바로 성 아래에 도착했다.

유비는 유장과의 전쟁 와중에도 각지의 소식을 접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던 듯싶다. 양주에서 용명을 떨쳤던 마초가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어 저족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다는 말을 들은 그는 즉시 이회를 보내 자신과 함께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기왕 누군가에게 몸을 의탁해야 할 신세라면 실력과 인망을 겸비한 유비가 낫겠다 싶어진 그는 마침내 그때까지도 자신을 따라주던 군사들을 대동하여 몸을 돌려 성도로 향했다. 마초가 자신의 장수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비는 기뻐하며 말했다.
 
이제 내가 익주를 얻었구나!
 
유비는 사람을 시켜 마초를 멈추게 하고 은밀히 군사를 대어 주었다. 마초가 도착하자 군을 이끌고 성 북쪽에 주둔하게 했는데, 마초가 도착한 후 열흘이 지나기 전에 성도가 무너졌다. 당시 성도의 성벽을 사이에 두고 수십 일 동안 대치하던 유비군과 유장군의 전쟁은 마초의 전향으로 비로소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성안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유장이 이내 머리를 조아려 절하니 마초를 평서장군, 독임저로 임명하고는 예전대로 도정후로 삼았다. 이 해가 건안 214년이다.

관우는 마초가 항복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예전부터 친분, 내왕이 있는 이가 아니기에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사람됨과 재주가 누구에 비교될 수 있는지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의 강한 호승심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맹기(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웅렬이 남보다 뛰어난 일세의 호걸로 응당 익덕(장비)과 말머리를 나란히 해 달리며 선두를 다툴 수는 있으나 염(髥) 그대의 절륜 일군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관우는 수염이 아름다웠으니 이 때문에 제갈량이 관우를 일컬어 염(髥)이라 한 것이다. 관우는 이 서신을 읽어보고 크게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주었다.[56]

마초는 유비가 후대하는 것을 보고 유비와 더불어 말하며 늘 유비의 자(字)를 부르니 관우가 노하여 그를 죽일 것을 청했다.[57] 유비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궁박해져 내게로 귀의했소. 그런데 경 등이 분노하며 내 자(字)를 불렀다 하여 죽이자 하니, 천하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이겠소!

장비가 말했다.
그렇다면 응당 예(禮)를 보여야지요.

다음 날, 크게 모이며 마초를 청했는데, 관우, 장비가 함께 칼을 쥐고 곧게 서 있었다. 마초는 좌석을 둘러보았을 때 관우, 장비를 보지 못했다가 그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니 마침내 다시는 유비의 자(字)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 날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이제야 패망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인의 자(字)를 부르다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구나.

이후로 유비를 존중하며 섬겼다.[58]

하지만 배송지는 이 기록에 대해 관우는 당시 형주에 있었는데 왜 유비, 장비랑 같이 익주에 있냐고 주석을 달아 이 기록의 신빙성을 크게 부정하였다. 연의에서야 화끈하고 성미 급한 인물로 나오지만, 정사에서의 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냉철함을 보유했고 사리분별도 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궁지에 몰려 귀부한 유비에게 어찌 저러한 하대를 할 수 있었겠냐는 것. 더구나 관우는 마초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기에 제갈량에게 편지까지 보내가며 그에 대한 내용을 물어야 했다. 직접 만날 수 있는 환경이라면 굳이 편지까지 보내며 제갈량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도 하다. 이에 배송지는 크게 분노해 분질(忿疾)이란 표현까지 써가며 기록 자체가 그릇됐으며 사실이 아니라고 극렬하게 비판했다.[59]

한 가지 가능성을 말해보자면 이 시점에서 마초의 지위가 명목상으론 형주를 진수하는 관우의 관할 구역인 임저독이었기 때문에 마초가 잠시 본인의 임지가 속한 형주로 와서 형식상 직속 상관인 관우와 대면했을 공산은 있다. 거기에 유비는 익양대치 때 형주에 군을 이끌고 온 적이 있었고 마초 역시 여기에 종군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유비, 관우, 마초가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만났을 가능성이 없진 않은 편이며, 잠시나마 모두 같이 형주에 머물렀을 확률은 있지만, 파서태수로서 조조가 공격한 한중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방어해야 하는 장비가 형주에 왔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에 만약의 만약을 가정한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여도 배송지의 의견처럼 사실상 헛된 기록에 가깝기 때문에 해당 기록은 신뢰성을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2.3.2. 유비 휘하

이때 팽양은 자신이 먼 곳으로 진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불쾌하여 곧 마초를 찾아가 만났다. 마초가 팽양에게 질문했다.
그대는 재능이 특출나므로 주공께서는 그대를 중요하시며, 응당 제갈공명, 효직(법정) 등과 함께 발을 나란히 하고 달려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찌하여 외지의 작은 군에 임명되었습니까? 이것은 사람들의 그대에 대한 희망을 저 버린 것입니다.

팽양이 말했다.
(유비가) 이미 늙어서 황당하고 어그려졌으니 또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마초에게 말했다.
그대가 외부를 맡고 내가 내부를 담당하면 천하는 충분히 평정되지 않겠습니까?

마초는 먼 곳에서 떠돌다가 촉나라로 투항해 왔으므로 항상 위험과 두려움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팽양의 말을 듣고 매우 놀랐으므로 대답하지 않았다. 팽양이 돌아간 후, 마초는 팽양의 말을 모두 상주했다. 이 때문에 팽양은 체포되어 담당 관리에게 보내졌다.[60] 이는 마초가 여러차례 고난을 겪고 안정된 생활을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팽양의 반란이 실현 가능성은 들째치고 이런 표현이 나왔다는 것은 마초가 매우 조심하면서 생활했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마초가 양백들의 시기를 피해 무도 저족부락으로 피신해 있다가 촉으로 들어올 때 그의 첩인 동씨와 아들 마추는 남아서 장로에 의탁하고 있었다. 장로가 패망하자 조조가 이들을 손에 넣었는데, 동씨를 염포에게 하사하고 마추는 장로에게 주니 장로가 자기 손으로 직접 마추를 죽였다.[61]

2.3.3. 한중 공방전

218년, 유비가 제장들을 이끌고 한중으로 진군했다.[62] 유비는 장비와 마초 등을 파견하여 저(沮) 길로부터 나와 하변을 취하도록 하였고, 마초의 출정 소식에 저, 뇌정 등 일곱 부족 1만여 부락이 모반하여 유비에게 호응했다.[63] 유비가 장비, 마초, 오란 등을 보내 하변에 주둔하게 하니, 조홍을 보내 이에 맞서게 했다.[64] 유비는 장수 오란을 보내 하변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가 장비를 보내 고산에 주둔케 하여 군의 배후를 끊으려 했다. 의논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자 조휴가 말했다.
적이 실제로 길을 끊고자 하면 응당 복병으로 몰래 행군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먼저 성세를 과장하니 이는 실제로는 그들이 이를 실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적군이 아직 집결하지 못했을 때 급히 오란을 공격해야 할 것이고 오란이 격파되면 장비는 달아날 것입니다.

조홍이 이를 좇아 진병했고, 오란을 공격해 대파하니 과연 장비는 달아났다.[65]

3월, 장비,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고, 음평의 저족 강단오란을 참수해 그 수급을 보내왔다.[66] 이후 마초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데 한중으로 후퇴했다는 무제기의 기록도 그러하거니와 아래의 기록처럼 간접적 추측이 가능한 정황이 있으니 유비가 전군을 한중으로 이끌고 들어가서 싸웠으므로 마초도 이동하여 싸웠을 것으로 보인다. 한중 공방전의 승리 이후, 유비가 한중왕이 되고 유비가 마초를 좌장군, 가절로 임명했다.

이렇게 유비가 한중왕이 되어 황충을 후장군으로 임명하려 하니 제갈량이 유비를 설득하며 말했다.
황충의 명망은 본래 관우, 마초와 동등하지 않았는데 이제 곧바로 동렬에 두려 하십니다. 마초, 장비는 가까이에서 그의 공을 직접 보았으므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으나 관우는 멀리서 이를 들으면 필시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불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내가 직접 이해시키겠소.

그리고는 마침내 관우 등과 더불어 나란한 지위에 두고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67]

2.3.4. 이릉대전

221년, 표기장군, 영(領) 양주목으로 올리고 태향후로 올려 봉했다.

이것은 굉장히 많은 부분을 시사하는데 이 양주목(양주자사) 자리는 촉한의 북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 주로 받은 것이다. 대표적으로 위연이나 강유를 들 수 있다. 근데 이들도 '영 양주자사' 였을 뿐인데 마초는 그냥 '영 양주목'이다. 제갈량의 '영 익주목'을 생각해보면 마초 홀대설을 부정하는데 있어서 강력한 근거자료다.
짐이 부덕(不德)하나 지존(至尊)의 자리를 이어 종묘를 봉승(奉承)하게 되었다. 조조(曹操) 부자(父子)가 대대로 죄가 가득하니 짐은 참달(慘怛-참담하고 비통함)하여 열병으로 머리가 깨어질 듯하구나. 해내(海內)가 원망하고 분노하여 정(正)에 귀의하고 본(本)으로 되돌아오고 저(氐), 강(羌)이 솔복(率服-잇따르며 와서 복종함)하고 훈육(獯鬻- 흉노)이 의(義)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대는 북토(北土)에 신의를 드날리고 위무(威武-위엄과 무력) 또한 아울러 빛났도다. 이로써 그대에게 임무를 맡기니 효호(虓虎-포효하는 범)의 위용을 높게 드날려 만 리 밖까지 겸하여 바로잡고 백성들의 아픔을 구하도록 하라. 장차 조정의 교화를 밝히고 베풀어 멀고 가까운 이들을 품어 보호하고 상벌을 엄숙하게 삼가고 한나라의 복운을 두텁게 하여 천하의 기대에 보답하도록 하라.

유비가 마초를 표기장군, 영(領) 양주목으로 임명한 이 시기는 이릉대전이 발발한 때이다. 유비는 마초를 임명한 책문에서 강, 저가 복종하고 있고, 흉노 및 북쪽지방에 대한 그의 큰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오와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언제라도 생길지 모를 위, 이민족의 침입에 대한 북쪽의 방비를 마초에게 전적으로 맡긴 것으로 보인다.

2.4. 죽음

222년에 죽으니 이때의 나이가 46세였다. 죽음이 다가오자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렸다.
신의 종족 2백여 명이 맹덕(조조)에게 주살당해 거의 다 없어지고 다만 종제 마대가 남았으니 미천한 종족을 위해 제사가 이어질 수 있도록 폐하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 외에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68]
세상을 호령했던 맹장 마초였지만 마지막 유언은 오직 가문의 존속만을 빌고 있다. 마원 이래에 명가로 유명했던 한양 마씨의 후예이자 한때 관중을 호령했던 관중 제장의 맹주였으면서도 일가족 모두를 전쟁과 함께 잃은 그가 남긴 유언은 정말 처량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마초는 한중 면현 정군산 부근, 뇌공산에 묻혔다. 면양 무후사와 약 1km 떨어져 산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한수를 사이에 두고 관자산의 여랑사(즉 장로의 딸 장기영의 묘)가 있다. 시호를 추증해 위후(威侯)라 했다. 아들 마승이 후사를 이었다. 마대의 관위는 평북장군에 이르렀고 진창후로 올려 봉해졌다. 마초의 딸 마씨는 안평왕 유리의 배필이 되었다.[69]

마초의 요절은 유비와 촉에 있어서는 여러모로 안타까운 일인데 마초가 사망한 연도는 이릉대전이 끝난 연도와 같다. 이 무렵 촉은 관장황이라는 1세대 핵심 지휘관들이 순차적으로 사망했다. 마초는 관장마황조 중 가장 젊었다고 할 수 있기에 살아있었다면 북벌 때 마초 자신의 연고지였던 옹양주에서 일어나는 전투에서 중요한 비중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결국 요절하면서 이릉대전 전후를 기점으로 관장마황조 중에선 조운만이 남았고, 몇 년이 지난 1차 북벌 이후에는 조운까지 사망해 이들은 모두 역사에서 퇴장한다. 제갈량의 북벌 시기 인재 부족에 시달리던 촉으로서는 마초를 비롯하여 형주 공방전부터 이릉대전까지 잃어버린 인재들은 실로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이었다. 살아남은 2세대 장수들인 왕평, 요화, 마충, 장익, 장억, 위연 등의 활약이나 공적을 보면 잃어버린 인재들이 더더욱 아깝게 느껴진다.[70]

일부에서는 마초의 무기력한 말년의 모습과 요절이 마음의 병을 얻어서 그런 게 아니었나 하는 추측[71]을 하기도 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부터가 우리 집안 사람들은 다 죽고 마대 하나 남았으니까 잘 좀 부탁합니다였을 만큼 마초는 조조와의 대립과 익주 공방전을 거치며 거의 모든 것을 잃게 되었고, 촉에서는 자신의 입지 때문에 적지 않은 고민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외모가 수려해서 금마초(錦馬超:비단 같은 마초)라는 이명이 생겼다. 정사에서는 마초의 외모가 어떻다는 언급은 없고 건장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기에 연의의 창작으로 보인다.

우선 마초의 아버지 마등부터 이미지가 바뀐다. 정사에서 마등은 반란 세력에다가 동탁과도 연계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인품이나 통치에 있어선 훌륭했으며 관서 군벌 자체가 이합집산과 서로간 통수 때리기로 일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시대엔 이런 일이 흔했다. 실제로 이 양반은 동탁이 죽고나서 이각, 곽사에게 정서장군 직위를 받고 돌아온 다음에 익주의 유언과 손잡고 이각, 곽사를 칠 계획까지 짰던 인물이다. 어쨌거나 연의에서는 마등이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하고 나중에 유비와 함께 헌제혈서에 서명하는 등 반란자이자 난세를 틈탄 군벌에서 충신으로 이미지 체인지된다.

마초가 정사보다 일찍 등장한다. 장안을 점거한 이각 일파와 마등, 한수가 싸울 때 17세의 마초는 적장인 이몽, 왕방을 베는 활약을 보였으나 아버지인 마등이 패했기 때문에 패퇴했다.

연의에서 마등은 조조와 대립한 양주의 한 세력으로서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원소의 잔당인 고간, 곽원과 마씨 일족의 전투는 연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연의에서는 마등이 조조 암살 계획에 가담했기 때문에 마초는 일족의 대부분을 조조에게 모살당하고 만다. 양주에 있어서 난을 피한 마초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촌 동생인 마대와 함께 복수를 위해 거병하게 된다. 마초는 상복을 대신해서 흰 전포를 입었는데 사자 형상의 투구와 더불어 마초를 상징하는 아이템이 되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마초가 충렬지사로 변한 것이다. 정사에서 마초는 업에 자신의 일족들이 분명히 있음에도 관중제장들의 압박과 서량에 남은 자신의 일족들을 보전하기 위해 한중 쪽으로 이동하려는 조조군의 움직임을 보고 조조가 자신을 친다고 생각해 반란을 일으켜서 결국 마등 등 마초의 일족은 몰살돼버린다. 물론 이는 높은 관직에 눈이 멀어 어설프게 일족들을 나누어선 하나는 호랑이 입 속인 업으로, 하나는 그대로 서량에 잔류하게 만든 마등의 책임도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만약 마초가 군벌들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허도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조조에게 항복 의사를 표한다면 서량에 남아있는 마초의 일족들부터가 관중제장들의 손에 의해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 했기에. 그러나 연의에서는 조조가 먼저 마등을 죽이고 마초는 그 복수를 위해 거병한다는 식으로 바뀌었다.

연의에서 한수의 부하들로 등장하는 수하팔부는 별로 비중이 없지만, 정사에서는 모두 관중의 유력 군벌들이었다. 봉기했을 때 마초군이 장안성을 함락시켰다는 것도 허구. 곧바로 동관으로 군사를 휘몰아 조조와 승부를 벌인다. 동관 전투에서는 마초의 용맹함이 과장되어 이통을 찔러 죽이고 조조를 추격하자 겁이 난 조조는 자신의 기병들 사이에서 도망친다. 그러자 마초는 붉은 전포를 두른 놈이 조조라고 외치자[72] 붉은 전포를 벗어던지고 그 다음에는 수염기른 놈이 조조라고 하자 자신의 칼로 즉석에서 수염을 자르자 이번에는 '수염 짧은 놈이 조조다!"라고 하자 뭐 어쩌라는거야.... 옆에 있던 깃발을 잘라서 얼굴을 가리지만 오히려 더 티가 나 금방 발각되고 마초는 지구 끝까지 조조를 쫓아 갈 기세였지만 조홍이 겨우 구해주는 장면이 창작된다. 연의에서 몇 안되는 블랙 코믹한 장면이다. 여기에서 정신없이 부랴부랴 도망친다는 뜻의 할수기포(割鬚棄袍)라는 사자성어가 생겨났다.

정사에서 이통은 마초에게 죽은 게 아니며, 실제로 조조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인 건 맞지만 조조가 수염을 자르는 장면은 없다. 중간에 웃통을 벗은 허저와 대결을 하는 장면이 있지만 창작이다. 마초는 허저와의 싸움을 통해선 "그 용맹이 지난날 여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조조의 찬사를 듣는다. 가후의 이간계에 의해 마초는 한수를 공격해 그의 한쪽 팔을 잘라버리지만 패주한다. 연의에서 한수는 이후 조조에게 투항하지만 정사에서 한수는 그 후에도 조조에 대항해 거병하다가 죽었다.

기성에서 양부 등의 계략에 속은 마초는 자신의 눈 앞에 아내 양씨 등 자기 가족들의 목이 떨어트려진다. 마초는 역성을 습격하여 분풀이로 그곳의 강서, 윤봉, 조앙의 가족들도 다 죽여버리는데 조앙의 아내 왕이만 남편이 있는 기산의 군중에 가 있어서 죽음을 면했다고 나온다. 정사에서 마초가 역성에서 죽인건 강서의 어머니 뿐으로 나머지 강서. 윤봉, 조앙의 가족들은 멀쩡히 살았다. 아마도 나관중이 가족이 몰살당한 마초가 불쌍해서 이런 화풀이 장면으로 추가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대로 장로에게 의탁하고 유장군의 원군으로서 파견되어 유비군의 장비와 일 대 일로 싸운다. 장비와의 대결을 통해서 유비와 제갈량으로부터 "과연 서량의 금마초다."라는 극찬을 듣는다. 마초는 제갈량의 책략에 의해 양송의 참언에 혹한 장로에게 의심받아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양송은 실존하지 않았던 인물이고 정사에서는 제갈량의 책략도 아니었다. 정사에서 장로에게 마초를 시기한 것은 양송의 형으로 나오는 양백이다. 뜬금없이 이회에게 마초의 친구라는 설정이 붙었고 마초는 이회의 설득에 의해 유비군에 투항한다. 유장은 원군이 오지 않는 것을 깨닫고 유비에게 항복한다.

유비 진영에 합류한 이후의 활약도 대폭 늘어나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군에게 광역 공포를 걸고 기습으로 적의 배후를 교란하며 맹활약, 마지막에는 복병으로 등장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다. 정사에서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이 사방장군에 임명되지만 연의에서는 이 멤버에 조운이 추가되어 오호대장군으로 바뀌었다.

정사에서는 유비가 죽기 1년 전에 죽었다. 그러나 연의에서는 수명이 늘어나서 유비 사후에도 조비의 오로군이 쳐들어왔을 때 제갈량의 명을 받들어 그중 한 갈래인 강족의 군대를 패기만으로 제압하는 등 활약을 이어간다. 다만 연의에서도 유비에게 귀부한 뒤로는 정사처럼 미묘하게 활약이 부족했는데 따로 죽음 장면은 묘사되어 있지 않으나 제갈량이 북벌을 나서면서 마초의 묘를 방문하는 장면이 있다. 이후 제갈량이 자길 빼놓고 북벌에 나선 것에 항의하기 위해 홀로 제갈량의 군대 앞을 가로막은 조운과의 대화에서도 '마초 장군마저 세상을 떠난 지금 오호대장군은 조운 장군 뿐이고, 그런 장군이 북벌에 나섰다가 변고라도 생기면 이는 곧 촉의 비극과도 같다.'라며 마초가 제갈량의 북벌 이전에 죽었음을 암시한다.

마초의 사촌 동생인 마대는 정사에서는 높은 관직과 작위를 받았음에도 딱히 비중이 없는 인물이지만[73] 연의에서는 마초 버프를 받아 제갈량 세대 촉한의 필두 무장 중 하나로 활약한다. 사실상 관흥, 장포처럼 오호대장군 2세대 보정으로 마초가 했을만한 공적들을 마초가 죽은 뒤에는 조금 너프해서 마대한테 몰아주어서 오호대장군의 스토리를 이어간 것.

4. 가족 관계

  • 마원 - 마초의 선조.
  • 마평 - 마초의 조부, 마등의 아버지.
  • 강족녀[74] - 마초의 조모, 마등의 어머니.
  • 마등 - 마초의 아버지.
  • 마휴 - 마초의 남동생, 마등의 차남.
  • 마철 - 마초의 남동생, 마등의 삼남.
  • 마대 - 마초의 사촌 동생, 마등의 조카.
  • 양씨 - 마초의 본처
  • 동씨 - 마초의 첩, 염포의 아내.
  • 동충 - 마초의 처남, 동씨의 남동생.
  • 마추 - 마초의 아들. 한중이 정벌되고 나서 조조가 장로에게 주어서 처형당한다.
  • 마승 - 마초의 아들. 마초의 후사를 이었다.
  • 마씨 - 마초의 딸, 유리의 아내.

5. 평가

마초는 융족과 용력에 의지해 자신의 일족을 망쳤으니 애석하구나! 허나 곤궁함에 쳐했고 이로 인해 태평함으로 나아갔으니 오히려 더 낫지 않았는가.
진수정사 삼국지
표기장군(마초)는 분연히 일어나 서방의 호걸들과 합종하고 연횡하여 삼진의 땅에서 군사를 일으켜, 황하와 동수를 지배했다. 황실을 존중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으나 어떤 때는 모반하고 어떤 때는 동조한 탓에 적이 틈타서 집이 무너지고 군대가 멸망했다. 도덕을 어기고 봉황이나 용에게 의탁했다.
양희 《계한보신찬》

후한 말을 주름잡았던 난세의 호걸이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으며, 한신에게 비견되던 군재와 영포, 팽월을 떠올리는 용력은 당대의 이름난 군웅들도 한수 접어줄 만큼 뛰어났다. 특히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 어느 때 와해될지 모르는 이민족들을 규합하고 명망을 얻어 젊은 나이에 맹주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만 하더라도 마초의 위상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수준.

마초의 전공과 생애를 살펴보면 제후의 반열에 들어간 명성과 엄청난 용력,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이민족들의 도움으로 관중 전체를 진동시켰으며, 몇 차례의 인상적인 군사적 성과를 거두면서 작금 천하에 마초라는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마초를 극혐한 친조조 성향의 양주의 명사인 양부조차도 마초를 두고 "한신, 영포와 비견될 만 하다."라며 그 능력만큼은 확실히 인정했고, 조조는 마초를 두려워해 '만약 마초가 살아있다면 자신의 무덤도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또한, 양주에서 멀리 떨어진 강동의 실권자 주유 또한 천하이분지계를 계획할 때 유비장로를 제치고 서량의 마초를 북벌에 필요한 최중요 동맹 요인으로 꼽았을 정도로 그 명성은 막강했다.

군벌이 아닌 군사지휘관으로서의 모습을 살펴봐도 종요를 비롯한 조조의 제장들이 상대하기 버거워했던 명장 곽원을 격파하고 참살하거나, 별동대를 이끌어서 조조를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붙이고, 조위의 손꼽히는 사령관이었던 하후연을 물리쳐서 서량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등 비록 조조의 군세에 중과부적으로 끝내 패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매우 화려한 전적을 보여주었다. 그밖에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성도의 유장을 항복시키거나 조조에게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도 곧바로 일어섰던 기록을 보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패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기도 했다.

허나 이처럼 화려한 전공과 명성을 가졌음에도 마초의 인생은 결코 순탄하진 못했는데, 아버지 마등과 한수의 갈등, 조조와의 대결, 아군에게 당한 뼈아픈 배신 등으로 인해 젊은 시절부터 몇 번이나 가족들이 몰살당했기 때문. 말년에 죽음이 임박하자 "저의 일족 대부분이 모두 조조에게 살해당하고 이젠 마대 한 명만이 남았으니 마대만이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더 이상 남길 말은 없습니다." 라며 유비에게 마대만이라도 건사해주길 간청했던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진수도 마초를 평할 때 일신의 용력과 이민족들을 규합하여 군세를 이끌며 천하를 진동하게 할 성과를 남긴 점은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그로 인해 불우한 인생을 살다갔음을 매우 불쌍히 여기며 안타까워했다.

이상과 같이 마초라는 인물은 당대와 후대를 가리지 않고 천하의 쟁쟁한 이들로부터 인정받은 군웅이었고, 단순히 명성만 뛰어나고 실속이 없는 인물이 아니라 그 드높은 명성과 본인의 능력을 이용해 중원을 뒤흔들 수 있는 뛰어난 군사지휘관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허나, 계속된 전란 탓에 수없이 가족들을 잃고 방랑하다가 비운의 삶을 마친 인물이라 볼 수 있다.

5.1. 명성

"마초는 한신(韓信), 영포(英布)의 용맹을 갖추고 강(羌), 호(胡)의 마음을 심히 얻고 있습니다. 만약 대군(大軍)이 돌아가며 이를 엄히 방비하지 않는다면 농상(隴上)의 여러 군(郡)들은 국가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양부(楊阜)
마초는 병사를 이끌고 지름길로 성 아래 이르렀다. 그 소식에 성도 전체와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떠니, 유장은 곧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여 항복했다.
촉서 마초전

마초는 후한의 개국공신이었던 대장군 마원의 후손으로서 할머니가 강족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강족저족 등 서북 지역의 이민족들과 가까웠고, 이로써 그는 그들의 지지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75] 마초의 명성은 그가 거병할 때부터 중요한 이점으로 작용했으며, 조조에게 큰 패배를 겪고도 1년 만에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민족들에 대한 마초 본인의 강한 영향력과 명성 덕분이었다.

당대에 실제로 마초를 높이 평가했던 이들만 하더라도 조조, 유비, 제갈량, 관우, 주유 등 하나같이 천하에 쟁쟁한 인물들뿐이었다는 점도 후대에 마초의 명성을 드높이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만약 마초가 그저 뛰어난 장수에 불과했고 군벌로서의 능력이나 명성이 부족했다면 적국의 군주 내지는 사령관 급 인사들로부터 하나같이 두려움을 사거나 고평가를 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일단 마초가 유비에게 귀부하자 유장과 성도의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벌벌 떨다 바로 항복했다는 기록이나 개국공신으로 숱한 공을 세운 장비를 제치고 표기장군에 임명된 사건, 주유가 천하이분지계를 계획할 때 유비가 아니라 마초와 동맹을 맺어 조조를 압박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는 등 당시 마초에 대한 인식은 최소 중원을 뒤흔들 만한 제후의 반열로 여겨졌던 것임은 확실하다. 이는 마초라는 인물이 명성에 있어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 조조와도 자웅을 겨뤄 일시적이나마 조조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여 당대의 호걸로 여겨졌다.
  • 마초는 당대에 피아를 가리지 않고 한신, 영포, 팽월 등 고대의 명장들과 비견되는 극찬을 받았다.
  • 조조에게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겪고도 농서 지역을 일부 점유해 금세 일어설 수 있었으며 그가 봉기하자 이민족을 비롯 상당한 세력들[76]이 순식간에 호응했다.
  • 장로에게서 탈출해 유비에게 귀순할 때도 이민족인 저족의 영역을 자유롭게 경유했다.
  • 유비는 마초를 포섭하는 데 성공하자 "내가 익주를 얻었구나"라며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실제로 유장은 유비에게 귀순한 마초의 군대가 성도에 당도한 걸 보고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벌벌 떨다 유비에게 항복한다.
  • 자신의 명성과 공적에 대한 자부심과 호승심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관우는 마초의 평판에 대해 묻는 내용의 편지를 제갈량에게 보냈는데 제갈량이 관우가 마초보다 낫다는 평가를 하자립서비스 대단히 기뻐해서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여주고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기까지 했다고 한다. 제갈량이 관우의 성질머리를 생각했으리라는 걸 감안하면, 실제로 제갈량이 관우를 마초보다 높게 평가했는지 어떠한지 이것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중원에 이름을 크게 떨친 천하의 관우가 호승심을 느끼고, 더 낫다는 평가를 받음에 대단히 기뻐하여 자랑할 정도였다는 것이 마초에 대한 당대 인물들의 평가를 알게 해준다.
  •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뒤, 이미 당대 전중국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칭송받던 만인지적 관우, 장비와 동렬에 세워졌다.
  • 좌천된 팽양은 마초에게 반란을 부추기며 "당신이 외부(군사)를 맡고 내가 내부(내정)을 맡으면 천하가 충분히 평정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했다. 크게 신빙성 있는 소리는 아니지만 마초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발언이다.
  • 양주에서 모든 걸 다 잃고 한중에서 무도로 도망가 있던 시절에도 저족에게 영향력이 있었고 후일 한중 공방전 때 장비와 함께 이 지역 저족을 비롯한 이민족 일곱 부족 1만여 부락이나 유비에게 호응시킨다. 마초의 이민족 영향력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알 수 있다.
  • 한중왕표에서 당시 유비의 휘하에 있던 부하들의 서열이 어찌 되는지 확인해볼 수 있는데, 마초가 가장 앞에 있다.(평서장군 도정후) 장비는 그렇다 쳐도 당시 형주를 총감독하며, 가절월의 직책까지 받았던 관우보다도 앞서 있다는 점은 심히 파격적이다. 도정후는 본래 조정으로부터 받은 작위고 평서장군은 유비가 임의로 부여한 장군직이다. 아무튼 그의 이름이 가장 앞에 등장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마초가 유비로부터 제후 대접을, 적어도 겉보기상으로는 동등한 입장으로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77][78][79][80] 영입된 지 얼마 안된 마초가 유비의 왼팔인 장비보다도 한 단계 위의 직위를 받았다는 것만 해도 파격적으로 높은 대접을 받은 것은 맞다.
  • 유비에 의해 촉한의 최초이자 최후의 영 양주'목'에 임명된다. 후에 북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위연이나 강유의 지위가 이보다 한급 낮은 '영 양주자사'였던 걸 감안하면 마초가 갖고 있던 위상과 관서지방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

이상과 같이 당대 마초의 명성과 웅장위맹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고, 실제로 성도의 유장이 몹시 두려워하여 항복하게 만들거나 조조를 거의 죽일 뻔하는 등 그 높은 명성에 걸맞는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괜히 후세에 서량을 대표하는 영웅 '금마초'라 불리우게 된 것이 아니다. 마초의 명성은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위왕 조조, 강동의 주유, 한중왕 유비, 형주목 관우 등 당대의 인사들로부터 인정받아 높이 평가받았으며 일개 군벌이 아닌 제후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그 명성을 천하에 크게 떨쳤었다.

5.2. 통솔

맹기(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웅렬(=굳세고 맹렬하다)이 남보다 뛰어난 일세의 호걸로 응당 익덕(장비)과 말머리를 나란히 해 달리며 선두를 다툴 수 있습니다.
제갈량 《관우전》
"마초 저놈이 죽지 않는다면 내가 묻힐 땅조차 없겠구나!"
조조 《산양공재기》

연의에서의 마초는 조위 제장 중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는 허저와의 일 대 일 대결에서 우세한 무승부를 거두고 만인지적 장비와도 호각을 이루는 것으로 묘사되는 맹장형 인물이나 정작 진짜배기 장수로서의 정수인 전략과 용병술에 있어서는 한수나 방덕에 의존하고 때론 성급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 일을 그르치는 등 최상급의 일신의 무력에 비해 다소 미흡한 구석이 있게 그려진다.

그러나 실제 정사에 기록된 마초의 군사적 행적을 보면 마초는 일신의 용맹을 앞세우기보단 출중한 전략적 식견과 용병술에 의존하여 군을 움직였고 상당히 인상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곽원이나 하후연 같은 명장들을 상대해 격파한 전적도 있고 당대 최강이었던 조조의 군세를 상대로 국지적이나마 조조를 위기로 몰아넣거나 실제로 조조를 죽일 뻔하는 등 꽤나 선전하였다. 이러한 전적과 적국의 모사들이 한신과 영포에 비유했던 사례를 보면 마초의 군재는 당대의 군웅들 사이에서도 뛰어난 편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마초는 어린시절부터 관중 호족과의 싸움에서 활동했고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조조의 배후를 공격하며 관서를 진동시키고 맹위를 떨쳐 사례 지역 제장들과 관원들이 모두 진압[81]하는데 실패한 고간 휘하의 하북의 명장 곽원을 1만여 명의 적은 군사로 쓰러뜨리며 적장까지 참살하는 대공을 세웠다. 이때 곽원이 이끈 군세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견초전에서 고간이 진수한 병주의 총 병력은 정예 5만으로 확인된다. 일시적이나마 사례지역을 발칵 뒤집어 엎은 곽원이 기세를 감안할 때 그가 이끄는 군세는 최소 2~3만 명 이상으로 추정. 따라서 마초가 1만의 군대를 지휘해 자기 군세보다 최소 두 배 이상은 많았을 곽원을 공격해 그의 군대를 완전히 박살낸 것은 무척 인상 깊은 군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정면대결로 곽원을 깨부순 것이 아니라 곽원이 도하 중에 기습한 것이긴 하나 그것도 정확히 예측하고 군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빠르게 치고 들어가야 성공할 수 있는 법이니 마초의 용병술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전투 과정에서 마초는 화살을 맞아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부상투혼을 발휘해 종횡무진 군세를 이끌어 곽원군을 궤멸시키고 사례 방면을 안정시켰다.[82]

또한, 30대 중반의 나이에 전투력은 강하지만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율할 정치력의 결여로 조금만 수틀려도 와해되기 십상인 중구난방 관서의 군벌들을 규합하여 구심점이 되어 군벌 연합체를 이끌었다. 이때 마초는 분명 명성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딱히 두드러진 위상을 갖춘 게 아닌 여러 갈래의 서북방 군벌 가운데 한명에 불과했고 이 시점에 서북방 군벌 가운데 가장 알려진 인물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분명 수십 년의 세월에 걸쳐 끊임없이 중앙권력과 드잡이질을 벌여 명성(혹은 악명)을 쌓은 한수였다. 연령에 있어서도 한수는 이때 이미 환갑을 넘긴 관록 있는 인물인데 지금도 유교 문화권에선 리더 선출에 있어서 나이가 작용하는 여지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감안하면 당대에 마초가 한수를 제치고 서북방 군벌 연합체의 우두머리가 된 건 꽤 파격적인 행보였다.[83] 이러한 불리한 정치적 입지를 뛰어넘어 서북방을 대표하는 군웅으로 선출된 걸 보면 마초의 군사적 재능과 리더십이 훌륭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담으로 마초가 총사령관이 되어 이끌었던 관서군에 대해 호삼성은 "이때 관서 지역의 군대는 천하에서 가장 날카롭고 강하였다"라고 평하고 있다.

주유전에 따르면 주유의 천하이분지계는 기본적으로 익주를 취하고 장로를 병합한 다음 유비가 아닌, 마초와 동맹을 맺고 조조를 압박하여 북방을 도모하는 계획이었다.[84] 이는 마초라는 군벌이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서 손에 꼽히는 지휘관이었던 주유가 유비를 제치고 아군으로 삼고 싶어했으며, 조조에게 위협이 될만한 영웅이였다는 뜻으로 마초의 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라 볼 수 있다.
마초는 보병과 기병 만여 명을 이끌고 조조군을 추격하여 왔는데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허저는 조조에게 적군이 너무 많이 오고, 지금 병사들은 이미 다 건넜으니 떠나야만 한다고 말하고는 조조를 부축하여 배에 태웠다, 적군은 더욱 빨리 추격하였고 군사들은 배에 오르려는 자들을 죽이고 왼손으로 말 안장을 들어 조조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사공이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자, 허저는 오른손으로 배를 저어 나아가게 하여 가까스로 황하를 건넜다. 이날, 허저가 없었다면 조조는 위험에 빠졌을 것이다.
정사 《허저전》

마초의 통솔력에 대해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진수와 당대의 인물들이 가장 고평가했던 부분인 용력인데, 무려 천하의 절반 이상을 석권했던 조조를 죽기 직전까지 몰고갔던 기록이 존재한다. 조조가 탄 배를 몰던 사공이 화살에 맞아죽어서 허저가 말안장을 방패로 써서 화살을 막아가며 손으로 배를 저어서 가까스로 살아났다고 하니, 무척이나 긴박하고 조조의 목숨은 풍전등화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85]

일신의 용맹이나 군을 이끌고 적절한 시기에 기습하는 능력도 뛰어났지만, 마초의 가장 큰 강점은 바로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었다. 관서에서 조조와 대결할 때 배후를 노리고 도하하는 서황과 주령을 보고 마초는 군사를 몰아 공격하고 싶어했지만 한수는 선봉군은 그냥 통과시키고 조조 본대가 도하할 때 일격을 가하자는 일종의 유인책[86]을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상황을 옳게 본것은 마초였고 관중 연합군은 서황과 주령에게 배후를 털리고 조조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내주는 빌미를 제공하는 오판이 되었다. 조조는 마초의 전략적 통찰을 후에 전해 듣고 "마초 그 아이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도 묻힐 땅이 없겠구나!"라고 탄식하였다.

이때 마초와의 전쟁을 통해 조조군 전사자가 만 단위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10만 명 중 1만 명만 날아가도 전멸 운운했던 시대상을 감안할 때 마초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긴 했어도 조조군의 피해 역시 만만찮았다는 반증이다. 결국 조조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겨우 1만 남짓한 군세로 농서 일대에서 재기에 성공했으며 적어도 자신보단 많은 병력을 거느렸을 당대의 유력한 야전 사령관 하후연을 야전에서 패퇴시켰다.[87]

허나, 장로와 유비 밑에선 딱히 두드러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한중공방전을 마지막으로 군사적 커리어가 끊긴다. 여기서 마초를 지탱해주던 한 인물의 빈자리가 크게 드러나는데, 마초의 커리어를 논할때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하면 단연 방덕이다. 전장에서 늘상 적진에 돌격하여 적군을 격퇴하였으니 방덕마등군 내의 최고의 무용을 지녔으며, 마등이 입조한 후에도 마초를 따라 반란에도 가담하고, 기성 전투에도 참가하는 등 꾸준히 마초를 지탱했다. 유비에게 관우, 장비가 있었던 것 처럼 맹장 방덕의 존재는 분명 마초에게 있어서 군재를 발휘하게 해주기 충분했다. 하지만, 장로 밑에 들어가고 마초가 유비에게로 도망치면서 둘의 운명이 갈렸다.[88] 유비가 먼저 황권을 통해 장로를 조조보다 먼저 영접하는데 성공했다면 마초에게도 가족을 비롯해 유능한 심복의 재가세로 뭔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마초는 분명 뛰어난 군재를 가진 장수지만 그런 장수도 휘하 부장들의 힘을 빌려야 한다. 대장의 작전대로 잘 움직여줄 수 있는 유능한 부장이 있다면 그 장수는 뛰어난 활약을 보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마초는 유능한 부관인 방덕을 잃었고, 이는 마초에게 통솔할 중간층의 소실로 한쪽 팔을 잃은 것과 같은 여력 상실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마초는 방덕의 빈자리를 채울만한 중간층을 재건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이처럼 마초는 당대에 훌륭한 업적을 세운 군웅으로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조조를 죽일 뻔한 전적이 있다는 점 만으로도 유력한 제후군의 수장인데다 강동의 도독과 촉한의 황제에게까지 존중을 받았으니.

마초의 용병술 중 특기할 만한 사항이라면 소수의 병력으로 속공과 기습에 능했다는 점이다. 마초의 군사적 커리어 가운데 가장 빛나는 순간들인 평양 전투에서의 곽원 참살, 동관 전투에서의 조조와의 대결, 농서에서 하후연을 패퇴시킨 것 모두 1만 명 정도의 상대보다 적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적군이 빈틈을 보이는 순간을 노려 순식간에 군사를 휘몰아 상대방을 위기에 빠뜨린 케이스다. 곽원과 조조 모두 도하 도중에 마초군의 기습을 받아 위기에 몰렸으며 하후연 같은 경우는 기성에서 200여 리 떨어진 곳에서 마초군의 요격을 받아 후퇴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빠르게 육박한 마초의 기습에 당한 상황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확실히 이런 측면에서 마초는 자신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견되기도 했던 급습의 달인 팽월과 군을 움직이는 스타일이 비슷하다. 파란만장한 마초의 일생에서 가장 정점에 다다랐던 순간은 관서 군벌군의 총대장으로서 당대 최고 군웅인 조조와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인 것이었지만 실제로 마초가 군을 지휘하는 방식을 보면 동시대 제갈량, 주유, 육손 등처럼 한 국가의 군권을 총괄하는 총사령관의 그것이라기보단 한갈래의 군세를 이끄는 별동대 사령관으로서 한 전선을 책임지고 치고 빠지며 상대방을 괴롭히는 데 특화된 모습에 가까웠고, 이는 실제로 마초가 비견됐던 팽월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5.3. 무력

심심하면 일대일 대결이 난무하는 연의가 널리 알려진 탓에 장수의 기량을 가늠하는 결정적 기준이 일신의 무용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연의에서 나오는 단기접전은 대부분 창작으로, 정사에서 군을 이끄는 지휘관이 일대일로 적장과 맞붙는 기록은 매우 찾기 힘들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휘관으로써 지양해야할 행위였다.그러나 마초 같은 경우는 일개 장수도 아니고 당대의 군웅으로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면서도 마치 여포처럼 일신의 무용을 언급하는 기록이 꽤 남았다. 이렇게 일신의 무용을 묘사하는 대목 자체가 마초의 용맹함이 비범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실제로 양부는 마초의 용맹함을 두고 그 옛날 한신, 영포와도 비견된다며 그의 위세와 영향력을 걱정하는 묘사가 정사에 등장한다. 아군도 아닌 적군의 인물이 이러한 말을 했다는 것부터가 마초의 용맹과 무력이 천하에 널리 퍼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양부 본인은 형제들과 함께 마초를 상대했다가 형제들은 모두 마초에게 죽고 본인도 여러 군데 상처를 입으며 겨우 살아남았으니 그의 우려가 기우는 아니었던 셈.

물론 염행이나 허저와의 일화를 신뢰할 경우 마초 일신의 무력을 연의에서 묘사된 수준의 만인지적의 용장으로 보기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무슨 이종격투기도 아니고 애초에 순간의 실수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단기접전에 나서고 직접 당대 최강의 군주의 암살을 시도할 생각을 한 것 자체부터가 대단한 용맹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평양전투에서 보여준 부상투혼이 사서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최소 일정 수준 이상의 용맹한 장수였기 때문에 특기할 만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기본적 조건만 추려 봐도 평생을 전장에서 살았으니 무기도 익숙하게 다를 것이고, 서량 출신으로 숱한 전투를 치뤄왔으니 말도 잘 탈 것이며, 실제 사서에 건장하다고 기록되어 있는 데다, 부상투혼을 보면 화살을 맞고 그대로 싸우는 육체적 터프함과 정신적인 강인함도 가지고 있으니 기본적으로 싸움을 잘 할 수밖에 없는 인물인 것만은 틀림없다.[89]

배송지의 마초전 주석 '전략'에 따르면 마초는 사례교위(종요)의 독군종사가 되어 곽원을 토벌했는데 날아온 화살에 맞자 주머니로 자신의 다리를 감싼 채 싸워 곽원을 격파하고 참수했다. 그만큼 마초가 용맹하기에 기록될 수 있었던 기록인데 이마에 화살을 맞고도 멀쩡히 군대를 지휘했다고 기록된 관우의 일화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5.4. 패륜아 논란?

정사에서 마초의 행동 탓에 그의 일족과 부하들이 위해를 당한 비극이 여러번 언급된다.
  • 마초는 아버지 마등 등 자신의 일족이 중앙권력에 출사해 있는 상태에서, 즉 적의 손아귀에 인질로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고 그 여파로 아버지를 비롯한 일족들이 조조에게 몰살당했다.[90]
  • 위략에 따르면 마초는 처음 한수와 결탁할 때, 한수에게 자신의 부친을 버리고 한수를 부친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심지어 한수가 마등의 처자식을 죽인 적이 있는데도 그와 결탁한 것이다.
  • 패륜로서의 행동은 아니나, 한중을 탈출해 유비에게 귀순할 때 첩 동씨, 아들 마추를 버리고 갔다. 이때, 부하 방덕도 함께 남겨진다. 다만 이는 장로에게 주변에서 마초는 어버이를 버린 인간이니 믿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여 장로와 사이가 벌어졌던 상황에, 장로의 지원군을 받았음에도 양주를 공략하는 데 실패했고, 장로의 장수인 양백이 마초의 유능함을 시기했기에, 이런 불리한 상황을 버티지 못한 마초가 저족에게로 달아났다가 결국은 유비에게 귀순했던 상황이다. 한마디로 장로군 내부에서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던 마초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자기에게 호의적인 저족에게 도망가야 했을 정도로 마초의 상황이 좋은 게 아니었는데 유비의 제안으로 한줄기 구원을 얻은 셈인 것이다. 사실 이 점도 다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91]

이렇게 정사에서는 그의 아버지와 일족을 버린 마초의 패륜을 언급하는데 사실 마초 이외에도 당시 인물들 중에는 패륜행위로 비난 받을 일들이 있었다.
  • 부하의 의견을 듣고 마초를 사위로 삼으려는 계획을 철회한 장로부터가 원래 유언의 부하였는데 유장이 유언의 뒤를 잇는 정권이양기의 공백을 틈타 반란을 일으켜 오두미도를 중심으로 한중 일대를 독자 세력화하면서 유장의 말을 무시하여 모친을 비롯한 일족 전체를 상대로 결과적으로 패륜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였다. 마초를 비난한 장로임에도 마초와 가장 유사한 행동을 하였다는 점이 특이사항이다.
  • 원소는 원봉의 얼자로 이미 죽은 원성의 가문으로 입적된 상황에서 6년상을 치루어 효자로서 명성을 올렸었다. 하지만 동탁이 정권을 잡자 일족이 경사에 있으면서도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몸을 빼 관동에서 거병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 조정에 적대하면서 정작 당시 동탁의 위세 아래에 있던 친어머니와 일족 50인이 몰살 당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동탁이 자리잡은 정부의 칙사를 살해하는등 기세가 등등하였다[92].

이 셋 중에서도 당대엔 유독 마초의 패륜행위가 자주 비판되었다. 그 사정을 논하면 다음과 같다.
  • 양부가 마초는 아버지를 배신했다고 언급한다.
  • 강서의 어머니가 마초를 꾸짖으며 부친을 배반했다고 언급한다.
  • 장로는 마초를 높게 평가해 자신의 딸 장기영과 결혼을 시키려고 했으나 마초가 가족을 아끼지 않는다고 반대하는 의견을 듣고는 생각을 바꿨다. 이는 마초의 전처가 적에게 죽었는데 장로의 딸이라고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뜻이다. 역시나 마초는 유비에게 투항할 때 처자를 버리고 갔다.

그런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당대에 마초를 주로 패륜아로 비난하던 이들은 그와 대결하던 조조 휘하 지방 속관들이나 그들의 가솔들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장로의 경우엔 본인 스스로가 이미 마초와 같은 전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더더욱 마초를 꺼리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당대에 또 다른 군웅인 유비는 그의 불효를 논하기보단 그의 재능이나 위명에 관심을 두어 마초를 얻자, 내가 익주를 얻었다며 기뻐한 사실도 분명 존재하였다. 또 마초가 일족을 배반했어도 농서지방의 수많은 호족들이나 이족들은 여전히 마초를 따르며 그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명성 항목에도 나오지만 그가 주로 패륜아 소리를 들었던 건 조조 휘하 지방 속관들 상대였을 때였고 무조건 당대에 패륜아라고 매도당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측면으로 봐도, 마초가 가족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냉혈한만으로는 볼 수 없는 대목도 존재한다.
  • 마초가 양주를 잃고 한중으로 도피했을때 눈치없이 정월을 쇠자는 첩 동씨의 동생 동충, 그러니까 처남의 부박함을 꾸짖으며 죽은 가족들을 생각하며 오열했다.
  • 임종을 앞두고 유비에게 일족이 마대밖에 안 남았으니 종족의 제사가 이어지게 해달라고 서글픈 유언을 남겼다.[93]

또한 마초 이외에도 당시 인물들 중에는 장로, 마초, 원소급은 아니지만 가족을 저버린 패륜행위로 비난받을 일들이 있었다.
  • 제갈각손권의 의심 혹은 숙청을 피하기 위해 장남 제갈작을 독살했다.
  • 왕이는 마초의 가족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 자식을 인질로 보내는 걸 허락했고 아버지 조앙이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자 그런 자식이야 군부보다 더 중하냐면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하였다. 왕이가 조월의 계모도 아니고 엄연히 친모인데 이런 말을 했는데 조월이 왕이한테 무언가 잘못해서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일까? 오히려 이후 마초는 자신의 가족들이 왕이에 의해 죽었을 때도 조월을 죽이지 않았고 왕이가 마초를 계속 공격하자 그제서야 죽였다. 그럼에도 그는 절개높은 부인으로서 황보밀의 열녀전에 실렸다. 왕이는 마초의 처를 친구로 두고 친구를 배신했고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볼모로 둔 아들을 끝내 외면했으니 그녀가 저지른 일이 결코 작지 않다. 특이 이 부분은 왕이 역시 마초를 군부와 아버지를 버린 자라며 비난한 자들과 연계한 사람으로서 이런 행동을 했다는 점에서 마초를 비난했던 자들이 무작정 마초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처지는 못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만 이는 당대의 시각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왕이의 동기는 임금을 위한 것이었으나 마초의 동기는 스스로를 위한 것이었고,[94] 왕이가 희생한 것은 아들이었지만 마초가 희생한 것은 아버지였다.
  • 마초와 연합한 한수 역시 업에 자기가 볼모로 보낸 자신의 자손들을 조조에게 잃었다. 한수 역시 조조에게 위협을 느끼고 부하인 염행이 마초와의 동맹을 말렸음에도 자진해서 연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한수의 상황이 더 웃기는 건 동관 전투 이후, 염행을 사위삼아 자기처럼 가족을 조조에게 잃게해 '불효자'로 만들어 자신에게 복속시키려는 한수와 마초와 한수의 친족들은 아무렇지 않게 죽였으면서도 친 조조 성향 관중군벌인 염행에게는 특별히 회유책을 구사해 '불효자가 되어선 안되지 않겠냐?'고 은근히 볼모로 잡힌 가솔들에 대한 협박과 이간책을 동원하는 조조간의 정략싸움 때문이다.[95] 이 두 명의 늙은 능구렁이들에게 이용당하던 염행이 가족 때문에 오락가락 하다 결국 주인인 한수에게 반기를 들고 그게 실패해 조조에게 귀순하는 장면은, 후한 말 이 시대에 효(孝)라는 가치가 얼마나 정략적으로 이용되었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염행이 불충이냐 불효냐 사이에서 고민하며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불충'을 선택하며[96] 괴로워하는 장면은 한때 그와 단기접전을 벌인 '불효자 패륜아' 마초가 나중에 '일가친척이 다 죽었는데 기뻐할게 뭐가 있느냐?'면서 피를 토하면서 통곡한 장면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 한종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불안해하다 손가 3대를 섬긴 충신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한당의 시신이 담긴 관과 함께 위나라로 투항해 한당은 평생을 싸웠던 적국인 위나라에 묻혔다.

분명 마초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패륜을 저지른 것은 부정할 수 없고, 당대에도 마초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패륜아, 냉혈한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투영된 건 사실이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마초가 스스로의 결단으로 패륜을 저지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를 인간적 감정이 없는 냉혈한으로 치부하는 것은 남겨진 기록을 봐도 무조건적으로 그렇다고 볼 순 없다. 차라리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일족을 멸하게 했다는 것에 더 가깝다고 하면 모를까.[97] 당대에도 이와 같이 자신의 결단으로 인한 결과로 가족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이 없지 않았다, 또 굳이 마초 같은 사례가 아니더라도 이 혼란한 시대의 사람들이나, 군웅들에겐 그럴 의도가 있던, 혹은 그렇지 않던 종종 이런 종류의 일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서 군벌이 봉기한 이유에 대해선 조조의 계략이라는 설도 있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
장로가 한중을 점거하니 3월에 종요를 보내 장로를 토벌했다. 공이 하후연 등에게 하동(河東)에서 나와 종요와 합류하게 했다. 이때 관중(關中)의 제장들은 종요가 습격하고자 하는 것으로 의심하니, 마침내 마초가 한수, 양추, 이감, 성의 등과 함께 모반했다.
라는 무제기의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관중 군벌이 조조가 종요로 하여금 한중을 토벌할 것을 명했을 때, 이것이 양주 군벌들을 자극하여 조조가 습격하려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이것을 바탕으로 조조가 이를 기회로 반란을 유도했다는 의견을 보이는데 실제로 원나라 시기에 자치통감에 음주를 단 학자 호삼성은 이를 조조의 허허실실에 의거한 계략으로 보았다.[98]

당시 관서 군벌과 조조의 조정세력은 언제라도 서로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팽팽한 긴장 상태를 유지한 것으로 보이며 정사에 남아 있는 기록들만 조합해도 이런 긴장 관계가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호삼성의 서술대로 마초가 조조의 선제도발 혹은 계략에 말려들어 자기 영역을 보존하려고 수동적으로 봉기한 군벌이라는 시각을 강화한다면, 마초의 행적은 분명 변호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마초는 조조와의 전쟁이 장기화되자 먼저 사신을 보내 화해를 요청하고 자신의 영토를 보존해 줄 것을 청했다, 즉 마초 역시 처음부터 자신의 가족이 죽을 때까지 싸울 생각은 아니었던 것이며, 조조는 마초의 타협안을 거절하고 후일 마초가 격파되고 관서지방으로 도주해 천수에 도착하자마자 인질은 필요없다는 식으로 그제서야 마등의 일족을 죽인다. 물론 이는 군벌연합체의 수장으로서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구심력 와해를 우려한 제스처일 수 있겠지만 애초에 마초의 봉기가 조조에 대한 적극적인 대항의지에서 기인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대목이다.

그렇기에 여기서 마초도 마초지만 아버지 마등 역시 비판받아야 할 여지가 있다. 마등은 조조에 순응해 업으로 일족과 이주하면서 마초만 양주에 남겨 자신의 본거지를 관리하게 하는데 이것은 본인의 생명까지 빼앗은 마등의 말 그대로 치명적인 실수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마등은 업에 이주함으로서 조조 체제에 순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양주에 남겨둔 자신의 기반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어차피 조조가 언젠가는 이 지역을 차지하려 들테고 관중제장들이 이에 반발할 것은 필연적이었으며 관중제장 중 하나인 마초도 어쩔수 없이 주변 제장들에게 공격받지 않으려면 조조와 싸우지 않을수가 없게 된다. 즉 마초만 양주에 남겨둔 건 사실상 마초를 조조와 싸우도록 놔둔 셈이 되어 마초의 인생이 거하게 꼬이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본인 일족의 명을 재촉한 셈이 되었다. 업에 이주할거면 깔끔하게 양주의 본거지를 포기하고 확실히 장남 마초까지 이주를 시켜서 장로처럼 한 자리를 얻게 하거나 아니면 계속 양주에 있는것이 차라리 나았다.

그리고 마초가 유비에게 투항할 때 부하 방덕을 버리고 갔다고 비판하는 시각이 타당하다면 유비 역시 전예, 진군, 진등같은 특급 인재들을 버린 셈이 된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데려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가족조차 데리고 가지 못했을 정도였는데 방덕과 같이 유비에게로 귀순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장로, 원소와 같이 마초와 비슷한 경우가 있었고, 꼭 "패륜아"에 해당하진 않지만, 조조, 유비, 손권의 경우에도 세력화와 권력화의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친인척이 위기에 빠지는 일이 있었다.

특히 원소와의 비교가 볼만한데 분명 마초와 같이 그 역시 중앙정부에 봉기하여 인질로 잡혀 있던 일족을 죽게 하였음에도 그는 오히려 충신열사로 명망을 더하고 패륜아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는 원소가 6년상을 치르면서 천하에 효행으로 이름을 높은 명망, 역적 동탁을 죽여 나라를 평온케 한다는 명분이 마초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초와 비교하면 마초는 기껏해야 관서의 군벌 중 일부로 봉기 당시에는 오히려 한수가 더 명망이 높았던 상황이었으며[99] 명분 역시 관서군벌의 안전이라는 명분으로 원소의 '동탁이라는 천하를 혼란케 하는 대역적 토벌'보다 그 명분이 부족한 편이었다. 또 원소는 천하의 공적으로 찍인 동탁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와 타협은 안한다!'는 자세로 갔지만 마초는 계속 협상을 요구하고 화해를 하려고 하면서 아울러 인질을 계속 요구하였는데 이는 업으로 가 있는 인질화된 일족에 대한 보험을 필요로 했다는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다. 마초는 이쯤하면 우리가 그만두겠다는 자세를 취했으니 어쨌든 아직 천자의 신하로서 천하를 주무르던 조조에게 타협할 수 있다고 여겼다.

결국엔 유사한 상황이어도 원소는 원씨 일족이 몰살당한 것에 대한 동정표가 더해졌으나 마초는 아비를 죽게한 패륜아 소리를 들었다. 한대의 법률에는 아무리 큰 죄를 저지른다 해도 어린아이와 늙은이에게 까지는 연좌시키지 않았으나 후한쯤 가면 거의 사문화 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원소의 일족이 몰살당할때는 이 규정으로 원소가 동정을 더 받았었는데 마초는 그렇지 않았고 그냥 닥치고 욕을 먹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또 생각외로 중요한 두 사람의 차이점인데 마초는 아버지를 비롯한 일족들이 자기들 의지로 중앙에 가 있는 것이었기에 자신이 간섭해 여기에 머무르라고 할 상황이 되있지 못했다. 이후 중앙에 위협에 맞서 봉기한 이후 화해를 청하고 이쪽에서도 향후를 대비한 인질을 받아내려 했다. 또 마초는 아비를 버리고 한수를 아버지로 섬긴다고 말로만 그랬을뿐이지, 실제로는 서로를 전혀 믿지 못해 내분을 일으켰다. 한수가 마초의 말을 무시하고 작전을 내리거나 가후의 간단한 이간책으로 만으로도 아비라고 불리던 한수를 친 마초이다. 이랬는데 아버지 운운은 그저 당장이라고 무너지기 쉬운 관서군벌들의 집합을 결속하려는 말 이상은 되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관서군벌의 수장으로서 아직 젊었던 그는 모래알 같은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자신과 버금가는 세력의 한수와 연합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결국 그것때문에 무너졌다는 것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원소는 당시 수도를 관장하는 사례교위였고 수도에서 몸을 뺄 때 동탁이 그의 명망을 보고 함부로 죽이지 못하고 바로 발해태수가 되었었으므로 일족을 소수라도 수도에서 빼낼 시간은 많이 있었다, 즉, 그는 동탁과 맞설 작정을 했고, 일족을 빼낼만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거병하기 이전에, 친어머니를 비롯해, 단 한명의 친족도 동탁의 위협에서 빼내오지 않았다.[100] 더욱 섬뜩한건 이런 지경임에도 그는 여전히 효자라며 칭송을 받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원소는 이런 원가의 몰살로 인한 동정과 그 자신에게 주어진 원가로서, 효자로서의 명망으로 인해 마초와 달리 엄청난 세력을 결집시키는데 성공하고 유우 옹립 실패 이후에도 이런 명성을 바탕으로 하북을 제압하는 등 강한 결집력과 독재적인 카리스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그 독재적인 행동으로 인해 무너지지만 같은 처지에 처한 두 사람의 행동이나 처지가 완전 달랐다는 점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앞 문단에 언급된 바와 같이, "역적의 토벌" VS "관서군벌의 안전" 이라는 명분의 차이와 더불어, 당시 원소는 6년상이라는 고행에 가까운 행위를 하면서 얼자 신분을 걷어내고 얻어낸 당대의 효자라는 명성도 있었기에, 원소의 행위로 인한 일족의 몰살은 마초와 달리 당대 인사들에게 오히려 동정을 샀다. 반면, 마초의 경우는 위의 명분의 차이에 더불어서, 마초 본인의 일가가 강족의 피가 섞인 이민족이었고 심지어 마등의 경우도 자기 아들과 똑같이 중앙정계에 반란을 일으켰던 군벌들 중 하나였기에 이런 동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 '반 이민족이자 반란군 자식 놈이 괜히 봉기해 일족을 죽게 했다'는게 더 부각되었다. 실제로는 비슷한 행위임에도 평가가 갈리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가 있던 것이다.

굳이 더 따지면 한 사람은 오히려 어떻게든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사태를 종결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협상을 하고 다른 한쪽은 겉으로는 역적을 친다는 명분하에 자신의 야망을 위해 가족이 어떻게 되던 말던 밀어붙였음에도, 세간의 평가는 완벽히 정반대로 흘렀던 것이다. 이런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일족을 버렸음에도 결국 효와 일족에 대한 정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던 자'와 '효를 자신의 입신양명에 철저히 이용한 자'의 대비되는 평가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어찌보면 마초의 패륜아 논란은 명분으로서의 효와 실제적인 당대 인물들의 행동이 괴리되었던, 유교의 효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이용되어 모순을 보였던, 혼란한 한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마초는 융족을 믿고 용맹에 힘입어, 그의 일족을 뒤집었으니, 애석하구나!(그러나) 곤궁함으로 인해 편안함에 이를 수 있었으니, 오히려 낫지 않은가!"라고 평가했다. 진수는 위진 정통론자이며 유교적 가치가 절대적이던 시대에 살았던 선비답게 어떠한 인물을 평가할 때 유교적 가치에 입각해 품성과 도덕성을 매우 중요시 한 사가였다. 그래서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인격에 하자가 있다면 가차없이 비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령 당대 이미 전 중국 최강의 무장으로 높게 평가되던 만인지적 관우장비와 같은 경우라도 그들의 군재와 무용, 주군에 대한 충성심 같은 장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들이 인격적 결함 때문에 곱게 죽지 못했다는 식으로 거침 없이 비판했다. 반대로 단독으로 일군을 이끈 경험이 별로 없어서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엔 논란이 있는 촉한의 조운이나 무장으로서 군재는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한 조위의 하후돈 같은 경우는 그들의 고결한 품성과 충성심, 인격을 높이 사 종합적으로 매우 후한 평가를 해주었다.[101]

그런 깐깐한 진수이기에 정말로 당대 사람들에게 마초가 패륜아로 이미지가 고착화 됐다면 당연히 마초를 혹평했을 법도 한데 정작 진수는 마초를 평할 때 마초와 극렬히 대립했던 조위 영향권 옹양주 명사들의 시각처럼 마초의 행적 가운데 패륜적인 측면을 부각하고 비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용력과 이민족들의 인심에 의지해 군을 일으켰다 일족을 망치고 그런 곤궁함에 인해서야 태평한 방향으로 나간 안타깝고 불쌍한 사람으로 여긴 걸 보면 당대 사람들이 마초를 진정 어떤 인물로 간주하고 있었는지 그 단초를 알 수 있다.

중국에서도 마초의 행보가 크게 논란인지 한쪽에서는 마초에게 모든걸 짊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반대쪽에서는 동탁보다 더한놈이라고 욕을 먹고 바이두 위키에서 마초를 소개하는 영상 제목은 마초를 사기꾼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6. 이야깃거리

  • 영어 Macho와도 혼동되기도 한다. 실제로 용력이 대단했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고 마초스러운 인생을 살다간 마초에게 있어서 저 '마초'라는 표현은 꽤나 잘 어울리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 후대에 와서는 뛰어난 용력과 인상 깊은 군사적 행보,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명성이 주목을 받아 '서량의 금마초'라는 멋들어진 이명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점이 크게 각광받아 예로부터 명성이 자자했던 관우, 장비, 황충, 조운과 함께 촉나라의 오호대장군으로 떠받들어 지는 것으로 나온다.
  • 연의와 정사에서의 공적 차이가 크지 않은 촉한의 인물이기도 한데, 연의에 나온 굵직한 전공들은 거의 모두 정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조조를 죽일 뻔한 동관 전투와 양주에서의 세력 회복 및 하후연 격퇴와 성도의 유장 항복에 일조한 것 등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 명나라 가정제 시절, 하량신이라는 장수가 예로부터 전해지는 검법을 언급할 때 유비의 고응법과 더불어 '출수법'이라는 마초의 검법을 거론한 적이 있다. 중국에서는 이 출수라는 단어를 직역하여 발도술의 모태가 아니냐는 가설을 내세웠다.
  • 동진의 1대 황제 원제[102]보다 생년과 몰년이 둘 다 정확히 100년씩 이르다. 마초는 176년생에 222년 몰, 원제는 276년생에 322년 몰이다.

7.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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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 한수 후선 정은 이감
장횡 양흥 성의 마완 양추


[1] 하늘이 내린 장군[2] 관장황조는 사망년도만 나와있지 출생년도는 불분명하다.[3] 삼국지 촉서 허정전 주석 익주기구전.[4] 배송지 주 전략.[5] 삼국지 위서 장기전 주석 위략.[6] 삼국지 위서 종요전 주석 배송지 주 전략.[7] 가규도 이때 포로로 붙잡혔었다.[8] 사례(司隸) 하동군(河東郡) 평양국(平陽國)[9] 의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함부로 화살을 뽑았다가는 더 큰 출혈이 일어나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하다.[10] 삼국지 위서 장기전, 자치통감.[11] 사병(私兵)을 뜻한다.[12] 배송지 주 전략.[13]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다른 관점으로 해석해야 하는 게, 조조는 양주 이민족 세력의 안정을 위해 마등에게 관직을 주고 좋게 대우해준 것이다. 즉, 양주에서 마씨 일가가 입김을 발휘하고 버티고 있어줘야 조조의 계책이 작동하는 것이지 마씨 일가가 군대를 해산하고 양주 세력을 다른 이에게 넘긴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론 훗날 이 판단으로 인해 마초나 다른 이민족 수장들이 중원을 공격하지만, 이 역시 조조의 한중 공격으로 인한 이민족 세력의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지 마초의 단독 행동이 아니었다.[14] 삼국지 촉서 허정전 주석 익주기구전.[15] 삼국지 오서 주유전.[16] 다만 애초 조조는 마씨 일가가 양주 이민족을 통제해주길 바라고 마등을 대우해준 것으로, 마씨 일가의 누군가는 양주에서 남아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마초의 중원 공격도 마초가 입신양명을 위해 가족이 죽어도 좋다라는 해석보단 마초도 공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해야 하는 게, 마초의 군대는 수많은 이민족들의 연합체로 실제 전쟁 당시에도 수장들끼리 의견이 엇갈려서 제대로 된 공세를 펼치지 못하는 일이 많았던 만큼, 양주 전체의 인심이 이미 반 조조로 돌아섰는데 업에 가족들이 있다고 마초 혼자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17] 삼국지 위서 고유전.[18] 위기전 주석 위서.[19] 배송지 주 전략.[20] 연의와 달리 마초가 장안을 점거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정사 삼국지 내에 없다, 장안 넘어에 있는 동관을 포위했다고 나와 정황상 장안을 점거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은 있으나 직접적으로 마초가 장안을 함락했다라는 식의 기록은 없으며 장안 점거를 한 건 아니고, 장안에서 못 기어나오게 위협만 한 후 우회를 하였다는 것이 대세. 실제 드라마 삼국에서도 이걸 고려해 마초가 장안을 무시하고 동관으로 바로 진격하는 식으로 나온다.[21] 삼국지 위서 장기전 주석 위략.[22] 삼국지 위서 두기전.[23] 삼국지 위서 장로전 주석 위략.[24] 삼국지 위서 서황전.[25] 삼국지 위서 무제기.[26] 삼국지 위서 무제기 주석 산양공재기.[27] 삼국지 위서 무제기.[28] 삼국지 위서 무제기.[29] 삼국지 위서 무제기 조만전.[30] 담을 양쪽에 쌓아 만든 통로다.[31] 삼국지 위서 누규전.[32] 삼국지 위서 가후전.[33] 삼국지 위서 무제기 주석 위서.[34] 일단 자치통감에서는 이 기록을 배제하였다. 자치통감의 국내 번역자인 권중달 교수는 원저자 사마광이 이를 사서에 수록하지 않은 것을 들어 허저전의 내용이 조작일 것임을 의심하고 있는데 다만 이 부분은 앞선 기록들에서 허저가 호위하여 마초가 실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하기에 시도 자체는 사실이지만 내용을 허저의 용맹을 강조하기 위해 부풀린 기록이라는 의견도 있다.[35] 삼국지 위서 가후전[36] 삼국지 위서 위기전 주석 위서[37] 이각, 곽사전.[38] 삼국지 위서 양부전.[39] 삼국지 위서 하후연전.[40] 삼국지 위서 염온전.[41] 강유의 아버지 강경이 이때 강족의 봉기를 막다가 전사했다는 설이 있으나 마초의 공격 말고도 강족과 저족을 수시로 이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켜왔기 때문에 시점을 확언할 수는 없다.[42] 삼국지 위서 양부전.[43] 삼국지 위서 염온전.[44] 양부전 주석 황보밀 열녀전 왕이.[45] 삼국지 위서 양부전.[46] 삼국지 위서 하후연전.[47] 양부전 주석 황보밀 열녀전 왕이.[48] 삼국지 위서 양부전.[49] 양부전 주석 황보밀 열녀전 왕이.[50] 삼국지 위서 무제기.[51] 양부전 주석 황보밀 열녀전 왕이.[52] 삼국지 위서 하후연전.[53] 배송지 주 전략의 기록.[54] 배송지 주 전략의 기록.[55] 마초는 모든 걸 잃은 시점에서도 유독 이민족들에 대한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한수에게 붙었다 하후연에게 깨진 저족의 천만도 이 시기 마초에게 도망오기도 하고 말이다.[56] 삼국지 촉서 관우전.[57] 자를 부르는 것은 상대방과 신분이 동등하거나 높을 때 가능하며, 하급자가 상관의 자를 부르는 건 불경하다 여긴다. 부하가 상관을 부를 땐, 직책으로 부르는게 일반적이다.[58] 마초전 주석 산양공재기.[59] 신 송지가 보건대(주석자인 배송지裵松之의 견해), 마초는 궁박해져 유비에 귀의하여 그의 작위를 받았는데 어찌 오만하게 유비의 자를 부를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유비가 촉으로 들어올 때 관우를 남겨 형주를 진수하게 했으니 관우는 일찍이 익주 땅에 있은 적이 없다. 그래서 관우는 마초가 투항했다는 말을 듣고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주는 누구에 비견될 수 있는지를 물은 것으로 이 책(산양공재기)이 말하는 바 대로가 아니니, 관우가 어찌 장비와 함께 곧게 서 있을 수 있었겠는가? 무릇 사람이 일을 행할 때는 모두 그것이 가능하다 하여도 불가함을 알면 이를 행하지 않는 법이다. 과연 마초가 유비의 자를 불렀다면 또한 이치로 볼 때 의당 그리해도 된다고 여겨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령 관우가 마초를 죽일 것을 청했다 하더라도 마초는 이를 듣지 못했는데, 단지 두 사람이 곧게 서 있는 것을 보고 무슨 까닭으로 이내 (자신이 유비의) 자를 불렀기 때문임을 알아채고는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다’고 말했겠는가? 말이 이치에 닿지 않음이 너무 심해 가히 분질(忿疾-분노하고 미워함)에 이르는구나. 원위(袁暐-헌제춘추의 지은이), 악자(樂資-산양공재기의 지은이) 등이 기재한 여러 대목은 추잡하고 헛되고 그릇되니(穢雜虛謬) 이와 같은 부류가 거의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다.[60] 삼국지 촉서 팽양전.[61] 배송지 주 전략의 기록.[62] 삼국지 촉서 선주전.[63] 삼국지 위서 양부전.[64] 삼국지 위서 무제기.[65] 삼국지 위서 조휴전.[66] 삼국지 위서 무제기.[67] 삼국지 촉서 황충전, 이를 통해 마초가 편입된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유비군 내에서 장비나 황충보다 높고 관우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68] 유비의 수하가 된 후 마초는 다시 가정을 꾸려 아들 마승을 얻어 그가 후사를 이었지만 마승이 어린 탓에 마대에게 가문의 제사를 맡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유비에게 귀순하고 새로 가정을 꾸렸을 때가 214년 이후라 보고 222년 마초가 죽었으니 아이의 나이를 높게 잡아봐야 8세다.[69] 유리가 요절하는 바람에 딸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리의 사망연도가 244년인데 가정을 꾸렸을 때가 214년 이후라 보면 당시 마초의 딸은 적어도 30세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70] 마초는 제갈량보다 5살 연장자였다. 관장황조 등 1세대보다는 제갈량을 비롯한 2세대들에 더 가까웠다. 유비가 마초를 영 양주목에 임명한 것도 북벌에서 그의 역할에 크게 기대를 한 인선이었던 걸로 보이지만 둘 다 이릉대전 시기에 세상을 떠났으니 참 얄궂은 상황이기도 하다.[71] 동충과의 일화 당시 피를 토했다는 기록을 신뢰한다면 가족들을 잃은 스트레스로 장로에게 몸을 의탁했을 당시에도 이미 건강이 악화된 상태일 가능성이 있다.[72] 덤으로 부하들에게 조조를 잡는 자에겐 무려 열 계급 특진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참고로 현실에서 어느 나라든 보통 많아봤자 2계급 특진인데 이 경우는 어마어마한 공을 세워야 할정도로 매우매우 드물다고 볼 수 있다.[73] 다만 아주 비중이 없다고 보기는 어려운게, 가장 유명한 위연을 참한 사건은 역사에서도 기록되는 사실이고 마대가 상장으로써 군사를 이끌고 조위를 침공했다는 기록도 있다.[74] 이름이 아니라 그저 강족 여성이란 의미다.[75] 사실 마등은 강족 어머니 이전에도 수 차례 혼혈이 일어나서 얼굴이 서구인같았다는 기록을 보면 실제 비율은 쿼터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 당대 이민족들의 혈통주의 문화를 생각한다면 마초가 이들에게 그만한 지지를 받았던 것은 그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앙의 높으신 분들은 마초가 동한 개국공신 마원의 후손임에도 반오랑캐라고 디스했다. 거기다 이민족과 결탁했다는 이미지 때문에 후세에는 마초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였다.[76] 그러나 마초가 재기할 때 농서에 집결한 병력이 마초 직계 패잔병, 서북방 여러 이민족, 양앙이 이끄는 장로의 원군 포함 고작 1만 명 수준이었다는 기록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그 전까지 조위의 자장권이라고 보기 힘든, 외려 마초의 홈그라운드에 가까웠다면 가까웠을 곳에서 결국엔 내부의 친 조조 세력을 방치한 것이 문제가 되어 마초가 농서지역에서 축출된 걸 보면 마초의 전성기는 조조와의 대결에서 참패한 시점에 끝났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물론 애초에 농서 지역 자체의 인구가 적고, 마초가 농서 전체의 지배자라기보다는 연합세력의 수장이었다는 점, 농서가 이미 조조의 군세에 패배하며 인구가 줄어들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초에 대한 농서 지역에서의 지지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며, 마초가 농서를 둘러싼 여러 세력들, 그러니까 저, 강, 장로의 봉기를 유발시켰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마초가 양부를 죽여 내부의 조조 추종세력에 대한 정리를 분명히 했다면 양주는 마초에 손아귀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마초 세력 자체가 전투에 특화된 군사 집단이기에 후방에서 내정을 돌볼 문관 성향의 인재가 거의 없었다는 한계가 재봉기 실패의 핵심인 셈이다. 양부는 당시 이미 중앙권력에 능력을 인정받은 인재이고 또 후에 유엽과 조조로부터 삼공급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긴 하지만 극친조조 성향의 인물인데 오죽 내정을 돌볼 사람이 없었으면 그런 양부마저 아쉬워서 강제로 기용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77]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중왕표를 올리던 시점, 즉 한중왕에 즉위하기 직전 기준이다. 이때 기준으로 마초의 벼슬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마초의 이름이 가장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평서장군이란 (좌장군이 속한) 사방장군보다 아래인 사평장군에 속하는 직위이며, 유비는 유장과 전쟁을 벌이던 도중 군벌급인 마초가 자신에게 귀부해오자 크게 기뻐하며 좌장군의 권한으로 임의로 평서장군 직위를 내렸다. 이로 인해 한중왕표를 올릴 당시 기준으론 (권한은 높지만) 잡호장군 직위였던 제갈량이나 관우보다 마초의 벼슬이 높았다. 이후 유비가 한중왕에 즉위한 이후 사방장군을 임명할 때는 좌장군에 마초를, 관우를 전장군에, 장비를 우장군, 황충을 후장군에 임명한다. (좌장군이 전장군보다 위인 경우가 많기에 마초가 관우보다 위 서열로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론 관우가 위라고 보는게 맞다. 자세한 이유는 후술) 즉 정리하면 실제 유비 세력 내의 입지로 따지면 형주 측 사령관이었던 관우가 명백히 No.2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관우는 당시까지 (적벽대전 이후 유비가 내린) 양양태수 및 탕구장군의 벼슬 밖에 없었던지라 일시적으로 유장 측에서 영입된 인물들, 마초, 그리고 제갈량보다도 낮은 직위에 있었던 것이다.[78] 관우와 마초의 우열에 대해서: 위 각주에 언급됐다시피 사방장군 중에는 (원칙적으로 상호우열이 없으나) 보통 좌장군이 제1순위가 되는 경우가 많아, 기존 서술에서는 유비가 한중왕으로서 좌장군에 임명한 마초를 전장군에 임명한 관우보다 높은 벼슬을 주었다고 적혀있었다. 그러나 좌장군이 최고순위인 것이 고정인 것은 아니며, 마초와 관우의 경우 관우가 약간이나마 위였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당시 마초는 가절에, 관우는 가절월에 제수되었기 때문인데, 가절 (假節)이란 전시에 군법을 어긴 자를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지칭하며 가절월((假節鉞)은 가절을 받은 신하조차 죽일 수 있는 권한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가절 외에 지절, 사지절의 권한이 있는데 가절월은 가절, 지절, 사지절을 가진 이를 모두 처벌할 권한을 갖는다. 실제로 마초, 그리고 그보다 약간 아래인 우장군 장비는 둘 다 가절을 받았으나, 가절월을 받은 신하는 관우 뿐이었다. 즉 만약 여기서 좌장군 마초가 전장군 관우보다 위라고 본다면, 약간이나마 아래 직위인 관우가 상위 직위인 마초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는 모순이 생겨버린다. 촉한이 규정하는 가절과 가절월의 권한이 이와 다르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관우가 당시 장비와 마초보다 상위의 권한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가절월 자체가 가절의 권한을 포함한 권한이기 때문. 이 점으로 봤을 때 최소한 한중왕 유비가 벼슬을 내린 의도는 관우가 마초보다 더 높은 직위를 주려고 했다고 보는게 더 타당하며, 당시 유비 진영에서 관우의 지위나 권한을 볼 때 이게 더 자연스럽다. 벼슬명이나 직위, 상대적인 권한은 고정된게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했기 때문에 절대적인 게 아니었다. 추가로 조조가 위왕에 올랐을 당시 하후돈을 전장군, 우금을 좌장군에 올린 적이 있었는데, 조조 휘하에서 하후돈의 직위와 권한은 그 전이나 후에나 항상 우금보다 우위에 있었다.(하후돈은 조위가 황제국이 된 이후 최초의 대장군 자리에 올랐으며, 원래 조조는 위의 관직을 준 다른 신하들과 달리 하후돈만 한의 관직을 주려고 했으나 하후돈 본인이 극구 사양해 전장군직을 준 것이다) 즉 정황상 최소한 한중공방전~번성공방전 즈음 시기에 조위와 촉한에서는 전장군이 좌장군보다 우위였다고 보는게 더 그럴 듯 하다.[79] 추가로 난세이던 당시엔 벼슬을 내릴 중앙정부 자체가 무너져서 실제 권한과 벼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조조 측의 넘버투에 가까운 하후돈은 많은 권한을 갖고 있었지만 조조가 위왕에 오르고 전장군에 임명하기 전까진 (이때도 유일하게 조조 본인과 동일한 한나라의 관직을 줘 특별대우를 해줬다) 잡호장군에 해당하는 직위였다. 하후돈의 최종직위가 대장군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의 대략적 위치를 알 수 있다. 손권이 적벽대전을 치를 당시 그의 벼슬은 토로장군에 불과해 좌장군 유비를 끌어들일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 때문에 군벌들이 벼슬을 자처하거나 내릴 때는 '제가 임의로 내리고(혹은 벼슬에 오르고) 나중에 (황제께) 승인받겠습니다'란 명목으로 일방적으로 조정에 표를 올렸다. 이런 식으로 유비는 마초에게 평서장군 직위를 내린 것이고, 본인도 한중왕에 오른 것이다. 당연히 조조의 꼭두각시인 헌제가 한중왕 등극을 승인해줄리가 없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표를 올린 것. 여담으로 조조가 위왕에 오르자마자 한중왕을 자처한게 것도 저런 명분과 상관 있다. 당시에 왕위는 황족만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왕은 실질적 권위는 적은 황족용 직위에 가까웠다) 조조가 왕이 됐다는 건 찬탈의 의미로 받아들여졌고, 이에 반발하는 여론 덕분에 황족인 유비가 왕에 오르기 쉬워진 것이다.[80] 관우는 유비가 황제가 되기 전에 죽었기에 최종벼슬이 마초나 장비보다 낮지만, 사방장군 임명 당시 관우보다 아래 직위였던 저 둘이 촉한 건국 이후 각각 표기장군, 거기장군에 임명된 것을 보면 만약 관우가 살아있었다면 무관 중 으뜸이었던 관우가 대장군으로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제갈량이 죽기 전까지 촉한의 대장군 직위는 공석으로 남게 된다.[81] 뛰어난 인재라고 볼 수 있는 가규도 이때 곽원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마초군에 의해 곽원군이 궤멸되자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82] 연의에서는 듣보잡이지만 실제 역사상에선 한시적이나마 조조에게 유효타를 성공시키고, 세력균형과 판도를 완전히 반전시킬 뻔 했던 고간과 그의 상장, 심배가 자세력 하북의 명장으로 인증한 곽원의 임팩트는 생각보다 크다. 고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고간은 원담, 원상처럼 원소의 직계 가족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원소의 유력 일족으로서 유표 휘하의 실세 채모처럼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잘 나갈 때도 별로 좋은 소리가 안 나왔던 채모와는 달리 최소 한지역을 재패할 제후 수준의 뛰어난 명망과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만약 고간의 봉기가 성공해 독자세력화가 이뤄졌거나 적어도 할거 노선이 어느 정도 지속됐다면 조조는 북방의 원상과 인접해 있으며 막 점령해 민심이 적대적이었던 기주 북부/유주 일대에 고립되어 북쪽의 원상과 오환, 서쪽 병주의 고간의 압박을 받는 형세가 되고 더불어 고간이 사례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면 조조에 적대적이었던 유표와 고간 사이의 연대와 소통이 원활해져 중원까지 공세를 받게 되는 등 조조 입장에선 최악의 구도가 확정된다. 이쯤 되면 조조는 그 동안 원상, 원담과 몇 년 동안 싸워가며 고생 끝에 먹었던 걸 도로 다 뱉어내야 함은 최소한이고 그 자신의 생명도 위태로운 지경이 될 가능성이 높다. 설사 이 정도 파국까진 치닿지 않더라도 고간이 업성 전복이 아니라 최소한 호관 봉쇄와 사예 장악까지만 성공했더라도 조조에겐 역시 치명타였다.[83] 비슷한 시기에 30대의 나이에 구장들을 제치고 한 국가를 진두지휘한 총사령관에 오른 주유나 육손 같은 경우도 있지만 이들은 비교적 확고한 권위를 갖춘 세력의 군주의 권력을 위임받은 입장이라 약간의 잡음은 있을지언정 얼마든지 내부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지만 마초는 거의 동등하거나 위상과 권력이 더 높았다면 높았을 군벌들 틈바구니에서 리더로 선출된 격이니 더 파격적이다. 어찌 보면 반동탁 연합군의 수장으로 선출된 원소의 마이너 버전이다.[84] "지금 조조는 방금 좌절과 고통을 당하여 마침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있으므로 아직은 장군과 병사를 이어서 서로 싸우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저는분위장군과 함께 촉을 취하러 나가기를 원합니다. 촉을 얻고 장로를 병합한 후에 분위장군을 남겨 그 땅을 단단히 지키도록 한다면, 마초와 동맹관계를 맺을 것입니다. 저는 돌아와 장군과 함께 양양을 점거하여 조조를 추격한다면, 북방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오서 주유전.[85] 여기에 추가로 정비의 활약도 한 몫 했다. 조조군의 물자담당관이었는데, 조조가 죽기 직전으로 몰린 걸 보고 가지고 있던 소와 말을 있는대로 풀어놔서, 대부분 농민 출신인 마초군 병사들이 눈이 돌아가 그걸 잡느라고 조조를 제대로 추격하지 않았다고 한다.[86] 혹자는 이 대목에서 당시 관중연합군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읽어내기도 한다. 이때 마초의 주장은 후에 전해 들은 조조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조조군에게 큰 위협을 줄 수 있는 전술적 선택이었는데 한수의 발언권이 더 큰 걸 보면 실질적인 오너는 마초가 아니라 한수라는 얘기. 물론 한수의 유인책 역시 꽤 일리가 있었고 실제로 조조는 한수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거의 죽을 뻔 했다. 실제로 습격으로 엄청난 성과를 낸게 마초였고 결과적으로 무산돼서 문제였지…[87] 마초와의 전투에서 패배해서가 아니라 하후연의 본대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군을 물렸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상 하후연은 마초에게 패배한 게 맞다. 당시 마초가 양주자사 위강을 하후연이 구원하기 전에 포위해서 격파하고 하후연과 맞붙는다. 마초는 기성에서 2백 여 리 떨어진 곳까지 요격와서 하후연은 이에 맞서 싸웠는데 군이 불리했고 마침 견저가 모반하자 하후연은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고 기록돼 있다. 즉 하후연은 마초의 기세에 먼저 밀리고 마침 모반이 일어나서 이걸 기회로 퇴각한 것에 가깝다. 참고로 이때 마초가 이끈 병력은 1만 명을 조금 웃도는 수준으로 추정된다. 마초가 농서에서 재기해 양부를 중심으로 하는 기성을 공격할 때 이끈 병력은 본인 휘하의 패잔병을 포함해서 이민족, 한중의 장로 등으로부터 빡빡 긁어모아 고작 1만 명 수준이었고 기성에서의 저항도 만만찮았으니 전사자도 꽤 있었을 것이다. 농서 일대를 확보하고 어느 정도 증원됐다 하더라도 아마 1만 명 언저리 수준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88] 자치통감에 마초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저족 부중에서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마초가 이 당시 방덕과 미처 협의를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9] 단 마초가 단순히 싸움을 잘 한다 수준을 넘어서 어느 정도까지 잘 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이며, 사실 이 부분이 무력논쟁의 핵심이긴 하다. 잘 싸운다는 얘기는 많은데 사실 구체적인 기록은 부상투혼과 염행에게 패배한 것뿐이니 과연 얼마나 잘 싸우는지는 애매한 것은 사실이다.[90] 이 대목이 마초가 패륜아로 비판받는 가장 큰 근거이다.[91] 거기에 당시 유비세력의 정황상 마초에게도 믿을 구석이 있었다. 유비 세력의 우선적인 대전략은 일단 기본적으로 형-익을 아울러 천하를 삼분해 조조에게 대항한다는 것이고 당시 파촉까지 얻은 상황에서 유비군이 이 계획에 따라 바로 얻어야 하는 곳이 한중이다. 따라서 유비 세력은 바로 한중에 있는 장로세력을 포섭하거나 공격해야 했는데 시간상으로 한중 옆에 있는 유비세력이 장로를 포섭하거나 공격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고, 유비 세력에서 고위급 위치에 서게된 마초 입장에선 일단 유비에게 귀부해 일신의 위험을 피했으니, 얼마 후 유비가 한중을 얻으면 자연스럽게 가족과 심복을 돌려받을수 있는 공산 역시 충분히 있다고 나름대로 계산이 서기도 했을것이다. 그러나 얼마후 급작스럽게 형주에서 익양대치가 발생해 유비는 거기에 신경을 집중해야 했고 이 사이 조조가 한중으로 치고 들어가 한중을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만다. 유비는 익양대치 직후, 뒤늦게라도 황권의 조언에 따라 장로가 조조에게 패해 파중현으로 들어올 때 장로를 영접하려고 했으나 황권이 도착하기 전에 장로는 남정으로 돌아가 조조에게 투항해버렸는데 이 과정에서 마초의 아들 마추는 죽고 수하였던 방덕은 조조의 신하가 되어버린다. 214년 당시 유비에게 귀부하던 마초 입장에서 그 다음해 발생할 갑작스러운 익양대치나 장로의 동생 장위가 천혜의 요새지인 양평관에서 삽질(...)을 해서 장로가 제풀에 무너질것을 예상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유비 입장에선 이후 한중을 공격해 조조의 최고위 상장 하후연을 죽이고 친정한 조조를 격파함으로써 세력에 최고조에 오르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지만, 마초 입장에선 또 다시 가족을 잃고 심복까지 잃는 통탄할 일이었다[92] 당시 동탁의 명성과 행적을 생각하면 명분이 존재하긴 했지만,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동탁 토벌은 의로운 싸움이라기보다는 이권을 챙기기 위한 1차대전과 비슷한 전쟁이었다.[93] 패륜아 논란때문에 부각되지는 않지만 삼국지 시대에서 친족이 여러 번 잃은 비운의 삶을 살아간 사람이기도 하다. 유언도 남은 일족을 보호하려는 모습이다.[94] 물론 왕이는 모시는 임금이 따로 있었던 반면에 마초의 경우는 어느 정도 스스로가 임금의 위치였던 것도 한몫했다.[95] 사실 한수는 마등과도 서로 가솔들을 죽이면서 의형제라는 이상한 관계를 맺었던 작자이다. 이런 염행 상대의 장난질이야 이상할 것도 없는 셈.[96] 사실 한수의 '사위'였기에 '불효'도 되는 셈.[97] 사실 이 부분에서 더 경솔하다고 까여야 할 것은 마초가 아니라 아버지 마등일지도 모른다. 괜히 적진으로 들어갔다가 죽음을 맞은 거기 때문.[98] 이와 관련된 또 다른 기록이 고유전으로 이에 따르면 '고유가 간언하여, 지금 거대한 군대를 함부로 파견한다면 서쪽에 있는 한수와 마초가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게 되어 장차 서로 선동하여 반역을 일으키게 될 것이니, 우선 삼보(三輔)를 불러 모아서 삼보가 평정시킨다면, 한중은 격문만을 보내도 평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위기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이때 관서 제장들은 겉으로는 귀부했으나 내심은 믿을 수 없었다고 한다. 조조의 한중진공을 두고 조조 진영에서도 이쪽이 한중을 공격하려고 군대를 동원하면 관서가 반드시 위협을 느껴 공격할테니 한중보다 먼저 치자는 주장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군벌들이 장로를 치려고 준비하는 것을 곧 관서 토벌의 징조라고 경계하고 있었다는 것.[99] 물론 이건 상대적인 비교로 주유가 언급했듯이 마초 역시 이전부터 관서의 대표적인 군벌로서의 명성은 있었다. 다만 한수는 워낙 오래전부터 마초보다 관서에 오래있으면서 그 지역의 유력자로 존재했기에 연륜의 측면에선 마초가 밀릴 수 밖에 없다는 것, 마초가 이후 한수를 넘어설 정도로 명망이 올라간건 오히려 조조와 싸워 조조를 곤경에 몰아붙인 덕이 컸다.[100] 심지어 친어머니의 신분은 일개 노비였기 때문에 친어머니 한 명만이라면 사람 한둘 보내는 것만으로 간단히 빼내올 수 있었다.[101] 물론 서주 대학살을 자행하는 등 무고한 민중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친 전적에 있어선 동탁이고 이각이고 곽사공손찬이고 뭐고 다 초월해 당대 no.1인 조조 같은 경우는 별 비판 없이 초세지걸이라는 둥 찬양 일색인 예외적인 케이스도 있긴 하지만, 정작 무제기 본문엔 진수조차도 서주 학살에 대해서는 '잔륙(残戮, 잔인하게 도륙했다, 학살했다)'이라는 잔학한 뉘앙스로 기술했는데 정사 삼국지에서 저런 식으로 학살을 표현한 건 이게 유일하다. 역적으로 욕먹던 동탁의 양성 학살도 이 정도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상당히 드라이하고 간결한 문체로 유명(그래서 후대 유송의 3대 황제 유의룡이 읽다가 너무 간결해서 사건을 제대로 알기 힘들다는 이유로 배송지에게 주석을 달게 했다.)한 정사 삼국지의 레토릭을 감안하면 굉장히 이례적으로 엄청나게 부정적인 뉘앙스의 단어를 총동원해 정론직필 한걸 보면 그 폭거를 일으킨 조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102] 휘는 사마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