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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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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후한.jpg
25년~220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현한
촉한
별칭 후한(後漢), 동한(東漢)
위치 중국 대륙, 베트남 북부
수도 낙양 (25~190)
장안 (190~196)[1]
허도 (196~220)[2]
인구 56,486,856명(156년)
면적 6,500,000km² (100년)[3]
5,400,000km² (220년)[4]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劉)
국가원수 황제
주요 황제 광무제 유수,(25~57),
명제 유장,(57~75),
장제 유달,(75~88),
화제 유조,(88~105),
안제 유호,(106~125),
순제 유보,(125~144),
환제 유지,(146~167),
영제 유굉,(167~189),
헌제 유협,(189~220),
주요 섭정 동탁
조조[5]
언어 상고 중국어[6]
문자 한자
종교 유교[7]
도교(태평도, 오두미도), 불교[8], 중국 토속 종교
종족 한족
통화 오수전
현재 국가
[[중국|]][[틀:국기|]][[틀:국기|]]

[[베트남|]][[틀:국기|]][[틀:국기|]] (북부)

[[북한|]][[틀:국기|]][[틀:국기|]] (일부)

[[몽골|]][[틀:국기|]][[틀:국기|]] (일부)

1. 개요2. 역사3. 황실의 붕괴4. 평가5. 계승국6. 역대 황제
6.1. 계보6.2. 추존 황제
7. 행정구역8. 관직9. 군사 병과10. 기타11. 관련글

[clearfix]

1. 개요

중국 한나라의 일부. 신나라의 멸망 이후로 혼란기를 거쳐서 전한되살아난 국가.[9] 복벽자는 광무제 유수(劉秀).

후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아마도 사료인 후한서에서 비롯된 것 같다. 중국에서는 오대십국시대 후한과의 구별을 위해, 수도 낙양의 위치가 전한의 수도 장안보다 동쪽에 있는 점에 착안하여 동한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영향을 받아 한국의 중문학계, 철학계 등에서도 서한·동한(통칭으로는 양한)으로 자주 사용한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계에서는 대개 전한·후한으로 부르고 통칭으로는 한대(漢代) 내지는 양한(兩漢)이라고 한다.

2. 역사

파일:aca65a99c3ab28256a24b2caa8a8cb76.jpg

원래 신나라가 멸망하고 후한이 나오기 전에 현한이 있지만 기간이 너무 짧아서 그런지 잘 언급이 되지 않고 있으나, 사실상 신나라가 23년에 멸망한 다음에 한나라가 다시 재건이 되었기 때문에 개국이 25년이 아닌 23년이라 봐도 무방하다.

현한 경시제 유현의 밑에 있었던 유수는 유현 휘하에서 세력을 키우다 하북 지방에 정착하며 세력을 넓혔고, 25년 6월에 한나라를 재건한 국가 후한을 건국하여 도읍을 낙양으로 하고 연호는 건무(建武)라 하였다. 그 뒤 유분자황제로 옹립하고 유현을 살해한 적미군을 격파하여 관중을 평정하고, 36년에는 지방에서 할거하던 공손술을 토벌하여 중국을 통일한다. 통일 후 유수는 신나라의 폭정과 실정, 군웅할거로 인한 전란으로 파괴된 통치 체계와 국가 시스템을 복구하는 한편, 백성들을 위해 노비를 해방하고, 죄인들을 석방하고 수리 사업을 일으키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유수는 한경제의 6대손이었지만 독자적인 세력이 약하다보니 자신의 근거지였던 남양 인근의 호족들과 연합 정권을 세웠다. 이는 전한이 건국된 직후에 공신 세력을 숙청해서 강력한 황권을 확립한 것[10] 달리 호족 세력이 공신으로서 정치에 간여하는 바탕이 되었고[11], 아울러 이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이들이 강성한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원인이 된다.[12]

후한은 환관인 채륜이 초기 형태의 종이를 실용성 있게 대폭 개선한 채후지를 만들었고, 장형이 혼천의와 지동의를 만드는 등 문화가 매우 번창했다. 또한 반초가 서역 여러 나라와의 교역길을 열어서 실크로드를 다시금 개척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4대 황제인 화제부터는 외척환관의 세력 다툼이 심해지면서 정치는 점점 혼란해졌으며 사회 전반의 침체가 뒤따랐다. 화제 이후로는 어린 황제가 즉위했다가 일찍 붕어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정치적 권위가 불안정해진다. 비록 환관의 정치 개입의 효시가 되었지만 화제까진 전성기였고 거의 후한 중반 무렵인 안제 때에는 화희황후 등씨가 임조칭제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여러 곳에서 문제는 있었어도 덕정이 펼쳐지고 국가가 안정적으로 돌아갔다. 외척이 문제가 되었던 후한이지만 사실 후한 초중기엔 황태후들의 정치 참여가 정국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

문제가 시작된 때는 안제의 다음 황제인 순제가 황위에 오르기 위해 환관과 손을 잡고 132년에 양기의 여동생 순열황후 양씨를 책봉한 이후부터이다. 그녀가 황후가 된 이후 양기가 외척보정의 자격으로 대장군이 되었는데, 양씨 일족은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고 삼갔던 화희황후 등씨의 일족과는 정반대의 성향으로 황제를 위협하는 권세를 잡고 횡포를 부려 후한 중후기의 정국을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결국 순제가 즉위하고 양씨가 황후가 된 132년부터 환제 시절인 159년까지 권세를 농단하던 양기를 제거하기 위해 환제가 손을 잡은것이 환관이었는데, 양기가 제거된 바로 이때부터 환관들이 후한의 정세를 주무르고 당고의 금을 일으키는 등 사회를 더욱 혼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황건적의 난을 시작으로 민란이 자주 일어났는데, 후한 조정이 직접 진압할 능력이 없다보니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방관들의 자율성을 크게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각지에서 독자적인 권력을 쌓으면서 사실상 군벌화가 이루어졌다. 광역 행정 단위인 주의 장관으로서 감찰의 업무를 업무를 맡은 주자사가 임명되었던 초기와 달리 이 시기에는 행정, 군사 등 전권을 행사하는 주목이 설치되어 이러한 군벌화가 더욱 가속화되었고, 중앙 조정의 영향력은 미미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십상시의 난으로 중앙 정치가 혼란스러워지자, 조정의 분란을 명분으로 하여 거의 모든 지방관들의 이반으로 국가가 공중 분해되는 대참사가 터지고 만다.

이 같은 후한 말기의 상황이 삼국지연의의 초반부 배경이기도 하다.

3. 황실의 붕괴

십상시의 난 이후로 양주 지역에서 이민족인 강족한족이 결합된 강력한 군세를 이끌던 동탁이 일전에 하진의 입경(入京) 요구에 호응하여 낙양 인근에 와있다가 난을 틈타 낙양에 입성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동탁은 오래지않아 정원을 죽여 그의 병사를 흡수하여 군권을 장악하였고, 조정에서도 사공이 되었다가 태위로 관직을 옮겼다. 그러고 나서 소제 유변하태후를 살해하였고, 왕미인 소생의 헌제를 옹립하여 명실공히 정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세력이 반동탁연합을 결성하여 그와 대적하였고, 이에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하기에 이른다.

장안 천도 이후 동탁이 살해되자 그 부관이었던 이각곽사잠깐 정권을 잡았다가, 마침내 조조가 정권을 잡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미 동탁이 정권을 휘두를 때부터 후한 황실은 그저 명목상의 존재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 협천자이령제후(挾天子以令諸侯 = 천자를 끼고 그를 명분으로 삼아 제후들을 호령한다)이다.

조조는 천자를 명분으로 삼아 각지의 군웅들을 차례차례 토벌하였지만, 각지의 군벌들은 오히려 조조가 천자를 위협하는 역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대항하였다. 결국 조조가 지배한 중원, 유비가 지배한 사천 분지, 손권이 지배한 강남 일대 등 지배 영역이 셋으로 나뉜 상태로 고착되었다.

조조 지배 지역에서 식물 인간 상태에서 유지되는 후한 조정은 이 상황에서 전혀 영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허수아비 신세가 되었다. 결국 220년, 헌제가 조조의 아들조비에게 제위를 선양으로 위장한 찬탈을 당하면서 후한멸망하고 위나라가 건국된다.[13]

이후 황실의 일원인 유비익주에서 후한을 잇는 명분으로 한나라 황제로 즉위하는데 스스로는 후한이 이어지는 체제로 간주했지만 후세에는 구분을 위해 촉한이라 부른다. 이렇게 43년을 더 이어갔지만 결국 조위의 침략으로 멸망함으로써 완전히 사라졌다. 자세한 내용은 촉한 문서 참고.[14]

4. 평가

냉정하게 보면 아예 건국 황제인 광무제 정도에서, 잘 쳐주면 3~4대 황제인 장제화제 초반 제위 시기 정도에서 뭔가 '정상적인' 느낌은 다 끝나고 그 뒤로는 틈만 나면 황제들이
  • 어린 나이에 재위 → 그런데 갑자기 급사,
  • 갑자기 '병'으로 사망,
  • 멀쩡히 적장자 있는데 건너 뛰고 황제에 등극하더니 얼마 안 있어 사망,
  • 이런 사망자 중 독살이 의심스러운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거기다 궁정에선
  • 다른 후궁들 자식 뺏어오고 친모는 독살해 버리기,
  • 황제의 유모황태자의 가정교사 등이 권력 다툼하기,
  • 외척, 후궁과 환관들이 편 붙어 먹고 싸우기

등등 궁중 암투 사극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 비일비재한 막장 왕조였다.

태생적인 문제인 강성한 호족들은 그나마 가장 황제의 권위가 강력했던 광무제 때 조금 건드리려고 하다가 호족들이 반발하니 금세 꼬리를 내린 이후로는 건드리려는 시도도 못했고, 정부 조직을 간소화해서 황제들의 직접적인 권위 행사를 늘리려고 하니 그 뒤로는 다들 귀신같이 빨리 죽어버렸다. 그래도 광무제는 명군이라 괜찮았지만 문제는 나라를 재건하느라 호족들의 힘이 너무 강해졌고 말기인 환제영제 시대엔 호족들과 사류를 탄압하면서 황권을 마구 휘두르며 환관 힘이 커졌다는 건데 이건 광무제 탓이라기엔 이미 망한 전한 탓이라고 봐야한다.

사실 고대 전제군주정, 특히 중국 제정에서 명나라 때 까지 환관 자체는 황제의 친위세력으로써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황제의 신임에만 의존하기에 황제가 믿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환관 세력이 없으면 황제의 수족이 되어 정국을 통제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던 것. 특히 호족의 세력이 비대해질수록 그것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황제의 입장을 대변하고 실천할 친위세력으로써의 환관 세력도 그만큼 힘을 키워야 했다.

이 부분은 애초에 호족-사대부 세력과 환관·외척 세력의 균형을 통해 황제의 권위를 세우고 영역을 통제하던 후한의 체제 자체가 가진 문제이고 후한 후반의 난맥상은 어린 황제가 즉위했다가 요절하는 사례가 잦아 이런 체제의 중심을 잡아 줘야 할 황제들의 권력에 공백이 생겼다. 그나마 오래 재위한 환제, 영제 등의 황제들은 황제로서 제대로 국정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 운영에 필수적인 환관 관리도 안된 것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5. 계승국

이렇게 전한-(현한)-후한-(촉한)으로 이어지는 한나라는 멸망했지만 그래도 오호십육국의 스타트를 끊은 흉노족전조는 초기 국호가 한이었는데 이는 흉노와 한나라가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며 당시 흉노족의 지도자 유연의 성 역시도 한나라의 유씨였기 때문이다. 또 성한 역시도 국성은 이씨였지만 초기 국호는 성이었다가 나중에 한으로 바꾸었는데 이 역시도 촉한을 의식했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한나라가 오대십국시대남한, 후한[15]의 초대 황제 유지원사타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이 유씨이고 광무제의 8남 유병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국호를 한으로 정했다. 물론 후한의 후신 중 하나인 북한 역시도 마찬가지.

6. 역대 황제

  • 비록 전한의 황족이 특권을 상실하기는 하였지만 전한과 후한은 나라 이름도 같고 국성(國姓)도 같으나 왕망 때문에 잠시 끊어져서 전·후로 나누어 부르는 것뿐이다. 그래서 광무제 또한 왕조를 새로 세운 게 아니라 다시 일으킨 황제로 여겨서 묘호가 세조이고 대수도 전한 시기까지 따지면 16대에서 비롯한다.[16] 다만 여기서는 후한 시기만 다루므로 따라서 그 앞의 황제를 알고 싶으면 전한 열성을 참고.
  • 광무제를 제외하면 전한과 마찬가지로 시호에서 '효(孝)'를 빼면 된다. 예시) 효장황제 = 장제, 효령황제 = 영제, 효헌황제 = 헌제
대수 묘호 시호 출생 사망 연호 재위기간 능호
01 세조
(世祖)
광무황제
(光武皇帝)
유수
(劉秀)
기원전 5.1.15 57.3.29 건무(建武, 25~56)
건무중원(建武中元, 56~57)
25~57 원릉
(原陵)
02 현종
(顯宗)
효명황제
(孝明皇帝)
유장
(劉莊)
28.6.15 75.9.5 영평(永平, 58~75) 57~75 현절릉
(顯節陵)
03 숙종
(肅宗)
효장황제
(孝章皇帝)
유달
(劉炟)
57 88.4.9 건초(建初, 76~84.8)
원화(元和, 84.8~87.7
장화(章和, 87.7~88)
75~88 경릉
(敬陵)
04 목종
(穆宗)
효화황제
(孝和皇帝)
유조
(劉肇)
79 106.2.13 영원(永元, 89~105.3)
원흥(元興, 105.3~105.12)
88~105 순릉
(順陵)
05 - 효상황제
(孝殤皇帝)
유융
(劉隆)
105 106.9.21 연평(延平, 106) 105~106 강릉
(康陵)
06 공종
(恭宗)
효안황제
(孝安皇帝)
유호
(劉祜)
94 125.4.30 영초(永初, 107~113)
원초(元初, 114~120.4)
영녕(永寧, 120.4~121.6)
건광(建光, 121.7~122.3)
연광(延光, 122.3~125)
106~125 공릉
(恭陵)
07 - 소제
(少帝)

북향후
(北鄕侯)[17]
유의
(劉懿)
? 125.12.10 - 125 -
08 경종
(敬宗)
효순황제
(孝順皇帝)
유보
(劉保)
115 144.9.20 영건(永建, 126~132.3)
양가(陽嘉, 132.3~135)
영화(永和, 136~141)
한안(漢安, 141~144.4)
건강(建康, 144.4~144.12)
125~144 헌릉
(憲陵)
09 - 효충황제
(孝沖皇帝)
유병
(劉炳)
143.2.26 145.2.15 영희(永憙, 145) 144~145 회릉
(懷陵)
10 - 효질황제
(孝質皇帝)
유찬
(劉纘)
138 146.7.26 본초(本初, 146) 145~146 정릉
(靜陵)
11 위종
(威宗)
효환황제
(孝桓皇帝)
유지
(劉志)
132 168.1.25 건화(建和, 147~149)
화평(和平, 150)
원가(元嘉, 151~152)
영흥(永興, 153~154)
영수(永壽, 155~158)
연희(延熹, 158~167)
영강(永康, 167)
146~167 선릉
(宣陵)
12 - 효령황제
(孝靈皇帝)
유굉
(劉宏)
156 189.5.13 건녕(建寧, 168~172)
희평(熹平, 172~178)
광화(光和, 178~184)
중평(中平, 184~189)
167~189 문릉
(文陵)
13 - 소제
(少帝)

홍농회왕
(弘農懷王)
유변(劉辯) 176.9.27 190.3.6 광희(光熹, 189.4.13~189.8.27)
소녕(昭寧, 189.8.28~189.8.30)
189 -
14 - 효헌황제
(孝獻皇帝)
[18]
산양공(山陽公)
유협
(劉協)
181 234.4.21 영한(永漢, 189.9.1~189.12)
중평(中平, 189.12)
초평(初平, 190~193)
흥평(興平, 194~195)
건안(建安, 196~220.2)
연강(延康, 220.3~220.10)
189~220 선릉
(禪陵)

6.1. 계보

한나라 문서의 계보를 참조.

6.2. 추존 황제

  • '황제(皇帝)'가 아니라 '황(皇)'으로 시호가 끝난다.
시호 이름 생몰기간 능호 비고
거록부군(鉅鹿府君) 유회(劉回) ?~? 장릉(章陵) 광무제 추숭, 광무제의 조부
남돈군(南頓君) 유흠(劉欽) BC 1세기~3년 장릉(章陵) 광무제 추숭, 광무제의 부친
효덕황(孝德皇) 유경(劉慶) 78~107 감릉(甘陵) 안제 추숭. 안제의 부친
효목황(孝穆皇) 유개(劉開) ?~131 낙성릉(樂成陵) 환제 추숭, 환제의 조부
효숭황(孝崇皇) 유익(劉翼) ?~? 박릉(博陵) 환제 추숭, 환제의 부친
효원황(孝元皇) 유숙(劉淑) ?~? 돈릉(敦陵) 영제 추숭, 영제의 조부
효인황(孝仁皇) 유장(劉萇) ?~? 신릉(愼陵) 영제 추숭, 영제의 부친

7.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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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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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군사 병과

  • 분명병(奔命兵): 위급할 경우 동원 명령을 받고 즉시 소집에 응하는 용감한 병졸, 현대의 동원소집된 예비군
  • 재관(材官): 용기와 힘이 뛰어난 정예 보병, 본래 군국(郡國)에 주둔한 병사이다.
  • 기사(騎士): 말을 탄 병사, 즉 기병. 본래 군국(郡國)에 주둔한 병사이다.
  • 돌기(突騎): 글자 그대로 전투가 벌어지면 적군을 향해 돌격을 담당하는 임무를 맡은 기병[19]
  • 경거(輕車): 가벼운 전차를 모는 병사. 아마 4마리의 말들이 끄는 무거운 전차보다 더 적은 수의 말들이 끄는 빠른 속도의 전차였을 것으로 추정됨.
  • 누선(樓船): 높은 다락이 설치된 군함.[20]
  • 그 밖에 후한의 다른 군사 병과의 복식을 재현한 그림과 사진을 보려면 옆의 링크를 참조 바람. #1, #2

10. 기타

  • 후한의 역사를 다룬 사서인 후한서가 2018년 3월 23일, 한국에서 총 10권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1

11. 관련글


[1] 전한의 수도. 왕망과 후한 교체기의 전란으로 피폐해져서 전각과 민호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反)동탁 연합에 대항하기 위해 동탁이 강제로 천도하였다.[2] 동탁의 장안 천도로 약탈 및 방화가 벌어지고 전란의 영향으로 낙양이 피폐해지자, 협천자이령제후를 목적으로 헌제를 옹립한 조조가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허(許)로 천도하였다.[3] Taagepera, Rein (1979), "Size and Duration of Empires: Growth-Decline Curves, 600 B.C. to 600 A.D.", Social Science History, 3 (3/4): 115–138#[4] 임읍(참파)과 오르도스 지방, 서역도호부(타림 분지 일대)를 상실한 후의 면적이다.[5] 그 밖에도 1세기 말 화제 시대부터는 외척과 환관, 권신의 발호로 인해 실권을 가진 황제가 거의 없다.[6] 이 시대의 언어는 중고한어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 상고한어에 속하는 시대긴 하지만 후한 중국어(Eastern Han Chinese)라는 용어로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7] 한무제 때 동중서의 "파출백가, 독존유술'로 대표되는 헌책에 따라 세계 최초로 유학을 관학으로 지정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과 연구가 있어서 한무제 때의 일을 상징적인 조치로 보고, 실질적으로 유학이 정치, 사회, 문화, 학술 등 국가 전반에 침윤하여 영향을 발휘하게 된 것은 후한 장제 이후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백호통의의 성서(成書)와도 관련이 있다.[8] 후한 초기에 서역을 통해 전래되었고, 후한 후기에 중원에 유입되어 불경의 번역이 이루어졌다.[9] 신나라를 부정하는데다가 국호도 그대로 한(漢)으로 유지하고 황실도 계통은 다르지만 고제 유방의 자손이라 애초에 단절된 적이 없다고 보는 것이 한나라 당대인의 시각이다.[10] 특히 오초7국의 난에서 황실반란을 일으킨 제후국들을 상대로 승리함에 따라 황권이 더욱 강화되었다.[11] 이 때문에 후한은 강력한 황권을 가진 전한 때보다 황권이 더 약했다.[12] 음씨, 등씨 등.[13] 사실상 동탁~이각, 곽사 집권때부터 후한은 국가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14] 촉한정통론에 입각한 시각에서는 촉한이 전한과 후한을 이은 마지막 한나라라는 뜻에서 계한(季漢)이라고도 하였다. <계한보신찬> 등 서적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15] 당연히 오대십국시대의 후한이지 이 후한이 아니다.[16] 유비가 한 황조의 후예를 자처할 수 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유비는 광무제의 후손이 아니다. 즉, 후한의 황실과는 혈연적으로 (공통 조상을 두고 있긴 하지만)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러나 전한 경제의 아들의 후손이며, 따라서 유비의 핏줄은 전한대까지는 확실한 황족이었다. 후한은 유비같은 전한대 황족은 황족대우를 안 해줬지만, 어쨌거나 후한이 전한의 후예를 자처하고 있으니 전한의 황실과 핏줄이 이어진 유비 역시 황족인 셈이고, 이에 따라 그가 세운 촉한(계한)이 한나라 황실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17] 안제의 황후 염씨가 옹립하였다가 사망하였는데, 염씨 일족이 몰살당한 후 북향후로 격하되었다. 재위기간 200일.[18] 촉한에서는 민제(愍帝)라는 시호를 올렸다.[19] 후한 동북부 어양 지역의 돌기가 가장 뛰어난 전력을 가져서, 광무제가 그들의 돌격 장면을 보고 천하 제일의 기병이라며 감탄했다는 기록도 있다.[20] 출처: 『역주 후한서』 1권, 범엽 지음, 진기환 번역, 명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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