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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마푸체
마푸체인들이 쓰는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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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Folil aliwen taiñ namun, Müpü üñüm rupalelu niey taiñ Piwke."
우리의 발은 나무 뿌리고, 지나가는 새의 날개엔 우리 심장이 깃들어 있다.
파파이[1] 마리을
Mapuche우리의 발은 나무 뿌리고, 지나가는 새의 날개엔 우리 심장이 깃들어 있다.
파파이[1] 마리을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 마푸는 땅, 체는 사람 또는 사람들을 뜻하므로 마푸체란 땅의 민족 쯤 되겠다. 아라우코족이라고도 한다. 이는 점토(라우)물(코), 즉 라우코(점토 물)란 지명에서 유래한 말이다.
아우카(Auca, Awqa)라 하기도 했는데 아우카는 잉카 제국의 언어 케추아어로 '야만인'을 뜻한다. 칠레에는 아라우카니아 주에, 아르헨티나에는 네우켄 주에 많이 살고 있다. 물론 도시에 사는 마푸체도 많다.
2. 역사
스페인인들이 남아메리카에 당도하기 전부터 감자와 옥수수를 중심으로 한 농업-어업을 주로 하고, 칠리웨케라는 낙타과의 동물을 가축으로 목축도 좀 겸하면서 100만 명이 넘는 수가 살았다.사람들은 몇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집들이 가족 별로 흩어져 사는 식으로 살았지만, 일부다처제를 통한 혼인 동맹과 잦은 친족 방문으로 넓게 연결되어 "한 사회"를 이루었다. 당시에는 강도 지금보다 커서 교통은 강과 바닷가를 왐포(wampo)라고 하는 배로 다니는 것이 중심이었고, 스페인인들의 기록을 보면 나무로 거대한 건축물도 많이 지었던 것 같다.
은근히 전투종족스러운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당시 북쪽으로 콜롬비아 남부, 남쪽으로 칠레 중부 일대까지 왕국들과 각 부족들을 복속시키며 팽창 중이던 잉카 제국의 영토 확장을 멈춘 민족이기도 했다. 15세기 말에 잉카 제국과 마푸체족은 접촉을 시작하여 충돌했고[2], 마울레강 근방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져, 여기서 실질적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잉카인들의 세력 확장을 저지한 것은 물론, 처음으로 맞닥뜨린 강대한 적에 놀란 마푸체인들이 느슨한 부족 단위의 세력 구조에서 벗어나 단일화된 민족으로서 뭉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후 스페인의 침공과 그로 인한 전염병으로 수십 만명이 넘게 죽으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방식의 '문명 수준'은 상당히 후퇴했고, 스페인인들의 침공이 잦은 지역에서는 주 산업조차 목축으로 바뀌어 버렸다. 가축은 데리고 도망칠 수 있지만, 밭은 들고 튈 수가 없었기 때문.
백인 이주민 마을을 습격하는 마푸체인들 묘사한 그림.
이후 마푸체 민족은 남아메리카의 다른 여러 원주민과 달리 스페인 제국과 제국에서 독립한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공격을 잘 막아내며 19세기 후반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스페인 왕조차 하는 수 없이 마푸체 민족의 영토를 인정했다. 이에 마푸체 일부는 시몬 볼리바르나 호세 데 산 마르틴 같은 이들이 아니라 "'우리야말로 남아메리카 최초로 독립을 이룬 사람들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스페인 정복자들과 마푸체인들의 전쟁은 실로 격렬하여, 당시 스페인 왕실에서는 칠레를 두고 "신세계의 네덜란드 전역(Flandes de Indias)"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스페인 입장에서는 몇몇의 주요 정착민 도시만 점거하고 나머지 광활한 숲과 고원은 마푸체인들이 여전히 지배하며 간간히 정착민 도시들을 폭풍 같이 휩쓸어 버리는 꼴을 어찌 하지도 못하고 지리멸렬한 게릴라전에 인력과 자원만 낭비하고 있었으니 딱 아메리카 전선에서 벌어지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페루에서 얻는 수익금의 상당 부분을 마푸체를 상대하는 정규군에게 Real Situado란 이름으로 꾸준히 투자하기도 했다.
오히려 마푸체족은 유럽인들이 도래한 이후 한동안 세력을 더 뻗어 나갔다. 안데스산맥의 페웬체와 팜파의 테우엘체가 마푸체 문화를 받아들이고 친족 관계를 맺으면서 점점 마푸체가 되어 갔다. 마푸체들은 유럽인들이 가지고 온 가축들을 받아들여 목축하는 동물 종류를 바꾸었고 농사에 유럽 작물도 도입했다. 그리고 말을 입수하여 기병을 양성하고 여러 기동전술과 차륜전 전술을 개발하여 유럽인들과 맞섰다. 병력도 한번에 3~4만명을 동원할 정도로 뛰어났다. 특히 화기가 없는데 스페인군 상대로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고 팽팽한 대립구도를 형성했다.[3] 마푸체족의 세력 확장을 아라우카니사시온(Araucanización)이라고 한다.
이 마푸체의 세력 확장 전쟁으로 칠레에서만 총독인 마르틴 가르시아(Martín García Óñez de Loyola)[4]를 비롯한 스페인인 4만명과 그들을 따르는 원주민 6만명이 사망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스페인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서 마푸체의 피해도 엄청났는데 무려 10만명이 사망했다. 게다가 스페인은 마푸체가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히면 잔혹하게 보복하여 마푸체인들이 심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마푸체 측도 계속된 세력 확장을 할 수가 없어 아라우카니사시온을 중단하고 스페인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물론 평화 협정을 맺고도 스페인과의 대립과 갈등은 여전했기에 틈만나면 스페인 식민지와 접한 국경선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특히 스페인은 평화 협정을 지키지 않고 마푸체의 영토를 침공하고 마푸체인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잡아가자 분노한 마푸체는 다시 스페인과 전쟁을 벌인다. 다시 터진 전쟁에서 마푸체는 수많은 스페인 병사들을 죽이고 스페인 도시들을 파괴한터라 놀란 스페인 측은 마푸체에 평화 협정을 제시했고 마푸체측은 이를 받아들여 전쟁은 종결되나 마푸체는 여전히 스페인을 불신했다. 하지만 마푸체는 전쟁이 계속되면 자신들도 피해가 심하며 좋을게 없다는 것을 알고 최대한 스페인과의 충돌을 피하고 영토 유지에만 힘썻다.
마푸체 민족은 국가를 이룬 적은 없고, 외부의 공격에 대항하여 마푸체 민족의 여러 가문들이 연합한 부타마푸 같은 것이 가장 큰 정치조직이었다. 의사결정은 트라운이나 카윈 같은 모임에서 여러 집안들이 만나 합의를 이루었다. 복잡한 친족망으로 수많은 부족이 이어져 있었지만 명확한 정치체계랑 행정체계가 없다보니 적대하는 집안들끼리 많이, 피터지게 싸우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들끼리 배신하거나 협조도 하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이 수많은 집안들이 모두 존중하는 관습법인 앗마푸(Ad mapu)로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전쟁 시에는 토키(도끼를 뜻하기도 한다)라는 지도자를 뽑아 지휘를 맡겼다.[5] 하지만 스페인과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단결력이 중요해지자 마푸체의 정치조직인 부타마푸가 이전의 유동적인 모습을 벗어나 일종의 정부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지도자 직책인 롱코(우두머리)의 권한도 강해져 마푸체의 통치자가 되었다. 롱코가 세습되는 일도 많아졌다. 롱코들 중에서도 특히 위엄이 있는 인물은 니돌 롱코, 즉 대 롱코라 하여 부타마푸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마푸체 영토 대부분에서 롱코의 권한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어서 공동체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하려 들다가는 국물도 없었다.
진짜 권력을 휘두른 이들은 칠레가 뒤를 봐줘서 자기 공동체 바깥에 권력의 근원이 있는 롱코들이었다. 그런 롱코들 중 한 명인 로렌소 콜리피(Lorenzo Colipi)는 다른 마푸체를 개 잡듯이 죽인 폭군으로 기억된다. 칠레 세력은 이런 폭군 롱코를 만드는 일에 힘을 기울였는데, 롱코 한 명의 독재 체제가 되면 그 한 사람만 매수하여 마푸체 사회를 집어 삼킬 수 있으니까 그런 것이었다.
이들이 쓰는 마푸체어는 마푸둥군(땅의 언어) 또는 체둥군(사람들의 언어)이라 한다. 여러 학자들은 이 말을 교착어로 분류한다. 한국어처럼 주로 어미에 여러 문법 요소를 붙여서 말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칠레 사람들은 다른 언어가 아니라 "사투리"(dialecto)라고 불러버린다. 스페인어와 같은 접속 구조가 없어 복잡한 문장을 만들지 못하니 마푸둥군을 쓰는 사람들은 생각도 단순하고 하등하다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는 사람도 있다.
스페인과 평화 협정이 맺어진 이후 마푸체인들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스페인과의 교역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마푸체는 소금, 소, 말, 폰초(판초)를, 스페인령 칠레는 설탕, 옷, 술을 팔아서 교역했다. 교역은 마푸체인들에게도 큰 이득이 되었기에 마푸체 부족들은 스페인와의 관계가 나빠지기를 바라지 않아 충돌을 피하며 스페인을 자극하지 않았다. 심지어 칠레가 독립할 때 마푸체 대부분은 스페인 왕당파 편을 들어 독립군을 공격하고 왕당파를 여러 면에서 지원했다. 여기에 일부 칠레인들은 "자기 압제자들을 돕는 어리석은 놈들!"이라고 까지만, 사실상 독립군도 마푸체가 보기에는 왕당파와 똑같은 "윙카(스페인 혈통 또는 스페인 문화에 물든 자라는 뜻으로, 도둑놈이란 뜻도 있다)"인데다, 왕당파의 수장인 왕은 독립 운동파에 참여한 수많은 국경지대 군인들과 달리, 직접 마푸체들 앞에서 포악질을 해 댄 적도 없고 오히려 평화협정의 대표자로 이름이 나올 때가 많았으니 마푸체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게다가 독립운동파는 스페인과 마푸체들이 맺은 비오비오 강을 국경선으로 인정한다는 조약을 인정할 마음도 없었다. 포악한 깡패 행동대원이 가끔 온정적인 모습도 보이는 깡패 두목한테서 독립해서 새 조직을 세우려 할 때, 그 깡패 행동대원한테 시달림 받아온 지역 상인이 이 둘 중 한 쪽 편을 들어야 한다면 누구 손을 들까를 생각하면 마푸체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칠레 독립파는 이런 마푸체들의 행동을 '무지에서 나온 짓' 내지는 '배신'으로까지 취급했다. 크리오요 독립운동가들은 마푸체의 스페인에 맞선 저항을 "칠레 독립 운동 1기"로 포장하려 했는데 그게 먹히지 않은 것이다.
19세기 중반 쯤에 니돌 롱코(대 지도자) 마닌과 다른 롱코들이 프랑스인 '오렐리앙투안 드 투낭(Orélie-Antoine de Tounens)'을 왕으로 받들어 '아라우카니아 파타고니아 왕국'이라는 근대국가 설립을 시도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 시도는 마푸체 민족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은 칠레 정부가 이 계획을 알아채고 프랑스인인 앙투안을 체포하여 프랑스로 추방하면서 실패했다. 칠레 역사는 흔히 이 일을 '우스꽝스러운 사건', 앙투안을 프랑스 제국주의의 대리인 또는 정신병자로 취급한다. 마푸체들은 몰랐거나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앙투안을 받아들였을지 모르나 앙투안 또한 프랑스에 보낸 편지에서 마푸체의 '남는 땅'을 프랑스인 이민자들한테 나눠주고 마푸체에겐 쥐꼬리만한 땅만 남길 계획임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계획 또한 제국주의의 일환이었음을 인증했다.
어쨌든 현재도 프랑스에는 앙투안의 계승자가 남아 계속 아라우카니아 파타고니아 왕국의 왕위를 주장하고 있지만 제국주의자였던 선조와는 달리 탄압받는 마푸체의 상황을 해외에 알리는 일을 하는 중이며 일부 마푸체도 이들을 존중한다.
3.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침공과 학살
칠레군과 마푸체의 전투
건국 초기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힘이 약해서 마푸체인들과의 전쟁을 하지 않고 그들의 영토를 보장해주며 충돌을 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국력이 마푸체를 넘어서고 자국내의 백인계 인구가 폭증하자 노선을 바꾸어 마푸체인들의 땅을 빼앗아 자국 영토를 확장하기로 작정하여 조직적인 공격을 하였다.
칠레에서는 19세기 중반부터 30년에 걸쳐서, 아르헨티나에서는 1880년쯤부터 마푸체 민족의 영토를 본격적으로 정복하기 시작했다. 특히 칠레는 1852년에 마푸체의 땅 아라우카니아에 아라우코 주(Provincia de Arauco)를 설치한다고 공포하여 마푸체를 도발했다. 당연히 마푸체도 가만있지 않았고 1859년에 칠레인들이 내전에 빠져 있는 틈을 타서 대규모 군사공격을 하여 비오비오 강 남쪽 칠레인 정착촌을 모조리 쓸어 버렸다. 마푸체가 민간인을 해쳤으므로 토벌할 수 있는 명분을 얻은 칠레는 대규모 병력을 양성해 보복에 나섰다. 마푸체와 칠레-아르헨티나와의 전쟁은 굉장히 치열했으나 국력에서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압도적이라서 마푸체는 게릴라전으로 나가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물론 마푸체의 저항이 워낙 격렬했기에 칠레군과 아르헨티나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고 완벽하게 굴복시키는 데는 수십 년이나 걸렸다. 이 와중에 마푸체한테 입은 피해로 독이 오른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섬멸전과 초토화로 나가 많은 마푸체인들을 학살했고,[6] 생존자들은 레둑시온(Reducción)이라는 좁은 지역으로 강제이주당한다.
결국 마푸체 민족은 이러한 칠레군과 아르헨티나군의 대대적인 원주민 정복전쟁에 큰 타격을 입어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차지하던 영토의 95%를 빼앗기고 5% 남짓한 땅에 떠밀려 들어갔으며 그 뒤로도 계속해서 인종주의를 따르는 정부와 유럽계 이주민들에게 땅을 빼앗겼고 2등 시민, 열등한 인종 취급을 받았다. 심지어 마푸체를 잡아 가축한테 하듯이 귀 한쪽을 자르거나 동물 소유권 표시마냥 낙인을 찍는 일까지 당했다. 마푸체 민족을 가난으로 몰아넣고 그곳에 유럽 이주민을 데려오는 칠레와 아르헨티나 정부의 '인종정화' 정책으로 수많은 마푸체가 영양실조와 병으로 죽었고 살아남은 생존자들 중 여자들은 강제로 백인 이주민과 혼혈하도록 하였다. 이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된 뒤로는 마푸체 민족이 강탈한 토지나 기타 재산 등에 대한 소유권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순혈 마푸체는 멸종했다는 헛소리로 마푸체 민족의 존재를 부정했다. 원주민과 백인 정복자의 첫 만남도 아니고 수세기가 지났는데 전염병으로 죽은 2만 명이 당시 전체 마푸체 인구의 20%일 정도로 추산되니 말 다 했다.
많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마푸체 몰살 전쟁을 지휘한 로카 장군이나 원주민 말살을 주장한 사르미엔토를 영웅으로 숭배한다. 칠레 역시 마푸체에 대한 토벌 작전과 학살을 주도, 지시한 칠레군 장군들을 영웅으로 숭배한다. 한술 더 떠서 칠레의 몇몇 역사학자들은 칠레의 마푸체 공격을 아라우카니아 평정(La Pacificación de Araucanía)이라 부르며 이 사건으로 아라우카니아가 평화로워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학살당하고, 자기 땅을 백인들에게 빼앗기고, 인종차별에 시달리게 된 마푸체인들은 이에 대해 역사왜곡 하지 말라며 치를 떤다.
4. 현대사
조직적인 학살과 전염병으로 수많은 마푸체들이 사망하며 마푸체는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현재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마푸체는 칠레에 150만 명, 아르헨티나에 20만 명이 거주해 170만 명밖에 안되는 소수민족에 불과하다. 게다가 마푸체인 대부분이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심한 차별을 받으며 가난에 시달린다.칠레의 경우 마푸체 정복 이후 마푸체 민족과 지주, 정부 사이의 싸움은 1970년에 선거로 들어선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좌파연합 정권이 토지개혁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면서 전환기를 맞았다. 마푸체 단체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옛날에 빼앗긴 땅에 쳐들어가 눌러앉은 다음, 정부에 그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이전 정부와 달리 가난한 농민층에 경찰력을 동원하길 꺼렸던 좌파 정부는 그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마푸체 민족은 수많은 땅을 되찾았으나 1973년 쿠데타로 앞서 말한 좌파 정부를 뒤엎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모든 땅을 도로 압수하여 이른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면서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물론 군사 정부도 마푸체를 심하게 차별하고 탄압하여 그들에게 대항하다 죽은 마푸체도 많았다.
현재에도 칠레 정부와 마푸체 민족의 갈등은 심각하다. '민주화' 이후, 칠레에 세워진 민간정부는 마푸체 민족의 문제를 풀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러한 '화해'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아서 피노체트의 군정 때 빼앗긴 토지를 돌려받는 일도 소유주들의 반발로 얼마 가지 않아 어렵게 되었다. 특히 댐 건설이나 도로 건설에 마푸체 거주지가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옮겨 가길 거부하는 마푸체를 경찰력으로 밀어버리는 일이 일어나 아직도 문제가 되고 있다. 아울러 칠레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인 목재 산업을 위해 수입해서 심은 소나무와 유칼립투스 농장에서 뿌리는 농약으로 마푸체 민족의 땅이 오염되고, 고유종이 아닌 이 두 나무가 빨아들이는 수분 때문에 땅이 말라붙어 마푸체 전통의약에 쓰이는 약초가 줄어들고 있어 이것 때문에 마푸체인들이 반발하여 분쟁이 심각하다.
게다가 마푸체 민족을 상대하는 경찰과 법원 조직에서 피노체트 때 활동했던 사람들이 그대로 직위를 이어받아 활동하다 보니, 피노체트 때 만든 '반 테러법'을 아직까지도 적용하고 있어 저항하는 마푸체인들에게 장기수감 같은 중형을 먹인다. 그래서 일부 마푸체 사이에선 '피노체트 때와 다른 게 뭐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부패 없는 '좋은 경찰'이라고 선전하는 칠레 헌병군, 카라비네로스는 마푸체의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며 마푸체 집 안에 최루탄을 발사하고 온 집을 뒤엎어 놓고는 여성과 아이들까지 고문하거나 강간하기도 한다. 사실 칠레 카라비네로스의 기원이 된 집단의 전설적 영웅 에르난 트리사노부터가 '칠레의 버팔로 빌'이란 소릴 들은 사람이었다.
미첼 바첼레트가 집권했을 당시 마푸체에 사과한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문제는 그 말을 하는 와중에도 마푸체 다수 거주 지역 근처의 학교를 카라비네로스 무장 경찰 본부로 만들거나 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고, 아이들이 있는 학교에 최루탄을 던져 넣고, 도주 위험이 있다면서 마푸체 여성이 아이를 낳는 중인데도 쇠고랑에 매달아 두고, 아이의 등에다 경찰이 고무총을 난사해서 반 죽음으로 만든 일 등에 대한 사과나 수정 조치가 전혀 없다. 게다가 이러한 '농촌 폭력'이 일어나게 한 것에 대해 실패라는 소리만 하고 있어서, 대다수 마푸체들은 이 사과를 전혀 신뢰하지 않고 있다.
2018년 초 들어서는 칠레 경찰 카라비네로스에서 증거 조작으로 마푸체 민족 운동가들을 테러범으로 잡아넣으려다 증거 조작이 들켜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민족 운동가들을 잡아 넣으려던 작전 이름은 폭풍 작전(Operación Huracán)이라고 하며, 청렴하고 정직한 경찰이라는 카라비네로스의 평판이 허상일 뿐이라는 평가에 힘을 보태고 있다.
오늘날의 아르헨티나도 마푸체를 무자비하게 대하는 건 마찬가지이다. 특히 마푸체에게 높은 세금을 매겨 반발한 마푸체들이 시위와 납세 거부를 하자 정부에 의해 탄압당한다. 2017년 8월에는 마푸체 원주민 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시민운동가인 산티아고 말도날도가 아르헨티나 경찰에 끌려간 뒤에 실종당하다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이 벌어졌는데 정부에서 의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어 큰 이슈가 되고 있다. 관련 기사, #
그나마 칠레 쪽에서 거주하는 마푸체족들에게 다행인 것은 2021년 5월에 치러질 새 제헌의회 개헌 투표에서 마푸체족과 쿤코족, 알랄카루페족 등 자국내 원주민 출신 의원에게도 국회 의석 17% 정도가 할당되고 새로 제정되는 신헌법 조항에 원주민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의 조항이 신설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나마 기존에 백인계에게 유리했던 칠레 헌법을 폐기하고 새 헌법을 제정함으로서,[7] 그간 오랫동안 정치, 사회적으로 홀대받았던 마푸체 등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칠레 정부 측에서 유화책을 펼치고 정치적 발언권도 넓혀 자국의 일원으로서 포용하여 남부 개척 이래 오랫동안 이어져온 원주민과 정부와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취지였다.
2021년 7월 4일에 칠레 제헌의회가 마푸체족 여성 의원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9월 4일 개헌 국민투표로 부결나면서 무산되었다.
5. 기타
- 마푸체족 사이에는 아래와 같은 농담들이 있다. 농담이라고는 하나, 유럽인 및 유럽계 식민자들의 남아메리카 침략사, 아니 비단 남아메리카뿐 아니라 유럽 열강과 그 계보를 잇는 독립국가들이 세계 각지에서 행하였던 만행들을 단편적으로, 그러나 핵심을 지적하는 뼈있는 농담이기에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그 자들이 처음 왔을 때 그 자들에게는 성경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땅이 있었다.그 자들이 말했다.'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기도하세요."눈을 떴다.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었다. 그 자들에게는 땅이 있었다.[8]
- 시드 마이어의 문명 6의 확장팩 흥망성쇠 추가 문명으로 등장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 Hearts of Iron IV에서 남미 DLC를 보유할 시, 칠레를 선택하고 비동맹주의 루트를 고르면 마푸체족을 중심으로 한 국가를 세울 수 있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원주민 독립국으로 만들 수 있으며, 마푸체 국가를 세우는 대신 상술한 앙투안의 후손 자크 앙투안 베르나르(Jacques Antoine Bernard)를 국왕으로 앉혀 아라우카니아 파타고니아 왕국을 다시 만들 수도 있다. 아라우카니아 파타고니아 왕국 루트는 앙투안의 후손을 계속 왕위에 앉힐지, 아니면 도중에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Carlos Ibáñez del Campo)를 왕으로 만들지 중점으로 선택할 수 있다.
- Victoria 3에도 등장하며, 프랑스 왕[9] 이벤트도 존재한다.
[1] 이름이 아니라 마푸체 말로 경애하는 여성을 부르는 말이다.[2] 잉카 제국군은 본격적인 전투 전에 투항을 권유했지만, 마푸체인들은 "입 털지 말고 덤벼라. 우린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며 권유를 묵살했다.[3] 전략적, 정치적 차원에서는 몰라도, 전술적 차원에서 '대등하게 싸웠다'는 과언이다. 정직한 회전에선 당연히 기본적인 기술력 차이로 인해 마푸체가 열세였고, 따라서 마푸체인들도 멍청하지 않으니 이런 싸움은 일부러 피했다. 그리고 당시 스페인 제국 전체로 보자면 애초에 중남미 정복 자체가 자국 정규군이 아니라 사설 무장약탈단에 가까운 콩키스타도르들이 주도한거지, 당시 유럽 패권국이었던 스페인 본토의 관심사는 같은 유럽이나 가까운 이탈리아, 플란데스 전역, 지중해 반이슬람 성전이었지 마푸체는 정말 머나먼 오지의 지엽적인 분쟁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페인 본토의 시선은 이렇다고 해서 다른 원주민 정치체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갈 때 현지 식민지세력이라 해도 어쨌든 물리적 싸움을 통해 독립을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력을 확대한 마푸체의 전략적, 정략적 노련함이 떨어지는건 아니다.[4] 쿠랄라바 전투에서 마푸체의 공격에 맞서 싸우다 살해되었다. 당시 마르틴은 스페인군 50명과 원주민 보조군 300명을 이끌고 마푸체를 토벌하려 갔으나 이들이 상대하던 마푸체군은 600명으로 압도적이었다. 특히 마푸체군은 사전에 마르틴의 군대가 오는 것을 알고 이동경로를 전부 파악하고 있었는데 정작 마르틴은 이를 모르고 진지를 구축한 채 방심하다가 마푸체한테 기습을 당한다. 이때 얼마나 처절했는지 스페인군은 2명을 제외하곤 마푸체군에게 살해되었고 마르틴은 마푸체 병사들한테 살해된 다음 참수되어 목이 내걸린다. 이 전투는 스페인군의 큰 패전 중 하나기에 쿠랄라바의 비극이라고 할 정도.[5] 문명 6에서 마푸체 문명의 지도자인 라우타로(?~1557)가 스페인 총독 발디비아를 죽인 걸로 유명하다.[6]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마푸체 뿐만 아니라 카웨스카르나 테우엘체 같은 아르헨티나, 칠레 남부에서 살던 다른 남미 원주민들도 아르헨티나군과 칠레군에게 엄청나게 학살을 당했다.[7] 기존에 있었던 칠레 헌법은 원주민의 권익을 보장하는 법적 조항이 없어 마푸체를 위시한 현지 원주민들 사이에서 비판이 많았다.[8] 이 이야기는 남아공이라든지 아프리카 인종차별 및 식민지 상황을 비꼬는 말로 나온 말이다. 데즈먼드 투투 주교도 이런 말을 하며 유럽 백인들을 깠다. 케냐의 국부라 불리는 조모 케냐타도 매우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한다.[9] 앙투안이 아니라 무작위 프랑스 인물이 선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