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6298><tablebgcolor=#006298>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025 시즌 코칭스태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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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등번호 46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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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등번호 1번 | ||||
신조 츠요시 (2004~2006) | → | 모리모토 히초리 (2007~2010) | → | 양다이강 (2013~2016) |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등번호 5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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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키 유타로 (2007~2012) | → | 모리모토 히초리 (2014~2015) | → | 키무라 쇼고 (2016~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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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298><colcolor=#ffffff>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No.80 | |
모리모토 히초리 森本稀哲 | Hichori Morimoto | |
한국명 | 이희철(李稀哲) |
출생 | 1981년 1월 31일 ([age(1981-01-31)]세) |
도쿄도 아라카와구 | |
국적 |
|
학력 | 테이쿄고등학교 |
신체 | 185cm | 81kg |
포지션 | 외야수, 1루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8년 드래프트 4순위 (닛폰햄) |
소속팀 | 닛폰햄-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1] (1999~2010) 요코하마-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2] (2011~2013)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14~2015) |
지도자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군 외야수비·주루코치 (2023~) |
응원가 | 닛폰햄 시절[3][4] 요코하마 시절[5] 세이부 시절 [6] |
1. 개요
나는 '유쾌한' 희철 씨입니다 - 2011년 박동희와의 인터뷰를 가질 당시 한국 팬들을 위해 진행한 급조 퍼포먼스.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은퇴 이후에는 입담을 살려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다가 현재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1군 외야수비 및 주루코치를 역임하고 있다. '히초리즘'이란 이름의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있다.
재일 한국-조선인 3세이며, 이희철(李稀哲)이라는 한국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애초에 '히초리'라는 이름부터가 '희철'을 일본식으로 읽은 것.
2. 플레이 스타일
수비형 외야수로 타격 자체는 그렇게 돋보이는 편이 아니었지만 드넓은 삿포로 돔의 외야를 종횡무진하던 우수한 수비력과 허슬 플레이, 그리고 아래 나올 여러 똘끼나 팬서비스 정신 덕에 컬트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선수였다. 특히 외야 수비는 2006년부터 2008년까지 3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높이 평가받았다.풀타임 초창기엔 좌익수로서 2006년 우승 당시 좌익수 모리모토 - 중견수 신조 츠요시 - 우익수 이나바 아츠노리의 철벽 외야진을 구성했으며, 신조 츠요시가 은퇴한 뒤인 2007년부터 신조의 등번호 1번과 함께 닛폰햄의 주전 중견수 자리를 물려받아 그 해 3할 타율에 31도루를 마크하며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한편으로 2007년엔 111삼진에 볼삼비가 1:2에 달할 정도로 극단적인 배드볼 히터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으며 중거리 타자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삼진이 많았다. 2009년 시즌 이후로는 2번 타순에 자주 배치되면서 희생번트가 늘어났다.
3. 프로 입단 전
재일 한국-조선인인 아버지와 제주도 출신 한국인 어머니[7]사이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시절에는 축구를 병행하며 J리그팀 도쿄 베르디의 입단 테스트를 볼 정도로 운동에 자질이 있었다. 테이쿄 중학교·고등학교 시절[8]에는 1998년에 야구부 주장을 맡았고, 유격수로서 제80회 하계 코시엔 대회에 출전하여 3차전인 시마네 현립 하마다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8회에 와다 츠요시로부터 동점 홈런을 때려냈으나 이후 팀이 패배하며 우승엔 실패했다. 고교 시절에는 통산 34홈런을 기록하며 강타자로도 주목받았다.이후 1998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닛폰햄 파이터즈의 4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고, 프로 입단 직후 외야수로 전향했다.
4. 프로 입단 후
4.1. 닛폰햄 파이터즈 시절
4.1.1. 1999년 ~ 2005년
프로 2년째인 2000년에 1군 무대 첫 출전과 첫 홈런을 달성했으며 주로 대수비와 대주자 요원으로 기용되었다. 2003년에는 닛폰햄 감독으로 취임한 트레이 힐만 감독으로부터 일본의 버니 윌리엄스가 될 선수라는 칭찬을 듣는 등 높은 평가를 받아 1번-중견수로서 처음으로 개막전 선발 명단에 올랐는데, 4월에만 4개의 홈런을 기록했지만 그 이후 성적이 침체되면서 한신 타이거스에서 이적해 온 츠보이 토모치카[9]에게 주전을 빼앗긴 채 대수비·대주자로 뛰었다.2005년에는 재차 타격 성적이 향상되면서 처음으로 100경기 이상에 출전해 타율 .264, 7홈런을 기록했다.
4.1.2. 2006년
개막전 전후로 주전 좌익수였던 츠보이 토모치카가 부상으로 이탈하게 되면서 4월 하순 무렵부터 1번-좌익수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주전으로서의 첫 풀타임 시즌을 맞이하며 처음으로 규정타석을 채웠고, 그 외에도 리그 최다 득점을 기록하는 등 테이블 세터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같은 팀의 동료 외야수인 신조 츠요시, 이나바 아츠노리와 함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10] 올스타전에서도 처음으로 출장한 데 이어 일본시리즈 5차전에선 마지막 아웃카운트인 좌익수 쪽 뜬공을 잡아내며 팀의 44년 만의 일본시리즈 제패를 자신의 손으로 결정지었다. 당시 아웃을 잡아낸 직후 중견수 신조 츠요시와 부둥켜 우는 장면은 현재까지도 2006년의 닛폰햄을 상징하는 명장면으로 회자되며, 후에 이미 눈시울이 붉어진 상태에서 타구가 자신에게 날아올 때 행여나 놓칠까봐 걱정했다는 말을 남겼다.4.1.3. 2007년
은퇴를 선언한 신조 츠요시의 중견수 포지션과 등번호 1번을 물려받았다. 팀내 부동의 1번 타자로서 전 경기 풀 이닝 출전을 완수했고, 시즌 막판까지 세이부 라이온즈의 카타오카 야스유키와 도루왕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으나 아쉽게도 도루왕 수상에 실패했다. 처음으로 3할대 타율을 기록했고, 당시 퍼시픽리그 역대 6위 타이 기록이자 오시타 히로시와 함께 구단 사상 최다 타이 기록인 24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한 데 이어 내야안타 갯수도 이나바 아츠노리의 뒤를 이은 리그 2위를 기록했다. 여기에 수비에서도 강한 어깨를 보여주면서 양대리그 1위인 15보살을 기록하는 등 공수 양면에서 호성적을 기록하며 골든글러브(2년 연속)와 베스트나인을 동시에 수상했다.4.1.4. 2008년
5월 2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교류전에서 상대 투수 니시무라 켄타로의 공에 왼손 새끼손가락을 맞아 전치 5주의 골절상을 입는 바람에 2006년부터 계속되고 있던 연속 경기 풀 이닝 출전 기록도 중단되었다. 후반기에는 부상의 영향으로 인해 부진에 시달리는 등 개인 최저 성적을 기록했으나 그래도 수비력만큼은 여전히 인정받아서 골든글러브를 3년 연속으로 수상했다.4.1.5. 2009년
이토이 요시오에 주전 중견수 자리를 빼앗겨 좌익수로 자주 출전하게 되었는데 이마저도 타격 부진으로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는 일이 많아지면서 출전 기회가 크게 감소되었다. 그래도 올스타전을 앞두고 타격이 살아나면서 다시 출전 기회를 늘리고 있었으나 8월 6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지난 해에 부상당했던 왼쪽 새끼 손가락에 또 다시 공을 맞아 골절상을 당했다. 107경기에 출전했지만 규정 타석은 채우지 못했고 타율도 .247에 그치는 아쉬운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타나카 켄스케가 1번 타자로 뛰면서 2번 타자로 자주 기용되었고, 리그 최다인 43개의 희생타를 기록해 높은 성공률을 자랑했지만 일본시리즈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몇 차례나 번트 실패를 반복하고 2개의 병살타를 기록할 정도로 부진했다.5월에 국내 FA 권한을 취득했지만 FA 권한을 행사하지 않고“어떤 조건을 나와도 잔류할 생각이었다. 다른 팀에서 플레이할 이유가 전혀 없다”라는 코멘트와 함께 잔류를 선언했다.
4.1.6. 2010년
7월 14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1회에 희생 번트를 시도하다 노가미 료마에게 공을 맞아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골절상을 입으면서 다음날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 3년 연속으로 새끼손가락에 사구를 맞아 골절상을 입는 불운을 겪었지만 리그 최다인 55개의 희생타를 기록했고 타율도 .272로 올라가며 지난 해보다 타격이 나아졌다.그러나 갈수록 줄어드는 팀 내 입지 때문인지 결국 지난 해와는 달리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했고, 12월 11일에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 계약을 맺으며 닛폰햄을 떠났다.
4.2.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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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시절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
요코하마로 이적하지만 부상 등에 시달리며 2011년에는 48경기에만 나와 .187/.236/.246의 저조한 성적을 보였다.
2012년에는 강타자 알렉스 라미레즈와 신인 아라나미 쇼에 밀려 경기 후반 대수비로 교체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중 9월 말 골절상을 입으며 그대로 시즌을 마쳤다. 시즌 성적은 108경기 0.244/0.320/0.323, 3홈런 18타점.
2013년에는 1군에서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시즌 종료 뒤 전력외 통보를 받았다. 일단 본인은 현역 속행을 원했고, 11월 19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 계약을 하며 일단 현역생활은 이어가게 됐다.
2014년에는 세이부에서 대타, 대수비, 대주자요원으로 쏠쏠한 활약을 하며 99 경기에 출장하였다. 언제나처럼 쇼맨십을 발휘하며 덕아웃의 분위기를 북돋아준 것은 덤.
2015년에는 전년도와 같은 활약은 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를 선언하였다.
5. 은퇴 이후
은퇴 후에는 특유의 예능감을 살려 야구 해설자로 방송에 출연하고 있다.2023 시즌부터 친정 닛폰햄의 1군 코치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6. 여담
6.1. 스킨헤드를 하는 이유
초등학교 시절 범발성 원형탈모증에 걸려서 이지메를 당했다고 한다. 현재는 거의 극복하였지만 당시의 고생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같은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매일 머리를 밀며 스킨헤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6.2. 재일 한국-조선인 3세 정체성과 이름의 유래
'히초리(ひちょり)'라는 이름은 '희철(稀哲)'의 한국어 발음에서 따온 것으로 아버지가 명명했다. 당연히 보통의 일본 이름에서 볼 수 없는 발음인 탓에 데뷔 초 프로야구 선수들의 정보를 다룬 일부 가이드북에서 글자를 잘못 보고 '히초리(ひちょり)'가 아닌 '히로요리(ひろより)"라고 표기하거나 '稀哲(희철)'이 아닌 '秘哲(비철)'이라고 표기한 일도 있었다.[11]초등학교는 민단 계열 한국학교인 동경한국학교로 진학했고, 본인도 "재일동포로서 민족 의식이 강했었습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부모님은 닛포리역 인근에서 에리카(絵理花)라는 야키니쿠집을 운영했으나 건물의 노후화 및 체력 문제로 2013년 10월을 끝으로 폐점했다고 하며, 둘 모두 제주도 출신이라 제주도에 친척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이러한 출생 환경 때문인지 닛폰햄에서 FA로 풀렸을 때 한국프로야구 진출도 진지하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한국프로야구는 해외교포선수 제도가 있기 때문에 외국인 선수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뛸 수 있긴 했는데, 한국프로야구에서 활동했던 외국인 선수들에게 조언을 구했을 당시 다들 일본과 환경이 많이 다르고 훈련량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상당히 어려울 거라고 만류했기 때문에 본인도 단념하고 재일교포로서 일본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쪽을 택했다고 한다.
한편 모리모토 본인은 2007년 11월에 일본으로 귀화했으며, 2012년 3월에 3살 연상의 패션 모델인 유미(悠美)와 결혼해 2014년과 2016년에 각각 딸과 아들을 낳았다.
6.3. 신조 츠요시의 후계자
2006년 7월 21일, 메이지진구 야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 1차전에서 피콜로의 코스프레를 하고 나와 화제가 되었다.[12]절대 합성이 아니다.
모리모토의 분장을 보고 옆에서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콘헤드처럼 분장을 한 적도 있다.
신조 츠요시가 은퇴한 뒤 등번호 1번을 물려받음과 동시에 신조의 개그센스도 함께 물려받는다고 선언했다. 2008년엔 신조와 함께 삿포로돔 천장에서 줄을 타고 내려온 적이 있으며 닛폰햄 시절 연봉 협상 때는 돈 문제 따윈 제쳐놓고 어떤 이벤트를 해야하는가 의논하는 게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팬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 덕에 팬서비스 정신으로 유명했던 신조의 후계자로서 인정받았다.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입단식의 모습. 차이나타운에서 라면맨을 코스프레한 채 공식 입단식을 치렀다.
요코하마 시절, 데뷔팀 닛폰햄과의 교류전에서 경기가 우천순연되는 와중에 후배 코야노 에이이치와 프로레슬링 놀이를 하는 장면. 이렇게 소소하게 재미있는 장면들을 자주 연출했다.
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감독이 수석코치 시절인 2007년에 했던 팬티만 입고 구장 한바퀴 돌기 쇼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고 한다. 당시 기자가 어떻게 이에 대해 알았냐고 묻자 "진정한 행위예술가는 세계의 퍼포먼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해 여러 사람들을 배꼽잡게 했다.
7. 관련 문서
[1] 2004년에 도쿄도에서 홋카이도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지역명인 홋카이도가 팀명에 붙었다.[2] 2012년에 DeNA가 구단을 인수하면서 구단명에 모기업명이 들어갔다.[3] (전주) 焼肉絵理花 日暮里駅前 歩いて5分の一等地 (야키니쿠 에리카 닛포리역 앞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의 일등지) / 후술하겠지만 히초리의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야키니쿠집의 주소를 홍보하는 PR(...)로, 당시 닛폰햄의 엽기적인 작사센스를 상징하는 사례 중 하나다. 전주 가사가 확실히 들리는 응원 영상[4] 心の叫びを バットにぶつけろ 立ち上がれ いざ見せろ 燃える 男の魂を (마음의 외침을 배트에 부딪쳐라 일어나라 자 보여줘라 타오르는 남자의 혼을)[5] 心奮わす 君の情熱 掴めその手に 輝く星を (마음을 흔드는 너의 열정을 잡아라 그 손으로 빛나는 별을), 동키콩 컨트리의 오프닝이 사용되었다.[6] 待ってた晴れ舞台 コールが響く 茜空に映える シルエット oh oh 稀哲 oh oh 稀哲 さぁ星のように 眩しく光れ (기다려온 맑은 무대 콜이 울린다 노을에 빛나는 실루엣 oh oh 히초리 oh oh 히초리 자 별처럼 눈부시게 빛나라)[7] 일본인이라는 루머도 돌았지만 한국인이 맞다라는게 정설이었고, 2015년 9월 28일 인터뷰에서 어머니의 국적이 대한민국이라고 밝히며 사실로 확정 되었다.[8] 여담으로 테이쿄 고등학교가 1995년 여름 코시엔을 우승한 다음 해인 1996년 코시엔 대회를 취재한 Q채널의 아시아 리포트 다큐에서 잠시 촬영 화면에 잡히기도 했다.[9] 스즈키 이치로와 유사한 '시계추 타법'을 구사하는 교타자였다. 말년에는 미국 독립리그에서도 뛰었다.[10] 한 팀의 주전 외야진 전원이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것은 일본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참고로 일본의 골든글러브는 수비만을 평가한다.[11] 여담으로 秘(비) 역시 일본어로 히(ひ)라고 읽을 수 있다.[12] 참고로 이 해 올스타전에 신조도 선발되었는데, 이날 신조는 LED 전광판이 달린 벨트를 차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