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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버스비

버스비에서 넘어옴
영국 기사 서임자 (남성)
British Kn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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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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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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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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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버스비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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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파일: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3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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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16대

리버풀 FC 주장
톰 쿠퍼
(1934~1939)
맷 버스비
(1939~1940)
윌리 페이건
(1945~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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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前 축구인
파일:external/www.retrounited.com/matt-busby.jpg
맷 버스비
Sir Matt Busby, CBE[1]
<colbgcolor=#eeeeee,#191919> 본명 알렉산더 매튜 버스비
Alexander Matthew Busby
출생 1909년 5월 26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스코틀랜드 노스래너크셔 벨스힐 오비스턴
사망 1994년 1월 20일 (향년 84세)
영국 그레이터맨체스터 주 치들
국적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스코틀랜드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신체 174cm
직업 축구선수 (공격수[2], 미드필더[3]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맨체스터 시티 FC (1928~1936)
리버풀 FC (1936~1941)
감독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45~1969)
영국 대표팀 (1948)
스코틀랜드 대표팀 (1958)[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70~1971)
국가대표 1경기 (스코틀랜드 / 1933)

1. 개요2. 초기 생애3. 선수 경력
3.1. 맨체스터 시티 시절3.2. 리버풀 시절
4. 지도자 경력
4.1. 버스비의 아이들4.2. 뮌헨 비행기 참사4.3. 팀을 재건하다4.4. 마침내 유럽을 정복하다4.5. 말년
5. 평가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6.2. 감독
6.2.1. 대회 기록6.2.2. 개인 수상
6.3. 서훈
7. 기타

[clearfix]

1. 개요

영국(스코틀랜드)축구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절에는 맨체스터 시티 FC에서 7시즌간 주전으로 활약해 전성기를 보내면서 30년대 맨시티의 구단 전성기를 이끌었고, 1945년부터 1971년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감독을 맡았다.

2. 초기 생애

맷 버스비는 1909년 5월 26일 스코틀랜드의 조그만 광산 마을인 오비스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 할아버지는 대기근을 피해 스코틀랜드로 이주한 아일랜드인이었고, 외가도 그보다 나중 시기에 이주한 아일랜드계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어머니는 의사로부터 "다리가 이렇게 튼실한 걸 보니 오늘 축구 선수가 태어난 모양입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버스비의 아버지는 광부였는데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병사로 징집되었다가 1917년 4월 23일 아라스 전투에서 저격수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버스비는 1차 세계대전 때 아버지 외에도 세 명의 삼촌들을 잃어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홀로 버스비와 세 딸들을 부양하다가 1919년에 Harry Matthie 이란 이름의 남성과 재혼했다.

버스비는 그의 아버지처럼 때때로 광산에서 일했지만 그의 꿈은 프로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훗날 버스비는 어린 시절 당시 벨스힐의 유명 축구 선수인 알렉스 제임스와 허그힐 겔라처 같은 선수가 되고 싶어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버스비가 축구 선수가 될 때까지 지원하기에는 너무나 가난했고 어머니는 새로운 삶을 위해 이민을 택했다. 1928년, 버스비의 어머니는 미국으로 이민가기 위해 비자를 신청했다. 그러나 비자의 발급은 계속 지연되었고 그 사이에 맨체스터 시티에서 버스비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그에게 유스 계약을 맺자고 제의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머니를 설득하여 이민을 그만두고 맨체스터 시티 유스팀에 입단했다. 훗날 버스비는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어머니와 나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고 했지만 비자 발급이 계속해서 지연되고 있었다. 그걸 기회, 운, 운명 등 뭐라고 불러도 좋지만 결국 그 지연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놨다. 나는 결국 미국이 아니라 맨체스터로 이주했다.

3. 선수 경력

3.1. 맨체스터 시티 시절

1928년 2월 11일, 버스비는 5파운드의 계약을 맺고 맨체스터 시티 유스팀에 합류했다. 그는 좌측 윙포워드로서 활동했으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30년에는 피터 호지 감독이 그를 맨유로 보내려고 했으나 이적료에서 합의를 보지 못하고 결렬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30-31 시즌이 진행되던 중, 당시 맨체스터 시티 감독이었던 피터 호지는 버스비의 재능이 하프백에 더욱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버스비의 포지션을 하프백으로 바꿨고 버스비는 열심히 훈련한 끝에 마침내 자신의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1930-31시즌을 2군에서 훈련하며 기량을 쌓는 것으로 소비한 그는 다음해에 1군에 합류하여 1경기를 제외한 모든 경기에 출전하였고 자신의 진가를 보여줬다.

버스비는 재키 브레이, 지미 멕뮬란과 함께 리그 최강의 3백을 구축하여 맨체스터 시티의 1930년대 전성기를 이끌어냈다. 1932년, 맨체스터 시티는 FA컵에서 4강까지 올라갔고 1933년에는 결승전에 진출했으며 마침내 1934년에 팀 창단 2번째로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리그에서는 공격진의 열세로 승점을 놓치기 일쑤여서 우승을 번번히 놓쳐야 했다. 게다가 1934-35 시즌엔 그의 등번호 4번이 젝 퍼치발이란 선수에게 넘겨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버스비가 항의하자, 팀은 1936년 3월 12일에 8천 파운드를 받고 리버풀로 이적시켰다.

3.2. 리버풀 시절

버스비는 리버풀로 이적한 후 이틀 후인 3월 14일에 허더즈필드 타운과의 경기에 데뷔전을 치렀다. (리버풀은 이 경기에서 1:0으로 패했다.) 버스비는 한 달 뒤 블랙번과의 원정 경기에서 데뷔 골을 기록하여 팀의 2:2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그는 얼마후 등번호 4번을 되찾는데 성공했다. 그는 이후 3시즌 동안 거의 모든 경기에 출전했다. 리버풀은 매 경기마다 성실하게 뛰어다니고 리더십이 훌륭한 그를 주장에 임명했고 그는 주장으로서 선수들을 잘 이끌어 구단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1939년 훗날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 될 밥 페이즐리가 리버풀에 입단했고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리버풀의 성공을 견인했다. 둘은 개인적으로도 친구 관계를 맺었고 평생동안 우정을 함께 했다.
''맷은 우러러보고 존경할 수 있는 남자였다.''
밥 페이즐리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전쟁 동안 리버풀에 주둔한 영국군을 위한 위문 축구 대회에 참여했고 첼시, 미들즈브러, 레딩, 브래트포드, 본머스 등 영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축구 활동을 계속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버스비는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코치로서 일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리버풀은 당시 감독이었던 조지 케이를 보좌하는 수석코치를 제안했다. 그러나 버스비는 수석코치 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감독이 팀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컨트롤해야 한다고 봤고 감독의 결정에 일일이 간섭하는 리버풀의 구조하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봤다.

코치 계약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던 중, 리버풀의 최대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그에게 접근했다. 당시 맨유는 새 감독의 임명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맨유의 홈구장 올드 트레포드는 나치 독일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고 그 여파로 구단은 파산 위기를 겪어야 했다. 흐트러진 팀을 재수습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감독이 필요했다. 루이스 로커 스카우터는 버스비에게 맨유의 감독이 되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버스비는 처음엔 리버풀의 최대 라이벌인 맨유로 가는 것에 주저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고 맨유와 협상하기로 결심했다.

1945년 2월 15일, 버스비는 당시 맨유의 회장이었던 제임스 W. 깁슨에게 선수 훈련지침, 선수 선발, 선수 및 코치의 영입 및 방출에 대한 전권을 감독에게 주겠다고 약속해준다면 감독직을 수락하겠다고 밝혔다. 깁슨 회장은 버스비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에게서 맨유를 위대한 클럽으로 이끌어갈 잠재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수락했다. 깁슨은 버스비에게 3년 계약을 제시했다. 하지만 버스비는 자신이 생각하는 비전을 맨유에서 이루려면 최소한 5년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깁슨은 이 또한 동의했고 결국 5년 계약을 체결했다. 이로서 맨유 역사상 최으 감독중 한명인 버스비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4. 지도자 경력

4.1. 버스비의 아이들

맨유와의 계약은 1945년 2월 19일에 체결되었다. 하지만 버스비가 아직 군대에서 근무하고 있었기에, 실질적으로는 10월 1일에야 맨유에서의 감독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맨유에서 온 이후 제일 먼저 지미 머피를 코치로 임명했다. 이 결정은 버스비가 감독 기간 내내 했던 모든 결정 중 가장 잘한 것이었다. 지미 머피는 평생 동안 버스비를 도와 맨유를 강팀으로 육성시키는 데 기여했다.

버스비는 기존에 주급을 많이 받고 있던 7명의 선수들을 방출하고 여러 어린 선수들을 영입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선수는 셀틱의 윙어 지미 델라니였다. 그는 득점력이 뛰어나 매 시즌 10골 이상 넣을 수 있는 선수였다. 버스비는 델라니를 앞세워 전쟁 이후 재개된 1946-47 시즌에 리버풀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 다음 시즌에도 맨유는 리그에서 2위를 기록했고 FA컵 결승전에서 블랙번을 4:2로 꺾고 FA 우승컵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이 우승은 맨유가 마지막 우승컵을 거머쥔 지 37년 만에 얻어낸 쾌거였다. 깁슨 회장은 우승을 차지하고 돌아온 버스비에게 "자네가 내 최고의 꿈을 이뤄졌네"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1949년 맨유의 홈구장 올드 트래포드의 수리가 완공될 즈음, 버스비는 본격적으로 유망주들을 키워 월드 클래스로 육성시키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는 나이가 많거나 전성기가 지난 선수들을 다른 팀으로 모조리 내보내고 유소년팀에 대한 투자를 대폭 강화했으며 스카우팅 시스템을 확장하여 잉글랜드 전역을 샅샅이 뒤져 재능이 있는 유망주들을 모조리 긁어모았다. 그 결과는 2년 후인 1951년 11월에 마침내 효과를 봤다. 당시 18세였던 재키 블랜치플라워와 22세의 로저 번이 리버풀 원정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맨유는 이 경기에서 리버풀을 1:0으로 격파했다. 맨유는 기세를 이어가 1951-52 시즌에 23승 11무 8패로 승점 57점을 획득, 2위와 4점차 승점을 거두어 맨유 역사상 3번째이자 41년 만의 리그 우승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버스비는 자신의 정책에 확신을 가지고 계속 밀어붙였다. 1953년 4월, 던컨 에드워즈가 16세의 나이로 1군 무대에 데뷔했다. 그는 첫 경기부터 대활약을 선보여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고 곧 잉글랜드 최고의 재능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또한 맨유의 또 다른 전설 보비 찰튼이 1956년에 데뷔하여 역시 대활약을 선보였다. 이후 마크 존스, 리암 윌런, 에디 콜먼, 데이비드 펙, 데니스 바이올렛, 빌 폴크스 등이 차례로 데뷔했고 이들은 버스비 감독의 지도 아래 지속적으로 경기에 출전하며 기량을 키웠다. 당시 언론은 이들을 '버스비의 아이들(Busby Babes)'라고 불렀다.

1955-56 시즌, 평균 22세의 선수단으로 구성된 맨유는 압도적인 전력을 선보이며 2월부터 리그에서 무패행진을 지속했고 마침내 2위인 블랙풀보다 11점이 더 많은 승점 60점을 획득,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1952년 우승 당시 맨유에 뛰었던 선수는 로저 번과 조니 베리 단 둘 뿐이었다. 그 다음 시즌인 1956-57 시즌, 버스비의 아이들은 103골(!)을 터트리며 승점 64점을 획득하여 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또한 FA컵에서도 결승전에 진출하여 더블을 노렸지만 아스톤 빌라에 2:1로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버스비 감독이 유스들만 길러내어 경기에 투입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53년 반즐리 FC에서 공격수 토미 테일러를 영입했다. 그는 전방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1955-56 시즌 25골, 1956-57 시즌에는 34골을 터트리며 리그 최강의 공격수로 등극했다. 또한 1951년에 버밍엄 시티에서 영입해온 조니 베리 역시 날카로운 돌파와 결정력으로 맨유 공격에 힘을 보탰다.

한편, 맨유는 이 시기 잉글랜드 팀 최초로 유러피언 컵에 참가했다. 사실 1955-56 시즌에 유러피언 컵이 막 창단되었을 때, 당시 우승팀이었던 첼시 FC유러피언컵 주최자들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잉글랜드 축구 협회 FA는 그런 대회에 참가하지 말고 자국 리그에 집중하라고 권고했고 첼시는 이를 따랐다. 다음 시즌 우승을 차지한 맨유에게도 같은 권고가 내려졌다. FA는 "맨유의 유러피언 컵 참가는 풋볼리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그러나 버스비는 이에 불복했고 이사진에게 "축구는 이제 전 세계의 게임이 됐고 더 이상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만의 것이 아니다"라고 설득했다. 이사진은 감독의 의견에 동의했고 버스비는 FA가 맨유의 국제대회 참가를 막을 법적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유러피언 컵 참가를 강행했다. FA는 이에 불만을 표시했지만 결국 이를 용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1956-57 시즌에 우승팀 자격으로 참가한 맨유는 벨기에의 명문 구단 RSC 안데를레흐트와 맞붙어 원정경기에서 2:0 승리를 거뒀고 홈경기[5]에서 토미 테일러가 헤트트릭을 넣고 데니스 바이올렛이 포트트릭을 달성하며 10:0의 엄청난 승리를 거두어 전 유럽을 경악시켰다. 이 10:0 승리는 현재도 유럽 대회 최다 점수차 승리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후 맨유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아틀레틱 클루브를 격파하고 4강에 진출했다. 4강전에서 맞붙은 상대는 다름 아닌 전설의 공격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비롯한 초특급 선수들이 집결해 있었던 레알 마드리드 CF였다.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에서 펼쳐진 1차전에서 토미 테일러의 골에도 불구하고 결국 3:1로 패했다. 이후 2차전에서는 보비 찰튼이 골을 기록하며 분투했지만 결국 2:2 무승부를 기록,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맨유의 경기력을 높이 산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레알 마드리드 회장은 버스비에게 감독직을 제의했다. "맨체스터를 떠나서 마드리드로 오십시오. 파라다이스를 선물해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버스비는 빙긋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맨체스터가 저의 천국입니다.
Manchester is my heaven.

4.2. 뮌헨 비행기 참사

1957-58 시즌, 맨유는 이번에도 승승장구하여 유로피언컵에 진출하여 샴록 로버스, 둘카 프라하를 꺾고 8강에 진출했다. 8강전 상대는 유고슬라비아의 명문 구단 츠르베나 즈베즈다였다. 맨유는 홈경기에서 2:1 승리를 거둔 뒤 원정경기에서 3:3 무승부를 거두며 4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원정 경기를 무사히 치르고 맨체스터로 돌아오던 맨유 선수들은 1958년 2월 6일 뮌헨 공항에 도착했다. 당시 맨유가 유로피언 컵에 참여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던 FA는 일부러 일정을 팍팍하게 부과했다. 이때문에 맨유 선수들은 그날 내로 맨체스터에 돌아오지 않으면 시즌 운영에 차질을 빚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선수들은 얼른 뮌헨을 떠나고 싶어했지만 문제는 날씨가 매우 좋지 않았다. 폭설이 내려 비행기에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자, 기장은 스태프들에게 비행기의 양쪽 날개에 제설 및 방설 작업을 하도록 지시했다.

현지 시각 오후 2시 20분, 모든 준비를 완료했다고 판단한 기장은 선수들과 버스비, 코치들, 그리고 함께 타고 오던 기자들에게 비행기가 이륙할 준비가 끝났다고 알렸다. 이에 일행은 비행기에 탑승했지만 이륙을 시도한 비행기 엔진에서 비정상적인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기장은 여러 번 시도해봤지만 계속 같은 소리가 나오자 뭔가 문제가 생겼다고 보고 승객들에게 엔진의 결함으로 이륙할 수 없다며 공항으로 돌아가게 했다. 공항으로 돌아온 던컨 에드워즈는 자신이 묵고 있던 집의 여주인에게 "비행이 취소되어 내일 돌아간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장이 비행기가 이륙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 이에 선수들과 일행은 다시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 안은 승객의 절반이 비행기의 정면을 바라보고 남은 절반은 뒤편을 바라보도록 디자인되어 있었다. 이에 일부 선수들은 비행기의 뒤편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후 3시 4분, 세 번째 이륙을 시도한 비행기는 이륙 직전에 갑자기 속도를 잃었고 공항을 둘러싸고 있는 펜스에 부딪힌 후 전방에 있던 민가와 그대로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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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충돌로 비행기가 두 동강 나면서 뒤편에 앉아 있던 선수들과 승객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민가에는 불이 붙었다. 얼마 후 의료진과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맨유 선수 7명을 포함해 21명의 승객들이 이미 사망한 뒤였고 생존자들도 상태가 매우 위독했다. 던컨 에드워즈는 사고시 즉사하진 않았지만 갈비뼈와 골반, 다리가 모두 부숴지고 폐와 신장에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그는 잠시 의식을 찾았을 때 옆에 있던 지미 머피 코치를 알아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코치님, 다음 경기는 세 시에 시작하나요?

생사를 헤매면서도 다음 경기를 생각했던 그였지만 결국 사고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보름 만에 짧은 인생을 마쳤다. 이때 그의 나이 고작 23세였다.

이 사고로 죽은 선수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1, 로저 번: 28세, 277경기 출장 19골.
2. 에디 콜먼: 21세, 107경기 출장, 2골
3. 마크 존스: 24세, 120경기 출장, 1골.
4, 토미 테일러: 26세, 191경기 출장 131골
5. 던컨 에드워즈: 21세, 175경기 출장, 21골
6. 지오프 벤트: 25세, 12경기 출전, 0골
7. 리엄 윌런: 22세, 96경기 출전 52골.

그 외에 사고에서 살아남은 조니 베리와 재키 블렌치플라워는 부상이 너무 심해 은퇴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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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맷 버스비

한편, 맷 버스비는 던컨 에드워즈 못지 않은 부상을 입고 2개월 동안 의식을 잃은 채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언론에서는 그의 생존 확률이 50 대 50이라고 전망했지만 의사들은 그보다 비관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의사들은 그가 오래 버텨봐야 2주 안에 사망할 것이라고 전망했고 신부들은 두 차례나 사망이 임박한 환자에게 실시하는 병자성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그는 놀랍게도 빠른 회복력을 보였고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다. 간신히 정신을 되찾은 그는 던컨 에드워즈의 안부를 물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버스비는 매우 애통해하다가 자신의 오른팔과도 같은 지미 머피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계속 깃발이 날리도록 해주게 지미. 내가 돌아갈 때까지 맨유가 무너지지 않도록 해줘.

머피 코치는 버스비 대신 살아남은 선수들을 추스려서 잔여 경기를 치렀다. 하지만 주전 8명이 사망하고 2명이 은퇴한 최악의 상황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맨유는 유러피언컵 4강전에서 AC밀란에게 패했고 리그에서도 9위로 추락했다. 이 무렵 간신히 회복한 버스비는 선수들이 자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며 심각한 죄책감을 토로했다. 그는 일전에 맨유가 유로피언컵에 진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바 있었다. 그는 만약 맨유가 유로피언컵에 참여하려고 비행기를 타고 장거리 이동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참극은 없었다고 여겼다. 훗날 그는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내게 처음 든 생각은 다시는 축구와 관련된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축구를 버리지 않았다. 1958년 4월 23일, 버스비는 부상에서 회복해 지팡이에 의지하고 올드 트레포드로 돌아와 뉴캐슬전을 준비했다. 맨유 선수 였던 로니 코프는 버스비가 드레싱룸으로 복귀했을 당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가 뮌헨의 병원에서 돌아와 처음 드레싱룸에 들어왔을 때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와서 드레싱룸에 모여 있는 선수들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문 밖으로 도로 나갔다. 선수들은 모두 그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땅히 드레싱룸에 있어야 하지만 더 이상은 그 자리에 없는 선수들을 본 것이다.

이후 버스비는 이 암울한 상황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버스비의 아이들'을 재건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다.

4.3. 팀을 재건하다

1957-58 시즌 9위에 머무른 맨유는 다음 시즌에 2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 다음 두 시즌을 연달아 7위로 마무리했고 1961-62 시즌에는 15위로 추락했다. 팀 성적이 이렇게 추락한 것은 뮌헨 비행기 참사로 버스비의 아이들이 몰살당한 여파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당시 그들을 대신해 맨유에서 뛰는 선수들의 기량은 사고로 죽은 선수들에 비할 바 아니었고 버스비 또한 사고의 후유증으로 주기적으로 병원에서 건강 진단을 받아야 했고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어서 경기에 집중하는데 애를 먹었다.

이 시기 맨유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는 버스비의 아이들의 일원이었고 뮌헨 참사로 비명에 죽은 토미 테일러와 함께 최고의 공격력을 보여줬던 데니스 바이올렛이었다. 그는 1959-60 시즌에 리그에서만 32골을 터트렸는데 이는 맨유 선수가 한 시즌 기록한 가장 많은 골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바이올렛의 활약도 맨유의 하락세를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바이올렛은 1962년 1월 맨유를 떠나 스토크에 합류했다. 이후 1962-63 시즌 개막직전 예전부터 노렸던 데니스 로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영입하는데 성공을했지만, 맨유는 1962-63 시즌에 19위로 추락하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가 했으나, 버스비는 1963년 FA컵 결승전에서 레스터 시티를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하여 마침내 우승컵을 확보했다.

이후 1963년, 버스비는 조지 베스트를 유스에서 콜업을 시켰고 데니스 로 - 보비 찰튼 - 조지 베스트로 이어지는 잉글랜드 축구 리그 역사상 최강의 삼각 편대를 구축한다.[6]

4.4. 마침내 유럽을 정복하다

1963-64 시즌, 맨유는 지난 시즌 19위를 기록했던 그 팀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선보였다. 데니스 로는 이 시즌 모든 대회를 통틀어 46골을 기록했고 보비 찰튼과 조지 베스트 또한 절정의 경기력을 선보였다. 그 결과 맨유는 우승팀 리버풀보다 승점 4점이 적은 2위로 리그를 마무리했다.

1964-65 시즌, 맨유는 찰튼, 데니스 로, 조지 베스트의 맹활약으로 9월부터 12월까지 15경기 중 13승을 거두며 우승 경쟁을 이어갔다. 시즌 최종전이었던 1965년 4월 28일, 맨유는 아스톤 빌라에게 2:1로 패하고 승점 61점을 기록했다. 이때 리즈도 승점 61점을 획득하여 맨유와 같은 승점을 거뒀으나 맨유가 리즈보다 골 득실이 앞섰기 때문에, 맨유는 뮌헨 참사 이후 7년 만에 맷 버스비 부임 이후로 4회, 구단 통산 6회의 리그 우승을 달성하게 됐다.

1965-66 시즌, 맨유는 리그에선 4위에 그쳤고 FA컵도 준결승에서 탈락했지만 유로피언 컵에선 선전했다. 특히 유러피언 컵 8강전에서 조지 베스트는 당대 최고의 공격수 에우제비오가 있는 벤피카를 상대로 2골을 기록했고 맨유는 그의 활약을 앞세워 벤피카 원정에서 5:1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맨유는 4강전에서 세르비아의 명문 구단 파르티잔에게 패하고 말았다. 훗날 버스비는 이때 너무 낙담한 나머지 다 그만두고 은퇴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래도 맨유 팬들은 보비 찰튼의 발롱도르 수상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1966-67 시즌, 버스비는 마음을 다잡고 선수들을 독려하여 12월 27일 셰필드 유나이티드전부터 리그 최종전까지 무패를 달성하여 부임 이래 다섯 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우승의 주역은 삼각 편대와 최강의 센터백 빌 폴크스와 뛰어난 기량의 풀백 토니 던이 이끄는 수비진이었다. 맨유는 그 다음 시즌 유러피언 컵 대회 우승에 도전했다. 맨유는 4강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격돌하여 홈에서 1:0 승리를 거두었고 원정에서 3:3 무승부로 마침내 고대하던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의 상대는 다름 아닌 벤피카.

에우제비오를 대표로 하는 벤피카 선수들은 지난 날의 완패를 복수하기 위해 이를 갈고 있었고 결승전에서 거친 태클을 일삼으며 맨유의 공격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 했다. 특히 이날 조지 베스트는 상대에게 거의 완벽하게 봉쇄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후반 8분, 보비 찰튼이 헤딩골을 기록하며 승부를 맨유 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벤피카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매세운 반격을 퍼부었고 후반 34분 만회골을 터트렸고 후반 막판엔 에우제비오가 맨유의 두 수비수를 제치고 골키퍼와 1:1 찬스를 얻어내어 슈팅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의 슛은 골키퍼의 선방에 막혔고 양 팀의 승부는 연장전까지 이어졌다.

연장전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베스트가 마침내 폭발했다. 그는 골킥을 받자마자 상대 문전으로 침투, 골키퍼를 완전히 제치고 벤피카 골문에 정확하게 골을 넣어 맨유 팬들을 열광시켰다. 이후 벤피카는 완전히 무너졌고 맨유는 신예 브라이언 키드와 보비 찰튼의 추가골로 4:1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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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경기는 종료되었다. 맷 버스비 감독은 주전 선수 8명이 사망하고 2명이 은퇴하는 최악의 상황을 극복하고 10년 만에 팀을 유럽 챔피언에 등극시켰다. 그날 경기에 출전했던 맨유의 골키퍼 알렉스 스테프니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컵 대회 결승전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난 뒤에 선수들은 자기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선수들을 끌어안고 기쁨을 나누는 법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날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같이 버스비 감독에게 달려가 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고 그와 함께 기뻐했다. 그건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하기로 미리 결정한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4.5. 말년

1968-69 시즌, 버스비는 시즌 도중에 은퇴를 선언했다. 그 때문인지 선수들은 이전과는 달리 그리 투지를 보여주지 않았고 결국 맨유는 11위로 추락했다. 시즌이 끝난 뒤, 루이스 에드워즈 회장은 버스비를 팀의 이사진에 합류시키면서 새로운 감독이 팀을 이끄는 것을 도와주게 했다. 그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취임한 윌프 맥기네스는 버스비의 아이들의 일원이었고 맨유 리저브팀의 감독이어서 맨유에서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버스비의 뒤를 잇기엔 너무 벅찼다. 맨유는 그의 재임 첫 시즌 8위로 마쳤고 FA컵에선 준결승에서 탈락했다. 다음 시즌에는 리그 하위권에서 머무르다가 리그컵에서 3부 리그 소속이었던 아스톤 빌라에게 패한 후 사임했다.

맥기네스가 사임한 후, 버스비는 다시 맨유 감독으로 부임하여 리그 꼴찌로 추락했던 팀을 수습하여 8위로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버스비는 다시 이사진으로 돌아갔고 맨유는 그때부터 버스비의 후계자를 찾기 위해 17년간 시행착오를 겪었다. 1972년 맨유의 감독으로 부임한 토미 도허티는 선수들이 불만이 있을 때마다 버스비에게 가서 고백한다며 이 때문에 맨유를 개혁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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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1986년, 애버딘 FC를 이끌고 유럽 대회를 제패한 알렉스 퍼거슨이 맨유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했다.[7] 그는 부임한 이래 몇 년간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을 거둬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버스비는 퍼거슨을 끝까지 지지했고 그가 젊은 시절 자신을 닮았다며, 믿어보라고 호소했다. 퍼거슨은 그의 지지 덕분에 경질 압박에서 벗어나 팀의 리빌딩을 성공시킬 수 있었고 버스비의 아이들에 이어 '퍼거슨의 아이들'을 구축하는 데 성공, 맨유의 성공신화를 창조한다.

1988년, 아내가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오랫동안 시달리다가 숨을 거두자, 버스비는 이사진을 그만두고 야인의 삶으로 돌아갔다. 그는 회고록을 지으며 여생을 평안하게 보내다가 1994년 1월 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5. 평가

맷 버스비의 존재는 언제나 맨유와 함께할 것이다. 그가 바로 맨유 그 자체다.
바비 찰튼

그가 부임하기 전, 맨유는 70여 년간 리그를 2번 우승하고 FA컵 1회 우승한 것을 제외하면 별 볼일 없는 구단이었고 파산 위기를 여러 번 겪으며 언제라도 해체될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의 폭격으로 홈 경기장이 파괴되면서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였다. 버스비는 이런 답이 없는 팀을 맡아 유스 선수들을 잘 길러내어 맨유의 전성기를 열었다. 뮌헨 참사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결국 극복해냈고 맨유를 유럽 최고의 클럽으로 육성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렇듯 그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고 맨유는 그로 인해 어떠한 역경을 겪어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강성한 구단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맨유를 넘어 잉글랜드 축구를 유럽으로 진출시켜 활약하게 했다는 점에서 잉글랜드에 남긴 업적도 분명하게 크다. 라이벌 구단인 리버풀빌 샹클리와 더불어, 두고두고 회자될 명감독.[8]

아쉬운 점이라면 전성기를 이룩하면서도 시즌 순위에서 기복을 보인 점,[9] 그리고 유럽 대회를 제패한 뒤 선수들에게 동기부여를 주지 못하여 11위로 추락한 점, 은퇴 후 선수들의 불만을 다 들어줘서 감독이 리빌딩을 감행하지 못하게 만들어 17년간 암흑기를 겪게 한 것이다.

그만큼 버스비 감독이 맨유에서 가지는 입지와 업적이 너무 컸던것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강등, 징계같은 수준을 넘은 말 그대로 클럽의 존망이 달린 사고를 겪고도 그것을 이겨내고 장기간 팀을 이끈 감독의 빈 자리를 메꾸기는 당대에도 쉽지 않았다. 현대에 퍼거슨 감독 이후 10년 가까이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감독이 4명째 교체된 현 맨유를 보더라도 그렇다.

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6.2. 감독

6.2.1. 대회 기록

6.2.2. 개인 수상

  • PFA 메리트상: 1980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2
  • 유럽 축구 명예의 전당: 2008

6.3. 서훈

7. 기타

맷 버스비 감독이 역대 유러피언 컵에 5회 진출을 했었으며 5번 모두 4강 이상 성적을 거두었다.

[1] Commander, 대영제국 훈장 3등급[2] 윙어[3] 하프백[4] 뮌헨 참사로 인해 도슨 워커가 감독대행을 맡음.[5] 올드 트레포드는 당시 조명시설이 갖춰지지 않아서 맨시티의 홈구장 메인 로드에서 경기를 치렀다.[6] 데니스 로는 1964년, 보비 찰튼은 1966년, 조지 베스트는 1968년에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역대 최초의 발롱도르 트리오 공격진으로 후에 탄생한 발롱도르 트리오인 히바우두-호나우두-호나우지뉴와 함께 역사상 최고의 삼각편대로 불리는 최고의 공격진을 구축했다. 로 찰튼 베스트 트리오는 3R 트리오와 함께 유이한 발롱도르 공격진으로 그 유명한 BBCMSN도 올 발롱도르는 실패했다. 사실 BBCMSN는 각각 CM의 임팩트가 너무 큰 탓도 있다.[7] 이 때 알렉스 퍼거슨은 "맷 버스비를 위해 맨체스터로 간다"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고, 그 말을 지켰다.[8] 실제로 버스비와 샹클리는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에서 동료로 같이 뛰기도 했으며, 서로 사적으로도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참고로 샹클리가 허더스필드 타운 FC 감독 시절에 리버풀 회장인 T.V. 윌리엄스가 접근해서 "이 나라 최고 클럽의 감독직에 관심 없습니까?"라며 영입 제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권유에 샹클리는 도리어 "뭐라고요? 혹시 버스비가 짐 싸고 있습니까?"라고 반문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9] 하지만 이 부분은 좀 어폐가 있는 게, 45년 부임 이후 뮌헨 참사 이전까지 3번의 리그우승을 비롯해 준우승도 2번이상이었다. 기복을 보였다고 할만한 시기는 참사 이후인데, 이 시기에는 데니스 로가 합류하는 62년 이전까지 제대로 된 전력조차 없던 시기라 7,7,15,19위를 기록한 것을 감독에 대한 평가로 보긴 어렵다. 19위 이후 리그 2위, 리그 우승을 연달아 기록하고 65/66 4위, 66/67 우승을 달성하고 그 다음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 이후 은퇴하였는데, 참사로 인한 부진을 감안하면 꾸준히 우승~4위권을 오간 성적인지라 이것을 기복이라 표현하기는 묘하다. 물론 마지막 은퇴시즌에는 이미 동기부여가 저하된 선수들과 버스비 본인의 은퇴로 인해 11위를 기록하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