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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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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삼경
사서 삼경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시경 상서 주역

1. 개요2. 텍스트의 정립
2.1. 금문상서 vs 고문상서2.2. 매색의 위고문상서
3. 구성4. 내용5. 번역6. 《상서》와 관련 있는 것7. 관련 고사성어

1. 개요

『상서()』유교십삼경 중에 하나로 요순시대,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왕들이 내린 포고문, 신하들의 상소, 왕의 연설문 등 각종 기록을 모아둔 것이다. 본격적인 역사서는 아니지만[1] 어쨌든 당대의 국가 기록을 정리한 것이라 역사서로 분류하기도 하며, 중국 전통 산문의 전범으로 꼽히기도 한다.

원래는 정치 문헌들을 그냥 문서란 의미의 『서(書)』라고 불렀는데, 전한 시대에 유학이 국가이념이 되자 존중의 의미를 담아 '상(尙)'자를 붙여 『상서』라고 불렀다.[2] 이후 송나라가 되면 3경에 든다는 의미로 『서경(書經)』이라고 한다.

2. 텍스트의 정립

2.1. 금문상서 vs 고문상서

공자가 편찬했다는 이야기가 도는 물건이니, 당연히 분서갱유로 인해 『상서』는 대다수 경서와 함께 소실되었다.[3] 진나라의 통치가 끝나고 한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진나라 때의 「협서율(挾書律)」[4]이 해제된 혜제(惠帝) 이전까지는 복구되지 못했고, 한문제 때에 비로소 박사 복승(伏勝)[5]이 암송하고 있던 《상서》 29편을 당시 통용되던 글자인 예서(隸書)로 기술하여 복구하였다.[6][7] 이것을 『금문상서(今文尙書)』라고 하며, 경제(景帝) 때 학관에 세워졌다.[8]

그런데 무제(武帝)가 즉위한 이후, 공자가 살던 집을 헐어보니 벽 안에서 춘추전국시대 당대의 과두문자로 쓰인 「상서」의 죽간이 발견되었다. 이것을 『고문상서(古文尙書)』라고 하는데, 이때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이 고문을 해석하고 그에 따른 「전(傳)」[9]을 지었다.

『금문상서』와 『고문상서』는 텍스트의 내용에서 차이가 있었고, 따라서 해석 또한 다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후 《고문상서》를 지지하느냐 《금문상서》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파가 나뉘어 치열한 논쟁(금고문 논쟁)의 막이 올랐다.[10] 이 과정에서 《고문상서》는 전한 성제 때에 학관에 입관되기는 하였으나 고문학파에 의해 왕망(王莽)의 찬탈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후한에서는 다시 학관에서 퇴출되었다. 그러나 민간에서의 연구는 더욱 지속되어서 후한 시대에는 대체적으로 고문의 전성기였다고 평해진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전한 시대까지는 금문학파가 우세하였으나 후한 시대에는 고문학파가 그와 대등한 위치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고, 『상서』 또한 그러한 기준에 따라 『금문상서』와 『고문상서』의 권위가 각기 다르게 부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11]

2.2. 매색의 위고문상서

그러던 중 위진시대에 와서는 『고문상서』는 아주 완전히 소실되어 버렸다. 동진(東晉) 때 매색(梅賾)이라는 사람이 『고문상서』 58편을 찾아서 황제에게 바쳤다. 당나라 때는 공영달(孔穎達)이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면서 매색의 것을 토대로 금문과 고문을 모아 해석을 붙여 재구성하면서 지금의 『통행본 상서』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통행본 상서』는 그 자체로 텍스트상의 문제점이 많았다. 매색 당대에는 물론 이후에도 꾸준히 그 논의가 지속되었는데 심지어 주희(朱熹) 같은 경우에는 아예 『고문상서』 자체의 위작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복승의 『금문상서』는 이해하기 어려운데 공안국의 『고문상서』라는 것은 어찌 더 쉽고 분명한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정도로 『상서』 자체의 텍스트 비평이 꾸준히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명나라 때 매작(梅鷟)과 청나라 때 염약거(閻若璩)에 의해 절정에 이르러 이때가 되면 이미 《통행본 상서》, 그러니까 동진 시대 매색의 『고문상서』는 완전히 '위작'으로 낙인이 찍혀 『위고문상서(僞古文尙書)』, 즉 짝퉁 『고문상서』라고 불리게 되었다. 특히 염약거는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을 지어 당대의 『통행본 상서』 뿐 아니라 한대의 『고문상서』 자체를 가짜라고 입증하였다. 이 설은 동시대의 모기령(毛奇齡)의 「고문상서원사(古文尙書寃詞)」라는 글을 통해서 반박되기도 하였으나, 『상서』에 대한 대세를 거스르지는 못했고, 이러한 흐름이 조선에도 전해져 정약용에 의해 「매씨서평(梅氏書平)」으로 정리되어 『통행본 상서』의 텍스트 자체로서의 가치는 이미 위서로 결론이 났다.

한편, 2006년에 『고문상서』가 포함된 전국시대 죽간이 홍콩의 유물시장에서 나타났고, 2008년에 자오웨이궈(趙偉國)가 죽간을 구입하여 모교인 칭화대학(淸華大學)에 기증하였다. 자오웨이궈가 모교 청화대에 기증한 죽간은 청화대에서 소장, 관리를 담당한다고 하여, 《청화전국간(淸華戰國簡)》(약칭《청화간(淸華簡)》)으로 부른다.《청화간》의 내용 중에는《상서》20여편 및《일주서》와 유사한 문헌과 그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문헌이 있었다. 《청화간》 중 매색의 《고문상서》와 비슷한 제목인 걸 비교해보니, 매색의《고문상서》가 청나라 시대에 위서로 판명된 것이 지금 완전하게 100% 입증되었다. 참고로 청화대에서 고문으로 된 글을 금문(今文)으로 해독한 『고문상서』 11편[12]이 있으니, 중국어 위키문헌에 있다.링크 다만 한국어 위키문헌은 청화간 상서가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서』의 가치 자체가 완벽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상서』의 텍스트 자체에 대한 비평은 '금고문 논쟁'이 일어나기 한참 전인 맹자(孟子) 시대에도 있었던 만큼[14] 종래의 유학자들도 텍스트 자체에 대한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텍스트의 위작 여부보다도 중요한 것은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상서』가 갖고 있던 정치철학적 가치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지식인들이 《상서》를 통해서 각종 정치 원리를 언급하였던 사실은 《상서》의 내용이 전근대 동아시아 정치 철학의 원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특히 『상서』의 위작 입증 과정에서 하나의 화두였던 '16자 심법'(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조차도 그 텍스트의 진위가 의심받았을 지언정, 그 원칙 자체가 부정당한 적은 없었다. 곧, 『상서』 자체의 중심적인 가치는 그 텍스트의 실제성 여부보다도 그 텍스트가 담고 있는 '정치적 원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상서』에 언급된 정치적인 수사들이 곧, 전근대 동아시아 정치의 흐름에 큰 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 『상서』라는 텍스트 자체의 중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구성

흔히 『상서』의 구성을 이야기 할 때, 4서(書) 4요(要) 6체(體)를 언급하곤 한다. 이는 각기 목록, 카테고리, 편집 형식상의 구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먼저 4서는 『상서』의 큰 줄기가 되는 분류로써 「우서(虞書)」, 「하서(夏書)」, 「상서(商書)」, 「주서(周書)」의 4개 대단원을 말한다. 4요는 『상서』에 나타난 편집의 큰 원칙으로써 천문, 지리, 도서(圖書), 윤리를 말한다. '4요'는 이후 동아시아 역사 서술에서의 편집 원칙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6체는 서술의 방식을 말하는데 전(典), 모(謨), 훈(訓), 고(誥), 서(誓), 명(命)의 6가지를 말한다. '전'은 공자가 말한 제요(堯) 도당씨, 제순(舜) 유우씨 두 제왕에 대한 글을 말하며, '모'는 군주와 군주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 서로 정치에 대해 논의한 것을 글로 옮긴 것이다. '훈'은 백성과 신료를 훈계하는 글이고, '고'는 천자가 제후에게 내리는 당부의 글이며, '서'는 천자가 하늘에 맹세하는 글이다. '명'은 대신에게 내리는 천자의 명을 말한다. 여기에 더하여 10례(例)를 거론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6체에 '정'(征), '공'(貢), '가'(歌), '범'(範)을 포함하여 일컫는 말로 각기 정벌, 조공, 헌가, 전범의 기사를 의미하는 것인데 각기 한 편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주된 구성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4. 내용

『상서』의 내용은 명덕신벌(明德愼罰)로 규정할 수 있다. 이것은 주나라가 상나라를 정벌한 후 집권층에서 천하 통치를 위해 고심한 결과라고 하며, 본래 군주의 자계(自戒) 였으나, 후세에 경서의 권위가 높아지면서 역대 제왕들이 지켜야 할 전범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특히 여기서 '명덕'에 대한 관점들은 이후 주희에 의해 《대학》의 해석에 활용되면서 성리학적 정치 철학의 큰 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또한 유덕자(有德者)천명(天命)을 중시하고 있으며, 천자가 실덕하면 외명(畏命)이 내려 천명의 주재자가 바뀌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맹자》로 이어지면서 역성혁명의 전거(典據)[15]로 활용되었다. 특히 이러한 내용은 <상서>와 <주서>에서 자주 보이는데, <상서>나 <주서>의 내용 대부분이 탕왕(湯王) 천을무왕(武王) 희발, 주공(周公) 희단과 관련이 있는 내용으로 상나라와 주나라의 성립을 천명과 연계하여 정당화하려는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시 여기서 천명의 이동과 보존에 대한 큰 원칙이 바로 애민(愛民)중민(重民)으로 대표되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인데, 여러모로 유교적 정치 원리로서의 '민본주의(民本主義)'의 원류[16]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이 외에도 정치와 관련된 여러 개념어들의 출전이기도 한데, 이러한 개념어들은 모두 국가의 개혁 과정에서 개혁세력이 제왕을 높이거나, 혹은 제왕 주도에 의한 개혁 과정에서 그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용어로 활용되었다. 조선 후기 정치사의 큰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탕평(蕩平), 황극(皇極)은 모두 『상서』를 출전으로 하고 있는 말이며, 이것이 왕권 강화와 제왕 주도의 개혁을 설명하는 텍스트로 활용되었다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5. 번역

성균관대출판부에서 출간한 서경(2011)은 주자의 해석에 근거한 번역으로, 가장 통상적으로 팔리는 판본 중 하나이다. 이외에 이기동 교수의 서경강설, 김학주 교수의 서경 번역본, 을유문화사 이세동 교수의 번역본 등을 원전 텍스트 번역본으로 꼽을 수 있다.

주희의 집전을 번역한 것으로는 성백효역(1998)과 김동준역(2019)가 있다. 김동준 역자는 이외에 당나라 공안국의 주석서 상서정의도 번역했다.

염약거가 고문상서의 위조를 밝혀낸 상서고문소증도 소명출판사에서 번역되어있다.

다산 정약용의 상서고훈은 학자원에서 번역되어있다,

6. 《상서》와 관련 있는 것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중요한 정책 중 하나인 '탕평책'의 '탕평'이 바로 이 『상서』가 출전이다. 「홍범」 5조 황극설의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 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탕탕해지고 평평해진다) 구절이 원 출처.
청구영언영언도 「순전(舜典)」에서 순임금에게 내린 윤음(綸音)인 歌"永言"(가영언: 노래는 길게 말함이다.)에서 따온 거다.
일본 연호 중 쇼와가 서경이 출전이다.

7. 관련 고사성어



[1] 란 한자가 , 使, 와 같은 갑골문에서 나온 한자인데 원래 역사란 뜻이 아니다.[2] 이 의견은 정현의 설이다. 공자의 후손이자 《고문상서》의 권위자였던 공안국은 자신이 지은 《고문상서》 <서(書)>에서 '상(尙)'자를 '상(上)'과 동일시하고, '상대(上代, 상고시대)'의 문서라는 뜻으로 '《상서》'라 이름하였다고 했다.(‘尙’者, 上也. 言此上代以來之書, 故曰 ‘尚書’.)[3] 《주역》을 제외한 대다수의 유경이 소실되었다.[4] 민간에서 책(書)을 소장(挾)하지 못하게 한 법. 진시황이 기원전 213년에 제정한 법으로 알려져 있다.[5]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복생(伏生)이라고 기록되어 복생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자는 자천(子賤).[6] 이때 복승에게서 《상서》를 배워 예서로 기술한 이가 조조(晁錯)다.[7] 복승이 상서에 주석과 본문을 추가하여 복원한 상서를 상서대전(尙書大全)이라고 하는데 한나라 이전 상서에 기록되지 않은 기자동래설이 추가되어 있다.[8] '금문'(今文). 말 그대로 오늘날의 글자라는 뜻이다.[9] 원래 동양에서 '경전(經傳)'은 하나가 아니었다. '성경현전(聖經賢傳)'이라고 해서 '성인의 말씀' 혹은 '기록'인 '경'을 '현인'이 해석한 '전'으로 나누어서 파악한 것이다. 따라서 '전'이란 경에 대한 1차적 해석서로서의 성격으로 파악되었다.[10] 대표적으로 이러한 논쟁에 휘말린 텍스트로는 『상서』 이외에도 『춘추』 3전, 『의례』, 『주례』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춘추좌전》이나 《주례》 같은 책은 고문에만 존재하였다고 한다.[11] 기본적으로 '금고문 논쟁'은 하나의 경서만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고, 유경 전반에 걸쳐서 일어난 논쟁이었던 만큼, 그중 하나의 경에 대한 논쟁만을 소개하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상대적으로 더욱 치열하게 논쟁이 붙었던 것은 역시 아예 한나라의 정통성을 해석하는 근거였던 『춘추』에 대한 논쟁이나 종법적 질서의 재구현을 위한 근거였던 의례를 둘러싼 논쟁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금문상서』와 『고문상서』가 모두 소실되어 그 상세한 내용을 알기가 꽤나 어렵기도 하다.[12] 보훈(保訓), 윤지(尹至), 정오(程寤), 기야(耆夜), 윤고(尹誥), 황문(皇門), 채공(祭公), 간서금등(簡書金縢), 부열지명(傅說之命) 상(上), 부열지명 중(中), 부열지명 하(下), 후보(厚父), 봉허지명(封許之命).[13] 청화간 상서 번역본을 볼려면 구글링을 통해서 각각 한편씩 번역된 논문을 찾아서 볼 수 있기도 하다. 다만 번역이 안된 편목이 있으니 주의.[14] 맹자는 " 『상서』를 완전히 믿는 것이 『상서』가 아예 없는 것만 못하다."고 혹평하고 있다. 즉 『상서』 자체의 텍스트 문제는 전국시대에 이미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맹자의 『상서』 비판은 딱히 고증학적 비판이 아니다. 『상서』 대목 중에는 '무왕의 주나라 군대와 걸왕의 상나라 군대가 맞붙자, 절구가 둥둥 떠다닐 만큼의 피바다가 생겼다'는 대목이 있고, 맹자는 이에 대해 '무왕은 어진 사람이니까 상나라 사람들이 귀순했을 거로 보고 그런 잔인한 일이 있었을까' 했는데, 이는 고증학적 근거에 의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나의 성왕(聖王)은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관적 견해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에 대해 주자는 자기는 「대학」 텍스트를 입맛대로 개조했으면서도 '무왕 군대가 학살을 저지른 게 아니고 상의 내분으로 벌어진 것이라' 했는데, 그 근거 역시 그냥 자기 주관적인 생각이었을 뿐이다. 주자는 사실 『맹자』와 『주례』의 주나라 시대 관직 제도 설명이 다르자 『주례』가 맞는데 『맹자』에 위작이 1장 섞인 것'이라고 역시 개인 견해를 밝힌 적도 있다.[15] 말이나 문장의 근거가 되는 문헌상의 출처.[16] 절대 민주주의(民主主義)가 아니다. 민본주의를 민주주의와 엮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개념이 이상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