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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子朝鮮 기자조선 | |
<colbgcolor=#820000><colcolor=#ffd400> 국가 | 고조선 |
존속 | 기원전 1126년(?) ~ 기원전 194년 |
창건자 | 기자 |
말대 군주 | 준왕 |
국성 | 기(?) |
정치체제 | 군주정 |
국가 원수 | 조선후 (기원전 1126 ~ 기원전 323) 조선왕 (기원전 323 ~ 기원전 194) |
성립 이전 | 단군조선 |
멸망 이후 | 위만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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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자조선은 과거 고조선 지역에 상나라 왕족 출신 기자란 사람이 와서 세웠다고 전해지는 전승 속 국가이다. '후조선'(後朝鮮)으로도 칭했던 바 있다. 오늘날 남북학계에선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는 점을 들어 실체를 부정하고 있다.2. 연원
기자조선은 중국계 사서에 나오는 내용으로[1], 동시기 한반도계 사서는 없거나 전부 소실되었기에 관련 기록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허나 삼국시대 이후부턴 기록을 주도하는 세력이 유학자들이었기에, 중원문명을 흠모한 이들에게 중국계 사서에 기록된 기자조선은 고대부터 한반도 국가에도 문명의 교화를 상징하는 스토리가 있었다고 프로파간다하기 알맞기에 고려 시대부터[2] 19세기까지 큰 거부감 없이 정설로 받아들여져왔다.이러한 기조는 개화기가 시작되면서 민족주의가 서구화되어 발흥하고 그에 따라 민족주의 역사학이 대두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아직 고고학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이었지만, 기자라는 존재에 의문을 품는 주장들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3] 물론 민족사학은 당대 시대상의 한계가 있었기에 오늘날 주류 사학계에선 비판도 받는 주장이 많았지만, 기자조선에 있어선 오늘날 주류 사학계에서도 고고학 성과 등을 통해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45년 광복한 이후부턴 고고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되어 실증적 연구가 진행되었고, 오늘날까지 발굴된 사료들이나 고고학적 연구 방법에 따라 나온 유물들에 따르면 기자조선이라 할만한 외래 세력이 고조선 지역에 들어왔다고 볼 증거가 없다는게 대세가 되었다. 만일 기자를 비롯한 상나라 유민들이 조선에 왔다면 갑골문이나 황하 문명의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어야 정상인데, 만주나 한반도에서는 갑골문이 출토된 바가 없고 청동기 자체도 황하계와는 다른 북방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내 학계에서는 그 실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기자조선은 나오지 않으며, 민주화 이후 진행된 국수주의와 민족주의 퇴출정책에도 단군은 하나의 직책 혹은 신화적 역사로써나마 배우지만[4] 기자는 그냥 교육과정 자체에 존재를 하지 않아서 고대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기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한국에서 실존 불인정은 '기자 동래설 or 기자 피봉설' 뿐이기 때문에 위만 이전에 고조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진 않는다. 애초에 고고학적 유물로 보나 문헌적 기록으로 보나 자료가 부족해서 정확한 내막을 알기 어려울 뿐이지 고조선이란 국가 자체가 존재했다는 것은 확실하게 인정되고 있다. 따라서 현재는 고조선(단군조선[5])에서 위만조선으로 바로 이어진다는 것이 국내학계의 정설이다. 이 두 왕조를 합쳐서 고조선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교과 과정에선 두 왕조에 대한 기록이 상당히 빈약하기 때문에 그냥 합쳐서 '고조선사'로 뭉뚱그려 배우는 경우가 많다.
3. 실존 여부
기자라는 존재는 선진시대에도 현자로 언급이 되는 인물이나, 기자 동래설에 관한 기록은 전한(서한) 시기 들어 처음 나온다.전한 초 한문제 이전~그 무렵을 보낸 학자 복승(伏勝)이 복원한 《상서대전》(尙書大傳)[6]에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후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7] 여러 중국 사서들이 이러한 기술을 따르게 되면서, 중화권에선 위만에 의해 멸망한 조선왕 준은 이 기자조선의 왕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상서대전》은 기원전 3세기의 사료로 기원전 11세기의 일을 실증하기에는 많이 늦은 사료라는 점, 고고학적으로 한반도 북부 및 중국의 동북 지역에서 상나라 문화와 직접적으로 관계있는 유물들이 발견되는 예가 없다는 점[8] 때문에 서양에서 발달한 현대적 사학이 들어온 일제강점기 이후부턴 꾸준히 부정되어 왔다.
애초에 서주 시대 초기의 봉건은 '이미 완전하게 영토로 확정된 곳'을 하사받는 것이 아니라 '가서 그 지방을 정복하고 살아라'라는 지시를 받는 개념에 가까웠다. 당시까지만 해도 고대국가의 한계로 인해 넓은 지방을 한꺼번에 다스릴 수는 없었고, 이민족의 부족장들도 협상 결과나 아니면 주나라에 알아서 복속되는 개념으로 제후에 오른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제후국의 숫자도 매우 많았다. 《한비자》에 따르면 춘추시대의 패자(覇者)인 제환공은 30개국, 초장왕은 26개국을 병탄했다고 한다.
게다가 '조선' 같은 두 자의 국명은 서주 시대의 주나라 계열 봉건 왕조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이는 고대 중국어가 단음절 언어였기 때문이다. 다음절 언어인 한국의 국호에는 한 자, 두 자, 석 자 등 다양한 음절의 국호가 존재했다. 반면 중국은 주로 외자의 국명을 사용했으며, 두 자 국명은 '중산', '구오'(句吳: 뒷날의 '오나라')의 사례처럼 중화권 외부의 이민족 국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고죽처럼 예외도 있었지만 고죽국 역시 변방의 제후국으로 이민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서주시대에 '조선'이 국명일 뿐만 아니라 랴오닝 지역까지 포함하는 지역명이기도 했다고 해석한다면 중국의 기록과 실제 발굴된 유적 사이의 모순은 없는 셈이다. 기자조선이 원래의 조선을 대체했다고 이해하게 된 것은 랴오닝 등의 지역을 서한시대에는 더 이상 조선이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 설명은 서한시대 이전이라고 해도 랴오닝 지역을 조선이라고 불렀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약점이 있다.
한편, 《위략》에는 아예 기자조선의 후예인 기원전 4세기 고조선 왕이 주나라 희성 왕실을 받들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연나라를 치려고 했다는 말이 언급된다. 이때 고조선의 군주는 이전까지 주나라 천자의 칭호였던 왕을 자칭했다. '연역왕이 왕을 칭하자 조선의 통치자도 왕을 칭했다'고 왕을 자칭한 이유까지 풀어서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건 중국식 왕칭이 맞다. 이를 생각하면 위략의 기록이 거짓이 아닐 경우[9], 오히려 중국 사회로의 진출 및 편입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 기자 계통을 사칭했을 가능성도 제시할 수 있다. 신라 왕실이 흉노 김일제를 조상이라 주장하거나 고려 왕실이 당나라 숙종을 조상이라고 주장한 것처럼[10] 전통시대에는 머나먼 조상이 역사의 유명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례가 흔했기 때문에 이것도 그런 사례라는 것이다.
기자조선의 실존을 믿는 설을 따른다면, 마지막 왕으로 여겨지는 준왕은 성이 '기'(箕), 이름이 '준'(準), 즉 '기준'(箕準)이 된다. 이들이 찬탈자 위만에게 밀려 위만조선 시대 초기에 한반도 남부로 남하해 진국을 세웠다고 한다. 이때부터 준왕은 '한왕'(韓王)이라 칭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한왕은 '마한 왕'으로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는데, 백제 시조 온조왕에게 멸망당했다고 한다.[11] 다만 제사는 《삼국지》 시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여기서 기자는 기 땅의 자작이라는 뜻이며, 기자의 본명은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였고, 상나라의 왕족이었기 때문에 상나라의 왕성인 '자'(子)씨를 썼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73년 랴오닝성 카줘현(喀左縣)에서 '기'(㠱)라는 명문(銘文) 등이 쓰여진 서주 시기의 청동기가 출토된 바 있다. 때문에 기자 일족이 봉해진 곳은 조선이 아닌 요서 지역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제시되었지만, 해당 청동기가 출토된 지점에서 그것만이 아닌 여러 나라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기들이 함께 출토되었고 '기(㠱)'가 새겨진 청동기가 다른 곳에서도 출토됨에 따라 해당 유물만으로 기자조선의 위치를 확정할 수 없다고 보게 되는 등 유물의 의미는 일정 부분 인정되나 논의 자체는 거의 원점으로 돌아갔다. 한편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송호정은 이 명문 청동기로 보아 '기(㠱)'와 관련된 연나라의 속국이었던 소국(小國)이 후세에 기자조선으로 와전된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한편, 한반도로의 청동기 유입이나 춘추전국시대 전쟁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중원을 떠난 피난민의 이주가 기자조선설로 변형되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다만 이 경우도 결국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게 모티브가 아니었을까' 하는 수준의 가설적인 것이어서, 1970년대 이후에는 거의 발전해 계승되는 경우가 없다. 아예 시기를 확 늦춰서 문헌에서 분명히 확인되는 진나라와 한나라 때의 중국계 이주민들이 이권을 주장하기 위해 설화를 퍼뜨렸다는 견해 정도가 비교적 문헌이 풍부하게 남아 방증 자료라도 인용할 수 있는 당시 중국 통일 왕조의 프로파간다를 근거로 맥을 잇는 정도.[12]
물론 기록 자체가 별로 안 남아있는 고대사이기 때문에 결론이 쉽게 나지 않을 여러 설이 있으며, 이에 대한 내용을 확인하고 싶다면 한국어 위키백과의 기자조선 항목도 참고하도록 하자.
이외에 중산국의 기록과도 관련이 있다.
4. 전근대의 인식
조선은 바로 인현(仁賢)한 기자(箕子)의 후예로서 하늘의 돌봄이 독후(篤厚)하여 한 무제와 당 태종(唐太宗)도 멸할 수 없었던 나라이다.
-명나라 병부(兵部)(《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11월 1일 정사 1번째 기사 1592년)[13]
고조선이 사라진 이후 고구려부터 시작해 역대 한반도 왕조를 거쳐 20세기까지, 기자조선은 큰 영향력을 미쳤다. 한사군을 축출한 고구려 제15대 미천왕 기준으로도 위만조선 이전이 단군조선인지 기자조선인지의 여부는 이미 수백년 전의 까마득한 과거였는데, 전근대에는 고고학이 발전되지 않았던 시대적 한계상 문헌기록에 의존해야 했으므로, 기자조선의 존재를 마땅히 부정할 근거도 없었기 때문이다.-명나라 병부(兵部)(《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11월 1일 정사 1번째 기사 1592년)[13]
위에서 설명했듯 단군이 아닌 기자에 대한 숭배가 더 널리 행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기자에 대한 문헌기록이 더 풍부하고 무가적, 도교적으로 흡수된 단군조선보다 제도적인 기틀을 잡았다는 기자조선이 유교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에 대한 숭배 기록은 7세기 고구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태양신, 영성신, 가한신 등과 함께 섬겼다.
이후 삼한일통의식을 통해 고구려계의 의식을 통합하고자 했던 통일신라에서도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과 계승의식이 드러난다. 당현종이 743년 신라에 보낸 국서에 '(대대로) 큰 현인(大賢)의 가르침이 신라에 미쳤다'는 글귀가 있는데, 이 '큰 현인'은 기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최치원이 당나라에 쓴 <양위표>(讓位表)에도 고조선의 여덟 가지 법을 의미하는 기자의 <팔조지교>(八條之敎)를 이어받는다는 구절이 등장했다.
고려시대에는 11세기 이후, 기자에 대한 존숭 의식이 확립되었으며, 제15대 숙종 때 기자 사당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원체 기자에 대한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단군과 관련해서는 고려 중기에 편찬된 《삼국사기》 동천왕 21년 조에 '선인(仙人) 왕검(王儉)'을 언급한 짧은 기록 외에는 전하는 바가 없으나 고려 후기의 《삼국유사》 이후 13세기 후반에 단군에 대한 인식이 점점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유학자들에게는 기자가 큰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적 토대가 필요한 14세기 말 조선 건국까지는 단군에 대한 인식이 기자보다 뒤쳐졌다.
이후 단군과 기자에 대한 숭배는 아이러니하게도 안티들에겐 '사대적'이라고 허구헌날 까이는[14] 조선시대에 들어서야 어느 정도 균형이 맞게 되었다. 고려시대 기자에 편향되었던 제사 의식을 조선시대에 들어서야 바꾸며, 숭령전을 건립해 단군과 기자를 함께 제사 지내게 되었고, '개국'과 '교화'의 두 의미를 함께 부각시키게 되었다. 양측의 의미가 달랐기에 학문 성향에 따라 어느 한쪽을 띄운 학자들도 있었으나 국가에서는 양쪽 모두 중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는 단순히 모화(慕華) 사상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실 신라시대 이후로 한민족은 중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통일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에도 모화 사상은 존재했다. 고려 성종은 유교식 예제와 중국의 율령 체계를 고려에 도입했고, 고려 문종은 오랑캐 거란과 단교를 주장할 정도로 북송과의 교류에 관심이 많았다. 이는 아들인 제15대 숙종 때 기자를 기리는 사당을 세우는 배경이 되었다. 또 북송에는 고려 사신들의 시 모음집인 《소화집》(小華集)이 출판되었는데 '소화' 자체가 '소중화'를 가르켰다.
그랬던 것이 조선시대 들어선 단군 사당을 기자 사당 옆에 중건한 바 있다. 일부 유학자들은 기자를 더 쳐줬지만 공식적으론 차이를 두지 않았다. 즉, 단군을 인정하면서 한국의 기원을 요•순 시대로 끌어올리고, 기자를 인정하면서 중화권과 비교해도 한반도의 문화가 부족한 것이 없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단군이 조선의 '독자성'을 상징하는 존재라면, 기자는 조선의 (당대 중화 문명에 대한) '보편성'을 상징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선우(鮮于)씨, 기(奇)씨, 한(韓)씨[15]는 이 기자를 조상으로 삼고 있으며, 이들 성씨의 《족보》에는 기자조선의 왕계와 더불어 기자의 후손 준이 남하하여 마한의 왕이 되었고, 마한의 마지막 왕의 아들 셋이 각각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동하면서 성이 갈라지게 되었다는 전승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모화 사상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이야기일 확률이 매우 높다고 봐야 할 것이며, 고조선 당대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고려시대에는 이 청주 한씨가 고조선의 후예로 인정되어 기자에 대한 제사를 맡는 관직을 세습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모든 세습 관직이 없어지고, 단군과 기자에 대한 제사는 정부 주도로 행해졌다.
기자 전승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정전제 등 상나라의 문화를 도입했다고 전하기 때문에 조선시대 성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왕도의 덕치를 이룬 국가라면서 숭상했다. 심지어 북위 낙양성의 영향을 받아 잘 구획된 고구려의 평양 궁성 유적이 발굴되자 이를 '기자의 정전(井田)'으로 파악하는 경우도 있었다. 1607년(선조 40년)에 사대부 한백겸(韓百謙; 1552년 ~ 1615년)이 이 유적을 발견했는데, 그는 이를 보고 '이 땅에 기자가 왔다는 증거가 나타났다.'며 기뻐했고, 조정과 여타 사대부들도 모두 환호했다고 한다. 수천년 전부터 조선이 당당한 중화 문화권이었다는 사실(?)이 실증되었으니 당대인으로서는 매우 자랑스러운 발견이었을 터이다. 이후 간행되는 평양 지도와 풍경화에는 꼬박꼬박 기자 정전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16] 《동사강목》에도 한백겸의 이 주장을 그대로 실어서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17] 및 '기자조선 정통론'을 주장했다.
한편, 중국에서도 기자에 대한 전승 때문에 고조선을 꽤 괜찮게 봤던 것 같다. 《한서》(漢書)를 쓴 반고(班固)는 이렇게 평했다.
반고(班固)가 말하였습니다.
"현토와 낙랑은 본래 기자의 봉지이다. 옛날에 기자는 조선에 있었고, 그 백성을 예의를 가지고 가르치며, 밭 갈고 누에치고 길쌈을 하게 했으며, 백성들을 위해서는 여덟 조목의 금령을 두었는데, 죽이면 그 당시에 죽여서 갚고,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하고, 도둑질을 하면 남자는 적몰하여 그 집의 가노(家奴)가 되며, 여자는 비(婢)로 삼고, 스스로 대속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한 사람에 50만으로 하며, 비록 면하여 민(民)이 되어도 풍속에서는 이를 수치로 생각하고, 시집가고 장가들기는 하였지만 파는 일은[18] 없었다.
이리하여 그 백성들은 끝내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문호(門戶)를 닫는 일이 없고, 부인은 곧고 믿음성이 있어서 음란하지 않았다. 그 전야(田野)에서는 변두(籩豆)로 먹고 마시며, 도읍에서는 자못 관리를 본받았는데, 왕왕 배기(杯器)로 먹었다. 군(郡)에서는 처음에 요동에서 관리를 데려왔는데, 관리들은 백성들이 문을 닫거나 감춰두지도 않는 것을 보았는데, 고인(賈人, 장사꾼)으로 갔던 사람들이 밤에 도둑이 되자 풍속은 점차로 더욱 야박해졌다. 지금은[19] 금법을 범하는 일이 차츰 많아져서 60여 조목에나 이르렀다.
귀하다 할 것이다! 어질고 현명한 사람의 교화여! 그러나(?) 동이의 천성이 유순하여 다른 세 곳의 밖에 사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공자는 도(道)가 실행되지 않음을 애도하고, 바다에 뗏목을 띄어 구이(九夷)에 살고 싶다고 하였으니 있음직하다."
《자치통감》 권21에서 간접 인용.
"현토와 낙랑은 본래 기자의 봉지이다. 옛날에 기자는 조선에 있었고, 그 백성을 예의를 가지고 가르치며, 밭 갈고 누에치고 길쌈을 하게 했으며, 백성들을 위해서는 여덟 조목의 금령을 두었는데, 죽이면 그 당시에 죽여서 갚고,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하고, 도둑질을 하면 남자는 적몰하여 그 집의 가노(家奴)가 되며, 여자는 비(婢)로 삼고, 스스로 대속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한 사람에 50만으로 하며, 비록 면하여 민(民)이 되어도 풍속에서는 이를 수치로 생각하고, 시집가고 장가들기는 하였지만 파는 일은[18] 없었다.
이리하여 그 백성들은 끝내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문호(門戶)를 닫는 일이 없고, 부인은 곧고 믿음성이 있어서 음란하지 않았다. 그 전야(田野)에서는 변두(籩豆)로 먹고 마시며, 도읍에서는 자못 관리를 본받았는데, 왕왕 배기(杯器)로 먹었다. 군(郡)에서는 처음에 요동에서 관리를 데려왔는데, 관리들은 백성들이 문을 닫거나 감춰두지도 않는 것을 보았는데, 고인(賈人, 장사꾼)으로 갔던 사람들이 밤에 도둑이 되자 풍속은 점차로 더욱 야박해졌다. 지금은[19] 금법을 범하는 일이 차츰 많아져서 60여 조목에나 이르렀다.
귀하다 할 것이다! 어질고 현명한 사람의 교화여! 그러나(?) 동이의 천성이 유순하여 다른 세 곳의 밖에 사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공자는 도(道)가 실행되지 않음을 애도하고, 바다에 뗏목을 띄어 구이(九夷)에 살고 싶다고 하였으니 있음직하다."
《자치통감》 권21에서 간접 인용.
읽어보면 알겠지만, 기자조선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은 '성인(聖人) 치세'였으며, 덕분에 다른 오랑캐들과는 달리 교화가 잘된 것 같다고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
기자는 《상서》, 《주역》, 《논어》 등의 경전에서 현인으로 부각되는데, 그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음은 한마디로 상•주(商•周) 시대의 문명이 조선에 이식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상•주(商周) 시대가 유학에서 차지하는 포지션은, 가히 르네상스 사상에서 그리스-로마가 차지하는 포지션에 대응된다.[20] 로마가 가지는 문화적 영향력에 힘입어 후대의 유럽에선 민족에 관계없이 'ㅇㅇ로마 제국'이란 국명을 서슴없이 차용하지 않았던가. 즉, 유학이 구현하고자 하던 바로 그 이상세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자는 상•주 시대의 전설적인 통치법인 <홍범구주>[21]를 주나라 무왕에게 교시한 사람이었다. 즉, 단순히 '상나라 왕족 A' 수준을 넘어, 상•주 시대의 '아름다운 정치'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위대한 성현이 문명을 가져왔다는 것은, 당시 관점에서 볼때 대국에 대한 굴종심이라곤 볼 수 없다.[22] 오히려 한반도의 문명이 상•주 교체기까지 올라갈 정도로 유구하다는 자부심의 근거로 사용된 것이다. 굳이 21세기 감수성에 맞게 치환을 하자면, "고대 아테네의 민주개혁 첫 머리에 서 있던 솔론이 집정관 임기를 마치고 여행을 하다가 지중해 어떤 나라에 와서 민주정의 토대를 닦았다카더라" 정도에 비견할 수 있는, 근거는 의심스럽지만 어쨌거나 뭔가 있어보이는 옛 일화라는 것이다.
5. 근현대의 인식
20세기에 들어서 고고학이 발전함에 따라 기자조선의 실재를 비판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밝혀지기 시작했고, 일제강점기의 민족주의적 사학자 신채호, 박은식, 장도빈 등은 기자에게 대대로 제사를 지내왔고 받드는 그런 역사를 사대주의라면서 대차게 깠다. 다만 이때는 기자조선의 존재까지 부인하지는 않았는데, 신채호는 자신 나름의 '삼조선설'에 따라 기자조선을 삼조선 중 하나인 번조선(番朝鮮)의 한 왕조로 보았다. 기자를 언급하는 문헌 자료들이 적잖게 남아 있는 이상은 (특별한 발견이 있기까지는) 기자조선의 연대기를 그냥 두고 볼 것이며, 기자라는 사람이 3,000년 전에 있었고 우리나라에 왔었다 정도로만 알면 된다 정도였다. 아예 기자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없었다는 의견은 좀 더 이후에 부각되기 시작했다.한편, 기자의 세력을 단군조선의 토착 세력으로 보아 고조선 내에서 권력 이양이 일어나고, 중국과 교류한 것이 후에 동래설로 와전되었다는 주장도 있다.[23]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방식이 도입된 이래, 동북공정 등의 역사왜곡을 행하는 중국을 제외하면, 한국 사학계는 고고학적 발굴과 정면 배치되는 허무맹랑한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병도는 기자조선을 부정하고, 대신 한씨조선(韓氏朝鮮)이 있었다고 주장했다.링크1,링크2. 하지만 이러한 견해에서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기자조선이지, 고조선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쉽게 말하자면 기자가 이주해 온 것이 분명하다면 정황상 그가 다양한 신 문물을 가져왔어야 할 것인데,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시대라 문화적인 부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유물 측면에서도 딱히 다른 문화의 급격한 유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약점인 것이다. 더군다나 단순히 귀화인이나 다른 나라에서 넘어온 정치 거물 정도도 아니고, 새로 이주해온 땅의 기존 사회 지배 계층으로 유입되었다면 분명히 눈에 띄는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현재 고고학적으로 중국계 청동기의 도래는 기자조선과는 시대가 맞지 않고, 그마저도 굉장히 점진적인데다 도입에도 한계가 있다.
고조선이 대중국 외교 및 중원 진출을 시도하면서 본래 위치보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국의 시조를 기자로 선전했다는 주장도 있다.[24] 실제로 고대의 중국에 기자라는 인물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가 동쪽으로 피난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으므로 이를 유리하게 이용했다는 가설이다. 중화질서에서 단순히 중원 동쪽의 오랑캐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현자의 가르침을 받은 문명국으로 대우받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으며, 이같은 선전의 효과는 위의 자치통감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 만약 기자 설화가 단순한 중국의 왜곡이었다면 현지인들이 부정하는 반응이 있어야 자연스러우나 한반도에서 기자 신앙은 오랫동안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도 생각해 볼 점이다.
한편 고대 한국어로 '왕'이라는 뜻의 '길지'(吉支)라는 말[25]이 이 기자와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다. 조선 선조대에 발간된 광주판 《천자문》에서는 皇자와 帝자에 대해 '님금'이라는 훈을 달았으면서 王자에 대해 '긔ᄌᆞ 왕'이라는 '훈'과 '음'을 달고 있는데, 이때의 긔ᄌᆞ가 바로 吉支(길지)라는 학설이다. 이 학설에 따르면 고대 한국어로 '왕'을 일컫던 '기자'라는 단어가 중국의 기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어느 시점에서 혼동이 일어나면서 '기자조선설'이 생겨났던 것으로 추정한다.[26] 상고한어 음을 기준으로 생각해도 箕子의 고대음은 /*k(r)ə tsəʔ/(Baxter-Sagart의 재구) 혹은 /*kɯ ʔslɯʔ/(정장샹팡의 재구)으로, 고대 한국어 어형 '吉支', '吉士', '吉師' 등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5.1. 중국에서
중국에서는 중원 출신 인물이 세웠다고 여겨지는 기자조선이 있는게 동북공정에도 유리하기 때문인지 긍정론이 우세하다고 한다. 단순히 기자조선 긍정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단군조선 혹은 토착 고조선 왕조의 존재마저 같이 부정하기 때문에[27] 일반적인 긍정론보다 더 나갔다.다만, 기자조선을 어떤 관점으로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중국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편인데, 일단 한국사의 시조국가로 인정하는 입장이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고조선(=기자조선)은 한국의 첫번째 국가이기는 하나, 고대 중국의 봉건국가였다는 한계를 지니게 된다. 즉, 한국은 중국의 속해있던 속국 혹은 구성국에서 출발한 나라라는 결론이 나온다. 두 번째 입장은 아예 한국사 자체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 관점에서 고조선(=기자조선)은 한국과는 1도 관련이 없으며, 단지 중국의 일부에 불과했다고 본다. 물론 중국 특히 한족사의 일부라고 보긴 무리수가 많다.
이런 주장들은 중국 외에선 크게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다른 나라 학계에서는 별다른 논평조차 내놓지 않을 정도이며, 일본이나 대만의 혐한 세력 중 일부 말고는 딱히 호응해주는 집단도 찾아보기 드물다.[28] 다만 서구권 등 과거 일부 사료에선 기자조선을 긍정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 사실 중국 내에서도 학계에선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는만큼 토론의 영역에 있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며, 이런 류의 논쟁이 흔히 그렇듯 분청처럼 이른바 극단적 (그들 기준) 애국주의자들이 열렬히 옹호하는 경우가 많다.[29]
6. 삼한정통론
'삼한정통론'은 '마한정통론'이라고도 불린다. 이 이론은 조선 후기 국학 계열의 실학자들에 의해 발흥한 이론으로 기자조선이 위만조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마한으로 이어졌다는 이론이다. 이유는 위만이 찬탈자이기 때문에 유교적 사상에 근거하면 적통으로 볼 수 없고, 적통인 기준왕이 쫓겨 내려가 마한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기자조선의 적통은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족보》에서 준왕의 씨족이 '기씨'(箕氏)에서 '한씨'(韓氏)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자의 혈통과 유지는 마한, 더 넓게는 삼한으로 계승되었고, 삼한은 한국사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그런데 염철론에서는 찬탈 이전부터 한씨를 썼다고 나온다. 이러한 사상은 현대적인 실증 사관은 아니고, 조선시대의 관념론적 사관이라 할 수 있다.다만 2010년대 이후에 건마국 유적이 발굴되고, 백제에서 건마국 출신 귀족들을 높게 대우해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려고 했던 점, 고구려에서 기자에 대한 제사를 지냈던 점이나 신라가 기자의 적통을 이었다고 자랑스러워했다는 점을 겹쳐서 고조선 계승의식 자체는 삼국시대 당대부터 존재했으며, 고조선을 삼국이 공통조상 정도로 여겼을 가능성 자체는 열려 있다.
7. 기자와 기자조선의 군주들을 조상으로 삼는 성씨 목록
8. 역대왕
자세한 내용은 고조선/왕조 문서 참고하십시오.9. 민간 설화
임석재 선생이 전국의 설화를 수집, 집필해 펴낸 《한국구전설화전집》(전12권)에 실린 마이너 버전 <단군신화>에는 이런 내용이 있는데 간단히 옮기면 이렇다."옛날 옛적 밥도, 옷도 나무에서 따서 구하던 때 하늘에서 사람이 하나 떨어졌는데 그 거시기가 예순 댓발이나 해서 모든 동물들이 기겁하고 멀리했다. 그러나 곰이 그를 굴 속에 맞이하여 단군을 낳았고, 그 후 여우가 맞이하여 기자(箕子)를 낳았다.[30] - 신문 칼럼 참조.
10. 관련 역사기록
10.1. 중국
압록강을 건너 동쪽으로 옴이여,
현도(玄菟)ㆍ낙랑(樂浪) 향하도다.
신세웅(辛世雄)[31]을 살수(薩水)에 조상함이여,
기자(箕子)를 평양에서 뵈옵도다.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32] 중에서.
현도(玄菟)ㆍ낙랑(樂浪) 향하도다.
신세웅(辛世雄)[31]을 살수(薩水)에 조상함이여,
기자(箕子)를 평양에서 뵈옵도다.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32] 중에서.
고려는 본래 고죽국이다.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하여 조선(朝鮮)으로 삼았다 . 한(漢)이 이를 다시 나누어 세 군을 설치하여 낙랑, 현도, 대방이라 불렀다.
《수서》(隋書) <배구전>(裵矩傳) 中
《수서》(隋書) <배구전>(裵矩傳) 中
10.2. 한국
당고(唐高) 즉위 50년 경인(庚寅)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여 처음으로 조선(朝鮮)이라 칭했다. 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또는 궁홀산(弓忽山)이나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다스림이 1,500년이었다. 주(周) 호왕(虎王: 주무왕) 즉위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阿斯達)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다. 나이는 1,908세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기이> 제1 -고조선(왕검조선)- 中
《삼국유사》 <기이> 제1 -고조선(왕검조선)- 中
唐裵矩傳云高麗本孤竹國.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謂玄菟樂浪帶方.
通典亦同此說.
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名又不同何耶
당의 <배구전>은 말한다. 고려는 고죽국[35]을 모방하였다. 그것은 주나라가 기자를 책봉하여 조선으로 삼았기 때문이며 한은 분리하여 삼군을 설치하였으니 현도, 낙랑, 대방이라 이른다. 《통전》 또한 이 설과 같다.
그런데 《한서》에는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인데, 여기(당 <배구전>과 《통전》)에서는 (현도, 낙랑, 대방)3군이라 하고 이름 또한 같지 않으니 이는 어찌된 영문인가?
《삼국유사》 <기이> 제1 -고조선(왕검 조선)- 中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謂玄菟樂浪帶方.
通典亦同此說.
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名又不同何耶
당의 <배구전>은 말한다. 고려는 고죽국[35]을 모방하였다. 그것은 주나라가 기자를 책봉하여 조선으로 삼았기 때문이며 한은 분리하여 삼군을 설치하였으니 현도, 낙랑, 대방이라 이른다. 《통전》 또한 이 설과 같다.
그런데 《한서》에는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인데, 여기(당 <배구전>과 《통전》)에서는 (현도, 낙랑, 대방)3군이라 하고 이름 또한 같지 않으니 이는 어찌된 영문인가?
《삼국유사》 <기이> 제1 -고조선(왕검 조선)- 中
옛날에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고 인하여 그를 단군이라 불렀다. 이때가 당요 원년 무진년이다. 《고기》에 말하기를 상제 환인에게 서자가 있었는데, '웅'이라 하였다. 인간세상을 탐내어 인간이 되어 천부인 3개를 받아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니 이 분이 환웅 천왕이다. 환(桓)은 혹은 단(檀)이라고도 한다. 산은 지금의 평안도 희천군 묘향산이다.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명, 병,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게 하여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이때 환웅이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는 이것을 먹되 햇빛을 100일 동안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이 되리라" 하였다. 범과 곰은 그것을 먹고 금기하였는데,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했지만 곰은 금기를 잘 지켜 21일 만에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혼인할 상대가 없어 매양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이에 환웅은 잠깐 사람으로 변신하니 웅녀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단군이다. 단군은 당요와 같은 날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불렀다. 처음 도읍지는 평양이었고 뒤의 도읍지는 백악산이었다. 비서갑 하백의 딸에게 장가들어 부루를 낳았는데 이분이 동부여왕이다. 하나라 우왕 때에 이르러 제후들이 도산에 모일 때, 단군은 태자 부루를 보내었다. 단군은 하나라 우왕을 거쳐 상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이다. 사당이 지금도 있다. 나라를 누리기 1,048년이었다. 그 뒤 164년 후에 기자가 와서 분봉받았다.
《응제시주》 中
《응제시주》 中
가을 7월 초하루 정사일.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거란의 전 태후와 황제는 조서를 내려 압록강(鴨綠江) 동쪽 지역을 우리의 영토로 인정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거란이 성과 교량을 가설하거나 전투용 방책과 사격용 궁구를 설치하면서 점차 국경선을 넘어오니 이는 욕심이 지나친 것입니다. 이제 또 우정(郵亭)까지 새로 만들어 우리 영토를 잠식하고 있으니 《춘추》에서 지적한 '제멋대로 뻗어나가게 방치하지 말리니 더 이상 방치하면 제어하기 어렵다.'는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거란의 동경유수(東京留守)에게 국서를 보내 더 이상의 군사 행동을 중지하도록 경고하되, 그들이 거부하면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 건의에 따라 거란의 동경유수에게 다음과 같은 국서를 보냈다.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나라를 계승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국경으로 삼아왔습니다. 하물며 전 태후와 황제께서도 책문을 보내 은혜를 베풀면서 영토를 분봉할 때에도 또한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상국에서는 우리 영토 안으로 들어와 교량과 보루를 다수 설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부지런히 조공을 바치고 사신을 보내 입조해왔으며, 또한 조정에 글을 올려 옛 땅을 돌려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아직까지 허락을 얻지 못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또 최근에는 내원성(來遠城.지금의 압록강 검동도)의 군사들이 우리 성 바로 근처까지 사격용 궁구(弓口)를 이설했으며, 망루를 만들려고 건축 자재까지 쌓아 놓음으로써 변경의 주민들을 놀라게 하고 있으니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동경유수께서는 이웃나라와의 친선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실정을 잘 헤아려 황제께 잘 보고해 주셔서 우리 땅을 돌려받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임의로 설치한 성과 교량, 전투용 방책과 궁구 및 망루는 모두 철거하도록 해주십시오."
《고려사》 <세가> 문종 9년(1055) 을미년 가을 7월
이 건의에 따라 거란의 동경유수에게 다음과 같은 국서를 보냈다.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나라를 계승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국경으로 삼아왔습니다. 하물며 전 태후와 황제께서도 책문을 보내 은혜를 베풀면서 영토를 분봉할 때에도 또한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상국에서는 우리 영토 안으로 들어와 교량과 보루를 다수 설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부지런히 조공을 바치고 사신을 보내 입조해왔으며, 또한 조정에 글을 올려 옛 땅을 돌려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아직까지 허락을 얻지 못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또 최근에는 내원성(來遠城.지금의 압록강 검동도)의 군사들이 우리 성 바로 근처까지 사격용 궁구(弓口)를 이설했으며, 망루를 만들려고 건축 자재까지 쌓아 놓음으로써 변경의 주민들을 놀라게 하고 있으니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동경유수께서는 이웃나라와의 친선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실정을 잘 헤아려 황제께 잘 보고해 주셔서 우리 땅을 돌려받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임의로 설치한 성과 교량, 전투용 방책과 궁구 및 망루는 모두 철거하도록 해주십시오."
《고려사》 <세가> 문종 9년(1055) 을미년 가을 7월
...河南王使郭永錫來, 樸爲館伴. 永錫曰, “嘗聞高麗山水之異, 尙有箕子之風, 願觀地圖·禮樂·官制.”...
...하남왕(河南王)의 사신 곽영석(郭永錫)이 오자 임박이 관반사(館伴使)가 되었다. 곽영석이 말하기를, “일찍이 고려의 산수(山水)가 빼어나고 아직도 기자(箕子)의 풍속이 남아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원컨대 지도(地圖)·예악(禮樂)·관제(官制)를 보기를 원하오.”...
《고려사》, <열전>, 24권, 제신, 임박, 임박이 <정심론상> 20조를 올리다. 中.
...하남왕(河南王)의 사신 곽영석(郭永錫)이 오자 임박이 관반사(館伴使)가 되었다. 곽영석이 말하기를, “일찍이 고려의 산수(山水)가 빼어나고 아직도 기자(箕子)의 풍속이 남아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원컨대 지도(地圖)·예악(禮樂)·관제(官制)를 보기를 원하오.”...
《고려사》, <열전>, 24권, 제신, 임박, 임박이 <정심론상> 20조를 올리다. 中.
...서적을 상고해 보면, 본래 기자가 봉 받았던 땅으로, 9주의 교화와 8조의 가르침이 사람에게 깊이 배어 1,000여 년이 지났으니, 실제로 우리 동방 풍속의 시작이 되었다. 말엽에 위만에게 빼앗기게 되었다가, 한무제가 군대를 보내어 위만을 내쫓고 군을 설치하였다. 그 뒤에 고주몽이 점령하자 평양에 도읍하였는데, 기자가 남긴 풍속이 아직 남아서 600여 년을 편안히 지내다가, 그 쇠할 무렵에 연개소문이 흉악하게 굴어서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의 군사를 불러들였고... 지방에 가면 반드시 임금의 덕과 위엄을 펴고, 교화를 밝혀서 이미 잘 된 것은 그대로 지키고 아직 미진한 것은 더 장려하여, 기자의 유풍을 되찾는 데 힘쓰고 연개소문의 나쁜 습관을 깨끗이 없애서, 덕성을 훈도하여 기르자...
《동문선》, 제93권, 하륜, 서북면 도순문겸 병마도절제사 평양윤 조공을 전송한 시의 서문(송서북면도순문겸병마도절제사평양윤조공시서) 中.
《동문선》, 제93권, 하륜, 서북면 도순문겸 병마도절제사 평양윤 조공을 전송한 시의 서문(송서북면도순문겸병마도절제사평양윤조공시서) 中.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삼한(三韓)에 대한 설(說)은 서로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조선왕 기준(箕準)[36]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가서 개국(開國)하여 마한(馬韓)이라 불렀었는데, 백제(百濟) 온조(溫祚)가 즉위함에 이르러 드디어 그를 병합하였다. 지금 익주(益州)[37]에는 고성(古城)이 있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기준성(箕準城)[38]이라고 부르고 있으므로 마한이 백제가 된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후략)"
《동국통감》 <외기>(外記) -삼한기-
《동국통감》 <외기>(外記) -삼한기-
생각건대, 우리 동방은 단군이 나라를 처음 세우고,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았는데, 모두 평양(平壤)에 도읍하였고, 한나라 때에는 4군(四郡)과 2부(二府)를 두었습니다. 이로부터 삼한(三韓)이 오이처럼 쪼개어져 마한(馬韓)은 54국을 통솔하고,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각각 12국을 통솔하였습니다.
《동국여지승람》 <서문> 中
《동국여지승람》 <서문> 中
華人이 稱之曰小中華라하니 玆豈非箕子之遺化耶리오 嗟爾小子는 宜其觀感而興起哉인저
중국인이 작은 중화라고 칭찬하니 이 어찌 기자가 남긴 교화가 아니겠는가? 아! 어린이들은 마땅히 이 것을 보고 감동하여 분발해야 한다.
《동몽선습》 中
중국인이 작은 중화라고 칭찬하니 이 어찌 기자가 남긴 교화가 아니겠는가? 아! 어린이들은 마땅히 이 것을 보고 감동하여 분발해야 한다.
《동몽선습》 中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변계량의 상서문
천자(天子)가 천지(天地)에 제사지내고, 제후(諸侯)가 산천(山川)에 제사지내는 것이 제도이니, 비를 하늘에 비는 것은 참람(僭濫)하지 않은가?’고 하나, 신은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천지(天地)에 제사지내는 것은 상경(常經)이요, 하늘에 비를 비는 것은 비상(非常)의 변(變)에 대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을 좋게 말하는 경우에는 사람에게 징험이 있다.’고 하였으니, 신은 인사(人事)로써 이를 밝혀서 사람을 여기에 두도록 청합니다. 그 일을 소송하고자 할 때 형조(刑曹)에 가지 않으면 반드시 헌사(憲司)에 가게 되는데, 형조와 헌사에서 그 일을 올리는 것은 나라의 제도입니다. 일이 급하고 사정이 지극할 경우에는 직접 와서 격고(擊鼓)하여서 천총(天聰)에 아뢰는 자도 있는데, 무엇이 이와 다르겠습니까? 대저 5일 동안 비가 안 오면 보리가 없어지고, 10일 동안 비가 안 오면 벼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제 10여 일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는데, 아직도 하늘[天]에 제사하기를 의심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비록 하늘에 비를 빈다고 하더라도 또한 기필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이제 빌지도 아니하고 우택(雨澤)이 내리기를 바라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또 나라의 제도가 예문(禮文)에 의거하여 교사(郊祀)를 폐지한 지가 지금까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도리가 있었으니, 폐지할 수 없습니다. 신은 청컨대, 그 설(說)을 조목별로 말할 수 있으니, 전하께서 청감(淸鑑)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의 무진년(戊辰年)에 있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000여 년이 됩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러나 또한 1,000여 년이 되도록 이를 혹은 고친 적이 아직 없습니다. 태조 강헌대왕(太祖 康憲大王)이 또한 이를 따라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은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말하기를, ‘단군은 해외에 나라를 세워 박략(朴略) 하고 글이 적고 중국과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찍이 군신(君臣)의 예를 차리지 않았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이르러서 은(殷)나라의 태사(太師)를 신하로 삼지 아니하고 조선에 봉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39] 이로써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행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중국과 통하여 임금과 신하의 분수에 찬연(燦然)하게 질서가 있으니, 법도를 넘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신은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제후(諸侯)는 산천(山川)에 제사하는 것은 이것은 예(禮)의 대체(大體)가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제후로서 하늘에 제사한 경우도 또한 있었다. 노(魯)나라에서 교천(郊天)한 것은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에게 큰 공훈(功勳)이 있다 하여 내린 것이고, 기(杞)·송(宋)이 교천(郊天)한 것은 그 선세(先世) 조종(祖宗)의 기운이 일찍이 하늘과 통하였기 때문이다. 기(杞)나라가 기(杞)나라 됨은 미미한 것이지만 선세 때문에 하늘에 제사지냈고, 노(魯)나라는 비록 제후(諸侯)의 나라라 하더라도 천자가 이를 허락하여서 하늘에 제사하였다. 이것은 예의 곡절(曲折)이 그러한 것이다.’고 합니다. 신이 일찍이 생각하건대, 고황제(高皇帝)가 참란(僭亂)을 삭평(削平)하여 이하(夷夏)를 혼일(混一)하고, 제도를 창시하며 법을 세울 때, 옛 것을 혁파하고 새로운 것을 취하였습니다. 이에 현릉(玄陵)이 귀부(歸付)한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밝은 조서(詔書)를 내려, 우리 조정(朝廷)의 일을 두루 말하기를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자세하게 갖추 말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10,000리 밖을 밝게 내다보는 것이 일월(日月)이 조림(照臨)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일도 또한 반드시 알고 있었을 것은 의심이 없습니다.
그 뒤로 곧 의식은 본속(本俗)을 따르고 법은 구장(舊章)을 지키도록 허락하였으니, 그 뜻은 대개 해외(海外)의 나라이므로 처음에 하늘에서 명(命)을 받았음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 하늘에 제사하는 예법은 심히 오래 되어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국가의 법은 제사(祭祀)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제사의 예법은 교천(郊天)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법은 옛 전장(典章)을 지키는 것이니, 이것이 그 먼저 힘써야 할 일입니다. 이것에서 말미암아 말한다면, 우리 조정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선세(先世)에서 찾게 되니, 1,000여 년을 지나도록 기운이 하늘과 통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고황제(高皇帝)가 또 이미 이를 허락하였고, 우리 태조(太祖)께서 또 일찍이 이에 따라서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이 이른바 우리 동방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이치가 있어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16년 6월 1일
천자(天子)가 천지(天地)에 제사지내고, 제후(諸侯)가 산천(山川)에 제사지내는 것이 제도이니, 비를 하늘에 비는 것은 참람(僭濫)하지 않은가?’고 하나, 신은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천지(天地)에 제사지내는 것은 상경(常經)이요, 하늘에 비를 비는 것은 비상(非常)의 변(變)에 대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을 좋게 말하는 경우에는 사람에게 징험이 있다.’고 하였으니, 신은 인사(人事)로써 이를 밝혀서 사람을 여기에 두도록 청합니다. 그 일을 소송하고자 할 때 형조(刑曹)에 가지 않으면 반드시 헌사(憲司)에 가게 되는데, 형조와 헌사에서 그 일을 올리는 것은 나라의 제도입니다. 일이 급하고 사정이 지극할 경우에는 직접 와서 격고(擊鼓)하여서 천총(天聰)에 아뢰는 자도 있는데, 무엇이 이와 다르겠습니까? 대저 5일 동안 비가 안 오면 보리가 없어지고, 10일 동안 비가 안 오면 벼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제 10여 일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는데, 아직도 하늘[天]에 제사하기를 의심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비록 하늘에 비를 빈다고 하더라도 또한 기필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이제 빌지도 아니하고 우택(雨澤)이 내리기를 바라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또 나라의 제도가 예문(禮文)에 의거하여 교사(郊祀)를 폐지한 지가 지금까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도리가 있었으니, 폐지할 수 없습니다. 신은 청컨대, 그 설(說)을 조목별로 말할 수 있으니, 전하께서 청감(淸鑑)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의 무진년(戊辰年)에 있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000여 년이 됩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러나 또한 1,000여 년이 되도록 이를 혹은 고친 적이 아직 없습니다. 태조 강헌대왕(太祖 康憲大王)이 또한 이를 따라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은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말하기를, ‘단군은 해외에 나라를 세워 박략(朴略) 하고 글이 적고 중국과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찍이 군신(君臣)의 예를 차리지 않았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이르러서 은(殷)나라의 태사(太師)를 신하로 삼지 아니하고 조선에 봉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39] 이로써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행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중국과 통하여 임금과 신하의 분수에 찬연(燦然)하게 질서가 있으니, 법도를 넘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신은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제후(諸侯)는 산천(山川)에 제사하는 것은 이것은 예(禮)의 대체(大體)가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제후로서 하늘에 제사한 경우도 또한 있었다. 노(魯)나라에서 교천(郊天)한 것은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에게 큰 공훈(功勳)이 있다 하여 내린 것이고, 기(杞)·송(宋)이 교천(郊天)한 것은 그 선세(先世) 조종(祖宗)의 기운이 일찍이 하늘과 통하였기 때문이다. 기(杞)나라가 기(杞)나라 됨은 미미한 것이지만 선세 때문에 하늘에 제사지냈고, 노(魯)나라는 비록 제후(諸侯)의 나라라 하더라도 천자가 이를 허락하여서 하늘에 제사하였다. 이것은 예의 곡절(曲折)이 그러한 것이다.’고 합니다. 신이 일찍이 생각하건대, 고황제(高皇帝)가 참란(僭亂)을 삭평(削平)하여 이하(夷夏)를 혼일(混一)하고, 제도를 창시하며 법을 세울 때, 옛 것을 혁파하고 새로운 것을 취하였습니다. 이에 현릉(玄陵)이 귀부(歸付)한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밝은 조서(詔書)를 내려, 우리 조정(朝廷)의 일을 두루 말하기를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자세하게 갖추 말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10,000리 밖을 밝게 내다보는 것이 일월(日月)이 조림(照臨)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일도 또한 반드시 알고 있었을 것은 의심이 없습니다.
그 뒤로 곧 의식은 본속(本俗)을 따르고 법은 구장(舊章)을 지키도록 허락하였으니, 그 뜻은 대개 해외(海外)의 나라이므로 처음에 하늘에서 명(命)을 받았음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 하늘에 제사하는 예법은 심히 오래 되어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국가의 법은 제사(祭祀)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제사의 예법은 교천(郊天)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법은 옛 전장(典章)을 지키는 것이니, 이것이 그 먼저 힘써야 할 일입니다. 이것에서 말미암아 말한다면, 우리 조정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선세(先世)에서 찾게 되니, 1,000여 년을 지나도록 기운이 하늘과 통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고황제(高皇帝)가 또 이미 이를 허락하였고, 우리 태조(太祖)께서 또 일찍이 이에 따라서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이 이른바 우리 동방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이치가 있어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16년 6월 1일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구도(舊都)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그의 41대 손(孫) 준(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亡命)하여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가지고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검성(王儉城)【곧 평양부(平壤府)이다.】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 조선(衛滿朝鮮)이었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나라의〉 조명(詔命)을 잘 받들지 아니하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이를 쳐서, 진번(眞蕃)·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의 4군(郡)으로 정하여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에 이르기를, “현토와 낙랑은 본래 기자(箕子)를 봉한 곳인데, 소제(昭帝) 시원(始元) 원년에 임둔·낙랑으로써 동부 도호(東府都護)를 설치하였다.” 하였고,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변한(卞韓)은 낙랑 땅에 있다.”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평양부(平壤府)-
《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평양부(平壤府)-
상이 이르기를, 기자의 자손은 후세에 아는 자가 없으니 매우 서운하다...(후략)..." 근수[40]가 아뢰기를, "세상에서 전하기로는 청주 한씨(淸州韓氏)가 기자의 후손이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까닭인가?”하자, 영경이 아뢰기를,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이 삼한(三韓)이 국호이었으므로, 한을 가리켜 기자의 후손이라 합니다." 하고, 근수는 아뢰기를, "공가(孔哥)·인가(印哥)·선우가(鮮于哥)도 다 기자의 후손입니다. 대개 기자의 작은 아들이 우(于)에 봉해졌으므로, 선우라 합니다. 고시(古詩)에 기자의 후손에는 털북숭이가 많다.(箕子枝裔多髯翁)' 하였는데, 대개 선우추(鮮于樞)를 가리킨 것입니다." 하고, 윤휘는 아뢰기를, "평안도에서는 선우가가 대대로 기자전(箕子殿)의 참봉(參奉)이 된다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36년 8월 13일(병신일)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36년 8월 13일(병신일)
우리나라 대원군(大院君) 합하께서는 지극히 공경스럽고 존엄한 위치에 계신다. 이런 글을 어떻게 전달하겠는가? 그래서 도로 돌려보낸다. 귀국과 우리나라의 사이에는 애당초 소통이 없었고 또 서로 은혜를 입었거나 원수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덕산(德山) 묘소에서 저지른 변고야말로 어찌 인간의 도리상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또 방비가 없는 것을 엿보고서 몰래 침입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무기를 약탈하며 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한 것도, 어찌 사리상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들은 단지 힘을 다하여 한마음으로 귀국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짐할 따름이다.
보내온 편지에서 좋은 대책을 도모하라고 한 것은 바로 사류(邪類)를 위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좋은 말로 용서를 구하려는 것이 아닌가? 우리 나라는 바로 단군(檀君)과 기자(箕子)로부터 몇천 년 동안 이어온 예의의 나라인데, 어찌 이단에 유혹되어 그것을 없애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위정척사(衛正斥邪)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것으로써 보면 우리나라의 비적 무리 가운데 법의 그물에서 빠져나간 자들이 당신네 배로 도망가서 백방으로 부추겨서 그렇게 된 것이다. 남의 부추김을 받아서 이유 없이 소동을 피우는 것은 귀국을 위하여 매우 좋지 못한 일이다.
몇 달 뒤에 설사 전선(戰船)이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도 방비할 대책이 있다. 대원군 합하께서 국정을 확고하게 잡고 계신 데 대해서는 내가 잘 알고 있다. 이제부터 표류해 오는 서양 각국의 배에 대해서는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는 도리로 대우하지 않을 것이니, 다른 말을 하지 말라. 이렇게 알라.
오페르트의 서신에 대한 영종첨사 심효철의 답서
보내온 편지에서 좋은 대책을 도모하라고 한 것은 바로 사류(邪類)를 위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좋은 말로 용서를 구하려는 것이 아닌가? 우리 나라는 바로 단군(檀君)과 기자(箕子)로부터 몇천 년 동안 이어온 예의의 나라인데, 어찌 이단에 유혹되어 그것을 없애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위정척사(衛正斥邪)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것으로써 보면 우리나라의 비적 무리 가운데 법의 그물에서 빠져나간 자들이 당신네 배로 도망가서 백방으로 부추겨서 그렇게 된 것이다. 남의 부추김을 받아서 이유 없이 소동을 피우는 것은 귀국을 위하여 매우 좋지 못한 일이다.
몇 달 뒤에 설사 전선(戰船)이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도 방비할 대책이 있다. 대원군 합하께서 국정을 확고하게 잡고 계신 데 대해서는 내가 잘 알고 있다. 이제부터 표류해 오는 서양 각국의 배에 대해서는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는 도리로 대우하지 않을 것이니, 다른 말을 하지 말라. 이렇게 알라.
오페르트의 서신에 대한 영종첨사 심효철의 답서
뒷날에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크게 쓰기를, ‘아무 해 아무 달에 서양 사람이 조선에 들어와 아무 곳에서 동맹을 맺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기자(箕子)의 오랜 나라가 하루아침에 오랑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강화도 조약에 대한 최익현의 반대 상소 中
강화도 조약에 대한 최익현의 반대 상소 中
11. 같이 보기
11.1. 정통론 목록
11.1.1. 한국
11.1.2. 중국
11.1.3. 일본
[1] 후술되어있듯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은 한나라(전한) 시기 처음 등장한다.[2] 기자를 넘어 기자조선설이 좀 더 확고해진건 대몽항쟁이 끝나는 중후기부터. 사실 삼국시대만 해도 기자조선은 그리 많이 언급되는 주제는 아니었다. 이는 대몽항쟁기에 고양된 민족의식과 원나라 중심의 세계질서에 순응해야 하는 당대 현실 속에서, 나름대로의 타협론으로 발굴해낸게 단군과 기자조선이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제왕운기에서 이른바 전조선, 후조선론을 띄우며 단군을 민족적 독자성과 유구성의 표상으로, 기자는 주나라 무왕에게 홍범구주를 교시해준 문명화의 상징으로 강조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볼 수 있다.[3] 마침 청나라에선 고대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는 고증학이 유행하고 있던 시기기도 했다.[4] 단군조선을 제정일치의 증거로 배우는 식. 물론 현행 교과 체제에서 단군왕검은 신화적 존재로 한정한다.[5] 애초에 단군조선도 학계에선 근거가 부족하다고 보기에 부정되며, 토착계 고조선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단지 대중적으로 표현할 때 좀 더 이해하기 쉬우라고 편의상 단군조선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6] 복승이 진나라 시기 분서갱유로 상서가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벽 속에 상서를 숨겼는데, 이후 세월이 지나 유실된 편을 제외하고 나머지 29편을 주석과 본문 등을 추가해 지역민들에게 가르쳤는데, 이를 전해들은 한문제가 조정에 출석하길 원했으나 고령이라 먼 길 오기 어렵자 신하 조조를 복승에게 보내 배움을 구하고 예서로 기술해 복원한 것이 상서대전(금문상서)이다.[7] 사기엔 기자조선 관련 내용이 없다는 글도 있으나#, 사기 송미자세가에 주무왕이 홍범구주를 교시해준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하되 신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라는 구절이 나오긴 한다. 물론 그 뒤의 얘기가 자세하게 나오질 않아서 정확한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사마천 당대에도 딱히 다른 기록이 없어서인지 상서대전 보고 그 구절 하나 추가한 모양. 참고로 사기의 조선열전은 거의 위만조선만 다룬다.[8] 중국 청동기는 하북 ~ 요서 선에서 출토 한계가 그친다.[9] 사실 기원전 4세기랑 위략이 쓰인 위나라 시기 역시 연도차가 제법 나긴 한다.[10] 고려의 경우 훗날 원나라에서 이걸로 까였다. 숙종(당) 문서 참조.[11] 다만 온조 행적에 대해선 후대에 위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게 학계 정설이다. 실제 마한이 백제에 흡수되는건 온조 한참 뒤다.[12] 실제 한 무제가 고조선을 정복한 이후, 해당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면서 지역 토착민들을 좀 더 쉽게 다스리기 위해 직전 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기자조선설을 더 띄운거 아니냔 의견도 있다.[13] 기자의 후예 얘기와 함께 한무제, 당태종을 꺼낸 이유는 그만큼 중국 왕조들에 한반도계 국가가 각인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수나라때 100만 대군과 당태종의 침공에도 살아남은(물론 당고종때 멸망되긴 한다) 고구려는 중국 왕조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는데, 먼 훗날 원나라를 세우는 쿠빌라이 칸이 고려의 태자가 자신에게 줄을 서자 "당 태종도 굴복 못 시킨 고려의 태자가 내게 왔다"며 크게 기뻐하며 부마국 지위와 불개토풍의[41] 약속을 할 정도였다.[14] 사실 이것도 관학파 시절엔 덜했고, 사림파 이후에나 두드러진다. 실제 원구단 폐지 논쟁 때만 하더라도 명나라는 원구단을 없앨 것을 요구했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조선이 동방에 있으므로 '동방청제(東方靑帝) 신위'만 받들자는 반칙적 제안도 있었고,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온 이래 1,000년이 넘도록 하늘에 제사를 받들었으므로 조선이 명나라의 제후국이라고 해도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을 정도였다. 조선의 예법을 살펴보면 천자국 예법과 제후국 예법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태조니 세종이니 하는 묘호도 사실 제후국은 사용하지 못하는 용어임에도 조선은 20세기 초 멸망할 때까지 꿋꿋이 썼다.[15] 이천 서씨의 조상도 기자조선에서 왔다고 전해진다.[16] 강응천, <단군 대 기자, 우리 역사의 상징을 둘러싼 경쟁>, 《(청소년을 위한) 라이벌 한국사》, 그린비, 2010년.[17] 기자가 한반도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기자조선을 세우고 왕 노릇을 했다는 설.[18] 매매혼을 말한다.[19] 반고의 시대.[20] 혼란기 춘추전국시대에 태동한 유교의 모티브가 사실상 '이상적인 주나라 시대로 돌아가자!'였다.[21] 하나라 우왕이 남겼다는 9개 조항의 큰 법, 정치 이념을 가리키는 유교용어.[22] 각기 판단하기 나름이겠지만, 사실 오늘날에도 세계최강국이자 민주, 문화강국이기도 한 미국에 대해 상당수 한국인들이 가지는 태도와 결은 같다. 물론 정도차의 문제겠지만.[23] 김용섭, 《동아시아 역사 속 한국문명의 전환》[24] 물론 기자조선이 사실이라는 뜻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칭이다.[25] 백제의 왕호 건길지, 고구려의 왕호 '개차' 등.[26] 이 가설대로라면 고구려의 기자 숭배는 고구려와 토착 지배세력간의 연결고리로 볼 수 있다.[27] 다만 단군조선은 국내학계에서도 신화적 요소로 이해하지 역사적으론 부정하는 단어긴 하다. 보통은 그냥 토착계 고조선 왕조로 본다.[28] 일본 위키도 일단은 2020년대 기준 실체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29] 사실 한국에서도 기자조선을 부정하는 부류들 중엔 딱히 합리적 근거도 없이 그냥 기분이 나쁘니[42] 무조건 부정하고 보는, 반대로 한국 역사에서 타국 역사에 간섭하거나 우월성을 드러낸 것 같은 내용이 있으면 묻고 따지지도 않고 걍 사실이라고 못박아버리는 국뽕성 행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30] 이 설화의 여우는 좋은 의미가 크겠지만 메타적으로 볼때 "기자(箕子)조선"은 현 사학계에서 허구로 보고 있으니 "속임수"를 잘 쓰는 여우의 상징으로도 읽힌다는 점이 재미있다. 이런 식의 단군신화 마이너 버전 중에는 곰이 아닌 호랑이가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다.[31] 살수대첩 당시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으로 그가 지휘하는 수나라 제8군이 후방 엄호를 맡아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전멸했다.[32] 명나라의 호부낭중으로 1460년 진사에 합격했으며, 성종 7년(1476년) 조선에 사신으로 온 기순(祁順)이 썼다.[33] 요나라가 옛 조선 땅에 처음 세워졌다는 말이다.[34] 8조법을 의미한다.[35] 백이와 숙제의 나라로서 중국의 성지[36] 준왕을 뜻한다.[37] 현재의 익산시.[38] 다른 곳에는 "미륵산성(彌勒山城)"이라고 부르기도 한다.[39] 기자를 조선후로 봉함을 의미함.[40] 윤근수(尹根壽, 1537년(중종 32년) ~ 1616년(광해군 8년).
[41] 다만 불개토풍은 당시 원나라가 다른 지역에서도 웬만하면 들어주던 약속이긴 했다. 고려의 특이점이라면 원나라에 귀부한 이후 제국 내 아마도 거의 유일한 이민족 왕조였고 부마국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또 당시 고려에 온 제국대장공주는 황금씨족 여성이 유일하게 외국인과 결혼이 허가된 사례였다.[42] 이것도 일종의 배타적 민족주의 시각이 들어간걸로, 아이러니하게도 중세 유학자들에게 기자조선은 빠른 문명화라는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