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 |
1. 구한말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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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고무된 전국의 의병장들은 경북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전국 8도의 의병장들에게 참가를 호소하는 격문을 보내 1907년 11월 경기도 양주에 집결한다. 그 결과 허위, 민긍호와 같은 당대의 쟁쟁한 의병장들이 합류하여 10,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집결했다. 이 중에는 대한제국군 출신 병력이 무려 3,000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문태수, 이강년 등이 합류할 예정이었다.
13도 창의군은 1908년 1월 서울에 주재 중인 각국 대사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합법적인 교전단체로 여겨줄 것, 즉 교전권을 인정해 줄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보내는 한편 허위가 이끄는 선발대 300명을 한양 밖 30리[2]까지 진격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일본 육군의 반격으로 인해 후퇴하고 만다. 여기에 이강년, 문태수의 의병부대가 일본군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합류에 실패하면서 작전은 위기를 맞게 된다.
한편 이런 상황에서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해 고향 문경으로 낙향한다. 그냥 물러난게 아니라 이미 진공작전이 어렵게 되었다고 보고 의를 중지하라는 통문을 각 의병진에 돌려 서울진공작전을 중지시켰다. 작전을 매조지하고 수습하는 과정을 허위가 맡게 된것인데 고종의 밀지를 받은 이인영의 영향력은 13도 창의군을 결성할 때까지 유효했으나 창의군 결성 이후 관력이나 연배, 예하 병력에서 앞서는 허위, 민긍호 등이 합류하여 발언권이나 영향력이 크게 밀리던 상황이라 그의 귀향이 특별히 지장을 주진 않았다.
결국 서울에서 퇴각한 13도 창의군은 해산해 각자의 연고지로 돌아가 예전처럼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고, 특히나 황해도와 전라도 쪽에서 움직임이 활발했다. 물론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무장단체들이 자신들에게 위험하다고 판단한 일제는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저항하는 의병들을 거의 없애다시피 한다. 한편 이인영은 1909년 일본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만다.
2. 일제강점기의 서울 진공 작전
2.1. 개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연합군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서울을 해방시키고자 계획한 군사 작전이다.[3] 미국의 도움을 받아 1945년 8월 18일 광복군을 서울에 투입하여 일본 제국을 몰아내고 서울을 탈환하는 것을 목표로 할 예정이었으나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일본 제국이 항복함에 따라 취소되었다.교과서에서도 간략하게 서술되곤 한다. 특히 백범일지에 나오는 김구의 탄식이 자료로 같이 나온다.
2.2. 만약 시행됐다면?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광복군의 진공작전이 무산되지 않고 일본의 항복이 조금만 늦춰져서 진공작전이 시행되어 분단이 안 됐을 것이니 강대국으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주적인 나라가 되었을 것이니 하는 가정들을 예전부터 거론해왔으나[4] 이는 타당하지 않다. 우선 광복군의 병력과 장비 등이 매우 형편없을 정도로 빈약해서 도저히 일본군을 이길 수준이 못 되었다는 것은 둘째치고 광복군 지휘관들이 이순신처럼 연전연승으로 이긴다 쳐도 임정 주도의 정부가 수립될 가능성은 낮다.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도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는데[5] 장제스의 지지만 있어봐야 세계대전에서 가장 지분이 큰 두 열강을 설득하지 못하면 허사다.한국광복군은 '승리'가 목표였다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참전' 자체에 의의를 둬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자주적인 주권정부로 발전하기는 어렵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는 대전 이전에 독립국이었고, 비록 나치에 패배해 점령당했지만 바르샤바 봉기를 포함 주요 유명 전투란 전투에 전부 참전하여 수십만이 죽은 교전국임에도, 승전국으로 인정을 못 받았고 전후처리 과정에서 소련의 전리품으로 인정받아 나치 패망 후 뒤이어 들어온 소련군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공산화되었다.[6] 폴란드의 경우, 연합군의 일원으로 60만에 가까운 장병들이 싸웠고[7] 여기에 폴란드 지하에서는 최소 40만 명의 폴란드 국내군이 활약하고 있었는데도 이 정도다. 그리고 전후 본국으로 귀국한 15,000여 명의 자유 폴란드군 장병들은 나치 독일 완장 차던 놈들 대신 자리잡은 빨간 완장 찬 매국노[8]들에게 반동 취급을 받았고 수많은 폴란드 국내군 지도자들은 모스크바로 압송되어 고문되고 투옥되었다.[9] 물론 영국에서의 대우도 탄압만 안 당했지 신세가 비참한 건 똑같았다.
프랑스도 비록 나라가 거의 나치에 넘어가다시피 했지만 프랑스는 존재감이 적던 아시아 식민지인 조선[10]과 달리 세계 2, 3위를 다투던 강대국급 열강이니 미국이 낼름 먹을 수도 없고 비록 몇 주 만에 밀렸다지만 어쨌건 2차 대전 교전국이었다. 더불어 나치 점령 이후에도 프랑스 식민지 중엔 비시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지역이나 영국의 개입으로 탈환된 시리아 지역도 있었다. 파리 탈환 이후에는 다시 공식적으로 참전하여 자유 프랑스의 병력은 44년에 이미 40만 명이 넘었고, 전쟁 막바지에는 130만이 넘었는데[11], 이는 수적으로 연합군에서 5번째로 많은 병력이었다. 별로 한 게 없어도 서부전선의 주력인 미군-영국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독일 본토로 진격하는 동안 자유 프랑스군도 남프랑스의 독일군과 싸웠으며 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15만 이상의 독일군을 붙잡는 데 성공한다. 자유 프랑스의 상황이 이랬는데 350~360명 수준에 불과한 광복군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했더라도 승전국 대우를 받았을 가능성은 굉장히 낮다.
물론 광복군이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국 광복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정식으로 버마 전선에 병력을 파견했다. 정확히는 임팔 전투에 광복군 대원 9명이 투입됐는데, 이들은 1943년 8월 영국군 총사령부에 합류했으며, 1944년 3월부터 1945년 9월까지 약 1년 6개월 간 실전에 투입되었다. 당시 광복군의 파견 규모가 워낙 작았음에도 매우 큰 활약을 했기 때문에, 연합군 동남아시아사령부 총사령관이 직접 추가 파견을 요청할 정도로 한국 광복군은 호평을 받았다. 다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직접 연락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화민국을 통해 전달했는데, 이로 인하여 추가 파병은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영국군은 한국 광복군을 신뢰하고 끝까지 싸워줄 것을 요청했다. 이 사실은 그동안 대원들의 일지를 통해 국내에 알려졌었지만, 무려 80여 년의 세월이 지난 2022년에 영국 측 문서를 통해 광복군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한 사실이 국제적으로 공식 확인되었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이 시작되었으면 어느 정도 활약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관적인데, 일제강점기 조선에는 일본군 수십만 병력이 있었다. 조선군 참조. 여기에 일본 제국 육군 헌병, 무장 경찰[12]까지 합치면 답이 없다. 이들은 당시 주요국 기준으로 보면 잡병 집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지만 기본적으로 차량화보병에 치하 중형전차, 최신형 하야테 전투기 등을 갖추고 있어 고작 몇백 명 정도를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당시 광복군 규모는 대대 수준인 350~360명 수준이었고, 만일 광복군이 전력으로 진공 작전을 시도했다고 하더라도 한반도를 해방시킬 만한 힘은 전무했다. 여기에 17명으로 시작했다는 피델 카스트로와 라울 카스트로, 체 게바라의 쿠바 혁명 같은 게릴라전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결국 통치 구조를 통째로 뿌리뽑을 수 있을 만한 대군이 없는 이상 일부 후방 교란으로 일제의 조선 통치엔 흠집도 안 난다. 당시 국내에서 나름 비밀결사 형태로 활동했던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음은 염두에 둬야겠지만 워낙 전력차가 압도적이다.
광복군의 전력이 조선 주재 일본군을 이길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인데다 OSS 문서에서 볼 수 있듯, OSS의 임시정부에 대한 신뢰는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었기에, 되려 광복군에게 시간이 더 있었다 하더라도 차질이 생길 가능성도 있었다.
[1] 다만 을미의병의 경우 해당 문서에서도 나와 있듯이 근대식 군사훈련의 이수와 함께 소총은 물론 암스트롱 야포까지 보유한 지방군(말만 구식군)이나 역시 적지 않은 조총과 구식 화포 및 서구식 총기를 보유한 민보군과 포군들을 주로 이루고 의병장들에게 포섭된 극소수의 청군 패잔병들도 있었기 때문에 정미의병 만큼은 아닐지 언정 화력과 전투력면에선 농기구만 들고 다녔다는 대중적인 이미지와 상반된다.[2] 당시엔 성저십리만 한양이라서 당시 한양에선 바깥이지만, 오늘날 서울특별시엔 들어 간다. 정확한 위치는 오늘날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중랑구 일대. 정확히는 왕산로부근이다, 참고로 왕산로 자체가 허위의 호에서 따와서 지은 도로이다.[3] 물론 만주 지역의 독립군들이 국내로 진공하려는 시도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이래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일본군 보고에 따르면 주로 압록강-두만강 국경지대인 평안북도나, 함경남, 북도 등 한반도 북부의 전 국경에서 독립군의 활동이 포착되었으며, 3월 초 함경북도만 살펴보아도 수차례의 국내 진공 작전이 있었음을 일본측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秘受第六七一六號 ‘不逞鮮人의 侵入情況 一覽表送附件’,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2 : 中國東北地域篇 Ⅳ>, 2006, 647~648쪽). 봉오동 전투 직전에 있었던, 양하청의 온성 전투의 경우 일본군이 강 너머 병력을 파견하여 독립군 본거지를 소탕할 필요성을 자극한 전투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로 이어지는 한 복선이 되었으며, 남만주 조선혁명군의 사령으로 알려진 양세봉도 1923년 정의부가 조직되자 중대장으로 활발한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으며, 조선혁명군이 조직(1929년)된 뒤에는 1932년 한 해에만 국내 진공 작전을 모두 16차례에 걸쳐 벌였고 이때 참가한 인원은 101명에 달했다.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만주 지역 항일 무장 세력들의 '국내 진공 시도'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4] 이는 여전히 한국사 교과서의 주류 시각이기도 하다.[5] 미국 OSS가 진공작전을 직접 지원하긴 했지만 정작 OSS는 해방 직전까지 임시정부를 혹평했고 이는 미군정의 입장에 그대로 반영되었다.[6] 특히 체코슬로바키아는 제2차 대전 독일군 해방 후 본국에서 치러진 자유 총선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압승을 거둔 뒤 소련의 지지를 받고 쿠데타를 일으켜 비공산 야당 세력들을 모조리 제거, 불법화하고 정권을 장악해 공산정권을 세우는 일까지 있었다.[7] 미국, 소련, 중국, 영국 다음.[8] 이중에 엄청난 태세전환을 보인 친나치파들도 있었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스필만이 아우슈비츠에 끌려가기 직전에 끌어내 준 유대인 경찰이 실제 전후에도 소련 완장을 차고 활동했다고 한다.[9] 이 때문에 총사령관 오쿨리츠키는 차라리 게슈타포가 나았다고 블랙조크를 했을 정도.[10] 한일합방조약의 당위성이나 적법성과는 별개로 세계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한일합방조약을 인정하였고 카이로 회담 이전까지 조선을 일본 영토로 인정하였다.[11] 이는 서부 연합국 한정으로 4위에 이르는 수치이다. 자유 프랑스는 막판에 프랑스가 해방되면서 크게 몸집을 불린 것이었다.[12] 38선 이남에만 2만 5천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