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12:18:35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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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ational_Emblem_of_the_ISIL.png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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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초대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
أبو بكر البغدادي | Abu Bakr al-Baghdadi
파일:JPQN6IJYWFEZLCCQKNUTMKRZVE.jpg
<colbgcolor=#000><colcolor=#fff> 본명 إبراهيم ابن عواد ابن إبراهيم ابن علي ابن محمد البدري السامرائي
이브라힘 이븐 아와드 이븐 이브라힘 이븐 알리 이븐 무함마드 알바드리 앗사마라이
출생 1971년 7월 28일
이라크 사마라
사망 2019년 10월 26일 (향년 48세)
시리아 이들리브
종교 이슬람 수니파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청년기2.3. 성전에 입문하다2.4. 칼리프에 취임하다
3. 행방
3.1. 사망설3.2. 사망 : 케일라 뮬러 작전
4. 평가5. 연설6. 언어별 명칭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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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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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ugshot_of_Abu_Bakr_al-Baghdadi%2C_200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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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부 바르크 알바그다디.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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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캠프 부카 수용 당시 2014년 칼리프로 취임했을 당시 2019년 최측근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이라크에서 태어난 이슬람 극단주의자이자 테러리스트. 테러 조직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를 세운 장본인 겸 지도자이자 자칭 IS칼리프이다. 2010년대 테러리스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라는 이름은 이른바 지하디스트 네임(Jihadist name)이라 불리는 가명으로, 이는 아랍권 또한 다른 문명권들과 마찬가지로 본명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금기시 되어있기 때문이다.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방식으로 치면 '백범' 김구와 같은 를 짓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일례로 '오마르 알 시샤니'라는 이름은 체첸(시샤) 출신의 오마르(가명)라는 식. 이 사람의 경우는 최초의 칼리프아부 바크르의 이름에서 가져왔고, 이 뒤에 '바그다드에서 온'이라는 뜻의 '알바그다디'를 더하여 만든 '바그다드(의) 아부 바크르'라는 뜻이다. 하지만 알 바그다디의 고향은 바그다드가 아닌 사마라다. 사마라는 주민 대부분이 수니파지만 시아파 성지가 있는 도시라서 충돌이 끊이지 않는다. 그가 이름을 바그다디로 한 이유는 성년이 되어서 학위를 따고 생활한 곳이 바그다드였기 때문으로 추측되고는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무식한 광신자는 아니고 바그다드 이슬람 신학 대학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은 적은 있었다. 당시 이슬람 성직자이며 쿠란샤리아에 정통한 학자이기도 했다. 즉 아예 아무것도 모르고 사상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이 때 배워둔 종교적인 이론을 토대로 킬라파의 해석을 해낸 것이다.

2011년 10월 4일 미국 국무부는 알 바그다디를 특수 분류 테러리스트로 지정했으며 그의 생포, 혹은 사살과 직결되는 정보에 현상금 천만 달러를 걸었다.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지만 적 관계인 알카에다 역시 알 바그다디의 목에 현상금 2500만 달러를 걸었었다.

2018년 이후 IS가 시리아이라크 등지에서 축출 당해 빠르게 몰락하고 수도 라카까지 빼앗기자 피신하여 은둔하였다. 하지만 그는 인터넷과 라디오 등으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며 지하드를 지속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2019년 10월 26일, 시리아이들리브에 있는 그의 은신처를 파악한 미국델타포스를 투입해 공격했고, 결국 자폭조끼를 기폭시켜 폭사하여 가족들과 함께 사망했다. 이후 아부 이브라힘 알하셰미 알쿠라시아부 알하산 알하셰미 알쿠라시, 아부 알후세인 알후세이니 알쿠라시를 비롯한 IS에 새로운 지도자가 자리를 대신 하고 있으나 그들 역시 각각 미국과 시리아 민주군, 튀르키에국의 공습을 받고 사망하는 등, 지도자 임기 기간도 알 바그다디에 비해 오래 가지 못해 짧은 시간 내에 숙청당하는 추태를 보이고 있다.

2. 생애

2.1. 유년기

그는 세 형제 중 막내였고 의외로 그는 유년 시절 부끄러움을 많이 탔으며, 성격이 소심했다고 한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으며 축구를 좋아했다.

2.2. 청년기

파일:external/5pillarsuk.com/abu-bakr-al-baghdadi.jpg
이브라힘은 어린 시절을 사마라에서 보냈다. 그가 18살부터 바그다드(بغداد)에서 살게 된 건 그의 대학 때문이었다. 하즈 이브라힘 알리 알바드리(Haj Ibrahim Ali al-badri)라 불리던 교수 겸 자신의 할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이브라힘은 국립 바그다드 이슬람 대학교(현 국립 이라크 대학교)에서 이슬람학에 대한 학사와 석사와 율법 샤리아(شريعة)에 대한 박사 과정을 마친 뒤 2000년 초에 결혼을 했고, 2003년에 첫 자식으로 아들을 낳았다.

그는 대학에 다니면서 바그다드에 있는 성원 옆에 살았다. # 그와 성원에서 만나서 자주 알고 지냈던 이라크인 아부 알리(أبو علي)에 따르면 그는 말수가 적었다고 한다.

한편 아부 알리는 바그다드에서 영국인 기자와 이브라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창문을 전부 가렸고 동생에게 바깥의 망을 보게 시켰다. 왜냐하면 밖에서 시아파 민병대들이 수니파 주민들 사이에서 IS를 지원하는 자들을 적발해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브라힘의 삼촌마저 이라크에 살다가 바그다디의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잡혀가서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ugshot_of_Abu_Bakr_al-Baghdadi.jpg

아부 알리는 영국인 기자에게 자신이 바그다디가 2004년에 미군한테 잡혔을 때 이라크 남부 시아파 도시 바스라(البصرة)에 있었던 부카 교도소(Camp Bucca)에서 찍은 사진을 정보통신망에서 봤다고 말했다. 해당 사진은 현재 천만 달러 현상 수배의 사진이 되었다. 그는 사진 속의 바그다디가 안경을 안 쓴 것 말고는 자신이 기억하는 얼굴과 똑같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바그다디의 시력이 매우 나빴기 때문에 그는 안경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이브라힘이 바그다드에 살던 시절에 만났던 또 다른 이웃에 따르면 그는 미군의 침공 훨씬 전에 이미 이슬람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길거리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남녀가 함께 손을 잡고 춤추는 모습을 보며 그들에게 '어떻게 남녀가 이딴 식으로 함께 춤을 출 수 있냐', '비종교적이다'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결국 이브라힘은 소리 지르며 화를 내서 그들 남녀가 춤을 못 추게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미국의 공격(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사마라의 '이맘 아흐마드 이븐 한발' 모스크에서 교리를 전했다. 그는 특히 걸프전 이후로 오사마 빈 라덴, 아부 무함마드 알 마크디시(Abu Muhammad al-Maqdisi)의 이슬람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2.3. 성전에 입문하다

바그다디의 친구 아부 알리에 따르면 그가 성전, 즉 지하드(جهاد)를 하게 된 계기가 매우 사소한 것이었다고 한다. 2003년에 미국이 사담 후세인(صدام حسين)의 이라크(العـراق)를 침공하자 후세인과 같은 종파이자 침공 이후 권력을 잃은 많은 수니파들이 미국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러자 이브라힘 알 바드리의 집주인이자 바그다드에 있던 성원의 주인이었던 사람이 이브라힘보고 자신이 가입한 신생 이슬람 정당에 가입하자고 권유를 하였다. 허나 정당은 비종교적이라고 생각했던 바그다디가 이를 거절했고, 그 뒤 집주인과 바그다디 사이의 갈등이 커져서 바그다디는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브라힘은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그의 전공인 이슬람 율법 샤리아 박사 학위를 살려서 수니파 무장 단체 '자마아트 자이시 아흘 알 순나'와 알 자마아트[1] 안에 있는 샤리아 위원회에서 활동하다가 미군한테 붙잡혀서 2004년 2월부터 12월까지 이라크 남부 시아파 도시 바스라(البصرة)에 있었던 부카 강제 수용소(Camp Bucca)에서 생활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바트당(حزب البعث العربي الاشتراكي) 이라크군 포로들을 만났고 그들과 친해졌다. 바그다디가 부카 강제 수용소에서 만났던 이라크군 장교들은 훗날 그가 이라크 이슬람국가의 아미르(أمير, 사령관)로 재직할 때 수많은 도움을 주게 되었다.

이 점이 이브라힘을 이전의 지도자들과 다르게 만들어줬다. 저들은 미군이나 신생 이라크군 기지를 습격할 줄은 알았지만 점령할 줄은 몰랐다. 만약 바그다디 치하의 이라크 이슬람국가마저 습격만 하고 점령할 줄 몰랐더라면 이들은 국가가 아니라 떠돌이 무장 단체 혹은 테러 단체 그 이상을 뛰어넘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트 당 출신 장교들의 도움을 받아서 이브라힘의 이슬람 국가는 영토를 점령하고, 또 그 점령지를 탈환하려는 정부군으로부터 점령지를 지켜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2004년까지만 해도 이브라힘은 서른이 조금 넘은 청년에 불과했던 데다가 총을 잡고 싸우는 무장 단체 대원보다는 그냥 사이비 이슬람 학자의 성향이 더 강했기 때문에, 미국 국방부는 그를 테러범으로 분류하는 대신에 그냥 민간인 수용자로 분류했다. 그리고 그는 10개월 만에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당시에는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본격적으로 악이 깨어나게 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ujahideen_Shura_Council_Iraq_logo.jpg

이브라힘은 감옥에서 나온 뒤에 전사들의 협의회(مجلس شورى المجاهدين)라는 무장 단체들의 연대 조직에 가입했다. 전사들의 협의회는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가 주도한 알 카에다 조직과 현지 저항 조직들이 힘을 합친 곳이었다. 그는 거기에서도 전공을 살려서 율법 해석과 자문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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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_qaeda_in_iraq_and_sunni_insurgents_march_2008.jpg
알 자르카위 사망 이후에 전사들의 협의회가 이라크 이슬람국가 건설을 선포하자 거기에서는 이라크 이슬람국가에 속한 각 주들이 율법을 제대로 집행하고 있는지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이브라힘은 이라크 이슬람국가의 아미르였던 아부 우마르 알 바그다디에게 충성 맹세를 했고 사마라와 디얄라에 살고 있었던 자신의 부족원들에게도 충성 맹세를 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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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핑 진행자는 이라크 전 총리인 누리 알 말리키.

2010년에 아부 우마르 알 바그다디가 미군과 이라크군의 합동 작전으로 전사하자 이브라힘이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라는 가명으로 이라크 이슬람국가의 아미르(총사령관)가 되었다.

2012년에 시리아 내전이 발생하자 그는 자신의 부하들 중에서 시리아 출신 대원들을 불러 모은 다음 그들을 시리아로 보냈다. 이들이 만든 조직이 바로 알 누스라 전선이다. 알 누스라 전선은 그 뿌리가 뿌리인지라 알라위파 포로들을 전부 참수하는 만행을 선보여서 자유 시리아군까지 욕 먹게 만들었다. 어쨌든 정부군과 자유 시리아군이 점령하지 못한 시리아 영토들은 알 누스라 전선이 점령하게 되었다.

한편 2013년에는 이라크에서도 시아파 총리인 누리 알 말리키의 폭압 정책에 반발하는 수니파들의 반정부시위가 일어났고, 이라크 수니파 지역의 무장 투쟁은 더 거세졌다. 바그다디는 알 누스라 전선의 영토가 탐이 나서 알 누스라 전선이 이라크 이슬람국가의 일부였다고 선언한 뒤 알 누스라 전선과 이라크 이슬람국가를 일방적으로 통합시켰다. 그러자 한때 바그다디의 부하였던 알 누스라 전선 총사령관 아부 무함마드 알 줄라니는 이에 반발하면서 알 카에다 총사령관 아이만 알자와히리에게 일러바쳤고, 알 자와히리는 알 바그다디보고 그만 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알 바그다디는 이를 무시하고 알 누스라 전선 군대를 공격했다.

결국 알 누스라 전선은 조직원의 8할과 시리아 동부의 라카와 데이르 알 조르 등을 내주고 시리아 북서부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8할의 조직원들은 전부 이라크 이슬람국가가 흡수했고, 이라크 이슬람국가는 나라 이름을 이라크 시리아 이슬람국가로 갈아치웠다.

2.4. 칼리프에 취임하다

이라크 반정부 시위가 거세진 2014년을 틈타 안바르 주와 니나와 주 사막에 있던 이라크 시리아 이슬람국가의 군대는 팔루자를 점령해버렸고, 점점 세력을 다시 키워가서 2008년에 잃었던 라마디와 히트(Heet)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끝내 2014년 6월에 모술과 히트, 티크리트를 함락하자 자만심이 높아진 이라크 시리아 이슬람국가는 IS(이슬람 국가)로 개칭한 뒤, 스스로 칼리프 국가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이라크 시리아' 라는 칭호를 단체명에서 떼어버리고 '이슬람 국가'로 나라 이름을 갈아치우고 국가 원수 직함도 아미르에서 칼리프로 갈아치웠다. 아미르는 그냥 총사령관을 뜻하지만 칼리프는 모든 무슬림들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를 의미한다. 다른 종교로 따지자면 교황과 황제를 겸하겠다는 뜻. 이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나 알 카에다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마저 '니까짓 게 뭔데 감히 칼리프를 자칭하면서 설치냐?' 라며 IS를 욕하기 시작했다.

한편 바그다디는 2014년 여름, 칼리프 자체 취임 이후 모술의 모스크에서 전 세계의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칼리프 국가에 동참하라는 지하드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고 이 영상을 IS 매체를 통해 유포하였다. 연설 전문 이 연설 장면은 인터넷, SNS, 뉴스 등을 통해 전 세계가 보게 되었고, 그는 21세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신종 악당으로 등극하며 지하드 세계에 일약 스타급 인물로 부상했다.

이후 2015년까지 IS는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승승장구할 뿐만 아니라 리비아 동부의 데르나라는 해안 도시도 점령했다. 이후 나이지리아보코 하람도 바그다디에 충성을 맹세하고 IS에 소속되었다. 리비아 데르나 점령에는 리비아 출신 토착 극단주의자 뿐만 아니라 IS에서 보낸 전사들도 많이 공을 세웠다. 안사르 베이트 알 마크디스[2], 준드 알 칼리파[3] 등의 단체들도 바그다디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그 밖에 사우디랑 예멘이 있던 극단주의자들이 충성을 맹세한 것 가지고 자기가 동부 리비아, 시나이 반도, 알제리, 사우디아라비아, 예멘을 주로서 IS에 신설했으며, 이들의 충성 맹세를 전부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이 때 녹음한 음성은 11월에 정보통신망에 공개되었다.

그 뒤 12월에는 전 부인 사자 알 둘라이미가 바그다디와의 관계에서 낳은 딸과 함께 레바논에서 붙잡혔다고 나왔다. 둘라이미 집안도 극단주의자 집안이라 사자의 아버지는 알 누스라 전선과 이슬람국가에서 활동하다 전사했고, 형제 한 명도 자살 폭탄 공격에 참가했다고 한다. 그러다 위조 여권으로 레바논에 들어가 잡힌 것. 이라크 내무부에 따르면 둘라이미와 바그다디는 이혼했으며, 현재 바그다디의 부인은 이라크 여자 한 명과 시리아 여자 한 명으로 총 두 명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슬람교에서 이혼은 '알라께서 허락은 하셨지만, 허락한 행위 중 알라께서 제일 싫어하는 행위'로 해석한다.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다만 미 국방부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외신에서는 시리아에 있는 은신처에 여성 성노예들이 존재한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외신 출처인 영국 인디펜던트의 카더라식 내용이라 불확실하며 적어도 리더였기 때문에 과연 저런 행동을 대놓고 했을지는 불분명.

3. 행방

2016년에 이라크군과 미군 등을 포함해서 합동 작전을 벌이는 국제사회 연합군이 2년 4개월 만에 모술에 다시 입성하였다. 이때 IS는 2014년에 그가 연설하던 모스크를 뺏기기 싫어서 폭파시켜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서방 정보기관들은 바그다디가 이미 모술에서 빠져나갔다고 보고 있다. # 이후로는 2019년까지 무수한 사망설 속에 종적을 감추고 은둔 생활을 하며 이따금씩 녹음 육성 공개로만 메시지를 드러냈다.

3.1. 사망설

여러 보도들에 의하면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는 공습에 의해 사살되었고, 시신이 확인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다만 아직 생사여부는 불명인 상태지만. 2015년 11월 파리 테러가 바로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에 의한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2016년 10월, 독극물을 이용한 암살 시도가 있었고 그 결과 알 바그다디와 측근 세 명이 중태에 빠졌다고 한다. #

2017년 6월 11일 시리아 공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는 반면, 이와 달리 아직 살아있다는 주장도 있다.
But intelligence agencies believe he escaped from the city while it was being retaken by the Iraqi army.
그러나 정보기관들은 그가 이라크 군에 의해 쫓겨나는 도중 도시에서 탈출했다고 보고 있다.
2017년 5월 28일 시리아에서 사망했다는 정보가 러시아에서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미국에서 이를 부인하고 있어 확정되지 않은 소문만 무성하다.

2017년 7월 11일 ISIS가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의 사망을 인정하였다고 이라크 현지 매체가 보도하였다. ISIS는 모술(Mosul) 서쪽의 탈 아파르(Tal Afar)에서 아부 바카르 알 바그다디가 사망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였으며, 빠르게 후계자를 발표하고 전사들로 하여금 동요하지 말라는 것 이외에 더 이상 자세한 사항은 밝히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7월 21일 미국방장관 제임스 메티스에 따르면 미국 측은 아직 살아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NYT가 보도했다.

Breitbart에 따르면 매티스의 입장은 그가 죽었다는 것이 확인이 안 되면 살아있다고 보는 것이라 한다.

현지 언론에서 ISIS가 바그다디의 죽음을 인정했다는 보도가 나오는 와중에 이라크와 쿠르디스탄 정보당국은 그가 죽지 않았다고 확신한다고 한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시간이 소요될 듯.

이와는 별개로 트럼프 대통령에 따르면 2015년경에 뉴욕 타임즈로 인해 바그다디를 죽일 기회를 놓쳤다고 한다. 과도한 보도 경쟁으로 인한 베트남전의 망령이 돌아오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IS 수괴 바그다디, '북핵' 언급하며 사망설 불식.

# 2018년 2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IS의 우두머리인 아부 바르크 알 바그다디가 시리아 북동부에 은신 중이라는 정보가 이라크 정보당국에 포착됐다. 이라크 정보·대테러기구 수장 아부 알리 알바스리는 "IS 내부 정보원으로부터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가 시리아에 은신하고 있다는 반박할 수 없는 정보와 기록을 입수했다"고 말했다고 관영 일간지 아스-사바가 보도했다. 바스리가 밝힌 정보에 따르면, 바그다디는 이라크에서 공습 중에 당한 부상과 당뇨병으로 치료를 받고 있으며, 다리와 신체 여러 부위에 골절이 생겨 혼자서는 걷지 못하는 상태라고 한다.

2019년 4월 30일(현지 4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5년 만에 그의 영상이 공개되었다. 그는 "바구즈 전투가 끝났다"면서 조직원의 죽음에 복수할 것이라고 다짐했다고 전해졌다.

3.2. 사망 : 케일라 뮬러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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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IS 수장은 울면서, 훌쩍거리면서, 소리 지르면서 겁쟁이처럼 죽었다" 미 육군 특수부대 델타포스레인저의 'IS 수장' 알 바그다디 제거 작전 영상 공개

파일:WhatsApp-Image-2019-10-27-at-16.14.08.jpg
사진 설명 [ 펼치기 · 접기 ]
왼쪽부터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 마이크 펜스 부통령,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마크 에스퍼 국방부 장관, 합동참모본부 의장 마크 밀리 미합중국 육군 대장, 합동특수작전사령부 부사령관 마커스 에반스[4] 육군 준장 순서의, 작전 종료 후 연출하에 촬영된 작전 지휘부의 사진이다.

[Clearfix]
2019년 10월 27일, 주요 외신들은 미군이 시리아 북서부 이들리브에서 그를 사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하고 있으며, 백악관 기들리 부대변인은 오전 9시(한국 시간 밤 10시)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중대성명을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다. #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10월 27일 미국 시각(워싱턴) 오전 9시, 미국 정보부와 특수부대가 바로 전날인 26일경에 알 바그다디를 급습하여 처단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 #

뉴욕 타임즈에 따르면 알 바그다디를 잡는 구체적인 작전은 2019년 여름 경, 그의 아내 중 하나와 연락책이 체포되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로부터 은신처 몇 군데와 행동 습성을 캐치해 낸 미군 당국은 주변에 스파이들을 배치해 그의 주기적인 움직임을 감시했다. 이 때 2~3차례의 기회를 포착했지만, 행선지가 변덕스럽게 바뀌면서 포기되었다고 한다.

이후 실제 작전 실행일 몇 주 전, CIA쿠르드족 민병대인 YPG이라크, 튀르키예, 러시아, 시리아 정보부와의 협력을 통해 그의 정확한 위치와 동향을 잡는 데 성공했고, 그가 은신하고 있는 곳의 건물과 터널 구조까지 전부 파악했다. 시리아 철군 발표가 난 지 일주일 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관련 보고가 올라갔으며, 철군으로 인한 비판을 잠재울 가시적인 업적이 필요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작전 승인이 떨어졌다. 이후 26일 밤, 미 육군러시아시리아로부터 영공 개방을 허가 받은 다음 이라크의 알 아사드 공군기지에서 델타포스레인저 부대를 태운 8기의 CH-47 치누크 헬리콥터와 AH-64 아파치 공격 헬리콥터를 띄워 알 바그다디의 은신처를 강습했다고 한다. 작전명은 케일라 뮐러(Kayla Mueller)로 명명되었다. 이는 2015년, IS에 피랍되어 포로가 되었다가 방공망 무력화 작전에 휘말려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케일라 뮬러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

이 때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 마크 에스퍼 국방부 장관, 마크 밀리 합참의장 등이 백악관 상황실에서 실시간으로 생중계 화면을 받아 보았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최첨단 기술을 총동원한 영화와 같았다고 소감을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에 따르면 마지막 순간, 알 바그다디는 세 자녀를 데리고 출구가 없는 막다른 동굴로 도망갔고 델타포스는 군견을 투입해 그를 쫓았다. 궁지에 몰린 알 바그다디는 입고 있던 자살폭탄 조끼를 터뜨려 자폭했으며, 그를 지키고 있던 추종자들도 대부분 그와 함께 지옥행 급행열차를 탔다고 한다. 그의 아내 둘 역시 자살폭탄 조끼를 입고 있었다가 기폭하지 못한 채 델타포스에 의해 사살되었고, 11명의 아이들과 극소수의 성인들만 살아남아 포로가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과정에서 미군 측 인원이 전혀 인명손실을 입지 않았음을 덧붙였다. 군견 역시 다치긴 했으나 무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특유의 화법으로 그 군견을 "멋있는 개, 영특한 개(A beautiful dog, a talented dog)"라고 칭송하면서 이틀 후 그 군견의 사진을 자신의 트위터에 공개했다. 이 군견은 알 바그다디 레이드 당시 4살 난 벨지언 쉽독 품종으로 SOCOM K9 프로그램을 이수한 후 50번의 실전을 수행한 베테랑 견공이라고 한다. 바그다디의 자폭으로 인한 붕괴된 잔해와 삐져나온 전선에 감전되는 가벼운 부상만 입었고, 다시 부대에 복귀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알 바그다디가 겁 먹은 개처럼 울다가 죽었다고 조롱했는데, 이 일화는 도널드 트럼프 특유의 과장이 섞인 멘트인 것으로 보인다. 몇 시간 후 에스퍼 국방장관은 기자 회견에서 원래 목표는 사살이 아닌 생포였고, 지하 터널 깊은 곳에 들어간 그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했으나 거부하고 자살폭탄 조끼를 기폭시켰다고 밝혔다. # 또한 마크 밀리 합참의장 역시 트럼프 대통령이 어디서 바그다디의 겁 먹은 모습에 대한 정보를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물론 칼리파를 자칭하며 온갖 만행을 저지르다가 결국 궁지에 몰린 끝에 찌질하고 비겁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최후가 비참했던 건 맞다. 게다가 자칭 칼리파라는 인간이 이슬람 최고 금기인 자살을 행했으니, 이슬람적인 시선으로 보면 가장 비참하고 추잡하기 짝이 없는 최후를 맞이한 셈이다.

작전 직후 미국 정보 요원들이 붕괴된 동굴에 깔린 알바그다디의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 조각에서 DNA을 채취해 사전에 확보된 그의 DNA와 대조하는 작업을 실시했고, 알 바그다디임이 100% 확인됨으로써 그의 죽음은 완벽하게 공식화되었다.

그의 사체는 오사마 빈 라덴처럼 수장되었으며, 혹여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한 미군은 수장 지역을 공개하지 않았다.[5] 그가 사용했던 은신처들 역시 같은 이유로 완전히 때려 부수어 콘크리트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10월 31일, 미국 정부는 작전에 관해 좀 더 자세한 정보와 함께 영상을 공개했다. 바그다디와 함께 있던 추종자 6명이 사망하였으며, 바그다디가 자폭할 때 그의 아이들 2명이 함께 폭사했다고 한다. 11명의 아이들의 신변이 확보되었고, 2명의 성인이 포로로 붙잡혔다. 영상은 대부분이 적외선 카메라로 찍힌 것으로 항공 폭격을 실시하거나 미군 요원들이 바그다디의 은신처에 접근하는 장면만 보여진다.[6] #

트럼프 대통령은 알 바그다디 제거 작전 성공 후 지원을 했던 튀르키예, 시리아, 이라크, 러시아 등 국가에게 감사를 표했고, 이들 나라들도 해당 작전에 공헌한 바를 알리며 자축 중이다. 이라크 정보국은 알 바그다디의 위치를 알려주고 튀르키예 정보국이나 시리아군은 미군과 사전 조율을 했다고 했으며, 쿠르드 민병대는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DNA를 제공했다.

특이한 반응을 보인 건 러시아인데, 러시아 국방부는 미군과 접촉한 적도 없고, 영공을 열어준 적도 없었으며, 해당 지역에서 미군의 공습도 없었고 죽은 게 알 바그다디인지도 모르겠다는 성명을 내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 하지만 러시아 크렘린 궁 성명에서는 알 바그다디가 죽었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큰 공헌을 한 것이라고 돌려서 칭찬하고 있다. # 아마도 모종의 이유[7]로 미국과 협력한 것을 공개하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4. 평가

말 그대로 오사마 빈 라덴보다 더한 테러리스트이자 21세기 최악의 전쟁범죄자로 꼽히는 인물이다.[8] 수십만 명이 그가 이슬람을 비틀어 탄생시킨, 경쟁 조직인 알 카에다탈레반마저도 한 수 접고 갈 미친 사상 아래 고통받거나 참수, 분살 등 각양각색의 잔인한 방법으로 목숨을 잃었다. 위기에 처한 중동아프리카에 또 다른 거대한 재앙을 초래했고, 이슬람 사회에 와하비즘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초극단적으로 변질된 압제적 원리주의의 암세포를 뿌리 내리게 만들었다.

기존의 테러 조직과는 달리 자칭일 뿐이나 "국가"라는 형태와 정규군 수준의 무장을 한 군대를 갖추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점이다. 또한 민간인이 접근할 수 있는 수준의 인터넷 및 미디어 컨텐츠만으로 매우 효과적이고 수준 높은 선전, 선동 활동을 벌이고 심지어 실전에도 적극 활용하는 등 테러 행위를 한 단계 진화시켰다는 점에서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알 카에다에서는 철천지 원수로 여긴다. 시리아 내전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알 누스라 전선의 세력 대다수를 먹튀하고 순식간에 주도권을 뺏어가 버렸으며, 이에 자와히리는 알 바그다디와 해결점을 찾고자 밀사를 시리아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밀사로 간 아부 칼리드 알-수리와 그의 일행이 2014년 2월 23일에 IS의 비밀경찰 조직 암니에 의해 암살되는 일도 벌어져서 그냥 관계가 개판이 되어 버렸다. 여담으로 이 일이 있고 얼마 후 시리아 암니의 책임자 아부 오베이디 알 마그리비는 처형을 당했다. 참고로 알 카에다는 그의 목에 현상금 2,500만 달러를 걸었었다.

튀르키예 정부의 입장과는 별개로 초반엔 일부 튀르키예 국민들은 아주 나쁘게 보진 않았다. 정확히는 서구화된 도시민들은 IS의 잔학무도한 극단적 행동을 싫어하지만, 시골이나 이슬람주의적 정서가 강한 곳은 심지어 좋아하기도 했다. 아무리 서구화를 국시로 추진하였더라도 같은 수니파 무슬림으로서의 동질감이 있는 데다가 튀르키예 독립 전쟁의 기억 탓에 기본적으로 서구 유럽 국가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IS와 알 바그다디를 튀르키예 독립 전쟁과 동일시하는 사람들도 생각 외로 많았었다. 근데 IS가 튀르키예를 겨냥한 테러를 자주 감행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튀르키예가 '유프라테스의 방패'라는 이름 하에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자 바그다디를 비롯한 IS 대변인들도 튀르키예를 십자가의 보호자라고 부르면서 배교자 튀르키예에 대한 공격을 대놓고 촉구하기 시작하고, 연이어 IS의 이름 하에 테러가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그런 여론은 사라진 상태이다. 더군다나 무아트 알 카사스베에게 한 것처럼 붙잡은 튀르키예 육군 2명을 산 채로 분살하는 짓거리까지 벌였다.

단순히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에서부터, 바트당과의 제휴로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순식간에 국가급으로 성장한 실력을 대단하다고 여기는 평가까지 양극단을 달린다.

수니파 일각에서는 영웅 대접을 하기도 했으나, 요르단 조종사 포로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사건을 벌이면서부터 서서히 등 돌리는 이들도 늘어났다. 이게 어디까지나 같은 수니파 무슬림을 죽이는 등 율법상 모순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여론이 바뀌는 것일 뿐, 그들 시각에서는 '이단'인 시아파와 '이교도'인 비무슬림들이 죽어나갈 때는 보수적인 율법학자들이 암묵적으로 침묵했던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사살당한 요르단 공군 장교 포로인 무아트 알 카사스베의 아버지나 그 부족들도 맨 처음에는 IS를 그리 나쁘게 여기지 않고 미국에게 반감을 가졌으며, 잡힌 아들을 풀어달라고 부족 홀로 교섭하려고 할 정도였다. 물론 아들이 분살당해 처참하게 죽어가는 걸 본 아버지는 "IS는 악마다! 모든 이슬람이, 아니 전 세계가 저 악마들을 물리쳐야 한다"며 부족과 함께 맹렬한 반대파로 돌아섰다.[9] 다른 수니파 국가들도 제 멋대로 교리를 해석하는 놈들은 이슬람이라고 논할 자격도 없다 라면서 등을 돌렸다.

결국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는 지금까지 그 어떤 테러리스트도 이룩하지 못한 지점까지 올랐으나, 자신들 외에는 세계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멍청한 짓거리를 함으로써 스스로의 명을 재촉하였고, 결국 그의 운명은 자폭이란 방식으로 추하고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되었다.

5. 연설

쿠란이 우리를 인도하고 칼이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다.
이슬람평화의 종교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슬람은 전쟁의 종교다. - 2014년 7월 5일, 음성 메시지 #
이슬람 전사들이 수 년간 알라의 적과 싸우는 투쟁과 인내 끝에 승리를 선언했다. - 2014년 여름, 칼리프 취임 이후 모술의 모스크에서
북한이 미국과 일본을 으로 위협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인, 러시아인, 유럽인은 무자헤딘의 공격 공포 속에서 떨고 있다. - 2017년 9월 28일, 육성 연설 #
전 세계 모든 무슬림에게 IS로 이주할 것을 명한다, 이주할 수 없다면 현재 있는 곳에서 싸우라.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본다면 도와라.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멈추게 하라. 내가 신에게 복종하는 한 내게 복종하라.
그들의 형제들은 당신의 희생과 모든 것을 기억할 것이다. 너희 형제들은 핏줄이 존재하는 한 잊지 못할 원수를 갚을 것이며, 이 일이 있은 뒤, 신께서 원수를 갚으실 것이다. - 2019년 4월 영상에서

6. 언어별 명칭

  • 본명
    • 아랍어: إبراهيم ابن عواد ابن إبراهيم ابن علي ابن محمد البدري السامرائي
    • 한국어: 이브라힘 이븐 아와드 이븐 이브라힘 이븐 알리 이븐 무함마드 알바드리 앗사마라이
    • 튀르키예어: İbrahim İbn Awad İbn İbrahim İbn Ali İbn Muhammed el-Badri es-Samarray
    • 영어: Ibrahim Awwad Ibrahim Ali al-Badri al-Samarrai

7. 관련 문서



[1] 'جماعتِ جيش أهل السنة والجماعة, 수니파 군사 회의.[2] 시나이 반도 버스 폭탄테러 사건의 주범[3] 프랑스 등산객 참수 사건의 주범[4] 현 육군 소장. 케일라 뮬러 작전 이후 합참과 아프가니스탄에서 근무했고, 특수작전사령부 참모장을 거쳐 제25보병사단장 취임 예정이다.[5] 이런 경우 보통은 무덤을 만들지 못하도록 화장해서 모처에 뿌리는 경우가 많지만, 이슬람교에서는 화장을 금지하기 때문에 화장하지 않고 그대로 수장했다.[6] 시체 모습 자체는 뉴스의 심의상 우려가 있었는지 공개되진 않았다.[7] 외교 전문 뉴스인 포린 폴리시에서는 바그다디 사망 1년 후 러시아에서 나타냈던 이와 같은 모르쇠 반응을 돈바스 전쟁 때문이라 밝힌 바 있다. 러시아가 미국과 협력한 사실이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의 반군(도네츠크, 루간스크)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러시아가 섣불리 미국과 협력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다고 전했다.[8] 빈 라덴은 9.11 테러라는 희대의 테러를 저질렀지만, 결과적으로만 보면 오히려 그 테러 때문에 미국이 알 카에다를 찾으려고 대규모 군사행동을 전개해 더 이상의 테러나 군사 활동을 하기가 사실상 어려워졌었다.[9]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가 사망했을 때는 그를 포함한 요르단 국민들이 기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