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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icus Ross 1968년 1월 16일 ~ ([age(1968-01-16)]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레드브록 그로브 출생
1. 개요
1988년 결성 당시부터 2016년까지 트렌트 레즈너의 원맨 밴드였던 나인 인치 네일스에서 리더인 레즈너를 제외하면 유일무이한 정식 멤버이다.80년대 후반에 애시드 하우스 장르로 음악에 입문했다. 참고로 애시드 하우스 장르가 뜬 나라가 그의 모국인 영국이다. 전자 악기로 원하는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자기 세대에겐 펑크 록과 같은 매력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흔히 펑크 록 하면 반항 정신을 떠올리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스스로 원하는 걸 만들어 낸다는 DIY 정신인데, 그런 점에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공식적인 음악계 데뷔 연도는 1992년으로 Barry Adamson의 Soul Murder 앨범에 Barry Adamson과 공동 작곡한 'On the Edge of Atonement'란 곡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후 Tim Simenon(Bomb the Bass)[1]의 앨범의 프로그래머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5년에 나인 인치 네일스의 <With Teeth> 앨범의 프로듀서로 참여했다가 2016년부터 정식 멤버로 영입되었다. 사실, 레즈너와의 인연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로스가 90년대에 활동했던 영국의 록밴드 '12 Rounds'가 마릴린 맨슨의 1998년 공연 오프닝 무대에 서게 된 것을 계기로 트렌트 레즈너의 레이블인 Nothing Records와 계약을 하게 된다. 링크
2018년 롤링스톤 인터뷰에 따르면, 트렌트 레즈너는 몇 년 전부터 꾸준히 그에게 정식 멤버로 합류하라는 제의를 해 왔지만, 무대 울렁증이 있는 로스는 고사해 왔는데, 레즈너가 자신에겐 애가 4명이나 있어서 어차피 투어를 할 일이 없을 것이라 해서 받아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2018년 시점 기준으로 무대에서 만난 누적 관객이 500만 명을 돌파했다.
트렌트 레즈너와 영화 음악가로 활동할 때는 나인 인치 네일스라는 명의를 쓰지 않고 본명을 쓴다. 영화 소셜 네트워크의 사운드트랙을 맡아 트렌트 레즈너와 함께 2011년 83회 아카데미 사운드트랙 상을 받은 적이 있으며, 이후 레즈너와 콤비로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음악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2020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트렌트 레즈너와 함께 헌액되었다. 원래는 나인 인치 네일스를 만든 트렌트 레즈너만 헌액되었으나, 코로나 19로 인해 시상식이 연기되는 동안 투어 멤버들과 함께 추가로 헌액된 것이다.
2. 나인 인치 네일스 이전
2.1. 작곡
- Barry Adamson - Soul Murder(1992)
수록곡인 'On the Edge of Atonement'를 Barry Adamson과 공동 작곡 - Bomb the Bass - Clrear(1995)
수록곡인 '5ml. Barrel'를 팀 시메넌, John WardleClayton과 공동 작곡
2.2. 12 ROUNDS
훗날 결혼하게 된 Claudia Sarne과 결성한 트립합 밴드로 1996년에 데뷔 앨범을 냈다. 데뷔 당시 인터뷰도 있다.로스에게는 미래의 배우자뿐만 아니라, 훗날 자신의 절친이자 음악적 동반자인 트렌트 레즈너와 인연을 맺어준 밴드라 할 수 있다.
데뷔 앨범을 당시 대형 음반사였던 폴리도어 레코드에서 냈으나, 모국인 영국의 매스컴은 당시 브릿팝만 띄어 주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트립합 성향의 음악을 하는 이들은 외면을 받았고 불과 1년 만에 레코드사에서 방출된다.[2] 이때 이들을 눈여겨 본 트렌트 레즈너는 자신의 레이블인 Nothing Records와 계약할 것을 제의했다.
하지만 이후 Nothing Records의 모기업인 인터스코프 레코드가 유니버설 뮤직 그룹으로 합병되자 업계의 사정으로 인해 밴드의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2000년 이후 애티커스 로스는 Claudia Sarne과 함께 LA에 정착했는데, 마침 2001년에 과거 자신이 몸담았던 레이블의 공동 창립자였던 트렌트 레즈너가 LA로 이주해 오면서 절친이 되었다.
3. 나인 인치 네일스
자세한 내용은 나인 인치 네일스 문서 참고하십시오.
4. How To Destroy Angels
2009년에 Mariqueen Maandig와 결혼식을 올린 트렌트 레즈너는 투어 활동에 지쳤다면서 나인 인치 네일스를 그만둔 후 새로운 활동을 모색했다. 이때 자신의 부인과 애티커스 로스가 합류하여 How To Destroy Angels라는 밴드가 탄생했다.2010년에 첫 EP 앨범이 나왔고 수록곡인 'The Space In Between'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됐다. 뮤직비디오 감독은 루퍼스 샌더스인데, 당시 로스에겐 매부였다.
다만, 4년 후 트렌트 레즈너는 마음을 바꿔 나인 인치 네일스 활동을 재개했으며, 2016년에는 아예 로스를 나인 인치 네일스의 정식 멤버로 받아들였다.
5. 영화 음악
록 음악 팬들에겐 나인 인치 네일스의 프로듀서로 유명하지만, 2010년대 이후로는 트렌트 레즈너와 콤비를 이뤄 영화 음악계에서 굵직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유일하게 2015년 작 블랙코드에서 트렌트 레즈너 없이 혼자 참여했다. 블랙코드는 해리 그렉슨 윌리엄스와 함께했지만, 영화에는 애티커스 로스 음악이 더 사용되어서 윌리엄스가 인터뷰에서 불평하기도 했다.부인인 Claudia Sarne도 영화 음악계에서 활동했다.
2011년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에 부인과 함께 선 모습. 왼쪽이 마리퀸 만디그, 트렌트 레즈너 부부, 오른쪽이 Claudia Sarne, 애티커스 로스 부부이다.
6. 여담
- 나인 인치 네일스에서 자신의 역할은 편곡과 프로그래밍일 뿐이라는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리더인 트렌트 레즈너를 보컬 셔틀로 쓴다고 한다. 레즈너가 로스와 함께, 기후 변화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Before the Flood>의 음악을 맡았을 때 레즈너는 자신이 쓴 곡에 어울릴 법한 섭외 가수 리스트를 작성했지만, 로스는 레즈너만큼 잘 부를 사람이 없다며 레즈너한테 시켰다.
- 로스의 말에 따르면, 레즈너는 어떤 악기든 연주할 수 있는 놀라운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 짜증이 날 정도라고. 자신의 역할은 레즈너가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뒷받침을 잘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 6남매 중 맏이이다.
- 부인인 Claudia Sarne[3]도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부부가 공동으로 음악 작업을 하기도 한다. Claudia Sarne은 로스의 밴드 '12 Rounds'의 보컬이었다. 링크 여담으로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했을 때 부인과 자신의 세 아이[4]를 언급했다. 트렌트 레즈너와 마찬가지로 다둥이 아빠이다.
- 이튼 칼리지 출신으로 영국의 전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과 동문이다. 기사 그리고 미술사학으로 유명한 코톨드 미술학교 출신이기도 하다. 또한 외증조할아버지는 이탈리아의 세균학자 알도 카스텔라니이고[5], 외할아버지는 귀족 출신 외교관 마일스 램프슨이다.[6]출처 즉, 알고 보면 귀족의 혈통이자 엘리트 출신.
- 여동생 리버티 로스는 90년대에 케이트 모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톱모델로, 모스와 함께 버버리 광고에 등장하기도 했다. 리버티 로스의 전 남편은 영화감독 루퍼스 샌더스로, 남편의 유명한 불륜 사건으로 이혼했다.링크 루퍼트 샌더스 감독과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불륜이 세상에 알려지자마자, 애티커스 로스는 장성한 큰아들과 함께 즉시 리버티의 집을 찾아갔고, 여동생을 파파라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언론 대응 담당자를 붙여 주는 등, 큰오빠 노릇을 톡톡히 했다. 본래 애티커스 로스는 인터뷰에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과묵한 성격이나, 이 기사에서는 이례적으로 한때 친구였던 루퍼스 샌더스 감독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다. 몇 년 후 리버티 로스는 인터스코프 레코드의 공동 설립자인 지미 아이오빈과 재혼했다.
- 애티커스 로스의 어머니인 록산나 램프슨은 상류층 여성들의 사교계 모임인 데뷔탕트에 버뮤다 팬츠를 착용해 파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때가 1963년으로 롤링 스톤스까지 섭외했다고 한다. 참고로 데뷔탕트 드레스는 이런 모습이다. 링크 이처럼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파격적인 성품이라, 결혼도 같은 귀족 출신이 아닌 중류 계급 남성과 했다.링크[7]
- 애티커스 로스의 아버지인 이안 로스는 해적 방송국인 라디오 캐럴라인의 주요 운영진이었다.[8] 1979년에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웨스트 할리우드에 롤러장을 열었다. 링크 롤러장의 이름은 ‘플리퍼의 롤러 부기 팰리스(Flipper’s Roller Boogie Palace)’였는데, 이안 로스가 17살에 사고로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면서 플리퍼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 별명을 롤러장에 그대로 쓴 것이다.링크 롤러장은 한때 할리우드의 명소로 통했다. 셰어도 이곳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탔다고 한다. 개점 당시 11살이었던 애티커스 로스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롤러장에서 하루종일 스케이트를 타며 어린시절을 보냈다.링크 당시 리버티는 아기여서 롤러를 타지는 못하고 5살 위 언니가 밀어 주는 유모차를 타고 롤러장 주변을 돌았으나링크, 아버지의 롤러장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시절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미 아이오빈과 재혼 후에 신혼집을 아버지가 운영했던 롤러장 콘셉트로 꾸몄다.
- 이처럼 외가의 귀족 혈통과 부친의 자유분방함이 더해져 로스의 집안은 보헤미안 블루 블러즈(Bohemian blue bloods)라 불리기도 했다. 로스 6남매는 모두 같은 지역에 살면서 자주 왕래할 정도로 평소 우애가 돈독하다.
- 로스는 2005년에 나온 나인 인치 네일스 앨범인 <With Teeth>부터 나인 인치 네일스 앨범의 고정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이 앨범은 트렌트 레즈너가 중독에서 벗어난 후 새로운 창작법을 모색하던 시기에 나온 앨범으로 이전 앨범에 비하면 절망적인 색채가 덜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로스 또한 중독 치료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링크 그가 중독되었던 약물은 무려 헤로인[9]이었다.[10]
2018년 인터뷰에서 중독 당시 상황을 짤막하게 언급하기도 했는데, 입 안에 총을 집어넣기도 했다고(...).[11][12] 애시드 하우스 시절 직후 뉴욕에서 살 때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90년대 초반으로 짐작되는데, 자식을 둔 아버지로서 두 번 다시 저런 상황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노력한다고 말했다.링크
[1] 디페시 모드의 1997년 앨범 <Ultra>의 프로듀서로 유명하며, 본인의 앨범을 낼 때는 Bomb the Bass라는 예명을 사용했다.[2] 2020년대 시점에서 90년대의 브릿팝 띄우기에 대해서는 오히려 모국인 영국에서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이를 비판하는 저널리스트가 지적하는 것이 바로 트립합에 대한 홀대이다. 영국의 문화를 띄운다는 쿨 브리타니아가 결국은 문화를 획일화하여 다양한 음악을 하는 자국 뮤지션들을 홀대했다는 것이다.[3] Claudia의 아버지는 60년대 초반 인기 가수였다가 배우로 전향한 후 영화감독으로 성공을 거둔 Mike Sarne이며, 어머니는 패션 디자이너 Tanya Sarne이다. 그런데 화목한 가정 생활을 하는 시부모와는 달리, 친정 아버지는 브리지트 바르도와 외도를 하고, 여배우에게 손찌검을 하는 등 막장 사생활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아버지가 가정을 버렸기 때문에 어머니가 패션 사업으로 성공하기 전까지는 생활고에 시달렸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아버지는 잊힌 인물이 된 반면, 어머니는 패션 디자이너로서 승승장구했다.링크[4] 전 여친 소생까지 포함이다.링크 로스는 1994년에 믹 플리트우드의 딸인 에이미 플리트우드 사이에서 아들 Woolf를 보았다. 현재의 부인과는 2000년대 초반에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링크 후술하겠지만, Woolf는 고모인 리버티 로스를 다룬 배니티 페어 기사에 이름이 언급된 적이 있는데, 고모부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불륜 사실을 알자마자 아빠와 함께 즉시 고모네 집을 찾아갔다고 나온다. Woolf는 한때 배우로 활동했다.[5] 알도 카스텔라니의 딸인 레이디 킬리언이 마일스 램프슨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레이디 킬리언은 2차 세대대전 당시 영국군을 위한 간호사 역할을 수행하고 부상병을 위한 다과회를 주최했다.링크 천성이 유쾌하여 외교관 부인으로서 각종 모임을 주최하는 사교계 명사 역할을 했으며, 남편이 외교관 자리에서 은퇴한 후에는 서섹스로 이주해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았다. 링크[6] 마일스 램프슨은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이집트 대사로 부임해 이집트의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한 제국주의자로, 이집트의 반영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하여 나세르와 대립했다. 물론 영국 입장에서는 애국자이니 초대 킬리언 남작 작위를 받았지만, 처칠이 실각하자, 이집트 대사 자리에서 해임된다. 여담으로, 한국의 독립이 결정된 카이로 회담에도 참석했다.[7] 그렇다고 이안 로스가 무슨 재벌급 재력가의 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한 마디로 애티커스 로스의 부모가 사랑꾼이었단 얘기. 후술하겠지만, 이안 로스는 해적 방송국 운영, 롤러장 운영 등 실험적인 사업을 펼쳤는데, 후술할 롤러장이 갑자기 문을 닫아 경제적인 부침도 겪었지만 이겨냈다.링크 로스의 부모는 지금도 해로하고 있다.[8] 기존 라디오 방송국에서 외면받은 음악을 방송하기 위해 설립했는데, 영국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무허가 방송국이었지만, 선박에 방송 시설을 차려 놓고 영국 정부의 법이 미치지 않는 해상에서 방송했기 때문에 불법은 아니었다고 한다.[9] Reznor finally did in summer 2001, checking into rehab and, once clean, moving to L.A. Soon after, he met British engineer and multi-instrumentalist Ross, also a recovering heroin addict, and the two “hit it off,” beginning a professional relationship that would span many bands but little released material.[10]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의 만남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언급되는 정보이다. 2001년에 재활 치료를 마친 트렌트 레즈너가 LA로 이주한 것을 계기로 로스를 만났는데 이후 둘이 이런저런 작업을 시도했지만 공개는 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그러다가 2005년에 트렌트 레즈너는 로스를 프로듀서로 기용하여 <With Teeth> 앨범으로 컴백한다.[11] Let me see... I lived in New York just after the acid house period, just before I got clean and I won’t go into detail but I had some very… ah… well, I did have had a gun shoved in my mouth once.[12] "죽거나 중상을 입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을 때가 언제였느냐?(ask them when the last time they were in a situation where they had reason to think, ‘I’m not going to get out of this without death or serious injury’)"라고 기자가 질문했을 때 언급했다. 자살을 시도했던 모양이다. 하마터면 커트 코베인처럼 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