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4-06 13:36:21

에라스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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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부터는 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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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뮈스
Erasmus
파일:Holbein-erasmus.jpg
이름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로테로다무스[1]
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
출생 1466년 10월 28일 부르고뉴령 네덜란드 로테르담
사망 1536년 7월 12일 스위스 바젤, (향년 70세)
국적 네델란드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분야 기독교 철학, 르네상스 인문주의
종교 가톨릭[2]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인문주의자2.3. 죽음
3. 사상
3.1. 인문주의와 교육3.2. 자유의지
4. 저서
4.1. 우신예찬
5. 가톨릭 복음주의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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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르네상스 시대 네덜란드의 인문주의[3] 학자이자 신학자, 철학자. 당대 유럽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흩어진 여러 사본을 수집해 온전한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구성하고 이를 직접 다시 라틴어로 번역해서[4] 당시 가톨릭에서 권위있던 불가타 성경[5]의 오역을 지적했으며, 이를 통해 성서해석을 놓고 갈등이 벌어지면서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우신예찬》, 《격언집》 등이 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에라스무스는 1466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성직자인 아버지와 의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4살에 학교에 입학하여 9살 때 아버지에 의해 라틴어 학교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라틴어 시를 지을 만큼 높은 학문적 재능을 보였다. 1483년 흑사병으로 부모를 잃고 난 후, 후견인은 에라스무스를 '공동생활 형제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맡겼다. 에라스무스는 당시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과 혹독한 생활을 겪으면서, 수도원의 타락과 부정 축재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우게 된다.

2.2. 인문주의자

21살이 되던 해 에라스뮈스는 생계 문제로 스테인에 있는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에 입회, 가톨릭 사제가 되었다. 하지만 수도원 생활에 회의를 느낀 그는 수도원을 떠나 1493년 베르겐 주교의 비서가 되었다. 베르겐 주교의 밑에 있는 동안 에라스무스는 수도원의 지루한 삶에서 벗어나 세속적 삶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라틴어 실력을 눈여겨 본 베르겐 주교는 그가 프랑스 파리에 가서 공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덕분에 에라스무스는 파리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며 당시의 지식인들과 교류했다.[6]

1499년, 에라스무스는 영국을 방문한다. 영국 방문은 그가 인문주의자의 길을 걷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영국에서 토머스 모어[7], 존 콜렛 등 당시의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했고, 어린 시절의 헨리 8세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영국에서의 지적인 교류를 계기로 고전과 인문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1506년 그리스어와 인문주의를 더 배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탈리아로 넘어간다. 에라스무스는 이곳에서 그리스인들에게 직접 그리스어를 배운다. 1509년에는 영국으로 다시 넘어와 토머스 모어의 집에 머무르면서 작품을 쓴다. 그 작품이 바로 교회의 허위와 위선을 풍자한 『우신예찬』이다. 우신예찬에서 그는 우신(愚神, 바보 신)을 내세워 교황, 성직자 뿐만 아니라 군주와 학자들을 비판한다. 이 때문에 『우신예찬』은 금서로 지정되지만 유럽에서 이 저서의 파급력은 엄청났고,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가를 비롯한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게 된다.
"아마도 신학자들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지나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거만하고 화를 잘 내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600개에 달하는 논거를 한 조(組)로 묶어 내 주장을 취소하도록 몰아세울 것이다. 내가 그것을 거절하면 그들은 즉각 나를 이단자로 선언할 것이다. 스콜라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방법은 난해한 것들 가운데 가장 난해한 것을 더욱 난해하게 만들 뿐이다."
『우신예찬』 中
그가 이전에 저술했던 『격언집(Adagia)』, 『기독교도 병사의 휴대서』 등에도 이러한 인문주의적 태도가 담겨져 있다. 또한 그는 가톨릭과 인문주의의 융합에도 관심을 가져, 인문주의의 문헌적 연구를 통해 성서의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고자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516년 신약성서의 각종 그리스어 원전 사본을 합쳐서 사상 처음으로 그리스어 성서를 활자화하고 상세한 주해와 라틴어 번역을 첨가한 『교정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펴낸다. 이 업적은 신학자로서 그의 명성을 높여주었으며, 여태껏 교회가 독점했던 성서 해석을 바로잡았기 때문에 이후 종교개혁의 밑바탕이 되었다. 루터의 그 유명한 독일어 번역 성경이 바로 에라스무스의 라틴어판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는 여러 책을 통해서 당대 부패한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여 많은 종교개혁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대한 박식함으로 유럽 최고의 지성으로 등극한다. 하지만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가 벌어지고 종교개혁가들이 투쟁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하자, 그는 가톨릭에 변화가 필요한 것은 맞으나 전쟁은 원하지 않는다는 평화주의 노선을 견지한다. 이로 인해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에게 외면당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노년을 보내게 된다.

2.3. 죽음

그는 네덜란드의 섭정인 헝가리의 메리 여왕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브라반트로 가던 도중, 스위스 바젤에서 이질 증상으로 1536년 선종했다. 그가 선종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신이시여..."였다. 사후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병자성사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바젤 성당에 안치되었다. 1622년, 그가 태어난 로테르담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파일:Rotterdam_standbeeld_Erasmus.jpg

3. 사상

3.1. 인문주의와 교육

에라스무스는 고전 연구를 통하여 ‘인간성’(humanitas)의 개념을 인간의 덕, 윤리, 고결 등의 의미로 규정하고, 그 개념이 기독교적인 것과 일치한다고 보았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대체로 그리스로마 고전에만 관심을 기울인데 비해, 에라스무스는 그 고대 인문주의를 기독교의 교부철학과 성서 연구에 도입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는 이런 차원에서 고대 그리스어로 된 성서의 원전을 연구함으로써 초기 그리스도교의 순수성을 회복하자고 주장했고, 이는 당시 부패한 스콜라 신학자와 수도자들에 대한 비판과 도전이기도 했다.

그는 고대의 고전 작품에서 순수한 인간성과 숭고한 신성을 찾았으며 그것이 기독교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대의 지식이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로 승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소유한 이성의 궁극적 원천은 하느님의 이성(로고스; logos)이므로, 그리스 철학자들이 탐구한 이성적 지혜가 기독교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다음과 같은 자신의 글로 대변된다. "거룩한 소크라테스여,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

즉, 그는 고전 문학에서 발견되는 인문교육의 이상으로서의 교육적 가치와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되는 성경 속의 예수의 삶에서 발견되는 도덕적 가치를 결합함으로써 학문과 종교의 조화를 추구했다. 이는 고대 그리스고대 로마의 고전들과 그 시대 교부들의 저작 속에 포함된 정신을 종교적 도덕의 표준으로 간주함으로써 그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해석하는 기독교적 인문주의의 철학적 원리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참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시민을 위한 학문과 도덕을 내포한 인문주의 교육을 통해 그리스 로마의 고전들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에라스무스는 평민이든 상인이든 귀족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인간다움을 갖추기 위해서 이러한 인문주의 교육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특히 아동교육에서 교사의 역할을 중시했는데, 아이들은 상상력이 풍부하기 때문에 교사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의 상상력에 기초해서 공부의 과정에 놀이의 외양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육을 통해서 아이들이 교사를 좋아하고 존경하여 그를 본받고자 하며, 인문교양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불명예를 싫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문교육은 공공의 책임이기 때문에, 교육을 책임질 교사들 역시 법제화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3.2. 자유의지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가톨릭개신교가 갈라선 이후, 교황청의 요청에 의하여 에라스무스는 마르틴 루터의 『노예의지론』을 반박하는 글을 쓴다. 그는 『자유의지론』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인간이 신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는 루터의 견해를 거부한다.

그는 루터의 노예의지대로라면, 선한 일을 하도록 예정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형벌을 전가하는 것이 과연 정의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하느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의 관계에 관한 여러 교부 철학자들의 논쟁을 개괄한 뒤, 그는 양 극단을 통합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의지에 속하지만 실제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도 자유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에게도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일에는 시작, 과정, 결말의 세 단계가 있는데 시작과 결말은 하느님이 예정한 것에 속해서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지만, 시작과 결말의 중간인 '과정'에는 인간의 의지가 작용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개별적 행위는 하느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라는 두 원인이 동시에 작용하며, 하느님의 의지는 주도적 원인, 인간의 의지는 이차적 원인이 된다.

그는 불을 예로 들어 이 관계를 설명한다. "불의 본래 성질로 인해 불이 날 경우, 그 불이 일어나게 만드는 하느님은 일차적 원인이다. 만약 일차적 원인이 없어지면 불은 결코 일어날 수가 없다." 즉, 건조한 날씨로 메마른 숲속에 누군가 성냥불을 버리면 산불이 난다. 이 경우, 불이 나기 좋은 건조한 날씨와 적당한 산소량 등, 가연성이라는 불의 성질은 일차적 원인이고 성냥불을 던지는 행위는 이차적 원인이다. 성냥불을 아무리 던져도 불이 날 조건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불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일차적 원인으로서 하느님이 예정한 결과로 귀결되며, 그럼에도 선과 악의 행위는 인간 의지의 작용에 따라 일어날 수 있으므로 하느님은 그 인간 행위의 의지를 파악하여 포상 또는 징벌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 변론은,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음에도 모든 것은 이미 신이 결정한 것'이라는 장 칼뱅의 이중예정설로 이어진다.

4. 저서

4.1. 우신예찬

에라스무스는 이탈리아에 있으면서, 청빈과 기도, 눈물과 고행에 몰두해야 할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그렇게도 많은 재물과 영광, 세금과 면죄부를 통해 쾌락에 빠져 있으면서 전쟁을 자신의 주된 업무로 생각하는 것을 보고 극한 실망감에 빠진다. 그리고 1509년 이탈리아를 떠나 영국으로 오는 길에 그는 이런 물음에 사로잡힌다. 사람의 생각을 사로잡고 행동을 부추기는 동기가 무엇인가? 진실과 사랑, 지성과 현명, 이런 고상한 것보다는 허영과 욕망, 정념과 어리석음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아닌가? 그리고 그는 영국 런던에 도착하여 토머스 모어 집에 머물면서 일주일 만에 『우신예찬』[8]을 쓴다.

『우신예찬』의 주인공은 '모리아(Moriae; 우신, 바보신)'이다. 모리아는 라틴어로 '어리석은 여신'을 말하는 것으로, 토머스 모어의 '모어'와 유사해서 선택한 단어라고 에라스무스는 밝힌다. 물론 모어는 어리석음과 거리가 멀지만, 그는 친절하고 너그러울 뿐 아니라 유머감각이 뛰어나 자신의 재치 넘치는 풍자에도 크게 즐거워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9]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에서 '어리석음'을 대략 3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리석다고 말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실 똑똑한 사람들이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한다는 의미로도 사용한다. 또한 그는 바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혜로운 자들을 말할 때도 '어리석음'을 사용한다.

그는 "스토아 학자라도 아버지가 되고 싶다면 바보신(우신)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이라며, 무엇으로 인간을 만드는지 묻는다. "머리나 얼굴로? 가슴으로? 손 아니면 귀처럼 정숙한 부분으로? 아니 그렇지 않다. 인류를 널리 번식시켜 퍼뜨리는 그 부분은 너무 우스꽝스럽고 바보 같아서 웃지 않고는 언급할 수 없는 부분이다."[10] 그리고 바보신은 생명이 어리석음을 통해 태어날 뿐 아니라 어리석음 때문에 유지된다고 역설한다. "사람은 어리석고 미칠수록 즐겁고 어리석을수록 타인과 잘 어울린다. 아첨과 속임수가 없다면 백성이 지배자를, 상전이 하인을, 마님이 하녀를, 선생이 학생을, 아내가 남편을, 지주가 소작인을 어떻게 견뎌내겠는가?" 바보신은 이렇게도 반문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법칙, 또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 의해 다스려진 나라가 단 하나라도 있는가?" 영웅들의 고귀한 행위도, 수많은 찬란한 글도, 도시도, 제국도, 사법행정도, 종교도, 인간의 계획과 판단도 모두 어리석음과 허영, 광기에 의해 유지된다. 인간이 이용하는 기술도 명예욕 때문에 나온 것이며 온갖 학문과 예술도 모두 이와 같은 것 때문에 나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어리석음은 인간의 본성에 꼭 어울린다. 인간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온갖 근심과 걱정을 벗어날 수가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삶을 즐길 수 있다.

또 바보신은 실상은 어리석으면서도 현명한 척하는 어리석음을 폭로한다. 자기 아내가 수많은 남자를 가졌는데도 마치 정숙한 부인이라고 생각하는 남편들, 사냥에 미쳐 날뛰는 귀족들, 노름꾼들, 거짓말쟁이들,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해 면죄부를 받았다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등은 모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바보신은 '기독교적 어리석음'을 논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이나 힘있는 자들, 가진 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여자들과 어부들을 가까이 한 것, 짐승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당나귀를 고르신 것, 성령이 독수리의 형상이 아니라 비둘기의 형상을 하고 내려 온 것,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을 양이라고 부른 것, 그리고 심지어 자신을 어린양이라고 부르게 한 것 등은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높이 인정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바보신은 반문한다. 또한 사도 바울로에 따르면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에겐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어리석은) 것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어리석음과 혈연관계를 가진 종교라는 것이다.

5. 가톨릭 복음주의

개신교의 주요 교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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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회(a.k.a 안식교)는 안식일이 결부된 구원론과 앨런 화이트에 대한 직통 계시론 때문에 이단 논쟁이 심하다.
강력한 에큐메니컬 성향 교단에서는 정통의 일원으로, 구원론 및 계시론에 민감한 교단에서는 이단으로 분류한다.
국내 개신교계는 조직신학(교의학)에 민감하기에 대체로 이단으로 받아들인다.
같이 보기: 기독교의 종파 }}}}}}}}}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세례를 받은 사람도 서품을 받은 사람도 교회에 가는 사람도 아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 내면 가장 깊이 끌어 안고서, 믿음 깊은 행동으로써 그를 모방하려는 사람이다"
Erasmus. D. The Education of a Christian Prince (1965) p.153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영적인 삶에 있어서 두가지를 요구한다. 하나는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이다. 지식은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는 무기로서, 성경과 고전을 통해서 얻어진다. 이를 통해 그는 오로지 내적이고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그의 삶을 따라가고자 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지, 미사의 참석이나 고해성사 등의 형식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주의 타파는 부패한 교황과 성직자에 대한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종교개혁은 교육으로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이 에라스무스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았다. 처음에 루터의 가톨릭 비판에 동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에 대해 지지해달라고 요청하고 그리스도교 사회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질 것으로 예상되자,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비이성적으로 움직일 것을 우려하였고 “격렬한 언동보다 정중한 중용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며 자신의 온건 노선을 견지했다. 그가 바랐던 것은 어디까지나 교육을 통한 교회 체제 내의 개혁이었지,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간이 적절한 인문주의 교육을 받으면 그 이성의 자유의지로 종교의 부패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맥락에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의지(은총)이고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다는 루터의 『노예의지론』을 반박했던 것이었다. 에라스무스는 고전과 교부시대 철학자들을 근거로 하느님이 인간에게도 자유의지를 주었음을 알리는 『자유의지론』을 썼고, 루터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당대 최고 지식인을 논리로 이길 수 없자 루터는 논리를 펼치는 것을 그만두고 에라스무스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11] [12]

그러나 결국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을 저술한 것 때문에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당한다. 그래서 결국 당대에는 개신교에게도, 가톨릭에게도 외면받아 찬밥 신세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현대 개신교계는 그가 루터와 영향을 서로 주고받은 종교개혁가로 인정하고 있는 추세이며, 가톨릭 내부에서 가톨릭 개혁운동을 벌인 온건주의자로서 꽤 예우해주기도 한다. "외부로부터의 충격요법을 시도했던 다른 종교개혁가보다, '내부에서의 개혁'이라는 훨씬 어려운 길을 걸었다"면서 존경하는 시선도 있다. 결국 교파 불문하고 한국 개신교 신학대학에서 에라스무스를 반드시 언급한다. 학부 과정에서는 루터파 파트를 공부할 때 반드시 언급하고, 대학원 과정에서는 꽤 비평적으로 분석한다.

그의 직계 후신은 가톨릭 내부에서 가톨릭 전통을 따르지만 개신교 성향을 드러내는 '가톨릭 복음주의'를 들 수 있다. 물론 가톨릭은 종교개혁 이후로 예수회로 개신교 성향 신자들을 꾸준히 파문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파문된 신자들 중에서 온건파는 종교 환경과 예전 방식이 비슷한 성공회로 이동한 경우가 매우 많았다.[13] 강경파는 당연히 다른 주류 개신교계로 이동했다. 게다가 오히려 가톨릭이 반종교개혁을 통하여 도덕적인 개혁을 완료하자 자신들의 복음주의 교리를 유지하면서 교황청의 교도권에 들어간 개신교 교회도 꽤 있었고, 현대 가톨릭도 복음주의의 영향을 짙게 받아 더이상 개신교 성향 신자들을 무조건 내칠 수 없게 되어 이러한 성향의 신자들이 매우 많아졌다.[14] 개신교계는 이러한 신자들을 마치 성공회의 고교회파, 광교회파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의 가톨릭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과 신학 성향이 유사한 성공회 고교회파 및 광교회파와 교류가 잦다.

이에 대한 연장선상으로, 자유주의적 가톨릭주의(liberal Catholicism)의 시조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인문주의 성향이 가톨릭 내부의 자유주의 신학을 잉태시켰다고 보는 것. 실제로 한스 큉 같은 일부 진보파가 교황무류성을 비판하기도 하며, 자유주의적 가톨릭 신자들은 복음주의 성향을 겸비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이 또한 성공회의 광교회파 포지션과 매우 유사하다. 단, 한스 큉은 예수 밖에도 확실히 구원이 있다고 못박았기에, 가톨릭 복음주의자들에게도 호불호가 극심하다.[15]

6. 여담

  • 네덜란드어로 '에라스뮈스'라 불린다. 라틴어로는 '에라스무스'. 그가 당대의 대표적인 인문주의자로서, 모든 저서가 자국어가 아니라 라틴어를 써서 저술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어인 에라스뮈스로 표기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전문가의 의견도 있지만, 일단 국립국어원의 한글표기 규칙에 따르면 '에라스뮈스'이기 때문에 '에라스뮈스'도 혼용해서 쓰인다.[16]
  •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이자, 독일 초상화 예술의 정점인 한스 홀바인토머스 모어에게 추천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이 페이지에 실린 홀바인이 그린 에라스무스의 초상화가 에라스무스의 초상화들 중 가장 유명하다. 후에 홀바인은 토머스 모어헨리 8세의 초상화도 남겼다. 이들의 초상화 또한 북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 특이하게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에라스무스의 목조 조각상이 있는데 그 기원은 윌리엄 애덤스[17]가 타고온 선박 에라스무스호의 선미상(船尾像)을 누군가가 노획하여 도치기현 류코인(龍江院)이라는 절에 세워졌다고 한다. 현존하는 유물은 일본의 국보이다. 2012년부터 에라스무스 대학교를 주축으로 로테르담에서 반환 요청의사를 꾸준히 밝혀오는 중이나 매번 거절당하는 중이다. 네덜란드-일본 정상회의때도 마르크 뤼터 총리가 정중하게 반환의사를 보였음에도 아베 신조일본 총리는 "방법을 생각해보겠다"며 즉답을 회피했다.
  • 독일을 위한 대안싱크 탱크인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재단 또한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 네덜란드 출신의 범유럽주의자인 에라스무스의 이름을 독일의 반EU정당인 대안당의 정책연구소에 썼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재단 측에서는 "에라스무스의 자유주의 사상과 유럽적 가치관이 대안당과 일치하여 그의 이름을 땄다"고 밝혔다. #


[1] "에라스뮈스"는 그의 세레명이고, "데시데리위스"는 그가 1496년부터 추가해서 사용한 이름이다. "로테로다무스"는 그의 출신 지역 로테르담을 말한다. 라틴어인 이 단어들을 모두 함께 직역하면 "로테르담의 사랑받는 갈망"이 된다.[2] 당대 가톨릭 교회에 대해 개혁을 요구하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교회의 분열은 피하고자 했기에 가톨릭 신학자로 남았다. 무엇보다도 가톨릭의 자유 의지론을 옹호하여 루터의 노예 의지론(인간은 천성이 악하여 예수와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는 선을 행할 수 없는 노예 의지의 상태에 있음)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었고, 가톨릭 원칙주의자인 토머스 모어와 자주 서신을 주고 받으며 친교하였다.[3] 인문주의로 번역되는 독일어 'humanismus'는 독일의 교육자 니타머(Niethammer)가 직업적, 과학적 교육을 강조하는 세태에 대항해서 그리스, 라틴 고전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취지에서 1808년 처음 사용한 말이다.[4] 신약성서는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어인 코이네 그리스어로 쓰였는데 이를 중세 라틴어로 번역했다.[5] 382년에 히에로니무스가 교황 다마소의 명을 받고 편찬한 라틴어 번역본 성경.(원본은 그리스어) 중세에 이르러서는 서방교회 전체가 이것을 표준적인 성서로 사용하게 되었다.[6] 하지만 파리 대학교에서 에라스무스의 공부는 만족스럽지 못했던 듯하다. 파리 대학교에 있는 동안, 그는 그곳에서 가르치던 스콜라 철학을 비판했다.[7] 대화는 당연히 라틴어로 나눴다.[8] 원제: Moriae Encomium. (우신예찬)[9] 에라스무스 『우신예찬』 김남우 옮김. 열린책들. 2011. p.12~13[10] 성기를 말한다.[11] 이렇게 둘 사이의 관계가 틀어졌지만, 에라스무스가 루터를 싫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에라스무스는 루터가 트레엔트 공의회에 의해 이단자로 낙인 찍히자 교회에 루터의 선처를 요구하기도 했다. 루터 또한 에라스무스와 사이가 틀어지기 전에 에라스무스를 따라 신약성서 독일어 번역본을 만든 만큼, 에라스무스의 학문적 권위는 인정했다.[12] 에라스무스는 루터에게 급진적 개혁을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유유부단하다고 판단했지만, 사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급진적 개혁으로 인해 교회 내 강경 세력이 확고해져, 결국 교회가 영구히 분열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회 일치를 강조하는 신학자에겐 호평을 받지만, 교황무류성을 비판하는 신학자에겐 '에라스무스처럼 온건적 노선을 통해 가톨릭교회에 잔류했다면 에라스무스와 그 뒤를 잇는 가톨릭 복음주의자들이 그랬듯, 결국 종교개혁자들이 모조리 교황청과 가톨릭 수뇌부에게 숙청되었을 것'이라고 비판을 받는다.[13] 성공회가톨릭 사제의 경력을 온전히 인정한 채로 그대로 성공회 사제로 등용하는 이유가, 이런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타 개신교단은 산하 신학교에 30여 학점을 수강시키고 등용한다.[14] 정확히 말하자면 고교회파와 광교회파 스탠스를 취하는 복음주의자들을 함부로 퇴출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저교회파 성향 신자들은 잘만 퇴출하고 있다.[15] 한편 보수 개신교에서는 가톨릭교회가 현대에도 저교회파 성향 신자들을 꾸준히 축출한 전례가 있어서 회의적으로 보는 편이다. 실제로도 성당에서 파문(Excommunicatio)당한 저교회파 성향 가톨릭 신자들이 꾸준히 개신교회로 유입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냐면, 가톨릭 수뇌부는 개신교와의 대화를 꾸준히 시도하고 있어서 더이상 복음주의 성향 신학자들을 이단으로 지정하지는 않지만, 산하에 있는 각 교구와 각 신부들의 저교회파 성향 신자 퇴출 결정에 일일이 관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괴리를 해결하지 않고 보수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가교(架橋) 역할을 해줄 가톨릭 저교회파가 세력을 크게 불리지 않는 한, 가톨릭과의 심도깊은 교회일치 논의는 매우 힘들다고 보는 것.[16] 고향이 속한 국가의 언어인 네덜란드어를 발음표기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17]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된 영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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