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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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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반기
2.1. 경성의 노중한귀2.2. 십상시의 난2.3. 반동탁군과 형주, 예주 장악2.4. 낙양 탈환
3. 이원전쟁
3.1. 광정전투와 형주 상실 3.2. 양주 장악 3.3. 서주 침공3.4. 황제 참칭
3.4.1. 원술의 칭제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
4. 이원전쟁의 패배와 끝없는 몰락
4.1. 손책의 이탈4.2. 여포의 이탈4.3. 예주의 이탈4.4. 현실도피
4.4.1. 주유의 이탈4.4.2. 미워도 다시 한번?
4.5. 버림받다4.6. 원소에게 구걸하다4.7. 비참한 최후
5. 사후
5.1. 무덤

1. 개요

원술의 생애에 대해 서술한 문서.

2. 전반기

삼국지후한서에 남겨진 원술의 전기에서는 원술이 사공 원봉의 아들이라고만 나와있어 형제관계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후한서 효헌제기와 원안열전 등을 통해 원봉의 장남인 원기의 존재가 나타나고, 삼국지에 주석으로 인용된 위서는 원소가 원봉의 얼자이자 원술의 이복형으로 원소는 아들없이 요절한 원성의 대를 잇기 위해 입적되었다는 기록을 싣고 있으며, 원기를 형으로 표현한 원소의 글이 후한서 원소열전에 인용되어 남아있기 때문에 기록들을 취합한다면 원봉의 삼남이 된다.

차남 원소가 얼자였던 것과 달리 원기와 원술은 본부인의 소생이었고 원술의 어머니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동진의 역사가 배송지가 삼국지에 주석으로 인용한 일사전에서는 원술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만 3만명에 달했다고 적고 있기 때문에 원씨 종가의 안주인에 걸맞은 막강한 배경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원술은 한나라 최강 족벌인 원씨의 적통이었으나 명문가 자제로서의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어려서부터 거칠고 호방한 성격으로 양갓집 자제들을 모아 사냥에 몰두했고, 유협 집단의 리더로 명성을 얻으면서 사족사회 주류와 완전히 겉도는 성향을 보이다가 나중에 마음을 고쳐먹고 효렴[1]에 천거되어 낭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중앙과 지방의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북당서초》에서는 원술이 장수교위로 재임할 때 수레와 말이 호화로웠고, 사치스러움을 사랑하여 행렬이 거리낌없이 방자했으며, 항상 위압적인 기세로 사람들을 능멸해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일컫길 "거리의 한귀(=악귀, 사나운 귀신), 원 장수교위"라 불렀다는 기록[2]이 있고, 《위지》에도 ‘장수교위를 지냈는데 사치와 음란함을 좋아해 분수에 맞지 않는 화려한 수레를 타며, 사람들에게 위세를 부렸다. 사람들이 일컬기를, "거리의 한귀, 원 장수교위"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선 어지간히 행패를 부리고 다녔던 듯하다. 《후한서 원술전》에서는 원술이 스스로의 명성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으나, 그 천성이 교만하고 사치스러웠으므로 자신만이 고귀하다고 여기며 모든 것을 깔봤다는 평가를 남기고 있는데, 이처럼 원술의 인물상은 젊은시절부터 대단히 자긍심이 높고 오만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삼국지 원술전》에서는 효렴에 천거된 이후 낭중을 거쳐 내외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절충교위, 호분중랑장까지 이르렀다고 하며, 《후한서 원술전》에서는 효렴에 천거된 이후 여러차레 옮겨져 하남윤, 호분중랑장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 외에 영웅기에서는 원소가 시어사로 승진했을때 원술이 상서였기에 상서대 아래에 있고 싶지 않아 칭병하며 사직했다는 토막 일화로 등장하며,[3] 앞서 언급된 북당서초와 위지의 기록에 따르면 장수교위를 지낸 적이 있다.

2.1. 경성의 노중한귀

원술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무척 나빴고, 역사가들은 원술의 행보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기록했다. 당대 기록들의 서술 주체나 다름없던 사족들은 제각기 원술의 특성에 대해 서술하며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협명이 높았다는 점만큼은 후한서와 삼국지에 실린 원술 전기 열전의 첫머리부터 언급하고 있으며, 원술은 세상에 명성을 얻기 이전부터 사냥에 매우 심취하는 등 기본적으로 무예를 좋아했다.

한편 《삼국지 순유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장번의 한기에 따르면 원술은 당대의 호걸로 이름을 떨치며 원소와 그 명성을 두고 겨룰 정도였는데, 하옹이 원소는 매우 높게 평가한 반면 원술은 아예 찾아가지도 않았기에 원술는 이에 대단히 원한을 품었으며 당시 원소의 분주지우였던 허유를 거론하며 음란하고 불순하며 탐욕스러운 자라고 비난한다. 도구홍은 원술이 지적한 허유의 단점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허유를 위난을 극복하기 위해 진흙탕을 걷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인물이라며 나름대로 호평해주는데 몇 안되는 젊은 시절의 기록에서도 원소와 좋지 않은 관계임이 보여진다.

한기의 서술을 긍정한다면 그가 장수교위를 지내던 젊은 시절부터 오만하고 방탕해 사람들에게 ‘거리의 귀신’이라 불렸다는 위지 등의 서술은 원술에 대한 일반적인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서술이라 볼 수 있다. 원술은 그러한 악명에도 불구하고 ‘호걸’로서 당대 사족들에게 우상화된 인기를 누렸던 원소와 명성을 다툴 정도로 지명도가 있었다. 본인이 흔히 받던 불명예스러운 평가 그대로의 비난을 원소의 최측근인 허유를 겨냥해 늘어놓는 등 자신을 냉대하는 사족사회의 분위기나 원소의 이중성을 다분히 의식하는 자격지심에 가까운 면모를 보인다.

후한 말은 직업선택의 자유가 그리 많지 않았고 중앙정치의 오랜 혼란으로 정치 테러가 횡행했으며 민간 영역에서도 각 지역마다 사회모순과 개인적 은원으로 얽히고 설킨 가문 간의 대립이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시대였기에 테러리스트 꿈나무들이 넘쳐나는 사회였다. 사람을 죽이고 명성이 높아진 하후돈이나 전위, 서서 등의 사례에서 보이듯 노골적인 폭력에의 호소 또한 어떤 명분을 내세웠느냐에 따라 명예로운 협객의 행동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었다. 원술이 ‘노중한귀’라는 별명을 얻은 배경들을 살펴보면 그는 무예를 좋아하고 거칠고 과시적이며 원초적인 폭력과 공포를 동원해 좌중을 압도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원술은 이러한 특성들을 통해 유협 집단으로 분류되던 폭력배들을 휘어잡는 일에 특출난 재능을 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사병화된 폭력배들을 거느리며 협객을 자처했고, 폭력단을 기반으로 가문 간의 분쟁조정에 나름의 존재감을 떨치면서 그에게 수혜를 입은 사족들을 중심으로 ‘호걸’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을 것이다.

옛날 글줄을 읽다 보면 고대인들이 이따금 어떤 사람이나 행동을 평가하며 그것은 의로움, 난폭함이나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다고 서술한다. 사실 이런 폭력 등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윤리관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특성은 있다. 현대인이 보기에야 이상한 폭력이겠지만, 현대 사회 역시 공권력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를 항상 실현해주지는 않는다. 하물며 고대는 공권력의 지방 장악력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공권력에 일일이 정의실현을 기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이 시기 고대 중국에서 중앙에서 임명해주는 지방관의 한계는 고작해야 현령이었고 한국으로 따지면 시장이나 군수가 지방행정의 끝인 것이다.[4] 매관매직이 심했던 시대이기도 하기 때문에 공권력에 정의실현을 기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법이나 유력자를 두려워하고 자기 몸과 재산을 아껴서 굴종하면 용기 없는 비겁함이 되고, 그렇다고 복수를 해서 남을 해치면 난폭함이 되고, 복수를 하려 했지만 힘과 꾀가 모자라서 도리어 당하면 의롭지만 어리석음이 되고, 복수 과정에서 폭력의 범위가 커지면 잔인함이 되는 것이 고대인들의 사고였다.

다만 원술의 행동이 비록 폭력을 동원했다 하더라도 경우가 어느 정도 있었다면 반드시 악평만이 쏟아지진 않았겠지만, 이 시기 역사를 서술한 관찰자와 기록자, 그리고 기록 속의 행동주체들은 진영을 가리지 않고 원술을 혐오스러워 했다. 원술 말년의 삽질도 영향을 아예 안 끼쳤다고 말하기도 어렵겠지만, 어쨌든 관찰자들이 원술을 폄하하던 경향은 원술이 위세를 부리고 폭력을 사용함에 있어서 뭔가 하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술의 갱스터적 특질은 원술이 하진의 휘하로 영입되면서 십상시의 난이라는 후한 말 중앙정치투쟁의 전면에 선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대장군 하진이 원술을 영입하며 후대한 핵심적인 이유는 원술이 의협을 숭상하는 것으로 이름 높아 호걸들을 아우를 수 있었다는 점이었고, 더 정확히 말하면 하진과 십상시들이 정치투쟁이 전개되면서 직접적인 지휘권 없이도 사적 지시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정치깡패 동원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높게 산 것이었다.

원술은 무능하고 가벌의식에 찌든 소인배라는 인상이 강하고 역사적 평가도 최악이다. 그러나 그는 소년기부터 성년 이후의 초기 커리어를 거쳐 십상시의 난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무대에 등판하던 순간까지도 언제나 유협적 정체성에 따라 이야기되고 평가되어 왔던 인물로서 명문가 자제의 배경으로 기대되고 요구되던 일반적인 관념들과는 확실하게 동떨어진 삶을 살아 왔다. 무예를 좋아하고 거침없는 성격과 나름의 처세를 통해 정치깡패를 동원할 카리스마도 갖추어 당대 정치환경의 수요에 부응할 수 있던 낙양 폭력배들의 거두급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때 그때 뒷배를 바꿔 가며 완장을 차고 무자비하게 진압봉을 휘두르던 행동대장으로서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독특한 입지를 구축한 인물이었다.[5]

2.2. 십상시의 난

189년, 영제가 죽고 하진이 정권을 잡아 십상시와 대립할 때 호분중랑장으로 황실의 근위대를 지휘하고 있던 원술은 하진에게 포섭된다. 이보다 앞서 서원군의 중군교위를 지내던 원소는 하진에게 접근해 건석과 대립을 부추기며 점차 발언력을 확대하고 있었는데, 선비들을 다루는데 도통한 원소와 의협을 숭상해 협명이 높은 원술이 하진에게 가세하니 하진은 뛰어난 인재들을 충분히 뽑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원술은 십상시의 난 당시 하진의 피살 사실을 알자마자 하진의 부곡장인 오광과 함께 황궁을 공격하며 청쇄문에 불을 지르는 등 가장 먼저 무력행사에 나선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장양 등 십상시들은 황궁을 수비하며 시간을 끄는 한편 군권 장악을 위해 하남윤과 사례교위 등의 요직을 자파 인물들로 교체한 상황이었으나 원소가 선수를 쳐 이들을 제거하고 주요 기관을 장악한 뒤 황궁에 돌입하면서 십상시 측의 패배를 결정지었다.

원술이 원소와의 개인적 관계가 무척 나빴기 때문에 하진의 원술 포섭이 급격히 영향력이 확대되는 원소에 대한 견제의 의미를 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나 당시 원술은 황실 근위대의 지휘 책임자였고 자체적인 명성이나 능력 또한 상당했다는 점만으로 이미 하진이 포섭할 가치가 충분했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하진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 결과적으로 이때 원소와 원술은 십상시의 반격에 맞서 협력 비슷한 모양새를 취하긴 한다.

그러나 결국 남 좋은 일만 되어 버린 것이 운 좋게도 황제의 신변을 확보한 동탁이 허장성세를 통해 자신의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하자 하진 사후 어디에 줄을 서야 될지 감을 못 잡고 있던 낙양의 군사들은 죄다 동탁에게 붙어버렸고, 정원마저 제거하면서 견제세력이 없어진 동탁이 정권을 잡게 된다.

동탁이 정권을 장악한 직후 원소와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다 결국 원소가 실각해 하북으로 달아난 것과 대조적으로 동탁은 원술을 고위 장군직인 후장군으로 삼으려 하는 등 처음부터 상당히 호의적인 제스처로 접근했다. 원소는 청류파들의 우두머리였고 원씨들은 암묵적인 환관 지지파였다.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러한 정치적인 대립 + 원소의 복잡한 출생으로 집안 어르신인 원외를 비롯한 원가는 원소를 견제했고 그러므로 원가의 유망주인 원술을 포섭해서 명문가인 원씨의 지지를 얻으려는 동탁의 정치적 계산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원술은 동탁의 영입 제의도 무시하고 달아났으며, 원소의 거병에 호응해 자신도 군을 일으킨다.

원술이 한때 후장군으로서 동탁에게도 우대받다가 관계가 서로 틀어지게 된 계기는 기록의 공백에 해당되는 영역이나, 원술이 낙양을 떠난 시점은 후비전의 기록을 참조하면 조조와 비슷하거나 약간 늦은 것으로 보이고, 원술 역시 반동탁 연합군이 창설된 190년 정월 당시 다른 관리들과 동시에 거병했으며 동탁이 화해를 위해 보낸 조정의 칙사들을 살해한 주체 중 하나이기 때문에 원술 또한 낙양 원씨의 몰락에 일조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공손찬이 황제에게 올린 표에 따르면 원소는 분명 원씨 일족을 살릴 수 있었는데도 고의적으로 동탁을 자극해 애꿎은 원씨 일족이 죽어나갔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당시 공손찬과 동맹을 맺고 있던 원술의 시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면 이전까지의 원소와 원술은 비록 사이가 몹시 나쁘기는 했지만 필요하다면 잠시 손을 잡는 정도의 협력은 가능한 사이였으나, 원기를 비롯한 일가친족이 멸문당한 사건으로 인해 원술이 원소에게 대단히 큰 원한을 품게 되어 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2.3. 반동탁군과 형주, 예주 장악

삼국지 원술전에서는 동탁을 피한 원술이 남양으로 달아났고 마침 손견이 남양태수 장자를 죽이자 남양을 점거했다고 하며, 후한서 원술전에서는 손견이 장자를 죽이고는 남양군을 들어다 원술에게 바치자 유표가 원술을 남양태수로 인정하는 상소문을 쓰면서 남양태수가 됐다고 한다.

손견이 장자를 죽이기 이전까지의 원술의 행방이 원술 본인의 열전에서는 불분명하게 서술되고 있으나, 삼국지 손견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헌제춘추에 따르면 왕예를 죽인 이후 손견은 원술이 내린 중랑장 직위를 받았고, 남양에 도착한 뒤 남양태수 장자가 원조를 거부하자 그를 죽였으며, 삼국지 유표전의 주석으로 인용된 사마표의 기록을 보면 유표는 형주자사 왕예의 후임으로 조정에서 파견되었으나 이미 원술이 남양을 전부 장악하고 형주에서 족당의 도적들이 극도로 횡행하며 원술이 이를 이용하고 있던 상황이라 자사의 치소가 있는 무릉으로 가지 못하고 양양에 머무르며 양양의 호족 채모,괴월의 협력을 받아 자립을 이루는데, 원술을 남양태수로 인정한 주체가 유표라는 후한서 원술전의 기록을 참조한다면 채모와 괴월의 협력을 받기 이전까지의 유표는 사실상 원술에게 억류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처지였다.

또한 무제기에서는 196년에 조조에게 토벌당한 유벽, 하의, 하만, 황소 등의 황건적 군벌들에 대해 ‘본디 원술에게 호응하다가 (원술의 임명을 받은 예주자사) 손견을 지지하던’ 무리로 언급하는데, ‘제각기 무리가 수 만에 이르던’ 이들의 활동영역은 여남, 영천으로 특히 여남은 원씨의 본적이 있는 원술의 고향이며 영천은 물론 원술에게서 중랑장으로 임명된 손견이 태수를 죽인 남양과도 경계를 맞대고 있었고, 장자를 죽인 이후 노양에서 원술과 만난 손견이 예주자사로 임명되자 이전까지 원술에게 지시를 받던 황건적 군벌들이 편제상 예주자사 손견의 휘하로 들어갔다는 점은 원술의 초기세력 형성을 손견이 다 만들어줬다는 인식과 전혀 달랐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후한서와 삼국지 모두 원술전 본전에서 이 행적을 싹 생략하고 원술이 손견을 통해 남양태수가 되었다는 결과만을 서술하고 있기에 내막을 알기 어렵지만 흩어진 기록들을 통해 원술의 행적을 재구성하면 그는 낙양을 탈출한 이후 바로 남양으로 간 것이 아니라 우선 본적이 있는 여남으로 간 것으로 보이며, 어느 시점부터는 그곳에서 여남,영천의 황건적 잔당 다수를 사병처럼 부리며 이미 예주 공권력의 상당 부분을 침범하고 있던 상태였다.

손견과는 서로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서 동맹 혹은 종속관계를 수립하고 인접한 남양까지 무력으로 장악함과 동시에 후임 형주자사 유표를 억류한 채 반동탁 정국이라는 정치 국면에서 자신의 입지를 정당화하고 형주 전역의 자경단 활동을 부추김으로서 형주 공권력의 붕괴를 의도적으로 가속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본래 원술은 조조, 장홍과 함께 연합의 참여자들 중 현직 지자체장 출신이 아닌 몇 안되는 인물이었으나, 사방장군이라는 고위 장군직에 있었으므로 그 위상만큼은 연합 전체를 통틀어서도 특별했고, 동탁의 집권이라는 국가비상사태에 후장군으로서 막부를 세워 군사를 조직하며 의군에 합류하는 형태를 취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반동탁 연합이 태수와 자사 등 지방관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으니 각지의 태수와 자사들은 기존에 작동하던 공권력을 이용해 동탁의 집권이 쿠데타라는 인식을 공유하던 현지 호족들의 협력을 받아내며 거병에 관련한 일체를 순조롭게 진행해 나갈 수 있었으나, 일정한 지역에 권력을 행사할 공적 권한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지역의 정치적 입장을 결정하는 의사결정구조에서 배제될 수 밖에 없었기에 제약이 컸다.

원술이 황건적을 비롯한 무리들을 끌어들인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여남, 영천의 황건적 무리들이 원술을 따랐다는 기록에서 볼 때, 원술은 지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연고지인 여남에서 자신을 따르던 유협 깡패들은 물론 기존 후한 조정의 공식적 관념질서에서 명백한 반체제분자로 간주되던 집단들까지 과감히 끌어안으며 이들에게 장군사마나 종사를 비롯한 임시직을 뿌려 완장을 채워주고, 이들의 무력을 통해 기존 예주와 형주의 공권력을 압박하여 전복시키고 후장군부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실효지배를 시도했을 것이다.[6]

손견이 왕예와 장자를 죽인 표면적인 이유 또한 의군에 협조적이지 않다는 이유였고, 손견을 보호하면서 날개를 단 정치행보를 펼치는 원술의 모습을 볼때, 원술은 반동탁 성전의 기수라는 추상적 가치를 통해 이러한 모든 행보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나라 최대 명문가인 원씨가 여남 현지의 향론에서 차지하는 절대적인 권위와 후장군으로서 가지는 공적 지위를 통해 태평교도 또한 후장군부의 지도에 따라 역적에 부역한 과오를 씻고 국가비상사태에 맞서 진정한 구국에 기여하고 있다고 내세월을 가능성이 높다. 동탁과 제대로 싸우지 않고 듣기 좋은 말이나 내세우는 기회주의자들과는 달리 애국자 손견이 그 사명을 분명히 하도록 돕는다는 식으로 손견과의 결합은 포장되었을 것이다.[7]

아무튼 원술이 이러한 행보와 함께 후임 형주자사 유표를 억류한 채 ‘애국지사’들의 열렬한 동참을 요구하며 ‘종적’들의 대규모 봉기를 유도한 것이 형주의 공권력과 질서를 차근차근 무너뜨리면서 유표와 채씨, 괴씨들이 근심하던 상황의 기록으로 남았을 것이고, 유표가 형주에 처음 부임한 시점에서 형주의 실권자는 모로 보나 원술이었지 유표가 아니었다.

다만 이런 것이 손견을 부리는 원술이 처음부터 설계된 치밀한 계획이라기보다는 손견의 행보에 원술이 올라타면서 임기응변식으로 서로서로 빈 곳을 채워준 것이 맞아 보인다. 일단 왕예를 죽인 것은 당시 원술이 여남 인근에 있었다는 정황으로 볼 때 물리적인 거리상 손견의 거병소식을 듣고 손견이 왕예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무릉을 지나기 전에 손견에게 살해 지시를 내리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보자면 또다른 지방관 살해인 장자 살해 역시 손견이 독자적으로 해치울 수 있는 일이며 원술과의 연결이나 원술의 지시가 불가피해 보이지는 않는다.[8]

손견의 행보를 보면 낙양탈환에 뜨거운 열정을 불태운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장사에서 낙양까지의 긴 보급로와 연결선은 장사태수이며 무관에 불과했던 손견과 손견군 단독의 역량으로는 불안요소였을 것이다. 역사의 사례를 보면 단독으로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후방을 맡아줄 든든한 후원자가 생긴다면 나쁠 것은 없었다.[9] 원술의 훗날의 행적을 생각해 봐도 손견에게만 처음부터 계획된 치밀함을 발휘했다거나, 손견에게만 엄청난 통제력을 보여줬다던가 손견이 원술만은 무작정 따랐다던가 하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된다. 원술은 평생을 걸쳐서 하던 것처럼 임기응변으로 대충 꿰어맞추기를 했는데 이 경우는 어쩌다 보니 손견과는 공통의 이익이나 명분추구가 성립됐던 것이 가장 확률이 높아 보인다. 아마도 북상하던 손견과 교감을 나누고[10] 노양에서 수뇌부 회담 이후 동맹이나 연합을 맺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어쨌건 결과적으로[11] 노양에서의 손견 원술 회담 이후 손견이 수탈하던 남양은 원술의 것이 된다. 왕예의 후임으로 파견된 형주자사 유표는 원술을 남양태수로 인정하도록 상주하는 표문을 올리며 원술의 남양 지배를 묵인했다.[12] 손견으로부터 남양까지 넘겨받으며 본격적인 군벌의 반열에 들어간 원술은 손견을 예주자사 겸 파로장군으로 삼는 표를 올리며 손견의 후방을 담당하게 된다.

2.4. 낙양 탈환

원술과 손견은 동탁 토벌전을 통해 마침내는 동탁을 격파하고 낙양을 수복하기에 이르러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기록을 보면 동탁 진영에서도 반동탁 연합군의 맹주가 원소, 원술 중 누구인지 헷갈렸는지 아예 원씨로 묶어서 칭하고 있다. 동탁 세력은 서영을 내세운 일전에서 한 번 손견에게 승리한 것을 제외하면 죄다 패하며 191년 여름 장안으로 도망친다.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관중 지역으로 들어가 버려 지형의 이득을 취한다.

삼국지에 주석으로 인용된 오서와 산양공재기 등에 따르면 손견은 동탁을 무찌르고 낙양을 수복한 뒤 동탁이 불을 지른 화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옥새를 발견했다. 이에 원술은 훗날 참칭할 마음을 먹고 손견의 아내로부터 옥새를 강탈했다고 하나 주석을 달았던 배송지는 오나라의 사가들이 시조인 손견을 미화하고자 날조한 기사로 여겼다.

하지만 후한서 원술전에도 이 내용이 남아 있고, 후한서 서구전에도 원술 사후 그 옥새를 조정에 돌려줬다는 기록이 있는 등 오직 오나라 사가들만이 이 내용을 쓴 건 아니었는데, 원술이 손견을 통해 수복한 낙양에서 조정의 기물을 얻었을 가능성 자체는 충분히 그럴 법 하게 들리는 이야기였으므로 이미 당대에 많이 퍼져 있던 전승이었을 것이다.

원술이 남양에 있을 때 그 호구가 수백만이었으나 원술은 법도를 세우지 않고 약탈을 일삼았으며, 원술이 사치스럽고 방자하였으므로 그 영지에 편안할 날이 없었고 백성들은 이로 인하여 항상 고통을 받았다고 후한서에 묘사되지만 이 경우는 신세력인 원술이 동탁군과 싸우기 위해 짧은 기간에 최대한으로 남양을 쥐어짰던 반증이라고 보는 편에 가까워 보인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원술이 전유해서 만들어낸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일단 손견부터가 장자를 죽인 이후 보급자유권을 발급했다고 봐야 한다. 손견은 이 역할을 원술에게 넘겼을 것으로 생각되며 딱히 원술의 지시가 있었다고 보기에도 애매하다. 상술되었듯이 동탁과 싸우기에는 머나먼 장사태수나 형주자사의 치소가 있던 무릉의 힘으로는 역부족이고 더 보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원술 역시 손견을 참소하는 말을 듣고 잠시 군량 공급을 중지한 적도 있는 등 최소한 이 둘의 결합은 이 시기에는 그렇게 견고해 보이지 않는다. 단 손견이 애걸해서 원술이 보급을 재개했다고 하는 것도 애매하다. 손견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고 밤새 말을 달려온 손견의 진정성도 있었다. 그리고 보급을 계속 끊어서 손견이 말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게 된다면 장사로 돌아가면서 다음에 누구와 싸우겠는가? 보급이 부족해서 못 싸운다고 하기에도 어차피 손견도 왕예, 장자를 죽이며 대의라는 이름하의 약탈은 기본 이상을 한다는 것은 보여줬다.

3. 이원전쟁

이 시기 유우, 원술, 원소, 공손찬 등에게서 벌어진 사건의 타임라인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아무튼 동탁이 깨져서 장안으로 도망친 이후는 맞는 것 같다. 정확히 언제쯤인지 모르겠지만 대충 낙양 탈환 시기 정도에 연합군의 맹주이자 원술의 이복형인 원소는 동탁이 유협을 내세워 수립한 조정을 괴뢰정부로 간주하며 유협 대신 유우를 옹립하여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고자 했다.

당대 한족들은 동탁의 정권 장악과 폐립을 명백한 쿠데타로 인식했으며 쿠데타로 추대된 헌제의 정통성 또한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던 데다, 호족들에게 추대된 광무제라는 전례도 있었던 만큼 명망있던 황족이었던 유우의 추대안은 여론의 상당한 지지를 받기도 했다. 원술은 헌제의 정통성을 옹호하며 원소의 유우 추대 시도를 정면으로 논박했고, 원소는 그러한 논란 속에서도 한복과 함께 유우를 옹립하였으나 유우 본인이 극렬히 거절하는 바람에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유우 또한 동탁과 헌제, 연합군 측에서 제각기 러브콜이 이어지는 명망높은 황족이자 유주를 틀어쥔 실력자로서 요구되는 정치적 식견이나 권력의지가 없는 무능한 인물은 전혀 아니었고 그는 단지 원소를 비롯한 사족들의 이해관계 속에 추대되어 그들의 기대에 따라 이용당할 생각이 없었을 뿐이었다.

아무튼 유우는 전주를 사신으로 보내 황제를 알현하게 하며 헌제의 조정과 인연을 맺었다.

유우의 아들인 유화가 장안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으므로 헌제와 그 측근들은 유화를 유우에게 보내 장차 장안을 탈출하여 동탁에게서 벗어나 유우의 보호를 받고자 했다. 유우는 이 일에 상당히 공을 기울였는데, 그는 헌제를 부정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기보다는 일단 헌제를 인정한 채 그의 보호자이자 강력한 종친 권력자로서 정치행보를 이어나갈 구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신으로서 헌제 측의 계획을 유우에게 전달하던 유화는 무관을 나와 남양에 도달했고 원술을 만나 그 상황을 경계 없이 알려주었는데, 원술은 유우의 계획에 협조할 것을 밝히며 유화를 붙잡아둔 채 유우가 보내온 군사가 합류하면 같이 서쪽으로 진군하기로 했다.

이에 유우는 원술에게 수천의 기병을 보내 지원했으나, 마침 유우와 마찰을 빚고 있던 유주 현지의 전쟁영웅 공손찬은 원술에게 유화를 억류하고 기병대의 지휘권을 빼앗을 것을 권했고, 1천의 기병과 이를 지휘할 지휘관 겸 인질로서 사촌동생 공손월을 원술에게 보내 원술을 지원했으며, 원술은 공손찬의 제안을 받아들여 유우의 헌제 추대계획을 무너뜨렸고 이 일로 인해 유우와 공손찬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고 말았다.[13]

후한서와 오록 등의 기록에서는 이 무렵 원술의 행보를 두고 일찍부터 황제가 되려는 무군지심을 품었기에 유우 같이 장성하고 무게감있는 황족이 추대되면 혼란이 줄어들고 질서가 바로잡힐 것을 염려했다고도 하나, 한편으론 기세등등하게 전국에 세를 떨치다 초전에 패배한 뒤로는 의욕적 전투 없이 지리한 대치만 이어지며 궐기의 주모자인 지방관들과 그 주변에 모인 명사 그룹들을 중심으로 관동지역의 대립황제 추대의 방향이 잡혀가던 것이 반동탁군의 현실이기도 했다.

원술은 반동탁 봉기의 대의라는 추상적 가치를 앞세워 유협패와 황건적 잔당, 종적떼를 비롯한 후한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을 적극적으로 정치에 끌어들여 완장을 채워줌으로서 기존 공권력을 무너뜨리며 인근 지역을 장악하며 모험적인 정치행보를 이어가고 있었다.[14]

시기상 언제인지, 원술이 유화를 억류한 이후인지 언제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15] 아무튼 원소 역시 원술에게만 대공을 넘겨줄 생각은 없었는지 견제를 넣기 시작한다. 단양태수 주흔은 원술의 행보를 노골적으로 혐오스러워 했으며, 원소는 주흔을 포섭함과 동시에 주흔의 동생인 주앙 혹은 주우를 예주자사로 임명했다. 주씨 형제는 원술이 주둔하던 노양과 낙양 사이의 중간 거점인 양성을 장악한다. 원술에게 억류되어 있던 왕예의 후임 형주자사 유표 또한 양양의 호족이었던 채씨와 괴씨 가문의 협력과 추대를 통해 원술에게 호응해 자경단 활동을 하던 종수 55인을 연회 자리에서 붙잡아 참수하고 그 수하의 잔당들을 정리한 뒤 원소와 연합하며 자립 의사를 분명히 했다.

원술은 이러한 사실에 대단히 분개하며 천출인 원소에 대한 마음을 유감없이 드러내어 그가 집안의 노비(家奴)이며 원씨도 아니라고 비방하며 어리석은 자들이 나를 따르지 않고 비천한 종놈을 따른다고 역정을 내기도 했으나 이는 원소의 개인적 콤플렉스를 건드리며 명예를 실추시키고 화를 돋군 것 외에는 그리 이익될 것이 없는 행동이었다.[16]

원술은 낙양을 포기한 채 손견과 공손월을 앞세워 반격에 나섰고 여러 차례의 싸움 끝에 승리하여 양성을 탈환했으나 공손찬의 사촌동생 공손월이 전투중 유시에 맞아 사망하면서 공손찬은 모든 책임이 원소에게 있다고 선언하며 원소와 적대하게 된다. 이 무렵 반동탁 연합군은 완전히 결딴나서 원술은 공손찬 등과 편먹고 원소는 유표 등과 편먹고 서로가 전쟁을 벌였다.

원술은 손견을 통해 주씨 형제를 몰아냈고,[17] 공손찬은 원소를 계교로 몰아넣었으며 흑산적의 대두령 장연과 남흉노 선우 어부라 등이 반원소 진영에 가세하던 192년 초의 이원전쟁 정국에서 원술 진영의 기세는 대단히 높았고 원술은 주씨 형제를 격파한 기세를 타고 남쪽에서 반기를 든 유표에게도 철퇴를 내리려 했으나 원술의 기세는 여기까지였다.

원정군의 수장을 맡은 손견이 서전을 유리하게 이끌며 양양에서 농성하는 유표를 포위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손견은 유표가 별동대[18]를 성 밖으로 내보내 기각지세를 시도하는 것을 저지하려다 너무 깊이 추격하는 바람에 황조군의 공격을 받고 처참하게 죽어버렸고, 원정군 지휘관이었던 손견이 끔살당하자 전세는 뒤집혀져 원술의 침입을 격퇴한 유표는 한수 이남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굳히게 된다. 반면 손견을 잃은 원술은 남양에서 다시는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되었고, 원소를 밀어붙이는 듯 했던 북쪽의 공손찬 역시 계교의 회전에서 참패하는 이변 끝에 원소에게 연이어 밀리면서 원소의 영향력이 미친듯이 확대되고 있었다. 이에 공손찬은 서주목 도겸을 반원소 진영으로 끌어들이며 발간[19]에 주둔하게 해 원소를 압박하는 한편 유비를 고당에, 선경을 평원에 주둔시키며 원소를 압박했으나 원소는 조조와 함께 이들을 모조리 격파한다.

3.1. 광정전투와 형주 상실

손견이 죽고 공손찬이 연이어 패배하면서 192년 내내 반원소 진영의 부진이 이어지는 상황이 되자 이듬해인 193년에 원술은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 마침 원소와 전면전을 벌이고 있던 흑산적장연, 남흉노어부라와 연계하며 당시 원소의 임명을 통해 세력을 형성한 원소계 군벌이었던 조조의 근거지인 진류를 공격했다.

그 동안 군사적으로는 주로 손견에게 의존해 오던 원술이 처음으로 대규모 군사 작전을 펼친 것이고, 그것도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형주 방면을 정리하자마자 감행하는 매우 모험적인 행동이었는데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원소계 군벌인 조조가 연주를 기반으로 황하 이남에 세력을 구축하는 것은 원술과 공손찬에게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연주에서 조조의 기반이 아직 취약한 틈을 타 조조를 공략하는 것이 유리했다. 또한 원소에게 밀리고 있던 공손찬을 지원하고 조조를 몰아낸다면 흑산, 흉노와 힘을 합치고 공손찬과 함께 남북으로 원소를 압박할 수 있었다.

이에 더해 흔들리고 있는 자신의 세력기반을 재정돈하고 연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핵심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긴다는 측면도 있다. 이미 원술은 무분별한 수탈로 민심을 잃었고, 손견이 죽은 뒤로 남쪽에서 유표의 압박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원술의 영향력은 형주,예주뿐만이 아니라 양주까지도 미치고 있었다. 만약 연주를 장악한 뒤 이를 기반으로 내부를 공고히 정돈하기만 한다면 사실상 황하 이남 전역을, 더 나아가 패권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이에 더해 원소가 마음대로 임명한 짭퉁 연주자사 조조에 의해 임지에 부임하지도 못하고 쫓겨난 조정의 정식 연주자사 김상이 원술에게 망명했던 사건은 원술에게 매우 중요한 개입 명분을 제공했다.

한편 이때 장안에서는 동탁이 여포에게 죽고 그는 이각, 곽사에게 쫓겨나자 동탁을 죽여 원씨의 원수를 대신 갚아줬다는 명목으로 원술에게 의탁하는데 삼국지 여포전에 따르면 원술은 여포의 언행이 자주 바뀌는 것을 꺼려서 받아주지 않았다고 하며 후한서 여포전에서는 원술이 처음에는 여포를 매우 후대했지만 여포가 동탁을 죽인 공을 믿고 마음대로 군사를 풀어 노략질하다가 원술의 미움을 사 쫓겨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마침 손견을 잃어 군사력에 공백이 생긴 상태였던 원술은 여포에게도 잠시간 손견의 역할을 기대했던 듯 하지만 상상 이상의 인간이란 생각이 들자 쫓아낸 것으로 보이며, 여포는 원술의 밑에 있을 수 없게 되자 원술과 대립관계였던 원소에게 의탁하며 기병대장으로 많은 공을 세우지만 여기서도 버릇을 못 고치고 방자하게 굴며 약탈을 일삼다 쫓겨나게 되는데, 이때 생긴 원술과 여포의 악연은 훗날 양자가 공멸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193년 초, 원대한 전략을 구상한 원술은 마침내 진류로 북진해 올라갔다. 조조가 도겸과 싸우며 견성에 주둔하는 틈을 타 배후를 친 진류군에 진입해 본인은 봉구현에 주둔하고 장수 유상이 광정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반격에 나선 조조가 유상을 치자 친히 나서 이를 구원하며 조조 본대와 맞붙다 크게 패해 본영을 둔 봉구로 돌아가는데, 이때 어지간히도 크게 패하였는지 조조의 추격이 계속되자 싸워보지도 않고 양음으로 후퇴해 성을 점거한 채 농성했고, 조조가 둑을 터뜨려 성에 물을 끌어들이자 결국 주 경계를 넘어 예주 북부의 양국으로 달아났으며, 조조가 양국까지 추격해 오자 아예 예주를 벗어나 양주의 구강군으로 달아났다.

이후로도 예주 내에서 원술의 영향력이 한동안 유지되고 있었는데도 조조가 예주 북부에 진입하는 순간 원술이 아예 예주를 벗어나 양주 구강군으로 가버린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미 남북으로 조조와 유표의 압박을 받고 있던 데다 특별히 방어선으로 삼을 자연경계선이 마땅치 않은 예주의 지형상 예주를 전장으로 전면전을 시작하면 지켜내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후술될 영웅기의 기록을 감안하면 진우의 존재를 통해 양주 또한 자신의 간접적 영역권이라고 생각하던 원술이 진우의 조력을 기대했을 가능성이 높다.

원술의 전략은 좋게 보면 지금까지의 열세를 만회해 자신이 황하이남 전역을 아우르고 서쪽으로는 장연과 어부라가, 북쪽으론 공손찬이, 동쪽으로는 도겸이 제각기 원소를 사방에서 완전히 포위하고 압박할 수 있게 되는 원대한 계획이라 볼 수도 있지만, 잘 안되면 예주에 갇혀 형주에서는 유표, 연주에서는 조조 식으로 원소계 군벌들에게 완전히 역포위, 역으로 당하는 형국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었고 결과적으로도 그렇게 되고 말았다.

광정의 패배 이후로도 적어도 196년 무렵까지 원술은 예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으나, 남양은 더 이상 지켜내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형주의 패권을 유표에게 온전히 넘기게 되었다.

3.2. 양주 장악

원래 양주자사는 진온이었는데 병으로 죽고 양주 일대에 정치적 공백이 생기자 원술은 진우를 보내 양주자사로 삼았었다. 그런데 정작 원술이 패퇴하자 진우는 과거 신세졌던 원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진우의 문전박대에 분개한 원술은 친히 진우를 공격했고, 결국 진우는 하비로 달아났다.

삼국지 원술전이나 후한서 원술전에서는 진온이 원술에게 죽음을 당한 것으로 나오나 왕찬이 작성한 영웅기에서는 위의 내용이 적혀있다. 이에 대해 사마광자치통감을 편수하면서 위의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지적하였는데 왕찬이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기록의 신뢰성을 더 높이 산 것 같다.

어쨌든 진우를 격파하며 얻은 세력기반을 바탕으로 원술은 단양태수 주흔을 쫓아내고[20] 주흔의 동생들 또한 손분을 시켜 격파했으며 [21] 원소의 편에 서서 양주자사가 된 사촌형 원유 역시 격파해 쫓아냈다.[22] 그는 북양주의 패권을 잡고 서주백(伯)까지 자칭하는 등 다시금 화려한 재기에 성공하였다.

당시 동탁이 죽고 정권을 잡고 있던 이각곽사는 원술과 손잡을 생각을 하여 태부 마일제를 보내 좌장군과 양적후의 벼슬을 내렸다. 원소가 헌제를 동탁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해 완전히 무시했던 반면 원술은 적어도 유협을 정통으로 인정하는 만큼 최소한의 타협점은 있고, 따라서 잘하면 원술의 도움으로 관동지역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술은 관직만 받았을 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절로 파견된 태부 마일제를 억류하고 협박해 삥을 뜯었다.

원술은 마일제를 억류한 뒤 부절을 빼앗고 자신의 부하들을 천거하라고 협박하는데, 군웅할거의 시대였다지만 호족들을 포섭하며 일정한 세력권을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합법적이거나 적어도 합법을 가장한 방식에 따른 체계가 필요했고, 무력에 의한 지배만으로는 이러한 권위를 인정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관직은 매우 중요한 명분이었다.

하지만 당시 황제와 동탁 정권은 장안에 고립되어 있었고 정통성 측면에서도 최악이라 각 지방을 장악한 채 군벌화된 지방관들에게 정치적으로 완전히 무시당하는 상황이었기에 각지의 군벌들은 일단 관직을 임시로 임명 혹은 자칭하고 조정에 보고한다는 형태를 취한 것인데 장안 조정의 관점에서 볼때 이들은 반란군이었고, 반란군 수괴의 하나가 자기 사람을 천거하는 표를 올린다고 해서 어떤 직을 내릴 이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애초부터 승인받을 가능성이 없는 것이었고 표면상의 요식행위에 불과했으나, 자기 명의로 임의의 관직을 하사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반역자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므로 반동탁을 외치며 조정과 교류하지 않던 군벌들도 일단 꼬박꼬박 표를 작성해 자신들의 임용행위가 비상 상황에서의 일시적 인사 조치임을 가장하며 합법적 형태의 관직임명을 흉내내고 있었는데, 원술은 일단 관직상의 권위는 어마어마하게 높았던 마일제를 구금하고 태부의 권한으로 자기 부하들을 천거해 관리로 삼도록 하여 부하들에게 내리는 관직의 권위를 포장하며 부하들의 충성심을 얻어내려던 것으로 보인다.

마일제는 유명한 학자인 마융의 후손으로 덕망이 높은 대신이었는데, 원술에게 수치를 겪는 것에 걱정하고 성내다가 얼마 안 있어 죽는다. 이때 원술의 협박으로 마일제의 천거를 받은 원술의 부하들 중 이름이 기록된 게 주치손책, 화흠인데, 일단 화흠전과 손책전에서는 마일제가 정말로 그들을 높게 평가해서 벼슬을 준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적당히 걸러서 봐야 할 것이다.

마일제를 억류하면서 조정과의 관계도 냉각되었는지 조정은 원술의 양주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유요를 양주자사로 임명해 원술과 대립하게 했다. 유요는 원술이 점거한 북양주를 피해 장강 이남에서 장강을 끼고 1년간 항거하지만 194년에 손책에게 패했고, 장강 이남의 세력들도 차례로 손책에게 격파되면서 원술은 다시금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3.3. 서주 침공

193년에 조조에게 패한 원술이 양주로 달아나 양주자사였던 진온 혹은 진우를 격파하고 북양주를 점거한 채 서주백을 자칭했으며 마일제를 억류했다는 것은 삼국지와 후한서 원술전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나 이후 원술전의 기술은 곧바로 원술의 칭제로 넘어가기 때문에 그 사이의 행적 역시 다른 인물들의 열전에서 언급되는 기록이나 정황으로 본전의 공백을 채울 수 밖에 없다.

원술이 북양주를 점거한 이후 서주백을 자칭하며 서주의 지배권을 주장한 것에 대해 서주목 도겸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원술전이나 도겸전에서는 딱히 나타나지 않으나 여범전에서는 여범이 손책의 지시로 오국태를 맞이하러 광릉으로 가자 원술의 끄나풀이라고 생각해 붙잡아 고문하는 등 원술에 대한 경계심을 강하게 드러내는 모습이 나타난다. 한때 원술과 도겸은 반원소, 반조조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제휴하기도 했지만 원술이 근거지를 서주와 인접한 북양주로 옮긴 이후 서로 이권이 충돌하게 되었고 원술의 서주백 자칭을 기점으로 불화가 표면화되며 대립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4년에 도겸은 유비에게 자신의 지위를 넘긴 채 병사했고, 유비는 원소에게 자신을 서주목으로 임명해 줄 것을 정중히 요청하면서 수하를 자처해 옛 동맹들을 버리고 서주와 함께 친원소 진영으로 완전히 갈아탔으며, 195년 시점에 원술은 서주 침공에 비협조적으로 나오던 여강태수 육강을 2년의 공성 끝에 축출했다. 원술은 196년부터 유비가 지키는 서주를 공격했으나 서로 이기고 지는 것을 반복하면서 결정적인 승부를 가리지 못했는데, 마침 유비 진영에서 근거지인 하비를 지키고 있던 장비가 하비상 조표와 대립하면서 내전이 일어났고, 여기에 개입한 여포가 단양병들의 추대로 하비를 손쉽게 장악하자 급보를 들은 유비는 황급히 귀환했으나 하비에 도착하자마자 사기가 떨어진 군사들이 탈영하면서 공성의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등을 돌려야 했으며, 유비는 광릉을 거점으로 세력을 재조직하고자 했으나 거듭된 원술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면서 군량도 떨어지고 군중에 식인이 발생할 정도로 곤궁해진다.

이때 원술은 여포를 끌어들이기 위해 승리의 공을 여포에게로 돌리며 여포의 하비 장악을 부추기고 물자 지원을 약속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으며, 크게 패하고 광릉에 고립된 유비의 숨통을 끊기 위해 기령을 보냈으나 여포는 서주목을 자칭하고 유비의 투항을 받아들이며 기령을 막아서는데, 여포가 유비를 살려준 것은 원술이 장패와 같은 태산의 군벌들과 연합해 자신을 고립시키며 압박할 것을 우려한 것이라는 것이 삼국지와 후한서 여포전에 동일하게 나타나나 후한서 여포전에서는 이와 별개로 여포가 유비의 투항을 받아들인 것이 원술이 군량을 보내다가 다시 끊은 것에 분노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여포와 틀어지게 된 원술은 학맹진궁을 사주해 여포에게 반기를 들 것을 부추겼지만 학맹의 반란은 고순의 활약으로 진압되는데, 원술은 이에 두려워하며 여포에게 서로 사돈을 맺을 것을 제안했고 여포는 이를 받아들인다.

한편 삼국지 선주전에서는 유비가 196년에 원술과 싸우던 중 조조를 통해 진동장군,의성정후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무제기에 따르면 진동장군은 조조가 196년 6월에 헌제를 영접하는 과정에서 받은 직책이며 같은 해 9월에 조조가 대장군이 되기 때문에 이 일이 빨라도 조조가 헌제를 옹립하여 조정을 장악한 196년 9월 이후의 일로 여겨지나 삼국지 여포전에서는 이미 유비를 내쫓고 서주목을 자칭한 여포가 원술의 사주를 받은 학맹의 반란을 진압한 시점이 196년 6월로 명기되어 있기 때문에 적어도 둘 중에 하나는 명백하게 시점이 틀렸다는 결론이 도출되는데, 무제기에서는 여포가 서주를 취한 것을 196년에 일어난 일로 뭉뚱그리고 있어 연도 외에는 정확한 순서 파악이 어렵다.

원술은 오랫동안 서주의 지배권을 탐내고 있었고 배후의 위협들을 차례로 제거한 이후 야심차게 친정에 나섰지만 순욱전에 나타나는 순욱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유비 치하의 서주는 도겸 시절의 패배를 거울삼아 작정하고 군비에 치중했기에 쉽게 넘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며, 유비 역시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원술은 여포에게 쓴 편지에서 원술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천하에 유비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라며 낭패감을 드러내는데, 당시 유비는 지명도가 그리 높은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대 패권다툼의 메인 플레이어였던 원술의 시점에서는 유비를 철새 행보로 벼락출세한 듣보잡 뜨내기 정도로 우습게 여겼던 듯하다. 원술은 젊어서부터 최고 명문가의 적통으로 후한의 명문가 인맥이 두텁고, 유협집단의 우두머리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깡패나 도적, 임협들도 잘 알고, 효렴으로 젊어서 쉽게 벼슬길에 오른 원술인 만큼 아마 한다 하는 인물들은 모두 꿰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유비가 실제로 하비상 조표를 비롯한 내부 반대파들의 저항으로 인해 쫓겨났던 만큼 명성이 낮고 굴러온 돌이었던 유비의 정치적 입지가 불안정했을 것이라는 분석은 성립되며 원술도 이를 이용하려 했던 측면이 나타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유비의 불안정한 입지를 찔러 서주를 장악하는 과실을 따먹은 것은 원술이 아니라 여포였고 여포는 하비를 장악하자 곧바로 서주목을 자칭하며 상황이 원술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였기에 원술은 잔뜩 공들여 친정을 나서서 고전 끝에 기껏 유비를 격파하고도 정작 원하는 성과를 전혀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원술전 본전에서는 이 무렵의 행보가 완전히 생략된 채 칭제를 향한 원술의 빌드업이 중점적으로 묘사되는데 사서상 묘사되는 원술은 이때부터 점차 비정상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3.4. 황제 참칭

이 이전인 195년, 이각·곽사의 무리에게 핍박받던 헌제가 장안을 탈출했는데, 당시 한참 잘 나가고 있던 원술은 이를 보고 한 황실이 완전히 몰락했다고 판단해서 원씨 적통의 위광을 믿고 황제를 참칭할 마음을 먹었으나 부하들이 만류하자 그만두었다.

하지만 197년, 원술은 예언서의 내용을 명분 삼아 결국 천자를 자칭했다. 국호는 중(仲).[23] 그와 더불어 자신의 거성인 수춘이 있는 구강군을 회남윤(淮南尹)으로 고쳤다.[24][25] 원술의 부하들은 미친 듯이 반대하였으나 원술이 우격다짐으로 강행하였다. 원술은 황제로 즉위하자 황제에겐 대장군이 꼭 있어야 했으므로 부하 중 장훈교유를 자신의 제국인 중나라의 대장군에 임명했다.

원술이 황제에 오른 근거가 완전히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 한나라 시기의 유학은 후대의 유학과는 그 모습이 크게 달라서 참위와 오행을 중시하였으며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미신에 가까웠다. 사실 공자, 맹자, 순자로 대표되는 선진유학 시기에 이미 유학사상은 상당히 종교적 성격이 옅은 편이었다.[26] 그러나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한 차례 타격을 입은 후 복원이 이루어진 한조 시기에, 동중서 등이 상제(上帝)의 권위를 강화하고 오행론을 적극적으로 접목하여 유학의 강령을 우주적 계시화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이것이 민간의 도참 및 민간 신앙과 이상하게 짬뽕이 되기 시작한 것.[27] 말하자면 후한이 세워진 후로는 종래의 도교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며 유학이 상당히 많이 변화하게 되었다.[28]

물론 당대에도 이러한 기조를 비판하는 정현이나 노식 등 고명한 후한 시기 유학자들이 있었지만, 아직 후대의 당나라처럼 과거 제도를 통해 국학으로서의 유학이 어느 정도 체계화되거나 학문의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리는 풍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행이니 도참이니 주역이니 하는 것들을 '제법 그럴싸하게' 우길 말빨이 된다면 그것도 유학의 한 해석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던 셈이다.[29] 아무튼 태평도오두미도니 하며 후한 말은 도교가 크게 흥성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공자 왈 맹자 왈의 시대가 아니었다.

일부 지배층이나 식자층은 공자 왈 맹자 왈 순자 왈 증자 왈 할 지 몰라도, 일반적인 백성들은 아이고 신선님 아이고 선녀님 하는 도교 시대였으며, 심지어 지배층조차도 손자에 주석을 달았던 조조나 법가나 군사 계열 책의 독서를 권장한 유비 등 후대에 비하면 유교 경전을 그리 중시하지 않았다.[30] 이러한 분위기는 군웅할거와 삼국 정립 시기의 현학을 거쳐 청담사상으로 이어진다. 후한 말~위진남북조 시대까지는 대체로 도교가 사실상의 헤게모니로 작용했고, 불교는 부도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던 시기였으며 성리학과 양명학이 생기고 유교 철학이 정립되려면 수백 년은 지난 송나라~명나라 때까지 시간이 흘러야 했다.

여튼 후한 말엔 오행상생이 유행하여 한나라를 불에, 순 임금을 흙에 비정하는 기조가 대세였다. 오행상생에 따른다면 한나라의 뒤를 이을 자는 흙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야[31] 하는데, 마침 원씨가 규성(嬀姓), 즉 순 임금의 후예였다.[32] 지금의 시각으로 본다면 도대체 이게 말이 되나 싶지만 고대엔 이런 게 명분으로 먹히는 때였다.[33] 다만 한나라를 대체할 자가 원술일 거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을 뿐.

3.4.1. 원술의 칭제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

하지만 원술도 후한 조정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조조보다 앞서서 협천자를 시도했다고 보는 견해는 한국의 삼국지 팬덤에서는 꽤 오래 된 떡밥이다. 이는 나름의 사료적 근거도 뒷받침되고 있는데,〈조진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위략에선 이 무렵 조조가 원술의 무리와 치열하게 싸웠고 이때 조진의 부친인 진소가 조조 대신 죽었다고 하며 <무제기>에서는 조조가 헌제를 맞이하기 위해 서쪽으로 가는 과정에 예주에서 원술이 임명한 진국상 원사를 항복시켰다는 기록이 있고 원사의 투항을 받은 후 조조는 여남 일대의 황건적 잔당인 하의, 유벽, 황소, 하만 등을 격파하는데, 연의에서 이들은 여포와 싸우는 도중에 군량이 모자라게 된 조조에게 공격당에 물자를 강탈당하는 역할로 나오지만, <무제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처음에는 원술을 따르다가 손견이 예주자사가 되자 손견의 지휘 하에 활약하며 원술에게 협력해 왔던 범(汎) 원술계 군벌들이었다.[34]

이에 더해 유협의 측근들도 원술과 상당부분 연계되어 있었다는 것도 주목할 만 한데, 위장군 동승은 원술과 연합해 조조의 협천자를 저지했으며,[35] 조조가 황실을 장악하면서 쫓겨난 한섬, 양봉은 원술에게 의탁했다. 양표 또한 원술의 인척이며[36] 조조가 훗날 양표를 실각시키는 표면적인 이유도 원술과 내통했다는 죄목이었다. 게다가 원술은 분명히 참칭 이전까지는 유협의 정통성을 결사옹호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동승 같은 헌제의 측근들이 보기에 원소의 끄나풀로 진의가 의심스러워 보였을 조조와 달리 원술은 일단은 원소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친 헌제파 포지션이었다.

비록 원술이 마일제를 억류한 채 장표에 서명이나 하는 기계로 만들어 조정의 기대를 한 차례 배신하긴 했지만, 조정의 입장에서 조정의 정통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던 원소나 원소계 세력들을 원술보다 긍정적으로 인식했을 리가 없으니, 이들에게 의심을 거두지 않으며 장양이나 원술 같은 비 원소계면서 수도권과 인접해있는 세력들을 우선적으로 포섭하고 이들을 통해 정국 안정을 생각하는 것은 상식적인 범주의 판단이었고 <동소전>의 기록을 보면 196년 시점까지도 조조는 원소의 끄나풀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동승이 원술과 연합해 조조를 저지했다는 <무제기>의 기록은 조정의 입장에서 군벌들 중 그나마 대화라도 통할 것 같은 상대가 원술이라 낙양 환도를 앞둔 시점에서 낙양과 인접한 예주에도 여전히 일정부분 영향력을 유지하는 원술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원술도 이런 여론에 편승해 조조를 견제했으나 조조는 진국상 원사의 항복을 받고 하만, 황소, 하의, 유벽 등 원술계 군벌, 토호들을 군사적으로 박살내며 이와 동시에 조정에 선물공세를 퍼부어 조정의 경계를 풀고 한섬과 동승 간의 불화를 틈타 동승의 요청으로 낙양에 진입하면서 협천자 레이스의 최종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조조가 이토록 협천자를 위해 196년 내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동안 원술의 행보는 본전에서는 확인조차 되지 않으며, 동승과 연계해 조조를 견제했다는 <무제기>의 기록과 서주를 두고 유비와 드잡이질을 벌이다 여포가 서주를 장악하자 학맹과 진궁을 회유해 여포를 축출하려 했고 이 계획이 실패한 후 여포와 사돈을 맺을 것을 제안했다는 <선주전>, <여포전>의 기록뿐이다.

본전에서는 이 행적이 생략된 채 바로 칭제 메타로 넘어가는데, <원술전> 본전에 생략된 정황들을 종합하면, 원술은 적어도 196년 시점까지는 조정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며 예주에 여전히 남아 있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통해 조조의 조정 장악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더욱 대담한 공세를 펼쳐 오는 조조에 맞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예주로 향해 자신의 지지세력들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맞대응하기 보다는 지지세력들을 방치한 채 서주백을 자칭한 이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서주 원정이라는 대형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등 안이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조정 장악은 물론 서주 장악이라는 전략적 목표 달성까지 전부 실패하는 최악의 형태로 스텝이 꼬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유비가 조조에게 진동장군, 의성정후의 작위를 수여받은 것 또한 조조가 순조롭게 조정을 장악하는 동안 원술의 어그로를 잔뜩 끌며 시간을 벌어준 것에 대한 논공행상의 성질을 가진다고 볼 수 있고, 원술이 서주 장악이 실패하고 유비 축출까지 가로막히며 여포에게 물을 먹었음에도 여포와의 정면 충돌을 극히 꺼리며 학맹, 진궁 등을 부추기는 정치적 공작을 통해 여포를 처치하려 했고 이 시도가 실패하자 아예 여포를 두려워하며 여포에게 사돈을 제의하는 등 저자세로 나오는 것도 앞뒤가 들어맞게 되는데, 결국 이 시점에서 황실은 조조가 장악하게 됐고 원술은 앞서 언급된 마일제 능욕 사건만으로 충분히 책을 잡혔는데 황실을 자신이 장악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적대 세력인 조조에게 황실을 내 주었으니, 어차피 그때까지 고수해 왔던 충신의 이미지는 날아가고 한순간에 역적으로 지명될 것이 자명한 상황이었으므로 여포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원술 나름의 입장에 따라 호의적으로 해석할 경우 원술의 칭제는 이미 붙잡을 길이 없어진 충신 이미지를 포기한 채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며 후한 체제와의 결별을 선언해 후한의 신하를 자처하면서 조정에 거역하는 기존의 논리적 모순을 바로잡고, 도참사상을 통해 지배의 당위성을 세우고 명문 원씨의 적통이라는 브랜드 네임으로 부귀영화를 보증해 지지세력을 최대한 결집시키는 방책으로 볼 수 있는데, 엄청난 모험수이긴 하지만 전혀 일리가 없는 생각이라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원술이 칭제로 단결시켜려 했을 주요 지지세력 중의 하나인 손책은 후술하겠지만 원술이 칭제하자마자 독립해버린다.[37]

4. 이원전쟁의 패배와 끝없는 몰락

한때 원소의 유우 추대를 비난하고 헌제의 정통성을 옹호하며 낙양을 수복하고 대 원소 포위망을 구상해 실현해낸 반원소 맹주로서 위세를 날렸던 원술은 결국 원소의 수하였던 조조가 장악한 헌제와 중앙정부에 의해 역적으로 선포되었으며 공손찬과 같은 반원소 동지들도 비슷한 운명을 맞아 고립된 채 무너져 갔고 원소와 친원소 거물인 조조, 유표는 제각기 막부를 창설하고 각각의 관할구역을 나눠 사실상의 논공행상을 시작했다.

원술은 조조의 협천자를 기점으로 이원전쟁에서 회생의 여지 없이 완벽히 패배했으며 역적으로서 단죄되는 길이 남아있을 뿐이었고,[38]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칭제를 통해 산하 핵심세력이던 손책과의 결속을 굳게 하며 여포와 사돈을 맺어 그를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칭제 직전 시점에서 강남을 장악한 손책은 원술이 거리낌없이 아들처럼 대하던 관계였고, 조조와 크게 척을 지고 있던 여포 역시 원술과 사돈을 맺기로 약속했다. 이원전쟁의 승리자인 원소, 조조, 유표끼리의 서열다툼은 벌써부터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으며, 원래는 원술 본인이 헌제의 정통성에 가장 옹호적인 입장이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헌제가 정통성에 약점이 뚜렷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단지 조조가 근거지에 모셔둔 채 정부 재건을 선언했을 뿐이었으므로, 원술 자신의 주요 지지세력들과 동맹자들이 폭넓게 공유했던 반골적 정서와 원술이 좋아하던 신비주의를 통해 적당한 비전을 내세울 수 있다면 그것이 설령 야합일지라도 이념을 이용한 것이므로 상당한 결속력을 가질 수도 있었으며, 이미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 가던 태평교도들을 원술은 능수능란하게 활용했던 바 있었다.

조조가 단결된 원술 진영을 무너뜨리지 못한 채 고전한다면 원소와 유표는 조조의 건안 정부에서 이탈하거나 스스로 조조의 역할을 대체하려 했을 것이기에 원술의 운신폭은 더 넓어진다. 원술의 칭제 전략은 무모했으나 손책과 여포가 어떻게 나오는가에 따라서 중국의 패권은 몰라도 잘하면 훗날의 오나라가 그랬듯 장강을 중심으로 한 할거 정권까지는 노려볼 만 했다.

그러나 손책은 원술의 칭제가 본격화되자 사실상의 절연장을 보내며 이탈했고 여포 또한 원술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4.1. 손책의 이탈

이때 손책은 원술에게 경고장의 형식을 지닌 서한을 원술에게 보내고 칭제하지 말 것을 진언했으나 원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손책은 원술과 교류를 끊으며 이탈하게 된다. 이 서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은(殷)나라 탕(湯)왕이 하(夏)나라 걸(桀)왕을 토벌할 때 '하나라는 죄가 많다' 하였소. 주나라 무(武)왕이 은나라 주(紂)왕을 정벌할 때는 '은나라는 징벌이 너무 무겁다' 하였소이다. 이 두 사람이 아무리 성스러운 덕이 있다 할지라도 가령 그때 걸과 주에게 도리를 잃은 과오가 없었더라면 그들을 핍박해 천하를 취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오.

황제께서는 천하에 악한 일을 한 바가 없소이다. 단지 어리고 세력이 약해 강한 신하에 의해 협박을 받고 있는 것으로 탕왕과 무왕의 시절과는 사정이 다르오. 비록 동탁이 탐욕스럽고 도리에 어긋나고 교만하고 황실을 업신여기고 욕심이 끝이 없었으나 그조차도 황제를 폐립한 후 스스로 자립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소.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천하의 사람들이 다 한마음으로 그를 미워했는데 항차 그의 잘못을 본받고 나아가 더 심한 짓을 하려는 것이오?

또 듣기로는 어린 군주가 지혜롭고 총명해 이미 덕을 이룬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오. 천하 사람들이 비록 천자께 은혜를 입은 바 없음에도 마음을 천자께 돌리고 있소이다. 사군께서는 5대에 걸쳐 재상의 직을 역임하고 재상으로서 한나라를 보필하여 그 영예와 은총의 크기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오. 마땅히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지켜 왕실에 보답함으로써 주공 단(旦)과 소공 석(奭)의 아름다운 전례를 밟기를 바라는 것이 사군을 따르는 자들이 소망하는 바이오.

요즘 사군께서는 사람들이 도참과 점술에 의거해 떠드는 말에 혹해 망령된 글을 끌어다 붙이면서 참으로 아첨하는 말만 아름답게 여기고 계책의 성공과 실패를 고려하지 않고 있소이다. 성패는 예나 지금이나 신중을 기해야 하는 바이거늘 어찌 깊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리고 논박하는 것은 증오를 불러 일으키는 법이나 진실로 사군의 밝음에 도움이 된다면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소이다.

원술은 서주를 치면서 오경을 광릉태수로 삼았고, 칭제하면서 손분을 회남윤으로 삼았으나 손책이 이들에게 서신을 보내 원술과 관계를 끊은 것을 알리자 이들 또한 원술에게서 이탈해 손책에게로 가버린다.

손씨 일족 중에서는 그나마 손향만이 유일하게 잔류를 택함으로서 원술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고, 원술은 손향을 정남장군으로 삼았으나 그는 이후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수춘에서 죽었다.

원술은 한 황실이 몰락하리라 생각했지만 조조는 말할 것도 없이 그 때까지 헌제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던 원소조차도 헌제가 내린 대장군의 직위를 받아들임으로써 헌제의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여주었고, 손책 또한 원술에게서 이탈해 헌제를 옹립한 조조에게 정치적으로 줄을 대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표면상이나마 황실의 위세는 더 높아지게 되었다.

4.2. 여포의 이탈

삼국지 원술전에 따르면 원술은 당시 패국상을 지내고 있던 서주의 명사 진규와 어릴적부터 친분이 있었다. 원술은 진규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과 친구 사이면서 어떻게 조조를 도울 수 있냐고 따지고 자신을 도와 대업이 성공하면 진규가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 될 것이라며 회유하지만 진규는 천자를 옹립하고 있는 조조를 정상 질서로의 복귀라는 시대적 사명을 부여받은 국가재건의 기수에 빗대며 칭송하고 원술이 길을 잃었으나 아직 돌아올 수 있다며 원술의 제안을 거절하고 오히려 원술의 칭제를 만류했다.

앞서 서술했듯 원술은 서주를 장악하고 있었던 여포와 자식간의 정략결혼을 통한 동맹을 맺음으로써 조조에 맞설 우군으로 끌어들이려고 했고 원술을 견제하던 여포 역시 조조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서로 인척관계를 맺는 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는지 원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원술은 칭제와 동시에 여포에게 사신을 보내 칭제한 것을 알리며 혼약에 따라 딸을 보낼 것을 요구했고 여포는 원술의 칭제 사실을 알고도 딸을 순순히 원술에게 보내는데, 원술이 공식적으로 칭제를 발표하기 이전부터 진규가 원술을 만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보이듯 여포 또한 원술이 이미 조조와 허도 조정에 대항해 칭제할 계획이 있다는 것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표현에 따르면 이때 진규는 원술과 여포가 손잡는다면 서주와 양주가 합종하는 것이라 국가적 혼란이 그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조정을 봉영하고 국정을 운영하는 조조에게 정의가 있으니 원술과 혼사를 맺으면 오명만을 뒤집어쓸 것이라며 여포를 설득하고 여포는 원술이 칭제할 것을 진작부터 알고 딸을 보냈음에도 진규의 말을 듣고 기병대를 급파해서 이미 보냈던 딸을 되찾아오고 원술의 사신인 한윤은 압송해 조조에게로 보낸다. 여포 본인도 이미 조조가 황제를 옹립하고 원술이 칭제를 공식적으로 밝힌 시점에서 진규의 지적과 같은 너무나 당연한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굳이 딸을 보냈다가 진규의 설득에 결정을 물린 이유는 불명확하다. 이에 대해 사서상으로는 원술이 이전에 여포를 받아주지 않은 일을 비롯한 원술에 대한 여포의 개인적 원한이 결정적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는데, 이미 사서상 나타나는 상황에서도 원술은 진궁과 학맹을 부추겨 여포를 죽일 것을 사주해 놓고 이 시도가 실패하자 뻔뻔하게 혼담을 제의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여포는 나름의 이해득실을 고려해 원술과 혼약을 맺긴 했으되 원술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 상당히 복합적이었을 것이고, 원술과 오랜 개인적 친분이 있기도 했던 진규는 아마 이런 측면을 부추겼을 것으로 보인다. 조조는 한윤을 참수했고 완전히 체면을 구긴 원술은 수 만명의 군사를 동원하고 장훈교유를 대장으로 삼아 서주를 친다.

여포는 두려움에 떨며 진규를 책망했지만 진규는 원술의 부장인 한섬, 양봉이 원술에게 붙은 지 얼마 되지 않으니 전리품을 모두 그들에게 준다는 약속을 하면 넘어올 것이라고 여포를 설득했다. 이에 전투가 시작되어 원술군과 여포군과 불과 100보 거리에 다다랐을 무렵 진규의 회유공작에 넘어가 있던 한섬과 양봉의 군대가 배신해 일제히 원술군을 공격했으므로 원술군은 철저히 괴멸당하고 망신만 당하게 된다. 한섬과 양봉이 배신하게 된 표면적인 동기 역시 일단은 원술이 참칭한 것이 원인이었는데 이들은 헌제의 수레를 호송하는데 공을 세운 자들로 한실에 협력한 충신들인데 천자를 자칭한 원술에게 붙어 역적의 누명을 써서야 되겠는가라는 명분에 마음이 움직인 것이었다.

영웅기에 따르면 대승리를 거둔 여포는 가는 곳마다 노략질하며 회수를 건너 원술의 근거지인 수춘까지 당도했고, 이때 여포는 원술에게 편지를 보내 (원술이) 휘하에 싸움에 굶주린 맹장,무사들이 많아 항상 제어하는데 곤란을 겪는다며 항상 큰소리를 쳤지만 정작 회수 남쪽에서 여포 자신이 호랑이처럼 걸어다니는데도 맹장과 무사들은 보이지 않고 원술은 수춘에서 쥐새끼처럼 숨어있다며 조롱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를 받은 원술은 보기 5천을 이끌고 친히 여포에 맞서 응전하러 나섰지만 이미 회수를 건넌 여포군이 크게 비웃으며 다시 원술을 조롱한 뒤 돌아갔다는 원술로서는 두고두고 치욕스러울 수준의 일화가 전해진다.

4.3. 예주의 이탈

원술은 세력이 끊임없이 약해지자 이것을 만회하기 위해 진(陳)국을 쳐서 점령한다. 본디 원술은 형주 북부와 예주를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했으며 근거지를 양주로 옮긴 이후에도 원술이 임명한 진국상 원사와 여남태수 손향, 여남,영천 원술파 군벌들이 확인되는 등 예주에 상당한 지지세력을 갖추고 있던 것으로 보이나, 낙통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사승의 후한서에 따르면 당시 진국의 제후왕이었던 진왕 유총은 이미 원술이 예주에서 주씨 형제와 대립하던 시절부터 사방으로 원술의 영향권에 둘러싸인 섬 같은 판도에서도 자체적인 군사력과 통령체계를 엄격히 유지하며 원술과 선을 그은 채 독자노선을 걷던 인물이었고 낙통의 아버지인 낙준은 진국상이자 유총의 유능한 보좌로서 명망이 높았다. 유총이 다스리던 봉국에서는 경계지역을 철통같이 지켜 도적이 발생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하지 않아 재해가 발생하지 않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는데, 자치통감에 따르면 인접한 지역의 거주민들 대부분이 유총에게 귀부하면서 유총이 10만의 무리를 거느렸으며 주와 군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양하에 주둔하며 보한대장군을 자칭했다고 나온다.

두 기록은 동일하게 원술이 군량을 요구했고 평소부터 원술을 싫어했던 유총과 낙준이 이를 대번에 거절하자 자객을 보내 두 사람을 죽였다는 내용으로 이어지는데 근거지를 옮기기 이전부터 원술의 통치는 평가가 나빴고 원술이 근거지를 수춘으로 옮기면서 거리도 멀어진데다 칭제로 명분도 잃었고 여포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했고 흉년으로 기근에 시달리는 등 원술의 상태가 총체적으로 좋지 않았고 한때 예주에서 원술이 가지던 입지는 능력과 덕망을 검증한 고귀한 제후왕 유총에게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었고 유총은 보한대장군을 자칭하며 원술과 모든 면에서 대조적인 포지션으로 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원술은 군사를 이끌고 진국을 치는 한편 자객 장개양을 보냈고 장개양은 거짓 투항한 뒤 술자리에서 유총과 낙준을 죽였다. 남은 무리를 손쉽게 정리하고 순조롭게 진국을 점령하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조조는 진왕의 죽음을 명분삼아 곧바로 개입하며 실력행사에 나서는데 이때 원술은 꼴사납게도 조조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하장수인 교유, 이풍, 양강, 악취를 남긴 채 본인은 회수를 건너 수춘으로 달아났고 교유 등은 패하여 모조리 참수된다. 그리고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원술은 사실상 몰락하게 된다.

4.4. 현실도피

여포와 조조에게 패한 이후 원술전에 나타나는 기록들은 황제를 자칭한 이후로 끊이지 않는 사치의 기록들인데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답이 없는 상황 속에서 일종의 현실도피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원술은 후궁을 수백 명을 두었으며 황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경비로 상당한 돈을 낭비하였다. 원술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원술의 후궁에 대한 일화를 소개한다. 풍씨는 원술의 후궁 중에서도 미모가 뛰어나 원술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 이때 다른 후궁들이 이를 시기하여 풍씨보고 지조와 절개가 있음을 보이면 원술의 총애를 더 받을 수 있으니 원술앞에서 항상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라라고 권유하니 풍씨는 원술만 만나면 눈물을 흘렸고 원술은 이를 가련히 여겼다. 그 뒤 얼마 안있어 후궁들이 풍씨를 목졸라 죽이고 기둥 위에 목매달아 놓았더니 원술은 그녀가 항상 슬퍼하는 모습을 보아온 지라 슬픔에 못이겨 자결한 것으로 여겼다고 생각하였다.

그 사치와 무도함이 극에 달하여 그가 다스리던 강회[39]에서는 굶주린 백성들끼리 서로 잡아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만 이런 기근은 원술만의 잘못은 아니고 기후적으로도 197년부터 원술의 영역이었던 강회에 지독한 가뭄이 덮쳐온 탓도 컸다.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는 원술도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다만 몰락 직전 원술의 마지막 발악으로 싹이 잘려버렸던 유력 정치주자 유총만 해도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하지 않고 농사에 전념토록 해서 해마다 풍년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원술은 번번이 군사원정과 토목공사를 밥먹듯 벌였기 때문에 이런 변명이 상당히 궁색하며, 자연재해를 이유로 일부 책임이 경감된다 한들 백성 구제는커녕 고기와 비단이 썩어날 정도로 개인적 사치만 부리며 현실도피의 늪에 빠진 것은 도저히 변명이 어려운 추한 모습이었다.

결국 원술의 부하로 있던 패국상[40] 서소가 굶주리던 백성들을 보다못해 원술이 군량미로 쓰려고 비축해둔 쌀 10만 섬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했다. 당연히 원술은 격노하여 군사들을 시켜 서소를 붙잡고 참수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때 서소는 원술에게 "한 사람의 명을 바쳐 수많은 백성을 도탄에서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다."라고 원술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에 원술은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며 "그대는 어찌 그런 아름다운 이름을 혼자서만 남기려 하는가, 나와는 함께 누릴 수 없는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이 일화로부터 원술의 성향을 알 수가 있는데 원술은 천성이 거칠고 방탕했지만 의외로 감수성이 섬세하고 유독 '역사적 평가' 혹은 '명예'를 크게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자신의 정치적 행보가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 또한 정확히 알고 있었다. 실제 원술은 황제를 참칭하면서도 세간의 명사들을 초빙하려 무척이나 애썼다. 그 명사들이 죄다 원술을 피해다녀서 문제였지만. 어쨌거나 서소는 원술의 명예욕 혹은 감상적 경향 덕분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4.4.1. 주유의 이탈

주유전에 따르면 손책이 곡아를 점거하며 유요가 도주한 시점에서 주유는 숙부 주상이 있는 단양군으로 돌아갔고, 오래 지나지 않아 원술이 원윤을 단양태수로 삼자 숙부와 함께 수춘으로 복귀했으며 원술은 주유를 직속으로 두고 싶어했지만 주유는 원술이 끝내 이룰 것이 없음을 알았기에 거소를 통해 강동의 손책에게 가고자 거소현장의 자리를 원술에게 청원하며 이에 원술이 동의하자 거소에서 빠져 나와 손책에게 의탁했고 이때가 198년이라고 하며, 이때까지 직속 부하로서 원술을 수행하던 주유는 원술이 걷잡을 수 없이 몰락하는 과정을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지켜봤을 것이다.

손책은 주유를 대단히 환대했지만 손책의 서신을 받고는 군이고 가족이고 버린 채 그대로 도주한 오경, 손분이나 손책에게 합류하기는 커녕 끝까지 잔류하면서 진짜로 수춘에 뼈를 묻었던 손향과는 달리 주유는 상당히 애매한 시기에 이탈을 택한 것인데, 이는 주유가 일족들의 안전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주유 나름대로 원술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고도 볼 수 있으며, 보다 급진적으로 바라볼 경우 그가 한때 황제 원술과 중나라 건국 이념의 열렬한 지지자였다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이전의 철인의 비밀스런 의론에서 천명을 이어 유씨를 대신할 자는 반드시 동남쪽에서 흥기한다고 들었는데 형세의 변화를 추측해 보면 지금은 한가의 운수가 다한 때므로, 오의 군주가 나라를 창립하여 천명에 부합할 수 있소.

주유가 천하이분지계를 통해 드러낸 정치관은 유씨의 천명이 끝났고 남중국인이 주축이 되는 독자 정권이 세워져 북중국과 나란히 천하를 다투는 것을 골자로 한다는 점에서 당대엔 유래없이 급진적이었다. 그러나 주유가 평생에 걸쳐 추구했던 행보가 이러한 정치관에서 비롯되었다면 적어도 삶의 어느 시점에서 그가 황제 원술을 진지하게 지지했다는 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고 오히려 분명한 일관성을 가지며, 또한 주유는 자신의 지론이 '지나간 철인의 비밀스러운 의론'에 영향받은 것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 시점의 주유는 원술에게서의 이탈이 불과 2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그 전까지는 원술의 직속 부하로 있었던 기간이 훨씬 길었고, 천거인의 은혜에 대한 피추천자(고리)의 충성의무가 양심과도 같이 당연한 것이라는 것은 후한사회의 상식적 관념이었으며 원술은 도참 같은 신비주의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 까지 감안한다면 주유가 자신의 생각의 근거로서 소개하고 있는 선철의 비밀스러운 의논이란 것은 뜬금없는 헛소리가 아니라 원술과 중나라의 건국이념을 애둘러 말하는 것으로 진지하게 해석될 여지까지 남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경우 주유는 남중국 독자정권 수립이라는 비전을 믿고 원술을 지지했으나 원술이 더 이상 손쓸 길 없이 무너지자 원술을 포기한 채 손씨를 통해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려 했을 것이다. 물론 주유 본인부터가 북중국인이고 천하이분지계 또한 궁극적으로는 남중국 중심의 중국 통일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홍콩 독립운동같은 현대적 내셔널리즘에 대입하긴 어렵겠지만, 장강 이남을 전부 장악한 남중국인 중심의 정권 성립이라는 일차적 목표에 방점을 찍고 당대에도 뚜렷하게 존재하던 장강 이남과 이북의 인종, 문화적 이질성을 감안한다면 주유의 정치관은 적어도 북중국 중심의 천하관에서 벗어나겠다는 급진적인 분리주의 지향성이 다분했다.

주유는 손씨 가문의 헌신적인 충신이었고, 원술에게도 한때 그렇게 충성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심지어 원술에게서 손가로 이탈한 이후에도 원술에 대한 나름의 존경심을 여전히 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는 그 자신의 조상들이 2세에 걸쳐 삼공을 지낸 명문가 출신이면서도 한나라에 대해서는 대놓고 운수가 다해서 끝난 나라로 평가했고, 한나라 황제와 유씨 신앙을 겉으로나마 존중하며 이용하던 기성 정치가들에 비해 이미 이른 시기부터 전통적인 근왕의식이 놀라울 만큼 부재했다.

후대의 유학자들은 주유의 능력과 의리를 칭송하면서도 이러한 급진적 성향을 부도덕하다고 비난했다. 허나 장강 이남지역의 남중국인들은 본디 비한족 문명권이었다가 춘추전국시대와 진한시대를 거쳐 슬금슬금 중화질서에 편입되어가던 중 오나라 건국으로 독자 정권을 세웠고, 한족화된 남중국인들은 내재화한 중화주의적 관념 아래 여전히 한족에 동화되지 않은 채 독자적 정체성과 문화를 유지하고 있던 남중국 원주민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하며 폭력적 동화정책을 펼치는 크레올적 특성을 보이다 서진에 의해 재통합된 이후로는 북방 이민족 왕조에 밀려난 한족 왕조의 중심지이자 한족 민족주의의 아성으로 변모하기 때문에 원술의 중나라 건국이 주유의 정치관 형성에 기여했다고 볼 경우 원술은 남중국인들의 복잡한 정체성 형성의 역사에 간접적으로나마 나름의 영향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다.

4.4.2. 미워도 다시 한번?

원술전의 기록은 여기서 끊기고 몰락하여 원담에게 의지하러 가는 내용으로 이어지지만, 여포전에 따르면 이후 여포가 다시 원술 편으로 붙어 고순을 보내 유비와 하후돈을 격파하고 조조의 본대가 도착하자 원술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내용이 나온다.[41] 주석으로 인용된 영웅기에 따르면 당시 원술은 여포의 처지가 멋대로 혼약을 파토낸 인과응보라며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여포가 무너지면 자신도 끝이라는 판단에 따라 몸소 군을 이끌고 여포를 구원했다고 하나 삼국지와 후한서의 여포전 본전에서는 원술이 능히 구원하지 못했다고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원술이 도착하기 전에 여포가 패망했거나 어쩌면 이미 원술도 힘이 다 빠진 상태라서 강해진 조조의 포위망에 정면으로 도전할만한 여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4.5. 버림받다

한편 원술의 세력은 거듭된 패배에 가뭄과 학정까지 겹치는 바람에 민심이 완전히 원술로부터 이반했고, 백성들이 난민이 되어 사는 곳을 떠나면서 세금도 걷을 수 없게 되자 원술의 마지막 밑천이었던 군대를 유지하기도 힘들어졌다. 북쪽은 조조, 남쪽은 손책이 원술을 삼키려 하였고, 애증의 관계였던 여포는 이미 패망해서 죽은 후였다. 재정적 자립이 불가능해진 원술은 궁여지책으로 궁을 불사른 뒤 남은 무리를 이끌고 휘하 세력인 여강의 진란, 뇌박에게 의지하려고 했다.

진란과 뇌박이 주둔하고 있던 첨산은 지세가 대단히 험한 요충지였는데 원술은 미오성을 쌓던 동탁이나 역경루에 틀어박힌 공손찬과 비슷한 동기로 요새화된 요충지에 틀어박힌 채 외부 정세의 변화를 노리는 생존전략을 택한 것으로 보이나[42] 진란 등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주군이랍시고 뜬금없이 와서 자기들이 힘들게 모은 쌀을 축내는 격이니 달가울 리가 없었다. 또한 원술을 받아들였다간 조조, 손책 등 주변 거물들의 미움을 살 것이 분명하므로 받아들이는 것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원술이 강했을 때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힘도 다 빠져서 별로 무서워할 것도 없었다. 진란과 뇌박은 원술에 대항하여 성문을 닫아걸고 원술에게 저항했고, 원술은 군량이 모자라 공성전을 벌일 여력조차 없었는지 자신에게 반기를 든 부하들을 응징하지도 못하고 되돌아가지도 못한 채 성 앞에 진을 치고 3일 동안 머무르다 군량이 부족해 되돌아갔다.

이 사건은 연이어 하향세를 타던 원술을 회생불가로 몰아넣은 치명적인 타격이었는데, 그나마 원술이 의지할 측근으로 여기며 찾아갔던 진란과 뇌박이 주인인 원술을 정면에서 거부하며 문전박대했음에도 원술이 이들을 응징할 마음조차 먹지 못하고 군대를 물린 것은 원술의 다른 부하들도 원술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곧 원술을 중심으로 묶여 있던 토호들이 원술이라는 간판을 포기하고 제각기 각자도생에 나서면서 원술의 세력 자체가 공중분해되는 것을 의미했다.

4.6. 원소에게 구걸하다

휘하세력의 이탈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원술은 근심과 절망에 빠져 어찌 할 줄 모르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고 하며 결국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원소에게 황위를 양보하며 투항하기로 마음먹고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한나라가 천하를 잃은 지 오래되어, 천자는 손에 끌려 다니며, 정사(政事)는 권신들의 집안에 있고, 호걸 영웅들은 각축하며 강토를 나눠 찢으니, 이것은 주나라 말기에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세력을 나눴던 것과 다를 바 없으며, 끝내는 강한 자가 겸병하게 될 뿐입니다. 더하여 원씨는 천명에 의해 왕이 된다는 상서로운 조짐이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 군(=원소)께서는[43] (하북)4주를 옹유하며 백성들의 호구는 백만이요, 강한 것으로는 이보다 더 큰 것으로는 비할 바가 없으며, 덕을 논하자면 이보다 더 높은 것으로는 비할 바가 없습니다. 조조는 쇠퇴하고 미약한 한실을 붙잡고 돕고 있다지만, 어찌 끊어진 천명을 잇고 이미 멸망한 것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천하가 원씨의 것이 될 것이라는 설레발만 빼면 한나라의 운명을 정확히 꿰뚫고 있긴 했다. 원소는 내심 이말이 옳다 여겼다고 하며, 이 무렵 원소 끗발이 장난이 아니었던 터라[44] 여기에 혹해서 한번 여론을 떠 보기도 했다. 주부(主簿) 경포(耿苞)로 하여금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에게 칭제하라고 권하도록 자작극을 꾸몄는데, 막상 해보니 신하들이 흥분하며 경포를 죽이라고 하자 바로 죽이고는 입을 싹 닦았다.

칭제 자작극 사건의 결과로 원소가 원술을 손절했다고 해석될 여지도 있으나, 어쨌든 청주를 다스리던 원담은 사람을 보내 원술을 맞이하려고 했다.[45][46]

4.7. 비참한 최후

그간 대놓고 무시하던 원소에게 읍소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이미 상황이 상황인지라 자존심을 세울 여력이 없었다. 원술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청주로 향했는데, 도중에 조조가 유비주령, 노초를 하비로 보내 가로막는 바람에 청주에 갈 수 없었다. 원술은 우회로를 택해서 수춘으로 발길을 돌려 강정에 이르렀는데 사정이 너무 안 좋아서 주방에는 기껏 맥곡 가루 30곡(斛)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問廚下,尚有麥屑三十斛。 時盛暑,欲得蜜漿,又無蜜。坐櫺牀上,歎息良乆,乃大咤曰:「袁術至於此乎!」因頓伏牀下,嘔血斗餘,遂死。
요리사에게 물으니, 있는 것이라곤 보리싸라기 서른 석( = 300말) 뿐이었다. 이 때가 한여름이어서 꿀물을 얻으려 했으나 꿀이 없었다. 난간에 앉아 오랫동안 탄식하곤 이내 "이 원술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니!"하고 크게 울부짖었고, 땅바닥에 엎어져 피 한 말을 토해내고는 곧 죽었다.
위서 6, 원술전 #
게다가 당시에 더위가 극심했기 때문에 원술은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꿀물을 얻으려 하였으나[47] 결국 구하지 못했다. 이에 원술은 평상에 걸터 앉아 한참 동안이나 탄식하더니 이 원술이 (꿀물 하나 못 구하는)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하고 엎어져서 피를 한 말이나 토하더니 결국 죽었다. 이처럼 당대의 명문가 출신인데다 한때 최고의 유력자로 끗발을 날렸던 인물치고는 너무 초라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다. 이것이 199년 6월의 일로,[48] 한때 황제를 자처했던 원술의 말로 치고는 너무나도 처참했다.

연의에서는 유비에게 군사적으로 패배하고, 뇌박과 진란이 이때다 싶어서 군량을 다수 강탈하고, 도적떼들의 공격까지 받아서 위와 비슷한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 이 와중에도 밥이 거칠어 넘어가지 않는다고 꿀물을 찾았고, 이에 요리사가 "꿀물은 커녕 샘물도 흔치 않은뎁쇼, 병사들이 흘린 핏물은 널려있구먼요"라고 퉁명스럽게 비아냥대서 울분이 터져 사망한다. 그 외에도 워낙 아이러니하고 비참한 최후 덕분에 후대 창작물에서는 더욱 극적으로 묘사되는 것도 자주 볼 수 있다.

5. 사후

원술이 죽자 남은 무리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원윤원요, 황의 같은 원술의 일족들은 과거 원술이 임명해 놓은 여강태수 유훈에게 의지했으나, 이와 달리 손책에게 귀의하려 한 양홍과 장훈은 유훈에게 토벌당했다. 원술의 직계세력들이 여전히 많기는 많았는지 원술의 무리를 흡수하면서 세력이 비대해진 유훈은 군량이 부족해졌고, 예장태수 화흠에게 군량을 요청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때 손책이 여강을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며 유훈과 거짓 동맹을 맺고 남쪽으로 군대를 동원하라고 부추긴다.

손책은 황조와 싸운다는 명분으로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유훈이 남쪽으로 출정하여 환성을 비운 즉시 그 뒤통수를 거하게 날려 주유와 함께 2만 명을 직접 거느리고 환성을 점령한 뒤 유훈, 원술의 처자식을 모두 사로잡는다. 이후 원윤의 행방은 묘연하지만 손책은 원술의 아들 원요를 낭중으로 삼고 원요의 여동생이자 원술의 딸은 손권의 후궁으로 들어가 원부인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리고 원요의 딸이자 원술의 손녀는 손권의 오남 손분(孫奮)[49]의 아내가 된다.

원술의 무리를 받아들인 게 화근이 되어 유훈도 결국 손책에게 망한다. 손책은 사로잡은 무리들을 모두 동쪽의 오군으로 보내고 부하였던 이술을 여강태수로 삼아 3천 명과 함께 주둔케 한 뒤 자신은 전군을 이끌고 유훈을 추격하였다. 유훈은 강하쪽으로 물러나며 손책에 저항했지만 그는 그걸 모조리 때려잡는다. 결국 모든 것을 손책에게 빼앗긴 유훈은 조조에게로 달아난다.

5.1. 무덤

원술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원술고적묘(袁術古堆墓)가 중국 안후이성 허페이시 창펑현 샤오구두향 차이핑촌(화이난시로 편입됨)에 있다. 면적은 2756㎡, 높이는 7.5m에 달한다. 현재 주요 성급 주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 본래 청렴하고 효성스러운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인데, 추천제였기에 권문 자제들의 일반적인 출세 루트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았다.[2] 북당서초 권 6[3] 일각에서는 상서 시절 원소를 갈궜다고 추측하기도 하나 실제로는 그런 기록이 명확하지는 않기에 정확한 이유는 불문. 다만 원소가 상서대의 아래 있고 싶지 않아했다는 표현과 이 사건 이전에도 이후에도 둘의 사이가 쭉 매우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을 감안할때 원술과 무관하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4] 현령 밑에도 현위, 현승 등이 있긴 하나...[5] 어쨌거나 가문의 힘이 아니었으면 아예 불가능한 일이니 가문의 힘으로만 출세했다는 말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한가지 특이한 점은, 원술은 명문가 자제들이 흔히 보이는 가문과 배경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가벌의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난폭한 성격과는 별개로 특이할 정도로 개방성이 높고 유연한 성격으로, 자기 사람이 될만한 인물이라면 그 사람의 출신이나 배경을 가리지 않고 호의적으로 어울리며 받아들였다.[6] 단 후한 공식정부부터 이미 흑산적을 끌어들이는 등 선례가 충분했기 때문에 원술만 탓할 일은 아니다.[7] 왕예 등의 살해로 인해 손견이 정치적 궁지에 몰렸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손견전에 왕예, 장자를 죽이면서 손견이 창고를 까게 했다던가 얻지 못하는 것 구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라는 언급으로 봤을 때, 손견은 왕예와 장자를 죽이며 오히려 원술처럼 보급자유권을 발급받은 것에 가까웠을 것이다. 둘의 결합에서 원술이 구원자적인 성격을 찾기는 조금 힘들 듯하다.[8] 장자를 죽일 때도 손견은 물자를 주지 않았다, 의병에 도움을 주지 않아서 적을 이롭게 한다는 이유로 해치워버린다. 이런 기본적인 명분 만들기가 딱히 원술까지 필요해 보이진 않는다. 물론 왕예를 죽였을 때는 모르는 것이 죄다라는 이유로 해치운 것과는 좀 달라 보여서 원술과의 교감이나 가르침이 있었을 수도 있겠으나, 무릉에서 남양까지 가는 길에 실제로 보급이 절실하던 손견군이 이 정도를 떠올릴 수 없었고 반드시 원술의 가르침으로 보는 것도 좀 그렇다. 어쨌건 원술과 손견은 서로서로 이 순간에 합이 굉장히 잘 맞아 보이는 부분이 있다.[9] 원술은 중앙에 연줄도 빵빵한 명문가 출신에 고위직이었고 명성, 세력이 있고 문객도 많아 손을 잡는 것이 전혀 나쁠 것이 없었다. 손견의 목표가 한실 수복 후 중앙 정계 진출이나 고위직 역임이라면 원가와의 연합을 꺼릴 이유는 더더욱 없기도 하다.[10] 왕예를 죽인 이후 중랑장 벼슬을 줬다는 헌제춘추의 기록이 진짜라면 대충 친분을 나누고 연결되고 싶다는 인사 정도였을 것이다.[11] 뭐 원술이 어느 시점에서 손견과 결합했다던가 손견과 원술의 관계라던가 하는 것은 제쳐두고 결과적으로.[12] 후한서 원술전.[13] 내전기 초의 사족들에게 그 실력과 권위의 측면에서 대체불가능한 존재로까지 여겨졌던 유우는 헌제 옹립의 실패 이후 공손찬과의 마찰로 정국의 주도권을 놓쳤고, 폭주하는 공손찬이 원소를 치는 것을 관망하다 승패가 분명해지는 시점에서야 개입에 나섰지만 오히려 공손찬의 역격을 받아 생포당한 뒤 공개 처형당한다. 이는 심지어 공손찬의 정치적 동조자들 다수에게서도 상종할 수 없는 야만적 행위로 여겨지면서 공손찬의 몰락을 불러왔다. 공손찬의 유우 처단은 그 후과가 안 좋았지만 후과야 어쨌건 유우는 퇴장하게 되었고, 그 무게감에 비해서는 매우 허망한 퇴장이었다. 원술의 배신은 유우의 초라한 몰락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14] 손견이 모험주의자라면 맞지만 트러블메이커라기에는 딱히 누가 손견을 욕한다는 얘기가 사서에 있지는 않다. 어차피 서로 그렇게 죽고 죽이는 마당에 손견이 반동탁연합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누구를 죽였다고 욕하는 것도 이상하다.[15] 유화 억류 사건에서 원술과 공손찬이 편 먹고 있는 것을 봐서 원소가 견제를 시작한 것은 이미 유화 억류 이전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16] 다만 아예 이익될 것이 없는 행동이라고 보긴 어려운 것이, 원소가 반동탁 세력을 모을 수 있었던 명분 중 하나에는 원씨 일족의 멸족에 대한 복수가 있었다. 하지만 원소가 원씨 일족이 아니라는 발언은 이 명분을 근본부터 흔들 수 있는 논리였고, 발언의 주체가 원씨의 적자인 원술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파급력이 있었을 것이다.[17] 어쨌거나 이 과정에서 손견과 원술의 결합은 공고해져 가는 것으로 보인다.[18] 보통 황조로 알려져 있고 이 설이 우세하나 기록에 따라 여공이라는 이설도 있다.[19] 연주 동군 발간현[20] 회계전록에 따르면 주흔은 원술이 보낸 오경에 맞서 승리했다고 하나 오경의 패배에 분노한 원술이 백성들에게 분풀이성 보복학살을 벌이자 충격을 받아 자진해 군대를 해산하고 고향인 회계군으로 돌아갔다.[21] 주흔은 고향인 회계로 돌아간 이후 회계까지 원술이 보낸 손책의 침공이 이어지자 회계태수 왕랑과 함께 여기에 맞섰던 흔적이 확인되나 주흔의 동생들은 이때의 패배를 기점으로 기록이 끊긴다.[22] 원유는 달아나던 끝에 병사들에게 살해되었지만 훗날 원유의 인척이던 하기가 원술을 따르기를 거부했을 때 그가 원유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원술이 하기를 해코지하지 못했다는 삼국지 하기전의 기록을 보면 원유의 허망한 최후는 적어도 원술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고 나름의 죄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23] 일부 판본은 (沖)으로 나오고 삼국지연의에서 성(成)으로 나온다.[24] '수도'를 관장하는 직책에만 윤尹을 붙인다. 현대 한국 기준 '특별시'와 같은 행정구역으로 볼 수 있다. 윤尹은 특별 행정구역 장관의 관직명인 동시에 행정구역명 그 자체로 쓰였다가 한나라 후에는 관직명으로만 쓰이게 된다. 한나라 기준으로는 전한의 수도였던 장안 일대를 경조윤, 후한의 수도였던 낙양 일대를 하남윤으로 불렀다. 조선에서 한성을 관장하는 직책도 판윤이었다.[25] 반면 촉한과 오는 칭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를 장관하는 군의 태수와 행정구역을 윤(尹)으로 승격시키지 않았다. 이는 자칫 한나라 400년 역사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으로 보여 민중에서 거부감을 크게 느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후한의 계승을 표방한 촉한의 법적 수도는 장안이었다(손권 칭제 후 영토 분할안에서 장안과 낙양을 나눠가진 걸 볼 때 장안을 정식 수도로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성도는 어디까지나 임시 수도이기에 촉군을 촉윤으로 승격하는 일은 없었다. 공식적으로 후한의 마지막 수도는 허현이지만 조조가 협천자 후 천도한 것이니 무시했을 것이고. 오의 경우 원술의 잔당을 흡수하면서 그 전말을 듣고, 그리고 태생적으로 원술에게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집단인 만큼 잘 알고 삼간 것으로 보인다.[26] 없다고 단정할 순 없다. 선진 유학자들이 기독교의 하느님 같은 인격적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했는가는 아직도 이론이 매우 갈린다. 시경 등 고문헌에 보이는 상제(上帝), 황천(皇天) 등은 인격신적 색채가 진하긴 한데, 주 왕조 시기를 거쳐 동주 시대로 가면 이미 하늘(天)이 탈인격화가 진행된 정황이 눈에 띄기 때문. 어쨌든 선진유학은 하늘을 인격신으로 보든 이신(理神)으로 보든 간에 그러한 하늘의 뜻은 궁극적으로 신비를 배격한 합리적 정치 활동을 통해 구현되며, 하늘은 정치 철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최종 권위 이상의 뭔가로 보는 건 아니었다.[27] 유학의 우주론-국가론-심성론이 견고한 형이상학적 일관성을 갖추어 통합된 사상 체계는 정주의 성리학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추상성이 매우 강한 불교 교리가 매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28] 유학이 발생한 이유를 더듬는다는가 하는 것은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작용이다. 그리고 사상은 원래 변화하기 마련이다.[29] 우번이 주역에 능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걸 공융이 칭찬했는데 유학과 무관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사실 후대에도 이런 것이 과거에서 안 쳐주니까 쇠퇴하던 것이며 그 이유로 비주류가 되면서 사람들도 관심을 안 두거나 잘 몰라서 공감을 못 받아서 인정을 못 받는 것이지 그 이유만 빼면 집에 돈이 많아서 과거 안 붙어도 되는 학자가 말빨을 잘 세울 경우 인정 안 해주는 일은 별로 없었다.[30] 물론 이 시기의 공식 역사서라 해봤자 춘추·사기·한서 정도에 주자나 정이·주돈이 등 주요 유학자들의 저서가 없으므로 유교 공부량 자체가 후대에 비해 많이 적긴 하다.[31] 그래서 흙을 뜻하는 황색이 삼국지 구석구석에 많이 눈에 띈다. 황건의 난부터 조비의 연호인 황초, 손권의 연호인 황무와 황룡까지.[32] 참고로 왕망도 규성이었다. 그리고 장제가 '조씨가 규성이라니 뭔 뻘소리여'라고 했다는 것으로 보아 위나라에서도 이걸 의식했던 것 같다.[33] 과거에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어도 아는 대로 명분으로 써먹었고, 또 현대는 과학이 많은 걸 설명해주고 온갖 문명의 이기로 자신을 증명하니 과학이 헤게모니인 것이지 과학 없이는 도가니 참위니 하는 게 세계관 설명으로 기능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조경래 작가의 소설 삼국지 마행처우역거에서는 흙이니 물이니 불이니 청룡이니 하며 이러한 당대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34] 특히 유벽은 이후 관도전에서도 원소에게 호응해 후방을 공략하는 등 원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35]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는 처음에 조홍을 보내 헌제를 영접하게 했으나 동승이 원술의 부장 장노와 함께 험요지를 지키며 이를 막았다. <헌제기> 등 다른 기록에서 드러나는 정황상 당시 안읍에 체류하던 동승이 군사를 동원해 조홍을 막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이기에 이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당시 헌제와 조정이 조조보다 원술을 유력한 파트너로 여겼을 가능성은 있지만 적어도 동승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조조를 저지한 것 같지는 않다.'A가 B라는 곳을 지켰다'는 것은 포괄적인 의미로, A가 B라는 곳에 직접 주둔하며 수비한 것만 의미하진 않는다.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기록을 지레 단정짓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단정지을 만한 추가적인 자료 없이는 여러 해석이 가능한 그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36] 양표의 아내가 원술의 누이인 양태위부인 원씨다.[37] 연의에서는 이를 약간 비틀어서 손책이 전국옥새를 담보로 병사를 빌려 동오로 떠났다고 서술했다. 이 대목은 손책의 야망을 나타내는 동시에 원술이 황제를 자칭하여 몰락하게 된 계기를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원술이 칭제한 뒤 여포에게 패하였고 손책에게 원군을 요청하나 거절당하고 만다.[38] 시점으로 봤을 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기술은 정치적인 시각이 좀 지나치긴 하다. 원술의 몰락 기점이 협천자일 수 있지만 그의 몰락 이유는 조조, 원소가 협천자를 통해 정치적 우위를 얻어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원술이 그동안 여러 정치적, 군사적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게 원술의 그 시점에서 단기간에 개선될 이유가 없기에 그런 것이다. 어쨌거나 가망은 없지만 갑자기 손견 같은 뛰어난 사령관을 다시 얻는다는 가정을 한다면 이 시점의 원술이라 해도 단죄 일직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39] 양자강, 회남 일대다.[40] 상(相)=봉국의 승상으로 군 태수급이다.[41] 다만 여포전의 진등 관련 기록에 따르면 조조는 처음부터 원술이 몰락한 뒤엔 여포를 토사구팽할 생각이었고 영웅기에 따르면 유비군이 여포군의 말을 약탈하고 이 일로 여포가 유비를 치자 조조가 개입했다. 영웅기에 후술되는 원술의 반응 또한 멋대로 혼약을 깬 인과응보라며 여포의 태도를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비꼬고 있기 때문에 여포가 원술한테 붙어 반란을 일으켰기에 토벌했다는 여포전의 서술은 조조 측에서 사후에 내세운 명분에 가까울 것이고 실제 상황은 여포가 조조에게 토사구팽당할 상황에 몰리자 태도를 바꿔 원술에게 읍소한 것에 가깝다.[42] 실제 역사에서는 첨산으로 근거지를 옮기는 단계부터 진란과 뇌박의 하극상에 가로막혔지만 원술이 방어에 유리한 첨산을 근거지로 삼아 수비적인 운영으로 세력 와해를 막을 수 있었다면 이후 조조와 원소의 불화를 틈타든 혹은 손책 세력의 분열을 노리든간에 원술 입장에서는 라이벌들의 느슨한 연대를 틈타 나름의 이득을 노려봄직한 위치에 있었다.[43] 평생동안 원소를 종놈이라고 무시하던 원술이 완전히 몰락하고나서야 처음으로 원소를 형님이라고 높여 부른 격이다.[44] 공손찬의 세력을 흡수하여 하북을 막 평정했을 당시였고, 당대 군벌 중 그 누구도 감히 원소의 세력에 비할 수 조차 없던 상황이었다. 협천자에 성공하여 명분상으로는 만인지상 일인지하 위치에 올라섰던 조조도 황제의 이름으로 내린 벼슬에 원소가 '조조가 감히 나보다 높은 위계에 있다.' 고 불편한 소리를 하자 곧바로 꼬리를 내렸을 정도였다.[45] 원소의 손절을 가정할 경우 원술 영접은 원담의 독자노선 시도와 원소의 관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원소의 정치력을 생각하면 공식적으로는 거절했으나 일단 원담의 원술 영입을 관망하고, 잘되면 받아들이고 여론이 영 나쁘면 이를 핑계삼아 어차피 후계자 구도에서 언젠가 잘라내야할 원담을 잘라낼수도 있다. 원담 입장에서도 딱히 손해는 아닌게, 청주의 지배자로서 그야말로 폐급의 모습을 보여 원소 눈 밖에 단단히 난 원담 입장에서는 여론을 반전시킬 카드가 필요했고, 일가친척이라 명분도 있으면서 원가의 적자이기까지 한 원술은 더할나위없이 좋은 카드였다.[46] 다만 이미지메이킹과 보여주기식 쇼에 굉장히 능했던 원소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원술이 원소에게 무사히 도착했을 경우 대놓고 바로 손절하기보다는 적당히 살길은 마련해주는 관용을 보이면서 한동안 마음대로 굴려먹을 장기말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47] 그 와중에 그냥 맹물도 아닌 꿀물을 마시고야 말겠다는 배부른 생각을 하고 앉았다. 우물 가서 숭늉이 아닌 꿀물을 찾다가 죽은 격.[48] 정사 삼국지 무제기는 12월에다가 원술의 죽음 기사를 붙여놨는데 후한서 효헌제기, 원술전과 자치통감은 6월로 기술하니 무제기의 오류인듯 하다. 따라서 여기선 후한서와 자치통감의 서술을 따른다.[49] 손책, 손권의 사촌 손분(孫賁)와는 동명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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