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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 나라에서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불가피한 사정이 발생해 기존의 수도가 심각한 위험에 처했을 때 정부가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수도를 잠시 옮겼을 때 정부가 이전한 곳을 말한다. 전통적인 중국 왕조 시절에는 행재(行在)라고 불렀다. 여기서 좀 더 상황이 나빠지면 영토를 모두 잃고 아예 해외로 망명한 망명 정부가 된다.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케이스는 6.25 전쟁 당시 부산이 서울을 대신해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임시수도 정부청사(現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와 경무대 역할을 대신했던 이승만 관저[1] 등 임시수도 당시 주요 시설이 모여있는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에는 임시수도기념관에서 부민사거리까지 이어지는 임시수도기념로를 조성해 이를 기리고 있으며 2016년부터 피란수도 부산야행 행사를 매 년마다 진행 중이다.
2. 입지 조건
기본적으로 정부의 기능을 해야하므로 기반 시설이 이미 갖춰져 있어야 한다. 전쟁 중에 적군과 대치하는 것도 힘든데 기반시설까지 따로 만드는 건 전황을 더욱 불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6.25 전쟁 당시 부산에는 규모 큰 관청 건물이 많았으므로 경상남도청사가 임시수도 정부청사[2]로, 그 외 구 부산시청사[3], 중부산세무소[4], 부산지방법원[5], 부산극장[6] 등 기존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했다.하지만 임시수도가 반드시 대도시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기존 대도시로 피난을 가는 경우 원래 주민들과 자원을 나눠써야 하므로 민심이 불안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전황에 따라 바뀌는 경우가 많다.
3. 목록
3.1. 현존
- 타이베이시 -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중화민국이 중국 대륙을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빼앗기고 1949년에 국부천대한 이래 대만이 본거지가 되자 원래 수도 난징을 대신해 타이완 섬의 타이베이가 임시수도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나날이 중국 대륙의 국력이 강해지면서 사실상 '본토 수복'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대만 민족주의가 강해진 현재는 타이베이를 임시수도로 볼 것인지 정식 수도로 볼 것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일례로 2008년 교과서 집필에서 '중화민국의 수도는 난징이다' 문구를 삭제하였다.[7]
- 티파리티(Tifariti) - 미승인국인 서사하라(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의 수도. 법적 수도는 엘아이운이지만 현재 모로코가 통제하고 있다. 원래 임시수도는 '비르 렐루(Bir Lehlou)'였으나 2011년에 티파리티로 천도했다. 다만 티파리티는 임시수도로 선포만 했을 뿐 실제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 망명정부는 알제리 틴두프의 라부니(Rabouni) 난민 캠프에 소재 중이다. 그렇지만 '국내'에 소재한 임시수도라는 정치적 상징성 때문에라도 서사하라 공화국의 의회나 각종 공식 행사는 티파리티에서 열린다.
- 브레이즈 - 영국령 몬트세랫의 임시수도. 원래 수도 플리머스는 1995~1997년의 화산 폭발로 수도 기능을 상실하여[8] 브레이즈로 정부기관을 이전했다. 플리머스는 여전히 정식 수도로 남아있지만 주민들의 모두 소개된 후 유령도시가 되었고 몬트세랫 정부는 플리머스 재건을 사실상 포기하고 섬 북쪽 리틀 베이(Little Bay)에 신수도를 건설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 아덴 - 예멘 내전의 악화로 후티가 수도 사나를 점령하자 2015년 2월 하디 대통령이 아덴으로 탈출해 아덴을 임시수도로 선포했다. 그러나 4월 초 후티 반군이 아덴까지 점령해 임시수도는 끝났다. 7월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개입에 힘입어 정부군이 재탈환했으나 남부과도위원회가 다시 점령하였으며 지금은 남부과도위원회의 거점이다.
- 포트 수단 - 2023년 수단 내전의 발발로 수도 하르툼이 정부군과 신속지원군 간의 전장이 되자 수단 정부가 정부기능을 후방에 위치한 포트 수단으로 이전했다.
3.2. 과거
3.2.1. 한국사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던 부산.
- 신라의 명활성[9] - 475년~488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 위협을 경계해 옮겨 있었다.
- 고려시대
- 나주목 - 제2차 여요전쟁 시기 요성종이 40만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자 당시 고려의 국왕 현종이 개경을 떠나 나주로 피난했다. 나주는 건국초기 태조 왕건이 나주호족들을 포섭하여 고려왕실의 친위세력으로 만들었다. 나주는 2차 여요전쟁 기간 동안 임시수도 역할을 담당했다.
- 강도(江都) - 여몽전쟁 기간인 1232년부터 1270년까지 지금의 강화도에 있었던 고려의 임시수도.
- 복주목 - 홍건적의 난 때 홍건적이 10만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자 당시 고려의 국왕 공민왕이 개경을 떠나 안동으로 피난했다. 건국 초기 태조 왕건이 안동 호족들을 포섭하여 고려 왕실의 친위세력으로 만들었다. 안동은 2차 홍건적의 난 기간 동안 임시수도 역할을 담당했다.
- 조선시대
- 평양부 -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진격으로 인하여 임시수도로 삼았던 두번째 고을. 당시 전쟁 준비를 위해서 평양성 내부에 쌀을 비롯한 곡식, 군수물자를 비축하였으나 선조의 의주 피난 결정으로 인하여 함락되었다.
- 의주부 -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한양으로 진격하자 당시 조선의 국왕 선조가 한양을 떠나 의주목으로 피난했다. 당시 의주목은 명나라와 가까워서 유사시에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여러 이점이 있었으므로 임진왜란 기간 동안 임시수도 역할을 담당했다.
- 강화도호부 -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이 한양으로 진격하자 당시 조선의 국왕 인조가 여몽전쟁 시절처럼 한양을 떠나 강화도로 피난했다.
- 남한산성 -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다시 한양으로 진격하자 인조는 원래 정묘호란 때와 같이 강화도로 피난하려고 했으나 이미 청군에 의해 길이 막혀서 남한산성으로 갔다. 그러나 결국 항복하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만다.
- 현대
- 대전시 - 1950년 6월 27일 ~ 7월 16일. 6.25 전쟁 당시 수도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에 정부를 대전으로 이전했고 대전 전투 도중 대구로 이전했다. 대전은 4일 뒤인 7월 20일 북한군에 점령되었다.
- 대구시 - 1950년 7월 16일 ~ 8월 17일. 다부동 전투 전후로 대구도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최종적으로 부산으로 정부를 이전했다. 기간이 짧아서 부산시에 비해 임시수도였다는 존재감은 낮은 편이다. 다만 다부동 전투에서 방어하는 데 성공하고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면서 대구는 끝내 인민군에게 함락당하진 않았다.[10]
- 부산시 - 1950년 8월 18일 ~ 10월 27일, 1951년 1월 4일 ~ 1953년 8월 14일. 아마도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임시수도일 것이다. 임시수도였던 기간이 대전이나 대구보다 훨씬 길었기 때문에 6.25 전쟁 당시 임시수도로는 부산이 가장 유명하다. 서울 탈환 이후 북진한 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한 다음날인 10월 27일 환도가 이뤄졌으나 1951년 1월 4일 1.4 후퇴로 서울이 재점령되자 다시 임시수도가 되었다. 이후 UN군의 반격으로 서울을 재탈환했지만 환도는 하지 않고 정전 후인 1953년 8월 14일까지 부산을 임시수도로 유지한다. 부산시는 이를 기리고자 서구 부민동에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관저를 임시수도기념관으로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 시기에 발췌 개헌(부산정치파동), 제2대 대통령 선거 등의 사건이 있었다. 현재 관련 유적들이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하고 있다.
- 평양시 - 1948년 9월 9일 ~ 1972년 12월 27일. 북한 정권 수립 이후 북한은 헌법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首部, 수도)는 서울시다"라는 조항을 삽입하고 별도의 법률을 통해서 평양을 임시수도로 규정하였지만 1972년 사회주의 헌법 통과 이후 정식 수도를 평양으로 바꾸었다.
- 강계시 - 1950년 10월 12일 ~ 1950년 12월 6일.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평양을 향해 북진해 오자 북한 정부는 1950년 10월 12일 평양에서 철수해 강계로 이동하였다.[11]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12월 6일 평양을 재점령한 후 평양으로 환도했다.[12]
3.2.2. 중국사
- 베이징시 - 명나라 초기 3대 황제 영락제가 정난의 변 이후 난징시에서 즉위한 뒤 연왕(燕王)시절 자신의 본거지였던 베이징으로 천도한 후 경사(京師)[13]라고 불렀는데 이후 황제들의 치세에 여러 번 난징을 다시 경사(京師)로 고치고 베이징을 임시수도를 의미하는 행재(行在)로 고치는 등[14] 몇 차례 정식 수도와 임시 수도 지위를 오가다가 명나라의 정식 수도로 정착했다. 참고로 명대에는 난징에도 수도 베이징과 마찬가지로 중앙 관청들이 있었고 베이징에서 쓰는 북방 관화 이외에 난징에서 쓰는 남방 관화가 따로 존재했다.
- 항저우시 - 전술한 행재(行在)의 시조.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들어서자 언젠가는 반드시 수도 카이펑시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항저우를 행재라 하여[15] 임시수도로 정했다. 실제로는 망할 때까지 계속 항저우에 있었으나 명목상으로는 끝까지 임시수도로 남았다. 이 때문에 항저우의 궁성이나 관청은 크게 짓지 않았고 능묘도 초라한 편이었다.
- 뤄양시 -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때 상하이에서 격전이 벌어지자 일본군이 장강을 따라 난징을 침공할 것을 우려한 장제스가 잠시 뤄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 청두시 - 중일전쟁 때 충칭까지 함락되면 이곳이 수도가 될 예정이었으나 충칭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국공내전 중 충칭이 함락되자 이곳이 국민정부의 최후의 수도가 되었으나 군벌들이 반기를 일으켜 공산군에 항복함으로 공산군에게 넘어갔다. 청두가 함락되기 직전 장제스는 국부천대로 타이완으로 도망가게 된다. 이후 중화민국의 수도는 사실상 타이베이시가 되었다. 이후의 수도 문제는 중화민국의 국가 정체성과도 연결되는 복잡한 문제인데 국부천대 및 양안관계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 사실 청두의 임시수도로의 역사는 당나라 시대에 더 유명한데 안사의 난, 황소의 난 때 두 번이나 임시수도가 되었다.[16]
3.2.3. 기타
- 아크레, 티레 - 예루살렘 왕국이 하틴 전투에서 패배하여 수도 예루살렘을 상실한 후 임시수도가 되었으며 아크레는 멸망 당시 임시수도이기도 했다. 기간은 다음과 같다. 티레(1187년 - 1191년), 아크레(1191년 - 1229년 / 1244년 - 1291년)[17]
- 칼리아리 - 나폴레옹 전쟁 당시 본토 피에몬테, 발레다오스타, 니차, 사보이아를 빼앗긴 사르데냐 왕국의 임시수도. 1814년 파리 조약으로 실지를 모두 되찾아 토리노로 환도하였다.
- 리우데자네이루 - 이베리아 반도 전쟁 시기 포르투갈의 임시수도로 직선거리만 7,700km가 넘고 대서양과 적도를 뛰어넘으며 무려 식민지로 피난을 간 이 분야 레전드. 원래 수도인 리스본을 포함한 본토가 나폴레옹에게 점령되어 식민지 브라질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브라질 독립 이후에는 브라질리아로 천도하기 전까지 정식 수도였다.
- 쾨니히스베르크 -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당시 베를린을 점령당했던 프로이센 왕국의 임시수도. 틸지트 조약 이후 베를린으로 환도하였다.
- 보르도 - 1910년대에 제1차 세계 대전을 맞이한 프랑스군이 독일 제국군에게 밀리자 프랑스 정부가 이곳으로 이전했다가 전시 체제의 안정화에 성공하면서 파리로 환도했는데 1940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을 맞이한 프랑스군이 독일 국방군에게 밀리자 프랑스 정부가 이곳으로 이전했다가 비시 프랑스 정부를 수립하면서 비시를 임시수도로 정했다.
- 니시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세르비아 왕국의 임시수도로 수도. 베오그라드가 수도를 흐르는 도나우 강만 건너면 바로 적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인 최전방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터지자 세르비아 정부는 후방에 위치한 니시로 이동했다. 1915년 불가리아 왕국의 침공으로 전 국토가 동맹국에게 점령당한 후에는 프리슈티나를 거쳐 그리스 케르키라 섬에 망명정부를 차려 항전했다.
- 카우나스 - 1918년 독립한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의 임시수도. 정식 수도 빌뉴스는 폴란드 제2공화국이 점령 중이었다.
- 발렌시아, 바르셀로나 - 스페인 내전 당시 스페인 제2공화국의 임시수도. 수도 마드리드는 전쟁 최후반까지 가까스로 공화국이 사수하기는 했으나 프랑코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최전방이 된고로 1936년 10월부터 발렌시아를 임시수도로 삼았고 1년 후인 1937년 10월 바르셀로나로 이전했다. 전쟁 후반에 프랑코군의 카탈루냐 공세로 바르셀로나가 함락당하자 다시 발렌시아로 돌아왔으나 그때쯤 되면 이미 전쟁의 승패는 결정난 상황이었다.
- 욕야카르타 - 인도네시아 독립전쟁(1945~1949년)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의 임시수도였다.
- 부키팅기 -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와중인 1948년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의 임시수도인 욕야카르타를 함락시키자 인도네시아는 수도를 부키팅기로 옮겨 항전을 벌였다.
- 텔아비브 - 1948년부터 1977년까지 이스라엘의 임시수도였다. 6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도시계획에 착수하여 1968년부터 1992년까지 국회의사당과 정부종합청사와 대법원 및 공안부와 경찰청과[18] 문화복지부처들, 이스라엘방송공단과 이스라엘은행을 차례로 이전했으니 1977년에 이르러 예루살렘이 명실상부한 행정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국내외의 정세가 불안하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의 총력전에 대비하여 방위기관(국방부와 참모본부, 육해공군청과 국군사령부들), 정보기관 본부(모사드, 신 베트, 아만), 경제산업부처들, 국유기업들과 증권거래소, 대사관과 공사관과 영사관은[19] 여전히 텔아비브 관구에 있다.
- 벵가지 - 2011년 제1차 리비아 내전 때 혁명파의 임시수도.
- 바자라크 - 판지시르 주의 주도로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로 인하여 수도 카불을 함락당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정부가 판지시르에서 부통령 암룰라 살레를 대통령으로 선언한 뒤 판지시르에서 저항했지만 2021년 9월 5일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군대에 함락되었다. 이슬람 공화국 저항 세력은 판지시르 주의 계곡 지대로 후퇴하여 저항을 이어가고 있다.
3.3. 한때의 후보
- 쿠이비셰프(현재명 사마라)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향해 밀고 들어오자 소련 정부가 수도를 이곳으로 임시 이전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으나 모스크바 사수를 결심한 스탈린에 의해 거부되었다. 다만 유사시를 대비해 대부분의 기관은 쿠이비셰프를 비롯해 스베르들롭스크, 카잔, 튜멘 등 후방의 여러 도시로 이전하였다.
- 수원 - 6.25 전쟁 발발 당시 정부에서 제일 처음 천도를 결정한 곳이 수원이었다. 단, 발표된 지 얼마 안 지나고 금세 취소된 데다 너무 빨리 내려와 버린 북한군과 한국 정부(...) 때문에 정작 실제 임시수도는 달아보지 못했다.
- 공주 장기지구 - 박정희 정권은 서울이 군사적으로 전방인 문제와 서울의 집중화를 해결할 목적[20]으로, 통일 이후에는 서울로 환도한다는 전제조건 아래 비교적 후방 지역에 임시행정수도를 건설한다는 소위 백지계획을 세웠다. 1977년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키고 충청지방의 논산, 보은, 공주, 천안시[21] 등을 후보지로 검토하여 '공주 장기지구'를 임시행정수도 부지로 최종 낙점하였다.[22][23] 구체적인 도시계획[24][25]과 도시 건설, 공공기관 이전 일정까지 준비했다. 그러나 1979년 말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위기 및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압박으로 인한 안보위기 등으로 추진동력이 떨어지다가 결국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백지계획은 말 그대로 백지화되었다. 다만 이 계획은 훗날 둔산신도시 개발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2004년 참여정부의 신행정수도 추진으로 간접적으로 계승되었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특별자치시)가 탄생하였다. 상기 각주에서 언급됐듯이 현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특별자치시)의 대부분은 임시행정수도 계획의 동쪽 시가지에 해당된다. 당시 말단 실무자로 참여했던 김진애 의원의 포스팅. 박정희의 수도이전 계획과 현 행정도시의 입지 비교
3.4. 대중 매체
4. 관련 문서
[1] 현 임시수도 기념관 건물.[2] 대통령비서실, 국무총리실, 내무부, 외무부, 국방부, 법무부, 국무회의소, 총무처, 공보처, 법제처, 기획처, 농림부 등이 입주했다.[3] 지금의 롯데백화점 광복점 위치. 문교부, 보건부, 사회부, 서울시청 등이 입주했다.[4] 재무부, 기획처가 입주했다.[5] 대법원, 서울고등법원, 서울지방법원 등이 입주했다.[6] 국회가 입주했다. 이후 무덕전으로 옮겼다.[7] 천수이볜 정부가 감행하였다.[8] 수도 플리머스뿐만 아니라 플리머스를 포함한 섬의 남쪽 절반 전체가 화산 폭발로 인해 출입 금지 지역이 되었다.[9] 임시수도라기보다는 고대 한반도 수도 특유의 전시성~평시성 체제에 가깝다. 수도 바로 근처에 전시에 농성할 수 있는 성을 쌓아 전시에 대비하는 것.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도 국내성(평시성)과 환도산성(전시성) 이중 구조였고 한성백제의 수도인 위례성 역시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북성(평시성)과 남성(전시성) 이중 구조였으며 신라의 명활산성도 그런 역할을 하는 성이다.[10] 그래도 낙동강 전투 중에는 대구역 등지에 포탄이 떨어지기도 했다.[11] 이때 방송으로는 정부가 신의주시로 이동한다고 선전하였다.[12] 지금도 유사시 방어하기 힘든 평양 대신 개마고원 안쪽의 후방 강계가 임시수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대비가 되어 있다고 한다.[13] '수도'를 의미[14] 물론 베이징을 행재로 고쳤을 때에도 황제들은 베이징에 머물렀다.[15] 임안(臨安)이라고도 불렀다.[16] 사실 임시수도라는 인식조차 없어서 지나치기 쉬운데 촉한도 성도는 임시수도 취급했다. 그 증거로 수도라고 하는데 성도를 성도윤으로 승급하지 않고 끝까지 촉군으로 놔뒀고 법적 수도는 장안이었다. (낙양이 아닌 이유는 손권의 칭제 이후 장차 위를 멸망시킬 경우 삼하(하남(낙양), 하내, 하동) 지역을 오의 영유권으로 인정했기 때문)[17] 1229년에서 1244년 기간 동안에는 예루살렘이 불완전하게나마 회복되었다.[18] 소방청은 중부 관구의 리숀 레치욘 시에 있고 교도청은 중부 관구의 람라 시에 있다.[19] 1980년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예루살렘 관구에 상주하는 대사급 외교공관들의 철수를 요구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478호에 따라 국제사회의 주권국가들 가운데 약 50개국(미국, 러시아, 독일, 체코, 바누아투 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행정수도로 탈바꿈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20] 서울 집중으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대표적으로 상하수도 문제)는 당시 정권에서도 큰 골칫거리라 서울 편입 예정지였던 지금의 광명시 북부마저도 최규하 정부까지는 서울 편입을 보류했다가 전두환이 집권하자마자 배제했을 정도였다.[21] 천안(당시 천원군) 목천 지역은 훗날 독립기념관이 들어서게 된다. 행정수도 이전계획에 참여했던 김재익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독립기념관 입지 선정에도 관여하면서 교통과 지세가 좋아 행정수도 후보지 중 하나로 삼았던 목천 지역(행정수도 이전계획 당시 명칭은 '천원지구')에 독립기념관이 들어서게 했다.[22] 정부종합청사·국회·대법원 등 수도 기능이 입지할 부지의 중심부가 당시 행정구역으로 공주군 장기면(현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에 해당되어 '장기지구'란 이름이 붙었다. 이 때의 부지는 현재의 공주시 신관동·월송동, 우성면·의당면 각 일부,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서부, 연기면·금남면 각 일부 등에 해당됐다. 즉, 당시 임시행정수도 계획의 동쪽 지역은 오늘날 세종특별자치시(행정중심복합도시)의 서쪽 내지는 중심부에 해당된다. 공주군 장기면의 대부분은 세종시에 흡수되었으며 남은 3개리는 월송동에 편입되었다.[23] 장기지구는 원래 초기 검토 대상에는 없었으며 '공주지구'와 '대평지구'라는 2개의 지구의 각 일부였다. 이 중 대평지구는 공교롭게도 오늘날 행정중심복합도시와 거의 일치한다(!). 선견지명? 그런데 정작 당시 선정위원들의 최종평가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가 그 옆의 공주지구(현재의 공주시 시가지에 더 가까운 부지로, 역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음)와 절충해 만든 장기지구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게 되어 최종 확정됐다.[24] 심지어 1996년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주경기장을 포함한 스포츠타운 부지까지 지정되어 있었다.[25] 박정희 정부(대한민국 제3공화국, 대한민국 제4공화국) 시절에 테크노크라트로 유명한 오원철이 프로젝트를 총괄했으며 참여한 전문가들로 경제학자이자 관료인 김재익·박승·김만제, 건축가 김수근, 건축·도시계획가이자 전 국회의원인 김진애 등이 있다. 특히 도시계획, 건축 등의 분야에서는 국가적인 대규모 프로젝트였음을 반영하듯 당시 한국 최고의 전문가들(앞서 언급된 김수근을 비롯해 엄덕문, 윤장섭, 박병주, 주종원, 강병기, 황용주 등)이 대거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