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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이름은 이상길(李尙吉), 본관은 벽진(碧珍)이며 자는 사우(士祐), 호는 동천(東川), 시호는 충숙(忠肅)이다.2. 생애
1556년(명종 11년)에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4세이던 1579년(선조 13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6년 뒤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감찰을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호조와 병조의 좌랑 직을 거쳐 사간원의 정언 직과 지제교 직을 맡아 일했다.임진왜란 때에는 예조 좌랑으로서 선조의 어가를 따라갔고, 어가가 평양에 도착할 무렵에 강원감사로부터 종사관으로 임명받았다. 1594년(선조 27년)에는 병조 정랑과 익산 군수 직을 제수받았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군사들을 모아 남원으로 내려가 명나라 군과 합류하여 남원성 전투에서 왜군과 싸웠다. 이때 이상길의 부대에서 탈영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본 명나라 군이 감탄하며 상을 주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599년(선조 32년)에는 전라도 광주목의 목사로 부임했는데 이때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민생 안정에 힘을 기울여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래서 그 공로로 조정에서 그의 품계를 정3품 통정대부로 승격시켰다.
1602년(선조 35년)에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황해도 풍천으로 귀양갔다. 왜냐하면 그가 사간원 정언으로 있던 시절에 정여립의 난이 일어났는데, 그때 정인홍, 최영경 등을 정여립 일당으로 몰았고 최영경이 그 여파로 옥사했기 때문이었다.# 6년 가까이 유배 생활을 하다가 1607년(선조 40년)에 풀려났다. 이후에는 강원도 회양부사, 평안도 안주목사, 평안도 용천부사 등 다시 지방관으로서 활동했다. 1616년(광해군 8년)에는 호조 참의로 임명받기도 했다. 그러나 하필 과거에 악연이 있었던 정인홍이 당시 실세였기 때문에 결국 얼마 못 가서 파직당하고 말았다.# 이후 동지사로 임명받아 명나라에 다녀오고, 서도 독운사 직을 제수받아 황해도 지역에서 군인들의 급료로 쓸 식량을 실어다 주는 일을 관리 감독했다.
용천 부사로 있던 1621년(광해군 13년)에 후금에 쫓긴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압록강 하구에 있는 조선 영토 가도에 주둔하자 모문룡을 설득하려 했다.# 인조가 즉위한 후에는 동부승지에 제수받았다가 곧 병조 참의로 임명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접반사로서 모문룡을 상대하는 조선 측 대표가 되었다.
이후 평안감사로 임명받았는데, 재직 중이던 1624년(인조 2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안주에서 이괄 가족들의 목을 베는 등 반란 진압에 앞장섰다. 그 공로로 훗날 종2품 가의대부 품계를 받았다. 1년 뒤 평안감사 직에서 물러났는데 인조는 이상길이 일을 잘했다고 하여 다시 임명하려 했으나 이상길이 사양하여 무산되었고, 대신 호조참판 겸 부총관 직을 맡게 되었다.
1626년(인조 4년)에는 모문룡이 군사를 일으킬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돌아 민심이 흉흉해지자 인조의 명을 받고 모문룡의 동태를 살폈다. 다음해인 1627년(인조 5년)에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군량미 수천 석을 수운을 통해 인조가 피신해있던 강화도로 보냈고 용천에서 청나라 군과 싸워 승리했다. 이듬해에는 예조 참판 직을 맡았고 전주부윤으로 부임했으나 하필 그 시기에 부 내에서 역모를 꾀하다 사형당한 사람이 있어 얼마 못가 파직당하고 말았다.
1632년(인조 10년)에는 병조 참판 직을 맡았고 대사간과 대사헌도 두 번 지냈다. 3년 뒤인 1635년(인조 13년)에는 80세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자헌대부 품계를 수여받고 공조판서를 역임했다.
1636년(인조 14년) 말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이상길은 이때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들고 강화도로 피난갔다. 다음해인 1637년(인조 15년) 1월에 조선의 패배가 가까워지자 이에 부끄러움을 느껴 목을 매어 순절했다. 향년 82세였다.[1]
3. 사후
인조는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좌의정 직을 추증했고 강화도에 있는 충렬사에 그의 위패를 받들어 모시게 했다. 인조의 아들 효종은 1657년(효종 8년)에 시호 '충숙(忠肅)'을 하사했으며, 그 때 시장[2]을 김육이 적었다.1666년(현종 7년)에는 효종의 아들 현종이 그의 신위를 불천위[3]로 지정하고 사당 안에 초상화를 모셔 보관하도록 했다. 사당은 원래 한성부 가회동에 세웠는데, 훗날 순조 시기에 이상길의 종손이 남원으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에 현재는 전라북도 남원시 덕과면 사곡리에 자리하고 있다.
4. 영정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67호[4] | ← | 69호 | → | 70호 |
흥천사 명부전 | 충숙이공 영정 | 충숙공 이상길 묘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9호 | |
충숙이공 영정 忠肅李公影幀 | |
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로 57 (하계동) |
시대 | 조선 시대 |
분류 | 유물 / 일반회화 / 인물화 / 초상화 |
수량 / 면적 | 1폭 |
지정연도 | 1988년 4월 23일 |
관리자 (관리단체) | 이상원# |
<colbgcolor=#C00D45> 이상길의 영정[5] |
가로 93cm, 세로 186.5cm로, 비단에 그렸다. 그림 속에서 이상길은 연한 분홍빛의 단령과 검은 사모를 착용하고 몸을 약간 오른쪽으로 튼 채 의자에 앉은 모습을 하고 있다.
5. 묘역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69호 | ← | 70호 | → | 71호 |
충숙이공 영정 | 충숙공 이상길 묘역 | 옛 제일은행 본점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0호 | |
충숙공 이상길 묘역 忠肅公 李尙吉 墓域 | |
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 산 16-1번지 |
시대 | 조선 시대 |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
수량 / 면적 | 분묘 2基, 석물 7基, 토지 237.1㎡ |
지정연도 | 1988년 4월 23일 |
관리자 (관리단체) | 벽진 이씨 충숙공파 종회 |
<colbgcolor=#C00D45> 이상길 묘역에 있는 이상길의 신도비와 비각[6] |
현재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에 이상길의 묘가 있다.
이상길의 묘 동남쪽에 그의 일생과 업적을 적은 신도비가 있다. 받침돌 위에 비신을 올리고 그 위에 팔작지붕 형태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현재 신도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이 세워져있는데 이는 조선시대가 아니라 현대에 들어 지은 것이다.
[1]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를 적용한 기준이다. 만으로는 80세이다.[2] 諡狀. 어느 신하에게 시호를 내려달라고 왕에게 건의할 때 그 신하의 생존 행적을 적어 올린 글.[3] 5대가 지나도 계속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나라에서 정한 신위.[4] 68호 봉원사 대웅전은 화재로 불탔기 때문에 서울특별시에서 1993년 9월 23일에 해제했다.[5]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6]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