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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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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파
ꨌꩌꨛꨩ
Chiêm Thành | 占城(占婆)
파일:Locator-map-Champa.webp
참파의 강역
192 ~ 1832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후한 응우옌 왕조
위치 동남아시아
수도 싱하푸라 (605~757)
비라푸라 [1](757~875)
인드라푸라 (875~982)
비자야 (982~1471)
카우타라 지방(757~1471)
판두랑가[2] 지방 (1471~1832)
정치 체제 만달라 체제(도시국가 연맹, 군주제)
국가원수 (라자디라자, 포타나라야)[3]
주요 국왕 건국자 우련
전성기 제봉아
말대 반라차수
언어 참어, 산스크리트어, 동남아시아 군소언어
종교 토속신앙, 힌두교, 대승 불교, 수니파 이슬람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192년 건국
1471년 베트남의 참파 정복
1832년 응우옌 왕조의 공식 합병
현재 국가
[[베트남|
파일:베트남 국기.svg
베트남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 한자: 입읍(林邑, Lâm Ấp), 환왕(環王) 占婆(점파), 占城(점성, Chiêm Thành)
  • 베트남어: Chăm Pa(짬빠)
  • 영어: Champa

1. 개요2. 상세
2.1. 역사
2.1.1. 시작2.1.2. 마지막 부흥기2.1.3. 몰락2.1.4. 몰락한 이유2.1.5. 멸망 이후
2.2. 참파의 도시 국가2.3. 역대 참파 국왕
2.3.1. 주요 국왕
2.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서기 192년부터 1832년까지 무려 1600여년 동안 지금의 베트남 중남부 지역에 존재했던 참족의 나라.

2. 상세

베트남에 흡수되어 존재하지 않는데다 한국인들이 동남아시아 역사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역 내 강자인 미얀마, 태국, 베트남이 대두되기 전부터 동남아 지역의 강자였다. 현 캄보디아의 전신인 크메르 제국의 전성기 시절에도 일진일퇴를 주고 받던 국가이다. 앙코르와트에 부조된 바나나잎 모자를 쓴 적들이 바로 이들이다.[4] 사실상 베트남 역사상 최대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은 참파 말고도 프랑스, 미국, 몽골, 일본, 캄보디아 등등 적수였던 여러 국가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투쟁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반면 참파는 베트남과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대립과 전쟁을 반복해왔다. 베트남의 역사 자체가 참파를 정복해가며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참파와 비교할 만한 베트남의 숙적은 수천 년간 침략과 통치를 반복한 중국, 그리고 중세 이후 인도차이나 반도의 패권을 두고 수백 년간 경쟁한 태국[5] 정도이다.

참파를 세운 참족들은 베트남인과 인종적으로 다른 말레이계 민족이다. 이들은 오늘날의 보르네오 섬 일대에서 거주하다가, 2천 년 전에 현 베트남 중남부로 이동해왔으며, 동아시아한자 문화권이었던 베트남과 달리 힌두교를 받아들인 전형적인 인도-동남아 문화권 민족이었기 때문에 베트남과 참파 사이의 차이가 매우 컸다. 이후에 두 나라 모두 대승불교를 주로 믿게 되었던 적도 있었지만 베트남은 유교, 도교 vs 참파는 힌두교, 이슬람[6]으로 달랐다. 14세기 초에 참파의 자야신하바르만 3세는 대월국 영종 황제의 여동생인 현진공주(玄珍公主)를 왕비로 맞았으나 그가 1년 만에 죽자 현진공주는 사티(순장)을 피해 대월국으로 망명한 일도 있었다.

베트남의 역사는 북부에 있던 베트남이 남부의 참파를 밀어붙이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종 참파가 베트남을 역으로 밀어 붙이며 수도까지 함락시킨 적도 있었지만[7] 전체적으로 보면 베트남이 참파를 상대로 우세를 점했다. 참파는 14세기 말부터 서서히 베트남에 밀리더니 18세기에는 베트남이 참파의 근거지인 현 베트남 남부까지 들어오면서 베트남의 종속국이 되어 버렸다. 결국 19세기 베트남에 완전히 정복당하고 베트남의 소수민족이 되었다.

북베트남인과 남베트남인의 외모가 서로 달라 보이는 이유도 남베트남인의 혈통에 참족의 영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중국 남부에서 남하한 세력이 주가 되어 형성된 북베트남인은 외모가 동북아인과 비슷해 보이는 반면, 동남아 토착 인종이었던 참족의 영향이 큰 남베트남인은 캄보디아인과 비슷해 보인다.[8]

2.1. 역사

참파의 역사.

2.1.1. 시작

참파는 베트남인들과는 다른 민족인 말레이계 참인들의 나라였다. 이 말레이인들은 2세기 초반부터 후한령 베트남 남부로 쳐들어와 한나라 관리들을 죽이곤 했다. 그러다가 192년에 중국 관리 출신인 우련[9]이 한나라령 베트남 남단인 교주 일남군[10]에 '임읍(林邑)'을 세웠으며, 이후 '환왕(環王)', '점성(占城)'. '참파(占波:점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초창기에는 건국자 우련이 중국화된 참파인이고, 제2왕조 초대 국왕인 범문(范文)이 중국 양주 출신 상인이어서, 그의 후손들이 범씨(范氏) 성을 사용하면서 중국 문화권에 속했지만, 크메르로부터 불교, 힌두교, 인도 문화를 도입하면서, 중국식 이름을 버리고 산스크리트 이름을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등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처럼 인도 문화권이 되었다.

베트남은 화교가 주민의 대부분인 싱가포르를 제외하면[11], 한자를 사용하고 유교, 불교, 도교를 받아들이는 등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중국 문화권에 속한다. 그래서 베트남과 참파는 인종적, 문화적으로 매우 달랐다. 그렇기에 북부에 자리잡은 베트남과 대립했으며, 자주 전쟁을 벌였다.

국력이 융성하던 시기에는 인근 캄보디아를 수시로 공격하고, 중국 해남도 일대까지 원정을 다녀오기도 했다.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몰아붙이던 때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밀렸으며, 몽골쿠빌라이 칸베트남 원정에 나설 때 남북 양쪽으로 진공하면서 참파를 점령하였기 때문에 비록 베트남이 몽골을 격퇴시켰어도 참파의 피해가 막심했다. 그 후 참파는 몇 세기에 걸쳐서 서서히 남쪽으로 밀려났다.

2.1.2. 마지막 부흥기

참파의 마지막 부흥기는 포 비나수오르, 베트남어로는 일명 쩨봉응아(制蓬峨, 제봉아)가 참파의 국왕으로 있었던 때였다. 그는 1360년 즉위하자마자 베트남에 사절을 파견하여 베트남이 빼앗아간 옛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고, 1361년~1390년에 걸쳐서 3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당시 베트남의 쩐 왕조를 공격하여 베트남을 크게 몰아붙였다. 특히 1371년에는 당시 왕도였던 탕롱 성(지금의 하노이에 위치함)을 불태워 버리는 등 엄청난 패기를 발산한다. 1377년에는 당시 친정에 나서 참파를 공격하였던 쩐 왕조의 황제 예종(睿宗)을 전사시킨 뒤, 또 다시 탕롱을 털었고, 그 이듬 해에도 또 탕롱을 털었다. 포 비나수오르 왕의 재위기간 중에 베트남의 수도 탕롱은 세 번에 걸쳐 약탈당했고, 현재의 베트남 중부 지역까지 내려왔던 베트남의 영토는 베트남이 중국의 지배에서 갓 벗어났을 무렵 정도까지 북쪽으로 밀려나 수축될 정도였다. 그리고 포 비나수르 재위기 이슬람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어 왕 자신도 무슬림으로 개종하였으니 포 비나수오르 왕은 그야말로 참파 왕국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명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390년 베트남과의 전투에서 포 비나수오르가 전사한 뒤, 카리스마적인 인물을 잃어버린 참파의 기세는 급속도로 수그러들게 된다.

물론, 베트남 역시 큰 피해를 받았기에 참파가 곧장 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407년부터 20여 년간 명나라가 베트남을 지배하기도 했던지라 20여 년간 구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명나라의 지배에서 다시 독립한 베트남 후 레 왕조의 태조는 당시 참파의 왕이었던 자야 인드라바르만 6세와 공식적으로 관계를 회복한다.

2.1.3. 몰락

1441년 자야 인드라바르만 6세가 사망하자, 참파에서는 후계자와 관련해 내전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참파의 힘이 약화되었으며, 베트남은 이를 기회로 보아 1446년 참파의 중심지인 비자야를 급습하였다.

결정적으로 참파는 1471년 마하 사잔 왕이 당시 베트남 남부 국경을 기습적으로 공격했으나 그 역풍은 대단했다. 화가 난 베트남 후 레 왕조성종(聖宗)이 친히 군사 25만을 이끌고 수도 비자야 성으로 쳐들어가 당시 참파의 왕이었던 마하사잔(베트남어로는 '반 라쩨트안(반라차전)')을 생포하면서 영토를 대부분 빼앗겨 베트남의 속국이 되었고, 다시는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없었다.

이후 참파의 영토는 베트남에 의해 갈가리 찢겨져 분열된다. 이때 참파는 판두랑가[12] 지역으로 완전히 밀려 버리면서, 그 이후로는 베트남 치하의 종속국으로 형식상으로만 유지되었다. 베트남은 외왕내제 체제였는데, 내부적으로 황제를 자칭하려면 지배하는 번국(藩國)이 필요했기 때문. 베트남의 황제들은 역사적으로 주변 라오스캄보디아, 참파를 정벌하고 그 지역에 친베트남계 왕을 옹립시켜 형식상 나라(번국藩國)로 인정하고 베트남 국왕 자신은 황제 노릇을 했다.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판두랑가 지역의 참파는 17세기 완씨광남국(廣南國,응우옌씨 정권)과 일진일퇴를 되풀이하다가 1692년 참파 포사우트(Po Saot)왕이 완씨에게 패배하여 빈투언푸(平順府, 현재의 빈투언닌투언)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바로 참파 사람들이 큰 반란을 일으키고 현지에 역병까지 발생하자 베트남은 직접 통치가 어려워 포사우트왕의 동생 포삭티라이다파티(Po Saktirai da putih)를 투안탄왕(순성진順城鎭王)으로 책봉하고 투안탄국을 두었다. 1712년에는 베트남과 투안탄국 사이에 의정5조(議定五條, Ngũ điều Nghị định)가 체결되었다. 마침내 1832년 응우옌 왕조가 투안탄국을 폐지하고 빈투언성(Tỉnh Bình Thuận / 平順省)을 설치하면서 참파왕국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참파왕국 → 투안탄(순성진,順城鎭)국(1695~1832) → 1832년 베트남 빈투언성(평순성,平順省) 설치의 과정은 류큐왕국 → 류큐번국(1872~1879) → 1879년 일본 오키나와현 설치와 유사한 양상이다.

2.1.4. 몰락한 이유

사실 참파가 베트남에 인구는 밀릴 지 몰라도 풍부한 쌀 생산량과 비옥한 중부지대를 점유하고 있었고 무역으로 인한 재화도 풍부했기에 베트남과 전쟁하는 데 있어서 동등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수천 년 동안 중국 왕조들을 상대로 전쟁을 해오던 터라 군인들의 전투 경험이 풍부했다. 또한 베트남은 중국의 유학[13]과 중앙집권체제[14]를 도입하면서 참파보다 빠르게 국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고, 그래서 빠른 시간 내에 대규모 군대를 소집하여 참파의 공격에 대응하고 오히려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반면 참파는 16세기 중엽까지 다른 동남아 각국이나 말레이 반도이슬람 국가들처럼 도시국가들의 연맹체제를 유지하였던지라 도시국가들 중에 가장 영향력이 큰 도시의 왕이 참파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었다.[15] 이러한 연맹체제의 특성상 군사소집 속도가 중앙집권화된 나라에 비해 느릴 수밖에 없다. 각 도시들에서 군사들을 징발해야 했고 또 소집에 응하지 않는 도시들도 있었으니 전쟁수행이 여러모로 불편했다. 결국 참파는 베트남의 대규모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사로 치면 중앙집권에 도달하지 못한 가야가 중앙집권에 성공한 신라에 밀려 결국 멸망하고 흡수당한 과정과 비슷하다.

2.1.5. 멸망 이후

참인들은 베트남에게 서서히 밀려 버리자 캄보디아나 말레이 반도, 태국으로 가서 이슬람이나 불교로 개종하거나 베트남에 남거나 했다. 물론 한때 참파의 왕이 무슬림이었으니 베트남에도 이슬람을 믿는 참인들이 꽤 있다. 그래서 베트남에서 얼마 되지 않는 무슬림들은 참인들이 대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그 후 카티프 수마트 이맘대남국을 상대로 지하드를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민망 황제의 가혹한 진압으로 실패하고 베트남 내 참인들의 독립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반면 캄보디아에서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도움으로 캄보디아 내 참족들이 캄보디아 북동부 몬둘키리 성과 베트남 닥락성 극서부를 중심으로 포 다르마, 레스 코셈, 밤 에누올[16] 등이 피압박민족투쟁통일전선을 결성해 독립을 시도했지만 베트남 공화국, 남베트남 공화국(이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이어받음)과 민주 캄푸치아 양쪽에서 압박을 받다가 밤 에누올이 크메르 루주에 의해 처형당하고 레스 코셈과 포 다르마가 망명하면서 무장 투쟁에 실패하고 잔당들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에 항복하면서 무장해제되어 지금은 베트남, 캄보디아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15세기부터는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현재 참인들의 다수가 이슬람을 믿는다. 정확히 말하면 캄보디아와 말레이시아의 참족은 이슬람을 주로 믿고 베트남의 참족들은 힌두교를 주로 믿는다. 참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인 경위는 이렇다. 참인들은 계속되는 베트남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바다건너 말레이반도에 위치한 조호르 술탄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왕도 있었고 자위 문자도 가져오기도 했다. 허나 이 동맹이 도움은 안 됐다. 왜냐하면 참파와 말레이는 너무 멀었고 게다가 이때 조호르 술탄국은 말레이 해협 건너편에 위치한 수마트라 섬에 있는 아체 술탄국하고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베트남 내에서 참파의 후예인 참 족의 인구는 베트남인들에게 동화되거나, 쫓겨나서 현재 약 40만 명 정도만 남아있다. 이외에 캄보디아-베트남 국경지대에도 많이 거주 중. 참족은 베트남보다 캄보디아에 더 많이 산다.[17]

말레이시아에는 1970년대 월남전으로 인해 베트남에서 보트피플들이 왔다는데 소수의 참족도 있었다. 소수의 참족들은 같은 이슬람을 신봉하는 말레이시아에 남아 귀화하기도 했다고 한다.[18]

현 남베트남인들의 혈통에 참족들의 피가 진하게 섞여 있으니 참족은 남베트남인들의 조상으로 볼 수 있다.

우연찮게도 참족을 완전히 멸망시킨 응우옌씨의 대남국자신이 세운 왕국을 무너뜨린데 분노한 스리 마라의 저주를 받아청과 싸우다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 참파와 비슷하게 남베트남으로 나왔다가 참파처럼 내분을 겪다 결국 조직력이 우수한 북베트남에 밀려 멸망했다.근묵자흑(?)의 좋은 예(...)다...

유럽에서도 비슷한 예시가 있는데 아랍인 무슬림나스르 왕조가 왕실간 내분 끝에 라틴 계열 카스티야인카스티야 연합 왕국에 멸망당해 아랍인 대다수가 쫓겨나고 남은 아랍인들은 스페인인들과 개종, 혼혈되고 아랍어 방언인 안달루시아어가 로망스어 계열인 카스티야어로 대체되어 오늘날 안달루시아인의 기원이 되었으며 이들의 문화와 외모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베트남 남부의 참파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19]

2.2. 참파의 도시 국가

순서는 북쪽부터 남쪽이다. 인도 문화의 영향이 커서 산스크리트식 이름이다.
  • 인드라푸라: 인드라의 도시라는 뜻으로 오늘날 다낭에 위치해 있었다. 초기에는 맹주격 도시 국가였으나 제일 북쪽에 있어서 베트남의 압박으로 비자야로 주도권이 넘어가고 가장 먼저 베트남에 정복되었다.
  • 아마라바티: 불멸의 장소라는 뜻으로 인도 신화에서 인드라의 도시인 아마라바티에서 따왔으며 오늘날 꽝응아이 성에 위치해 있었다. 인도에서 동명의 도시가 사타바하나 왕조의 수도이자 안드라프라데시의 주도이기도 하다.
  • 비자야: 승리라는 뜻으로 오늘날 꾸이년에 위치해 있었다. 1000년경부터 참파의 맹주였으나 1471년에 대월이 정복하였다.
  • 카우타라: 오늘날 냐짱에 위치해 있었던 도시국가였다. 포 나가르 사원이 유명하다.
  • 판두랑가: 크리슈나의 다른 이름에서 따왔으며 오늘날 판랑탑짬에 위치해 있었으며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참파 도시국가였다.

2.3. 역대 참파 국왕

참파 왕국은 대체적으로 13세기 말 분열되기 전까지 총 15개의 왕조가 나뉘어졌다고 프랑스의 역사학자 조르주 마스페로(Georges Maspero)가 주장했다. 이하 계보는 참파의 역사에 대한 선구적 연구자로 유명한 조르주 마스페로의 주장을 근거로 씀.[20]

참고로 참파의 초기 국왕들은 제1왕조의 초대 국왕인 우련이 현지인 출신의 중국 관리였고, 제2왕조의 초대 국왕인 범문은 중국인이었기에 중국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중국식 성씨와 이름을 사용했으나, 중후기에는 인도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산스크리트식, 이슬람식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참파의 중후기 국왕의 중국식 이름은 주로 베트남 조정 측에서 한자를 이용하여 베트남어로 음차한 이름으로 남아있다.

2.3.1. 주요 국왕

왕조 대수 산스크리트식 이름 중국식 이름 재위 기간
제1왕조 1 스리 마라
(Sri Mara)
쿠 리엔
(Khu Liên
區連)
/우련
192 ~ ?
.
.
.
제12왕조 전기 59 자야 인드라바르만 4세
(Jaya Indravarman IV)
추아나(鄒亞娜) 1167년 ~ 1190년
크메르의 통치시기
제12왕조 후기 60 자야 파라메슈바라바르만 2세
(Jaya Parameshvaravarman II)
? 1220년 ~ 1252년
.
.
.
63 자야 싱하바르만 3세
(Jayasiṅhavarman III)
쩨먼
(Chế Mân
制旻)
/제민
1288(?) ~ 1307년
64 자야 싱하바르만 4세
(Jayasiṅhavarman IV)
쩨찌
(Chế Chi
制旻)
/제지
1307년 ~ 1312년
.
.
.
제13왕조 68 포 비나수오르
(Po Binasuor)
쩨봉응아
(Chế Bồng Nga
制蓬峩)
/제봉아
1360년 ~ 1390년
.
.
.
제15왕조 75 마하 사잔
(Maha Sajan)
반라짜토안
(Bàn La Trà Toàn
槃羅茶全)
/반라차전
1460년 ~ 1471년
76 마하 사자이
(Maha Sajai)
반라짜주옛
(Bàn La Trà Duyệt
槃羅茶悅)
/반라차열
1471년 ~ 1474년

====# 전체 계보 #====
왕조 대수 산스크리트식 이름 중국식 이름 재위 기간
제1왕조[21] 1 스리 마라
(Sri Mara)
우련(區連)
,<후리엔(Khu Liên)>,[22]
192년 ~ ?
.
.
.
,<2, 3대 미상>,
4 범웅(范熊)
,<팜훙(Phạm Hùng)>,
269년 ~ 284년
5 범일(范逸)
,<팜젓(Phạm Dật)>,
284년 ~ 336년
제2왕조 6 범문(范文)
,<팜반(Phạm Văn)>,
336년 ~ 349년
7 범불(范佛)
,<팜펏(Phạm Phật)>,
349년 ~ 380년?
8 바드라바르만 1세
(Bhadravarman I)
범호달(范胡達)
,<팜호닷(Phạm Hồ Đạt)>,
380년? ~ 413년?
9 강가라자
(Gangaraja)
범적진(范敵眞)
,<팜딕쩐(Phạm Địch Chớn)>,
413년? ~ 415년?
10 마노라타바르만
(Manorathavarman)
마낙랍달발마(馬諾拉笪跋摩)
,<마낙랍닷밧마(Mã Nặc Lạp Đát Bạt Ma)>,
415년?
11 범적문(范敵文)
,<팜딕반(Phạm Địch Văn)>,
415년? ~ 420년
제3왕조 12 범양매(范陽邁)
범양매 1세(范陽邁一世)
,<팜즈엉마이 1세(Phạm Dương Mại I)>,
420년 ~ 431년
13 범돌(范咄)
,<팜솟(Phạm Xót)>,
범양매 2세(范陽邁二世)
,<팜즈엉마이 2세(Phạm Dương Mại II)>,
431년 ~ 446년
14 범신성(范神成)
,<팜턴타인(Phạm Thần Thành)>,
446년 ~ 480년?
15 범당근순(范當根順[23])
,<팜당깡투언(Phạm Đang Căng Thuần)>,
480년? ~ 492년
16 범제농(范諸農)
,<팜쯔농(Phạm Chư Nông)>,
492년 ~ 498년
17 범문관(范文款)
,<팜반떤(Phạm Văn Tẩn)>,
498년 ~ 508년?
18 데바바르만
(Devavarman)
범천개(范天凱)
,<팜티엔커이(Phạm Thiên Khởi)>,
508년? ~ 520년?
19 비자야바르만
(Vijayavarman)
범필취발마(范弼毳跋摩)
,<팜벗또이벗마(Phạm Bật Tôi Bật Ma)>,
520년? ~ 529년?
제4왕조 20 루드라바르만 1세
(Rudravarman I)
고식승개(高式勝鎧)
고식률타라발마(高式律陁羅跋摩)[24]
,<까오특루엇다라벗마(Cao Thức Luật Đà La Bật Ma)>,
고수률타라발마(高戍律陀羅跋摩)[25]
,<까오투루엇다라벗마(Cao Thú Luật Đà La Bật Ma)>,
율타라발마(律陀羅跋摩)
,<루엇다라벗마(Luật Đa La Bật Ma)>,
529년? ~ 565년?
21 샴부바르만
(Ṣambhuvarman)
범범지(范梵志)
,<팜판찌(Phạm Phạn Chi)>,
565년? ~ 629년
22 칸다르파다르마
(Kandharpadharma)
범두려(范頭黎)
,<팜더우레(Phạm Đầu Lê)>,
629년 ~ 640년?
23 바사다르마
(Bhasadharma)
범진룡(范鎭龍)
,<팜쩐롱(Phạm Trấn Long)>,
640년? ~ 645년
24 바드레슈바라바르만
(Bhadreṣvaravarman)
바라문(婆羅門)
,<바라몬(Bà La Môn)>,
645년?
25 참파의 여왕 645년? ~ 653년
26 비크란타바르만 1세
(Vikrantavarman I)
제갈지(諸葛地)
,<쯔깟디아(Chư Cát Địa)>,[26]
653년 ~ 686년?
27 비크란타바르만 2세
(Vikrantavarman II)
건다달마(建多達摩)
,<끼엔다테마(Kiến Đa Thế Ma)>,
686년 ~ 731년
28 루드라바르만 2세
(Rudravarman II)
노타라(盧陀羅)
,<로다라(Lô Đà La)>,
731년 ~ 757년
제5왕조 29 프리티빈드라바르만
(Prithivindravarman)
757년 ~ 774년?
30 사티야바르만
(Satyavarman)
774년 ~ 784년
31 인드라바르만 1세
(Indravarman I)
787년 ~ 801년
32 하리바르만 1세
(Harivarman I)
803년 ~ 817년
33 비크란타바르만 3세
(Vikrantavarman III)
817년 ~ 854년?
제6왕조 34 인드라바르만 2세
(Indravarman II)
석리인다라발마(釋利因陀羅跋摩)
,<딕러이년다라밧마(Dịch Lợi Nhân Đà La Bạt Ma)>,
854년 ~ 893년
35 자야 싱하바르만 1세
(Jaya Siṅhavarman I)
893년 ~ 904년
제7왕조 36 바드라바르만 2세
(Bhadravarman II)
905년 ~ 917년
37 인드라바르만 3세
(Indravarman III)
인덕만(因德漫)
,<년득만(Nhân Đức Man)>,
석리인덕만(釋利因德曼)
,<싸자년득만(Xà Da Nhân Đức Man)>,
918년 ~ 960년
38 자야 인드라바르만 1세
(Jaya Indravarman I)
석리인타반(釋利因陁盤)
,<싸자년지반(Xà Da Nhân Di Bàn)>,
960년 ~ 972년
39 파라메슈바라바르만 1세
(Parameshvaravarman I)
파미세갈인다(波美稅褐印茶)
,<바미투에핫언짜(Ba Mỹ Thuế Hạt Ấn Trà)>,
비미세(篦眉稅)
,<베미투에(Bế Mi Thuế)>, [27]
972년 ~ 982년
40 인드라바르만 4세
(Indravarman IV)
시리타반오일환(施利陀盤呉日歓)
,<티러이다반응오녓호안(Thi Lợi Đà Bàn Ngô Nhựt Hoan)>,
982년 ~ 986년
41 유계종(劉繼宗)
,<르우께똥(Lưu Kế Tông)>,[28]
986년 ~ 988년
제8왕조 42 인드라바르만 5세
(Indravarman V)
양타배(楊陀排)
빙왕라(冰王羅)
,<방브엉라(Băng Vương La)>,[29]
989년 ~ 997년
43 얀 푸 쿠 비자야
(Yan Pu Ku Vijaya)
양보구비다실리(楊普俱毘茶室離)
양보구비다일시리(楊普俱毗茶逸施離)
998년 ~ 1007년
44 하리바르만 2세
(Harivarman II)
시리하리비마저(施離霞離鼻麻底)
시묵배마접(尸嘿排摩惵)
,<티낙바이마지엡(Thi Nặc Bài Ma Diệp>,
1010년 ~ 1030년
45 비크란타바르만 4세
(Vikrantavarman IV)
양보고시리피란덕가발마첩(陽補孤施離皮蘭德加拔麻疊) 1030년 ~ 1041년
46 자야 싱하바르만 2세
(Jaya Siṅhavarman II)
형복시리치성하불(刑卜施離值星霞弗)
작두(乍斗, 乍兜)
,<사다우(Sạ Đẩu)>,[30]
1041년 ~ 1044년
제9왕조 47 자야 파라메슈바라바르만 1세
(Jaya Parameshvaravarman I)
옹니(雍尼)
,<응니(Ứng Ni)>,[31]
1044년 ~ 1060년
48 바드라바르만 3세
(Bhadravarman III)
양복시리율타반마제파
(楊卜尸利律陀般摩提婆)
1061년
49 루드라바르만 3세
(Rudravarman III)
시리률다반마상양보(施里律茶槃麻常楊溥)
제구(第矩[32], 制矩[33])
,<쩨꾸(Chế Củ)>,
1061년 ~ 1074년
제10왕조 50 하리바르만 3세
(Harivarman III)
1074년 ~ 1080년
51 자야 인드라바르만 2세
(Jaya Indravarman II)
제마나(制麻那)
,<쩨마나(Chế Ma Na)>,[34]
1080년
52 파라마보디사트바
(Paramabhodhisatva)
1080년 ~ 1086년
53 자야 인드라바르만 2세
(Jaya Indravarman II)[35]
제마나(制麻那)
,<쩨마나(Chế Ma Na)>,
1186년 ~ 1110년
54 하리바르만 4세
(Harivarman IV)
양복마첩
(楊卜麻疊)[36]
1114년 ~ 1139년
제11왕조 55 자야 인드라바르만 3세
(Jaya Indravarman III)
1139년 ~ 1145년
제12왕조
전기
56 루드라바르만 4세
(Rudravarman IV)
1145년
57 자야 하리바르만 1세
(Jaya Harivarman I)
추시란파(鄒時蘭巴)
제피라필(制皮囉筆)
,<쩨비라붓(Chế Bì La Bút)>,[37]
1147년 ~ 1160년
58 자야 하리바르만 2세
(Jaya Harivarman II)
1162년 ~ 1167년
59 자야 인드라바르만 4세
(Jaya Indravarman IV)
추아나
(鄒亞娜)
1167년 ~ 1190년
크메르의 통치시기
제12왕조
후기
60 자야 파라메슈바라바르만 2세
(Jaya Parameshvaravarman II)
1220년 ~ 1252년
61 자야 인드라바르만 5세
(Jaya Indravarman VI)
1252년 ~ 1265년
62 인드라바르만 6세
(Indravarman IV)
1266년 ~ 1287년
63 자야 싱하바르만 3세
(Jayasiṅhavarman III)
제민(制旻)
,<쩨먼(Chế Mân)>,[38]
1288년? ~ 1307년
64 자야 싱하바르만 4세
(Jayasiṅhavarman IV)
제지(制至)
,<쩨찌(Chế Chi)>,
1307년 ~ 1312년
65 자야 싱하바르만 5세
(Jayasiṅhavarman V)
제능(制能)
,<쩨낭(Chế Năng)>,
1312년 ~ 1318년
제13왕조 66 자야 아난다
(Jaya Ananda)
제아난(制阿難)
,<쩨아난(Chế A Nan)>,
1318년 ~ 1342년
67 마하 사와
(Maha Sawa)
차화포저(茶和布底)
,<짜호아보데(Trà Hòa Bố Để)>,
1342년 ~ 1360년
68 포 비나수오르
(Po Binasuor)
(Po Bhinethuor)
(Jaya R'čăm B'nga)
아답아자(阿答阿者)
,<아답아지아(A Đáp A Giả)>,
제봉아(制蓬峩)
,<쩨봉응아(Chế Bồng Nga)>,[39]
1360년 ~ 1390년
제14왕조 69 자야 싱하바르만 6세
(Jaya Siṅhavarman VI)
각승(閣勝)
,<깍탕(Các Thắng)>,
나애(羅皚)
,<라응아이(La Ngai)>,[40]
1390년 ~ 1400년
70 자야 인드라바르만 6세
(Jaya Indravarman VI)
점파적뢰(占巴的賴)
,<찌엠바딕라이(Chiêm Ba Đích Lại)>,
파적리(巴的吏)
,<바딕라이(Ba Đích Lại)>,[41]
1400년 ~ 1441년
71 마하 비자야
(Maha Vijaya)
마하분해(麻訶賁該)
,<마카비까이(Ma Kha Bí Cai)>,
1441년 ~ 1446년
72 마하 칼리
(Maha Kali)
마하귀래(麻訶貴來)
,<마카꾸이라이(Ma Kha Quý Lai)>,
1446년 ~ 1451년
73 마하 카야
(Maha Kaya)
마하귀유(麻訶貴由)
,<마카꾸이조(Ma Kha Quý Do)>,
1451년 ~ 1458년
제15왕조 74 마하 사야
(Maha Saya)
마하반라열(摩訶槃羅悅)
,<마카반라주옛(Ma Kha Bàn La Duyệt)>,
반라차열(槃羅茶悅)
,<반라짜주옛(Bàn La Trà Duyệt)>,[42]
1458년 ~ 1460년
75 마하 사잔
Maha Sajan
반라차전(槃羅茶全)
,<반라짜또안(Bàn La Trà Toàn)>,
1460년 ~ 1471년
76 마하 사자이
(Maha Sajai)
반라차열(槃羅茶悅)
,<반라짜주옛(Bàn La Trà Duyệt)>,
반라차수(槃羅茶遂)
,<반라짜또아이(Bàn La Trà Toại)>,[43]
1471년 ~ 1494 년

2.4. 둘러보기


[1] 현재 달랏 근처 해변에 위치한 도시인 판 랑으로 추정된다.[2] 비라푸라와 같은 위치인 판랑에 위치해 있었다.[3] 각각 산스크리트어로 왕들의 왕, 전 국토의 군주라는 뜻이다.[4] 갑옷 입은 자들은 크메르 측에 고용된 중국인 용병이다.[5] 다만 태국의 역사적 숙적은 미얀마가 더 비중이 크다.[6] 참파는 상좌부 불교가 들어온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대승불교권에 가까웠다. 사실 스리랑카와의 교류 증가나 타이족의 도래 이전에는 다른 동남아 지역도 미얀마를 제외하면 베트남처럼 대승불교가 강세였다.[7] 포 비나수오르 왕의 재위 시기는 참파의 중흥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꽤나 넓은 영토를 보유했다.[8] 물론 북과 남 사이에 인적 교류가 없는 건 아니기에 북부 거주민이라 하여 무조건 북베트남인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남부 거주민이라 하여 무조건 남베트남인처럼 생긴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경향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참고로 베트남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기에 거주지를 바꾸려면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다.[9] 물론 베트남 사람이 아니고 참파인이다.[10] 오늘날의 베트남 꽝찌 성 동하.[11] 그 싱가포르조차도 말레이시아령 시절의 영향으로 말레이어가 국어이고 말레이인이 최대 소수민족이며 이슬람교가 최대 소수종교다.[12] 지금의 냐짱.[13] 유교는 충효를 강조하기 때문에 유교가 사회를 지배하면 임금에 대한 백성들의 충성심이 강해진다.[14] 즉, 군현제를 받아들였기에 국토 전체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했다. 그러므로 국가의 모든 힘을 제대로 동원할 수 있었다.[15] 대부분 현대의 다낭과 꽝응아이 지역에 속하는 인드라푸라와 비자야의 왕들이 돌아가면서 참파의 대표 왕 노릇을 했다.[16] 다만 이쪽은 참족은 아니고 근연관계인 에데족 출신이다.[17] 참고로 캄보디아의 참족은 소수민족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캄보디아 제2의 민족이라고 한다. 하지만 크메르족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 그리 부각되지는 않는다. 중국의 좡족이나 일본의 재일교포와 마찬가지.[18] 이때 같은 배에 탔던 베트남인들은 다 서방으로 갔다고 한다.[19] 다만 안달루시아어는 스페인에서는 완전히 소멸되고 모로코 일부에서나 가뭄에 콩나듯 쓰이는것과 달리 참어는 참파가 멸망한지 2세기도 채 안되다 보니 베트남캄보디아 양측의 참족들의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편이다. 물론 사회생활 할때는 베트남어크메르어를 제 1언어로 쓰지만...[20] 조르주 마스페로가 왕조를 나눈 기준이 아마도 중국과 베트남 역사서에 참파의 전임과 후임국왕이 혈연관계가 불명이거나, 남남인 경우에 근거로 삼아서 정한 것 같다.[21] 제1왕조는 대체적으로 중국에서 쓴 기록들이 많다.[22] 베트남 기록에는 우련(區憐).[23] 혹은 范當根純.[24] 양서(梁書)에 기록된 이름.[25] 남사(南史)에 기록된 이름.[26] 아버지가 죄를 지어 이에 연좌될까봐 진랍에 도망가 있었고, 참파에 돌아와 참파의 여왕과 결혼하여 참파의 왕이 되었다.[27] 베트남의 역사서 대월사기전서에 기록된 이름.[28] 유계종도 베트남인인데 아유타야왕조처럼 참파에서도 베트남인이 정변을 일으켜 왕이 된 것 같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참파에서 유계종이 이끄는 세력이 강해서 왕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29] 베트남의 역사서에 기록된 이름.[30] 베트남의 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에서 기록된 이름인데, 한자 음차를 다르게하여 기록되어 있다.[31] 베트남의 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에 기록된 이름.[32] 베트남의 역사서인 월사략(越史略)에 기록된 이름.[33] 베트남의 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에 기록된 이름.[34] 베트남의 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에 기록된 이름.[35] 복위.[36] 송사(宋史)에 기록된 이름.[37] 베트남의 역사서 대월사기전서에 기록된 이름.[38] 제12왕조의 왕인 제민, 제지, 제능은 베트남에서 기록한 이름이다.[39] 베트남의 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에 기록된 이름.[40] 베트남의 역사서에 기록된 이름.[41] 베트남의 역사서에 기록된 이름.[42] 베트남의 역사서에 기록된 이름.[43] 베트남의 역사서에 기록된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