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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등재 기준
이 문서는 상위 문서인 작위 요구자의 정의에 따른 현재 아메리카의 작위 요구자들을 나열한 목록 문서이다.- 해당 국가가 현재까지 존재하거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적법한 근거를 가지고 해당 작위를 주장한 사례가 있었던 경우.
- 혈통을 통해 세습되는 왕위나 작위와 같이 만약 해당 정권이 존속했다면 해당 정권의 주권을 이어받을 수 있는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등재하며, 계승권을 실제로 주장하는지 아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작위 이외에 영토에 대한 권리 주장.
- 작위 소유자가 공식적으로 해당 작위를 포기, 또는 해체한 경우.
- 식민국가나 피정복국가가 독립하고, 상대국이 해당국가를 인정한 경우에 해당하면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 합의
토론 합의에 따라, 근대 이후 공화국의 독재자가 직위를 자손에게 계승했거나 계승하려 시도한 경우는 등재하지 않는다. 단 근대 이후 공화국의 독재자라도 '몽골의 칸' 등 세습 군주의 칭호를 자칭한 경우는 등재한다.
2. 현재 작위 요구자 목록
2.1. 과테말라 국왕
과테말라 왕국 국장 | |||
관련 칭호 | 과테말라 국왕 | ||
작위 요구자 | (보르본 왕조) 식스토 엔리케 데 보르본-파르마 이 보르본-부세트 | (보르본 왕조) 카를로스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오란지-나사우 | (압스부르고 왕조)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전임자 | 하비에르[1] |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2] |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3] |
후임자 |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 | 잔도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
계승 실패 원인 |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압스부르고 왕조) 1821년 멕시코에 합병 |
과테말라 왕국은 중앙아메리카에 있었던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의 자치령이었다. 그러다가 1821년에 멕시코 제1제국에 합병되었으며, 이후 1823년에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으로 독립했다가 1841년에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해체로 지역에 따라 각각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가 되면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본 문단의 왕위 요구자들은 스페인 본토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하며, 스페인 왕실은 1836년에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을 승인함으로써 과테말라 국왕 칭호도 포기하였고 현재도 과테말라 국왕 칭호를 부활시키지 않는 상황인데, 압스부르고 왕조가 단절된 1700년과 페르난도 7세가 살리카법을 폐지하고 자기 딸 이사벨 2세를 후계자로 정한 1830년 그리고 이사벨 2세가 스페인 여왕으로 즉위한 1833년은 스페인 왕실이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을 승인한 1836년보다 앞선 시대이므로 본 문단의 왕위 요구자들은 과테말라 왕국의 멸망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이들의 입장에서 과테말라 국왕 칭호를 공식적으로 포기한 건 '여자 주제에 왕이 된(보르본 왕조 왕위 요구자 입장)/정통성이 없는 보르본 왕조의(압스부르고 왕조 왕위 요구자 입장)' 이사벨 2세가 제멋대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2.2. 멕시코
멕시코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멕시코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은 현대 멕시코인들이 봤을 때 하나 같이 조상 세대에서 각 군주국이 재건될 명분이 부족할 만큼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 중 누가 군주가 되더라도 멕시코인들은 전혀 반기지 않을 것이다.
멕시코 제1제국은 초대이자 마지막 황제 아구스틴 1세가 부정부패와 독재로 인기를 잃고 퇴위했으며, 멕시코 제2제국의 역시 초대이자 마지막 황제인 막시밀리아노 1세는 비록 본인은 명군으로서의 자질이 있었지만 하필이면 멕시코 제2제국이 프랑스 제2제국의 괴뢰국이었던 탓에 멕시코 현지인들에게 군주로 인정받지 못하고 끝내 사형에 처해졌다.
아즈텍 제국은 테노치티틀란 틀라토아니 문단에서 서술한다.
틀락스칼텍은 스페인에 협력한 과거 때문에 아즈텍 제국의 후신을 천명하는 현대 멕시코에서는 매국노 집단으로 취급받는다. 틀락스칼텍 국왕 칭호는 애초에 틀락스칼텍이 누에바에스파냐의 자치령이었던 관계로 스페인 국왕 칭호에 종속된 칭호일뿐더러, 틀락스칼텍인들은 스페인인들에게 매우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것 때문에 멕시코의 독립에 강하게 반대했으므로, 멕시코인들에게 진정한 독립을 위한 길은 멕시코 내 친스페인파의 구심점이었던 틀락스칼텍을 멸망시키는 것이었다.
본 문서에는 없지만 타라스칸 또한 왕실의 후손이 왕위를 되찾을 가능성은 0%인데, 아즈텍 제국이 스페인의 침략에 필사적으로 저항한 것과 달리 이쪽은 지형적 이점 덕에 스페인의 침략을 더 잘 막아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아즈텍 제국의 전철을 밟아 비참하게 멸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허무하게 스페인에 항복한 탓에 결과적으로 스페인의 멕시코 식민지배를 더욱 가속화시켰으므로, 틀락스칼텍만큼은 아니어도 현대 멕시코인들에게는 그다지 인상이 좋지 못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2.2.1. 멕시코 황제
관련 칭호 | 멕시코 황제 | |
작위 요구자 | (멕시코 제2제국) 카를 필리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멕시코 제1제국) 막시밀리안 폰 괴첸-이투르비데 |
전임자 | 펠릭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마리아 지셀라 툰클-이투르비데 |
후임자 | 율리안 로렌츠 페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페르디난트 폰 괴첸-이투르비데 |
계승 실패 원인 | 1823년 제국 멸망(멕시코 제1제국) 1867년 제국 멸망(멕시코 제2제국) |
막시밀리아노 1세가 처형당하고 프랑스의 괴뢰국 멕시코 제2제국이 멸망했다. 막시밀리아노는 멕시코 제1제국 황제 아구스틴 1세의 손자 아구스틴과 살바도르를 입양했는데, 장남 아구스틴이 황제위 요구자가 되었다. 아구스틴 사후 살바도르의 장녀 마리아, 손녀들인 여남작 마리아 안나와 마리아 지셀라[4]가 순서대로 황제위 요구자가 되었다. 현 황제위 요구자 막시밀리안 백작은 여남작 마리아 지셀라의 장남이다. 다만 아구스틴과 살바도르는 혈통상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이 아닌 관계로 멕시코 제2제국의 황제위 계승권자가 아니었으므로 막시밀리안 백작은 멕시코 제2제국이 아닌 멕시코 제1제국의 황제위 요구자로 간주되며, 막시밀리아노 1세의 동생 카를 루트비히의 아들이 멕시코 제2제국 황제위를 물려받을 예정이었으므로 그의 후손인 카를 필리프가 멕시코 제2제국 황제위 요구자이긴 한데, 문제는 이게 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자손[5]으로 빠진다는 것이다.
2.2.2. 테노치티틀란 틀라토아니
관련 칭호 | 테노치티틀란 틀라토아니 (=아즈텍 황제) 목테수마 데 툴텡고 공작 |
작위 요구자 | 후안 호세 마르시야 데 테루엘목테수마 이 발카르셀[6] |
전임자 | 후안 호세 마르시야 데 테루엘목테수마 이 히메네스[7] |
후임자 | 소피아 마르시야 데 테루엘목테수마 |
계승 실패 원인 | 1521년 제국 멸망 1565년 황실 완전 폐지 |
아즈텍 제국의 실질적인 마지막 군주 목테수마 2세[8]의 후손은 1521년에 아즈텍 제국이 멸망하고 1565년에 명목상의 허수아비 황실마저 폐지된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적통인 남계후손은 아즈텍 제국이 멸망한지 약 300년 후인 1836년에 대가 끊어졌으며, 목테수마 2세의 딸 이사벨 목테수마와 스페인 남성 사이에서 생겨난 여계후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목테수마 2세의 후손은 모두 이 여계후손들이다.
아즈텍 황실의 후손들 중 후안 벨라스케스 틀라코친[9]의 후손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목테수마 데 툴텡고 공작' 작위를 받는다. 다만 벨라스케스 틀라코친은 황실의 적통인 이사벨 목테수마의 후손이 아니라 목테수마 1세의 형제였던 틀라카엘레친의 손자, 즉 방계인 데다가 멕시코인들에게는 매국노나 다름 없는 자였기 때문에, 그의 후손인 목테수마 데 툴렝고 공작이 틀라토아니로 추대되어 멕시코에서 군주정이 부활할 가능성은 0%다.
2.2.3. 틀락스칼텍 국왕
틀락스칼텍 문장 | |||
관련 칭호 | 스페인 국왕 틀락스칼텍 국왕 | ||
작위 요구자 | (보르본 왕조) 식스토 엔리케 데 보르본-파르마 이 보르본-부세트 | (보르본 왕조) 카를로스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오란지-나사우 | (압스부르고 왕조)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전임자 | 하비에르[10] |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11] |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12] |
후임자 |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 | 잔도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
계승 실패 원인 |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압스부르고 왕조) 1821년 멕시코에 합병 |
아즈텍 제국의 인신공양으로 고통받던 틀락스칼텍인들은 멕시코 땅을 침략한 스페인군을 도와 아즈텍 제국을 무너뜨렸으며, 그 공으로 틀락스칼텍은 스페인 치하에서 단순한 식민지가 아닌 자치령이 되어 스페인 왕실에 의해 극진한 대접과 엄청난 자치권을 받고 심지어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옛 치치멕족 거주지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개척하기도 하는 등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13] 그러나 스페인의 멕시코 식민통치가 끝나고 멕시코가 멕시코 제1제국으로 독립하면서 틀락스칼텍은 멕시코에 합병되어 멸망하고 오늘날 멕시코 틀락스칼라 주로 이어지게 되었다. 본 문단의 왕위 요구자들은 스페인 본토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하며, 스페인 왕실은 1836년에 멕시코의 독립을 승인함으로써 틀락스칼텍 자치령 국가원수 칭호도 포기하였고 현재도 멕시코 관련 칭호를 쓰지 않는데, 압스부르고 왕조가 단절된 1700년과 페르난도 7세가 살리카법을 폐지하고 자기 딸 이사벨 2세를 후계자로 정한 1830년 그리고 이사벨 2세가 스페인 여왕으로 즉위한 1833년은 스페인 왕실이 멕시코의 독립을 승인한 1836년보다 앞선 시대이므로 본 문단의 왕위 요구자들은 멕시코의 틀락스칼텍 합병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이들의 입장에서 멕시코를 독립국가로 인정하고 멕시코 지배 및 틀락스칼텍의 빽 역할을 공식적으로 포기한 건 '여자 주제에 왕이 된(보르본 왕조 왕위 요구자 입장)/정통성이 없는 보르본 왕조의(압스부르고 왕조 왕위 요구자 입장)' 이사벨 2세가 제멋대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즈텍 제국과 틀락스칼텍의 악연으로 인한 영향 때문에, 테노치티틀란의 후신인 멕시코 시티의 주민들과 틀락스칼텍의 후신인 틀락스칼라 주의 주민들은 현재까지도 사이가 좋지 않다. 아즈텍 제국의 후신을 칭한 현대 멕시코의 입장에서 틀락스칼텍은 매국노 집단으로 여겨지며, 특히 멕시코의 극우민족주의자들은 틀락스칼라 주민들을 매국노의 후손이라고 멸시한다.[14] 하지만 틀락스칼라 주민들은 멕시코 극우민족주의자들의 매국노 후손 취급이 아무리 싫어도 조상들처럼 멕시코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0%에 가깝다. 만약 틀락스칼라 주가 독립한다면 스페인의 도움을 받아 아즈텍 제국에 복수한 역사적 인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중 친스페인 성향이 가장 강한 나라가 될 수 있는데, 무력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가 과연 자국민들 중 스페인의 지배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멕시코 영토 내에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우는 걸 용납할까? 특히 틀락스칼라 주가 스페인과의 동군연합이 되어 스페인 국왕을 섬기거나[15] 본 문단의 왕위 요구자들 중 1명을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하여 독립하려 한다면, 멕시코 정부는 틀락스칼라 주의 이러한 모습을 스페인의 멕시코 재침략을 유도하는 매국행위로 간주하여 틀락스칼라 주민들을 무력으로 응징할 것이다. 그리고 틀락스칼라 주민들을 제외한 현대 멕시코인들이 멕시코 제1제국의 틀락스칼텍 합병을 매국노들의 자업자득이라며 통쾌하게 여기는 현 상황에서 틀락스칼라 주는 공화정으로 독립하는 것도 허락받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의 멕시코는 아즈텍 제국만큼 악랄한 침략자가 아니었고 적어도 식인풍습은 스페인 치하에서 진작에 근절되어 틀락스칼라 주민들을 가축으로 취급하는 막장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16], 아즈텍 제국의 인간목장이던 시절의 틀락스칼텍에 비하면 독립할 명분이 부족한 상황이다. 따라서 틀락스칼라 주가 스페인과 힘을 합쳐 아즈텍 제국을 무너뜨릴 당시의 틀락스칼텍처럼 멕시코로부터 해방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2.3. 미스키토족 추장
미스키토족 추장 문장 | |
관련 칭호 | 미스키토족 추장 |
작위 요구자 | 노턴 커스버트 클래런스 |
계승 실패 원인 | 1894년 직계 혈통 단절 |
미스키토족은 벨리즈와 온두라스 일대에 걸쳐 사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으로, 두 나라의 역사에 매우 큰 족적을 남긴 이들이었다.[17] 한때 이들은 다양한 민족들을 자기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세를 키우고[18], 중앙아메리카의 강국으로 부상하기도 했으나, 계속되는 백인들의 침탈로 인해 끝내 몰락하고 말았다. 1894년에는 마지막 정통 추장인 로버트 헨리 클래런스가 자메이카의 킹스턴에서 사망하면서 추장 가문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었고, 1977년에 그의 후손인 노턴 커스버트 클래런스가 미스키토족 추장 직위 계승에 대한 명분은 자신에게 있다는 선언을 한 뒤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4. 베라과 공작
베라과 공작 문장 | |
관련 칭호 | 베라과 공작 라 베가 공작 아길라푸엔테 후작 자메이카 후작 대양제독 |
작위 요구자 | 크리스토발 콜론 데 카르바할 이 고르사벨 |
전임자 | 크리스토발 콜론 데 카르바할 이 마로토 |
후임자 | 크리스토발 콜론 데 카르바할 이 만달루니스 |
계승 실패 원인 | 1500년 탐사 후, 영지 개척 실패 1560년 영지 박탈 후, 페루 부왕령 편입 1810년 페루 부왕령 멸망 |
베라과 공작은 바이킹의 북아메리카 탐사 이후로 최초로 아메리카에 발을 딛은 유럽인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작위이고, 작위명의 어원이 된 베라과는 지금의 파나마 지역에 속한다. 콜럼버스가 이 지역을 탐사할 당시에는 당시 스페인[19]의 여왕이었던 이사벨 1세에 의해 탐험지인 베라과 전토가 그의 영지로 하사되었는데, 문제는 콜럼버스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영지를 실효지배하고자 보낸 스페인인 이주민들이 현지의 풍토병에 감염되어 전멸하면서, 끝내 이 지역은 콜럼버스 가문의 명목상의 영지로만 남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베라과 공작가는 시조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가혹한 착취 문제와, 탐험 자체에 대한 신빙성 논란[20]으로 인해 대차게 몰락하면서, 베라과 공작이라는 작위와 이사벨 1세에게 받은 세습 칭호들만 인정받고는, 파나마 지역을 전혀 실효지배하지 못하게 되었다. 덕분에 베라과 공작령은 1560년에 페루 부왕령에 합병되어 사라지고, 콜럼버스 가문은 명목상의 작위만을 계승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1810년에는 아예 페루 부왕령 자체가 남아메리카 독립의 영웅들 중 한 명인 시몬 볼리바르에 의해 전복되어 멸망하면서, 베라과 공작령에 대한 실효지배 가능성이 영영 사라지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
2.5. 브라질 황제
관련 칭호 | 브라질 황제 | |
작위 요구자 | (바수라스 계통) 베르트랑 | (페트로폴리스 계통) 페드루 카를루스 |
전임자 | 루이스 가스탕 | 페드루 가스탕 |
후임자 | 안토니우[21] | 페드루 치아구[22] |
계승 실패 원인 | 1889년 제국 해체 |
페드루 2세는 브라질 의회의 제정 폐지 결정에 따라 포르투갈로 망명, 객사한다.[23] 페드루 2세보다 오래 산 딸 이자베우가 뒤를 이어 왕위 요구자가 되었고, 여계 계승으로 왕가의 이름은 오를레앙-브라간사로 바뀌었다. 이자베우 사후에는 차남 루이스 마리아 필리프의 아들인 페드루 엔히키가[24], 1981년 페드루 엔히키 사후에는 그 장남 루이스 가스탕이 뒤를 이었다. 루이스 가스탕에게는 후사가 없고 동생만 여럿 있다.[25] 2022년 루이스 가스탕이 서거하자 공화국은 관보 호외를 통해 루이스 가스탕을 브라질 황실의 수장이라 하였으며, 7월 15일 하루를 애도일로 선언했다.#
한편 이자베우의 장남인 페드루 드 아우칸타라의 아들인 페드루 가스탕이 5촌 조카에 맞서 황위를 요구했다.[26] 페드루 가스탕은 2007년에 죽고, 그 아들인 페드루 카를루스가 그 뒤를 잇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페드루 카를루스는 공화주의적 성향을 가졌다고 영어 위키백과에 나와있으나 이는 스페인의 한 언론사를 출처를 두고 있고, 이는 불확실하다. 당장 해당 위키백과 문서에서도 구 황가의 재산을 돌려받는 것에 적극적이라고 나와 있으니.
2.6. 서인도 제도 국왕
관련 칭호 | 스페인 국왕 서인도 제도 국왕 |
작위 요구자 | 펠리페 6세 |
전임자 | 후안 카를로스 1세 |
후임자 | 레오노르 데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
계승 실패 원인 | 스페인의 서인도 제도 상실 |
현 스페인 왕실은 스페인이 오래 전에 서인도 제도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인도 제도 국왕 칭호를 쓰고 있다. 물론 스페인 왕들의 칭호는 과거 보유했던 칭호들을 현실과 상관없이 그대로 보유하므로 진지하게 해당 칭호를 쓰는 것은 아니다.
2.7. 아라우카니아 파타고니아 국왕
아라우카니아 파타고니아 왕국 국장 | |
관련 칭호 | 아라우카니아 파타고니아 국왕 |
작위 요구자 | 프레데리크 뤼 |
전임자 | 장미셸 파라실리티 디 파라 |
계승 실패 원인 | 1862년 왕국 멸망 |
아라우카니아 파타고니아 왕국은 마푸체족이 프랑스의 법조인이자 모험가인 오렐리앙투안 드 투낭을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하여 세운 왕국이었으며 지금의 칠레 중부 지역과 아르헨티나 남부 지역을 영토로 하였다. 오렐리앙투안 드 투낭은 자신이 세운 해당 국가가 국제적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이내 칠레군의 침략으로 왕국이 멸망했으며, 마푸체족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분할점령당하여 오늘날까지도 극심한 탄압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 오렐리앙투안 드 투낭은 칠레와 아르헨티나로부터 정신병자처럼 다뤄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고문이나 형벌은 받지 않고 칠레의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가 프랑스로 돌아와 1878년에 죽었다. 현재 그의 후손인 프레데리크 뤼가 명목상의 아라우카니아 파타고니아 왕국 왕위를 요구하고 있는데, 드 투낭의 후손들은 제국주의자였던 조상과는 다르게 마푸체족의 권리 신장을 위한 인권운동의 열성적인 참가자라서, 아라우카니아 파타고니아 왕위 요구를 마푸체 인권운동의 레토릭으로 삼고 있다.
2.8. 아이티 황제
관련 칭호 | 아이티 황제 | |
작위 요구자 | 맹빌-조제프 술루크 | |
계승 실패 원인 | 1859년 제국 멸망 |
아이티 제2제국은 1859년에 황제 포스탱 1세가 퇴위하고 망명함으로써 멸망했으나, 황제위 세습 자체를 완전히 포기하진 않아서 그의 후손이 명목상의 아이티 황제위를 세습하고 있다.
아이티 제1제국은 황제 자크 1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한데다, 선거군주제를 채택한 나라였으므로, 아이티 제1제국의 황제위 요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2.9. 캐나다 국왕
관련 칭호 | 하노버 국왕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국왕 캐나다 국왕 |
작위 요구자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5세 |
전임자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 |
후임자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27] |
계승 실패 원인 | 1901년 왕조 교체 |
하노버 왕국과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왕위 요구자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 때부터 영국 왕족임을 자칭하면서[28]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하노버 왕조의 작위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캐나다 자치령이 막 수립될 당시 영국은 아직 하노버 왕조였으므로 캐나다 국왕 칭호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2.10. 타완틴수유 사파 잉카
관련 칭호 | 사파 잉카[29] 산티아고 데 오로페사 후작 |
작위 요구자 | 알폰소 마르토스 카리온 이 아슬로르 데 아라곤[30] |
전임자 | 호세 루이스 마르토스 이 아슬로르 데 아라곤[31] |
계승 실패 원인 | 1533년 잉카 제국(타완틴수유) 멸망 1572년 스페인에 의해 황실이 폐지됨. |
1572년에 잉카 제국(타완틴수유)의 황실이 폐지되고, 안데스산맥에 있던 빌카밤바 망명 정부도 패망하면서 잉카 황족들은 스페인으로 끌려왔는데, 이들의 후손들 중의 한 사람인 아나 마리아 로렌사 데 로욜라 이 코야[32]가 산티아고 데 오로페사 후작 작위를 받은 뒤로, 오늘날까지 잉카 황손의 가문이 이어지고 있다.
[1]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데 브라간사[2] 하비에르의 장남. 카를로스 하비에르의 아버지.[3] 안톤 마리아 프란츠 레오폴트 블랑카 카를 요제프 이그나츠 라파엘 미하엘 마르가레타 니체타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4] 마리아와 체코인 모라비아 귀족 툰클로베 사이의 딸들.[5] 귀천상혼으로 오스트리아 황제 자리는 될 수 없으나 멕시코 제국의 황제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조건은 없다.[6] 제6대 목테수마 데 툴텡고 공작[7] 제5대 목테수마 데 툴렝고 공작[8] 그가 죽은 후에도 퀴틀라왁과 콰우테목 2명이 차례대로 즉위했지만 모두 얼마 안 가 죽음을 맞이했다.[9] 스페인 치하 아즈텍의 초대 통치자였다. 물론 명목상일 뿐 실권은 총독인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있었다.[10]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데 브라간사[11] 하비에르의 장남. 카를로스 하비에르의 아버지.[12] 안톤 마리아 프란츠 레오폴트 블랑카 카를 요제프 이그나츠 라파엘 미하엘 마르가레타 니체타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13] 스페인 치하의 틀락스칼텍인들은 자신들만의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으며, 스페인 국왕을 자신들의 군주로 섬긴다는 점과 유럽식 봉건 영지(이마저도 틀락스칼텍을 구성하던 4개의 도시국가들을 그대로 계승한 4개의 영지였음)가 생겨난 점을 제외하면 스페인의 멕시코 침략 이전 자신들만의 통치구조를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이 점에서 틀락스칼텍은 누에바에스파냐의 다른 지역들이 전형적인 식민지였던 것과 달리 사실상 스페인과의 동군연합이나 다름없었으며, 자신들만의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는 오늘날의 영연방 왕국들과도 비슷했다. 자체적인 외교권의 경우 일단 사방이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관계로 그렇게까지 큰 의미는 없었겠지만, 단순히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을 돕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식민지를 거느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틀락스칼텍은 스페인의 철저한 속국으로 보기 어려웠다.[14] 틀락스칼라 주민들은 반대로 멕시코 시티 주민들을 식인종의 후손이라고 깐다. 멕시코 원주민의 인신공양 풍습은 아즈텍 제국, 틀락스칼텍, 마야 문명, 타라스칸 등을 가리지 않고 대체로 널리 퍼져 있었지만, 아즈텍 제국만큼 대규모로 심각한 인신공양은 아즈텍 제국 지배층 본인들을 제외한 멕시코의 어떤 원주민들도 하지 않았다.[15] 대한민국으로 치면 친일파의 후손들이나 종북주의자들이 각각 일본의 천황과 북한의 국가원수를 섬기는 동군연합 형식의 국가를 남한 영토 내에 건국하는 격이다.[16] 물론 그것과 별개로 현 멕시코 정부가 문화상대주의를 내세우며 아즈텍 제국의 인신공양을 정당화하고 있어서 이것 때문에 틀락스칼라 주민들과 갈등하기도 한다.[17] 벨리즈 및 온두라스 현지에서는 거의 미국의 이로쿼이 연맹이나 수족의 포지션에 가까운 이들이 바로 미스키토족이다.[18] 개중에는 탈주한 흑인 노예나, 유럽에서 이주해 온 백인들도 있었다.[19] 정확히는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동군연합[20]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탐사한 곳이 인도라고 주장했으나, 당대까지 알려진 인도의 모습과 크게 달라서 실제로는 엉뚱한 곳을 탐사했다는 논란이 당대에도 끊이질 않았다. 급기야는 콜럼버스가 아직 살아있던 1503년에 이탈리아의 항해사인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이 문제의 탐험지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대륙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이에 당대의 지리학자들이 이 대륙을 그의 이름에서 딴 아메리카로 명명하기까지 하면서, 콜럼버스의 입지는 급격히 쪼그라들었다.[21] 베르트랑의 동생[22] 페드루 카를루스의 장남[23] 페드루 2세 문서를 가보면 알겠지만 이 자는 절대 암군이나 폭군이 아니었다. 오히려 명군이었고 노예제 폐지에 반발한 지주들이 반대로 황제를 쫓아내버린 것. 노예제를 폐지한 페드루 2세가 브라질 흑인 인권 신장의 선구자라는 점 때문에 브라질의 흑인들과 물라토들은 현재까지도 브라질 제국의 멸망을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다.[24] 이자베우의 장남인 페드루 드 아우칸타라는 일찍이 귀천상혼으로 왕위 계승을 포기하였고, 루이스는 어머니 이자베우보다 1년 먼저 사망하였다.[25] 페드루 엔히키는 여러 아들을 두었는데 독신인 1938년생 장남 루이스 가스탕과 1940년생 삼남 베르트랑을 제외하고 전부 귀천상혼으로 황제위 계승권을 포기한 상태이며, 유일하게 1950년생 6남 안토니우만이 왕족과 결혼하여 황제위 계승권을 갖고 있다. 안토니우의 장남인 페드루 루이스는 2009년에 에어 프랑스 447편 추락 사고로 사망했으며, 사실상 젊은 황제위 계승권자 중 순위가 가장 높은 사람은 차남 하파에우라고 볼 수 있다.[26] 페드루 드 아우칸타라가 체코인 귀족과 결혼하면서 귀천상혼 논란이 생기자 계승권을 포기했는데, 이후 페드루 가스탕이 브라질 제국 헌법에 황위 계승권자가 왕족과 결혼할 것을 명시한 조항이 없음을 근거로 귀천상혼에 따른 계승권 포기는 법적 근거가 없는 무효임을 주장하였다. 참고로 페드루 가스탕은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이모부이기도 하고,(부인 마리아 데 라 에스페란사가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이모) 장녀 마리아 다 글로리아는 페타르 2세의 외아들 알렉산다르와 결혼해 세 아들을 두었다 이혼하고 에스파냐 귀족과 재혼했다.[27]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5세의 아들.[28] 성씨에 Königlicher Prinz von Großbritannien und Irland를 추가했다.[29] 케추아어로 '위대한 자'라는 뜻으로, 잉카 제국(타완틴수유)의 황제를 가리키는 칭호다.[30] 제8대 산티아고 데 오로페사 후작[31] 제7대 산티아고 데 오로페사 후작[32] 이름에 있는 코야는 잉카 제국의 황후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