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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중부 최전선을 지키는 백골포병여단 | ||||||
창설일 | 1952년 10월 04일(제3보병사단 포병연대) 2020년 12월 1일(제3보병사단 포병여단) | |||||
상징명칭 | 금성지구 화력사수 여단 | |||||
소속 | 대한민국 육군 | |||||
상급부대 | 제3보병사단 | |||||
규모 | 여단 | |||||
역할 | 사단 예하 보병여단 화력지원 | |||||
여단장 | 대령 임근우(학사 33기) | |||||
위치 |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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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육군 제5군단 제3보병사단 예하 포병여단. 별칭은 금성지구 화력사수 여단.2. 연혁 및 특징
포병연대 본부, 18연대, 23연대 등 신막사 건축이 완료된 곳도 있고 건축 중인 곳이 있는 등 현대화가 이뤄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생활 환경은 열악한데, 특히 연대본부와 11포병대대(2010년 추석직전에 입주.), 71포병대대를 제외한 나머지 2개 대대들은 그야말로 현시창(19년도에 635가 21년도에 72이 부대를 신막사로 옮기게 됨으로서 모든 포병대대가 신막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생활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다). 특히나 포병의 경우 여전히 포반장을 병 출신 하사가 하는 등 아직 개편되지 않은 잔재가 남아있고, 병영 내 부조리나 악습 역시 알게 모르게 남아있으며 심한 곳의 경우 부대가 포대 단위로 독립되어 있어 열악한 환경은 물론이요 외딴 산속에 당직사관이나 기타 관리간부만 출근할 뿐, '간부의 천국 병의 지옥'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11대대의 경우 병영내 부조리가 2008년하고 2010년에 사단 기무부대와 기무사령부 불시검열에서 적발이 되는 바람에 한동안 대영창 시대의 개막과 함께 피바람이 불었었다.[1] 여타 관리의 눈길이 닿지 않아 분기별 실사격 훈련 등으로 포를 빼는 일도 잦아서 자신의 주특기가 155mm 견인포병이라면[2] 그저 묵념(...). 당장 수작업으로 박았다 뺐다 해야하는 견인포 발톱만 해도 40kg이 넘는 포병의 특성상, 분대원 하나하나가 제 일을 해주지 않으면 직접적으로 다른 분대원에게 타격이 가기 때문에 갈굼이나 체력단련 강요가 심하다.3. 예하부대
3.1. 여단 직할대
3.2. 제11포병대대 선돌
대한민국 국군 창설 후 1948년 11월 20일에 최초로 창설된 6개의 포병부대 중 한 곳이며, 창설당시 부대명은 야전 포병단 제6포병대대. 실제로는 선돌대대라는 이름 보다는 육군 최초창설 포병대대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인다.창설 당시에는 1사단에 배속된 포병대대였으며, 3.8선 최초 돌파 포병 타이틀도 같이 가지고 있다.[3][4]
71포병대대에 이어서 2번째로 신막사에 입주한 부대가 되었다.
105미리 견인포를 운용했던 시절에는 1942년에 제조된 105미리 견인포가 있어서 실탄사격 나갈 때마다 쏘다가 포가 터지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3.3. 제369포병대대(구 71포병대대) 칠하나
2022년 4월 5포병여단 예하 369대대와의 흡수통합을 통해 71대대는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369대대가 71대대의 막사와 소속을 이어받게 되었다.1973년 3.7 완전작전을 수행했던 부대이다.
3.4. 제72포병대대 선승
사단 신병교육대 그리고 사단 의무대와 가까워서 신교대와 23여단본부의 옆집 취급을 받는다.2020년 말에 신막사로 이주했다. 신막사인 만큼 시설도 깨끗하고 새건물 느낌이 확 난다. 신막사로 이주전까지는 신병교육대 막사에서 살았다.
3.5. 제635포병대대 가온
635대대는 KH179 155mm 견인포를 운용 하는 독립포대로 악명 높은 부대였으나 현재는 K-9 자주포로 개편되었다.1,2포대와 본부포대가 대대 신 막사를 사용하고 3포대는 다른 부대에 붙어있다.
시설은 매우 좋은편이나 훈련 빈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3.6. 과거 편제
4. 출신인물
* 노재현 - 12.12 군사반란 당시 국방부장관. 11포병대대에서 대대장을 역임하였었다.4.1. 여단장
볼드체는 대장 진급이 된 연대장 및 여단장. |
역대 제3보병사단 포병여단장 | |||||
역대 | 이름 | 계급 | 임관 | 비고 | 기타 |
초대 | 000 | 예) 대령 | 육사 00기 | 前 연대장 | |
00대 | 강인규 | 소장 | 육사 47기 | 現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참모장 | |
51대 | 박웅 | 대령 | 육사 54기 | 前 여단장 | |
52대 | 임근우 | 대령 | 학사 33기 | 現 여단장 |
4.2. 장교/부사관
4.3. 병
5. 사건 사고
- 과거 1973년에 18연대 전방대대가 군사분계선 표지판 보수 작업 중에 북한군의 사격도발에 의해 아군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사단장이었던 박정인 장군은 포병연대 본부에 전화를 걸어 포병대응사격을 했는데 105mm 견인곡사포로 백린탄을 발사해 북한군 GP를 직격, 그것도 GP건물 내부에 작렬시켜 북한군 상주인원 36명까지 몰살시켜버렸다. 이 사건이 이른바 3.7 완전작전. 이 작전으로 백골부대는 북한군 전방사단에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사단이 통째로 교체된 건 물론이고 3사단에 대응하기 위해 2개 사단을 배치했는데 그마저도 북한 고위층이 가장 꺼리는 임지가 되어버렸다. 북한이 뭘 이렇게까지 하나 싶은 분들이 있을 수 있는데, 참고로 백린탄은 화염이 물로도 안꺼지는, 포탄들 중에서도 꽤나 공포스럽고 강력한 탄 중 하나다. 북한은 말 그대로 완벽하게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셈.
당시 북한군은 한국으로의 귀순을 막으려고 최전방 사단에는 충성심이 확실한 고급 당원 일가만 배치했다. 대다수가 평양 핵심 계층 출신 인원들로 고위층과 연관되어 있었고 당시 북한측의 충격은 상당히 컸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사건이 일어난 지 무려 12년 후인 1985년 9월 20일 남북 이산가족 평양방문단의 일원으로 함경남도 도민회 이상순 회장이 평양에 갔을 때 북한 정치 보위부의 고위 간부가 방문단이 묵던 호텔로 불쑥 찾아와서는 "함경남도 출신에 박가 성을 가진 그 요란한 사단장은 요즘 뭘 하오?"라고 따져묻더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는 남북협상 기간이었고 이로 인해 약 1달 뒤에 박정인 장군은 불명예전역을 하게 된다(...). 다만 당시 사후처리에 있어서는 박 장군의 잘못도 있기는 하다. 성공적인 완전작전 후 박정인 장군은 사단 차량들을 일제히 비무장지대로 진군시켰다. 이는 당시 기습적으로 공격해온 북한군에 대한 일종의 무력시위로 보였고 당시 북한은 비상사태를 발령했다. 이는 작전권을 가지는 야전군사령관이나 군령권을 가진 육군참모총장[5]이나 명령할 수 있을 정도이며 박 장군의 행위는 허가를 받지 않은 월권행위였다. 여차하면 전면전이 일어날 수 있을 정도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6. 기타
[1] 2010년의 경우에는 대대 주임원사가 대대 부사관단 회비 횡령으로 걸리는 바람에 당시 군생활 했던 부대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갑자기 바뀐 대대주임 원사 때문에 깜짝 놀란적도....[2] 635대대가 K-9으로 바뀌기 전에는 11, 71, 72대대는 105미리 견인포였다... 심지어는 11대대에서 1942년산 105미리 견인포가 발견된 적도....[3] 11대대-1사단, 17대대-7사단, 16대대-6사단, 18대대-8사단, 10대대-수경사, 50대대-포병학교 배속이었다. 3사단은 6.25 전에 후방에 있어서 포병대대가 없었다.[4] 현재는 10대대-수기사, 11대대-3사단, 16대대-7사단, 17대대-1사단, 18대대-21사단, 50대대-8사단에 있으며, 최초포병대대 중 10포병대대만 창설당시 소속사단에 그대로 예속되어있다.[5] 당시는 군령권이 육군참모총장에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