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코비 브라이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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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비디오 (2002년 NBA 엔터테인먼트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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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기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과거에 NBA 선수였던 조 브라이언트.[1] 아버지인 Joe Bryant의 별명이 'Jellybean'이었다. 이에 따라 Bean이라는 미들네임이 붙은 것으로 추정. 코비가 6살 때 가족들이 전부 이탈리아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그곳에서 NBA 녹화비디오를 보면서 나름 향수병도 달랬을듯 하다. 이탈리아에 있을때 축구를 접했는데, AC 밀란을 가장 좋아했다 한다[2][3]. 아버지 조 브라이언트가 1991년에 은퇴를 선언하면서 코비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이름의 유래는 일본의 도시인 효고현 고베(Kobe,hyogo. 兵庫県神戸市). 아버지가 고베 일대에서 생산된 와규를 뜻하는 '고베규'를 좋아하여 아들 이름까지 Kobe라고 지었다. 이 인연으로 코비는 2001년 12월 13일에 고베를 방문해 친선대사로 임명된 적이 있다. 또한 중계나 NBA관련 방송을 보면 보통 전문가들이 선수들을 설명할 때 이름보다 성을 압도적으로 많이 부르는데, 코비는 반대로 다른 선수들에 비해 성보다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훨씬 많다. 본래 선수들끼리 같은 이름이 많다보니 이름보다는 성으로 구분하는게 더 일반적이나, 코비는 본명 자체가 원체 특이하다 보니 이름만으로도 구분이 되기 때문.[4] 공식 석상이나 중계에서 Bryant라고 종종 지칭하기도 했다.
별명은 2007년 인터뷰에서 스스로 블랙맘바라고 붙였다. "99%의 정확도와 최고의 스피드로 연속해서 공격하는 블랙맘바의 능력"을 그의 농구에서 보여주고 싶다는 이유로. 2013년부터는 고급 와인과 같이 숙성되어 가는 그의 플레이를 묘사하기 위해 스스로를 'vino'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2. 고등학교 시절
코비는 로워 메리언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3년간 로워 메리언 고교가 기록한 전적은 77승 13패. 이때 코비는 무려 5개의 포지션을 소화하면서 맹활약했다.[5] 평균 30.8점, 12리바운드, 6.5어시스트, 4.0스틸, 3.8블록을 기록했다. 그리고 Southeastern Pennsylvania의 최다득점 기록인 2,883득점 기록도 코비가 기록했다. 기존의 기록보유자는 윌트 체임벌린.
17세 시절[6] |
이렇게 고교 시절부터 활약상을 펼쳤기에 자신감이 생긴 코비는 대학 진학 대신 NBA 드래프트를 신청 전체 13순위로 샬럿 호네츠에 지명되었다가 드래프트 당일 LA 레이커스의 당시 센터인 블라디 디박과 트레이드되었다.
사실 이 트레이드는 레이커스의 당시 단장 제리 웨스트의 선견지명이 빛나는 부분이다. 디박은 센터 포지션이 매우 두텁던 1990년대에 올스타 바로 아랫급이던 수준급 센터(올스타전엔 2001년 한번밖에 못 나갔지만, 한때 MVP투표 상위 5명 중 네명이 센터였던 1990년대의 미친 뎁쓰만 아니면 올스타에 몇번 더 뽑혔을 것이다.)이며 당시 20대 후반으로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선수를 주고 18살짜리 신인 가드를 데려온 것이다. 바로 전해인 1995년에 미네소타가 20년 만에 처음으로 고졸 신인 케빈 가넷을 뽑았고 그가 잘 성장하고 있긴 했지만 고졸 신인들에 대한 주가가 그리 높지 않은 상황에서 모험을 건 것은 대단한 안목.
물론 1997시즌에 가넷이, 1998시즌에 코비가 올스타에 뽑히고 두 선수가 연달아 슈퍼스타급으로 성장세가 가팔랐던데다, 2년차까지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까지 3년차에 포텐이 터지면서 당시 리그는 고졸스타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이는 01 드래프트에서 절정에 달해 사상 최초의 고졸 전체 1번 지명선수인 콰미 브라운, 2픽 타이슨 챈들러, 4픽 에디 커리까지 톱 5중 3명이 고졸로 채워지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재앙의 루키시즌을 보냈다. 굳이 코비와 트레이드하지 않았더라도 이후 샤킬 오닐을 영입한 레이커스 입장에서 어차피 디박은 결과적으로 정리해야 할 선수였다. 사실상 잉여전력을 내보내고 리그의 탑 슈퍼스타를 데려온 셈인데, 이 탓에 코비와 디박의 트레이드는 최악의 트레이드 사례로 종종 언급된다.
다만 당시 슈퍼스타 글렌 라이스를 영입하고 즉시 전력이 필요했던 샬럿 입장에서도 고졸 유망주 하나 주고 준척급 센터를 영입했으니 바보짓이라고 하긴 그렇다. 게다가 오닐을 영입했으니 잉여인거지 당시 29세였던 디박의 가치는 상당히 높았다. 트레이드 당시에 오히려 환영했던 건 샬럿이었을 것이다. 그 어느 누가 13번 순위로 뽑힌 평범한 체격에 운동능력만 좋은 18세 가드가 훗날 MVP급을 넘어서 역대 10위권 안에 포함되는 선수로 성장할 줄 알겠는가? 드래프트 당시 코비의 스펙만 보면 J.R. 스미스(18번 지명, 198cm, 폭발적인 운동능력, 긴 슛거리)와 비슷하다. 오히려 체격과 기술은 스미스가 더 좋고 스미스는 맥도널드 게임 공동 MVP였다.
3. NBA 선수 시절
정규리그 평균득점 25.0점은 역대 1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며 통산 WS 172.7는 역대 15위, 효율성 22.9는 역대 2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코비가 역대 1위인건 역대 최다 야투 실패. 통산 득점은 역대 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으나, 2014년 12월 14일(현지 시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와의 원정경기에서 26득점을 기록하며, 마이클 조던의 정규리그 통산득점 32292점을 제치고 32310점으로 역대 통산득점 3위에 올랐다.[7] 하지만 마이클 조던에 비해 약 200경기를 더 뛰고 난 이후에 이루어낸 성과인지라 기록달성의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사람들도 있다.[8]어쨌든 이로써 NBA 역사상 코비보다 많은 정규리그 득점을 올린 선수는 카림 압둘자바(38387점)와 칼 말론(36298점)밖에 없었다.[9] 부상으로 인해 2014-15시즌을 일찌감치 마감했는데 이때 기준으로 통산득점은 32482점.
워낙 어린 나이에 데뷔한 선수기 때문에 (드래프트 당시 만 17세에 불과하다. 데뷔 경기 기준으로 18세 72일로 역사상 세번째로 어린 선수) 한때 카림 압둘자바의 기록을 노려볼 만한 선수로 꼽혔지만 부상이 은근히 잦고 심지어 2012-2013시즌에 커리어에서 가장 심한 부상을 당해 바로 다음 시즌을 거의 통으로 쉬면서, 압둘자바는커녕 칼 말론의 기록도 어렵게 되었다. 15시즌에 코비는 35경기, 22.3점을 기록했는데, 말론의 기록에 도달하려면 다음 두 시즌간 '''단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82경기 전부 출장해 평균 23.55점을 넣어야 한다. 코비가 지난 두 시즌간 총 41경기 출장할 정도로 부상이 잦다는 점, 올해 난사라고 욕을 먹을 정도로 슛을 많이 던지면서도 (리그 1위) 22점을 조금 넘긴 점, 내년에 코비는 만 37세이자 통산 20번째 시즌을 맞이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말도 안되게 후하게 잡아서 한 시즌에 1,500점(올 시즌 평균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전제 하에 67경기나 뛰어야 한다) 넣는다고 쳐도 앞으로 세시즌은 더 뛰어야 말론의 기록을 깰 수 있다. 물론 지난 두 시즌간 코비는 865점을 기록했다는 걸 생각하면 한 시즌 1,500점도 말도 안되게 무리한 가정. 2016년을 끝으로 코비가 더 이상 뛰지 않을 의사를 밝히면서 말론의 기록을 깨는 건 사실상 절대 불가능할 듯 하다. 15시즌 종료시점 기준으로 코비와 말론의 득점 차이는 4446점인데, 이를 15-16 시즌 한 시즌만에 뛰어넘기 위해서는 다음 시즌에 전 경기 출전한다는 가정하에 경기당 54.22점을 기록해야 한다. 코비의 한시즌 평균득점 중 가장 높은건 35.4점이고, 역사상 가장 높은 한 시즌 평균득점은 윌트 체임벌린의 50.4점이다.
결국 33,643점을 기록해서 역대 득점 순위 4위로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3.1. 초반
루키 시즌은 대부분 벤치에서 보냈다. 개막전은 출전하지 못했고, 두 번째 경기인 미네소타와의 홈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데뷔전 기록은 6분 출전에 무득점 1리바운드 1블락. 데뷔 첫 득점은 세 번째 경기인 뉴욕 닉스와의 원정경기에서 3분을 출장해 자유투로 1득점을 기록한 것이다. 보다시피 데뷔 초창기엔 가비지 멤버였다. 당시 팀에는 에디 존스와 닉 반 엑셀이라는 좋은 가드진이 있었기 때문이고, 같은 신인이었던 데릭 피셔가 코비보다 훨씬 중용되었다.[10] 그러나 시즌 중반에 들어서면서 출전시간과 비중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올스타 주간에 비트윈더레그로 슬램덩크 챔피언도 차지하며 전 세계 NBA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후반기에는 벤치 에이스로 활약했으며 주전으로 출장한 경기도 6경기나 되었다. 루키 정규시즌 기록은 71경기에 출전해 평균 15.5분을 뛰어 7.6점을 기록했다. 다만 이 시즌 플레이오프는 코비에게 있어 좋지 않은 추억이 있는데 바로 그 유명한 2라운드 5차전 클러치 에어볼 3연벙. 4쿼터 마지막 89 : 89 동점 상황에서 에어볼, 연장전 93 : 96의 약 40초가 남은 상황에서 3점 에어볼, 그리고 곧이어 다시 7초 남기고 3점 에어볼을 날렸다. 다른 선수도 아니라 풋내기에 불과한 고졸 루키가 무리하게 영웅이 되려 시도하다 던져버린 경기였기에 이 때 코비는 정말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11] 어떻게 보면 코비의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플레이 스타일은 이때부터 시작이었을지도. 당시 참사의 현장.2년차 시즌인 97-98시즌에도 79경기에 출전하는 와중에 단 1경기만 주전으로 출전하는 식스맨이었지만, 평균 출전시간은 26분으로 늘어났고, 득점은 15.4득점으로 두 배이상 상승했다. 인기도 크게 높아져서 팀에서도 주전이 아니면서 팬투표로 서부 올스타팀의 주전 가드로 뽑혔다(!). 아이러니하게 주전 슈팅 가드인 에디 존스는 올스타전에서 후보 선수. 인기가 꽤 높았던지 뉴스위크에도 두 페이지가량 그에 대한 기사를 싣기도 했으며, 코비의 인터뷰 도중에 레이커스의 광팬인 레전드 배우 잭 니콜슨이
게다가 이때 본인을 주인공으로 한 NBA게임이 나오기도 했다. 닌텐도 64용으로 나온 Kobe Bryrant on NBA Courtside란 게임인데, 당시론 그래픽이나 게임플레이도 제법 괜찮았던 농구 게임이다. 이런 식으로 게임에 이름이 걸리는 건 타이거 우즈같은 정상급 스타가 대부분이란 점에서 후보 가드주제에 게임의 주인공이 된 코비가 엄청 잘나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재밌게도 주인공인데 후보로 나오는 건 좀 그랬던지, 레이커스를 선택하면 주전 포인트 가드가 코비, 주전 슈팅 가드가 에디 존스로 되어있다. 진짜 주전이었던 닉 반 엑셀은 후보. 이것 때문에 당시 미국 초딩 중 코비를 PG로 착각한 이들도 상당하다.
3년차 시즌. 단축시즌으로 치러진 98-99시즌에서는 레이커스가 팀의 주전 슈팅 가드로 에디 존스 대신 그를 선택함으로써[12] 처음으로 풀타임 주전이 되었다. 그러나 코비 개인으로서는 다소 부진하다고 평가받은 시즌이었다. 전 경기를 주전으로 뛰었고 출장시간도 38분 수준으로 크게 늘어났지만, 당연할 것이라 여겼던 평균 20득점 이상에 실패(19.9득점)한 부분은 아직 주전으로 뛸 레벨은 아니지 않느냐는 평가를 듣기에 이르렀다. 레이커스도 플레이오프에서 또 다시 유타한테 탈탈 털리며 좌절을 경험해야 했고, 결국 레이커스는 시카고를 여섯 번 우승시킨 필 잭슨을 영입하게 된다.
3.2. 샤크와의 최강의 콤비
트라이앵글 오펜스 하에서 샤크는 더욱 위력적인 선수가 되었고, 이는 코비도 마찬가지였다. 코비는 조던의 역할뿐만 아니라 피펜의 역할인 볼 배급과 게임 리딩 그리고 상대 백코트 에이스 수비까지 다 혼자 해야했지만 전년도의 악평을 모두 날려버리려는 듯이 그것을 모두 훌륭히 소화했고, 레이커스는 드디어 99-00시즌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99-00시즌의 시작은 좋지 않았다. 코비는 프리시즌 위저즈와의 경기에서 부상을 당해 6주를 결장하게 된다. 그러나 복귀 후, 평균 38분을 뛰면서 팀내 최다 어시스트와 스틸을 기록하였고, 팀은 67승을 기록하였다. 에이스 샤킬 오닐은 MVP를 수상하였고, 코비는 세컨팀과 디펜시브 퍼스트 팀[13]에 들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클러치 샷을 성공시키고,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를 상대로 한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코비 커리어 하이라이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인, 샤크에게 클러치 엘리웁 패스를 성공시키는 장면도 보였다. 파이널에서는 2차전에 발목 부상을 입어 3차전을 결장해야 했으나, 4차전에 복귀하였고, 그 경기에서 샤크가 6반칙 퇴장을 당한 상황에서 연장전에서 클러치 샷을 성공시키며 팀을 승리로 이끈다. 레이커스는 이후 6차전까지의 혈투 끝에 필 잭슨 체제에서의 첫 우승을 이루었다.
00-01 시즌에 코비는 더욱 발전하여, 전년도보다 평균 6점을 더 넣으며 28.5점을 기록하였고, 전 시즌에 이어서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다. 팀은 시즌 중에는 56승으로 전년도에 비해 한풀 기세가 꺾였으나, 플레이오프에서는 파이널 전까지 블레이저스, 킹스, 스퍼스를 모두 스윕해 버리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파이널에 진출한다. 파이널 상대는 당시 모든 개인상을 휩쓴, 앨런 아이버슨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였고, 이들은 파이널 1차전에서 레이커스에 플레이오프 첫 패전을 안겨주며 선전한다. 그러나 레이커스는 곧바로 샤크의 맹활약에 힘입어 시리즈를 뒤집고, 5차전 만에 두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코비는 플레이오프 기간동안 29.4-7.3-6.1의 득점-리바운드-어시스트를 기록하였다. 또한 이 시즌에 샤크와 코비의 불화가 처음으로 수면 위에 드러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01-02 시즌에도 코비는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고, 생애 최초로 올스타전 MVP와 퍼스트 팀 입성의 영예를 누리게 된다. 또한, 전년도에 이어 디펜시브 세컨드 팀에도 선정되었다. 팀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밀레니엄 킹스를 상대로 고전했으나[14], 파이널에 다시 진출하였고, 제이슨 키드가 이끌던 네츠를 스윕하며 3-peat를 완성한다. 코비는 이 시리즈에서 26.8득점 5.8리바운드 5.3어시스트와 51.4%의 야투율을 기록하였다. 이들이 기록한 쓰리핏은 2020년 기준 마지막 쓰리핏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코비는 서서히 자기가 팀의 1인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보인다. 어느 순간부터 코비의 팀내 발언권도 커져갔고, 기존의 팀의 1인자였던 샤킬 오닐이 이를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오닐이 처음부터 코비를 미워한 건 아니었다.[15] 그러나 코비의 기량이 늘면서 서서히 1인자 자리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자 오닐의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고, 또 농구연습밖에 모르는 바보와도 같았던 코비가 오닐이 좀더 농구에 매진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출하자 '애송이 주제 건방지다'며 오닐이 불쾌해했다. 오닐도 코비를 "앤퍼니 하더웨이 part 2"라고 부르거나 Showboat[16]라는 별명도 지어주는 등 조롱하기 시작했다. 당시 팀 동료들도 전부 샤킬 오닐 편에 섰다고 한다. 유일하게 코비 편을 들어준게 드래프트 동기였던 데릭 피셔 뿐.
이러한 불화에도 불구하고, 코비는 계속 뛰어난 활약을 이어갔고, 02-03 시즌에 또다시 퍼스트 팀에 선정되고 MVP 투표에서 3위에 오르는 맹활약을 한다. 이들은 보스턴 셀틱스의 8연속 우승 이후 전인미답의 경지였던 4핏에 도전하였으나,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밀리며 좌절하게 된다.
그 다음인 03-04 시즌, 레이커스는 칼 말론과 게리 페이튼을 영입하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일명 전당포 라인업을 구축한다. 그러나 코비는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인생 최악의 흑역사를 터트리고 마는데, 덴버에서 강간 사건에 연루되고 만 것이다.[17][18] 변호인단의 노력으로 어찌어찌 무죄 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코비는 이로 인해 시즌 초반 몇 경기를 결장하였다. 또한 그러는 와중에 "딴 사람들도 다하는데 왜 나한테만 그러냐, 샤크를 봐라"라는 듣는 사람들의 어이를 상실케 한 발언까지 하며 팀내 분위기가 개판임을 직접 보여주었다.[19] 그 외에도 칼 말론이 아내 바네사를 성희롱하는 사건도 발생하는 등, 팀의 분위기는 개판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될 네명이 뭉친 효과인지, 레이커스는 2004 NBA 파이널에 진출하는데는 성공한다. 그러나 이들은 파이널에서 피스톤스에게 처참한 경기력으로 패하며 결국 우승에 실패하였고, 샤크는 시즌 종료 후 라마 오돔, 캐런 버틀러, 브라이언 그랜트를 대가로 트레이드된다. 코비는 이 시즌에도 퍼스트 팀과 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등극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용두사미였던 시즌이었다. 그리고 코비 개인에게는 말년의 두 시즌보다도 더 최악의 흑역사로 평가받는 시즌이었다. 또한 파이널에서도 코비는 2차전 3점 클러치 샷을 제외하면 시리즈 내내 부진한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레이커스 팬들에게 더욱 까였고, 위의 강간 의혹과 같이 엮여 버리면서 코비의 안티팬들이 엄청나게 급증한 시즌이었다.
3.3. 홀로서기
2004년에 샤크가 마이애미로 트레이드 되면서 본격적으로 팀의 1인자로서 처음으로 시즌을 시작했으나 결과는 시망. 코비의 개인기량은 좋았지만, 팀멤버 구성은 콰미 브라운, 스무쉬 파커, 루크 월튼 등 다른 팀에서는 벤치멤버를 할 선수들이 주전일 정도로 레이커스 역대 최약체인 것이 함정.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동료들과 어울리기보단 농구에만 집중하는 코비의 성격이 리더로서 적합하지 못하는게 본격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실제로 코비는 예전부터 팀 내에서 드래프트 동기 데릭 피셔 정도를 제외하면 농구 외적으로 적극적으로 대화하는 선수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결국 코비의 홀로서기 첫해는 그리 밝지 못했다. 결국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도 진출하지 못했고, 결국 오랜만에 로터리 픽 추첨식에 나오는 낯선 풍경을 연출했다. 개인 성적 또한 디펜시브 팀에도 오르지 못하고, All-NBA 팀도 서드 팀에 그치는 등 코비로서는 최악의 시즌이라고 할 만했다.그후 05-06 시즌에 필 잭슨 감독과 다시 재회하고 잭슨 역시 코비를 중심으로 한 팀 구성을 합의하면서 코비도 조금씩 날개를 달았다. 또한 04시즌 당시 최악이던 잭슨과 코비의 관계 역시 코비가 한 시즌을 철저하게 망하고 나서 리더 역할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고, 스스로 표현한대로 "망아지같았던" 성격을 조금씩 죽이고 난 뒤에 다소 회복되었다. 실제로 이때 코비는 동료들과 낚시를 가는등 예전과 달리 리더로서 역할을 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또한, 2006년 1월 22일 토톤토 랩터스를 상대로 81득점을 기록하면서 역대 한경기 최다득점 2위로 올라선다.[20] 또한, 평균 35.4득점[21]을 기록하며 생애 첫 득점왕에도 등극하였다. 그러나 2년 동안은 피닉스 선즈에게 1라운드 탈락이라는 쓰디쓴 성적표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05-06 시즌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는 서부 2번시드였던 피닉스를 상대로 4차전 4쿼터 7초를 남기고 파커의 스티브 내쉬 상대 스틸로 잡은 공격권을 가지고, 88대 90에서 동점을 만드는 플로터를 올려놓더니, 그 경기 연장전에서 본인의 커리어에 길이 남은 역전위닝 버저비터를 오른쪽 엘보우에서의 미드레인지 점퍼로 작렬시키며[22] 서부 7번시드 레이커스의 3승 1패 시리즈 리드를 이끌어 업셋 승리 완성에 1승만 남겨두었지만, 반드시 시리즈를 끝내야했던 6차전 홈 경기에서 경기종료 6.3초를 남기고 팀 토마스에게 동점 3점슛을 허용해서 연장전으로 끌려가 패배한 부분이 뼈아프게 작용하여 결국 3연승으로 반격한 피닉스에게 2라운드 진출권을 허용해야만 했다.
05-06시즌 종료 후, 코비는 등번호를 8번에서 24번으로 바꾸었다. 그렇게 맞이한 시즌은 06-07 시즌은 2연속으로 득점왕도 하고 전년에 이어 다시 1st 팀에 입성했으나 다시 1라운드에서 만난 피닉스에게 1승 4패로 탈락.
07-08시즌에는 초반에는 선전하고 있었으나 앤드류 바이넘이 부상으로 아웃되며 팀에 위기가 닥쳤으나, 파우 가솔이 합류하면서 팀도 다시 우승권 팀으로 발돋움했다. 가솔의 합류로 트라이앵글 오펜스가 완성되고, 안정적인 2옵션 득점원이 생기면서 팀은 다시 승승장구하게 된다. 시즌 종료 후, 그는 생애 유일한 시즌 MVP를 달성하였고,[23]퍼스트 팀에 3년 연속 입성한다. 또한, 플레이오프에서는 덴버, 유타, 샌안토니오를 만나 파이널 까지 진출하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폴 피어스, 케빈 가넷, 레이 앨런이 모인 보스턴 빅3에 파이널에서 6차전만에 패하고 만다. 코비에게는 두 번째 파이널 패전이었다.
이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뽑히게 되고, "올림픽 금메달이 NBA 우승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대표팀의 에이스로써 활약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08-09시즌과 09-10시즌에 연속 우승을 하면서 코비도 드디어 제대로 인정받게 되었다. 08-09 시즌에도 팀과 코비는 승승장구하였고, 코비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61점을 득점하며 해당 장소에서 최다득점 기록을 세우기도 한다. 또한, 올스타전에서 샤크와 공동 MVP를 수상하며 그간의 앙금을 털어낸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시즌 내내 역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통산 7번째로 1st 팀과 디펜시브 1st 팀에 선정된다.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 유타 재즈를 5차전, 휴스턴 로키츠를 7차전, 덴버 너기츠를 6 6차전만에 각각 제압하고 2년 연속으로 파이널에 진출한다. 상대는 드와이트 하워드가 이끌던 올랜도 매직이었고, 코비는 평균 32.4득점에 7.4어시스트를 달성, 마이클 조던 이후 최초로 파이널에서 30-5-5를 달성한 선수가 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다.[24] 코비로서는 샤크 없이 처음으로 1옵션으로 달성한 우승이었고, 또한 커리어 최초로 파이널 MVP를 수상하게 된 시즌이었다.
09-10시즌에는 제리 웨스트를 넘어, 레이커스 프랜차이즈 통산 최다 득점자에 등극하였다. 파이널에서는 숙적 보스턴 셀틱스를 다시 만나게 되고, 무려 7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레이커스가 다시 우승하며 리핏에 성공하였고, 코비는 2년 연속으로 파이널 MVP를 수상하였다. 코비는 인터뷰에서 해당 시즌 우승이 가장 만족스러웠다고 한 바 있다.
10-11 시즌에는 야심차게 두번째 3-peat 달성을 천명하였고, 가장 큰 라이벌은 르브론의 디시전 쇼와 함께 슈퍼팀을 구성한 마이애미 히트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 의외로 댈러스 매버릭스에게 4전전패를 당하면서 3연패 달성에는 실패했다.[25] 이 경기를 끝으로 필 잭슨은 물러나게 된다.
필 잭슨이 은퇴를 선언했고, 새롭게 클리블랜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마이크 브라운이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되었는데, 코비는 내심 팀의 코치였던 브라이언 쇼가 감독이 되길 원했던 듯이 보였다. 쇼는 3연패 시기에 코비의 백업을 했던 베테랑 가드로, 평판이 좋은 선수였다. 오닐 역시 쇼에 대해선 호평만 할 정도.
여담이지만 쇼는 코비와 재밌는 인연이 있는데, 코비의 아버지 조 브라이언트가 NBA생활을 마치고 선수생활 말년을 이탈리아에서 보낼 당시, 이제 갓 대학을 졸업했고 조의 상대팀에서 뛰던 22세의 쇼와 만난적이 있다. 당시 코비는 11세 아이. 당돌한 소년이었던 코비는 볼보이 역할이 아닌, 선수들과 대등하게 연습하길 원했고 쇼가 좀 비키라고 하자 H.O.R.S.E 게임을 하자고 도전했다. [26]쇼는 시합 결과에 대해선 자세히 기억이 안 난다고 했으나 (그가 나를 "이겼을 수도 있겠죠"라고 했다. 꼬마를 상대하는 프로선수 쇼가 봐주다가 갑자기 역습당해 졌을 가능성도 있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코비의 승리->코비가 1대1에서 승리했다는 말도 안되는 소문으로 퍼졌다. 레이커스가 결승에 진출했을 당시 쇼에게 기자들이 다가와 진지하게 "그때 코비가 1대1에서 이겼다던데요?"라고 묻자 쇼는 "뭐요?? 난 22살이었고 녀석은 11살이었단 말입니다. 진심이오?"란 반응을 보였다고. 그만큼 코비의 카리스마가 대단했던 것이다. 한편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 3학년 (미국 공립고등학교는 4년제가 일반적)이 된 코비가 올랜도에서 뛰던 쇼와 마주치자 반갑게 대화를 한 후 떠나는 쇼에게 코비가 "내년에 봅시다"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고졸 선수란 상상도 못할 것었다. 1976년에 최초의 고졸선수가 나왔지만 그 이후 20년 가까이 고졸이 없었고, 20년만의 고졸선수가 된 (코비보다 한 학년 위인) 케빈 가넷은 아직 드래프트 참가선언하기 전이었다. 그랬기에 쇼는 "얘가 왜 이래?"란 반응이었으나 아니나다를까 실제로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드래프트에 나선다. #
2011년 오프시즌에는 3핏 달성 실패와 잭슨의 은퇴를 뒤로 하고 팀은 보강에 나선다. 우선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크리스 폴을 영입하려 했으나 사무국의 승인 거부로 실패한다. 대신, 12-13시즌에 스티브 내시와 드와이트 하워드를 트레이드로 영입하며 소위 전당포 라인업 2기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 팀은 내시의 노쇠화와 하워드의 적응 실패로 1기 전당포 라인업보다도 훨씬 부진한 성적을 내게 된다. 그 와중에 2012년 12월 5일 뉴올리언스 호네츠전에서 통산 30,000득점의 벽을 돌파했다. 역대 득점 순위는 카림 압둘자바, 칼 말론, 마이클 조던, 윌트 체임벌린에 이은 5위. 그리고 3월에는 체임벌린의 기록도 넘어섰다. 그러나 12-13 시즌 레이커스의 엄청난 부진으로 인해 폭풍까임의 대상이 되었다.
플레이오프 진출마저 불확실해져 유타와 8위 순위다툼을 한 4월, 매 경기 거의 쉬지 않고 40분 이상씩 무리해서 뛰다가 12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전에서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했다. 경기는 승리했지만 레이커스 입장에서는 마냥 좋아할 수 없게 되었다. 아킬레스건 파열로 최대 9개월 결장이 예상되는 심각한 부상이었다.[27] 코비 없이 포스트시즌에 돌입한 레이커스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1라운드에서 스윕당하고, 전당포 라인업 2기는 해체된다.
그러나... 부상에서 완치되었고, 팀 연습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댄토니 감독 말에 따르면 11월 말쯤에 복귀가 가능하다하고 한다!! 20대도 재활에 1년이 넘게 소요되는 부상인데 30대를 훌쩍 넘은 그가 벌써 복귀를 노린다니 그의 자기관리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28]
2013년 11월 25일(현지시간) 레이커스와 새로 2년 연장 계약을 채결했다. 2년 총액 48.5M.(23.5+25) 15/16시즌후에 계약이 종료되고 2016년엔 만 38세가 되는 만큼 사실상 마지막 계약이 될 듯 하다.
그리고 12월 8일 토론토 랩터스전에서 복귀하긴 했는데...9득점 8리바운드 4어시스트에 8턴오버라는 많이 실망스러운 기록을 남겼다. 12월 11일 피닉스 선즈전에서 스몰포워드로 뛰면서 20점 3어시스트라는 기록을 남겼다. 스코어링 포지션으로 복귀하자마자 20+기록을 남긴것. 아직 체중 감량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이런 기록을 냈다는 것은 고무적이었다.
12월 17일 멤피스 그리즐리스전에서 이번에는 왼쪽 무릎부상으로 또 6주 이상은 결장한다는 소식이 나왔고, 결국은 시즌 아웃이 확정. 중간에 잠깐 나왔다는 이유로 연봉도 보험처리가 안된다고 했다.
3.4. 후반부: 노욕?
3.4.1. 2014-15 시즌
레이커스의 로스터가 망가진 14-15 시즌, 조던의 통산 스코어 추월을 목표로 열심히 득점을 하고는 있지만 40%가 안되는 야투율로 난사를 하며 좋지 않은 효율을 보여주고 있다. 팀도 서부 최하위권을 벗어나기 어려워보인다. 11월 11일 멤피스와의 경기에서 존 하블리첵의 종전 기록인 13,417개를 제치고 역대 최다 야투실패라는 기록 아닌 기록도 세웠다. 그 후에도 신나게 난사를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카를로스 부저와 제레미 린이 코비를 돌려까는 뉘앙스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코비는 "나도 팀동료들을 참여시키고 싶지만 지갑을 도둑맞았으면 일단 급하게 잡고봐야지"라면서 일단 경기를 이기는 게 팀 동료를 참여시킨다는 것보다 우선한다는 식의 인터뷰를 했다.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게 어차피 농구는 팀스포츠다. 전성기 때야 혼자 날고 기어서 몇 경기 잡는게 가능해도 지금 코비의 기량으론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야 "도둑을 겨우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승리와 팀동료를 공격에 참여시키는 것을 별개로 보고 있는(즉, 승리를 따내는 건 어디까지나 나란 마인드) 걸 알 수 있는데 팀 스포츠에서 에이스가, 게다가 19년차 베테랑이 이런 마인드였다면 심각한 문제였다.[29]
12월 15일 마침내 마이클 조던의 기록(32,292점)을 넘어서 통산 득점 3위(32,310점)에 올라섰다.
12월 23일 기준으로 NBA 전체 득점 4위인 24.6점을 올리고 있으나 슛 성공률은 상위권의 다른 선수들과 비교하기도 처참한 37.2%이다. 3점슛 성공률은 27.4%.... 그나마 27점으로 득점 1위에 올라있는 제임스 하든이 42.1%로 슛 성공률이 낮은 편이지만, 이것마저도 코비보다는 훨씬 높고, 삼점슛 시도 개수를 적용해서 계산한 TS성공률로 보면 하든 57.9%, 코비 47.5%로 1할 차이가 넘는다. 이렇게 처참한 성공률에도 슛을 경기당 22.4개나 시도하며 NBA전체 1위를 달리고 있다.(하든보다 세개나 많다.) 다시 말해 06-07 시즌 득점왕을 했을 때(22.8개)와 거의 비슷하게 던져대고 있다. 현재 가장 큰 문제는 슛 시도가 많다는 것보다도, 성공률이 낮다는 것보다도, 경기력 자체가 극히 안 좋다는 점이다. 12월 21일 열렸던 경기는 이 모든 문제점이 드러난 경기다.
이 경기에서 코비는 25점 5리바운드 3어시스트 2스틸로 언뜻 보기엔 괜찮은 활약을 펼쳤으며 레이커스는 새크라멘토 킹스에게 108대 101로 분패했다. "코비는 잘했는데 팀동료들의 지원이 부족해서 졌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경기 내용을 보면 절대 이게 아니다.
이 경기에서 코비는 슛을 30개 던져서 8개 넣었다(26.7%). 이 수치는 코비를 제외한 다른 모든 주전 선수들의 슛시도를 합친 것(28개)보다도 많다. 참고로 벤치에서 출전한 닉 영은 코비의 절반도 안되는 14개를 던져 코비보다 많은 26점을 올렸다.
영상을 보면 더 가관인게 동료들이 완전히 오픈된 상태에서 손을 들고 있는데 코비가 수비를 달고 무리하게 슛을 쏴버려 동료들이 허탈하게 지켜보는 장면이 수차례나 된다. 공격경로가 완전히 막힌 상태에서 무리하게 돌파하다 공격자 파울을 세 차례나 범하기도 한다. 심지어 한번은 골밑에서 다른 동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엔드라인 밖으로 밀려 나가면서 백보드 뒤를 향해 정말 택도 없는 페이더웨이슛을 날리기도 한다. 정말 웃긴 게 이게 백보드 위를 넘어와서 들어가더라도 규정 위반이라 무효처리다.[30]
니갱망 모드는 둘째치고 더 큰 문제는 코비가 19년차 베테랑이자 만 36세 노장이라는 점이다. 안 그래도 초반에 비해 경기력이 떨어지고 있는데, 아직 시즌의 3분의 1밖에 안 지났다. 초반엔 그래도 27점 언저리였지만 어느새 25점 밑으로 내려왔으며 성공률은 더 떨어지고 있다. (최근 5경기 평균 20.6점 슛성공률 29.2%) 명예의 전당과 영구결번이 확실시되는데다 기량도 나이를 감안하면 괜찮은 편임에도 전성기 시절 플레이스타일을 버리길 거부하면서 안타까운 말년을 보내고 있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코비가 빠진 레이커스가 NBA 전체 1위팀인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를 시종일관 압도하다 잡아내는 일이 벌어져 입장이 뻘쭘하게 됐다. 물론 한 경기만으로 판단하는 건 무리지만...
복귀 이후 출장시간도 줄이고, 이틀연속 경기의 두번째 경기는 쉬는 등 뛰는 양을 조절하고 있다. 그러나 슛성공률은 여전히 낮으며 득점기록은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 1월 14일 기준 22.7점 5.6리바운드 5.4어시스트 필드골 성공률 36.9% 삼점슛 성공률 28.9% 자유투 성공률 81.4%.. 최근 페이스를 볼때 풀시즌 기준으로 2년차 이후 최악의 기록을 낼 것이 유력해보인다. 결국 한국 시간으로 1월 23일, 35경기만에 오른쪽 어께 회전근 파열 부상으로 시즌아웃되었다. 최종성적은 22.3점 5.7리바운드 5.6어시스트 필드골 성공률 37.3% 삼점슛 성공률 29.3% 자유투 성공률 81.3%.. 풀시즌을 기준으로 보면, 득점은 4년차 이후 최악, 전체생산성을 나타내는 player efficiency rating은 3년차 이후 최악. 특히 필드골 성공률은 모든 시즌 통틀어 커리어 최악이다.
사실상 이번 시즌은 조던의 통산득점을 넘은 것 빼고는 딱히 긍정적인 면이 없다. 최근 ESPN은 "레이커스가 코비 없이 더 나은 게 아닌가"란 기사를 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레이커스는 코비가 없을때 100포제션(공격권) 당 4점을 더 넣고, 10점을 덜 내줬다. 레이커스에서 코비보다 더 나쁜 영향을 끼친 선수는 조던 힐 뿐이다.
코비의 이번 시즌을 정리하자면,
윈셰어는 공격과 수비를 통해 한 선수가 팀에 얼마만큼의 승수를 공헌했는지 계산하는 2차스탯인데, 코비는 이번 시즌 0.1을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그의 커리어 하이 윈셰어는 15.3인데 최고수준은 아니지만(그는 윈셰어로 리그 1위를 차지한 적이 없다) 상당히 높은편[31] 코비의 윈셰어 수치는 이번 시즌 최소 1200분 이상 뛴 선수 중 가장 적으며, 심지어 비효율의 대명사로 알려진 조쉬 스미스(0.2)보다도 낮다. 농구에서 2차 스탯의 신빙성이 낮다는 걸 감안해도 이 정도면 심각하다. 또한 이번 시즌 코비가 기록한 필드골 성공률 37.3%는 지난 50년간 NBA에서 평균 20점 이상을 득점한 선수를 통틀어 가장 낮았다. 기존기록은 난사로 팬들로부터 가루가 되도록 까였던 앨런 아이버슨이며 03-04 시즌의 그는 38.7%로 26.4점을 기록했다.
그동안 ESPN이 코비를 집요하게 깠다는 걸 감안해도 해당 기사는 객관적인 기록만으로 분석한 만큼 "ESPN이 그렇지 뭐"하고 넘길 문제는 절대 아닌 듯 보인다.
농구 자체는 다른 팀 스포츠와 다르게 한 선수만으로 우승후보가 될 수 있단 점에서[32] 코비의 발언을 옹호하려는 주장들이 있지만, 이런 옹호론이 포인트를 좀 잘못 잡은 게 올해의 코비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비판의 주요 포인트라는 것이다. 코비 그 자신도 부상 자체에서 돌아와 패스를 적극적으로 하고 슛을 줄이는 스타일로 바꾸면서 평균 득점이 내려갔는데, 이러한 스타일 변화 자체가 코비 자신이 공격에 너무 참여한다고 느끼고 있는 명백한 증거다. 이러한 옹호론은 과거의 코비를 언급하며 옹호하는 생뚱맞은 옹호라 하겠다.
현재 레이커스에서 코비가 이탈하고 레이커스가 죽을 쑤고 있는 것은 코비가 이기적이었기 때문이란 얘기가 아니다. 물론, 현재 레이커스 로스터에는 쓸만한 선수가 별로 없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야투율이 3할, 심할때는 2할대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혼자 슛을 30번씩 던지는 게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3.4.2. 2015-16 시즌
시즌이 시작되기 전 본인은 이제 늙었고 젊은 선수들에게 주도권을 넘기고 캐치 앤 슛에 집중한다고 이야기 했지만 시즌이 시작되니 마구잡이로 던지는 슛은 여전했다. 다만 과거에 비해 슛성공률이 현저하게 떨어지며 팀을 망치는 주범이 되어가는 중. 전보다 패스를 하는 빈도가 늘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이 죽은 패스이며 잡으면 수비를 달고 던지는 확률 떨어지는 슛을 계속해서 던지고 있다. 팬들의 반응도 차마 눈뜨고 못보겠다 할 정도[33] 그리고...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코비만 몰랐다 - 워리어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가진 인터뷰 중
커리는 NBA 역사를, 코비는 '흑역사'를 썼다 - 가황 박세운 기자
한국시간 11월 25일, 코비 커리어에 있어 최악의 흑역사가 그것도 인생 마지막 시즌에 생기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상대는 연승기록중인 디펜딩 챔피언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이날 브라이언트는 경기에 앞서 골든스테이트의 연승을 저지할수있겠냐는 질문에 한국시간 11월 29일, 미국 프로스포츠 전·현직 선수들의 블로그 The Players Tribune[36]에 올린 '농구에게(Dear Basketball)'이라는 글을 통해 올 시즌이 끝나고 은퇴할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인디애나와의 경기, 전반엔 골든스테이트와의 게임과 별반 다를바없는 경기력을 선보였는데[37] 후반들어 추격의 3점슛 두방과 어시스트로 팀을 구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합종료가 얼마 안남은 결정적인 순간 역전을 위해 던진 슛이 하필이면 실패해도 에어볼로 나오고 만다.[38]
이후 필라델피아와의 탱킹대전에서 다시 한 번 충격과 공포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필라델피아의 첫 승을 만들어주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31분 42초동안 출장한 가운데 야투 26개를 시도해 7개, 3점은 17개 시도해 단 4개만을 기록했다. 득실 마진도 당연히 꼴찌.
하지만 그 다음날 열렸던 워싱턴 위저즈와의 매치는 코비팬뿐만이 아니라 그의 전성기부터 NBA를 봐왔던 사람들이라면 모두 향수에 젖게 만들었다. 35분 출장하며 야투 10/24 3점 4/11 자유투 7/8이라는 올 시즌 최고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31득점을 기록, 수비에서도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극후반까지 물고 물리는 승부 끝에 4쿼터 마지막 1분이 남았을 때 98대 99 상황에서 역전 3점슛과 101대 101 동점 상황에서 30.8초를 남기고 위닝샷을 넣으며 승부를 결착지었다.[39]
하지만 시즌이 진행되며 점점 부상 후유증에서 회복되고 신체 밸런스가 어느정도 되돌아옴에 따라 12월 10일 이후로는 슛이 안정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심적 부담이 덜해지자 후배들을 위한 이타적인 플레이까지 나오면서 이러다 은퇴번복하는거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등 매경기 농구팬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역시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한 법이다.
12월 3/23일에는 31득점을 기록하여 시즌 하이 기록을 갱신하기도 하면서 클라스는 영원하다며 감탄을 듣는 중.
위에 언급된 31점(23일) 경기부터 시작해 8경기동안 평균 20.4점 (아투율 37.7%)를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그 다음부터 8경기동안 평균 8.1점 (야투율 32.1%)의 슬픈 모습을 (네 경기 연속 한 자리수 득점은 덤) 보여주기도 했다.
각 경기의 기록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
참고로 이번 시즌 39경기 중에 5할을 넘긴 적은 딱 다섯 번이다. 말 그대로 널뛰기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1월 페이스는 상당히 안 좋은 걸 볼 수 있다. 10경기에 출전해 평균 24.9분 출장 11.1점 3리바운드 3.7어시스트 0.8스틸 0.3블럭 2.4실책 야투 성공률 36.7% 삼점슛 성공률 20.5%. 그나마 고무적인 게 시즌 초반에 비해 야투시도가 줄어들고 야투성공률이 소폭 상승했다는 것.
2월 1일(한국시간) 기준으로 39경기동안 29분 출장하며 평균 15.7점 3.9리바운드 3.5어시스트 0.9스틸 0.2블럭 2.3실책 야투성공률 34.6% 삼점슛 성공률 25% 자유투성공률 78.4%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이어가면 2년 연속으로 커리어 최악의 야투성공률 기록을 갈아치우게 되며, 삼점슛 성공률도 최하위, 득점은 2년차 이후 최악이다. 물론 커리어 말기에 대부분의 선수들이 최악의 기록을 낸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나마 작년과 비교하면 많이 나아진 것이 난사가 줄었다! 지난 시즌엔 택도 없는 성공률로 시즌 초반엔 거의 득점왕 시기만큼 던져대던 코비가 이번 시즌엔 슛 시도가 거의 5개나 줄었다. 물론 출장시간이 적어진 것을 감안해야 하지만 지난 시즌처럼 무작정 탐욕을 부리는 모습은 아니다. 또한 출장시간 감소를 감안해도 실책갯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지난 시즌에 어림도 없는 공격을 억지로 하다가 공을 흘리던 모습과 비교하면 정말 감개무량할 정도로 나아진 모습.
종합하자면 초반의 부진을 딛고 그나마 나아진 모습을 보여준다는 모습과 20년을 뛰어온 팀에서 은퇴시즌을 홀라당 날려먹으면서 자신의 은퇴투어를 다니고 있는 중이라는 식으로 국내의 농구팬들 사이에서도 찬반논란이 엄청나다. 결국 끝까지 제독이나 노비츠키, 가넷과 같이 후배선수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못할 듯 하다.
은퇴선언을 한 뒤로는 마음 속의 짐을 조금은 내려놓은 듯 몇몇 경기에서는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오랜 선수 생활 동안 쌓였던 부상이 몸을 갉아먹고 있어 출장시간을 조절하고 있는 중이다. 유니폼을 입고 은퇴하기 위해서.
그리고 노장의 마지막을 기념하기 위해 압도적인 득표수를 받으며 전체 1위로 올스타 주전으로 뽑히게 되었다!
현지시간 2월 2일 스테이플스센터에서 열린 미네소타와의 대 탱킹대전에서 3점슛을 코비다운 셀렉션으로 11개 시도해 7개나 적중시키는 퍼포먼스 끝에 38점이라는 시즌 최고득점 기록을 경신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더더욱 고무적이었던 건 외곽을 맹폭하고 골밑에서는 돌파 후 자유투 머신이던 00년대 중반 최전성기 코비의 모습이 보였다는 데 있다.
이틀 후 펼쳐진 뉴올리언스 원정 경기에서도 팀의 클러치를 담당하며 27점을 기록했고 팀은 승리했다.
그리고 마지막 경기를 갖게되는데...
3.5. 은퇴(Mamba Out)
현지시간 2016년 4월 13일에 열린 유타 재즈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이자 은퇴경기.. 한화로 약 4만 원이었던 티켓값이 약 70만 원으로 폭등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그 경기에서 코비는 50개의 야투를 시도,[40] 게임 종료 30초를 남기고 위닝샷을 집어넣는 등 22개의 야투를 성공하며 60득점으로 자신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자축했다. 커리어 통산 6번째 그야말로 코비이기에 할 수 있는 코비다운 마무리.[41] 그리고 커리어 마지막 스탯은 어시스트, 즉 패스였다.[42]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립박수속에 자신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었다.[43][44] 동시간 열렸던 경기에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가 73승, 스테판 커리가 3점슛 400개, 평득 30점으로 180 클럽 득점왕 성공을 실현시키면서, 농구 시청자들에게 한 시대가 새로운 시대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감동을 선사하며 은퇴하였다. 인터뷰에서 커리어 내내 패스 좀 하고 살라는 소리를 들어왔는데, 오히려 오늘은 마지막을 골로 장식 했어야지 패스를 왜했었냐, 아예 패스하지 말라는 말을 들어 아이러니 해서 재밌고 인상깊었다는 말을 했다. "Man!"으로 시작한 그의 은퇴사에서의 마지막 말이었다.은퇴사 전문 번역
"What can I say, Mamba Out."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맘바는 떠난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맘바는 떠난다.
본 경기를 중계하던 SPOTV는 경기가 끝나고 그동안의 코비의 모습을 담은 뮤직비디오를 보내며 레전드에 대한 예우를 보이기도. 음악은 015B의 이젠 안녕이었다. 그의 커리어 전체 야투율은 44%. 그의 마지막 경기 야투율 또한 22-50으로 44%였다. 참고로 이 날의 기록은 은퇴경기 최다득점 및 최고령 선수의 60점 득점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렇게 커리어를 마무리한 코비의 마지막 시즌 기록은 66경기 28.2분 출장, 17.6점 2.8어시스트 3.7리바운드 0.9스틸 0.2블럭 2턴오버 필드골 성공률 35.8% 삼점슛 성공률 28.5%에 자유투 성공률 82.6%였다. 주요 2차 스탯인 윈셰어와 Value over replacement player(대체 선수가 출장시보다 얼마나 높은 가치를 갖고 있는지 보여주는 스탯)은 둘다 마이너스에 PER은 고작 14.9를 기록하는 등 작년보다 더 떨어져 빈말로라도 좋은 활약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엄청난 고액의 연봉에도 불구하고 공수에서 커리어 최악의 활약을 보여주었으며, 게임 외적으로도 디안젤로 러셀의 병크로 개판오분전이 된 팀내 분위기를 전혀 추스르지 못했다는점에서 부정적인 시즌일 수밖에 없지만, 팬들 입장에서는 전설의 마지막이라는 점, 그리고 마지막 경기에서 맹활약으로 코비답게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감동적이었다는 평도 많다.[45] 참고로 저 기록을 내면서 받아간 연봉은 2천5백만달러로 NBA 1위였다. 코비 팬들은 코비를 한 경기라도 더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좋았겠지만, 그가 말년에 보여준 모습을 객관적으로 정리해보면 돈 무지 많이 받는 먹튀가 1년 내내 돈값 전혀 못하고 민폐급의 활약만 하다가[46]대체되는 게 차라리 나은 정도의 활약이란 소리다.] 승패가 별 의미도 없는 마지막 한 경기에서만 맹활약을 한 정도다. 물론 그가 NBA 역사에 남을 뛰어난 선수였고, 커리어 내내 팬들을 즐겁게 해주는 슈퍼스타였다는 걸 부정할 이는 없겠지만 말년의 그는 정말 못했다. 당장 코비가 은퇴하고 난 2016-17시즌에는 별 특별한 선수영입을 한 것도 아닌데[47] 26승을 거두며 전 시즌에 비해 9승이나 올랐다. 2003년에 은퇴하고 나서 팀이 길버트 아레나스를 영입했음에도 성적이 13승이나 떨어져 25승에 그친 마이클 조던과 비교된다. 심지어 조던은 이때 나이가 만 40세로 코비보다 많았다. 누적 경기수나 연차는 훨씬 적었지만...
통산 정규 기록
1346경기 33643점 7047리바운드 6306어시스트 1944스틸 4010턴오버 야투 11719/26200 3점 1827/5546 자유투 8378/10011
평균 정규 기록
1346경기 25.0점 5.2리바운드 4.7어시스트 1.4스틸 3.0턴오버 야투 44.7% 3점 32.9% 자유투 83.7% TS 55.0% eFG 48.2% WS 172.7 WS/48 0.170 PER 22.9 ORtg 110 BPM 3.9 VORP 72.7
2017년 9월 13일(한국시간), 코비의 등번호인 8번과 24번 모두 LA 레이커스의 영구결번으로 확정되었다. 한 팀에 두 개의 번호가 영구결번이 된 경우는 코비가 NBA 역사상 최초였다. 영구결번 행사는 12월 19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의 홈경기에서 하프타임에 이루어졌다.
이날 은퇴식에선 코비의 은퇴편지를 애니메이션화 한 <Dear Basketball>이란 짧은 단편이 나왔는데 이 애니메이션이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단편 애니메이션 부분을 수상했다. 감독과 코비가 나란히 단상에 올라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2020년 1월 6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 저스트 머시에 출연한 배우진들과 상영회를 진행하기 위해 참석했다. #
그러나, 이별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4. 사망
Good Bye MAMBA |
이렇게 유종의 미를 거두며 현역에서 은퇴를 한 후 제2의 인생을 살아가던 도중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이 올라왔다. 은퇴한 지 겨우 4년, 이제 겨우 불혹을 넘긴 불과 41세의 나이였다.
현지 시각 2020년 1월 26일,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칼라바사스에서 그의 전용 헬리콥터인 시코르스키 S-76B 기종(등록코드 N72EX)이[48] 추락해 사망했다. # Flightradar24에 기록된 비행 루트[49] # ESPN# LA Times[50]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그야말로 전 세계가 큰 충격을 받았다.
헬기 안에는 13살 된 둘째 딸인 지아나 브라이언트와 오렌지 코스트 대학[51] 야구 감독인 존 알토벨리[52]와 그의 아내 케리 알토벨리, 딸 알리사 알토벨리, 코치인 크리스티나 마우서[53], 지아나의 친구 페이튼 체스터, 어머니 사라 체스터, 헬기 조종사 아라 조바얀이 타고 있었다. # OCC 추모 트윗
코비는 이 날 평소에 농구를 좋아했던 딸 지아나[54]와 농구를 하기 위해 존 알토벨리의 가족[55]을 포함한 9명의 승객과 함께 본인이 설립한 맘바 스포츠 아카데미[56]로 향하기 위해 오전 9시 6분 경 평소 습관대로 헬리콥터를 타고 오렌지 카운티에 위치한 존 웨인 공항에서 탑승자 9명과 함께 이륙했다.[57] 하지만 그 날 안개가 끼는 등 날씨 사정이 안 좋았고 결국 오전 9시 47분 경 칼라바사스 상공에서 추락했고 동시에 화재가 발생했다. 오전 10시 30분 경 화재가 진화되었지만 생존자는 없었다. # 2016년에 방영한 코미디 센트럴의 “Legends of Chamberlain Heights”라는 애니메이션에서 코비 브라이언트가 탄 헬리콥터가 추락하는 장면이 있었다. # 그리고 이 여파로 인해 해당 장면이 수록된 해당 에피소드의 공식 사이트에서의 다시보기 지원이 중단되었다.
연예 전문 타블로이드 TMZ가 경찰이 유가족에게 코비의 사망 소식을 전하기도 전에 보도해버려서 논란을 샀다.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현지의 주류 언론사는 물론 LA 카운티 보안관까지 TMZ의 기레기 보도 방식을 비판했다. # 참고로 TMZ는 2009년에 마이클 잭슨의 사망을 최초로 보도했던 신문사이며 2016년에는 프린스의 사망을 최초로 보도하기도 했다.
레이커스의 팀 후배 르브론 제임스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자신의 NBA 통산 득점 3위 기록을 넘어선 바로 다음 날 일어난 비극이었는데, 코비의 마지막 트윗도 르브론에 대한 축하 멘트였다.[58] # 르브론도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급보를 듣고 충격을 받았는지 오열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코비의 커리어 초반부를 함께 했고 한 때 사이가 나빴지만 이후 다시 친분을 회복한 샤킬 오닐, 코비를 좋은 후배이자 경쟁자로 여겼던 마이클 조던 등의 추모 메시지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샤킬 오닐은 과거 사이가 안좋았던 시기를 지나 다시 절친이 되어서인지 내 최고의 친구와 조카를 함께 잃었다며 매우 슬퍼하며 눈물을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59] 코비의 멘토였던 제리 웨스트 역시 오열을 했다. 마이클 조던은 코비는 내 남동생같은 존재였고 나는 그를 매우 사랑했다면서 깊은 애도를 전했다.[60] 6성 슈가로 불리었던 앨런 아이버슨, 폴 피어스, 레이 앨런, 빈스 카터,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모두가 각자의 SNS를 통해 코비에 대한 추모의 메세지를 남겼다. 그 중에서 빈스 카터는 코비가 사망하였던 날이 그의 43번째 생일이기도 하였다. 한때 동티맥/서코비로 라이벌리를 형성했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는 ESPN과 하였던 코비에 대한 인터뷰를 하는내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61] 매직 존슨과 카림 압둘자바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디르크 노비츠키 또한 SNS을 통해 코비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고인의 현역 시절 감독으로서 지켜봤던 닥 리버스는 눈물을 흘리며 인터뷰를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했다. #[62]
현역 선수들의 추모도 이어졌다. 조엘 엠비드는 '2010 NBA 파이널을 본 뒤 농구를 시작했다.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미친듯이 슬프다.'라는 글을 올렸고. 마이크 콘리도 '이 상황을 표현할 단어를 찾을 수 없다. 비통하다. 관련된 모든 가족을 위해 기도한다. 당신과 경쟁한 건 영광스러운 일이었다.'라는 글을 올렸다. 야니스 아데토쿤보는 아예 SNS를 폐쇄해버렸다. 코비와 함께 포스트 조던의 한축을 이뤘으며 당시 선수 중 유일한 현역으로 뛰고 있는 빈스 카터는 자신의 생일에 일어난 이 비극에 경기를 준비하며 눈물을 흘렸다. 코비와 각별한 사이였던 브루클린 네츠 소속 카이리 어빙[63]은 뉴욕 닉스와의 경기 시작 전 코비의 비보를 듣고 충격을 받아 닉스 전에 결장했다. 데빈 부커와 트레이 영[64]은 당일 경기에서 각자 추모의 의미로 자신들의 야투갯수를 코비의 등번호인 24개로 맞추었는데 절묘하게도 두 선수의 야투 성공갯수를 합치니 24(13+11)가 되었고 득점으로 환산했을 때는 코비의 커리어하이 득점경기였던 81점(45+36)이 되었다.
그런데 일부는 코비의 등번호였던 8번[65]과 24번[66]을 내려놓고 다른 번호로 이동하는 일이 일어났다.[67] 다만 NBA에서는 선수들의 시그니처 넘버가 관련상품의 제작 판매와 밀접한 영향이 있기 때문에 일시적인 변경일지, 계속 묵인해줄지는 사무국과 스폰서의 판단을 기다려야 할 수밖에 없다.
사망 소식이 알려진 뒤에 치러진 NBA 경기들에서는 이렇게 경기 시작 후 한 팀은 아무 플레이도 하지 않고 공격제한시간 24초를, 한 팀은 아무 플레이도 하지 않고 하프코트를 넘어가지 않으며 8초를 소진했다. 코비의 생전 등번호가 24번, 8번이었던 것에 착안한 추모 의식. 공격제한시간 및 하프코트 바이얼레이션 제한시간이 끝나는 24초, 8초 부저가 울리면서 양팀 벤치와 관중들이 모두 기립해 박수를 치며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24번, 8번의 슈퍼스타를 추모했다. 앤드류 위긴스는 다음날 경기에서 추모의 의미로 점프볼로 팀이 딴 공을 자신 진영의 자유투 라인 한가운데에 내려놓고 8초를 소진했는데, 팀버울브스의 홈구장 타깃 센터의 해당 방향 코트 자유투 라인, 즉 위긴스가 공을 놓은 그 자리는 코비가 자유투로 득점해 조던의 통산 득점을 넘긴 역사적인 자리이다. 현지 해설진도 이를 언급하며 위긴스의 의미 있는 행동을 좋게 평가했다.[68]
그 밖에 다른 경기장에서도 추모 영상과 함께 묵념이 진행되었으며, 추모 행사중 여러 선수들과 관계자들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론조 볼이나 P.J. 터커는 자신의 신발에 추모 메시지를 적어 놓기도 했다.
의외로 코비가 커리어 전체를 바쳤던 LA 레이커스는 사망 2일째까지 공식적인 SNS 메세지를 올리지 않았다. NBA 팬덤에서는 그렇게 활발하게 소식을 전하고 팬들과 소통하던 LA 레이커스가 차마 할 말을 잃은 모습이 더욱 슬프고 안타깝다는 평.
나이키는 당분간 코비의 시그니처 슈즈의 판매를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른 스포츠에서도 코비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이날 NFL은 올스타 게임인 프로볼이 열렸는데, 프로볼에서도 코비를 추모하는 영상을 경기장에 띄우며 슈퍼스타를 추모했다. #관련 영상 이후 톰 브래디[69], 드류 브리스[70], 롭 그롱카우스키[71] 등 많은 NFL 스타들이 SNS로 그의 명복을 빌었다.
타이거 우즈도 PGA 투어 파머스 인슈어런스 오픈 최종 라운드를 마친 뒤에 '갤러리들이 "For Mamba"라고 외쳤는데 무슨 소리인지 몰랐지만, 라운드 종료 후 캐디를 통해 이야기를 들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프고 비극적인 날 중 하나다.'라면서 5분여에 걸쳐서 인터뷰를 했다.
축구선수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72]와 리오넬 메시[73][74]도 SNS에 코비 브라이언트의 사진을 올리고 고인의 명복을 비는 멘트를 남겼으며, 토니 크로스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코비의 사진을 올리며 추도했다.[75] 네이마르도 리그 경기에서 골을 넣은 후 손가락으로 2와 4를 표시하며 그를 추모하는 세레머니를 하였다.[76] 세르히오 라모스[77], 제라르드 피케[78]도 코비를 추모하는 트윗을 남겼다. 또한 FC 바르셀로나[79], 레알 마드리드 CF[80][81], 토트넘 핫스퍼[82], 리버풀 FC[8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84] 등 여러 축구팀에서 공식 SNS를 통해 추모의 글을 남겼다. 모든 축구 선수들을 나열할 수는 없지만 카를레스 푸욜, 이케르 카시야스, 마르코 아센시오 등 많은 축구 선수들이 SNS에 추모의 글을 남겼다.
한편 테니스 그랜드 슬램 대회인 호주 오픈이 진행중인데 몇몇 테니스 스타들이 코비에 대한 추모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라파엘 나달은 남자 단식 16강전을 승리로 장식한 이후 LA 레이커스 모자를 쓰고 코비를 추모하는 인터뷰를 진행하였다.[85][86] 닉 키리오스는 코비의 8번 져지를 입고 남자 단식 16강전을 치르기 위해 입장하였으며 경기 시작전에도 코비의 져지를 입고 연습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87] 이외에도 노박 조코비치[88], 스테파노스 치치파스[89], 스탠 바브린카[90] 등 많은 테니스 선수들이 SNS에 추모의 글을 남겼다.
음악계에서도 많은 아티스트들이 그에 대한 추모글을 올렸다. 특히 힙합 아티스트들이 많은 애도를 표했는데, 그중에서도 스눕 독은 코비의 사망 이후 그를 추모하는 내용의 포스팅을 30개 가량 작성하였으며, 코비의 등번호가 새겨진 레이커스 저지를 입고 찍었던 사진들을 올렸다. 이외에도 아이스 큐브, 드레이크, 나스, 더 게임, 앤더슨 팩 등 수많은 래퍼들이 그를 추모했다.
그의 사망 몇 시간 후 열린 그래미 어워드에서도 그의 넋을 기렸는데, 우연히도 그래미가 열리는 곳은 고인이 생전에 몸담았던 LA 레이커스의 홈구장 스테이플스 센터다. 이날 스테이플스 센터 주변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팬들이 삼삼오오 모이기도 했으며 2020 그래미 어워드의 진행을 맡은 알리샤 키스는 시상식전 고인을 추모했다. 알리샤 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 추모 그리고 Lil Nas X의 공연엔 처음 부분에 고인의 유니폼이 놓여 있었으며 Nipsey Hussle 추모 공연 막판 DJ Khaled가 닙시 허슬과 함께 코비 브라이언트와 그의 딸을 추모하는 멘트를 했다.
LA 레이커스의 골수 팬인 잭 니콜슨도 진심으로 코비의 명복을 빌었다. #
같은 로스앤젤레스를 연고지로 하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91]와 에인절스를 비롯한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SNS를 통해 그를 추모했다.[92]
한국프로농구 KBL은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서울 SK VS 안양 KGC, 원주종합체육관에서 열린 원주 DB VS 서울 삼성, 인천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인천 전자랜드 VS 고양 오리온과의 경기에서 위의 NBA와 유사하게 24초와 8초를 그대로 흘러보내는 방식으로 고인을 추모했다. 선수 시절의 그를 많이 다뤘던 농구전문가 손대범 점프볼 편집장도 추모글을 기고했다.
나이키와의 협업으로 유명한 아트토이 아티스트 coolrain은 SNS에 코비가 자신이 선물한 빅사이즈 코비 브라이언트 피규어를 들고 있는 사진을 올리며 추모했다.#[93]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코비의 사망 소식이 퍼지던 와중에 자신의 탄핵 심판을 비판하는 트윗만 올려서 잠시 욕을 먹었다. #[A] 상황을 파악한 이후 #[A] 몇 시간 뒤에 애도를 표하였다. #[A]
스포츠경향 기사를 비롯한 몇몇 국내 기사에서는 이미 공소기각 처리된 성폭행 기소 사건을 추모 기사에 덧붙여 비판을 받았다. 이후 스포츠경향은 해당 문단을 기사에서 삭제했다. 워싱턴 포스트 소속 기자 펠리시아 손메즈(Felicia Sonmez)는 트위터에 관련 기사를 공유했지만 엄청난 악플에 시달리자 워싱턴 포스트는 소속 기자를 변호하기는커녕 손메즈를 징계했다. 미국 언론계는 민중이 보고 싶은 기사만 내기 위해 보도지침을 버렸다고 워싱턴 포스트를 강하게 비판했다. # 미국의 주류 언론은 오히려 성폭행 논란을 코비의 인생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보기 때문에 기사에 반드시 포함하고 있다. 다만 스포츠경향과 워싱턴 포스트의 후속조치를 지지하는 여론도 있다. 특히 미국 바로 윗동네인 캐나다에서는 코비 브라이언트의 성폭행 논란 그 자체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알 권리를 인정하지만, 그런 보도가 반드시 해당 인물의 갑작스런 사망이 보도되고 있고 추모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시점에 함께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론이 매우 부정적이었다. 이와 관련한 시민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토론토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News Talk 1010)에서도 인터뷰를 청한 시민들은 추모가 필요한 시점에 진실 여부가 확실하지 않은 고인의 과거의 행적을 덧붙여 보도하는 행태에 대해서는 모두 부정적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현지시간 1월 28일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vs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의 맞대결은 2020년 4월 10일로 연기되었다.이로써 일정 레이커스는 8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9일 시카고 불스, 10일 클리퍼스 경기까지 로스앤젤레스의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홈 3연전을 쉬지않고 백투백투백으로 치른다. #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은 진정한 올림픽 챔피언이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방송계 역시 추모 물결에 휩싸였다. 심야 토크쇼 진행자들은 그를 추모하는 모놀로그로 방송을 시작했다. 코난 오브라이언은 그가 출연했던 이전 방송 분들의 짦막한 모음과 애도사를 남겼다. 투나잇쇼의 진행자 지미 팰론은 그와의 첫만남을 이야기하던 중 눈물을 보이기도 했으며, 지미 키멜은 자신의 방송을 관객 없이 녹화하며 애도사를 남긴 뒤 해당 방송 전체를 그의 생전 출연 분으로 채웠다. 제임스 코든은 "자신의 고향 영국에서 비인기 종목인 농구를 사람들이 관심 갖게한 대단한 선수였다"며 애도사를 남겼다.코난 오브라이언과 지미 팰론 (자막) 제임스 코든 지미 키멜
현지시간 1월 28일 그의 시신이 확인되었다고 한다.[97] # 그의 딸 지아나양의 시신은 발견되지 못했다고 한다.
현지시간 1월 31일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열린 포틀랜드와 레이커스의 경기 하프타임 쇼에서 위즈 칼리파와 찰리 푸스가 See You Again을 부르며 코비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현지 시간 2월 2일 라 리가 22R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경기 시작 직전에 양쪽 선수들이 피치 정중앙에서 팀원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며 잠시 코비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제 92회 아카데미 시상식 중간 한 해 동안 사망한 영화인들을 추모하는 시간에 그의 사진과 이름도 등장하였다.
현지 시각 2월 12일, CNN의 보도에서 7일 LA카운티는 성명을 통해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카운티 자택 근처에 있는 퍼시픽 뷰 추모공원[98]에 안장되었다고 밝혔다.
2월 16일, NBA 측에서 그를 기리는 의미로 NBA 올스타전 MVP의 명칭을 Kobe Bryant Award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참고로 코비는 선수 생활 동안 18번의 올스타전에 출전해 4번의 MVP를 수상했다.
WWE의 프로레슬러 도미닉 다이자코빅은 NXT 테이크오버: 포틀랜드에서 코비와 그의 딸을 기리는 복장을 입고 등장했다.
그리고 미국 현지시간 2월 24일 코비가 평생 몸 담았던 레이커스의 홈구장인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코비의 추모식이 열렸다. 지미 키멜, 샤킬 오닐, 베네사 브라이언트 그리고 마이클 조던이 나와서 추모연사를 했고 거의 대부분의 NBA선수들이 참석해서 코비의 마지막을 기렸다.
그리고 6월에 헬기사고 조사로 당시 기상 악화로 조종사가 방향 감각을 잃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NTSB는 2021년 2월 9일, 코비 브라이언트의 헬기사고 조사보고와 관련된 공청회를 화상으로 헬리콥터 추락사가 조종사의 과실에서 비롯됐다고 발표했다.# 3월경 최종조사보고서를 공개한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사고당시 기상은 계기비행을 시행해야하는 기상이었으나, 사고기엔 제대로 된 계기비행을 위한 장치가 부족했고 조종사도 계기비행 경험이 부족해 IFR 비행이 아닌 Special VFR[99] 비행을 하다 사고가 난 것으로 결론내렸다.
8월 25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내야수 키케 에르난데스는 전에 쓰던 14번이 영구결번되자, 코비의 등번호인 8번으로 변경했다고 경기전 인터뷰서 밝혔다.
[1] 나름 농구 집안인데 NBA에서 8시즌 뛴 아버지 조를 포함해 외삼촌 John "Chubby" Cox도 잠깐 NBA에서 뛴 적이 있는 농구선수 출신이며, 이종사촌인 존 콕스 4세 역시 프로선수다. 2024년 7월 16일에 별세했다.[2] 제일 좋아하는 축구선수는 마르코 반 바스텐이었다고 한다.[3] 이후에도 축구에도 애정이 많았으며 실제로 코비가 공을 차는 영상을 유튜브에서 보면 비선수 출신 치고는 꽤나 수준급이긴 하다. 그리고 호나우지뉴를 비롯한 바르샤 소속 축구 스타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바르샤의 팬을 자처한 적도 있었다.[4] 동양권은 대체로 성이 종류가 적고 그 대신 이름이 다양한데, 서양권은 역으로 이름이 그게 그거고 성이 다양한 편이다. 동양권은 한자 글자를 조합해 각자 새로운 이름을 창조해내지만 서양권 이름은 성경 등장인물이나 신화 등장인물 등 한정된 리스트 중에서 골라 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족이지만 아시아 이민자들의 이름이 몰개성한(서양 이름+동양 성) 이유기도 하다.[5] 미국 고등학교 농구의 경우 다재다능한 선수는 딱히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자신이 원하는 자유로운 플레이를 많이 하게 되는데, 코비도 그중 한 명이였다. 참고로 케빈 가넷의 경우 공식 포지션은 센터였지만 모든 포지션을 다 소화했고 가장 즐겨하는 포지션은 포인트 가드였다고 한다.[6] 드래프트에서 레이커스로 트레이드 된 다음 입단식에서 처음 유니폼을 받고 환하게 웃는 사진이다. 그리고 훗날 이 고졸 출신 소년은 한 번의 쓰리핏과 한 번의 리핏 우승으로 레이커스를 다시 NBA 최고 명문팀으로 부활시킨다.[7] 이것을 두고 한 기사에서는 '24번이 23번을 눌렀다.'고 표현하기도 했다.[8] 사실 코비의 기록이 별 의미없다고 하면 평가절하겠지만, 조던이 1072경기만에 달성하는 것이 코비가 1240여경기 (기록 깰 당시)만 에 달성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건 사실이다. 평균으로 보면 30점과 25점의 차이이다. 물론 이와 별개로 위대한 기록인 것은 확실하다.[9] 이후 르브론 제임스도 추가[10] 18세에 데뷔한 코비와 달리 22세였던 피셔는 대학을 졸업하고 왔고 당연히 훨씬 더 완성된 기량과 신체를 갖고 있었다. 2000년대 들어서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나 르브론 제임스같이 고등학교부터 이미 근육질 몸을 만들어오는 선수들이 많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코비나 케빈 가넷,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같은 고졸들은 운동능력은 대단해도 근육이 부족한, NBA급은 아닌 몸이 대부분이었다.[11] 다만, 두번째 에어볼은 완벽한 오픈찬스에서 던진 것이었기 때문에 영웅놀이라 보긴 어렵다. 물론 완벽한 오픈에서 에어볼이라고 깐다면 그건 그대로 말이 된다.[12] 코비가 존스를 벤치로 밀어낸건 아니고 첫 20경기는 존스가 슈팅가드, 코비는 스몰포워드로 나란히 주전 출장했으나 원래 포지션이 가드인데다 호리호리한 체격을 지닌 둘을 동시에 기용하니 매치업 문제가 있었고, 득점욕심이 큰 코비와 함께 기용하니 존스의 위력이 공격에서 크게 줄어드는 역효과까지 있었다. 그렇다고 둘 중 한명을 벤치에서 출장시키기도 재능낭비였기에 존스가 샬럿으로 트래이드된다. (상대는 당시 정상급 슈터이자 스코어러이던 글렌 라이스) 존스는 이후 샬럿에서 잔여경기를 모두 주전으로 출장한다. 존스는 99-00시즌 동부 올스타 주전으로 선발되어 올스타전에서 코비와 동서부 주전가드로 맞붙는다.[13] 최연소 수상[14] 판정 논란으로 말이 많은 시리즈이다.[15] 코비의 8번 저지를 입고 사진을 찍기도 했고, 태어날 아들 이름을 "ShaqKobe"로 하겠다는 립서비스도 하기도 했다(물론 실제로 그리하지는 않았다). 샼코비는 좀 오버긴 하지만 절친한 동료들끼리 상대의 이름을 따 자식의 이름을 짓는 경우도 가끔 있는데 레전드 빌 월튼은 친한 동료 모리스 루카스의 이름을 따 아들 이름을 루크로 지었다. 이 아들이 코비의 동료로 상당 기간 뛰었던 루크 월튼이자 현 킹스 감독[16] Showboat는 과시하다라는 뜻도 있는데 이는 부정적인 의미. 초창기 화려하지만 조금은 무리한 플레이를 간혹 보여준 코비를 비꼬는 별명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 누구를 showboat라고 하거나 showboating이라고 하면 "잘난척"이란 의미로 통용된다[17] 자세한 것은 코비 브라이언트/논란 및 사건 사고 참고.[18] 심지어 코비는 유부남이었다.[19] 샤크는 코비의 이 발언으로 인해 이혼당했다고 한다.[20] 1위는 윌트 체임벌린의 한 경기 100득점.[21] 커리어 하이[22] # 당시 경기를 중계했던 캐스터 마이크 브린이 "Bryant for the win! Bang!!!!" 이라는 명대사를 날리며 이 버저비터를 더욱 빛냈다. 참고로 여전히 현역 캐스터로 활동 중인 위대한 캐스터 마이크 브린은 코비와 함께 2020년도 기수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또한 이 경기 직후, 코비의 둘째 딸 지아나 브라이언트가 태어났다.[23] 다만 이 MVP 수상은 지금까지도 정당한 투표가 아니었다고 말이 많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크리스 폴의 07-08시즌 항목 또한 같이 참조하면 좋다. 이때문에 많은 NBA 팬들은 2005년 MVP에 내쉬가, 2006년 MVP에 코비가, 2008년 MVP에 크리스 폴이 오르는 것이 옳았다는 말을 하곤 한다. 사실 NBA에서 MVP는 가장 뛰어난 선수가 아닌, 그 시즌에 가장 뛰어난 성과를 보낸 선수에게 수여되기 때문에 미묘하게 갈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06년 당시 코비는 대다수가 인정하는 리그 최고의 선수였지만 팀성적이 서부 7위에 그쳤기 때문에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를 잃고도 팀을 서부 2위로 이끈 선즈의 내쉬보다 성과는 떨어진다. 개인성적은 코비가 압도적이지만 농구는 팀스포츠이기 때문. 반면 08년의 코비는 개인기량과 기록은 06년만 못해도, 뛰어난 개인성적과 서부 1위란 팀성적을 거뒀기에 가장 뛰어난 성과를 거둔 것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팬들의 체감은 좀 달라도 NBA 투표단의 투표 성향으로 보면 크게 이상한 결과는 아니다. 어쨌거나 코비는 대다수가 인정하는 MVP급 선수였기 때문. 다만 마찬가지로 MVP급이었지만 타이밍이 안 좋아 결국 수상을 못하고 커리어를 마무리하게 생긴 폴과 팬들 입장에선 좀 아쉬울 수 있을듯.[24] 심지어 이때 코비는 손가락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25] 이 당시의 에이스였던 디르크 노비츠키는 말 그대로 제대로 각성 모드로 날뛰던 폭주츠키 혹은 사기츠키였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덕분에 댈러스는 사상 첫 NBA 우승을 차지했다.[26] 한 명이 어려운 슛을 하면 상대방이 같은 슛을 성공시켜야 한다. 실패하면 H부터 한 철자씩 쌓이며 HORSE가 완성되면 패배.[27] 파열 직후 얻어낸 자유투 2개를 모두 성공시킨 뒤 벤치로 향했는데 코비는 이 경기 이후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훗날 이 게임은 아킬레스 게임으로 회자된다.[28] 하지만 이 부상 이후 예전의 폭발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29] 참고로 위저즈 시절 마이클 조던의 경우, 팀 동료들이 코비 못지 않게 부실했지만 03 시즌 초반 후보 역할을 자처한 적도 있다. 결국 상상 이상으로 팀이 답이 없어서 주전으로 복귀하긴 했지만.[30] 참고로 슛도사 래리 버드도 이런 식의 슛을 던져 성공시킨 적이 있는데 이때는 주변에 동료도 없는데다 이미 승부가 난 경기 막판이라 장난으로 던진거고 코비의 경우 지고 있는 상황에서 던진 것.[31] 마이클 조던의 경우, 커리어하이가 21.2이며, 20을 넘긴 시즌이 세번, 15을 넘긴 시즌이 10번에 달한다. 윈셰어로 리그 1위를 차지한 적은 9번.[32] 일반적인 팀 스포츠와는 다르게, 농구는 팀을 한 선수를 중심으로 전략을 짜고 그와 맞는 선수들을 영입한다.대표적으로 위에 언급된 아이버슨이 00-01시즌 철저하게 자신에 맞춰진 맞춤형 동료들을 데리고 팀을 파이널에 진출시켰다.[33] 조던과 피펜 그리고 코비의 팬으로 유명한 월간농구잡지 점프볼의 손대범편집장마저도 도대체 무엇을 더 증명하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쉴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다.[34] 3쿼터 8분 35초를 남기고 45도 지점에서 뱅크샷을 시도했으나 공이 그대로 림과 백보드 사이에 끼는 장면도 나왔다.[35] 이 당시 레이커스는 2승 12패 중이었다.[36] 플레이어 트리뷴은 MLB의 전설 데릭 지터가 주도하여 만든 사이트로 NBA 뿐 아니라 모든 미국 프로스포츠 리그 선수들의 글이 올라온다.[37] 야투율이 2/15였다.[38] 참고로 에어볼이 나온 이후 폴 조지가 자유투를 던지게 되었는데 사실상 그 역전의 찬스 이후 레이커스가 할수있는건 자유투작전 외엔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폴 조지가 자유투를 실패했을땐 이미 인디애나가 승기를 잡은 상황이었고 경기는 레이커스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39] 여담으로 워싱턴 홈관중들은 마지막 원정을 온 코비가 클러치 슛을 연거푸 집어넣자 기립하는 등 좋아하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40] 이로써 코난사라는 그의 별명답게 '83년 이후 한경기 야투시도' 단독 1위에 올랐다.[41] 한국나이 39살 노장의 은퇴경기 기록이었다. 그것도 15-16 시즌 단일경기 최다득점 기록.[42] 이날 중계를 하고 있던 해설 박세운 기자는 그 패스가 마치 후배들에게 미래를 맡긴다는 의미 같이 느껴졌단 말을 남겼다. 여담으로 박세운 기자는 손대범과 마찬가지로 LA 레이커스와 코비의 오래된 골수팬이다.[43] 이 날은 샤킬 오닐을 비롯한 NBA 과거 레전드들과 함께 LA 레이커스의 열혈팬 잭 니콜슨과 JAY-Z, 데이비드 베컴, 스눕 독을 비롯한 많은 스타들도 자리를 함께했다.[44] 다만 유타 언론들은 이날 코비의 은퇴를 축하하긴 했지만 대놓고 하는 접대 농구 + 접대 농구를 하는 유타 재즈 선수들을 꽤나 고까운 기사로 디스했다. 심지어 NBA는 억지드라마를 너무 좋아한다고 비판한 패널도 있을 정도. 이전 글에는 의혹이라 했지만 워낙 빅네임의 은퇴라 묻혔을 뿐, 억지감동 만들기와 그 해의 철벽 유타 수비가 코비를 아예 슛 쏘게 놔뒀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논란이 되는 경기였다.[45] 반면 그와 한평생 선수생활을 라이벌로 한 팀 던컨은 그답게 시즌이 끝나자 조용히 은퇴했다. 코비는 코비답게, 던컨은 던컨답게 은퇴했다는게 흥미로운 점.[46] VORP가 마이너스란 건 replacement player(대체선수)가 더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 즉,[47] 이 해에 LA 레이커스가 영입한 선수는 트레이드로 호세 칼데론, 코리 브루어, 타일러 에니스, 드래프트로 브랜든 잉그램, 이비카 주바치가 있는데, 이 중 풀타임 주전은 없으며 그나마 잉그램이 79경기에서 40경기 주전으로 뛰며 9.4점 4리바운드 기록한게 가장 좋은 활약이었다. 나머지 선수들의 출장시간은 전부 10분대였다.[48] 일리노이 주정부가 비용절감하려 2015년 매각한 헬기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 참조[49] 중간의 굵은 점은 안개를 접하고 그 자리에서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렸던 흔적이다.[50] 링크된 기사 제목에선 LASD의 짧은 기자 회견 후에.[51] 영문명은 Orange Coast College로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내의 Costa Mesa시에 위치한 2년제 대학이다.[52] 2012~2014년 대학 야구 하계 리그인 케이프코드리그의 브루스터 화이트캡스의 감독도 역임했다. 당시 소속 선수 중에 애런 저지가 있었다. OCC에서 27년간 일했다고 한다.#[53] 아메리칸 갓 탤런트에 나온 맷 마우저의 아내이며, 전직은 교사였다.[54] 자녀 4명 중 가장 농구를 좋아했으며 아버지를 따라 WNBA 선수를 꿈꾸고 있었다고 한다.[55] 알토벨리의 딸 알리사가 지아나와 팀 메이트였다고 한다.[56] 위치: Thousand Oaks, California[57] 출발지와 목적지는 85~6 miles(137~8 km)의 거리로, 교통 체증이 없다면 차로 1시간 반 정도의 거리이다.[58] 그리고 코비의 고향은 필라델피아이다[59] 샤킬 오닐은 코비의 딸인 지아나를 지지(Gigi)란 애칭으로 불렀다.[60] 장례식 당시 조던은 추도사를 할 때 거의 첫 마디를 뗀 이후부터 목이 잠기며 울먹거렸는데, 조던의 감정표현이 풍부한 편이긴 했지만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만큼 슬퍼하는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다. 그 와중에 "또 crying Jordan 밈이 생기겠네요"라고 조크를 던지긴 했지만 연설 장면을 보면 얘기를 이어가다가 목이 메이고,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이다. 조던은 2020년 시카고에서 열린 올스타 주간에도 아예 불참했는데, 평상시에 조던이 종종 올스타 주간에 참석하곤 했다는 점과 딴 곳도 아닌 시카고에서 열렸다는 점, 시카고 팀과 별다른 갈등도 없다는 점에서 이번 불참이 자신의 참석으로 코비 추모 분위기가 묻히지 않게 하려던 의도가 아니었냐는 추측이 많다. 실제로 올스타 주간 직전 열린 그의 생일 파티에서 코비를 추모하는 화환을 놓아두었으며, 이를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기도 했다.[61] 은퇴 이후의 두 선수가 함께하였던 참가하였던 인터뷰 이전까지는 생각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NBA 데뷔 이전부터 코비와 맥그레이디는 서로 알고 지냈던 절친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선수 시절에는 동티맥/서코비로 라이벌리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경쟁심으로 인해 잠시 관계가 멀어지기도 했지만 은퇴 이후에는 다시 회복되면서 예전처럼 가까워졌었다고 한다.[62] 2:13초 부분을 잘 들어보면 그를 인터뷰하던 리포터마저 울먹이는걸 확인할 수 있다.[63] 어빙에게 코비는 멘토 이상의 존재였고 2016 NBA 파이널 우승 이후 가장 먼저 연락하였던 사람도 코비였다고. 코비도 현역선수 중 가장 가까운 선수로 어빙을 언급하였었다.[64] 트레이 영의 등번호는 11번이지만 영은 이날 경기에서 코비를 추모하는 의미로 단 하루만 8번 셔츠를 입기도 하였다.[65] 브루클린 네츠의 스펜서 딘위디는 코비와 딸의 등번호의 합인 24+2라는 뜻에서 26번으로, 올랜도 매직의 테렌스 로스는 31번으로,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의 모 하클리스는 11번으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마키프 모리스는 88번으로, 뉴올리언스 펠리컨스의 자릴 오카포는 9번으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알렉 벅스는 20번으로 변경한 모습을 보였다.[66] 덴버 너기츠의 메이슨 플럼리는 7번으로 변경했다. 거기에 선수는 아니지만 댈러스 매버릭스의 마크 큐반 구단주는 코비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즉각 영구결번 처리했다.[67] 심지어 퀸 쿡이 착용한 2번은 딸 지아나와 신인 때부터 2006년까지 코비가 착용했던 번호를 추모한다는 뜻에서 28번으로 변경했다. #[68] 당시 위긴스는 데뷔 1년차 신인이었고, 코비 브라이언트는 만 36세의 노장이었다. 평생의 롤모델이었던 조던의 통산 기록을 넘어서는 순간 팀버울브스 홈팬들마저 코비에게 기립박수를 보냈었다.[69] # 톰 트윗[70] # 드류 트윗[71] # 롭 트윗[72] # 호날두 트윗, # 호날두 인스타그램 포스팅[73] 메시 인스타그램 포스팅[74] 메시는 코비와 함께 항공사 CF를 같이 촬영하기도 했으며 후술하겠지만 코비가 호나우지뉴와 친했기 때문에 메시와도 연을 틀 수 있었다.[75] 토니 인스타그램 포스팅[76] 이 경기는 우리나라에서도 중계됐는데, 정작 캐스터와 해설은 이 세레머니를 이해하지 못해 그냥 넘어갔다. 같은 종목이 아니라서 못 알아챘을 수도 NBA의 인기가 그리 높지 않은 한국에서는, 더욱이 타 종목의 종사자라면 관련 소식에 둔할 수도 있다. 다만 타 종목이라곤 해도 월드스타의 사망 소식에 종목을 불문하고 전 세계가 추모 분위기인 와중에, 전문인로서 스포츠계 전반에 대해 이런 굵직한 소식 정도는 소양으로 꿰고 있을 필요는 있다.[77] #[78] #[79] # 바르셀로나의 추모 트윗, # 파울 가솔을 위로하는 트윗[80] # 레알마드리드 트윗[81] 또한 레알 마드리드는 비야돌리드 전이 끝나고 나서 훈련하기 직전에 1분 동안 코비를 위해서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주장인 세르히오 라모스는 코비 브라이언트의 유니폼을 입었다.[82] # 토트넘 트윗[83] # 리버풀 트윗[84] # 맨유 트윗[85] # 나달 트윗, # 나달 인터뷰[86] 평소 나달은 승리 후 인터뷰에서 자기 자신의 라파불 모자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87] # 키리오스 입장 장면[88] # 조코비치 트윗[89] # 치치파스 트윗[90] # 바브린카 트윗[91] # LA Dodgers 트윗[92] 특히 다저스와 코비는 유독 친분이 깊은데 선수 시절 다저스타디움을 자주 방문했고 사망 전날 2019 NL MVP를 수상한 코디 벨린저에게 축전 영상을 보내기도 했다.[93] 쿨레인은 자서전에서 코비와의 만남이 인생에서 가장 두근거리는 경험 중 하나였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코비의 열광적인 팬이다.[A] 아카이브[A] [A] [97] 항공 사고는 시신이 신원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훼손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신원 확인절차부터 애로 사항이 많다고한다.[98] Pacific View Memorial Park. 코비가 다녔던 교회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다.[99] 기상상황이 나쁜상황에서 조종사가 모든 책임을 감수하고 시계비행을 하는 것이다. 사고기 조종사는 고속도로를 VFR로 따라가다가 안개속에 헬기가 갇히며 공간정위상실을 일으켰다. 7년전 발생한 서울 삼성동 헬기 추락사고와 비슷한 양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