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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30><colcolor=#fff> 토니 아이오미 Tony Iommi | |
본명 | 앤서니 프랭크 아이오미 Anthony Frank Iommi |
출생 | 1948년 2월 19일 ([age(1948-02-19)]세) |
영국 웨스트 미들랜즈 버밍엄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기타리스트 |
신체 | 183cm |
배우자 | 수잔 스노우돈 (1973년 결혼 - 1976년 이혼) 멜린다 디아즈 (1980년 결혼 - 1985년 이혼) 발레리 아이오미 (1987년 결혼 - 1993년 이혼) 마리아 소홀름 (2005년 결혼) |
자녀 | 토니 마리 아이오미 (1983년생) |
종교 | 가톨릭 |
소속 | 블랙 사바스 (1969년 - 2017년)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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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영국의 기타리스트.블랙 사바스의 기타리스트, 메인 작곡가, 리더이며, 딥퍼플의 리치 블랙모어와 함께 현대 헤비메탈 리프의 모범을 보여준, 즉 '헤비메탈 연주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1]
2. 생애
이탈리아계 영국인으로 1948년 2월 19일 영국 버밍엄에서 태어났다. 노동자 집안이었기에 토니는 어려서부터 공장 등에서 막노동을 해야 했는데, 목재 공장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오른손 중지와 약지 반 마디를 절단당했다.[2][3] 하지만 토니는 절단된 부위에 플라스틱 골무를 끼고 기타를 연주하는 식으로 장애를 극복하였다.[4][5] 다만 2023년 Sky TV의 Riff Master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밝힌 바에 따르면, 처음에 플라스틱 재질의 골무를 쓰긴 했으나 재질 특성상 지판 위에서 자꾸 미끄러져 이후부터는 가죽 재질의 골무를 만들어서 쓴다고 한다. 후술하겠지만 이는 블랙 사바스의 사운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이후 토니는 오지 오스본, 기저 버틀러, 빌 워드 등과 함께 어스라는 그룹을 조직한다. 이때 잠깐이지만 토니는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제쓰로 툴에 가입해 있었다. 즉 투잡을 뛴 것. 토니같은 경우 제쓰로 툴의 가입 기간이 한달도 채 못 되었기에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밴드를 두 개 하는 사람은 제법 많다. 메인으로 하는 밴드와는 다른 성향의 음악을 하기 위해 투잡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취미든 프로든 대다수는 음악 성향이 결국 한 쪽으로 치우쳐 기존 팀으로 돌아가거나 탈퇴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곧이어 어스는 팀명을 블랙 사바스로 바꾸고, 1970년 2월 13일의 금요일에 셀프타이틀 앨범을 발매한다. 곧이어 발매된 2집 Paranoid는 헤비메탈의 교과서라고 불리게 되며 큰 명성을 얻게 된다. 1980년, 오지 오스본을 축출하고, 보컬을 로니 제임스 디오로 바꾸고 발매된 Heaven and Hell은 이후 80년대 헤비 메탈의 기본을 다지게 된다. 하지만 한 장의 앨범을 더 발표한 뒤 디오는 솔로 활동을 위해 팀을 나간다. 디오가 나간 후에는 딥 퍼플의 보컬로 유명한 이안 길런을 영입하여 Born Again이라는 앨범을 내지만 전과 같은 주목은 받지 못했다. 이후 이안은 딥 퍼플 재결성에 참여하기 위해 탈퇴했고, 원년 멤버 기저 버틀러 또한 밴드에서 탈퇴했다.
이제 남은 원년 멤버는 토니 본인뿐이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팀을 해체하고 솔로로 나서는 게 더 이득이었지만 토니는 묵묵하게 혼자서 블랙 사바스를 계속 이끌어 나간다. 그렇게 90년대 중반까지 시대의 변화를 겪으며 다양한 메탈 사운드에 대한 시도를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퇴물이란 소리 뿐이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이후 오지 등 원년 멤버들을 다시 모아 팀을 재결성하고 투어를 돌기 시작했다. 2013년에 13이라는 신보를 냈다. 70년대의 사운드가 플렉시 앰프 기반의 퍼지한 사운드라 현재에서 보기엔 메탈의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면, 이 앨범에서야 블랙 사바스가 구현하고자 했던 헤비 블루스 기반의 하이게인 메탈 사운드를 완벽히 재현해냈다는 평.[6]
현재 림프암(lymphoma) 투병 중이다. 2017년 3월 블랙 사바스는 공식적으로 해체를 선언했다.
3. 사운드적 특징
상기했듯이 그의 장애 때문에 타 기타리스트들보다는 상대적으로 기교적인 면에서 핸디캡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7] 이에 토니는 파워코드와 함께 블루스, 펜타토닉 기반의 쉬우면서도 귀에 착 달라붙는 리프를 사용했으며 이는 헤비메탈의 직진적인 사운드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그를 논할 때 깁슨 SG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Laney 앰프[8]의 강한 게인을 기반으로 한 SG 특유의 카랑카랑한 사운드는 블랙 사바스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다.[9] 깁슨에서도 특유의 십자가 인레이가 그려진 시그네쳐 기타와 시그네쳐 픽업이 있지만, 현재는 패트릭 이글 등의 커스텀 기타도 사용 중이다.기타의 톤에 대해서도 꽤나 할말이 있는 분이다. 깁슨 SG의 사운드는 꽤나 어둡고 헤비한 편인데, 이 어두운 사운드에 토니 아이오미의 운지하는 손가락의 장애 때문에 약간 기타 사운드가 저는 느낌이 생겼는데,[10] 이 사운드가 굉장히 매력적이다.[11] 이 기타 톤은 블랙 사바스 특유의 어둡고 건조한 사운드를 연출해 내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이는 결과적으로 헤비메탈의 직선적인 하이 게인 사운드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여담
- 기타 뿐만 아니라 신디사이저는 물론 플룻, 피아노 등 여러 악기를 연주하며, 70년대 블랙 사바스의 음반에는 그의 플룻이나 피아노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곡들이 많다.[12] 하지만 헤비 메탈 밴드의 강한 이미지 때문에 토니의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인 면모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 손가락을 제대로 못 쓰기 때문에 당시 기타리스트들이 사용한 사이즈보다 얇은 게이지의 스트링을 사용했으며 현재 토니가 사용한 굵기의 스트링은 대중화되어 일렉기타의 스트링 사이즈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활동 초기 당시에는 얇은 게이지의 스트링이 딱히 상품으로 구상되는 경우도 없어서 밴조에 쓰이는 줄을 끼워서 쓰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기타 줄을 생산하는 회사를 찾아다니면서 보다 더 얇은 게이지의 줄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으나 전부 거절하던 차에, Picato사가 토니에게 얇은 줄 세트를 만들어주어 그걸 썼다고 한다. 그렇게 얇은 게이지의 줄도 충분히 경쟁 상대가 된다는 것이 증명되자 비로소 다른 회사들도 라이트 게이지 스트링 생산을 시작했다고 아이오미는 회상했다.#
- 토니 아이오미하면 깁슨 SG를 떠오를 정도로 SG 기타가 트레이드 마크로 유명하지만, 본래 그가 메인으로 사용한 기타는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였다. 1집 녹음 직전에 기타를 도둑맞아서 어쩔 수 없이 SG를 사용하여 1집 녹음을 진행했다고.(1집은 하루만에 녹음과정을 끝마쳤다.)[13][14] 이후 상기하였듯이 SG 기타는 그의 상징이 되어 훗날 깁슨 커스텀 샵과 에피폰에서 검정 도장에 십자가 인레이가 새겨지고, 깁슨에서 만든 시그니처 픽업이 장착된 시그니처 기타가 발매되었다. 이후 2020년 깁슨 커스텀 샵에서 그가 사용하던 64년제 SG를 바탕으로 한 'Monkey' SG가 발매되었다.[15] 특이점이라면 상기한 그의 시그니춰 픽업이나 일반 험버커가 아닌, 실제 기타에 장착되어있던 John Birch[16] 커스텀 P-90 타입 픽업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된 John Birch를 대신해 그의 제자가 작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 "Iron Man : My Journey Through HEAVEN&HELL with BLACK SABBATH"라는 자서전을 냈다. 400쪽으로 두껍지만 그렇게 어렵게 써있지는 않다. 과거 블랙 사바스 멤버들과의 재밌는 이야기와 토니 아이오미의 진솔한 이야기가 적혀있다. 그리고 중간에 사진들이 있다. 이 책은 뉴욕타임즈 베스트 셀러에 올랐다.
- 오지 오스본과 초등학교 동창이다. 당시 오지는 동창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는데, 오지를 제일 많이 폭행한 사람이 토니 아이오미였다고 한다. 이후 같이 블랙 사바스로 활동하다가 마약 중독이 심해진 오지를 밴드에서 쫓아내면서 사이가 틀어졌지만[17], 오지 오스본이 주최하는 오즈페스트에 참여하는 등 관계를 다시 회복했고 블랙 사바스도 원년 멤버로 재결합했다. 오지도 인터뷰에서 토니를 최고의 기타리스트라고 평가했다.[18]
- 영국과 이탈리아의 국적을 가진 복수국적 소유자이다. 아버지는 영국인, 어머니가 이탈리아인이라고 한다. 토니 아이오미의 외가는 집안은 이탈리아에 와인 농장을 운영하는 집안이었다. 여느 이탈리아계 가정처럼 집안 모두가 가톨릭 신자였다고. 토니 아이오미 역시 어린시절 성당에 열심히 출석했다고 한다. 스스로를 타락한 천주교 신자라고 말하지만, 고향의 성당을 위해 미사용 성가를 작곡하여 봉헌하기도 했다. 제목은 How Good It Is이며, 시편 133편에 실린 말씀을 바탕으로 한 가사가 있다.
- 아스톤 빌라 서포터다.
- 퀸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와 잘 알려진 절친이다. SNS등을 보면 가장 친한 친구 사이로 보인다. 한 인터뷰에서 브라이언 메이는 토니 아이오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사업에서 정말로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이고 수년간 그래왔습니다. 알다시피, 그는 빛을 내는 사람입니다. 토니는 멋지고, 친절한 본성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당황스러운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블랙 사바스 공연에 브라이언이 게스트 기타리스트로 참여한 적도 있고,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에서는 토니가 게스트 기타리스트로 참여했다.
- 잠깐 블랙 사바스에 재직했던 딥 퍼플의 보컬 이안 길런과도 친분이 있다. 물론 이안 길런이 블랙 사바스 재직 당시에 여러 실수를 저질렀던 건 맞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사적인 친분은 꽤나 두터운 듯. 위의 브라이언 메이와 더불어 토니 아이오미가 인스타그램 계정에 생일을 축하하는 게시물을 올리는 인물이기도 하고 함께 Whocares라는 프로젝트 밴드도 했던 적 있다.
[1] 특히 특유의 음침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내뿜는 리프들 덕에 둠 메탈, 스토너 메탈에 특히 큰 영향을 미쳤다.[2] 토니는 지미 헨드릭스, 커트 코베인처럼 왼손잡이여서 기타도 왼손으로 치기에 프렛을 운지하는 손가락이 절단당했다는 것은 기타리스트로선 사망선고나 다름없었다.[3] 원래는 음악에 전념하기 위해 공장 일을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었고, 마지막 날 오전 업무가 끝난 후 점심을 먹으러 집에 갔을 때 어머니께 오후에는 일하러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허나 어머니는 "하기로 한 일을 끝마치고는 와야지!"라는 말씀과 함께 토니에게 공장에 가라고 말씀하셨다고. 이후 오후 업무시간에 절단 장치를 다루다가 사고를 당하고 만다.[4] 손을 다친 후 정신없이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던 동안, 본인이 사고를 당한 공장의 관리인이 찾아와 위로의 말과 함께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의 이야기를 해준다. 토니는 이 말에 크게 위안을 얻고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다고 한다.[5] 참고로 메가데스의 멤버였던 크리스 폴란드도 비슷한 케이스로 이전에 사고로 운지하는 왼손의 검지 마디가 구부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메가데스에서 화려한 솔로와 연주를 보여주었다.[6] 아무래도 장비의 덕을 가장 크게 본 듯. 어찌 보면 흥미로운 점인데, 그가 현대에 쓰는 메탈 게인 장비들은 그가 오래전 1960년대 후반에 선보였던 하이게인 사운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7] 다만 기타 솔로를 아예 못해온 것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8] Laney에서도 그의 상징인 십자가 문양으로 된 그릴을 적용한 시그니쳐 모델이 있다[9] 초창기에는 오렌지사의 앰프를 주로 사용했다[10] 당장 같은 깁슨 SG를 사용하는 앵거스 영의 사운드는 약간 어둡기만 하지 저는 느낌보다는 직선적인 느낌이 강하다.[11] 리치 블랙모어가 토니 아이오미의 기타 톤을 매우 부러워하고 시기했음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12] Gibson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가족과 친척들이 원래부터 피아노나 아코디언 등의 악기를 잘 다루는 분들이었다고 한다.[13] SG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레스폴 모델은 생산 중단 상태였고, 스트라토캐스터급으로 많이 찍어냈던 기타가 SG였다. 어찌보면 가성비 따지다가 그나마 기타장인 회사것인 깁슨사를 선택한 듯[14] 토니 아이오미는 왼손잡이이나, 급하게 구한 오른손잡이용 SG를 거꾸로 들고 1집을 녹음했다. 녹음 직후, 왼손잡이용 SG를 사용하는 오른손잡이 기타리스트를 만나게 되어 서로 기타를 바꿨다고 한다.[15] Monkey라는 별칭은 기타에 붙어 있던 원숭이 캐릭터 스티커로 인해 생긴 것으로 보인다.[16] 영국의 유명 기타 기술자. 토니 아이오미 외에도 브라이언 메이의 기타 레드 스페셜의 복제품을 만들어주기도 했다.[17] 사실 오지 오스본과 사이가 제일 안 좋았던 멤버는 기저 버틀러(오지 오스본은 밴드에 복귀하면서 자신이 보컬 멜로디를 만든 곡만 녹움할거라며 똥고집을 부렸고 작사를 맡은 기저 버틀러는 오지가 흥얼거리는 보컬 맬로디를 들으먄서 가사를 재작업해야 했기 때문이다.)였다고 한다. 그러나 밴드에서 사실상 리더 역할을 맡고 있는 자신도 별로 오지에 대한 감정이 좋지는 않아서 오지를 밴드에서 해고시키자는 결정을 내렸고 밴드의 매니저 역할을 맡았던 빌 워드가 직접 오지 오스본에게 밴드에서 나가라는 통보를 했다고 한다.[18] GQ 2021년 3월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