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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로 말디니/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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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경력2. 국가대표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말디니가 만나본 선수들과 감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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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경력

1985년 1월 20일, AC 밀란 vs 우디네세. 세르지오 바티스티니의 부상으로 교체된 말디니, 이 때 나이 고작 16세. 더 놀라운 건 17세의 나이일 때 AC 밀란의 주전이 되었고, 마우로 타소티-프랑코 바레시-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와 수비 라인을 결성한데 이어 1986-87 시즌에는 오렌지 삼총사가 결성되었고 카를로 안첼로티, 로베르토 도나도니,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등 중원과 공격라인도 막강했다. 이들은 밀란 제너레이션이라 불리며 아리고 사키가 지휘하는 압박 축구는 잘 가동되었다. 그렇게 그 시즌에 14골밖에 허용하지 않았고 첫 스쿠데토를 들어올린다. 다음 시즌에는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를 잡고 20년만에 유러피언컵에서 우승한데 이어, 그 다음 시즌에도 SL 벤피카를 상대로 유러피언컵 2연패를 성공하며 승승장구한다. 사키가 떠나고 카펠로가 온 밀란은 계속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1991-92 시즌에는 아예 무패 우승을 달성했다.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명장 요한 크루이프가 이끌던 '드림팀' 1기 FC 바르셀로나를 4:0으로 학살하고 빅 이어을 들어올렸다. 거기에 같은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하면서 더블을 기록한다. 그리고 같은 해 1994 미국 월드컵에서의 준우승과 겹쳐 말디니 본인도 1994년 발롱도르 3위,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1위를 차지한다. 1994-95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 2연속으로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AFC 아약스에서 0:1으로 패하여 준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말디니 본인도 1995년 FIFA 올해의 선수 2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카펠로가 떠난 후 사키가 다시 부임했지만, 리그 11위를 하는등 부진했고 카펠로가 또 다시 오지만 그래도 팀은 점점 기량이 하락하고 있었다.

밀란 제너레이션 1기 세대가 끝나며 2000년대 초반까지는 그렇다한 성적 하나 내지 못했다. 굳이 뽑자면 알베르토 자케로니올리버 비어호프를 활용한 뚝배기사커 하나로 뜬금없이 이뤄낸 스쿠데토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2000-01 시즌에 카를로 안첼로티가 감독으로 부임한다. 이때 말디니는 저주가 걸렸던(…) 산 시로 구장에서 그만 부상을 당해 15경기를 뛰는 데 그쳤고,[1] 무관에 그치지만 다음 시즌에 후이 코스타, 알레산드로 네스타, 카푸 등의 영입이 이어지며 2002-03시즌에는 주장 완장을 찬 말디니의 밀란이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말디니는 발롱도르 3위에 등극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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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 시즌부터는 안드레아 피를로, 안드리 셰브첸코, 카카, 젠나로 가투소 등이 제대로 활약하며 밀란에도 점점 따듯한 바람이 부는듯 했다. 또 야프 스탐이 오면서 말네스카 라인을 형성하지만 사실 이 수비라인이 제대로 가동된 시간은 한 시즌 정도도 밖에 없었다. 말디니와 카푸는 이미 30줄을 타고 있었고 네스타는 부상으로 제대로 나오지도 못했다. 리그 최저 실점도 리그 우승과 함께 유벤투스 FC에게 내줬다. 때문에 2004-05 시즌에 남은건 챔피언스 리그뿐이었고 결국에는 결승까지 진출한다. 결승전은 리버풀 FC와의 경기였는데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말디니의 챔스 최단 시간골, 이 후 쐐기를 박는 2골로 전반전이 끝나며 빅 이어를 드는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후반전 스티븐 제라드의 헤더 골과 함께 3골을 내리 먹히며 승부차기로 갔고 결국 패배하고만다. 이것이 바로 이스탄불의 악몽. 이후 풀백으로서는 예전같은 모습이 안나오자 말디니는 이 때부터 아예 센터백으로 주 포지션을 변경했다.

파일:2006-07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빅 이어를 들어올리는 말디니.png

2006-07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설욕에 성공해, 빅 이어를 들어올렸다.

이후 2006-07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할 예정이었고, 재계약을 시도하던 밀란과의 협상도 연봉 문제로 진전이 안 되었지만, 5위로 그치면서 체면을 제대로 구긴 밀란이 안타까웠는지 2008년까지 더 뛰겠다고 발표를 했다.

2007-08 시즌에는 웬만한 젊은 수비수보다도 뛰어난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특히 아스날전에선 평점이 제일 높았다. 사실 그 경기를 보면서 가장 혀를 찼던 것은, 상대 팀 아스날의 주장이라는 세스크 파브레가스는 말디니가 프로 데뷔했을 때 태어나지도 않은 새파란 것이었으니[3] 그리고 또 한 시즌 더 뛰겠다고 했다.

은퇴 시즌인 2008-09 시즌 말기에는 유벤투스와의 경기에서 키엘리니한테 빡쳐서 키엘리니의 멱살잡는 평소 말디니답지 않은 거친 행동을 보이면서[4][5] 경고를 받았다, 그의 마지막 홈 경기에서는 밀란 팬들에게 야유를 받기도 했다. 밀란 팬들은 말디니를 존중하지만, 우리의 캡틴은 영원히 바레시라고 했는데, 이는 예전 2004-05 시즌에 이스탄불에서 벌어졌던 챔스 결승전에서 밀란 팬들이 밀란의 드라마틱한 패배에 분노하여 비난하자 말디니가 역으로 팬들을 비난했던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는 것과 밀란 보드진의 막장 경영 때문에 애꿎은 말디니가 희생되었다는 것.

어쨌든 이 일은 유럽 축구계의 저명한 선수, 인사들 모두가 '희대의 병신짓'이라고 비난할 정도로 희대의 병크였다.[6]

이후 2009년에 40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여담으로 말디니는 밀란에서만 24년동안 902경기나 뛰며,[7] 7개의 스쿠데토와 5개의 빅 이어[8][9]를 들어올렸다.

디에고 마라도나부터 미셸 플라티니, 호마리우,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호나우두,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모두 상대해본 유일무이한 수비수.[10] 이것만으로도 말디니의 위엄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2. 국가대표 경력

국대에선 매우 뛰어난 활약을 했음에도 클럽과는 다르게 우승컵을 들지 못했다. 말디니는 4번의 월드컵[11]와 3번의 유로[12]에 출전했는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선 3위,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선 승부차기 끝에 준우승, 이어 UEFA 유로 2000 결승전에서도 다비드 트레제게에게 통한의 골든 골을 먹고 준우승에 그쳤다.[13] 따라서 국대에서는 무관의 제왕.

일단 국가대표 데뷔는 1988년 이었는데 확실히 엘리트 코스를 밟은 선수 답게, 1988년에 데뷔하자마자 그해 유로와 올림픽에 참가한다. 유로 4강, 올림픽 4위로 그 한해를 마무리 한다. 특히 이제 막 국가대표에 데뷔한 선수로서 UEFA 유로 1988 베스트 11에 선정되면서 이미 완성된 슈퍼 수비수임을 보여줬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하는데 당시 개최국 이탈리아는 말디니-바레시-페리-베르고미[14]로 이어지는 월드컵 단일 대회 역사상 최강의 수비 라인과 골키퍼 발테르 쳉가가 버티고 있었고, 살바토레 스킬라치의 뜬금포 활약으로 이탈리아는 강력한 모습을 보이며, 월드컵 단일 대회 최장 시간 무실점 기록을 이어갔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와의 4강전에서 클라우디오 카니자에게 동점골을 허용해, 무실점 기록은 517분으로 막을 내렸고, 승부차기 끝에 패해 결승 진출이 좌절된다. 이후 3·4위 전에서 잉글랜드를 이기고 대회 3위를 차지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조별예선으로 부상 아웃된 프랑코 바레시 대신, 4강전까지 임시 주장을 맡았는데, 말디니를 앞세운 강력한 수비진[15]로베르토 바조의 대활약으로 이탈리아는 결승전에 진출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결승전에서 브라질과의 혈전 끝에 바조의 실축으로 승부차기 패배로 준우승에 그쳤다... 그래도 말디니 본인은 대회내내 좋은 활약을 펼쳐 1994년 발롱도르 3위,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1위를 차지한다.

UEFA 유로 1996에서는 바레시의 은퇴, 그리고 바조아리고 사키와의 불화로 국대에서 탈락했으며 아주리 자체의 경기력이 내려온 상황이었고, 결과도 조별예선 탈락이었다. 그랬는데도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의 말디니는 여전히 훌륭했으나, 아쉽게 8강에서 개최국 프랑스와의 치열한 중원다툼, 수비싸움에서 아주리레블뢰는 승부의 결말을 짓지 못했고, 결국 승부차기로 프랑스가 4강을 올라간다. 이때를 기점으로 말디니의 후배 세대에서 리자라쥐, 카를로스같은 역사에 남을 왼쪽 수비수들이 등장했다.

UEFA 유로 2000에서 아주리의 스쿼드와 디노 조프 감독의 전술이 맞아 떨어지면서 아주리는 승승장구했다. 부폰과 비에리가 부상으로 아웃되긴 했지만, 델피에로인자기, 토티 등이 있었고, 알베르티니, 디 비아조, 피오레, 콘테 등등 미들진도 훌륭했다. 당시 디노 조프 감독은 율리아노-네스타-칸나바로로 3백을 형성한 후에 말디니와 잠브로타를 윙백, 나아가서 측면 미드필더로 썼는데, 베테랑과 중진 그리고 신예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강력한 모습으로 4강까지 진출했다. 4강전 개최국 네덜란드와의 경기는 그 재밌다는 유로 2000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명경기인데, 잠브로타가 경기 시작한지 극초반에 퇴장하면서 아주리의 수비라인은 즉각적으로 말디니-네스타-율리아노-칸나바로 포백으로 변환, 알베르티니와 디 비아조도 중원 싸움보다는 수비에 집중하게 된다.[16][17] 여기서 말디니는 네덜란드의 오베르마스, 또 젠덴과 공방을 저지했다. 당시 말그대로 절정의 스쿼드를 가지고 있었던 네덜란드였기 때문에 아주리는 말그대로 막는 것에 총력을 했는데, 여기서 말디니는 세도로프의 슈팅 타이밍을 잠시 놓치자 손을 내리고[18] 말그대로 몸을 던진다. 그야말로 말디니 수비의 처절한 명장면.[19] 경기는 대혈전 끝에 아주리의 극적인 승부차기 승리였다. 그리고 대망의 결승에서 왕조를 이루려하는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말디니는 앙리를 완전히 억제하면서 왼쪽을 장악했지만, 결국 통한의 역전패로 준우승의 분루를 다시 한 번 삼키게 된다. 물론 이 대회에서 말디니의 역량은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에 당연히 대회 베스트 11에 선정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그의 축구 경력 최초로 장기 부상을 끊으면서, 정말 아슬아슬하게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하지만 부상 후유증으로 평상시 보다 떨어진 경기력도 있었고, 지역예선에서 3백을 쓰면서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승승장구했던 조반니 트라파토니가 갑자기 본 대회에서에서는 4백으로 포메이션을 전환하면서 아주리의 플레이 자체가 불협화음이 심했다. 거기다 네스타의 부상 아웃, 칸나바로의 경고 누적 등 악재가 겹치면서 16강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울며 겨자 먹기로 말디니를 센터백으로 기용했는데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선제골로 앞서갔으나, 후반 종료 직전 설기현에게 동점골을 허용했고, 연장 후반 말디니는 안정환의 헤더를 제대로 커버 못하면서 부폰골든 골을 허용하여 결국 패하고 만다. 참고로 말디니가 국가 대항전이나 국제 메이저 대회에서 커맨더 센터백으로 선 경기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20]

파일:이천수 말디니 사커킥.jpg
전설의 사커킥
더군다나 이 경기에서 이천수의 오른발에 뒤통수를 까이기도 했다.[21] 그래서 그런지 2002년 월드컵은 안 좋은 기억 밖에 없는 생애 최악의 대회라고 한다. 말디니는 억울합니다...[22] 이 경기만 이겼으면 로타어 마테우스를 제치고 월드컵 최다 경기 출전[23]에 오를 수 있었으나 무산되었다.[24]

마르첼로 리피는 파올로 말디니에게 2006년 월드컵을 함께 하자는 제의를 했고, 그 전에는 트라파토니가 말디니에게 2004년 유로 대회를 같이 하자고 제의를 했지만, 말디니는 두 제의 모두 거절.

그러나, 이탈리아는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더군다나 이 때 말디니는 충분히 주전으로 뛸만한 기량이었다.

말디니가 은퇴한 직후 2010년 초에 마르첼로 리피이탈리아 축구 연맹 측에 요청하여 이탈리아 vs 북아일랜드 경기를 말디니의 국대 마지막 경기로 정하려고 했지만, 이 역시 거절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말디니는 오른발잡이였고, 그래서 유스 팀 때는 라이트백이었다. 하지만 밀란에는 이미 마우로 타소티라는 걸출한 라이트백이 있었기에 성인 무대에서는 레프트백으로 데뷔했다. 그 후로도 레프트백 포지션에 주로 기용될 것이 확실시되자, 웬만큼 다 큰 나이에 왼발을 오른발처럼 잘 쓰기 위해 죽도록 연습했다고 한다. 연습을 정말 많이 한 덕에 프리킥과 같은 데드볼 상황에서도 오른발 대신 왼발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공격 진영에 올라간 상태에서 어느 발로든 양질의 크로스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급의 양발잡이로 거듭났다. 유로 2000 4강 네덜란드전에서는 승부차기에서 왼발로 킥을 하기도 했다. 비록 결과는 실축이었지만.

말디니는 남들이 다 전성기를 지나 은퇴 수순을 밟는 시점인 30대 중반까지도 레프트백으로 뛰면서 기나긴 전성기를 누렸다. 일단 기본적으로 빠른 주력을 바탕으로 측면 뒷공간을 완벽 그 이상으로 커버해냈고, 특히나 상대 측면 공격수 즉, 윙어가 박스 근처에 접근 못하도록 측면 터치라인 부근까지 몰아내는데 있어서는 이견이 없는 역대 최고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는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2000년대 초반까지는 레프트백으로 경기를 소화했고, 이후 큰 부상을 끊으면서 주력이 느려지자 중앙 수비수로 포지션을 바꿨는데, 이 또한 큰 성공을 이뤄낸 바 있다.

말디니의 수비 능력은 정말 뛰어났다. 한국에서는 아예 수비의 교과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태클, 인터셉트, 몸싸움, 제공권, 주력, 지구력, 침착성, 리더십 등 수비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충만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야말로 약점이 없는 수비수였던 셈.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였던 능력은 상대 선수의 공격 방향을 예측하여 페널티 박스로 치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구석으로 몰아 가게 하는 능력이었다. 이러한 수비 능력으로 수없이 많은 공격수를 묶어냈고, 그 중에서도 말디니가 가장 돋보였던 경기는 유로 2000 4강 네덜란드전이다. 이 경기의 초반에서 잔루카 잠브로타가 퇴장당했고, 이탈리아는 수적 열세에 놓였다. 말디니는 이런 상황에서 당대 최고의 스피드 윙어인 오버르마르스를 완전히 꽁꽁 묶어버렸고 단 한 번의 돌파도 허용하지 않으며 이탈리아의 수비진을 지켜냈다.[25] 충격적인 것은, 저 당시 말디니의 나이가 32세였다는 것이다.[26] 저 나이에도 그런 미친 스피드를 탑재한 상태라는 것이다.

워낙 수비력이 훌륭해서 말디니의 플레이를 제대로 보지 못한 축구팬들은 말디니가 공격력까지 좋은 풀백이라는 점을 잘 모른다. 사실 말디니가 뛰던 시기에 공격력이 좋은 풀백하면 대부분은 호베르투 카를루스를 먼저 떠오르기 때문. 그러나 하단에 호나우지뉴, 안드리 셰브첸코, 루드 굴리트가 언급했듯이 말디니는 공격력도 훌륭한 수비수였다. 슈팅 테크닉이 아주 훌륭해서 균형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정확하게 슈팅 동작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으며, 중거리 슛도 잘 했다. 세트 피스 상황에서 보여주는 헤더 슈팅도 매우 위력적이었다.

개인 기술도 매우 훌륭한 수준으로 갖추고 있었다. 공격수의 압박이 들어오면 스텝 오버, 마르세유 룰렛 등의 다양한 개인기로 공격수를 농락하고 과감하게 드리블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흔히 말디니의 플레이를 '우아하다'고 표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런 개인 능력의 진수가 가장 잘 발휘된 장면은 이탈리아가 3백을 쓰고 윙백으로 말디니가 나선 유로 2000인데, 특히 프랑스와의 결승전에서 말디니가 측면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의 거친 플레이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20년이 넘는 커리어 중, 퇴장당한 건 단 두 번뿐이라는 것이다. 이 기록은 말디니가 파울을 얼마나 영악하게 했는지 잘 알려준다. 굉장히 적극적이면서 거친 태도로 공격수를 다루면서도 카드 받을 만한 반칙들은 하지 않으며 공격수를 끈질기게 괴롭혔다는 말이다. 이런 영악한 수비 능력 때문에 대부분의 선수들은 말디니와의 대결을 어려워했다. 호나우두디에고 마라도나를 비롯해 지네딘 지단,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호나우지뉴, 루이스 피구, 아드리아누 등 수많은 선수들은 자신의 선수 생활 동안 가장 상대하기 어려웠던 수비수로 말디니를 선정했다.

4. 말디니가 만나본 선수들과 감독들

말디니는 선수생활을 20년 넘게 지속하며 수많은 선수들과 감독과 뛰거나 상대해봤다. 말디니가 밀란 소속으로 뛰면서 같이 뛰거나 상대해봤던 선수들을 나열한 목록은 다음과 같다.
말디니가 만나온 선수들은 그 숫자와 이들의 클래스[28]를 고려하면 말디니의 선수 커리어가 정말 괴랄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했던 팀들이나 지도를 받았던 감독들도 명장들이 쏟아지는데 밀란에선 아리고 사키, 파비오 카펠로, 카를로 안첼로티[29],알베르토 자케로니, 파티흐 테림이 있으며, 세리에에선 즈데넥 제만, 디노 조프, 마르첼로 리피, 스벤예란 에릭손, 조반니 트라파토니,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카를로 마초네, 로베르토 만치니, 주제 무리뉴, 로이 호지슨, 네비오 스칼라, 알베르토 말레사니, 체사레 프란델리, 프란체스코 귀돌린, 마르코 타르델리, 엑토르 쿠페르, 다니엘 파사레야 가 있고, 국가대표 팀에선 아버지인 체사레 말디니의 지도도 받았었고, 국제적으로는 요한 크루이프, 루이 판할, 알렉스 퍼거슨, 조지 그레이엄, 잔루카 비알리, 루이스 페르난데스, 하비에르 이루레타, 마티아스 자머 등이 있다.


[1] 그래서 데려온게 칼라제다.[2] 여담이지만 네드베드의 수상으로 끝난 03년도 발롱도르 시상 당시 이탈리아 축구계는 전폭적으로 말디니의 수상을 지지했다. 다만 유벤투스 라인은 차마 네드베드와 말디니 둘 중에 하나를 지지할 수가 없어서 조심스러운 중립을 유지했다. 네드베드 수상 이후에 이탈리안 축구인들의 반응이 의외로 코믹하다. 특히 가투소와 토티. 해당 링크[3] 파브레가스 87년생, 말디니 1군 데뷔 85년...[4] 카카와의 공중 볼 경합 중에 키엘리니가 손으로 카카의 얼굴을 쳤는데 그걸 본 말디니가 "너 이 새끼 왜 우리 카카 때려"하면서 멱살을 잡은 것.[5] 이 일로 키엘리니는 완전 상처를 받았는데, 다름 아닌 키엘리니의 우상이 바로 말디니이기 때문. 키엘리니는 프로 데뷔 시절부터 레프트백과 센터백을 오갈 수 있는 차세대 말디니로 각광받기도 했고, 본인도 말디니를 따르다 못해 본인은 그에 비하면 미천한 몸이라고까지 하며 하악댔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당시 장면을 보면 멱살은 잡혔으나 싸우거나 화를 내기는 커녕 말디니에게 하소연하는 키엘리니의 모습에서 억울함과 서러움이 뚝뚝 묻어난다. 실제로 나중에 울었다... 결국 말디니가 추후에 사과했다. 경기내내 너무 거친스타일로 카카를 괴롭히는 키엘리니를 보고 참다가 터진...[6] 심지어 상대였던 로마의 감독 루치아노 스팔레티도 격분하였다. 그래서일까, 바르샤의 과르디올라 감독은 08-09 챔스 우승 이후 우승의 영광을 말디니에게 돌리는 등 그에 대한 존경심을 전했다.[7] 밀란 역사상 최다출장 기록이다.[8] 밀란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 횟수가 7회라는 점으로 볼 때 클럽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의 태반 이상의 공적을 세운 셈.[9] 역대 챔피언스 리그 개인 우승 횟수 역대 공동 2위의 기록으로 엑토르 리알, 후안 알론소, 엔리케 마테오스, 마르퀴토스, 라파엘 레스메스, 호세 마리아 사라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마르셀루, 카르바할, 나초 페르난데스, 이스코, 카림 벤제마, 토니 크로스, 루카 모드리치, 카세미루, 가레스 베일과 공동 기록이다. 1위는 6회 우승을 한 레알 마드리드 CF프란시스코 헨토로, 이 선수들의 리스트를 잘 살펴보면 말디니와 코스타쿠르타를 제외한 전부가 레알 마드리드 출신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10] 아쉽게도 메시를 직접 상대한 적은 없다.[11] 1990, 1994, 1998, 2002[12] 1988, 1996, 2000[13] 트레제게는 이때의 활약으로 유벤투스로 이적해온다.[14] 페리와 베르고미는 유기적인 포지션 체인징을 보여주었다. 일단은 페리는 센터백.[15] 베레시의 부상과 타소티스페인과의 경기에서 루이스 엔리케의 코뼈를 부러뜨리면서 대회 아웃이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주리 수비라인 포메이션은 정말 유동적으로 바뀌었었는데, 말디니는 이 대회에서 왼쪽 풀백, 왼쪽 윙백, 왼쪽 센터백, 즉 왼쪽 수비에 관한 모든 보직을 다 맡았다. 말디니의 수비능력을 압축해서 보고 싶다면, 94년 월드컵을 추천한다. 의도적으로 포메이션 체인징이 있었던 90년 대회에 비해서 말 그대로 부상과 퇴장에 따른 임기응변이 필요했던 대회였기 때문에 그의 수비능력이 더더욱 빛을 발했다. 그리고 대회 내내 포지션 변화에 따른 말디니의 수비 스타일 변화를 볼 수 있다.[16] 이때 조프는 공격을 말그대로 알아서 하게 냅뒀다. 피오레나 델피에로 같은 흔들기 명인들이나 인자기 같은 한방이 있는 선수들의 자율적인 플레이를 디노 조프 답지 않게 용인했는데, 특히 델피에로 같은 경우는 드리블만으로도 네덜란드를 압박하는 장면을 꽤나 만들었다. 이후 후반에 교체로 투입된 토티도 특유의 배짱과 다이나믹함으로 네덜란드의 파상공세를 저지하는 역할을 했고, 역시 교체 투입된 델 베키오도 높이로 네덜란드 수비진을 압박했다.[17] 수비 포메이션은 이후 페소토가 알베르티니와 교체되면서 3백에 2명의 윙백을 쓰는게 아니라 철저히 수비를 염두에 둔 5백으로 전환된다.[18] 핸드볼 파울을 피하기 위해서[19] 아쉽게도 한국에서 돌아다니는 영상에서는 이 부분이 짤려있다.[20] 보통 말디니가 센터백에서 뛸때는 전문 센터백인 파트너의 커맨드를 받으며 보조를 맞췄다. 바레시, 코스타쿠르타, 네스타 등.[21] 이천수JTBC 뉴스룸이나 예능에서 밝힌 바로는 이탈리아측의 공격적인 반칙 때문에 열이 오르자 '눈 앞에 보이는 선수 아무나 걷어차야겠다'고 생각했고 실행했다고. 다만 누군지 제대로 확인은 못했는데 까고보니 말디니였던 거라고...[22] 10수년이 지나 이제 심판 자격증을 따게 된 이천수가 본인의 유튜브에서 반칙장면들을 보면서 말디니의 뒤통수를 차는 장면이 나오자, 이천수는 당시 대표팀이 처음으로 16강에 올랐는데, 자신도 대표팀에서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앞서서 이런 실례를 범했다면서 말디니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같이 이천수의 반칙 퍼레이드를 보던 윤보희 심판은 이건 당연히 퇴장감이지만, 경기 흐름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만약 본인이 주심이었더라도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23] 이미 최장 시간 출전 기록자였다.[24] 해당 두 기록은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결승전에서 리오넬 메시가 모두 경신하게 된다.[25] 오버르마르스는 세계 축구 역사에서 손꼽히는 엄청난 준족이다. 100m 최고기록이 10초6이었다고 알려져 있다.[26] 참고로 당시 오버르마르스의 나이는 한창 팔팔한 27살.[27] 이반 엘게라의 동생이다.[28] 적어도 한 시즌 이상 소속팀과 리그, 국가대표팀에서 준주전~주전으로 활약했고, 자신이 속한 팀의 주장직을 맡았던 선수들도 꽤있으며, 소속팀과 국가대표에서 굵은 족적을 남기며 레전드가 된 선수들이 대다수이고, 월드컵, 유로, 챔피언스 리그, 코파 아메리카, UEFA컵, 컵 위너스 컵 우승자와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 UEFA 올해의 클럽 선수,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국제 메이저 대회 MVP 수상자들도 심심찮게 있고, 팀의 영구결번까지 될 정도의 선수들도 있다.[29] 어렸을 때에 같이 뛰었다가 안첼로티가 감독으로 밀란에 다시 왔을때까지 말디니는 확고한 주전이었고, 안첼로티가 밀란을 떠나는 시즌에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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