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미국 의회에서 발표한 14개조 원칙.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자결권(민족자결주의)의 확산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으나 실상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 식민지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승전국 식민지들이 독립하기까지는 한 번의 세계 대전이 더 필요했다.
2. 내용
2.1. 비밀외교 철폐 및 공개외교 수립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공개적인 평화조약, 앞으로는 사적인 국제양해는 폐지하며 외교는 언제나 솔직하고 공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1차 대전이 각 국가들, 특히 강대국들 간의 비밀 외교와 그 지도자들 간의 밀실 야합들이 얼기설기 꼬여서 세계대전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는 점을 바탕으로 수립된 조항. 공개조약과 국제회의를 통해 민주적으로 국제 문제를 논의하도록 하였다.2.2. 해양의 자유
평시, 전시를 불문하고 영해 밖의 공해에서의 항해의 절대적인 자유, 그러나 국제행동이나 국제조약의 집행을 위해 일부 또는 전부가 폐쇄되는 경우는 예외로 한다.
독일 제국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통상 파괴 작전으로 인해 수립된 조항.2.3. 경제장벽 철폐
평화를 애호하고 평화유지에 참여하는 모든 국가들에 가능한 한 모든 경제장벽을 철폐하고 평등한 무역조건을 확립한다.
1차 대전이 두 개의 동맹(삼국 동맹, 삼국 협상) 간에 벌어진 전쟁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수립된 원칙. 국제연맹을 수립하고 그 내에서는 어떠한 동맹도 맺는 것을 막기 위해, 개별적인 경제 장벽을 맺는 것을 금지했다.2.4. 군비 축소
국내 치안에 필요한 최적한도까지 군비를 축소토록 적절한 보장을 한다.
1차 대전이 군비경쟁, 특히 빌헬름 2세가 촉발한 영국과 독일 간의 건함 경쟁으로 인해 발발했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추가된 조항. 이 조항으로 인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었다.2.5. 식민지 요구의 공평한 조정
식민지의 주권을 결정하는 데 그 주민의 이익과 수립하게 될 정부의 공평한 주장이 동등하게 고려돼야 한다는 원칙하에서 모든 식민지 요구를 공평하게 조정한다.
1914년 이전 독일 식민제국의 모습.[1] 전후 이 지역들과 오스만 제국령 중동 지역 대부분에는 승전국들의 위임통치령들이 들어선다. 다만 독일령 교주만과 텐진 조계는 중화민국에 반환되었고, 오스만 제국령 아라비아 반도는 토착 국가들에 병합되었으며, 오스트리아 제국의 피지배 민족 지역들은 후술하듯 독립 국가로 독립하거나 인접한 민족적 모국에 합병되었다.
2.6. 러시아 재건에 대한 원조
러시아로부터 군대를 철수한다. 그리고 러시아가 자신의 정치발전과 국가정책을 자주적으로 결정할 자유로운 기회를 갖고 원하는 정치제도에서 국제사회에 들어오도록 러시아 문제를 처리한다.
러시아 내전에 개입 중인 협상국, 동맹국 병력이 철수함을 명시. 1917년 러시아 제국과 공화국이 혁명으로 무너진 이후, 그 잔당(백군) 및 자잘한 군소 세력들과 신생 소비에트 정부(적군)가 러시아의 패권을 놓고 각축 중이었다. 이에 1918년 연합군의 일원인 프랑스, 영국이 러시아의 항구인 오데사와 무르만스크에 병력을 보내 백군을 지원하며 개입했고, 동맹국의 독일 제국 또한 신생 소비에트 정부를 압박하여 불평등 조약을 맺고 서부 러시아 지역에 병력을 파견하며 식민지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1차 대전이 끝나고 내전에서 적군이 승기를 잡은 1919년이면 전부 철수한다. 다만 극동 시베리아로 쳐들어가 바이칼 호까지 진출했던 일본 제국은 1921년까지 버티고서야 철수했다.[2]2.7. 벨기에의 회복
벨기에로부터 군대를 철수하고 그 주권을 완전히 회복시킨다. 이것만이 모든 자유국가들이 설정한 법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며 그렇지 않다면 국제법의 모든 구조와 효력은 영원히 훼손될 것이다.
1차 대전 중 독일이 침공했던 벨기에를 해방하고, 그 영세중립국 지위를 회복시킬 것을 명시한다.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위치한 벨기에의 영세중립국 지위는 1831년부터 국제적으로 공인된 것이었다. 벨기에는 19세기 이전까지는 독립 국가가 아니라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라는 이름의 영지였는데, 이웃한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상공업 지역인데다 자국 영토와 가장 가까운 오스트리아령이라는 이유로 공공연히 벨기에를 노렸다. 라인강이 프랑스의 자연 국경선이라는 논리도 이때 등장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던 프랑스 공화국은 결국 벨기에를 집어삼켰지만, 1815년 나폴레옹을 이긴 승전국들이 전후처리 과정에서 벨기에를 도로 뺏어 네덜란드에게 넘겨주었다. 유럽의 구체제를 뒤집을 뻔했던 '불순한' 프랑스인들이 다시 혁명을 일으키면 네덜란드가 최전선에서 프랑스를 견제할 수 있도록 강화시키려는 의도였다.[3] 하지만 1830년, 네덜란드의 강압적인 지배를 참다못한 벨기에가 프랑스 7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벨기에 혁명을 일으켜 독립하자, 빈 체제하에서 수구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하던 열강들은 처음에는 혁명을 강제 진압하려 했었다. 하지만 곧 동유럽에서 러시아에 대항한 폴란드인들의 11월 봉기가 터지는 바람에 급해진[4] 열강들은 진압 대신 회의를 거쳐 벨기에의 독립과 중립국 지위를 국제적으로 보장해주었다. 특히 벨기에와 긴밀한 경제적 관계를 맺었던데다 전통적으로 유럽의 세력균형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영국은, 대륙의 경쟁자인 프랑스나 독일이 벨기에의 독립에 위협이 되는 것에 매우 민감했다. 영국이 1차대전에 참전한 이유도 독일에 의해 벨기에의 독립이 침해당한 것이 매우 컸다. 이후 벨기에는 1차대전이 터질 때까지 83년간 영-불-독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중립국이자 유럽의 항구로서 평화와 번영을 누린다.
2.8. 알자스-로렌 반환
모든 프랑스 영토는 해방되며 (동맹군은) 점령지역으로부터 철수한다. 알자스-로렌 문제로 프로이센이 1871년에 저지른 비행은 근 50년간 세계평화를 불안정하게 했는데 이것은 평화가 만인의 이익을 위해 보장되기 위해 시정되어야 한다.
독일 제국의 구성국 및 지방 지도. 큰 지도 왼편 아래 바덴 대공국과 프랑스 국경 사이에 활 모양으로 생긴 붉은 지역이 독일이 1871년에 통일하면서 민족적, 안보적 이유로 프랑스로부터 강탈한 알자스-로렌 지방(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이다. 독일이 이 지역을 빼앗은 이후로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외에도 1차대전 중 북동프랑스 지역이 독일군의 점령을 당했다.
2.9. 이탈리아 국경 재조정
이탈리아의 국경은 명백히 승인될 수 있는 민족의 분계선에 의해 재조정이 이뤄져야 한다.
1차대전 직후의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이탈리아계가 많이 살고 있는 트렌티노알토아디제, 줄리아, 이스트리아 등을 편입하였다. 한편 연두색 지역은 당시 이탈리아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했지만 인정받지 못했던 미수복 지역을 의미한다. 이 지역들은[5] 1915년의 런던 밀약에서 이탈리아가 협상국 측으로 참전하는 댓가[6]로 오스트리아에게서 뜯어낼 영토들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들은 크로아티아인들과 독일인들이 다수인 지역이었기 때문에, 국경을 민족의 분계선에 따른다고 명시한 이 9번 조항에 걸려 결국 합병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제정 러시아를 멸망시킨 볼셰비키가, 런던 밀약을 만국에 까발리는 바람에 조약 자체가 무효화된 것도 한몫 했다.
이탈리아는 동맹을 배신하고 알프스 전선에서 수십만의 피를 흘렸음에도 그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여겨 분노했으며, 이는 훗날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이 득세하는 계기가 된다.
2.10. 오스트리아 내 여러 민족의 자결
오스트리아의 국제적 지위는 유지된다. 그러나 모든 민족은 자치적인 발전을 하도록 자유스런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언어별 민족 분포. 9조, 11조, 13조와도 연관된다. 붉은색은 독일계(오스트리아인), 녹색은 헝가리인, 하늘색은 체코인, 갈색은 슬로바키아인, 자주색은 폴란드인, 검은 갈색은 슬로베니아인, 노란색은 우크라이나인, 주황색은 루마니아인, 연한 갈색은 남슬라브인(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보슈냐크인), 형광색은 이탈리아인이다.[7] 이 중 9조는 이탈리아인들이 있는 지역, 즉 트렌티노 및 트리에스테 지역을 대상으로 한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조항은 오스트리아령 지역의 심각한 민족적 복잡성으로 인해 결코 평화적이거나 완벽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수많은 민족적 월경지들과 언어섬들이 존재해 정리가 거의 불가능했고, 언어적으로 유사하더라도 실제로는 다른 민족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우선 오스트리아 제국 내 독일인들은 자결권의 원칙에 따라서라면 독일에 병합되어야 했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패전국이 된 이상 협상국이 이 둘을 하나로 합쳐 키워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독일계는 중소 공화국인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으로 독립했는데, 또 막상 주데텐란트[8]는 오스트리아가 아닌 체코로, 쥐트티롤은 트렌티노에 묶여 이탈리아로 병합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자결권 원칙에 아예 정면으로 반하는 케이스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뿐만 아니라 슬로바키아 남부의 헝가리인 거주 지역, 독일인 지역인 주테텐란트, 폴란드인 지역인 상부 실레시아의 테신[9], 우크라이나인과 헝가리인들의 지역인 카르파티아 루테니아까지 합쳐 오스트리아 제국 뺨칠 정도로 끝내주는 다민족 국가가 되어버렸다. 이 문제로 1939년, 나치 독일이 강압적으로 주도한 뮌헨 협정이 맺어지자, 주변국들에 영토를 빼앗겨야 했고, 체코는 독일에 합병, 슬로바키아는 괴뢰국이 되었다.[10]
루마니아 왕국의 경우 지도의 주황색 부분인 트란실바니아 외에도 구 러시아 제국령 베사라비아(몰도바), 불가리아령 도브루자까지 얻어내어 두 배 가까이 불어나 모든 루마니아계를 통일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트란실바니아 중앙에 분포하는 세케이족이라는 헝가리계와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이라는 독일계 민족집단들의 지역까지 합병하게 되면서 헝가리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슬로베니아인들과 크로아티아인, 보스니아인과 몬테네그로인들은 종교에 기반한 민족 의식이 확연하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언어적 유사성을 이유로 한데 묶여 일부 헝가리인들과 함께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유고슬라비아에 병합되었다. 내륙 소국이던 세르비아는 이로 인해 세 배 가까이 불어났고, 11조에 언급된 대로 해양으로 진출하기에 충분한 해안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주변국들의 영토 조정 과정에서 최대 피해자가 된 헝가리 왕국은 중세 이래 내려오던 영토의 3분의 2 이상이 뜯겨나간 것으로도 모자라 300만 가까이 되는 동포들까지 인접국에 뺏기고 말았으며, 이에 분노하여 체코, 유고, 루마니아 삼국과 전쟁을 벌이다가 패배한다.
한편 지도에 나오지는 않지만 불가리아 왕국은 상술했듯 남 도브루자를 루마니아에, 하술하듯 서트라키아를 그리스에, 그리고 마케도니아 일부를 유고슬라비아에 넘겨주었다.
또 발칸 반도 최남단의 그리스 왕국은 불가리아로부터 서트라키아를 얻어내고 동로마 제국 시절의 고토 수복을 내세우며 오스만 제국 본토 내로 깊숙히 진격했다. 이는 12조와 연관된다.
마지막으로 폴란드인 지역은 별도로 13조를 따르며,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 지역은 러시아 내전 및 동유럽의 대혼란과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으로 인해 독립 국가로 독립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지역이 폴란드 영토로 합병되었다.
2.11. 발칸 제국의 부흥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부터 군대를 철수하고 점령 지역은 회복된다. 세르비아는 해양을 통한 자유로운 진로가 보장된다. 발칸 국가들의 관계는 충성심과 민족성의 역사적인 분계선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 그들의 정치, 경제 독립과 영토보전은 국제적으로 보장된다.
위 10조, 아래 12조와 연관된다.2.12. 튀르키예 내 여러 민족의 자치 및 다르다넬스 해협의 국제화
현재 오스만 제국의 터키인의 지역은 확실한 주권이 보장되나 그 밖의 민족들은 생명의 확실한 보장, 자치적인 발전의 절대 안정된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다르다넬스 해협은 국제적인 보장하에서 모든 국가의 상선이 무역을 위해 자유로이 통과하도록 영구히 개방되어야 한다.
세계대전 직전인 1913년 당시의 오스만 제국. 1차대전 직전에 있었던 발칸 전쟁과 이탈리아-오스만 전쟁에서 대부분의 남은 유럽 지역과 리비아, 그리고 일부 섬들을 이탈리아와 발칸 국가들에게 상실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집트의 경우에도 이미 비공식적으로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반도를 따라 길게 뻗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지역들에는 아랍인 다수와 일부의 유대인들이 있었다. 이 지역은 전후 대혼란에 빠진다. 승전국들은 아랍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각각 주권국가로 독립시켜 주겠다는 이중계약을 맺어 놓았지만, 이 모든 약속을 어기고 이 지역에 열강들이 관할하는 위임통치령들을 세운다.
유럽 지역과 소아시아 반도 해안에는 그리스인과 불가리아인, 소아시아 내륙에는 쿠르드인과 아르메니아인, 그리고 라즈인[11]들이 거주 중이었다. 그리고 소아시아의 오스만 본토 또한 그리스와 열강들에게 분할 점령되었지만, 터키 민족국가의 수립을 위해 궐기한 케말 파샤의 군대가 허울만 남은 오스만을 무너뜨리고 독립전쟁 끝에 통일한다. 이 과정에서 소아시아에 살던 그리스계 다수가 그리스 본토로 추방되었다.
한편 12조에 다르다넬스 해협의 국제화가 명시된 이유는 이곳이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유일한 통로이므로, 그동안 흑해에서 대양으로 나가려는 러시아와 이를 막으려는 오스만 간의 수 차례의 전쟁의 빌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국제 자유 해역임을 공인함으로써 이런 충돌이 계속 벌어지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2.13. 독립 폴란드의 수립
폴란드인만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독립 폴란드를 수립한다. 폴란드는 해양을 향한 자유롭고 확실한 진로가 보장되어야 하며 그 정치, 경제적 독립과 영토 보전은 국제조약으로 보장된다.
1937년 폴란드 제2공화국과 그 인접국들에서 폴란드계가 주를 차지하는 지역들을 표시한 모습. 짙은 갈색이 폴란드인들이다. 18세기 말의 3차에 걸친 폴란드 분할 이후 백오십 년간 독, 오, 러 세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폴란드는 1차대전으로 이들 제국들이 붕괴하자 독립했다. 왼쪽 위에 좁게 뻗어 발트 해에 닿은 부분이 바로 서프로이센의 폴란드 회랑으로, 13조에 언급된 '해양을 향한 자유롭고 확실한 진로'이다. 그러나 그 끝에 위치한 가장 큰 항구도시인 단치히 시만큼은 독일인들이 과반수를 차지해 폴란드에 병합시키진 못하고 따로 단치히 자유시라는 이름의 도시국가를 만들어야 했다.
추가적으로 독일은 이 지역 말고도 포젠과 상부 실레시아도 신생 폴란드에 넘겨야 했다. 이렇듯 폴란드 서부 지역은 독일이 단일한 패전국인 만큼 승전국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어 나름 깔끔하게 국경이 명시되었으나, 동부에서는 상술한 대로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이 완전히 붕괴하고 피지배 민족들이 전부 독립하며 일대 난장판이 벌어졌다. 폴란드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분할 이전 오랜 기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였던 현대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서부 우크라이나에는 지도의 자잘한 갈색 점들에서 볼 수 있듯 수많은 폴란드인들이 살고 있었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와 국경분쟁을 벌였지만, 얼마 안 가 소비에트 러시아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파기하고 동유럽 신생국들을 침공하자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벌이게 된다.
2.14. 국제연맹 창설
모든 국가들의 정치독립과 영토보전을 상호 보장키 위해 특별한 협약으로 국가들의 일반적인 연합을 구성한다.
이상주의적인 영구평화론에 따라 국제사회를 하나로 묶어 전쟁을 예방하고자 했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국가들 간의 알력을 직접적으로 조정하거나 실질적인 운영을 할 수 없었다. 막상 이걸 주창한 미국이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출처]
[1] 아프리카에 독일령 동아프리카,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독일령 서아프리카가, 태평양에 독일령 뉴기니와 독일령 사모아가, 중국에 독일령 교주만과 톈진 독일 조계가 존재했다.[2] 이 과정에서 최재형과 같은 연해주 기반 한국 독립운동가 다수가 이념 대립에 희생되고 일본군에 체포, 살해되어 독립운동 세력이 약화되었다.[3] 원래 주인인 오스트리아는 벨기에를 양보한 대신, 그 보상으로 오스트리아 본토와 접한 북이탈리아의 구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를 집어삼키고 북이탈리아의 많은 중소 국가들을 괴뢰국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 영토들은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의 패배로 거의 대부분 잃어버리고 말았다.[4] 당대 폴란드는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삼국에 분할 점령되어 있었다. 11월 봉기는 이 중 러시아령 폴란드 전역에서 격렬하게 일어난 저항 운동이었고, 폴란드인들은 수십만 러시아군을 곳곳에서 격파하며 독립에 성공하는 듯 했다. 하지만 만일 러시아령 폴란드가 독립한다면 프로이센 및 오스트리아령 폴란드에도 독립운동의 기운이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기에, 열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봉기를 진압하고자 했다. 이렇듯 폴란드 문제는 자그마치 세 열강의 영토와 국익을 침해하고 빈 체제를 위협하는, 벨기에 문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었다.[5] 지도 왼편의 니스 지역 제외. 이 지역은 이탈리아의 전신인 사르데냐 왕국이, 통일전쟁 당시 프랑스의 지원을 얻는 댓가로 프랑스에 넘겨준 지역이다.[6] 이탈리아는 원래 독일-오스트리아와 같이 삼국 동맹측의 국가였다.[7] 그리고 시스라이타니아와 성 이슈트반 왕관령 공통으로 루신인과 유대인이 있었다.[8] 위 지도에서 왼쪽 위의 푸른 체코인 지역을 포위하는 붉은 독일계 지역.[9] 독일어로는 테셴, 폴란드어로는 치에신[10] 이런 이유로 뮌헨 협정 당시 영국, 프랑스 등은 나치 독일의 주장을 무시하지 못했다. 무시하기에는 강해보인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명분상으로도 분명히 자결권에 따르면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에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체코슬로바키아를 자결권에 어긋나는 국가로 만든 것은 독일을 견제한다는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11] 조지아인의 일파[출처]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6, 599~6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