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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저출산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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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부터 2013년까지 중국에서 시행된 산아제한정책에 대한 내용은 계획생육정책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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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1980년대의 저출산 경향 · 80~90년대 한국의 여아 낙태 문제 · 고령화 · 노산 · 딩크족 · 만혼 · 비혼주의 · 소멸위험지수 · 인구구조변화 대응실태 · 인구 절벽 · 젠더 갈등 · 출산육아지원정책 · 출산율(향후 전망)


1. 개요2. 배경3. 산아제한 정책 중단 이후4. 평가
4.1. 옹호4.2. 비판
5. 후유증6.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external/photo-media.hanmail.net/20060619095605.585.0.jpg
차범근과 그의 아내 오은미, 장녀 차하나와 같이 등장한 산아 제한 캠페인 포스터[1]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1980년대 정부가 내세웠던 대표적인 가족계획 캠페인 표어
대한민국에서 1983년 계해년(癸亥年)부터 1990년 경오년(庚午年)까지 일어난 출산율 하락 현상 및 저출산 경향.

2. 배경

연도별 출생자 수 참고

1960년대부터 가족계획(산아제한정책)을 실시해 왔지만 성과가 미미하자 1970년대부터는 둘 낳는 집안에는 각종 혜택을 마련하는 형태로 강력하게 권장하였다. 하지만 베이비붐 세대 인구들이 출산할 시기가 되어도 출생자가 좀처럼 줄지 않자 결국 1980년대에 와서는 '하나씩만 낳자'고 매우 강력하게 나갔다. 이로 인해 1983년에는 합계 출산율이 인구 대체 마지노선인 2.1명에 조금 미달했다가(2.06명 769,155명)[2][3] 이듬해인 1984년부터는 그보다 훨씬 아래(1.74명 674,793명)로 떨어졌다.[4] 특히 1987년의 출산율(1.53명 623,831명)은 1997년의 출산율과 비슷한 수준이다.[5] 1988년부터 1990년까지는 출산율이 다시 조금씩이나마 늘어나기는 했지만 0.01~0.02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실제로 1985~1990년 중에는 출산율이 세계 최저 10~20위 사이를 기록하였다.[6] 1991년에는 산아제한 정책이 중단되어 출산율이 1.7로 오르고 출생아 수가 70만명대로 올랐다. 당시 출산 가능 연령대 인구에 1차 베이비붐 세대도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태어난 아이의 수는 적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 때까지의 출산율[7]을 생각해 보면 심각하게 낮은 수준이었다. 가임여성은 급증했으나 출생아는 유지도 아니고 급감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형제가 없는 외동인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현재도 전세계 기준으로 외동 인구 비율이 1위일 정도로 흔하다고 한다.[8] 1980년대 중반생 이후의 인구 급감과 여자들도 점점 30대 초중반 이후에 결혼하는 추세라 2017년 이후로 인구 감소폭이 매우 가파라졌다. 그러다가 인구가 다시 증가하는 해인 1991~1997년생의 여성들이 결혼적령기에 접어든 2020년대 중반이 되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감소했던 결혼 건수가 다시 반등하고 결혼적령기 여성의 증가로 2020년대 중반의 출생자 수가 2020~2022년보다 조금은 늘어날 것이라 보고 있다지만 이 세대 사람들은 전세대에 비해 결혼에 대해 회의적이고[9] 이후 40만명대 시절(2002~2015년) 출생자와 출산율 자체가 차이나다 보니 2023년생 이후의 출생아 수도 40만명대로는 늘어나지 않고 많아야 2020년생(27만) 정도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결국 1985년쯤 돼서는 한국의 출산율은 당시 일본, 미국, 영프독을 비롯한 선진국들과 비슷한 수준까지 도달해 버렸다. 출생아 수로는 이 시기는 연평균 66만명으로, 2차 베이비붐 세대(1979~1982년생, 연평균 86만명)와 에코붐 세대(1991~1996년생, 연평균 71만명)보다 적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산아정책을 사실상 무시해 왔던 농촌 지역의 출산율이 이때부터 급락했다. 완전 깡촌 소도시 지역, 섬 지역이나 특히 제주도 전 지역[10]은 평균 출생아 수가 2.0명 언저리었으나 이들 지역도 1980년대 후반에 와서야 1명대로 떨어졌다.

이렇게 1983년에 이미 대체출산율 2.1명 이하로 떨어졌지만 당시 정부는 1996년까지 산아제한 정책을 추진하는 오판을 하고 말았다.[11] 이런 정부의 오판은 1990년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지다가 1996년에 와서야 겨우 산아제한 정책을 폐기하였다. 당시의 산아제한 공익광고는 여기서 볼 수 있다. 공익광고 모음에서도 나오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해도 영상 중반에 나오는 현재 대한민국의 인구 숫자를 표시하는 전광판이 도시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당시 한 자녀만 낳고 끝낼 시에는 의료보험, 사립학교 우선 입학, 무료 교육[12]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는 등 갖가지 정책을 펼쳤으며 이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둘째아 비율이 이 시기를 기점으로 급락했다. 이는 곧 한 자녀만 갖는 가정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이 시기부터 셋째아 출생 시 의료보험이 들어가지 않는 등 많은 불이익을 받게 되고[13] 이는 재산이 아주 많지 않은 이상 사실상 반 강제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정책을 펼쳤다. 참고로 이 시기에 셋째아 이상 비율이 10% 아래로 떨어졌고 그 중 상당수가 딸 둘에 막내아들 같은 식이었다. 당시 셋째아 출생 비율 중에서도 첫째 둘째 중에 아들이 있는 상태에서 셋째인 케이스는 전체 셋째 출생아 중에 20% 남짓이었으며 이 비율은 전체 출생아의 2%도 안 되었다.[14] 이는 뿌리깊은 남아 선호 사상 때문에 딸 둘을 낳고 어쩔 수 없이 막내를 낳는 집안이 대부분이며 아이가 좋다고 셋째까지 가진 경우는 소수인 셈이다. 더불어 넷째아는 전체 출생아의 약 1%였으며 앞전에 아들이 있는 상태에서 넷째 출생아인 비율은 전체 넷째아 중에 10%였다.[15] 다섯째 이상 출생아는 정말 극소수이며 유명인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찾기 힘들다.[16] 사실상 국민 모두가 산아제한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셈이다.

동 시기에 선진국인 일본, 대만만 해도 셋째아 비율이 20% 안팎이었고 특히 미국이나 유럽 등 서양 국가는 이보다 더 높았다. 다른 선진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2분의 1 이상으로 낮은 수치였다. 심지어 계획생육정책을 시행한 중국보다도 더 낮은 수치였는데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

물론 산아제한 정책을 폐지하고 출산장려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2000년대~2010년대엔 셋째아 비율이 10% 초반대로 소폭 오르기는 하였으나 타 선진국가에 비하자면 턱없이 낮은 수치였는데 이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이 때문인지 셋째 이상 출생 부부는 다둥이 가정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대략 이 시점부터였다.

3. 산아제한 정책 중단 이후

1990년에 산아제한 정책을 실질적으로 중단되자 1991년 이후 늦둥이 출산이 급격히 늘어 출산율과 출생아 수가 반등하는 현상이 있었다.[17] 실질적으로 한국에서 저출산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밀레니엄 베이비 유행이 완전히 끝난 2002년 이후이며 1992년까지는 출산율이 다시 늘어났고 1995년까지는 출생아 수가 70만명을 넘겼기 때문에 오히려 산아제한을 너무 일찍 종료했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하였다.[18] 다만 늦둥이 출산이 반짝 늘어난 것으로 출산율이 안정화될 수 있는게 아니었던 데다 산모가 될 인구가 빠르게 줄어드는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별 의미 없는 주장이었다. 2001년에 출산율은 전년 대비 10%이상 급락했다. 당시 인구정책 담당자들과 관료들은 1997년 외환 위기만 끝나면 출산율이 안정적인 수준으로 오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물론 자신들만 조건을 갖추면 자식을 가질 것이라는 직관적인 판단 하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지만 그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남들도 똑같은 행동을 하면서 기준이 달라짐을,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경제성장은 자신보다 남들의 돈을 벌어주는 성향이 있음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2년에 출산율이 1.18명을 찍어 초저출산으로 돌입하자 뒤늦게나마 출산장려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19] 하지만 이후에도 출산율은 큰폭으로 올라가지 않고 1.1~1.2명대 정도에 머물고 있다.[20] 이후 등락을 반복하다가 2018년 1.0명이 붕괴해 0.98명을 기록했다.

이 시기 출생 남성들이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되는 2000년대 중반부터 병무 대상자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1990년대 중반이었다면 절반 정도가 방위로 빠졌을 남성들이 2000년대 중반부터는 얄짤없이 현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21] 이로 인해서 이 시기부터 현역 기준이 많이 완화됐다. 여러 가지 병역면제나 보충역 대상이었던 신체/장애/학력미달 기준이 줄줄이 강화/삭제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만 1990년대 초중반생들의 인구가 조금 많은 데다 현역판정률이 90%를 넘어가다 보니 부적합한 자들까지 억지로 징병한 부작용으로 수많은 사건사고[22]로 진통을 겪으면서 저출산의 장기적 대책을 겸해서 60→50만명으로의 적정 군사규모 하향조정(군축)정책을 추진하면서 일시적으로 기준이 올라가기는 했다. 물론 이 세대가 병역을 끝내는 2020년 이후에는 오히려 더 강화될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가용가능한 인적자원은 징병할 대로 징병한 상태[23]라 한계는 명백할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는 낮은 출산율과 남아 선호 사상으로 인한 낙태 문제가 겹쳐서 남초 현상이 매우 심했다. 사실 1980년대 초반까지 남아 선호 사상 그 자체로는 남초 현상을 유발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현대의학의 발달로 태아의 성별을 미리 감별할 수 있게 되면서 딸을 임신하면 낳는 게 아니라 아예 낙태시켜 버리는 일이 흔히 발생하는 바람에 급격하게 성비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기술의 발달이 오히려 인간의 해악을 끼친 셈이다. 자세한 사항은 80-90년대의 여아낙태 문제 문서 참조. 물론 현재는 남아 선호 사상이 줄어들고 워낙 출산율이 줄어들어 낙태가 남초 현상을 유발한다고 볼 수 없지만 2010년 기준으로 셋째 출산성비는 약 109(남자 52.15%, 여자 47.85%)로 자연성비 이상을 보여준 만큼 한동안 위험성이 도사렸다가 2017년 들어 셋째 성비도 107(남자 51.69%, 여자 48.31%) 밑으로 떨어졌으며 2020년 이후로는 자녀를 3명 이상 낳는 케이스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이 시기에 태어난 학생들이 주로 보는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지원자 수와 응시생 수가 70만명을 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저출산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1982년생들이 주로 응시했던 200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2000년 11월 시행)부터 매년 응시생 수가 감소하였으며[24] 1990년생들이 주로 응시했던 200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2008년 11월 시행)까지 계속되었다. 다만 이는 출산율 이외에도 대학입시 정책의 변화 등도 한몫하였다. 2016년에 역대 최저 출생아 수를 기록했던 것도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이 무렵에 출산 세대로 진입해서라는 분석도 있다.[25]

30대 이후 성인이라면 각자 자신이 졸업한 초, 중, 고등학교 홈페이지나 학교알리미를 들어가서 최신 입학 인원수가 몇 명인지 검색해 보자. 아무리 못해도 30~40%, 심한 곳은 70% 넘게 줄어 있을 것이다. 물론 서울 강남이나 동탄신도시, 세종특별자치시 같은 신흥 신도시는 감소폭이 작거나 오히려 증가할 수 있으나[26] 대한민국 초, 중, 고등학교의 90% 이상 해당하는 얘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 학년에 심하게는 20반까지 있던 학교의 학급 수가 많아봐야 6~7학급이 된 것을 보면 저출산이 확실히 느껴질 것이다. 전세버스는 28인승 우등고속형 차량이 급증하고 있는데 이는 고급 서비스를 요구하는 소비자의 눈높이가 높아진 것이 주 원인이 아니라[27] 저출산으로 인해 학급 인원 수가 25명 선으로 줄어서가 주 원인이다.[28] 담임교사를 합해도 28석을 다 못 채우는데 영리가 제1의 목표인 전세버스 회사 입장에서는 45인승 버스를 넣으면 인원은 적은데 좌석이 좁다고 고객들이 기피하게 된다.[29]

4. 평가

4.1. 옹호

인구 대처 문제를 전두환, 노태우 정부 시절 아주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기는 뭐한 것이, 당시 경제정책 담당자들의 인구관이 맬서스의 이론을 철저히 따르고 있었다. 심지어 당시 구호가 1984년 국민총생산으로 미국 수준의 개인소득을 올리려면 1천만 명으로 줄여야 한다는 것일 정도로 인구 압력에 대해 무척 민감했다. 당시 담당자들의 인식으로 인해서 김종인의 얘기에 의하면 "'출산율이 2명 아래로 떨어졌으니 산아제한을 슬슬 폐기해야 되지 않나'라는 투로 얘기를 해놓았다가 철저하게 박살이 났다"라는 지금보면 도저히 웃지 못할 얘기도 있었다. # 그만큼 당시 당담자들의 인식이 맬서스 트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얘기였다는 반증이다.

당시의 대한민국은 신흥 개발독재 국가로 정부 예산상의 한계가 닥쳐온 데다 더욱 더 첨예한 경쟁 시대에 더욱 더 극단적인 저과세 저복지를 추구했던 만큼 해당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노인 복지를 늘릴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을 가능성이 있다. 막말로 공산주의 또는 개발독재 국가들(중국, 구소련, 일부 아프리카, 중동 등)처럼 정년을 70~75세로 연장하고 실직 및 생계능력이 없는 노년층을 3D업종에 강제로 배정하여 재취업하고 젊은 시절에 노후대비도 안 했으면서 늙어서 일하기도 싫은 노인들은 굶어죽게 내버려 두면 해결되는 문제기도 할 정도다. 당시 프랑스와 일본은 한국과 달리 엄연한 선진국이었고 1980년대 기준으로도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저출산/고령화를 경험하고 있던 국가였으며 일본 역시 진작에 저출산/고령화에 진입한 상태였던지라 1980년대 한국과 동일시하기에는 어렵다. 한국의 고령인구 비율이 7%도 채 되지 않았던 반면 프랑스는 1980년에 고령사회에 진입했고 일본 역시 1970년에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이후의 시점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북한 경제가 급속도록 어려워지면서 구 동구권처럼 북한도 붕괴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던 때였던 만큼 통일도 염두에 두기도 했다. 하지만 폐쇄적인 북한 체제 특성을 고려하면 동구권과 다르게 예측이 빗나갔다.

물론 당시 담당자들이 이러한 인식을 가지는데 있어서 UN을 비롯한 국제기구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당시만 하더라도 2020년에 인구 120억을 예측하기도 했으며 국제적으로 산아제한정책을 강조하였다.[30]

다만 1974년 UN 인구 컨퍼런스에도 이미 발전은 최고의 피임약이라며 경제성장이 자연스레 저출산을 유도하리라는 시각은 있었다. # 그래도 저출산을 추구하는 정책이 추구된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는 남아 선호 사상, 대를 이어야 한다는 관념을 제외하면 다산을 할 요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의 교육과 물질의 번영을 추구하던 당시의 사람들은 다산을 어려워했고 다산 자체가 부모와 자식의 끈끈한 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가족관에도 근원적으로는 어긋났다.

관료부터 일반 시민까지 한 마음으로 생각하여 경제성장이 있으면 저출산이 유발될 수도 있다는 주장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고 자식이 귀하게 크는 것이 이상적인 양육이었다. # 프랑스 같은 나라의 출산 정책도 한국에 알려져 있었지만 국민들은 이를 대놓고 반대했다.

스위스나 일부 동유럽처럼 만 60~65세 이상의 고령층에 대해 고통 없는 조력 자살(사회경제적 사유의 자발적인 존엄사 인정)을 일정 기준 하에 법적으로 허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 분야에서는 스위스가 가장 진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 원정가는 사람은 종종 있긴 해도 엄청 많지는 않은데 외국인은 한화로 환산할 시 비행기값 빼고 1년간의 안락사 준비 프로그램 비용만 순수하게 약 2300만원 정도 비용이 든다고 한다. 고통 없는 자살도 돈이 많은 사람만 가능하다.

4.2. 비판

역사적으로도 한민족은 예로부터 출산을 그닥 많이 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인구증가율은 비슷한 환경의 타 국가와 비교했을 때 전쟁이나 기근을 제외하더라도 비교적 더딘 편이었다.[31] 당시 출산율은 6명 언저리였는데 동시기 유럽은 8~10명이었다. 이웃나라인 일본과 비교했을 때도 현저히 낮은 편이었으며 일본의 전국시대 당시 인구는 1,000만~1,200만명으로 한국과 거의 같았다. 20세기는 이미 근대화가 시작된 유럽, 일본 등의 나라들에 비해 국내의 출산율이 높던 유일한 시기인 데다[32] 결정적으로 6.25 전쟁 당시 전사자, 사망자나 전쟁고아가 속출하자 이승만 정부의 출산 장려 정책으로 인해 인구가 폭증했다. 이는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까지 이어졌는데 이걸 문제삼은 정부는 먼 과거는 안 바라보고 현 시점만 바라본 채 그걸 망각하고 있다는게 문제였다. 다출산을 하는 시기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너무 짧았다는 것이다.

같은 시기 중국은 계획생육정책을 시행 중이었는데 한국과 같이 매우 강력하게 한자녀만 허용했지만 이는 한족에게만 국한되어 있었고 농촌 지역에 사는 한족에게도 둘째아 출산이 허용되었다. 거기다 한족 외의 소수민족, 특히 위구르족이나 티베트족은 4남매, 5남매 이상 낳는 가정도 많았다. 당시 중국의 출산율이 2.0~2.5명인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반대로 한국은 비록 강제적이지는 않았지만 중국과 달리 농촌 지역을 포함한 전 국민을 상대로 시행되었기 때문에 4남매 이상 낳는 가정은 극히 드물었다. 이는 전두환과 노태우 정부의 명백한 실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1983년에 출산율이 대체출산율인 2.1명 수준으로 떨어진 이상 산아정책을 즉각 폐기하지 않은 것이 패인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참고하는 일본은 1957년 출산율이 대체출산율까지 떨어지자 1962년에 산아제한 정책을 폐기해 1974년까지 2.0~2.1명대로 유지했지만[33] 1970년대 중반에는 오일쇼크에 의한 경제 악화로, 1980년대 버블경제 탓에 집을 구하기 어려워진 청년들의 결혼 기피로 이미 1980년대에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프랑스만 해도 출산율이 1.87명으로 떨어지자 바로 1983년부터 적극적인 출산 장려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산아제한정책이 폐지된 해는 1996년인데 늦어도 너무 늦은 선택이었으며 1997년에 1997년 외환 위기까지 터져서 기업이 파산하고 실업자들이 대량으로 양산까지 되었으니 한가하게 아기를 출산하고 양육을 할 상황도 아니었다. 경제적 위기는 출산율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3저 호황 시절에 산아제한정책을 폐지했더라면 유사한 대만의 사례를 보면 비관적으로 보면 0.1명이나 0.2명 정도 높았을 수도 있으나 더 빠른 저출산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뒷받침된다면 일본하고 비슷한 수준의 출산율을 고민해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산아제한정책의 실질적 폐지는 1990년이었던 만큼 대체출산율 정도를 기록한 1983년에 산아제한정책을 폐지하지 않은 것, 그리고 1984년에 대체출산율 미만으로 내려갔는데도 출산장려정책을 2003년에야 시작한 것도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남북통일을 염두에 둔 면도 있었다고 하는데 출산율이 대체출산율인 2.1명 이하로 떨어진 1983년에는 아직 소련이나 동독이 건재하던 상황이었던 데다 북한의 경제도 고난의 행군 이전이라 그적 저럭 괜찮았기 때문에 단순히 통일에 대해 근거 없이 낙관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게다가 전두환,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동시기 서독처럼 통일을 위한 활발한 교류나 지원 활동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설령 남북통일이 됐다고 하더라도 1985년에 이미 북한의 합계출산율이 2.36명이었으며 이후 계속 감소했다. # 1985년 남한의 합계 출산율이 1.60명이었던 데다 남한 대 북한 인구비가 2:1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남북통일도 답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당시에 통일이 되면 남한 지역의 경제력이 좀 더 높으니 북한 지역의 경제력이 올라가 출산율도 오를 거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의 경제력이 동반 상승하리라는 기대에 출산율까지 오를거라는 기대를 했다면 정말 공상으로 국책을 결정했다고밖에 할 수 없다. 게다가 구 동독 지역은 오히려 독일 재통일 후 출산율이 떨어진 사례가 있다.

물론 당시 1인당 GDP를 늘리기 위해선 인구가 줄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름 힘이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이는 주로 출산율이 4~5명대에 달하는 후진국에서 나오는 것이다. 출산 제한을 통한 인구 감소는 전세대에서 동일한 비율로 줄어드는 게 아니다. 문제는 경제활동인구(만 15세 이상 만 64세 이하)가 비경제활동인구(만 15세 미만, 만 65세 이상)를 뒷받치는 구조라는 거다. 윗세대 인구는 많은데 아랫세대 인구는 적은 구조가 이어지면 인구가 많은 세대가 비경제활동인구가 되었을 때 아랫세대들의 부담은 점점 커진다. 단순히 따져봐도 1970년 출생자가 100만명이 넘었는데 1987년 출생자는 62만명이었다.

이들이 출산적령기(30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201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출생아수가 점점 줄어드는데 3차 베이비붐 세대(1979~1982년생)의 출산이 한창인 2010~2012년을 정점으로 47~48만명이었던 출생아수가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내려갔다.[34]

1986년에는 주교위원회 가정사목담당 박토마 주교(춘천교구장)가 11월 26일 '하나낳아 알뜰살뜰'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80원짜리 우표가톨릭 신자들이 사용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 물론 이 담화문 자체는 가톨릭의 종교적 입장(낙태반대) 표명이긴 하다. 그런데 우편이 주요 통신수단인 시대에 우표로 정부정책을 홍보할 정도면 정부의 책임은 매우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전두환과 노태우 정부가 바뀐 세태에 대해 빠르게 파악하고 다른 나라의 사례들을 참고하면서 기존의 출산 정책을 수정할 의무가 있었지만 별 생각 없이, 아니면 당장의 물질적 번영을 추구한다는 인기에 영합하는 행태로 이전 정책을 답습하기만 했던 것은 옹호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5. 후유증

성별 감별을 금지하고 의사가 태아의 성별을 알더라도 가족에게 알려주지 못 하도록 법을 만들었지만 남초 현상은 오히려 심화되었다.[35]

1990년에 실질적인 산아제한 완화조치를 취한 직후인 1990년대 초반에는 오히려 출산율이 올라가는 경향을 보였다. 1991년에는 출산율이 1.71명을 기록해 전년 대비 0.14명 상승했으며 1992년(1.76명, 730,678명)의 출산율은 1984년보다도 약간 높았다. 하지만 1995년 이후로는 다시 감소세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반등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부터 피임약과 피임기구 보급 사업비를 절반가량 줄여서 가족계획이 다소 완화되었다는 점도 한 몫 했다.[36]

1990년대 중반(공식적으로 1996년당시 기사) 이후 산아 제한 정책을 멈추고 나서도 계속 출산율이 감소했으니 단지 산아 제한 때문에 한국의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할 순 없다.[37] 양육 시스템과 가치관이 한국과 가장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대만, 싱가포르의 중국계[38]도 한국급의 산아제한은 하지 않았지만 출산율이 서구나 일본보다 낮고 한국과 0.1~0.2명 정도 차이날 정도다. 산아제한이 출산율을 떨어트렸다기보다는 슬슬 떨어지려는 출산율의 등을 밀어 준 셈이다. 일단 이 시기부터 태어나는 아이들의 수가 줄어 들더니 2002년에 초저출산에 진입하고 2018년에 0명대로 진입했는데 의료의 발달로 평균 수명은 증가하니 2050년 즈음엔 고령화 현상[39]이 심각할 거라는 예상이 나오게 된다.

일단 정부는 출산장려와 국제결혼을 권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힘든 부분들이 있어 대부분 이민을 주장한다. 특히 UN이나 IMF는 한국이 적어도 인구의 10%, 많게는 35%의 이민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고 주요 언론들도 다문화를 사실상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그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대책을 거론한다. 게다가 국제 사회의 흐름도 일본처럼 출산율의 자체 증가는 별로 효과가 없고 있더라도 인구의 자질 저하를 피할 수 없으며 독일처럼 적극적인 이민수용국이 오히려 상황이 양호해지고 있기 때문에 한국 역시 출산장려책 자체는 계속 하되 인구 유지에 있어서는 결국 대세를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완전히 순수한 혈통의식인 혈통론적 민족주의를 중시하는 한국 문화 특성상 이민 정책이 빛을 발할 때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예상된다. 제노포비아가 판을 치는 바탕도 이것이다.

그런데 이민을 받는 부분에 있어서 사회적 저항이 예상 이상으로 심각할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출산을 안 한다기보다는 전술한 문제들로 못 하는 사람들이 사실상 절대 다수인데 그걸 메우려고 이민을 받는다면 아무리 방송에서 떠들고 다민족국가를 장려해 봐야 경제적 문제로 아이를 못 낳는 상황에서 이민을 받아 해결하려고 하는 건 설득력 자체가 없다. 이민을 받아 인구를 늘려도 경제적 모순과 사회적 양극화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면 이제 민족 단위로 갈등이 증폭되거나 이민자 2세들의 집단탈선과 사회문제까지 덤으로 예상된다. 같은 민족인 북한이탈주민도 백안시당하고 아이들 교육을 시키는데 간첩 소리를 듣거나 집단차별을 당하는 현실이 방송까지 타는 상황에서 이민자를 대량으로 받는다면 벌써부터 싹수가 노랗고 대혼란만 예상된다. 이미 인터넷 등에서는 이민자 혐오정서가 만연하고 있는데 이게 확산되면서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확률도 매우 높다.

유럽에서는 알바니아[40], 루마니아[41] 같이 북한 같은 독재를 한 국가 출신의 난민은 문화가 비슷한 이탈리아에서 중동이나 아프리카 출신보다는 적응을 잘 했으나 그래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기는 했다. 알바니아 난민을 받은 이탈리아에서 보듯 적응하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며 탈북자도 어떤 사람은 정계나 언론계에서 찬사를 듣기도 한다. 조선족도 처음부터 인식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중국인 정체성을 갖기 때문에 백청강, 댄서의 순정에서 보듯 시진핑 집권 초기까지만 해도 인식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으나 2010년대 후반~2020년대 들어 훨씬 심해진 중국의 패권주의적 행보로 인해 적국을 옹호한다는 인식이 생겨 차별 인식이 커졌다.

유럽의 경우를 살펴봐도 기존의 문화와 인종이 완전히 다른 국가들의 이민으로 인해 현재 유럽에서 일어나는 혼란상을 봐도 위험성은 분명하다. 더구나 한국보다 외국인에 대한 인종 차별이 좀 덜한 편인데도 받아들인 많은 외국인들의 상당수가 중하류층에 머물러 있거나 불만세력이 돼서 극단주의에 심취해 자생적 테러 등을 일으키는 상황을 보면 무작정 이민을 받아 인구를 늘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성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게다가 인건비의 상승 문제와 겹쳐 기술의 발전으로 갈수록 줄어드는 일자리 문제를 감안하면 교육수준이 낮은 이민자를 대량으로 받아 인구 숫자를 무작정 늘린다는 것 자체가 바보짓에 가깝다.

북한 출신은 한국과 비슷해도 문제인데 이들은 없는 살림에서도 어떻게든 자식을 교육시키겠다며 높은 조건이 아니면 결혼을 하지 않거나 결혼을 해도 저출산을 선택할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것이다. 탈북자는 자신이 '한국인'이고 싶어하기 때문에 결혼을 할 때도 외국인이 아님을 강조하고 눈높이도 남한 사람의 생각 이상인 경우도 있다. 문화적 갈등은 줄어들지만 한국인의 특성인 저출산까지 물려받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실제로 동소득대 최저 출산율을 북한이 기록한 만큼 통일 내지 개혁 개방이 북한에 찾아오면 남들이 잘 사는 것을 보고 자기 자식은 밀리면 안된다고 하여 자식을 덜 낳는 경향이 생길 수도 있다. 이미 2010년대에 1.3명 정도가 아니냐는 추산이 한국은행의 보고서에서도 등장할 정도로 북한에도 저출산이 만연하며 '치맛바람'과 같은 마인드가 대단히 남쪽과 비슷하다. 북한에서도 '치맛바람'이 무슨 말인지 다 알고 있다. 그나마 한류 때문에 문화적으로 비슷해져 남자가 2010년대 후반 정도면 도시 출신은 밥까지 해주는 경우가 있을 정도이기는 하다. 그런데 그만큼 비슷해진다면 저출산과 관련된 아시아적 마인드인 '우리 아이만 뒤쳐져서는 안된다'는 생각까지 닮을 수가 있다.

6. 관련 문서


[1] 참고로 차범근 부부는 이후 둘째셋째도 출산하여 요즘 시대에서는 다자녀 가구라고 볼 수 있다(...)[2] 1979년부터 1982년까지 해마다 84.8~86.7만명이 태어났으나 갑자기 1984년이 되면서 70만명 미만으로 크게 하락했다.[3] 1983년 당시는 개발도상국이었고, 기대 수명이 80세를 넘는 오늘날에도 2.07명은 되어야 유지된다.[4] 1984~1989년의 출산율은 일본보다도 낮았다.[5] 출산율은 1997년의 1.537보다도 낮으며 출생아 수를 기준으로 할 경우 1999년을 제외하면 1990년대~2000년 어느 해보다도 적다.[6] 특히 미국에는 1984년부터 출산율로 한 해도 빠짐없이 계속 밀리는 중이다. 물론 미국의 출산율이 예나 지금이나 일본과 구미 선진국 중에서는 유별나게 높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7] 이에 관해선 대한민국/출산율 항목 참조.[8] 참고로 2위는 계획생육정책을 실시한 중국이다. 의외로 농촌지역에 사는 한족이나 소수민족은 한자녀 정책 수혜자가 아니었고 특히 농촌지역 소수민족 중에는 4, 5남매씩 낳는 가정도 종종 있었다.[9] 1980년대생들이 소위 낀 세대 라고 부를 정도로 1990년대생들은 지금까지의 대한민국 세대들과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태어나서 권위주의적인 사회 분위기가 아닌 탈권위주의적인 사회 분위기(ex.교내 체벌금지 등)를 보고 자라 왔으며 부모는 물론이고 교사, 선배 등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기 시작한 세대인 만큼 이전 세대와는 다르게 결혼은 필수라는 인식도 적은 편이다.[10] 제주도는 인구수 때문인지는 몰라도 타 지역에 비해 산아제한정책이 매우 느슨했다.[11]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1990년 이후 산아제한 정책을 중단하였다.[12] 다만 1970년 당시에도 사립학교는 두자녀 가정이면 우선 선발로 입학하는 등의 혜택은 있었지만 그 혜택이 후와 달리 미미했다.[13] 다만 부모 둘 중 한 명이 외동인 경우나 재혼 가정, 앞에 태어난 아이가 장애가 있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셋째까지도 허용되었지만 그 수가 몇 안 되었다는것이 문제다.[14] 재벌가 중에서는 한화 김승연의 3남 김동선이 이 시기에 태어났다. 재벌가가 아니더라도 유명인들 중에서도 드물게 있으며 손위 남자형제 2명인 유명인으로 본다면 대표적으로 보아, 황정음이 이 시기에 태어났다. 배우 송중기의 여동생도 해당 시기 출생자이다.[15] 이 시기에 태어난 가수 넉살, 펜싱선수 구본길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개그우먼 김지민의 남동생도 이 시기에 태어났다.[16] 해당 사례에 속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누나 8명이 있는 김재중이 있으나 실은 입양된 것이므로 배우 곽시양이 해당 사례에 속한다. 1남 4녀 중 다섯째. 다섯째는 아니지만 해당 가정 유명인만으로 한해도 공지호, 남보라, 배다빈, 유혜주, 이민형 등 극소수이다. 이 같은 케이스가 얼마나 희귀한 케이스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17] 다만 셋째아 이상 비율은 1991년 역대 최저치를 찍었는데 이는 자녀 하나만 낳던 가정이 둘째아를 낳는 가정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통계청이 작성한 1981년 이래로 둘째아 비율이 가장 높은 해가 1991년~1995년 이 시기이다.[18] 본 문서에서 설명하는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 1980년대 중후반생(1985~1989)은 출생신고 기준 약 319만 명인데 이 숫자는 1980년대 초중반생(1980~1984, 약 402만)은 당연하고 산아제한 중단 직후인 90년대 초중반생(1990~1994, 약 353만), 심지어 완연한 감소추세를 보이던 90년대 중후반생(1995~1999, 334만)에도 밀린다.[19] 통념과 다르게 저출산은 1983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20년이 아니라 40년이 다 되었다. 이 문서의 존재 이유이자 인구 정책의 헛발질도 드러낸다. 20년째는 초저출산 기준이다.[20] 그나마 2012년에 출산율이 1.297명을 찍으면서 2001년 이후 11년만에 출산율이 가장 높았다.[21] 실제로 1986년생들이 주로 받았던 2005년 병역판검사에서 병력 수급 부족을 이유로 그 해 신체검사를 받는 대학생에 한하여 4급도 현역 판정을 내렸던 적이 있었다. 나중에 예상 외로 병력 수급이 원활해져서 이들도 보충역으로 다시 환원되었지만. 이미 입대한 경우가 문제가 되었을 텐데 병역처분 내지는 병역통지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취소소송을 제기했다고 하더라도 병역 수급에 관한 행정청의 재량이 폭넓게 인정되어 기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22] 굵직한 것만 따져도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 내곡동 예비군 총기난사 사건[23] 2020년 현역판정률 약 89%. 93%에 달했던 2010년대 부적격자로 인한 수많은 사건사고들을 보면 르 이상 징병하는 것은 무리다. 부적격자를 억지로 채워넣다가 멀쩡한 자원들까지 비전투손실로 날려 버리느니 그냥 감편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다. 북한도 2020년 복무단축을 시행하며 징병 규모를 소폭 감편했다. 코로나19 때려맞은 상황에 아주 열악한 여건을 제공하기에도 정말 최소한의 유지비조차 부족한 데다 어차피 부적격자(북한은 대한민국이었으면 6급 완전면제에 장애인 등록도 가능할 정도의 인원도 징병한 사례가 있다.)로 채워 봐야 군사적 가치가 없으니만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24] 심지어 빠른82가 빠지고 빠른83이 포함되어(입학유예자 제외) 더 적다.[25] 다만 최저 출산율을 기록했던 2005년보다는 출산율이 높은데 이는 출산율에서 '분모'에 해당하는 가임기 여성의 인구가 줄어들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26] 그나마 이들 지역도 전국에서 손꼽히는 유소년인구가 가장 많은 신도시다.[27] 다만 자식을 귀하게 키우려는 풍조는 경제가 성장하면서 더욱 심해지고 특히 자식의 자립보다는 부모의 책임을 서구나 일본보다 강하게 요구하는 한국 가족문화 특성상 직접 의도하지는 않았어도 이런 고급 서비스는 부모들이 원하는 방향에는 부합하였을 것이다.[28] 애초에 2010년대 후반부터는 한 학급에 학생수가 겨우 30명만 되어도 과밀학급으로 간주된다![29] 한 학년에 학생들이 많고 버스들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시내버스를 전세용으로 활용하여(지금은 안전문제로 불법이다.) 입석으로 가득 채워서 활용했던 사례도 존재했다.[30] 세계인구는 전세계 평균 합계출산율이 떨어지면서 인구 증가폭이 줄고 있고 2020년 기준으로 78억 명으로 당시에 나온 인구 120억 명 전망은 잘못된 추계치이다. 한편, 세계인구는 2084년에 약 104억 명으로 정점을 찍을 것이라고 한다.[31]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나 적도 근처, 열대우림 지역은 영아사망률이 유독 높아서 인구증가율은 적은 편이나 출산율 자체는 높은 편이었다.[32] 다만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대도시 지역보다 경성부의 출산율이 약간 더 낮았는데 이에 기인한 것으로 보여진다.[33] 전두환 정부가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었다면 일본의 예를 참고해서라도 출산율이 대체출산율에 도달한 1983년에 산아정책을 즉각 폐기하고 대체출산율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짜는게 맞았다.[34] 2011년과 2015년의 출산율은 1.24로 유사하지만 출생아수는 각각 47.1만명과 43.8만명으로 꽤 차이가 나는데 이는 1980년대 중반생들이 출산연령에 진입한 것의 영향이지만 이때까지는 1979년~1982년생이 출산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있었다. 2016년에는 출산율은 1.17명으로 당시까지 역대 최저였던 2005년(1.09)보다 높았는데도 불구하고 출생아수는 40.6만명으로 최저치를 찍었다. 2017년에는 출산율 자체도 1.05명으로 최저치를 경신하며 출생아수 35.8만명으로 30만명대로 진입했다.[35] 특히 1990년, 1993년, 1994년에 절정을 찍었는데 출생성비가 각각 무려 116.5, 115.3, 115.2까지 치솟았다! 이 중에서 1990년역대 최고치였다. 1990년은 여자의 팔자가 드센 백말띠의 해라는 근거 없는 속설이 퍼져서 가장 많은 여아 낙태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근거 없는 속설은 21세기에도 살아남아 2006년 쌍춘년설로 인한 결혼붐과 2007년 황금돼지해 베이비붐으로 이어졌으나 2010년대 들어 완전히 사라졌다. 2019년에도 황금돼지해 마케팅이 있었지만 출산율은 0명대를 기록했다.[36] 아이 안낳는 한국, 1990년대생이 마지막 희망[37] 실제로 1995년(1.63명, 715,020명)부터 1999년까지 출산율이 계속 소폭 감소했으며 2000년에 밀레니엄 베이비붐으로 잠깐 올랐으나 2001년2002년에 급감해서 초저출산에 진입했으며 2005년에 사상 최저점(1.09명, 438,707명)을 찍기 전까지 출산율이 계속 하락하는 추세였다. 공식적이 아닌 실질적 중단으로 따지더라도 1991년 1.71, 1992년 1.76명까지 잠깐 증가한 이후에는 계속 감소세를 보였다.[38] 2022년은 0.87로 추산되는데 한국은 2021년 0.86, 2022년 0.78이었다. 충격적인 것은 싱가포르는 자가소유율이 90%대며 특히 신혼부부에게는 더 혜택을 주는데도 부동산 정책이 리콴유의 장기집권을 이끄는 효과가 있었지만 출산율이 이 모양이라는 것이다. 말레이계는 이 와중에 1.83명은 낳는데 아랍에미리트 같은 일부 부유한 이슬람 국가보다도 자식을 많이 낳는다.[39] 노인 인구는 많은데 이들을 부양할 청년층 인구가 엄청나게 적다.[40] 90년대에 북한보다 가난했던 적도 있으며 엔베르 호자 시기에는 북한과 비슷하게 폐쇄적이기도 했다.[41] 차우셰스쿠 같은 독재자는 김일성의 정책을 따라한 것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