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23:31:37

개성-문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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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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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개성-문산 전투
파일:개성문산피난민.jpg
<colbgcolor=#536349> 시기 1950년 6월 25일 ~ 6월 28일
장소 개성, 문산, 파주 일대
교전국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지휘관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백선엽 대령
제1사단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최경록 대령
제11연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고한조 대위[1]
제1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정영홍 소령
제2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김재명 소령
제3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전성호 대령[2]
제12연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신현홍 소령
제1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한순화 소령
제2대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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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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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연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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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윤천태 소령
제2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유재성 소령
제3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노재현 소령
제6포병대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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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대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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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연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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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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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연대 제3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유해준 중령
서울특별연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김병화 소령
보병학교교도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김응용 소령
육사교도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유재흥 준장
제7사단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김기태 경위
장단경찰서 경비주임
파일:북한 국기.svg 김웅 중장
제1군단장
파일:북한 국기.svg 김재욱 소장
부군단장
파일:북한 국기.svg 유신 소장
참모장
파일:북한 국기.svg 최광 소장
제1사단장
파일:북한 국기.svg 김양춘 대좌
제2연대장
파일:북한 국기.svg 이창권 대좌
제3연대장
파일:북한 국기.svg 황석 대좌
제14연대장
파일:북한 국기.svg 현학봉 대좌
1사단 포병연대장
파일:북한 국기.svg 최현 소장
제3경비여단장
파일:북한 국기.svg 방호산 소장
제6사단장
파일:북한 국기.svg 김후진 대좌
제1연대장
파일:북한 국기.svg 한일래 대좌
제13연대장
파일:북한 국기.svg 조관 대좌
제15연대장
파일:북한 국기.svg 이민 중좌
6사단 포병연대장
파일:북한 국기.svg 최율석 대좌
제203전차연대장
병력 병력 10,161명
105㎜ 곡사포 15문
57㎜ 대전차포 18문
81㎜ 박격포 36문
60㎜ 박격포 54문
60㎜ M9A1 바주카
각종 기관총 43정
병력 21,000명
122㎜ 곡사포 24문
76㎜ 곡사포 72문
45㎜ 대전차포 168문
화포 총계 444문
전차 40대, 자주포 32대[3]
피해규모 불명확 불명확
결과 북한군의 개성, 문산, 고랑포 점령
국군 제1사단의 전략적 후퇴

1. 개요2. 배경3. 지형
3.1. 예성강 서쪽3.2. 예성강 동쪽
4. 부대 배치 상황5. 개전 직전
5.1. 한국군5.2. 북한군
6. 개전
6.1. 청단 - 배천 철수6.2. 개성 철수6.3. 고랑포 전투6.4. 사단 사령부와 증원6.5. 임진강철교 폭파
7. 주방어선 전투
7.1. 문산 전투7.2. 파평산 전투7.3. 임진강 방어선 붕괴
8. 최후 방어선 전투
8.1. 봉일천 전투
8.1.1. 위전리 방면8.1.2. 문산천 방면8.1.3. 북한군의 야습과 반격
9. 철수
9.1. 행주 도하 작전9.2. 혼란
10. 재집결11. 피해상황
11.1. 한국군11.2. 북한군
12. 평가
12.1. 전투
12.1.1. 대전차 전투
12.2. 후퇴12.3. 종합
13. 여담

[clearfix]

1. 개요

개성-문산 전투는 청단, 연백평야, 개성, 고랑포 일대에서 한국군 제1사단이 북한군 제203전차연대, 북한군 제1사단 및 제6사단과 맞서 싸운 전투이다.

2. 배경

한국군 제1사단이 삼팔선에 대한 최초의 경비대를 파견한 것은 1948년 1월 초순이다. 이 무렵 소수의 미군만이 배치되었던 문산 북쪽 임진강 나루에는 경비의 소홀함을 틈타 북한군의 침범이 잦았던 때문에 당시의 초대 여단장 송호성 준장이 경계강화책으로 보병 1개중대를 출동시켜 미군과 합동 근무케 한 것이 시초이다.

이로부터 한 달 후인 2월 5일에는 이응준 대령이 제2대 여단장으로 부임하고 이해 가을로 접어들면서 주한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사단은 11월에 들어 수원에 위치한 제11연대를 문산으로 추진시켜 삼팔선 경비임무를 미 제7사단 32연대로부터 인수케 함으로써 고랑포 서쪽의 삼팔선 서부방면의 경비를 처음으로 맡게 되었다.

이때 삼팔선 경비란 주요간선도로의 요지에 경비초소만을 설치하였을 뿐 전술적으로 유리한 삼팔선상의 요충지는 그대로 비어둔 관계로 무방비상태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경비상태가 어떠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에 비하여 북한군은 이러한 요충지를 사전에 점거하여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이중에서도 개성시라는 중요 도시가 포함되어있고 지형상 방어정면이 100km이 넘어가며 지형효과도 제대로 못받아서 방어하기 어려우며 자연적인 배수진이 되어 버린 제1사단 담당구역에는 북한군의 소규모 도발 및 국지전이 빈번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육탄10용사로 알려진 1949년 5월 4일의 송악산 전투다. 해당 전투에서 일시적으로 개성시가 북한군에게 포위되기도 했으며 그 후에도 심심하면 박격포 포탄이 개성시를 목표로 날아오기도 했다.

따라서 북한군이 국지적인 도발을 포함한 각종 공격을 가해올 가능성이 높았기에 한국군 제1사단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3. 지형

당시 1사단이 담당한 삼팔선 지역은 예성강을 기준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나누어진다.

두 지역 모두 정도의 차이는 크지만 방어가 불가능한 지역으로 자연적인 배수진이나 마찬가지라서 북한의 전면적인 침공시에는 임진강을 방어선으로 삼아야 했다.

3.1. 예성강 서쪽

파일:벽성군.jpg 파일:연백군.jpg
벽성군 지도 연백군 지도

방어라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며 후퇴도 어려운 지역 그 자체다.

벽성군과 연백군의 삼팔선 이남 지역으로 한국이 점유한 지역은 벽성군 방면으로는 방어가 가능한 고지대가 전혀 없고 연백군 방면도 삼팔선 부근의 155m 높이의 임해산과 365m 높이의 용각산 빼고는 전혀 방어진지로 삼을 곳이 없으며 임해산과 용각산도 고립된 조그마한 언덕에 불과하다. 삼팔선 남쪽에는 그나마 이런 수준의 언덕도 없는 평지가 바다까지 펼쳐진 상태다.

하천의 경우에도 예성강을 비롯하여 화양천, 풍천, 진포천등 주요 하천들이 대부분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방어측이 동서방향으로 이동할 때 장애물이 되며 북쪽에서의 침공에 대비할 수 없다.

주요 교통로는 삼팔선 이북의 해주시와 개성시를 이어주는 토해선 및 병행해서 지나가는 국도가 유일하다시피하며 그나마 예성강을 건너는 교량은 예성강철교밖에 없다. 그리고 토해선은 협궤 단선 철도라 수송량이 빈약한데다가 배천역과 그 인근이 삼팔선에서 수백미터도 안떨어진 곳에 존재하며 예성강철교도 삼팔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므로 유사시에 쉽게 북한군의 침공에 차단된다.

애초부터 방어가 불가능하며 후퇴도 어려운 것이 뻔하게 보이는 지역이므로 연백군에 경찰서를 연안경찰서, 배천경찰서, 청단경찰서의 3곳을 배치하여 삼팔선 경비를 보조하게 했으며 해당 지역의 방어를 담당한 12연대도 제3대대만 파견하여 54km에 이르는 삼팔선 지역중 중요 교통로에 분산해서 경비와 검문을 담당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당지역에 비해 너무 병력이 적어서 청단지역 서쪽은 가끔 경찰이나 순찰하는 무방비지역이 될 정도였고 교통로가 아닌 지역으로 게릴라같은 자들이 수시로 침투가 가능했다.

3.2. 예성강 동쪽

파일:개풍군2.jpg 파일:장단군2.jpg
개풍군 지도 장단군 지도
파일:개성시.jpg
개성시 지도

예성강 서쪽보다는 양호하지만 여기도 개성시에서 밀리면 임진강까지 방어선을 만들 곳이 없다. 그리고 개성시도 지키기가 곤란하다.

예성강 동편에서 경의선이 지나가는 여현을 거쳐 개성시에 이르는 구간은 평야와 개천과 약간의 구릉지대만 존재하는데다가 삼팔선 이북에 해당 지역을 내려다보는 감제고지들이 많아서 방어가 불가능하다. 여현에서 경비 및 검문 목적으로 진지를 건설할 수는 있지만 유사시에 순식간에 포위되면서 집중공격을 받을 것이 뻔한 것이며 실제로도 그렇게 전개되었다.

개성시의 경우에는 488m로 가장 높은 고지인 송악산이 삼팔선 이북에 있다는 것이 치명타였다. 개성 시가지를 둘러싼 산악지대와 개성성 중에서 남아있는 성벽을 활용해서 개성시를 수비해야 하는데 그 중에서 북쪽에 위치한 시설을 전혀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선진지가 송악산에서 쉽게 관측이 가능한 산 중턱의 고지에 설치될 수밖에 없어서 방어작전에 매우 불리했다.

개성시가지와 붙어있고 침공군을 견제할 수 있는 곳에 103m의 자남산이 존재하지만 송악산에서 관측까지 하면서 포격을 날리는 것이 가능한 지역이라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 외에는 204m의 오공산이나 178m의 용수산이 존재하지만 오공산은 서쪽 방어에 적합하지 북쪽 방어에는 부적합하며 용수산도 자남산이나 성격이 비슷한 지역이라서 지연작전이라면 모를까 오래 버틸 수가 없다.

개성 남쪽으로 288m의 덕물산을 비롯한 고지들이 흩어져 있으나 서로 연결되지 않은데다가 북쪽에서 오는 침입을 막기에는 부적합하며 조금만 후퇴해도 한강이 나오기 때문에 지연전을 해도 시간을 많이 버는 것이 불가능하며 후퇴하기도 곤란해진다.

장단군 지역은 상황이 더 안좋아서 진서면과 장도면 사이에 있는 237m의 대덕산은 삼팔선에 너무 가깝게 붙어있고 말 그대로 고립된 곳이라 순식간에 포위당하기 쉽기 때문에 방어목적으로 쓰기가 어렵고 229m의 백학산 정도가 일시적으로 방어할만한 고지다. 그리고 백학산 후방지역은 그냥 임진강을 방어선으로 삼아야 한다. 백학산도 임진강철교같은 중요시설을 폭파처리할 시간을 벌 목적으로 임시적으로 방어하는 지역에 가까우며 오래 버틸 수 없는 곳이다.

고랑포 지역은 임진강이 흐르지만 너무 삼팔선에 가까워서 북한의 전면 침공시 방어가 힘들어진다. 따라서 지연작전후에 임진강 남쪽에 있는 파평산을 주진지로 삼아서 방어해야 하며 본질적으로는 해당 지역과 동쪽은 특성상 근처에 배치된 제7보병사단과 협력하여 침공해오는 북한군을 막아야 한다.

개성시가 방어가 매우 어려운 지역이지만 정치적, 경제적 중요성이 높고 개성에서 밀리면 개풍군 전역이 함락되기 딱 좋으므로 제12연대의 주력인 2개 대대가 개성과 주변에 집결하여 삼팔선 경비를 담당하였으며 장단군 지역은 제13연대가 방어하지만 삼팔선 지역은 경계진지로 하고 임진강을 주저항선으로 삼는 방어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4. 부대 배치 상황

개전 직전 한국군 제1사단에는 제11, 12, 13연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제12연대는 청단군에서 개성시까지 80km, 제13연대는 개성부터 장단군 장남면 원당리까지 20km에 이르는 38선을 경비하고 있었고, 제11연대는 사단 예비로서 수색에 주둔하고 있었다.

방어계획이 변동되기 전에는 총합해서 100km가 넘어가며 동서이동이 극히 어려운 배수진과 같은 불리한 삼팔선을 제1사단이 모든 병력을 투입해서 사수하라는 말도 안되는 수준의 계획같지도 않은 방침만이 수립되어 있었다.

1950년 4월 22일로 백선엽 대령이 제5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곧 사단의 전 지역을 돌아본 뒤 청단에서 고랑포에 이르는 100km의 정면을 방어하기 위한 현행 작전계획이 사단의 방어한계를 초과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곧 새로운 방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북한군의 주공 방향을 고랑포부근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사단의 주 전력을 임진강선으로 전환한다면 방어정면이 20여km로 축소 될 뿐만 아니라 여기서 병력과 화력의 열세를 임진강의 자연장애물로써 보완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래서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시에는 청단, 연백, 개성은 일시적으로 포기하고 임진강을 주방어선으로 삼으면서 방어선 길이를 20km으로 단축한 후 상황이 좋아지면 역습을 통해 다시 삼팔선 이남 지역을 수복한다는 방식으로 방어계획을 변동하게 된다. 만일 상황이 안좋아진다면 임진강 남쪽에 예비진지를 만들어서 최후의 방어를 한다는 계획도 잡아놓았다.

해당 계획은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의 승인을 받았다. 총 3단계로 이뤄진 방어계획의 전면적 수정에 따른 재편성으로 제1사단은 1950년 6월 초까지 진지구축작업을 마치고 임진강철교 폭파도 계획하였다.

5. 개전 직전

5.1. 한국군

한국군 1사단은 제11연대를 사단예비대로 사단사령부와 같이 수색에 배치하고 제12연대를 개성, 연안, 배천에, 제13연대를 문산, 고랑포 일대에 배치하여 38선 일대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1사단은 보유병력에 비해 담당 지역이 넓었기에 38도선의 경계진지에는 최소의 병력을 배치하고 임진강 남안을 좌우로 제2방어선을 지정해 강력한 주력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만일 제2방어선을 지탱할 수 없으면, 봉일천을 좌우로 제3방어선인 예비방어선을 구축해 적의 진출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1사단은 당시 방어계획의 전면적 수정에 따른 진지 재편성으로 인해 교육훈련율이 다른 사단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11,12연대는 겨우 대대전술훈련을 시작한 상태였고 제13연대는 2개 대대가 대대전술훈련의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제1대대는 야외훈련을 위해 자하리 부근에서 야영 중에 있었다.

더욱이 개전 전 북한측이 제기했다가 무산시킨 요인교환의 여파 및 북한군의 공격 징후마저 포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병들은 해이해져 있었다. 이러한 사유로 사단에서는 6월 24일에 보직병력의 약 1/3을 휴가 보내고 나머지 병력의 1/3범위 내에서 외출과 외박을 실시하였다.

결국 6월 25일 개전 당시 총병력의 57%가 부대를 떠난 상태이었으며, 제12연대의 경우 80km에 이르는 방어 구역에 배치된 병력은 8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개전 당시에는 병력의 42%만 가지고 전투를 해야했다.

제12연대 제3대대는 서쪽으로는 청단군 금학리 부근 하천인 읍천에서부터 연안군과 배천군을 가로질러 동쪽으로는 예성강 동쪽의 개풍군 전포리[4]까지 54km 정면에 3개 중대를 일선으로 배치하고 산간소로 5개소에 경찰초소를 설치하여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나 초소간의 간격이 너무 넓어 횡적 연락과 상호지원이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병력을 배치한 구간은 실제로는 39km 정도이며 청단 서쪽지역 11km 정도는 병력이 배치되지 않고 경찰이나 가끔 순찰하는 공백지역이었다.

제12연대 제2대대는 서쪽으로는 예성강에서 개성 시가지 북쪽을 지나, 개성시 운학동 소재 청학동을 거쳐 덕암리와 룡흥리 간의 소반고개까지 20km에 달하는 방어 정면에 3개 중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제13연대는 장풍군 영남면 대원리[5]에서부터 소반고개 - 판문점 - 두매리 - 조금리 - 고랑포리 - 원당리에 이르는 구간을 경비하고 있었다.

또한 방어계획 수정으로 보유차량의 대부분을 육군본부 계획에 따라 대규모 수리 및 정비를 위해 기지창으로 이동조치 되었으며, 제11연대의 경우 60mm 박격포81mm 박격포를 비롯한 대부분의 공용화기를 부평의 병기대대로 후송한 상황이었다.

남아있는 공용화기의 수준도 별로 좋지 않았다. M3 105mm 경곡사포는 본래 공수부대용 경량화포로 사정거리가 짧아서 북한군의 대포병사격에 취약하였으며 57mm 구경의 M1 대전차포는 원래 영국의 6파운더 대전차포의 라이선스 생산형으로 이미 2차대전 후반부터 관통력의 한계점을 드러내던 무기였으며 6.25 전쟁시기에는 미군이 관통력 좋은 분리철갑탄은 명중률 낮다고 라이선스 생산을 안하고 기존의 철갑탄은 경사장갑에 명중시 탄자붕괴가 일어나서 포탄이 장갑을 못뚫고 깨지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나마 한국군에게는 고폭탄만 많이 지급했지 철갑탄은 매우 부족하게 주는 등 대전차포로 쓰기에는 문제가 매우 많은 상태였다. 운용요원도 대전차포 사용훈련을 제대로 못받았고 전차라는 것을 전쟁이 터져서야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대다수일 정도니 대전차포를 대전차 용도로 사용하기 곤란했다. 따라서 사실상 보병포로 사용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나마 M1 카빈M1 개런드같은 제식 소총M1918 브라우닝같은 경기관총은 삼팔선을 수비하는 사단답게 제대로 장비하고 있었으나 2.36인치 바주카로 불리는 60mm 구경의 M9A1 바주카는 기본적인 관통력이 80mm 급이라 성능이 애초부터 부족하였고 포탄의 구조적 문제로 경사장갑에 착탄시 도탄된 후 발화하여 메탈제트가 허공으로 날아가서 그나마 부족했던 성능도 크게 하락하는 상태였다.

수비병력이 적으며 수비도 곤란한 지역인지라 육군본부에서는 수도경비사령부의 이종찬 대령의 휘하에 있는 독립기갑연대의 유흥수 대령에게 지시하여 박도경 대위가 지휘하는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9대로 구성된 기갑 1개 중대를 동원해서 1950년 5월 25일부터 1개월 정도의 예정을 잡고 개성, 배천, 연안, 청단지역을 순회시켰다. 이러한 행위를 한 이유는 북한군에 대한 무력 시위겸 주민들의 불안을 해소시키기 위함이었으나 이미 제대로 된 전차를 다수 보유한 북한군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그리고 후술할 오인 사건을 발생시키는 등의 부작용도 터졌다.

거기에 4월 22일 부임한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부대사정을 소상히 파악하기도 전에 6월 14일부터 시흥 소재 보병학교로 이동해 고급간부 재훈련교육을 받고 있었기에 최경록 제11연대장이 대리 근무를 하고 있었으며 그나마 24일에는 용산의 육군회관 낙성식에 사단장 대리인 최경록 대령과 제13연대장 김익렬 대령등 많은 간부가 참석하여 외출중이었다.

5.2. 북한군

본래 한국군 제1사단을 상대하던 북한군은 38선 제3, 제7경비여단이었지만, 6월 23일 기동훈련을 핑계로 하여 북한군 제1보병사단이 남천에 배치되었으며, 중공군 제166사단과 독립군 제4사단이 모태로 편성된 북한군 제6보병사단이 사리원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이들 2개 사단이 해당 방면의 침공군 주력이 된다.

북한군 제6사단은 구화리로, 제1사단은 고랑포, 적성 방면을 주공으로 일거에 개성 연백지구의 아군을 공격 분산시키고 수도를 점령함으로써 아군의 한강이남 후퇴를 차단, 일대격멸작전을 감행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북한군 제6사단이 옹진반도 전투를 비롯한 조공에 상당수의 병력을 투입했는데도 개성시를 비롯한 경의선과 경의가도를 공격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북한군 1사단은 고랑포와 적성 지역같은 우회로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는데 전면전이 발생하면 한국군이 임진강철교를 폭파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전차등 중화기가 임진강을 건너는 길이 막혀버리므로 도하가 상대적으로 손쉬운 임진강 상류 지역과 아예 도하가 필요없는 부근을 북한군 제1사단이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북한군 제6사단은 광범위한 면적에 대해 조공을 실시하고 도하작전을 하거나 주변 섬에 상륙하고 최종적으로는 한강 남쪽에서 한국군을 포위하는 작전도 해야 하므로 소련군에게서 지원받은 도하장비를 집중시켰기 때문에 약간의 전차와 소수의 보병 정도는 해당 장비를 이용해서 임진강을 도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임진강철교가 박살나도 병력을 어느 정도는 임진강 남쪽으로 계속 투입할 수 있었기에 북한군 6사단이 선택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북한군 6사단은 사단장인 방호산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모두 비정규전 전문가이고 실전경험도 풍부했으므로 한국군이 개성시에 깔아놓은 벙커같은 방어시설을 우회해서 침투하여 목표를 함락시킬 것으로 기대를 받고 있던 상태였다.

북한군의 배치현황을 보면 북쪽의 137고지로부터 서쪽으로 282고지(대원리) - 송악산 - 325고지(배천) - 120고지(연안 북쪽) - 98고지(청단 북쪽)등을 연하는 38도선상의 지형을 따라 진지를 편성하였으며 개성시가를 완전히 감쌀 수 있는 송악산과 그 주변 고지에 벙커를 구축하는 한편, 제1, 제2, 제3 경비여단 후방 남천에는 북한군 제1사단을 배치하여 제1, 제2, 제3연대와 포병연대를 두고 있었다.

북한군 제1사단 및 제6사단의 병력은 도합 21,000명 내외이며 장비는 122mm M-30 곡사포 24문, 76mm ZiS-3 사단포 72문, 45㎜ 53-KM-42 대전차포 168문, 그 밖에 그들의 총사령부 직할의 제105기갑여단에서 지원된 제203전차연대의 T-34-76T-34-85 전차 40대와 SU-76M 자주포 32문이 이들 사단의 지원거리내에 집결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북한군은 전쟁 전에 세워놓은 작전계획에 따라서 북한군 1사단은 동두천, 포천방면으로 침공하는 다른 북한군 사단과 협력해서 한국군을 압박하면서 서울과 주변지대인 한강 이북에 묶어놓으면서 계속 전진해서 서울을 개전 2일째에 함락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북한군 6사단은 개전시 광범위한 조공업무를 담당함과 동시에 개성시를 함락한 후에는 김포군의 김포반도에 주력을 상륙시켜서 춘천-홍천 전투의 북한군 제2군단이 담당한 임무와 같이 한국군을 한강 북쪽에서 포위해서 섬멸하는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게 된다.예시

6. 개전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경, 서울에 있던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사단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전화를 받았다. 개성 지역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1사단개성-문산 전투고랑포 전투, 봉일천 전투를 치르게 되었으며 이후 김포반도 전투한강 방어선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6.1. 청단 - 배천 철수

파일:제12연대_제3대대의_배치.gif
제12연대 제3대대의 방어지역

제12연대 제3대대의 개전 직전 배치상황은 3개 중대를 삼팔선 근방 진지에 직선으로 배치하는 구조였다. 제3대대장인 이무중 소령은 좌측 청단 - 대흥리에 제11중대, 중앙 대흥리 - 포운리에 제10중대, 우측 포운리에서 예성강까지는 제9중대를 배치하여 39km에 도달하는 선형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대대본부는 연안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청단 이서방면의 11km 정도는 병력이 배치되지 않고 경찰이나 가끔 순찰하는 공백지역이었다.

북한군도 해당 지역의 특성에 맞게 38경비 제3여단을 주력으로 한 3개 대대 병력을 개전 직전에 배치했다. 서쪽의 청단지역은 한국군이 방어하지 않는 공백지역까지 있는 관계로 가장 취약한 지점이라고 간주되어 북한군 6사단에서 지원받은 치안대대라는 임시부대를 배치했고 중앙의 연안 지역은 제3대대를 배치했으며 동쪽의 배천 지역은 제1대대를 배치했다. 지원화력은 제3여단이 자체적으로 보유한 박격포와 소형 야포를 제외하면 없다시피 했다. 비록 북한군이 담당한 다른 지역보다는 병력의 숫자나 중화기의 질이 낮았으나 그래도 한국군 1개 중대에게 북한군 1개 대대가 공격하는 식이라서 전력의 우위는 명백했다.
파일:청단연백철수.jpg
제12연대 제3대대의 지연전과 분산철수상황

제12연대 3대대가 지키는 청단에서 예성강 서안까지의 삼팔선 지역인 54km 구역으로 공격을 개시한 북한군은 공격준비사격을 하지 않고 은밀히 접근하여 기습적인 사격을 가하였다. 또한 동시에 대남방송을 통해 투항을 권고하였다. 북한은 12연대를 향해 이미 의정부와 개성이 함락됐다는 방송을 하는 등 심리전을 하였다.

구체적인 각 중대의 초기 전투상황은 다음과 같다. 오전 4시 30분에 제11중대 제3소대장 박규송 소위가 기관총 소리가 들리자 각 분대장에게 경계를 강화토록 지시하였다. 얼마 후 총성이 멎더니 확성기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북한군은 의정부와 개성이 이미 점령당했고 너희들은 포위되었으니 손들고 투항하라는 식의 거짓으로 점철된 대남방송을 펼쳤다. 얼마 뒤 교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제3소대는 오전 7시 30분에 중대본부로 철수하였다. 제3소대는 중대장 한보석 중위로부터 대대본부가 있는 연안으로 출동하라 명령을 받았지만 이동 과정에서 철수중인 화기소대를 만나 이미 연안이 점령되었다는 말을 듣고 방향을 돌려 중대와 다시 합류해서 용정리로 철수하였다.

제9중대의 경우에는 새벽 3시에 예성강에 보낸 정찰대로부터 북한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으며, 오전 4시 30분에는 제2소대로부터 적의 포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에 중대장 김두열 대위가 예비소대를 치악산 방면으로 파견했지만 이미 치악산을 선점한 북한군의 박격포 공격에 철수하였다.

날이 밝자 제9중대장에게 배천경찰서에서 배천경찰서장이 전화를 걸어서 같이 투항하자고 연락이 왔지만 중대장은 욕설을 하면서 이를 무시하였다. 이후 해당 연락 또한 북한군이 배천경찰서를 점령하고 배천경찰서장을 사칭해서 전화하는 식의 심리전이었던 것으로 밝혀진다.

연안의 제3대대 본부와 제10중대는 북한군이 침공했다는 보고에 따라 비상령을 하달하고, 연안경찰서와 협조해 사이렌을 울려 영외 거주 장병, 외출 장병, 그리고 비번 근무중인 경찰까지 빠르게 소집하였다. 제10중대장 조기백 중위는 오전 5시에 제1소대를 출동시켰지만, 삼팔선 부근의 207, 209고지를 선점하고 있던 제2, 제3소대는 이미 북한군의 포격과 공세로 인해 밀려난 상황이었다.

북한군이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하면서도 화력을 동원하기보다는 심리전을 병행하면서 박격포 공격을 포함한 보병전을 전개한 이유는 이미 한국군도 소수의 병력만 배치한 것을 잘 알고 있는데다가 더 중요한 지역인 서울 진공등에 주력을 할당했기 때문에 38선 경비여단을 주축으로 한 2선급 병력 위주에 북한군 1사단이나 6사단의 지원부대가 소수 참여하는 수준으로 해당 지역의 공격부대를 편성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워낙 숫자와 화력에서 압도적으로 북한군이 강한 상태였고 해당 지역 특성상 방어는커녕 후퇴하기도 곤란하여 12연대 3대대는 처음부터 토막으로 분단된 채 지연전을 펼치다 각자 독자적인 판단으로 사실상 분산철수하기 시작했다. 철수명령이 내려지긴 했지만 명령을 제대로 전달할 수단이 부족했기 때문에 각자의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우선 제3대대 부대대장 박관영 소령은 제9중대에게 강화도로 철수하라고 명령을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예성강철교 방면 상황은 질문하지도 않았는데 배천경찰서에서 항복권유 전화가 올 정도면 이미 토해선이고 예성강철교건 간에 모두 적에게 점령당했거나 가는 길이 차단당한 것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3대대장은 군대와 민간인의 철수를 위해 연안읍 북쪽에 바로 붙은 비봉산을 확보하여 시간을 벌려고 하였지만 이미 북한군이 함락시킨 후였다. 오전 10시에 대대는 철수를 시작하였고, 오후 1시에 석포에 도착하여 어선으로 강화도로 철수하였다. 제11중대는 교동도로 철수하였으며 대대의 일부 병력은 인천으로 철수하였다.

이미 배천이 개전 1시간만에 완전히 함락되면서 토해선이 절단되고 예성강철교가 함락되면서 육로로 개성이나 문산으로 철수할 길이 막혔으므로 분산된 병력은 해안선까지 도달한 후 현지에 있는 어선을 타고 분산철수했으며 일부 병력은 용매도 → 청룡반도 → 백석포 → 강화도 → 김포반도라는 긴 경로를 통해 최종적으로는 김포반도를 방어하는 부대에 편입되거나 인천으로 철수하였다.

지역 특성상 방어는커녕 빠져나가기도 곤란한 곳인데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병력이 무사히 철수한 것을 보면 문서상으로 만들지만 않았지 각 부대와 장병들이 유사시에 쓸 철수로와 후퇴수단을 각자가 알아서 미리 확보하거나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그냥 무작정 해안선으로 간다고 어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선에 탑승했다고 해도 선박을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철수가 제대로 이루어진 편이었다.

하지만 워낙 급박한 상황인지라 중화기와 보급품등 당장 쉽게 이동시킬 수 없는 것들은 현지에 버리고 소총과 개인장비 수준의 장비만 들고 철수했으며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포위한 진지같은 경우에는 빠져나가지 못해서 괴멸당한 것도 모자라서 현재까지도 해당 진지를 수비하던 병력이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는 경우까지 존재한다. 그리고 철수 과정이 조직적이지는 못했으므로 철수 과정에서 일부 병력이 낙오되었다.

6.2. 개성 철수

파일:개성철수.jpg
제12연대 주력의 개성지역 지연전 및 철수상황

개전 직전에 개성방면의 제12연대는 제2대대를 삼팔선 경비로 하고 제1대대를 연대 예비로 편성했다. 제12연대 제2대대는 예성강 동안에서 제13연대가 있는 대원리까지의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제5, 제6, 제7중대 순서로 배치한 상태였다. 그리고 5중대 후방 4km에 있는 103고지에 제1대대 제1중대 제1소대가 배치되었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6월 23일로 예정되었던 대한민국과 북한간의 요인교환시 한국으로 올 예정이었던 조만식을 경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현역 부근의 경의선 철도를 경비하려고 2개 소대를 배치했던 것이나 요인교환이 무산되면서 1개 소대는 원래 위치로 돌아가고 1개 소대만 남아있던 것 때문이었다.

북한군은 개성 방면에 북한군 6사단의 주력을 집중시켰는데 옹진반도 전투에 파견나간 제1연대를 제외한 모든 병력을 투입했다. 구체적으로는 예성강 동안과 경의선 방면은 제15연대가 담당하고 개성 북방은 제13연대가 담당한다. 지원세력으로는 북한군 제6사단의 포병연대 전부와 제203전차연대에서 지원받은 전차의 대다수를 투입했다.

북한군의 구체적인 작전계획은 제13연대가 개성의 북쪽을 직접 공격하는 사이에 경의선 방면의 제15연대가 빠른 돌파를 한 후 경의선 철도를 이용해서 개성역에 병력을 투입함으로서 예성강 서쪽방면의 교통을 차단하고 한국군 제12연대의 주력을 개성에서 포위해서 섬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해당 작전을 위해 미리 게릴라와 편의대를 개성 시가지에 잠입시켰다.

북한군이 이렇게 양동작전과 반포위작전을 설정한 이유는 개성시가 방어상의 불리함은 있으나 중요 도시인데다가 삼팔선 이남의 중요 고지와 요점마다 한국군이 벙커, 토치카, 유개호를 건설해두었기 때문에 힘으로만 밀어붙이다간 시간낭비와 희생만 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개성시를 함락한 이후에도 김포반도를 점령하고 한강 남쪽을 장악해서 한국군을 서울 근방에서 포위하는 중대한 임무를 해야 할 북한군 6사단의 입장에서는 개성시에서 시간을 끌거나 큰 손해가 나면 안되므로 양동작전과 반포위작전을 설정한 것이다.

새벽 4시에 포성에 잠을 깬 제2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작전장교에게 교전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대대장은 먼저 연대장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각 중대장에게 현 진지 고수명령을 내렸다. 이때 개성시가지에도 포탄이 낙하하여 시내가 혼란에 휩싸였다. 그리고 제12연대장 전성호 대령도 2대대 한순화 대대장에게 송악산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잠시뒤, 북한군 제6사단 15연대는 전차 5 ~ 6대를 앞세우고 국도 제1호선을 따라 한국군 제12연대 제2대대가 방어하고 있는 개성시내로 진격하였다.

같은 시각, 개성 시내의 만월국민학교에는 24일 밤 11시쯤 국군복장으로 위장한 북한군 1개 대대 병력이 야영을 하고 있다가 밤이 깊어지자 시내를 돌아다니며 우익인사들을 색출하고 있었다. 이들은 본대 공격시간에 맞춰 후방공작을 수행하기 위해 이미 개성으로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만월국민학교는 개성경찰서에서 불과 40여m 정도만 떨어진 곳이지만 이를 막아야 할 한국군은 당시 휴가나 외출한 경우가 많고 개성경찰서도 당직근무중인 20여명 밖에 없어서 경찰서 수비에도 인원이 모자르므로 사실상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개성 시가지 내부에 북한측 게릴라가 이미 진주한 상태라 유사시에 한국군이 시가전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려현역과 인접한 개풍군 여현리 일대를 경비하던 12연대 제2대대 제5중대는 경의선과 경의가도라는 중요 교통망을 담당하는 관계로 인해 1개 대대규모의 북한군에게 기습을 받아 분산되고 연락선이 차단되었다. 살아남은 병력도 개성이 함락됨을 확인하자 곧 소대 단위로 분산철수하였으며 일부 병력은 북한군에게 진지째로 포위된 후 더 이상의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제5중대 남쪽에 있던 제1중대 제1소대도 전투태세를 갖춘 후에 경의선과 경의가도로 밀려드는 북한군에게 사격을 가했으나 순식간에 밀려드는 북한군의 역습에 분산철수를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경의선과 경의가도 일대에는 북한군의 포탄이 날아들고 있었으며 전투 전에 위급상황을 알리기 위해서 1소대 선임하사관이 탑승한 개성행 열차도 포탄을 맞고 중간에서 정지한 상태였다.

개성시 서쪽이 이렇게 순식간에 뚫리면서 개성시 서쪽 4km에 위치한 명륜동 삼거리의 헌병검문소에 북한군의 전차 3대가 금천 방면에서부터 전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여기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한국군 헌병이 북한군 전차를 바로 전날인 6월 24일에 서울로 철수한 한국군 독립기갑연대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로 오인하고 검문소를 통과시켜주었으며 북한군 전차도 한국군인 척 하고 2대가 검문소를 조용히 통과한 후 마지막 전차가 본색을 드러내서 한국군 헌병을 불시에 기관총으로 사격하면서 검문소 건물을 들이받아 붕괴시켜서 건물 안에서 잠을 자던 나머지 헌병들도 압사했다. 이들 북한군 전차의 임무는 근처에 지나가던 경의선과 경의가도를 확보해서 한국군의 탈출을 막고 철도를 통한 북한군의 돌입을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송악산 남쪽 무명고지에 배치된 제2대대 제6중대는 북한군의 공격준비사격이 시작된지 얼마지나지 않아 중대장 백원담 중위가 전사하여 병력은 소대 또는 분대단위로 분산되었다. 병력이 분산될만한 상황에 놓인 이유는 중대장 전사 외에도 집중 포화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 통신기기가 파괴되었으며 안개로 인한 시계제한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7중대장 김영선 중위는 새벽 3시에 북한군 진지에서 200m 정도 수준으로 근접한 위치인 비둘기고지에서 총격전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고 현황을 살펴보았다. 중대장이 돌아서려고 할 때,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중대장은 지휘를 위해 관측소로 향했지만 이미 북한군이 인공기를 꽂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에 중대장이 본부요원에게 철수를 준비시키고 대대본부에 보고하자 대대본부가 위치한 자남산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는 오전 7시경에 방어진지를 지탱하지 못하고 오전 9시경에는 제2대대 전술지휘소가 위치한 개성시 선죽동 자남산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송악산 지역 고수에 실패하고 철수중인 대대장과 일부 병력은 문산으로 이동중인 제5중대 잔여병력과 만났다. 대대장은 낙오병과 함께 연대본부로 이동했으나 이미 본부 방향에서 화염이 치솟고 있어 다시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38선에서 고작 1km 떨어져있던 개성소년형무소도 새벽 3시경 근처에서 총성이 울리더니 곧이어 북한군이 건물을 포위했다. 이윽고 북한군과 교도소를 지키던 교도관들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교도관들은 북한군의 여러차레 공격을 격퇴하며 선전했다.

이렇게 개성시 북방 정면에서 한국군의 삼팔선 방어 진지들이 붕괴되고 있던 시기에 경의선 철도가 있는 여현 방면을 돌파한 북한군은 토해선과 경의선이 만나는 지점인 토성역을 강습하여 철도특별사법경찰대와 역무원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함락시키고 예성강 서쪽 방면의 교통을 차단함과 동시에 개성시를 서쪽 측면에서도 공격하는 협격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당시에 북한군 6사단은 경의선 철도를 몰래 보수한 후 객차 1량당 140명씩 탑승한 객차 8량 및 전차와 야포를 탑재한 화차를 추가해서 편성된 열차 1개 편성을 투입해서 토성역 함락 후에 바로 개성역으로 돌진시키는 전술적 승부수를 던졌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삼팔선이 성립될 당시 경의선 선로를 완전하게 절단해놓지 않고 단지 그 위에 흙과 자갈을 쌓아서 안전측선같이 열차가 다니지 못하게 하기만 했으므로 쉽게 보수 및 복구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철로 분기기가 설치된 토성역을 순식간에 함락시킴으로서 원래 복선 철도인 경의선 철도를 모두 제대로 이용가능했으므로 앞서 한국군 제12연대 제1대대 제1중대 제1소대가 위급상황을 알리려고 보냈다가 북한군의 사격을 받고 격파당한 개성행 열차를 우회해서 열차를 개성역으로 쉽게 보낼 수 있었다.

북한군의 승부수는 제대로 작동했고 당시 개성에 체류하고 있었던 주한미군사고문단 소속 다리고(Joseph R. Darigo) 대위가 개성을 탈출한 후 해당 기습을 증언할 정도로 한밤중의 홍두깨같은 습격이기도 했다. 그러나 개성역에서 철도특별사법경찰대 소속 감봉룡 경감 지휘하의 50명이 개성역 옆의 철도대 건물을 사수하는 바람에 건물을 포위한 후에 T-34 전차 5대의 지원하에 집중공격하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여 생각만큼 효과가 매우 크지는 않았다.

철도특별사법경찰대의 전투는 헛되지 않아서 잠시동안이지만 개성역에 남아있던 열차 중 일부가 남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북한군이 개성시가지를 빠르게 확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중과부적 상황이며 불리한 위치까지 합해진 경우라서 철도대 건물은 6월 25일 8시에 붕괴되고 8시 30분에는 방공호로 대피한 철도경찰의 잔여 병력이 집중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최후의 돌격을 한 끝에 전멸하면서 개성역이 8시 30분에 완전하게 함락되었으나 한국군 제12연대 주력을 포위할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1#2#3

한편 제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은 6월 25일 오전 9시쯤 국도 제1호선이 차단되기 전에 임진강철교를 통해 철수하기로 결심하였다. 때마침 제2대대는 개성 북쪽 일대에서 병력을 수습하며 제1대대가 배치된 개풍군 고남리로 철수하고 있었다. 철수중이던 제2대대장과 만난 전성호 연대장은 제1대대장과 제2대대장과 같이 만나서 사후대책을 논의한 후 연대본부 및 제1대대가 철수할 수 있도록 제2대대가 시간을 벌으라고 명령하였다.

연대 예비인 제1대대가 손실 없이 보존되어 있어 즉각적으로 반격이 가능한 데도 불구하고, 기습을 당해 와해되어 철수중이던 제2대대에 연대장이 왜 이와 같은 임무를 부여했는 지의 의문은 공식적으로는 풀리지 않은 상태이나 정황상으로는 이미 사실상의 설명이 존재한다.

원래 제12연대는 북한의 전면적인 침공이 있을 경우에는 지연전을 펼치면서 가급적 많은 병력을 임진강 남안으로 보내서 주방어선인 임진강 방어선을 강화해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연전보다는 최대한 많은 병력과 장비를 임진강 방어선에 투입해야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 이유는 새로운 방어계획에 따라서 방어선이 임진강을 방어선으로 하는 20km 정도로 줄어들었으나 당시 미군 교범상 1개 사단이 감당가능한 방어선 길이가 10km 이므로 방어선 길이가 아직 제1사단이 감당하기에는 매우 긴데다가 사단 예비인 제11연대가 임진강 방어선에 배치될 시간도 벌어야 하고 우측의 제13연대 방면도 지원군을 보내야 하니 제12연대 입장에서는 최대한 많은 병력을 보내야 하며 그것도 편제가 완편된 부대를 임진강 방어선으로 보내는 것이 매우 중요해진 것이다.

따라서 개성시를 포기하는 결정을 내리는 순간 연대 예비인 제12연대 제1대대를 손실없이 임진강 방어선으로 빠르게 보내는 것이 중요 목표가 되며 그 동안의 시간을 벌기 위해 지연전을 수행하면서 손실을 볼 병력으로는 이미 손실을 입은 제2대대가 적당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사실 제1대대도 제대로 된 병력이 아니었다. 6월 24일 오후부터 장병들의 외출과 외박으로 일부 병력만 남은 상태라서 완편상태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급박한 철수로 인해 당장 이동불가능한 장비를 파괴한 후 소총과 개인화기 정도만 가지고 있었으니 실질적으로는 제2대대와 비슷한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전성호 대령의 과거 업적과 인품도 매우 좋은 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국민혁명군에 복무하면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 독립투사였고, 1945년 해방 때 귀국해 53세라는 나이에 소령으로 임관하였다. 이후 제18연대 부연대장을 거쳐 제12연대장으로 임관해 서부의 요충지인 개성의 경비를 맡았다. 따라서 실전경험이 풍부하며 어려운 싸움을 해본 군인이었으며 후퇴시에 군인가족들에게 차량을 투입해서 빨리 피난시켜야 한다는 참모들의 요청을 개성시 주민들도 피난 못시켰는데 그런 말이 나오느냐고 질타할 정도의 훌륭한 인품도 지녔다. 따라서 제2대대의 지연전 투입은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평가받는다.

전성호 연대장은 군수주임과 근무중대장에게 후방으로 수송이 곤란한 연대 탄약고의 탄약을 폭파하라고 지시한 후 곧 연대본부와 직할대 및 제1대대를 지휘하여 고남리를 떠났으나, 이동 중 차량사고로 후송되고 후임으로 김점곤 중령이 부임하게 되었다. 연대본부와 직할대 및 제1대대는 문산리까지 후퇴한다. 폭파를 담당한 연대 탄약고 요원들도 무사히 탄약고를 폭파시킨 후에 차량을 이용해서 임진강철교를 건넌다.

한편 연대본부가 철수할 때까지 지연전을 명령받은 12연대 제2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제1중대와 특공대를 편성하여 개성 남대문에서 추가적인 남하를 위해 대열을 정비하려고 대기 중인 북한군을 오전 10시에 기습하여 큰 타격을 주었으나 북한군의 반격을 받고 분산철수하여 개성시 남쪽에 있는 중화초등학교에 재집결했다.

그 이후에는 대송리까지 후퇴한 후에 한강을 건널 때 중화기를 수송할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되어 박격포는 포신을 수류탄으로 박살내고 기관총은 완전히 분해해서 도로변 논바닥에 묻은 후에 오후 5시에 영정포에서 어선에 탑승하고 한강을 건너서 김포반도의 강녕포[6]로 도하하여 오후 7시에 통진에서 재편성 중 26일 오전에 급편된 김포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되었다.

한편 국군이 모두 철수한뒤에도 개성시내에서는 여전히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바로 개성소년형무소에 있던 교도관들이다. 이들은 우학종 소장의 지휘아래 북한군이 교도관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붙잡고 요구한 항복도 거부하고 여러차레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며 오후 1시까지 항전했지만 수적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교도소가 함락되고 교도소장 우학종 소장은 자결한다. 개성소년형무소가 함락되면서 개성은 완전히 북한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결국 개성시는 3시간만에 사실상 함락되고 만것이다

6.3. 고랑포 전투

파일:고랑포전투.jpg
고랑포 전투 상황도

한국군 제1사단 제13연대 제3대대가 삼팔선에서 고랑포에서 지연전투를 수행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항목을 참조하길 바라며 여기서는 한국군 제1사단이 삼팔선에서 벌인 전투 중에 가장 성과가 좋은 전투였다고 간단하게 언급한다.

6.4. 사단 사령부와 증원

6월 25일 오전 7시에 시흥의 보병학교에서 교육중이던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으로부터 북한군이 남침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사단장은 급히 차편을 얻어 용산의 육군본부에 출두하였다.

백선엽 사단장은 미 고문관 로크월 중령과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과 함께 수색에 위치한 사단사령부에 돌아와서야 개전 당시 1/3의 병력이 자리에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해당 상황은 제11연대도 마찬가지였으므로 백선엽 사단장은 최경록 대령에게 병력이 집결되는대로 전방에 투입시키도록 지시를 내렸고, 참모장 석주암 대령에게 문산에 사단 지휘소를 설치하도록 하였으며, 다시 정오에 파주로 지휘소를 옮겼다.

오후 2시에 제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이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은 채 사단 본부에 방문하여 기습공격으로 연대가 조기에 와해되고 제3대대의 상황을 알 길이 없다고 하자 백선엽 사단장은 전성호 대령을 후송 조치하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의 명령을 받고 보병학교와 육군사관학교의 병력으로 편성된 서울특별연대가 증원병력으로 때마침 도착하였다.

백선엽 사단장은 육사교도대를 제13연대에, 보병학교 교도대를 제11연대에 재배속시켰다. 그리고 조금 뒤 역시 총참모장의 명령을 받은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이 예하 제3대대의 지원 소식을 알렸다. 당시 전주에 있던 제3대대는 이동 도중 전투기의 공격을 받자 열차에서 내려 금촌 북쪽까지 행군하였다.

사단장은 우일선은 파평산을 확보해 저지할 수 있지만 좌일선의 경우 문산 돌출부라는 조건 때문에 서측방의 위협이 증대될 것이며 도하를 시작하면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제15연대 제3대대에게 금촌 북쪽의 고지군을 점령해 방어하도록 명령하였다.

오후 4시 30분에는 제1사단 지역으로 도착한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대전차포 1개 중대를 문산에 배치하고 장갑소대에게 정찰임무를 전담시켰다. 해당 장갑소대는 M8 그레이하운드를 보유하고 있지만 장갑차의 37mm 주포로 북한군 전차를 상대하라는 것이 아니라 장갑차의 무전기와 서울 용산에 위치한 독립기갑연대의 무선소와의 연결을 통해 전장의 상황을 알리고 신속하게 명령을 받기 위함이었다. 애초에 37mm 주포는 본질적으로 M3 37mm 대전차포의 파생형이라 6.25 전쟁 시점에서는 장갑관통력이 너무 약해서 동급 장갑차가 아니면 대전차전이 불가능하기도 했다.

오후 5시에는 백선엽 사단장의 명령을 받은 제15연대 제3대대가 용산까지 진출했다.

한편 광주에 위치한 제20연대는 백운산의 공비토벌 명령을 받고 이동중인 예하 제3대대를 서울로 돌렸으며, 제3대대는 6월 26일 문산에 도착하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한국군 제1사단이 당시의 혼란한 상황에 비하면 증원병력을 많이 받았는데 여기에는 2가지가 원인으로 지목된다.

첫번째는 너무 쉽게 개성시가 함락당하고 제12연대가 와해수준의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비록 북한의 전면적인 침공시 청단, 연백, 개성은 포기하기로 했지만 청단이나 연백과는 달리 개성시와 근방은 개성시 주변의 산악지대등을 이용해서 토치카와 유개호를 만들어두었으며 그 동안의 북한군과의 국지전을 통해서 북한군이 어떤 공격루트를 따라서 공격할 지 어느 정도는 감을 잡은 상태였고 장병들도 실전경험이 있던 상태였다. 따라서 청단과 연백을 포기한 제12연대 3대대가 제12연대 주력과 합류한 후 개성을 2 - 3일 정도 수비하면서 지연전을 펼치다가 천천히 임진강까지 후퇴하면 그 동안 한국군 제1사단의 주력이 임진강 방어선에 제대로 배치된 후 탄탄한 방어선을 만들 것이므로 방어가 수월하리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제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이 보고한 것에 따르면 이미 제3대대는 소재파악도 안되는 완전붕괴상태고 제2대대도 대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사실상 제12연대는 붕괴상태나 마찬가지며 북한군이 순식간에 개성시를 점령한 상황인지라 시간벌이도 제대로 못한데다가 북한군의 전력이 국지전때와는 매우 다른 수준이라는 것을 순식간에 파악할 수 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임진강 방어선을 확보하는 것도 어려워지므로 빠르게 대량의 증원이 필요하게 된다.

두번째는 서울을 위협하는 북한군의 진정한 주공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기존의 관념대로 경의선과 경의가도가 지나가는 서울 - 개성간 통로를 당시의 한국군 수뇌부가 더 중시했다는 것이다. 사실 일제강점기 시절때만 하더라도 해당 관념이 맞았으나 미군정 시절에 군용 트럭의 원활한 이동을 위해 3번 국도경원선을 보수해놓았기 때문에 한국군 제7보병사단이 수비하는 동두천 방면과 포천 방면이 오히려 큰 강을 건널 필요도 없고 의정부 회랑을 통해 서울을 직공하는 루트로 새롭게 떠오른 것이다. 이걸 북한군은 제대로 파악하고 북한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을 투입했으며 한국군 제7사단은 해당 공세를 힘겹게 막고 있었지만 해당 소식이 아직 한국군 수뇌부에게 제대로 전달이 안된 상태였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한국군 제1사단은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신속한 증원을 받고 주저항선으로 설정한 임진강을 방어하는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6.5. 임진강철교 폭파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은 개성지구의 제12연대 일부 병력이 임진강철교를 통해 철수한 상황을 확인한 후 백선엽 사단장에게 철교 폭파를 건의하였다.

제1사단 공병대대장 장치은 소령은 백선엽 사단장의 철교폭파 준비명령이 내려지자 대대 작전과장 정극서 대위로 하여금 폭파계획을 시행하도록 지시했다. 정극서 대위는 제3중대의 주둔지로 이동해 중대장 김동일 대위를 찾았으나 행방이 묘연하자 직접 폭파를 지휘하기로 했다.

정극서 대위가 교각에 폭약을 설치하고 대기하였는데 대대장 장치은 소령이 폭약설치상태를 점검한 후에 비겁하게 차안(임진강 남쪽) 교각에 폭약을 설치했다고 비난하고 즉시 대안(임진강 북쪽) 교각에 폭약을 다시 설치하라는 정신나간 명령을 지시하여 다시 대안쪽 교각에 폭약 설치를 마치고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사단이나 대대로부터 폭파명령이 오지 않자 제12연대의 철수 후 폭파하기로 결정했다.

그 뒤 제12연대의 주력이 통과하자 폭파 시기가 왔다고 믿고 폭파조에게 남쪽 철교인 경의선 철도를 폭파하도록 명령했다. 남쪽 교량을 성공적으로 폭파하고 인도교 겸용으로도 사용하는 북쪽 교량도 폭파하려고 했으나 남쪽 교량의 폭파 후폭풍으로 인해 배선이 끊어졌는지 실패했다.

정극서 대위는 폭파병에게 다시 배선을 연결하고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폭파 과정에서 이미 제12연대 병력을 따라잡은 북한군이 견제사격을 뿌려대는지라 결국 폭파에 실패하였다. 애초에 처음부터 차안에 폭약을 설치했으면 배선을 다시 연결할 수 있었겠지만 북한군의 유효사격범위에 들어가는 대안에 설치된 폭약에 근접하는 것 자체가 위험했고 여유분의 폭약도 없다시피했으며 상황도 위급했고 시간도 부족했다. 게다가 폭파를 실패한 것을 파악한 것도 북한군이 임진강철교를 사용하는 것을 나중에 관측했기 때문에 알아낼 수 있던 것이지 당시에는 북한군의 사격 때문에 정극서 대위와 폭파조는 후속 폭파 상황을 확인하지 못하고 철수해서 폭파 성공여부가 불확실하기까지 했다.

신기하게도 이 시점까지도 북한군 전차는 임진강 돌출부에 나타나지 않았다. 북한군은 애당초 남침계획을 수립하면서 한국군이 반드시 임진강철교를 폭파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전차를 국도 제1호선 상에는 투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임진강철교가 멀쩡한 것을 북한군이 확인한 이상 다른 곳에서 전차를 끌어와서 투입할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임진강철교 폭파가 실패함으로서 북한군은 평양 - 개성 - 서울로 연결된 경의도로를 침공로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임진강철교를 통해 북한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진격할 수 있게 됨으로서 이후에 발생하는 한강인도교 폭파때의 조기폭파에 심리적인 영향을 주었다.

7. 주방어선 전투

파일:임진강방어선전투.jpg
임진강 방어선 전투 상황도

25일 북한군이 청단에서 고랑포에 이르는 한국군 제1사단 삼팔선 담당지역을 전차와 함께 2개 사단으로 돌파하자 한국군 제1사단의 방어지역이 원래의 100km에서 임진강 방어선인 20km로 줄어들었다.

북한군 제1사단은 임진강 상류의 국군 제13연대를 공격하였으며 북한군 제6사단은 국군 제12연대 제2대대를 추격하면서 개성 남쪽으로 향했다. 삼팔선상의 전투에서 고랑포 방면같은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미한 손해만 입고 빠르게 목표를 달성했으므로 북한군의 전투력과 사기는 전반적으로 높았다.

한국군 제1사단은 삼팔선상의 전투에서 제12연대를 주축으로 하는 1개 연대 수준의 병력과 장비를 손실하였다. 하지만 분산철수하거나 휴가갔던 장병이 귀대하거나 증원병력이 투입되거나 하면서 손실분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수준의 증원을 받았으며 대전차포와 장갑차라는 중장비도 소수 지원받았다.

그러나 임진강철교를 완전하게 폭파하지 못한 실책이 발생하였으며 이에 따라 임진강 정면에서는 제6사단을 상대해야 했고 파평산에서는 북한군 제1사단을 상대해야 하는 어려움은 여전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도하장비를 가진 제6사단이 분산철수한 제12연대의 일부 병력만이 잔존하는 김포반도로 도하를 시도중이었으며 동두천과 포천 방면을 담당하는 한국군 제7보병사단이 중과부적의 상황에 놓임에 따라 파평산을 우회하는 적들이 점점 늘어나는 위기상황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산과 파평산에서 동시에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7.1. 문산 전투

수색에 주둔하고 있던 사단 예비대인 제11연대는 남침소식을 전달받고 6월 25일 오전 8시 30분에 대대별로 군장검사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이 나타나 연대장을 찾았다. 그러나 연대장이 아직 사단에서 돌아오지 않아서 대신 인사주임 김정렬 대위가 총참모장을 맞이했으며, 총참모장은 용감하게 싸우라며 격려하였다. 그 이후에 수색에서 출발하여 오전 11시 ~ 오후 3시 사이에 열차를 이용, 문산으로 이동하였으나 이때 병력은 980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도 준비된 병력부터 우선적으로 이동하여 4시간동안 1차 488명, 2차 131명, 3차 361명이 이동해서 겨우 숫자를 맞춘 것이다.

적전리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한 제11연대는 임진강철교 부근 마정리의 제1호 국도 좌우측에 고한조 대위가 지휘하는 제1대대를, 임진강 나루터 남쪽에 정영홍 소령이 지휘하는 제2대대를 배치하고 김재명 소령이 지휘하는 제3대대를 예비로 하여 방어전선을 구축하였다. 이후 연대가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동안에 휴가, 외출 장병이 귀대하여 병력은 1,500명으로 늘어났다.

제11연대가 방어하는 지역은 임진강철교가 설치된 임진강의 만곡부 돌출부로 큰 강이 둘러싸서 천연 장애물 역할을 하였으나 상대적으로 만곡부의 좌측은 병력이 부족했다.

따라서 제11연대장은 개성에서 철수하는 제12연대 엄호와 전방 경계를 위해 임진강 북쪽에 병력을 배치할 것을 2대대에 지시했고 2대대장은 오후 1시에 7중대로 하여금 임진강 북쪽 구릉 점령 및 임무수행 지시하였다. 7중대는 임무수행중에 오후 3시에 북한군이 선두에 보낸 기병을 격퇴했으나 임진강 전방 3km 부근에서 접근중인 대규모 북한군을 본 후에 본대로 철수한다. 해당 북한군은 북한군 제6사단 제15연대였다.

한국군이 주저항선을 거의 점령했을 때인 오후 5시경 철교 북쪽에서 전술행군대형으로 국도 제1호선을 따라 남하하는 대규모의 북한군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북한군은 임진강철교 부근에서 일시적으로 격퇴되었다.

그러나 25일에서 26일로 넘어가는 자정 무렵 11연대의 좌일선인 문산 돌출부의 최선단 지역인 1대대의 강변초소에서 적이 임진강철교를 통해 남하하는 것을 관측하였다. 임진강철교를 건너온 적은 강안을 따라 좌측과 우측으로 산개하였고 전차 5대가 뒤따르고 있었다. 제1대대는 적 전차가 방어진지 전방 500m 까지 접근하길 기다렸다가 기습적으로 대전차포를 발사하여 선두에 있던 전차를 명중시켰지만 적 전차는 별 다른 피해 없이 계속 접근하며 기관총을 발사하였다. 곧이은 두번째 대전차포 공격 역시 무위로 돌아가자 전차 5대를 앞세운 대규모 적병력이 순식간에 대대 중앙을 돌파하여 예비대 지역까지 진출함으로써 치열한 교전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후 혼전 상황에서 1대대는 분전하였지만 힘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26일 오전 9시 30분에 문산리 외곽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대전차포가 교범대로 500m에서 2차례나 성공적으로 포격을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는 당시 한국군이 보유한 대전차포가 이미 퇴물급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군에 배치된 57mm 구경의 M1 대전차포는 원래 영국의 6파운더 대전차포의 라이선스 생산형으로 이미 2차대전 후반부터 관통력의 한계점을 드러내던 무기였으며 6.25 전쟁시기에는 미군이 관통력 좋은 분리철갑탄은 명중률 낮다고 라이선스 생산을 안하고 기존의 철갑탄은 경사장갑에 명중시 탄자붕괴가 일어나서 포탄이 장갑을 못뚫고 깨지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나마 한국군에게는 고폭탄만 많이 지급했지 철갑탄은 매우 부족하게 주는 등 대전차포로 쓰기에는 문제가 매우 많은 상태였다. 운용요원도 대전차포 사용훈련을 제대로 못받았고 전차라는 것을 전쟁이 터져서야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대다수일 정도니 대전차포를 대전차 용도로 사용하기 곤란했다. 따라서 사실상 보병포로 사용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북한군이 보유한 T-34-76T-34-85는 모두 차체 전면장갑이 45도 경사를 가진 45mm 장갑판이라서 실제적인 방어력은 90mm에 육박했으므로 6파운더의 일반철갑탄으로는 전면장갑을 사격할 경우에는 이론상 320m 라는 초근접거리까지 근접해서 발포해야 관통이 가능했으며 해당 거리까지 근접했다가는 대전차포를 쏘기도 전에 전차의 주포탄과 공축기관총의 기관총탄맛을 제대로 보고 대전차포와 조작원이 세트로 개박살나기 딱 좋았다.

설상가상으로 목숨을 걸고 근접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6파운더의 일반철갑탄은 장갑의 경사도가 30도만 넘어가도 철갑탄이 착탄시 자기 혼자 깨져버리면서 관통불가상황이 발생하는 탄자붕괴현상이 일어나므로 차체 전면의 볼마운트 기관총좌를 핀포인트로 저격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실상 T-34 전차를 전면에서 상대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리고 T-34 전차 계열은 측면과 후면도 전면과 마찬가지로 45도 경사를 가진 45mm 장갑판이며 배기구같은 일부 약점이 존재할 뿐이라서 공격 난이도만 높아질 뿐 공격이 안먹히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며 T-34 전차를 격파하고 싶다면 보기륜으로 상당부분 방호가 되는 차체 하단의 45mm 수직장갑판을 보기륜 사이의 틈새를 노리고 쏴야 간신히 가능했으므로 실전에서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25일 오후 늦게 11연대에 증원 배속된 서울특별연대 예하의 보병학교 교도대는 김병화 소령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11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상대적으로 취약한 문산의 서측방 굴촌리 부근에 배치되었지만 긴급하게 편성된 후 황급하게 증원으로 도착했기 때문에 26일 새벽이 되어서야 진지 편성을 완료하였다.

11연대장은 1대대의 주저지선이 무너지자 임진강 방어선 전체의 밸런스가 깨질것을 우려해 예비대인 3대대로 하여금 1대대 증원 및 역습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3대대는 1대대의 저지선까지 2km의 거리를 신속히 이동하여 1대대와 함께 역습에 돌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북한군의 대규모 부대와 T-34 전차의 위력을 톡톡히 경험한 1대대장 고한조 대위가 지금 상황으로는 역습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들면서 역습명령에 반발하며 돌연 연대본부로 내려가면서 부대대장 고임현 대위가 1대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3대대의 증원에 의해 26일 오후 1시경에는 전선이 어느 정도 회복하는 기미를 보이지만 3대대의 좌측방에서 새로이 등장한 중대 규모의 적에의해 3대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연대장은 굴촌리 부근에 주둔하던 교도대대로 하여금 3대대의 좌측방으로 역습해 들어갈 것을 지시하였다. 북한군의 측후방에 있던 교도대대가 역습을 개시하여 좌측방에 등장한 북한군을 제압하고 다시 임진강 강변까지 진출하였는데 1,3대대의 분전 역시 이에 못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저녁 우인접 부대인 13연대 2대대쪽으로부터 등장한 전차와 북한군이 연대의 우일선인 2대대를 직접공격함과 동시에 대대 측후방을 우회하여 문산에 압박을 가함에 따라 그 기세가 오래가지 못하였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제11연대의 방어는 훌륭한 편이었다. 임진강철교 폭파 실패로 북한군의 전차까지 전투에 참여한 시점에서 몇 번이나 북한군을 임진강 너머로 밀어내는 반격에 성공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7.2. 파평산 전투

파일:Seoul_First_Battle.jpg
6월 25일 ~ 6월 26일의 전황

제1사단의 우전방으로써 개성부터 장단군 장남면 원당리까지 20km에 이르는 38선을 방어하고 있던 제13연대는 1대대와 2대대를 파평면 파평산에 투입하여, 북한군이 백학면 노곡리[7] 가여울 - 적성면 - 문산 도로를 따라 진출하게 될 것에 대비해 방어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그 과정에서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고랑포, 자하리로 공격해오다 격멸되었다.

13연대 1대대는 김진위 소령의 지휘하에 24일 대대전술훈련차 문산초등학교 분교가 위치한 자하리 부근에서 야영하고 있었다. 25일 새벽 4시 30분에 고랑포 방면에서 들려오는 포성에 대대인원 대부분은 으레 있는 북한의 도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대장은 상황파악을 위해 연대와의 연락을 시도하는 한편, 강건너 북쪽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고랑포를 감시하던 초병으로부터 "북쪽으로 부터 많은 병력이 내려온다"는 보고를 받고 적의 남침임을 확인, 각 중대로 하여금 진지 점령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이 때 1대대가 방어한 지점은 파평산에서 금파리로 연결되는 방어선이었다.

간신히 연대와 연락이 통한 1대대는 계속해서 탄약 보급을 요청하였다. 1대대가 훈련을 받던 중에 전쟁이 터진 것이라 대대가 보유한 탄약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대가 배치된 파평산과 연대 탄약고와의 거리는 차량으로 고작 10여분 거리 정도고 아직 북한군이 파평산에 근접하지 않은 상태라 상대적으로 후방에 있는 탄약고는 안전함에도 불구하고 탄약이 1대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북한군이 접근하면 탄약부족으로 패배할 것이 분명했기에 제1대대장은 연대 군수주임에게 탄약이 도착하지 않는다고 항의하였으며 연대 군수주임은 이미 탄약을 보급하라는 명령을 내린 지 오래였기에 탄약이 이미 대대에 보급된 줄 알고 있었다가 황급하게 연대 탄약고로 달려갔다.

연대 군수주임이 탄약고에 도착하자 탄약을 수송할 트럭은 빈 채로 단체로 대기중이고 탄약고 안에서는 탄악고를 관리하는 장교와 휘하 장병들이 탄약 상자를 모두 개방하고 탄약을 한발씩 수량을 세고 있다는 어이없는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평시에 탄약이 유출되는 사고를 막기 위해서 탄약이 탄약고에서 나갈 때 한발씩 섬세하게 숫자를 기록하고 나중에 사용한 탄피를 모두 회수해서 숫자를 검수해서 맞추는 복잡한 과정을 준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과정은 평시에도 사격훈련을 1번만 해도 엄청난 시간이 소모되고 탄약고의 업무가 힘들어지므로 훈련을 수행하기 힘들어질 정도가 되는 부작용이 있는데 전시에는 말 그대로 답 없는 일 그 자체였다. 다행히도 탄약고 소속 인원들에게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정식으로 전해지지 않아서 평시에 훈련가는 걸로 알고 한 행동이었으므로 연대 군수주임이 탄약고에 정식으로 전쟁 발발의 소식을 전함으로서 신속하게 탄약을 트럭에 적재하고 대대로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탄약 보급 및 분배가 완료된 시각은 오전 10시 30분이었다.예시

1대대가 탄약 보급 및 분배를 마치자마자 고랑포 - 자하리 방면에서 1개 대대 규모의 적이 제 1대대 정면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들은 파평산 정면의 덕현리로부터 산개하여 진지 정면을 가로지르는 320번 도로를 횡단하면서 대대의 우일선인 3중대와 중앙일선인 1중대에 소총 사격을 가하였다. 동시에 진지 정면에서 동서로 흐르는 냇가에 접근하고 있었는데 이 소하천은 대대의 작전계획에 따른 탄막지대였다. 대대장은 이를 이용하여 적들이 하천을 건널때까지 사격대기를 지시하다가 건너는 순간 105mm 야포와 81mm 박격포의 포격을 포함한 일제사격을 가하여 적을 제압하였다.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패주하였는데 많은 적들이 아군의 탄막범위 안에서 쓰러졌다. 간신히 살아남은 적 병력은 덕현리 지역으로 철수 하게 되었다.

오후 2시에 적성쪽으로부터 적 전차가 진지 정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평산 북쪽 320번 도로상[8]에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출현하였으며, 그 중 선두 5대가 파평산 북단으로 남하하였다. 이에 맞선 한국군은 전차가 종대행렬로 느리게 움직이면서 포탑만 돌려서 포격으로 공격하는 것을 보고는 2.36인치 바주카로 전차의 측면을 사격하였다. 여기까지는 정석적인 바주카 운영방식이 맞다.

그러나 60mm 구경의 M9A1 바주카는 기본적인 관통력이 80mm 급이라 성능이 애초부터 부족하였고 포탄의 구조적 문제로 경사장갑에 착탄시 도탄된 후 발화하여 메탈제트가 허공으로 날아가서 그나마 부족했던 성능도 크게 하락하는데다가 당시 한국군은 전차의 특성도 모르는데다가 사격술마저 미숙하고 사격거리도 바주카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500m - 600m 정도의 원거리였으므로 한 대의 전차도 파괴하지 못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병사들은 크게 동요하였는데 제1대대장 김진위 소령은 군의 사기를 고려하여 적의 전차를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특공대를 선발한다. 특공대는 18명을 선발하여 대전차특공조 2개 조를 편성하였다. 이 때 북한군의 전차들은 320번 도로를 따라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는데 대대 좌일선인 2중대 앞을 지날때 2중대가 바주카를 일제사격하자 북한군 전차병들은 포탑의 해치를 닫고 잠망경으로만 시야를 확보한 후 멈춰선 채 전차포로 반격을 시작하였다. 이 틈을 노리고 특공대가 81mm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전선줄로 묶어 만든 급조폭탄을 안고 적 전차의 무한궤도 밑으로 뛰어들었다.

아군의 필사적인 육탄공격에 무한궤도 손상을 입은 북한군 전차 5대는 진출을 포기하고 도로변의 초가 옆에 정지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광탄에 의해 초가집에 불이 나고 그 화염이 전차에 옮겨 붙었기 때문에 북한군 전차병은 전차를 버리고 도주했으며 이 광경을 지켜본 후속 전차대는 적성으로 되돌아갔다. 북한군 전차병들이 전차를 버리고 도망가자 한국군은 전차 안에 있던 물건을 노획하고 진지로 돌아왔다.

얼마뒤 북한군 1개 연대규모가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국군은 치열한 백병전을 펼치면서 끝까지 방어진지를 고수하였으며, 그 후 전장은 소강상태로 접어든 가운데 밤이 깊어갔다. 26일 오후 1시에는 또다시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제1대대의 우일선 제3중대를 집중 공격했지만 중대장 백남원 대위가 포격 지원을 요청해 격퇴시켰다. 포격과 함께 파평산의 가파른 지형에 북한군은 제대로 공격할 수 없었다. 오후 5시에는 북한군이 이번에는 중앙의 제1중대를 공격하자 박격포와 곡사포를 이용해 방어하였지만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이에 제1중대장 장덕수 대위가 수류탄을 던지며 진두지휘하여 북한군이 물러나게 하였다. 이런 식으로 26일 오후까지 제1대대는 81mm 박격포와 105mm 야포의 사격을 동반하면서 현재 진지를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지휘관과 병력들의 활약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파평산이라는 유리한 감제고지에 진지를 편성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13연대 제2대대가 담당한 구역이 문제였다. 해당 지역은 금파리 서쪽부터 율곡리까지의 구간인데 적당한 고지대가 없으므로 방어하기가 곤란한 지역이었다. 임진강변에 위치하기는 하지만 주적인 북한군 제1사단은 임진강을 건널 필요가 없는 우측으로도 내려오는 것이 문제였다. 육사교도대가 증원되었지만 역부족이었다.

25일 낮 12시에 제13연대의 좌일선을 담당한 제2대대는 대대장과 장교들의 복귀에 따라 개석동 남쪽으로부터 임진강변에 연하여 남서 방향 사선으로 진지를 편성하였다. 오후 2시 40분에는 제2대대 제5중대가 중대규모의 북한군을 발견하였다. 중대는 장마루까지 접근하기를 기다렸다가 15분의 집중 사격으로 격퇴하였다. 그러나 오후 3시에 북한군이 다시 장마루로 접근해 다시 교전이 시작되었다.

제2대대는 고랑포쪽에서 임진강을 도하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을 맞았다. 북한군은 공격준비사격 후에 1번 도로를 따라 전차와 더불어 2대대 중앙을 공격하였다. 북한의 전차가 57mm 대전차포의 사격을 뚫고 접근해 사격을 하자 병사들이 대오를 이탈하였고 우일선 중대가 분산되면서 우측 제1대대와의 사이가 벌어졌다. 보고를 받은 연대본부는 금곡리에 집결한 제3대대로 역습을 감행하도록 명령했다. 밤새도록 이어진 전투는 새벽이 되어서야 진정되었다.

한편 25일 저녁 무렵 제13연대에 배속된 서울특별연대 예하의 육사교도대는 김응용 소령이 지휘하여 문산에서부터 밤샘 행군을 하여 1대대 우측방이며 연대의 우측방이기도 한 357고지를 확보하고 진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는데 밤 사이에 이미 적군이 357고지의 정상을 점령하여 어쩔수 없이 고지 서쪽에 있는 230m 높이의 무명고지를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저지대에 위치한 탓에 고지에 묶인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상호간의 통신 부재로 357고지 점령에 실패한 육사교도대가 그냥 후퇴했다고 오판한 제13연대본부는 연대의 우측을 방어하기 위해 연대 직할대인 2개 중대 병력을 동원하기로 했다. 26일 오전 10시에 이전에 헌병대장이었던 유중수 대위가 이끄는 연대직할대 병력이 교도대 후방에 위치한 211고지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낮 12시에 357고지에서 남하한 후 우회한 북한군 1개 중대의 기습에 의해 육사교도대가 공격 받으면서 갑작스럽게 철수하게 된다. 육사교도대의 철수에 따라 해당 부대를 후방에서 지원하던 전남식 중위 휘하의 포병 중대는 105mm 야포 2문을 급박한 상황 속에서 회수하지 못한 채 철수하게 되었다.

이때 육사교도대장 김음용 소령은 실종되었으며 1중대 선임장교인 최재균 중위는 부상을 입고 과다출혈로 전사하게 된다. 이에 따라 육사의 중대장 김철수 대위가 육사교도대를 이끌고 봉일천으로 철수하였다. 제13연대의 제2포 중대장 전남식 중위는 야포를 회수하지 못한 자책감에 봉일천으로 철수하는 도중 수류탄으로 자폭하였다.

제13연대 1대대와 달리 2대대가 방어에 실패한 이유는 처음 설정한 진지구간이 이미 우측으로 우회하는 북한군 1사단의 공격에 취약한 지점이었고 그 이후에 설정한 방어지역은 격렬한 전투중에 본대 병력을 파견할 수가 없어서 타지에 긴급편성되어 긴급증원되는 부대에게 담당하게 한 것이 문제였다. 증원부대가 현지 지형을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북한군에게 중요 고지를 선점당한 결과 기습에 취약해졌으며 곧 붕괴되고 만 것이다.

7.3. 임진강 방어선 붕괴

국군 제1사단은 후방에서 증원된 부대로 전투력이 대폭 증강된 것에 힘을 얻어 6월 26일에는 방어선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상황을 보아가면서 반격으로 전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우측 인접부대인 제7사단이 덕정 - 축석령 선으로 철수한 탓으로 제1사단의 우측방이 완전 노출되고 말았다. 이러하여 가여울 - 적성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1사단은 한국군의 저항이 전혀 없는 상황 아래에서 한국군 제1사단을 우측방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임진강철교 폭파가 실패한 것을 확인한 북한군 제6사단은 문산 돌출부에 전차를 투입하고 6월 26일 이른 새벽에는 임진강철교를 통해 전차 5대를 앞세워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여기에 맞선 한국군 제11연대는 임진강철교로부터 남쪽으로 종심 깊게 편성한 방어지대에서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전차와 대결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과 방법이 없어 문산 남쪽 구릉지대로 철수하였다.

이후 문산 북쪽까지 진출한 북한군은 잠시 진격을 멈추고 후속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를 역습의 기회라고 판단한 제11연대장은 지원온 보병학교 교도대대를 포함한 3개 대대를 투입한 역습으로 적을 임진강철교 북쪽으로 일시적으로 격퇴하였다.

하지만 같은시각 우측의 제13연대는 파평산 방어진지 자체는 제대로 수비하고 있었으나 파평산 우측에 노출된 방어선으로 들어온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해 해당 방어선이 무너지고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1사단의 주공이 320번 도로를 따라 서진하면서 문산리를 위협하게 되었다.

8. 최후 방어선 전투

파일:봉일천전투.jpg
봉일천 지역의 최후 방어선 전투 상황도

이러한 상황추이를 지켜보던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최후 방어선으로 철수하여 마지막 결전을 펼치면서 반격의 기회를 조성하기로 결심하였다.

한국군 제1사단은 병력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26일 야간에 야간철수를 계획했다. 전성호 대령 후임으로 온 김점곤 중령이 제12연대를 이끌고 사단 직할대와 제11연대를 엄호했다. 제13연대는 제2, 제3대대가 먼저 퇴각하고 여전히 전투 중이던 제1대대는 27일 여명시각이 되어서야 철수를 시작했다.

철수 과정에서 임진강철교를 건너서 공격을 했던 제11연대와 보병학교 교도대대엔 차질이 있었다. 특히 보병학교 교도대대엔 철수명령이 너무 늦게 전달되어 철수시기를 놓쳤고, 그 과정에서 병력이 붕괴되어 전투능력을 상실하였다. 제11연대도 큰 타격을 받아서 재편성이 불가피했다. 반면 제13연대는 비교적 손실 없이 철수가 가능했다.

한국군 제1사단본부는 봉일천 초등학교에 세워졌으며 이에 앞서 금촌 지역에 도착한 15연대 3대대로 하여금 진지공사를 완료하도록 하였다. 또 그 우측방에 20연대 3대대를 배치하여 전방 상황에 유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하였다.

8.1. 봉일천 전투

파일:봉일천 Internet.png
봉일천 전투 작전도

봉일천 방어선에 투입가능한 한국군 제1사단의 원래 병력은 제13연대를 주력으로 하고 제12연대의 잔여병력이 보조하는 수준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11연대는 재편성이 필요했고 보병학교 교도대는 전투능력을 상실했다. 미리 도착해있던 증원부대 15연대 3대대와 20연대 3대대는 봉일천 방어선의 좌일선에 배치되었고 제12연대는 앞서 언급한 여러 전투에서 분산철수한 가운데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이 금촌에서 재편성되었다.

이 시점에서 한국군 제1사단에 추가적인 병력 증원은 없을 것이 예상되었다. 이미 의정부 지구의 7사단과 이를 증원하는 2사단은 이미 서울 미아리 부근으로 철수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후에 서울 방면으로 증원될 병력은 더 급박한 지역으로 투입될 것이 확실했다.

더 중요한 것은 서울에 위기가 닥쳐오면서 발생한 통신두절로 인해 제1사단은 주변 부대의 상황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봉일천 전투 이후의 철수 과정에서 악영향을 발휘하게 된다.

26일 오후, 한국군 1사단은 제2방어선마저 붕괴되면서 최후의 방어선인 봉일천으로 후퇴한 상황이었다. 1사단은 연대별로 지연전을 펼치면서 위전리 일대에 배치된 15연대의 엄호하에 방호진지를 급편하였다. 봉일천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제6포병대대 2중대가 적 정찰대의 습격을 받아 105mm 야포 4문이 소실되어 1사단의 지원화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1사단이 방어진지를 편성한 위전리와 문산천 일대는 주변에 넓은 면적을 점유하는 이 펼쳐져 있으며 진지는 구릉지대 상부에 건설되었으므로 일단 방어에 유리한 반면, 도로가 발달되어 있어 적의 기갑부대 운용에도 유리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이러한 지형적 특징을 감안하여 최후방어선을 지탱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1사단은 공세적인 반격계획을 세우고 기회를 노려서 적을 타격하는 데 주력하는 방법으로 태세를 바꾸었다. 한편 북한군 1사단과 6사단은 문산리 - 법원리 일대까지 남하하여 공격을 위한 전투정찰을 실시하고 있었다.

봉일천 전투에서의 한국군의 배치는 좌측과 우측으로 나누어서 좌측에는 15연대가 주력으로 연대본부는 금촌에 위치하였으며 좌전방에는 15연대 3대대를 배치하고 우전방에는 20연대 3대대를 배치하였으나 연대예비병력이 없어서 급변하는 상황에 취약했다. 우측에는 13연대가 주력으로 연대본부는 용미리에 위치하였으며 좌전방에는 13연대 3대대를 배치하고 우전방에는 13연대 1대대를 배치하였으며 연대예비병력으로 13연대 2대대를 배치하였다.

1선 방어선 뒤에는 사단예비병력 겸 예비진지를 설치하여 11연대를 배치하였으며 연대본부는 봉일천에 위치하고 좌전방에는 11연대 1대대를 배치하고 우전방에는 11연대 2대대를 배치하였으며 연대예비병력으로는 11연대 3대대를 배치하였다. 그 외에는 금촌에 제12연대가 있었으나 1개 대대규모의 잔여병력이었고 장곡리에 보병학교 교도대가 위치하였지만 전투력 상실상태로 재편성중이었다.

8.1.1. 위전리 방면

위전리 일대는 제15연대가 담당하여 방어하게 된다. 6월 26일 금촌 북쪽에 배치된 15연대 3대대는 최병순 소령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연대 방어선을 관통하는 1번도로와 이를 따라 남하하는 전차에 대한 방어책 마련의 중요성을 깨닫고 대비를 시작하였다. 27일 아침까지 대대 주력은 도로 좌측의 구릉지대를 확보하고 10중대를 도로 동쪽 측면에 배치시킴으로써 남하하는 북한군을 포위할 수 있는 진지를 구축하였다. 특히 효과적인 대전차 방어를 위해 각 중대에서 차출한 60mm 바주카 6문을 대대 주력의 우측에 배치하였고 사단에서 지원받은 57mm M1 대전차포 6문을 10중대 서측방에 배치하여 화력의 집중을 가능하게 했다.

27일 아침 10시에 북한군 6사단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해당 시각에는 아직 연대 우일선인 20연대 3대대가 진지 구축을 완료하기 전이었다. 대대 규모의 적 2개 부대가 각각 1번도로와 도로 좌측방에서 남하하였다. 좌측방의 적이 대대 좌일선인 9중대의 반대편 구릉을 점하고 9중대를 향하여 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자 아군은 즉각 구원에 나섰는데 대대 중앙일선인 11중대로 하여금 60mm 박격포 화력지원을 하게 하고 대대 주력의 후방에 있던 중화기 중대장으로 하여금 81mm 박격포를 지원사격 하게 하여 공격하던 적을 30분만에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와 같은 전개로 1번 도로를 따라 내려오던 적군도 산개하여 얼마간의 원거리 박격포 포격전을 벌이게 된다.

정오가 되자 전열을 가다듬은 북한군이 기병대와 18대의 전차를 앞세워 다시 남하하였다. 15연대 3대대는 전차가 진지 앞 300m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린 후 60mm 바주카 사격을 하였지만 소용없었다. 북한군 전차는 잠깐동안 멈추었을 뿐 기관총을 난사하며 전진을 다시 시작했고 일부 전차는 돌진해서 참호를 무한궤도로 깔아뭉개기 시작했다.

북한군 전차를 막지 못하면 대대 전체가 괴멸당할 수 있을 정도의 상황에 몰리자 위전리 1번도로에 위치한 15연대 3대대장인 최병순 소령은 육탄공격을 결심하였다. 육탄공격을 하려고 해도 적당한 폭발물이 없던 관계로 일반 수류탄을 전차의 해치 안에 투입해서 전차 내부에서 폭발시키는 방법을 쓰려고 했다. 그래서 최병순 소령은 11중대장에게 선두전차를 공격하라 명령하고 자신이 직접 특공대를 이끌고 전차에 접근하였다. 특공대가 일제히 전차를 향해 돌격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전차가 쏘는 기관총 사격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11중대장 이선도 대위도 전사하였다, 이후 11중대 2소대장 박종순 소위가 선두 전차에 수류탄을 집어넣어 격파하였으며 대대장도 최후미의 전차를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11중대의 돌격을 보고 10중대도 육탄돌격에 가세함으로서 북한군은 선두 전차와 최후미 전차 사이에 끼어버린 다른 전차들을 미처 빼내지 못하고 전차병만 탈출하였으므로 결국 적 전차 6대를 모두 격파하는데 성공하였고 북한군은 문산리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앞서 말한 이선도 대위를 포함한 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제15연대는 27일 오후 5시까지 북한군의 남하를 효과적으로 막아냈으나 밤이되고 소나기가 내리는 것을 기회로 삼은 북한군의 일제 공격과 탄약의 소진으로 인해 예하대대를 봉일천으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연대의 우일선인 20연대 3대대가 후퇴하는 것을 보고 북한군의 일부가 해당 루트를 따라가서 사단 우일선인 13연대의 서측방인 기존 20연대 3대대 방어지역으로 우회하여 공격해 들어가면서 대혼전이 발생하게 되었다.

8.1.2. 문산천 방면

문산천 일대는 제13연대가 방어하게 되었다. 13연대는 27일 아침에 방어 지역인 문산천 남쪽에 도착하여 진지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우측에 인접한 사단인 한국군 제7보병사단이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주력을 의정부 북부 지역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전선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안그래도 방어선 우측을 담당하는 상황에서 적이 우회로를 노리고 집중타격할 확률이 높아진 것이다. 따라서 연대 우일선인 1대대가 동측방의 방어에 유의하며 진지 구축에 돌입하지만 어쩔 수 없이 북한군에게 당하기 쉬운 취약성을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7일 오전 10시부터 좌측에 인접한부대인 15연대는 북한군과의 교전 상태에 돌입하지만 13연대 방어지역으로는 진지공사가 끝나갈 무렵인 저녁 7시가 되어서야 북한군이 출현하였다. 북한군은 문산천 북쪽에서 포격과 함께 전차를 앞세워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연대 좌우일선을 관통하는 307번 도로를 따라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13연대는 즉각 대응에 돌입하여 우일선인 1대대 서측방이자 307번 도로의 우측에 배치해놓은 57mm 대전차포와 15연대를 지원하던 포병중대의 105mm 곡사포가 포구의 방향을 돌려서 포격을 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한국군의 집중사격에 의해 북한군은 흩어지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 대열에서 이탈한 북한군 전차 1대가 13연대 1대대를 향해 접근해오자 1대대 2중대는 3문의 60mm 바주카를 집중사격하여 전차의 무한궤도를 파괴하여 북한군 전차를 포획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북한군은 문산천 북쪽으로 후퇴하고 포격전으로 전투가 진행되었다.

석양이 진 후에 연대 좌일선인 3대대의 서측방으로부터 침투한 규모를 알 수 없는 북한군이 공격을 재개하였다. 해당 북한군은 20연대 3대대가 퇴각함에 따라 생긴 공백을 따라 들어온 것이다. 그와 동시에 대대규모 이상의 적이 우일선인 1대대의 동측방을 우회하여 동거리 우측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쏟아지는 폭우속에 좌우에서 야습을 받은 13연대는 혼전속에 악전고투하였지만 해가 밝을 무렵에는 주진지의 대부분을 적에게 내주게 되었다. 따라서 13연대는 동거리 남쪽 1km로 저지선을 후퇴하게 된다.

여기까지 종합적으로 살펴본다면 지형지물과 진지의 견고성이 모자라긴 하지만 어떻게든 북한군을 틀어막고 있었으나 점점 밀려가는 상황이었으며 특히 우측의 제13연대쪽이 우회해서 들어오는 북한군에게 크게 밀리기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8.1.3. 북한군의 야습과 반격

6월 27일 제15연대의 철수에 따라 사단은 금촌 북쪽의 주진지 회복을 위한 반격명령을 하달하였으나 밤 사이에 우회침투한 북한군의 양면공격으로 인해 우일선 제13연대는 주진지의 대부분을 상실하여 천명과 더불어 동거리 남쪽에서 저지진지를 편성케 되었다.

덕분에 연대 예비겸 제2선 예비진지에 배치된 제11연대가 밤사이에 난데없이 최일선 부대가 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래서 27일 오전 05시 30분에는 좌일선 제1대대가 북한군의 급습을 맞게 되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해당 대대는 1번 도로상으로 집중하는 대대규모의 북한군을 진지 앞에서 저지하기 위해서 모든 화력을 집중시키는 동시에 포병화력까지 지원받아 북한군의 공세를 꺾었다.

그러나 6월 28일이 되고 날이 밝자 또 한 무리의 북한군이 서측 방향을 위협하였다. 연대장 최경록 대령은 대대로부터 긴급보고를 받자 금촌 북쪽에서 공격준비를 갖춘 김재명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로 하여금 예정된 공격개시시간보다 40분이 빠른 오전 7시 20분에 제1대대 서측으로 기동케 하여 북한군을 측방으로부터 쫒아내는 한편 오전 8시 10분에는 봉일천에 배치된 정영홍 소령이 이끄는 제2대대를 등원리 방향으로 공격하도록 했다.

이렇게 11연대의 각 부대가 일제히 전방에 나서게 되자 사단장은 해당 연대와 제13연대와의 사이에 벌어지게 될 간격을 메꾸기 위해서 박희동 소령이 이끄는 제20연대 3대대를 제11연대의 동쪽에서, 그리고 서울특별연대의 혼성병력을 다시 그 동측에서 공격토록 하였다. 이런 식으로 오전 11시 15분에는 이들 제대가 내화산 - 79고지 - 두분동, 그리고 국도 동측의 둔전동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다. 그 결과 11연대는 큰 교전 없이 위전리 ~ 도내리를 연결하는 선상의 중간목표를 점령하고 최후방어선 좌측일부를 회복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우측의 13연대는 북한군 1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기에 반격을 할 수 없었다.

9. 철수

이미 6월 27일에 육군본부에서 파견된 작전지도반이 한국군 제1사단한테 한강을 도하하여 철수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작전지도반장인 김홍일 소장은 재량권이 없었으므로 철수건의를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전달할 것을 약속하고 사단전술지휘소를 떠났다. 다음날인 28일 아침, L-5 센티넬 연락기가 사단전술지휘소에 연락통을 떨어뜨렸다. 연락통 안에는 "현 방어선을 고수하라" 는 육군본부의 명령이 담겨있을 뿐 철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물론 6월 27일에 제1사단을 방문한 김홍일 소장은 당일 육군본부에 복귀하는 즉시 제1사단의 철수문제를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에게 구신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북한군의 주공이 미아리고개 지역으로 집중되어 서울 방어가 가능할 지 불가능할 지 알 수 없는 위급한 상황하에 몰려있었으므로 총참모장 스스로가 이에 대한 명확한 지시조차 내리지 못한채로 수원시로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누가 연락기를 통해서 방어선을 고수하라는 명령을 보냈는지는 불명확하다.

그래서 제1사단장인 백선엽 대령은 28일 오전 8시 10분에 반격을 개시해서 성과가 있었으나 28일 정오쯤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고, 오후 2시경에는 녹번리에 적 전차가 나타나 도로를 차단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것도 사단의 환자후송차량이 서울시내에 들어가다가 녹번리 도로를 차단하고 있는 것을 보고 사단으로 되돌아왔고, 수색에 탄약수령차 갔던 보급차량이 도중에 사격을 받고 돌아오는 등으로 서울에 이르는 후방도로가 차단되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육로로 철수할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실제 상황은 더 안좋아서 북한군은 6월 25일에 개성으로부터 영정리(영정포)로 철수한 제12연대 2대대가 강화도를 거쳐 김포반도 서단에 있는 통진으로 철수한 다음 다시 6월 27일에 오류동으로 철수하자 뒤를 따라 김포지역을 침공하였다. 따라서 빨리 한강을 건너지 못하면 한강 건너편도 북한군이 점령하게 되므로 말 그대로 포위당해서 괴멸당할 뿐이었다.

9.1. 행주 도하 작전

파일:행주나루철수.jpg
행주나루와 이산포 방면 한강 도하 철수 작전 상황도

위급상황에 직면한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도하장의 선정에 대하여 선임연대장인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과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최경록 대령은 이산포를, 최영희 대령은 행주나루터를 각각 건의하게 되었다.

이렇듯 2개 도하장을 보고받은 사단장은 사단의 주력을 동시에 철수시키려면 최소한 2개 이상의 도하장소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이들 양 연대장에게 세부적인 도하지점의 선정과 도하장의 사전준비를 위하여 현지를 실제로 정찰할 것을 지시하고, 사단장 자신도 이날 오후에 이산포와 행주 등지를 돌아보았는데 행주의 도하준비를 맡은 최영희 대령은 그 부근의 창고를 헐어서 그 재목으로 선착장을 만들고 배 2척을 묶어서 차량을 운반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또한 오재기 중위에게 김포 방면에 대한 정찰을 실시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정찰결과 이미 대규모의 북한군이 김포비행장을 점령한 사실을 알게 되어 도하장 부근에 집결된 부대 중 병력 1개 소대를 뽑아서 도하장 주변 및 한강 양쪽 강변등에 대해서 경계에 임하도록 조치하였다.

결국 1사단은 한강 도하 철수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직시해 행주 나루터와 이산포 나루터를 도하지점으로 선정하고 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또한 철수 후 1사단은 6월 30일 오전 8시까지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로 집결하도록 하였다.

9.2. 혼란

그러나 철수명령이 내려지자 각 부대별로 빠르게 철수한 부대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이날 오후 3시 30분에서 오후 4시 사이에 철수하게 되었다. 그러다 공격중인 최전선부대까지 명령이 잘 전달 되지 않는 곳도 있었다.

예를 들어서 서울특별연대장 유해준 중령은 전방에 나갔다가 작전회의에 참석치 못한 관계로 철수에 관한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제20연대 3대대장 박희동 소령은 공격도중에 인접 부대가 없어진 것을 알고 나서야 뒤늦게 철수하여야만 하였다. 이렇게 나중에 제1사단에 증원된 부대인 제5사단 소속 부대들은 원래부터 투입될 지역의 군사지도를 보급받지 못한 채로 전방에 투입된 것 때문에 전투시는 물론이거니와 철수시에도 병력수습면에서 어려운 고비를 여러 번 넘겨야만 하였다.

한편 제13연대장 김익열 대령은 사단의 작전회의가 끝난 뒤 고양 남쪽 하천 제방에서 연대 자체의 지휘관회의를 열고 철수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제1대대장 김진위 소령은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가 옥쇄하자고 제의한데 반하여 제2대대장 윤천봉 소령과 제3대대장 유재성 소령은 북한산에 들어가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우군이 반격하여 올 때까지 항전하자고 하였다.

또한 작전주임 최대명 소령은 "사면초가인데 별수 있느냐, 차라리 부하들을 각개 행동케 하고 우리는 자결을 하자"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자결문제에 대하여서는 모두가 반대하였고 이때 미군 폭격기가 문산을 폭격하는 것을 보고 "미군이 참전한 이상 우리가 주저할 것이 없다. 한강을 건너서 싸우자."고 연대장 김익열 대령이 결론을 내렸다.

우선 연대 헌병대장 박충치 소령으로 하여금 헌병을 지휘하여 행주에서 연대의 도하준비를 하도록 조치하고 부대의 철수는 제2, 1, 3대대 순으로 결정하였으며 제3대대는 연대본부 병력까지 통합 지휘하여 주력부대의 철수를 엄호한 다음에 철수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각 대대는 철수하기 시작하고, 연대장 자신도 작전주임 최대명 소령을 대동하여 연대의 무선지휘망인 3/4톤 통신차 1대를 뒤따르게 하여 행주에 내려와 도하장을 확인한 다음 무전기로써 철수부대를 능곡 - 행주방향으로 유도하였으나 교신상태가 좋지않아 행주에서 다시 봉일천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능곡에 올라왔을 때에는 이미 봉일천 - 능곡간의 312번 도로가 철수차량과 병력등으로 길이 막혔으므로 능곡에서 내려오는 2개 대대와 연대직할대를 행주로 유도하다가 이들과 함께 이날 밤 소형 선박 5척을 할당받아 도하하게 되었다.

한편, 제11연대는 사단의 작전회의가 끝나는 즉시 공격중인 전방대대에게 철수명령을 하달하는 등으로 철수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는데, 이날 오후 3시 30분이 되자 돌연 연대의 후방으로부터 북한군의 박격포 사격을 받게 되었다. 이는 북한군 기병대가 연대 동측방에 있는 은골로부터 연대후방지역을 기습하는 한편 그들의 일부 보병부대가 철수시의 혼란을 틈타 이날 아침까지 제2대대가 확보하고 있던 봉일천의 111고지에 나타나, 연대 관측소가 있는 동측지 서측방의 독립고지와 107고지 남쪽에 있는 연대 지휘소 지역에 박격포사격을 개시한 것이다.

따라서 제11연대가 적의 포위망 속에 들어간 것처럼 북한군 포탄이 후방으로부터 날아오자 일대 혼란을 빚게 되었다. 당장 관측소에서 철수 준비 중이던 최일영 대위는 재빠르게 관측소 요원을 인솔하여 적의 포격을 피하면서 일산으로 철수하고, 연대 지휘소 주변에서 보급품을 후송하려던 보급장교 한근호 중위는 보급하사관 윤기열 중사등과 같이 우선 대기시켜 놓은 차량에 총기류부터 적재하고 이어서 탄약과 백미 100여 가마니에 해당되는 식량을 차량에 실으려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북한군 포탄이 그 옆에 쌓아둔 탄약상자에 낙하하여 명중하였으므로 유폭을 피할 겸해서 차량를 몰아 일산으로 빠져나왔다. 이무렵 사단 지휘소가 철수한 뒤의 봉일천초등학교에서는 원인 모르는 화염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제11연대의 주력은 이렇게 혼란에 빠진 광경을 멀리 바라보면서 일산을 거쳐 이날 저녁무렵에 이산포에 당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부근에서 수집한 소형 어선으로 도하하였는데 행주 나루터나 이산포할 것 없이 운집한 각 부대의 인원들은 앞을 다투어 도하에만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요인은 배가 한강 너머로 건너가기만 하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었으나 이보다도 소속을 달리하는 여러 부대가 통제를 무시하고 도하순서를 지키려 하지 않는 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병력들은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기 시작해서 상류나 하류지역을 수색해서 배를 구하여 도하하거나 뗏목을 만들어 건너는 등 아예 질서라곤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상당수의 장교가 지휘를 하기는커녕 군복의 계급장을 떼고 일반 병사로로 위장하여 누가 장교인지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아예 군복을 벗고 사복을 입고 있는 자도 적은 수가 아니었으므로 이미 상관이건 부하건 없는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더욱이 각 부대의 철수차량이 도하지점에 몰린 상태였고 사람도 강을 건너가기 어려운 판국에 차량을 옮길 여유가 없어서 대부분이 버려진 상태가 되었다. 그러므로 차량으로 이곳까지 후송된 부상자에 대하여서도 도하의 우선권이나 이들을 위하여 손을 쓰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부상자들은 체념한 나머지 차내에서 자결하겠다며 수류탄을 달라고 했고 더러는 차라리 쏴달라도 호소하는 자도 있었다. 이미 질서있는 철수 따위는 저 멀리로 날아간 것이다.

그리고 제13연대 수색중대의 김호 소위, 제7중대의 김홍주 소위 그리고 고모 중위등은 행주를 목표로 철수하다가 전세의 불리를 개탄한 끝에 자결하였다. 이들은 동행하던 김호 소위와 선임하사관인 홍원기 상사에게 먼저 가라고 한 다음 3명만이 운명을 같이 하였는데 그 이유는 모두가 북한 공산당 치하에서 월남하여 언젠가는 북한에 있는 부모형제들을 구하겠다고 군문에 들어왔던 것인데 이제 북한군들에게 수도가 함락되고 국군이 비참한 패퇴를 하는 마당에 우리의 갈곳이 없다고 서로 논의한 끝에 자결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제13연대 3대대는 엄호부대의 임무를 마치고 야간철수를 하였는데, 다음날인 6월 29일 날이 밝을 무렵에 수색동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부대행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대대장 유재성 소령은 대대를 수색동 북쪽 산에 집합시켜 일방훈시로써 그간의 노고를 치하한 다음, "지금부터 대대는 소집단으로 행동하여 시흥 방면에 집결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휴대한 무기들을 근처에 묻은 뒤 부대를 해산시켰다. 그 이후에 유재성 소령은 몇 명의 부하와 함께 사복으로 갈아입은 후 이 날 밤 광장교 방면으로 빠져나갔다.

또한 6월 27일 밤 금촌 북쪽에서 철수한 최병순 소령이 이끄는 15연대 5대대는 흩어진 병력을 봉일천 남쪽에서 수집하다가 6월 28일에야 능곡 부근까지 후퇴한 병력들을 겨우 다시 모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15연대 5대대는 28일의 반격에도 제외된 상황이라서 철수도 타부대보다 빨랐다. 이들은 이날 주간에 수색역을 거쳐 난지도로 나왔는데, 대대의 병력은 수색에서 수집한 타 부대의 병력까지를 합하여 1200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강변에서 병력을 풀어 배를 찾게하는 한편 이 무렵 난지도내 도처에서 원인 모르게 불타고 있는 가옥이나 주인이 없는 초가를 헐게하여 여기서 얻은 판자나 통나무 한 개씩을 전원이 갖게한 뒤 도하조를 편성하여 이날 오후 7시에 영등포의 염창동쪽으로 도하하였다. 그러나 판자나 통나무에 매달린채로 강을 건넌 관계로 대부분이 물에 떠내려가 55고지(염창동 북쪽 1.5km)아래 강변에서 상륙하였는데 그나마 개인화기는 전원이 휴대한 채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밖의 부대도 6월 28일 저녁부터 6월 29일 아침 사이에 행주와 이산포로 도하하였으며, 사단장 백선엽 대령도 사단 사령부와 함께 행주나루를 건너 철수하였다.

이렇게 혼란속에 분산철수한 제1사단의 철수상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사단사령부 및 직할대, 제15연대본부 및 직할대
    제1차로 행주나루터에서 대소 선박 5 ~ 6척으로 한강을 도하하여 시흥으로 철수하였다.
  • 서울특별연대(-), 제20연대 3대대(-) 제12연대의 일부병력
    행주나루터에 뒤늦게 도착하여 6월 28일 저녁부터 6월 29일 밤사이에 한강을 도하하였으나 일부 병력은 분산되었다.
  • 제13연대
    연대 주력은 제3대대의 엄호 하에 능곡을 경유 행주나루터에서 한강을 도하하였다. 그러나 제3대대는 야간 철수중 방향을 잃고 헤매다 6월 29일 아침 수색동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때 대대장은 대대를 해산시켜 소규모 단위로 분산 철수하여 시흥에 집결하도록 지시하였다.
  • 제11연대
    위전리~봉일천에서 사단주력의 철수를 엄호한 후 일산을 경유하여 이산포 나루터에서 제 12연대(-)와 기타부대의 낙오병을 수습하여 한강을 도하하였다. 그때에는 이미 김포 반도에 북한군이 진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규모 단위로 분산되어 시흥과 수원으로 철수하였다.
  • 제13연대 후발대와 기타연대 낙오병 130명
    어선에 승선하여 한강 하구를 거쳐 군산으로 항해한 끝에 7월 5일 증평에서 본대와 합류하였다.
  • 제15연대 3대대
    6월 28일 오후 타부대보다 한발 먼저 철수를 개시하여 수색 부근에서 낙오병을 수습해 병력이 1200명으로 증가되었다. 대대는 난지도로 건너가 초가집을 헐어서 그 목재로 뗏목을 만들어 한강을 도하, 영등포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한강을 건넜다고 끝이 아니었다. 이미 북한군은 6월 28일 전에 행주와 방화동 일대의 개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개화산과 김포 하성면 봉성리의 봉성산(129m)등을 점령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통제하는 한편, 신월동에 있는 지양산(138m)을 장악하여 김포 가도 주변지대를 선점한 상태였다.

결국 행주나루로 도하한 부대 중에서, 여러 부대가 혼성이 되어 질서를 찾지 못한 부대나 지휘자가 없는 부대는 한강을 건넌 후에도 북한군이 갑자기 사격하는 것에 직면하자 강변에 있는 갈대밭에 뛰어들어서 몸을 피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부대가 완전히 흩어지고 각자도생의 길로 나가기도 하였다.

6월 29일 오전에 미합중국 공군이 행주와 이산포에 버려진 한국군의 차량, 화포, 중장비를 북한군이 노획해서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폭격을 실시했다. 북한군은 한국군 잔여병력을 소탕하면서 서울로 진격했고 일부 병력은 행주 등지에서 한강을 도하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10. 재집결

한강을 건너서 철수할 때 제1사단이 사실상 붕괴되면서 분산철수라고 읽고 각자도생하는 사태에 빠졌지만 상당수의 병력이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로 재집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강 도하 과정에서 병력이 흩어졌음에도 빠르게 재집결 및 재편성이 가능했고, 이후 한강 방어선 전투김포반도 전투 당시 유일하게 제11, 12, 13연대의 원래 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싸울 수 있었다.

11. 피해상황

한국군과 북한군 모두 피해상황이 불명확하다.

11.1. 한국군

개전 초반의 혼란상황 및 행주 도하 이후의 재집결 등으로 인해 피해상황이 불명확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전시에 휴가, 외박, 외출나간 병력이 많았던데다가 증원으로 배속받은 병력들은 말 그대로 긴급하게 편성해서 투입한 관계로 원래 편제와 다르기라도 하면 다행이고 제대로 된 숫자가 얼마인지 파악도 안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주 대략적으로 판단하자면 한국군 제1사단은 원래 편제 병력만 본다면 총합해서 1개 연대 정도의 병력을 상실하였고 배속부대까지 포함한다면 절반의 병력을 상실하였다. 그 이유는 배속부대가 긴급하게 마구잡이로 투입된 병력이라 원래의 1사단 병력에 비하면 숫자, 장비, 수준이 모두 떨어지며 갑자기 엉뚱한 지역에 배속된 탓에 지형지물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군사지도도 지급받지 못한 관계로 인해 북한군의 기습에 쉽게 붕괴되거나 대타격을 입어서 희생자가 많았던 탓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제1사단은 장병들이 각자도생으로 한강을 도하한 후에 재집결하는 것에 성공하여 부대 편제를 유지하였다. 같은 시가에 서울 근방에서 전투한 대부분의 병력들이 부대가 붕괴되고 편제가 박살나서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는 일단 패잔병을 모아서 임시적으로 편성해서 부대를 만들어서 투입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부대 편제가 유지된 상태라면 새로운 병력을 받아도 기존의 병력과 간부진이 남아있으므로 지휘 및 통제가 수월해지므로 같은 병력을 가지더라도 전투능력에서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부대 편제 유지가 중요한 것이다.

한국군 제1사단이 받은 타격은 병력손실보다는 중화기를 비롯한 중장비 손실이 더 크다. 행주 도하 작전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기도 곤란해서 대부분의 중화기를 버리고 간신히 탈출한 것이다. 그래서 기본적인 보병전투장비 정도만 갖춘 알보병 집단에 가까울 정도로 전락하였다. 이런 문제는 미군의 지원을 서서히 받으면서 조금씩 해결해나갔지만 미군도 당장 모자란 숫자만 보유하는 병력 수송용 트럭 같은 것은 평양 탈환작전 당시에도 제1사단 전체에 차량이 50여대 밖에 없는 등 해결이 상당히 어려웠다.

11.2. 북한군

북한군의 피해상황은 더 불명확하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항목은 한국군의 육탄돌격으로 전차 몇대가 격파당한 것인데 그것도 전장지역을 곧 확보함에 따라서 후송한 후 수리해서 재투입이 가능했으므로 결정적인 타격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정규병력만 따져도 2대 1의 비율이었고 보조병력까지 합하면 3대 1 이상의 절대적인 우세상황에서 포병과 전차의 지원을 제대로 받았으므로 북한군의 손실은 한국군보다 매우 적었음을 충분히 짐작가능하다. 다만 보병간의 전투에서는 백중세를 기록하거나 타격을 입은 경우가 많아서 병력 손실이 어느 정도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북한군 제1사단이 북한군 제6사단보다 손실규모가 더 컸다고 판단되고 있다. 그 이유는 최광이 지휘하는 북한군 제1사단은 1이라는 이름이 붙은 특성상 북한출신, 중공군 출신, 소련군 출신이 모두 섞인 부대였고 각 계파들이 서로 경쟁하는 부대라서 부대의 통합성면에서 별로 좋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었던 것에 있다. 장비는 훌륭했으나 사단 전체를 통솔할만한 큰 비중이 있는 인물이 부족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최광도 북한군 제1사단장 직책을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부여받아서 부대를 장악할 시간이 부족했고 제1사단장 재직중에 그렇게 큰 공적을 세우지 못했다고 평가받았으며 북한군이 패배에 직면했다가 중공군 개입으로 간신히 되살아나기 시작한 시기인 1950년 12월 21일에 조선노동당 당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비판을 받고 해임당할 정도의 수모를 겪었다.

이와는 반대로 북한군 제6사단은 방호산이 이미 사단장으로 재직중인 중국공산당 인민해방군 제166사단이 북한과 중공의 협의 결과로 인해 사단이 통째로 북한으로 입북한 후 병력을 현지에서 보충해서 만들어진 사단이므로 방호산이 처음부터 제대로 통솔하고 있었고 병력도 조선족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며 실전 경험이 많고 비정규전 경험도 많으며 방호산 이하 중요 장교들이 국공내전에서 호흡을 맞춘지 오래된 상황이라서 정예병력이었다. 그래서 북한이 남침계획을 짤 때 북한군 제6사단에게 광범위한 곳에서 조공을 수행 + 개성시를 빠르게 함락 + 김포반도로 상륙해서 서울에 집중한 한국군의 퇴로를 차단한다는 매우 막중한 임무를 주고 소련군에게서 지원받은 도하장비를 몰아주기까지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블라디미르 라주바예프가 쓴 보고서처럼 개전하자마자 북한군 내의 통신이 두절되는 등의 혼란이 발생하자 비정규전에 능하고 휘하 병력을 제대로 통솔하는 방호산이 자신의 능력을 더 많이 발휘한 반면에 소련식 지휘통제를 따르는 최광은 휘하 부대 장악도 제대로 안된 상태라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북한군 제6사단이 손해를 별로 받지 않고 한국군을 타격하는 동안 북한군 제1사단은 정면공격하다가 반격타를 얻어맞는 등의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12. 평가

전반적인 평가는 여러가지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불리한 곳에서 압도적인 적을 상대로 지연전을 잘 수행하였고 부대 편제를 유지하면서 계속 전투를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높은 점수를 받는다.

다만 후퇴과정에서의 붕괴상황은 말 그대로 그냥 거기서 제1사단이 해체되어 버릴 정도였지만 부대 장병들이 각자 알아서 한강을 도하한 후 재집결했다는 행운 및 충성심이 기반이 된 결과다. 실제로 백선엽 사단장도 한강을 건널 때 그냥 제1사단이 여기서 사라지는구나 하고 절망에 빠졌지만 집결지인 시흥에 가보니까 휘하 장병들이 대규모로 집결해서 식사를 하면서 사단장을 기다리고 있던 것을 보고 감격했다고 한다.

12.1. 전투

개전 당시 삼팔선 방어 분야에서는 100km가 넘어가며 불리한 지형에다가 자연적인 배수진 지형이었다고 하지만 상당히 미흡한 점이 많았고 손실도 컸다고 평가된다.

사실 청단, 연백을 지키던 제12연대 3대대는 거기서 그냥 완전전멸판정을 받아도 무방한 상태였고 분산철수해서 귀환한 것 자체가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제12연대 주력도 개성에서 포위섬멸당하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고 제13연대 3대대의 고랑포 전투는 현지 장병들이 이룩한 업적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점에서 개성시 시가지에서의 시가전 준비나 개성시 남쪽의 산악지대를 이용한 지연전 성격의 방어선을 건설하지 않았거나 임진강철교 폭파계획을 부실하게 잡아놓는 등의 실수가 들어갔으므로 이 점에서는 사단본부의 지휘는 좋은 평가를 내리기가 어려우나 당시 한국군의 열악한 상황 및 신임 사단장이 부대를 장악할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당시 한국군 기준으로는 우수했다고 볼 수 있다.

임진강 방어선에 대해서는 착상은 아주 좋으나 실제적인 실천이 모자랐다는 점이 아쉽다. 지금의 군사분계선과는 달리 삼팔선임진강 본류가 삼팔선 이북으로 들어가는 구간이 더 많아서 북한군이 임진강을 건너지 않고 우회할 수 있는 구간이 존재하며 이는 우측에 있는 제7보병사단이 메꾸기에도 힘든 처지이므로 여기에 따른 대처가 필요했는데 그게 부족했다. 그래서 임진강 방어선 자체는 오래 버티지 못했고 자연지형인 파평산을 이용한 진지에서의 방어는 성공적이었으나 그 옆을 우회당해서 결국 밀려버리게 되었다.

봉일천 방어선에 대해서는 긴급건설한 방어선 치고는 제대로 작동하였고 국지적인 반격을 통한 방어시간 증대도 좋았다. 봉일천 방어선이 무너진 것은 우측의 제7보병사단이 중과부적으로 무너지면서 서울로 진격하는 길이 열려버린 탓이 크므로 제1보병사단의 탓이라고 보기 어렵다. 여기서는 사단의 지휘는 제대로 돌아갔다.

전반적으로 볼 때 장병들의 사기는 높았고 충성심도 높았으며 북한군 전차에게 먹히지 않는 열악한 장비를 가지고도 전차에 대항해서 육탄전을 벌이는 등 능력도 탁월했다고 본다. 지휘관의 지휘도 신생국가의 장교치고는 상당히 좋은 수준이었다.

그 외에 북한군 제6사단에게 개성을 순식간에 빼앗기거나 전투시에 우회를 당하거나 김포반도를 통해 진입해서 행주에서 후퇴하는 부대를 기습한다던지 하는 식으로 전술적으로 당한 것이 어느 정도 있다. 하지만 이는 북한군 제6사단이 원래 팔로군 출신의 실전경험 많은 비정규전 전문가들의 집단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북한군 제1사단은 어느 정도 잘 막아냈으니 한국군 제1사단이 무능한 것이 아니라 경험의 차이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12.1.1. 대전차 전투

정면에서 북한군 전차를 상대하지 못하는 대전차화기를 가지고도 한국군 제1사단은 의외로 잘 싸운 편이며 육탄부대를 동원해서 북한군의 전차중 일부를 격파하거나 노획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북한군도 전차를 호위병력 없이 단독으로 진격시키는 등 아직 전차를 운용하는 능력이 매우 미숙한 것도 작용했다.

다만 전쟁이 터져서야 전차를 처음으로 보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당시의 한국군은 기갑에 대한 이해도가 없다시피했고 그래서 전차를 막아내지 못할 때의 공포심이 부대 전체에 전염되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서 수송용 트럭을 운전하는 사람도 얼마 없던 시절이니 전차를 노획해도 운용은커녕 이동도 어려워서 잘해봐야 전차 내부의 비품을 털어가고 수류탄을 던져넣어서 약간 파손시키는 정도로 끝났기 때문에 전투가 끝나고 한국군이 후퇴한 후 북한군이 방치된 전차를 다시 재노획해서 수리후 전장에 재투입하는 사례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전차를 고철로 만들어놓을 공병용 폭약도 부족했던 당시 한국군의 열악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12.2. 후퇴

전투면에서의 좋은 평가와는 달리 후퇴에서는 매우 안좋은 평가를 받는다. 톡 까놓고 말해서 장병들이 스스로 잘해서 분산철수하고 각자도생해서 본대에 귀환해서 재집결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그냥 제1사단이 한강 북쪽에서 붕괴되었음하고 기록될 정도로 제1사단이 완전히 끝날 뻔했다.

일단 정면의 적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다른 부대의 상황을 전혀 살펴보지 않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철수준비를 해야 할 상황에서 반격에 돌입함으로서 일을 더 어렵게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명령전달체계가 너무 부실해서 명령을 못받거나 나중에서야 진상을 알게 된 후에 급속후퇴하면서 피해가 더 늘기도 했다. 애초에 급조한 증원부대를 자주 받아서 생긴 일이라고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나도 휘하 부대간의 소통이 잘 안되고 연락도 잘 안된 것은 비판받을만한 일이 맞다.

마지막으로 후퇴시의 혼란상은... 할 말이 없다. 장병들이 혼란에 빠진 것도 이미 여태까지의 전투에서 툭하면 연락이 끊어지고 북한군이 어느 새 인접부대가 지키던 곳에 들어와서 공격해오거나 반격을 하다가 뒤늦게 후퇴명령을 받으니 이미 반포위당해서 부대가 반쯤 괴멸당한다던지 하는 일을 이미 3일간의 전투에서 몇 번을 겪었는데 이번엔 한강을 건너서 후퇴해야 하니 당연한 일이다. 그걸 수습해야 할 장교들이 계급장을 분리하고 병사로 위장하거나 아예 사복으로 갈아입고 민간인인 척한 것은 진짜로 답이 없었다.

따라서 장병들이 스스로 잘해서 병력만큼은 다시 재집결할 수 있었으나 소총과 개인장비같은 것을 제외한 중장비나 중화기, 수송용 트럭같은 것은 전부 한강 이북에 버리고 왔기 때문에 사단 자체의 화력과 이동능력은 크게 감소하게 된다.

12.3. 종합

이런저런 문제는 많았으나 춘천-홍천 전투에서 대승한 제6보병사단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매우 양호한 결과가 나왔고 불리한 조건에서 3일간 경의가도를 막아냈으며 사실상 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부대가 분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재집결해서 부대 편제를 유지한 것은 대단한 일이므로 당시의 한국군의 열악한 상황을 감안한다면 전반적으로 우수했다고 볼 수 있다.

13. 여담

개전 초반의 혼란한 상황속에서 각 부대의 산하 소부대나 경찰같은 보조전투인원에 대한 자료가 매우 부족한 편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불리한 지형과 개전 직전의 휴가, 외박으로 인해 평시보다 줄어든 병력상태에서 갑자기 북한군의 기습을 맞이했기 때문에 방어진지가 순식간에 포위된 후 거기서 빠져나온 생존자가 없는 경우가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해당 부대 소속이라고 해도 개전 당시에 휴가나 외박으로 현지에 없던 경우라서 당시 상황에 대해 증언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으며 개전 초반의 전투에 직접 참여한 생존자들도 3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전투를 수행하다가 전사한 경우도 많아서 현재 시점에서는 더 이상의 자료를 수집하기가 곤란하다.
[1] 6월 26일부로 고임현 대위로 교체[2] 6월 26일부로 김점곤 중령으로 교체[3] 제105기갑여단 제203전차연대[4] 현재 개풍군 연강리[5] 현재 개성시 룡흥동 일부[6] 현재 월곶면 용강리[7] 당시의 노곡리는 38선 경계 바로 밑, 즉 최북단 지역이었다.[8] 청송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