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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호(1911)

파일:광복군 김문호.pn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학산(學山)
출생 1911년 1월 5일
황해도 해주시 백림동(栢林) 100
사망 1999년 3월 29일
학력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 졸업
광복 전 경력 중화민국 중앙군 제 3전구 닝보방수사령부(寧波防守司令部) 소교[1]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주임 겸 선전조장
(韓國光復軍 第三徵募分處將)[2]
광복 후 경력 미군정 CIC 요원
대한민국 육군 헌병총사령부 조사과장 [3]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733호
상훈 대통령표창(1963)
건국훈장 애국장(1991)
1. 개요2. 생애3. 중국군 시절4. 독립운동5. 광복 이후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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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대장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2. 생애


1911년 1월 5일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백림(栢林)에서 출생하였다. 해주보통학교와 해주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하여 1933년 4월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에 입학했었고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37년 중국인 학생을 가장하고 독일 기선을 타고 일본 나가사키를 탈출하여 저장성(浙江省) 찐화(金華)에서 중국군에 체포되어 심문받던 중, 중국인 와세다 대학 동창생 닝보(寧波)로 망명하였다. 1940년 6월부터 중화민국 제 3전구 사령부에서 정치부 설계위원으로 복무하였다.

3. 중국군 시절


1937년 8월 중화민국 중앙군 제 3전구 닝보방수사령부(寧波防守司令部)[4] 정치부에 특채되어 1939년 12월 소교(少校)[5]로 진급하고 제 3전구 방송국에서 반전방송을 하였으며 일본군 포로 심문과 일본 문서 및 서적 등에서 적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중국중앙군관학교 제 3분교에서 특수교육을 받았다. 1940년 9월 광복군을 창설했다는 소식에 충칭(重慶)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찾아간다.

4. 독립운동

1941년 3월 1일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 거행된 광복군 징모(徵募) 제3분처 성립식에서 주임 겸 선전조장에 임명되어, 한도명(韓道明, 훈련조장)·이지일(李志一, 정보조장)·신정숙(申貞淑, 회계조장)·강치명(姜治明)과 함께 중국군 제 3전구의 중심지인 장시성(江西省) 상라오(上饒)에 파견되었다.
파일:제 3징모분처 발족식.jpg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 위원 환송기념식(1941년 3월 1일)
충칭시 허핑루(和平路) 우시예샹(吳師爺巷) 1 호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는 이날 오전 제23주 3·1절 기념식의 뒤를 이어, 오후에 김구(金九) 주석, 지청천(李靑天) 광복군 총사령관을 위시한 정부·군·정당 관계 요인들이 다수 참석한 가운데 임시정부 비서 실장 차이석(車利錫)의 사회로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의 성립 전례식(典禮式)이 있었는바, 이 날 임명장을 받고 임지를 향하여 떠나게 된 제3 징모분처의 임원 명단은 아래와 같다.[6]

일본군은 괴뢰 왕징웨이(汪精衛)군(軍)과 합세하여 소위 절서대전(浙西大戰) 일으켜난징(南京), 쑤저우(蘇州)로부터 5만 병력으로 저장성(浙江省) 란씨현(蘭溪縣)을 침공함으로 구주통(顧祝同)사령장관 및마수리(馬樹禮) 정치부 부주임의 요청에 의하여 동분처 전원은 찐화(金華) 제 10집단군(第十集團軍) 총사령부 리우젠쑤(劉建緖) 상장과 제휴, 합류하고 대적선전 및 야전방송 또는 정보수집공작을 계속 강행 중, 훈련조장 한도명[7]씨는 란씨역(蘭溪驛) 전투에서 부상하여 후방지구인 찐화현(金華縣) 소재 대만의용대 부속병원에서 가료한 바 있으나 불행히 순국하였다.

광복군 병력 모집과 선전공작 임무를 맡아 6개월간 징모 활동을 벌여 23명을 모집하였다. 『유주일보(柳州日報)』 1941년 4월 17일자에 실린 한진원(韓鎭源)의 「조선인의 입장에서 본 삼민주의」에 의하면, “한국인으로 한국 임시정부의 명을 받아 한국광복군 동남지대의 징모 업무 담당하고 있었다”라고 한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 제 1지대로 편입됨에 따라 광복군 재편성하게 되는 과정에서 제 3 징모분처가 제2지대 3구대 3분대로 개편되면서 분대장에 임명되었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 공작인원 명단(1943년 7월)
직책 성명 연령 적관 출신 비고
대장 김문호 29 황해 해주 해주보통학교, 해주중학교, 와세다 대학 법학과 졸업
대원 김운경 27 경성 경성 매동공립보통학교 제 3전구 포로/ 광복군 편제에 제외 보안처에서 관리
대원 왕영일 32 함남 원산 일본 다이인 고급중학 졸업제 3전구 포로
대원 마춘림 31 황해 해주 해주중학 졸업 제 3전구 포로
대원 신봉빈 31 전북 전주고등과 여성, 신정숙으로 김문호의 내연녀
대원 이지일 28 평북 신견중학 교사 가명 전선학[8]
대원 김형석 25 전북 농림학교 졸업, 측량기사 이소민 부대 편입
대원 이명식 24 황해 해주 고등학교, 장사 이소민 부대 편입
대원 한진원 24 경기 경기 숭실중학 졸업, 교사 제 3전구 포로, 현재 항저우에 있음
대원 유명경 26 강원 강원농업학교 졸업, 농림기사 펑텐 거주
대원 유상운 27 황해 해주 옥산여고 졸업, 교사 여성, 상하이 거주
대원 이기심 27 경기 인천중학 졸업, 기사 제 3전구 포로, 항저우 거주
대원 진몽각 35 평북 신의주 중학 졸업, 제지회사 사원상하이 거주
대원 증 명 24 경기 경기고등직업학교 졸업 난징 거주
대원 조동걸 28 함북 청진고등중학 졸업. 교원 상하이 거주
대원 최일영 29 경기 경성 숭실중학 졸업, 운전수 상하이 거주
대원 김운정 33 전남 하포중학교 졸업, 장사 난징 거주
대원 사중득 24 전남 부산중학여성 이소민 부대 편입
대원 유증영 26 중국 산시성 간이사범학교 졸업 여성, 중국인, 이소민 부대 편입
대원 정봉수 제 3전구 포로, 횡령 도망하여 붙잡혀 처벌됨.
대원 김 의 제 3전구 포로, 정봉수와 도망

1943년 1월 24일 이소민(李蘇民)이 이끄는 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와 더불어 제 3분대가 제 3전구[9]에서 활동하였다. 중국 측 자료에 “김문호와 상급자인 제1지대 제2구대장 이소민은 계통이 달라 평소 의견 충돌이 빈번하다. 김문호는 공산당 계열로 분류되는 이소민과 서로 한인을 받아들이기 위해 치열하게 경합하고 있어, 이 지역 한국광복군의 내홍이 심각하다”라고 하였다. 광복군 제1지대에 합류한 조선의용대와 갈등을 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1942년 4월 18일에 미 육군 항공대의 제임스 해럴드 둘리틀(James Harold Doolittle) 당시 항공 중령이 이끌었던 둘리틀 특공대가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보복작전으로 실행되어 일본 제국 도쿄, 오사카 등 주요 도시에 폭격을 가했다. 폭격기 50대는 일본 도쿄를 폭격한 후, 중국 제 3전구 위샨(玉山) 비행장에 착륙하라고 지령을 받았으나 위샨(玉山) 비행장당국의 주부의로 인하여 폭격기 40여대가 일본점령지구에 불시착륙 또는 추락됨으로써 미 공군장병 수백명이 상하이(上海) 장완(江灣)비행장 내의 미군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여 중노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미 공군에서는 미군들이 수용되어 강제 노동을 하고 있는 포로 수용소와의 긴급 연락을 위한 임무 수행 등을 중국군 당국에 요청하여 왔는데, 중국 제3전구 정치부에서는 그 실행 책임자로 한국광복군의 김문호(金文鎬)를 추천하였다.

1944년 11월, 김문호는 제 3전구 사령부의 정치부 부주임마수리(馬樹禮)의 주선으로 당시 제 3전구에 있는 주중 미 제 5공군사령부 제 3전구 파견대장 쑈-요 소령를 만나 구체적인 토의를 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상하이 장완(江灣)에 있는 포로 수용소와 비밀 연락을 취하고, 수용소에 있는 미군포로들의 구출 공작을 전개하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장완 수용소 및 부근 일대에 있는 영·미군 포로 수용소의 위치를 확인하여 그 소재지를 연합군의 폭격 대상에서 제외하게 하는 사항도 있지만, 우선 미 공군 포로 중 어느 한 사람에게나 비밀 통신문을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김문호는 미 공군에서 제공하는 비밀 통신문과 공작금을 가지고 분처로 돌아와 이강(李剛)·정화암(鄭華岩)·신정숙(申貞淑)·전복근(全福根)·강치명(姜治明) 등과 함께 비밀 간부 회의를 열고, 공작 업무 수행에 관한 방안을 신중히 토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비밀 통신 연락 공작은 다년간 상해 방면에서 잠복 활동하여 온 정화암(鄭華岩)[10]이 현지 임무를 책임지고, 김문호를 일반적인 정보 수집 등을 담당하기로 하여, 주중 미 공군 사령부에 미·영 포로 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 보고함으로써 수용소 소재지에 대한 폭격을 중지하게 하는 등 한·미 합작의 성과를 거두었다.

1945년 3월 31일 시점에서 이끌던 3분대가 젠양(建陽)에서 활동하였음이 확인된다. 6월까지의 징모 제 3분처 전체인원은 120여명에 달하였는데 그 중에는 상당한 지식층이 36명이나 있었음으로 앞으로 초모공작을 계속 치중한다면 수개월 이내에 반드시 수백 애국청년들이 입대할 것이 확실시되였으며 이때까지의 간부 및 대원명단은 아래와 같다.
김문호, 이지일, 안병무, 신정숙, 김형석, 이일범, 김응삼, 조일문, 박철원, 정봉주, 김운경, 박승유, 김해일, 한진원, 전호인, 피문성, 박재봉, 신재섭, 김영관, 한말다, 이희화, 한응규, 이장용, 김영남, 박병두, 박종선, 윤우현, 유재영, 태대균, 이동욱, 정윤관, 정영호, 유증영, 유상언, 유상공, 모숙인, 김유난, 김윤국, 장동식, 김해동, 김응전, 김덕원 이복록, 정희섭, 이당백, 박흥선, 임계원, 계지풍 박재화, 김대준, 안병성, 김호, 피안창주(片昌周, 중국인), 김용, 김여재, 정일영, 박시준, 마일신, 심용철, 김성원, 정영, 허동무, 홍순택, 김성원, 김현태, 김상태, 박재성, 최창일, 문현모,쑤징허(蘇景和, 중국인), 왕하이칭(王海靑, 중국인), 링단루(凌澹如, 중국인),렌시위안(任世源, 중국인), 유익배, 송지영, 박재화, 이일도, 이찬원, 석길주, 봉검청, 신원, 김영종, 민종석, 당기수, 최성걸, 정천, 김광석, 박열부.

5. 광복 이후

1947년 봄, 이순용[11]의 추천으로 미군정 CIC 요원으로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민국 육군 헌병총사령부 조사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이일범과 같이 공조했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오산방어전에서 치안국 교육과장 이일범에게 김석원장군을 소개시켜줬고, 김석원 장군이 경찰병력 7천명을 주면 북한군을 괴멸시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지만, 당시 오산에 들어왔던 북한군 정예사단들이었다.

6. 참고문헌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57 373 379면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3권 222 223 224면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자료 1권 475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624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777·781·825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211 233 234 236 237 238 439 440 441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38면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5권 74 85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235·237·264·267·830면
정화암, 정화암 회고록-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1992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2
[1] 소령[2] 한국광복군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강남분대)라고도 불리나 동명의 분대가 시안(西安)에 있었기 때문에 '제 3징모분처'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었다. 실지 업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제 2지대 본부가 있던 산시성 시안과 제 3분처가 있던 젠양과는 수천킬로미터에 있었기 때문에 통신연락이 신속하게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3] 계급은 소령[4] 닝파를 지키는 방위사령부[5] 소령[6] 김구(金九) 저 ≪백범일지(白凡逸志)≫ 기적(寄跡) 장강(長江) 만리풍(萬里風) 조, 김문호(金文鎬) 제공인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3 분처 자료 참조[7] 본명 김응삼[8] 본명은 김응삼, 일명 한도명으로 알려져있는 평북 선천 출신 인물로 1942년 6월에 절감회전(浙贛會戰) 난계역에서 총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이규학(이지일)이 동료의 별명을 문서에 적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9] 제 3전구 사령장관 구주통(顧祝同)[10] 정화암, 정화암 회고록-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1992, pp..220~223에 자세히 적혀있다.[11] 미국 육군 중사 신분으로 CIC(미군 방첩대)에서 국무부 촉탁으로 일하며 백의사와 CIC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으며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도 기여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군정(1948)이 해체되면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