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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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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 미합중국 육군 · 필리핀 자치령 육군
관련 인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기타 인천상륙작전(영화) · 인천상륙작전(웹툰)
참전한 전쟁에 대한 내용은 더글러스 맥아더/생애4·5·6·8번 문단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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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군사적 능력
2.1. 임관 ~ 제1차 세계 대전2.2. 제2차 세계 대전
2.2.1. 1차 필리핀 전역2.2.2. 코코다 트랙 전투2.2.3. 뉴기니 전역2.2.4. 2차 필리핀 전역
2.3. 한국전쟁
2.3.1. 개전 ~ 인천 상륙 작전2.3.2. 38선 돌파2.3.3. 1950년 겨울2.3.4. 핵무기 사용 및 확전 주장
3. 행정 및 정치 방면
3.1. 사상3.2. 웨스트 포인트의 개혁을 주도하다3.3. 보너스 군대 유혈진압 사건3.4. 미국 기갑전력 약체화의 책임3.5. 필리핀군 육성의 실패3.6. 시대를 앞서간 이미지 관리3.7. 푸른 눈의 쇼군3.8. 해방 직후 한반도 정세에 대한 책임론3.9. 이승만의 동지
4. 성격 및 인간성
4.1. 자부심4.2. 독선4.3. 확증편향4.4. 유연성과 관대함
5. 총평

1. 개요

더글러스 맥아더에 대한 평가로 맥아더 문서에서 분리되었다.

2. 군사적 능력

2.1. 임관 ~ 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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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가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한 이래 제1차 세계 대전까지의 경력은 완벽 그 자체였다. 맥아더를 싫어하는 이들도 이 시기의 맥아더가 대단했다는 걸 부정하지 못할 정도. 물론 그의 할아버지가 주지사였고 아버지는 전쟁 영웅이었으며 어머니 핑키 여사가 아들을 위해 사생활을 희생하면서까지 대단한 지원을 해주고 아들의 빠른 진급을 위해 상관들에게 수시로 승진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그의 주변 환경이 매우 유리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막대한 지원과 배경도 본인이 잘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다. 재벌 2세가 집안의 막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방탕한 삶을 살다가 말아먹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반면에 맥아더는 그 스스로도 열심히 공부하여 웨스트포인트에서 역대 3위에 해당하는 대단히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임관 후에도 빠른 진급에 걸맞는 활약을 선보여 출세가 너무 빠르다는 비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모든 사람은 무능해지는 순간까지 진급한다는데, 이때의 맥아더는 진급하고 또 진급해도 유능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1차 세계대전 당시 제 42사단[1]의 참모로 부임한 뒤의 활약상은 실로 대단했다. 그는 후방 기지에서 책상에 앉아 서류를 끄적이는 걸 혐오했고, 전장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며 적을 향해 앞장서서 돌격하곤 하였다. 심지어 철모와 방독면도 쓰지않은 채 권총 한자루만을 가지고 "전진! 전진!"을 외쳐대며 적지로 달려가는 그의 행동에 쇼맨쉽이 가미된 것은 사실이지만 부하들에게 존경심을 심어주고 상관들의 신임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총포탄과 독가스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쇼맨쉽을 펼치는 거니까. 독가스에 2번이나 피폭당하면서도 전선 지휘를 고집한 그는 미군의 정예부대에 걸맞는 활약을 했다. 또한 그는 휘하 병력을 잘 이끌어서 독일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했고, 제 42사단은 1차 세계대전사에서 뛰어난 활약을 선보인 우수한 사단으로 기록되었다. 그 결과 그는 남들은 하나 달기도 힘든 훈장을 15개나 달았고 그 중 은성훈장(Silver Star)을 7번이나 달았다. 이렇듯 이 시기의 맥아더는 호평 받아 마땅한 군인이었다.

2.2. 제2차 세계 대전

2.2.1. 1차 필리핀 전역

파일:BjNSb2aIUAEAGF2.jpg

1935년 10월, 맥아더는 필리핀 연방정부의 군사 고문 겸 원수에 취임했다. 그후 그는 훈련 캠프가 거의 건설되지 않고 장부상에 병역 대상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군대에 없는 이들이 수두룩하고 장비와 무기는 형편없고 예산은 엉뚱한 곳에 쓰이는 등 온갖 문제점이 산적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맥아더는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노력했고 정부에 무기 및 PT 보트 지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미 정부도 세계 대공황 때문에 국방비를 감축하는 상황이라 맥아더에게 최신식 무기나 PT 보트를 지원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정부는 드럼 요새 등 중장갑 요새 시설이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는 답을 보냈고 맥아더는 이에 상당히 분노했다.

하지만 1941년 무렵 미국은 필리핀에 상당한 지원을 해줬다. 필리핀 수비군은 1941년 7월에서 12월까지 8500명을 증원받았으며 많은 장비들을 선적했다. 또한 11월까지 110만 톤에 달하는 장비가 미국 항구와 창고에서 필리핀으로 운송해줄 선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맥아더 휘하 병력도 상당했다. 1941년 12월 당시 보병 병력은 필리핀 병사 12만, 미군 병사 1만 9천 명으로 종합 13만 명이었고 전차는 108대였고 전투기 및 폭격기는 B-17 폭격기 35대, P-40 전투기 107대 등 총 249대(전투기는 175대, 폭격기는 74대)였다. 반면 필리핀을 침략한 일본군 전력은 제 14군 소속 12만여 명이었고 탱크는 90대였으며 전투기 및 폭격기는 총 541대였다. 그나마도 전투 후반인 1942년 2월 무렵엔 다수의 병력이 동인도 방면으로 이동하고 제65여단이 단독으로 바탄을 포위 공격했다.

그런데 맥아더는 이 시기에 실책을 연이어 범했다. 우선 방어 전략을 잘못 정했다. 미국의 초기 필리핀 방어 계획은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마닐라만의 바탄 반도로 후퇴하여 일본군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필리핀 전역의 해안 지대에 군대를 배치하고 B-17 폭격기를 사용하여 섬에 접근하는 일본 선박을 침몰시키는 계획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필리핀의 해안은 15만 군대로 커버하기엔 너무 길었기 때문에 방비가 소홀해진 곳이 많았고, 일본군이 필리핀에 상륙하여 내륙에 진입했을 때 이를 저지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맥아더는 일본군이 성공적으로 상륙해 내륙으로 진격해오는 상황에서도 이틀 동안 아무런 지령도 내리지 않다가 뒤늦게 해안 지대에 배치된 병력을 바탄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해안 지대에 주둔한 15만 병력 중 7만명 만이 바탄에 철수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물자들은 해안지대에 남겨져서 바탄에 남아있는 물자는 매우 부족했다.

또한 그는 일본의 예상되는 침략에 대항할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Station CAST라고 알려진 섬의 해군 요격 기지에는 일본의 외교 소식을 해독하는 일급 비밀 암호 시스템과 최신 JN-25 해군 코드의 코드북이 있었다. 맥아더의 부관 리처드 서덜랜드는 이 Station CAST에서 해독한 정보를 맥아더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다가 1941년 12월 8일 03시 30분, 서덜랜드는 진주만 공습 소식을 맥아더에게 알렸다. 그리고 05시 30분, 미국 육군 참모총장 조지 마셜은 맥아더에게 기존의 전쟁 계획인 레인보우 파이브를 시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맥아더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극동 공군 사령관 루이스 H. 브레톤은 3차레에 걸쳐 전쟁 전에 정해진 대로 대만의 일본 기지를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요청했지만 서덜랜드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브레톤은 맥아더에게 가서 11시전까지 대화했으나 허가를 얻지 못했고, 맥아더는 아예 브레톤과 대화 자체를 거부해버렸다.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진주만 공습 9시간 후인 12시 30분, 일본 제11항공 함대 소속 폭격기가 이바 필드에서 클라크 필드와 근처 전투기 기지를 공습했다. 그 결과 35대의 B-17 폭격기 중 18대가 파괴되고 107대의 P-40 전투기 중 53대가 파괴되었으며, 3대의 P-35 전투기와 25대의 다른 비행기들이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거기에 8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150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극동 공군의 남은 전투기들도 며칠만에 모두 파괴되었다. 반면 일본 항공기의 손실은 겨우 7대였다. 만약 맥아더가 제때에 '레인보우 파이브'를 시행하고 브레톤의 요청대로 대만의 일본 기지를 공격하게 해줬다면 이러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현장에 가서 병사들을 독려하긴 커녕 몇몇 인사들과 함께 말타 터널에 숨어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병사들에게 전황을 타개할 이렇다할 작전도 제대로 지시하지 않았다. 이에 병사들은 그를 "참호속의 더그(Dugout Doug)"라고 조롱했다. 지휘관이 이렇듯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는 상황에서도 바탄 현지 미군 장교들은 최선을 다해 일본군에 맞서 싸웠고, 일본군은 20사단의 3개 대대가 궤멸되는 등 막심한 손해를 입었다. 그리고 1942년 2월 무렵엔 일본군 제65여단 7천명이 미군-필리핀 연합군 7만명이 지키는 바탄을 포위 공격하는 묘한 상황이 펼쳐졌다. 상식적으로 보면 미군-필리핀 연합군이 밀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급품들을 해안지대에 내팽개친데다 7만명에 달하는 피난민까지 먹여 살리는 바람에 물자가 완전히 소진되어서 연합군의 전투력 자체가 소멸되었다. 게다가 공군이 너무 허무하게 궤멸되는 바람에 일본의 공습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맥아더는 뾰족한 대책을 세우지 않고 코레히도르 섬의 터널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러다가 루즈벨트의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하라"는 지시를 받자 웨인라이트 장군에게 지휘권을 넘긴 뒤 가족과 전속부관 등 소수의 인원만 대동한 채 미 해군 어뢰정 2척을 타고 심야에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했다. 실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앞장서서 군대를 지휘했던 용감한 참모와 동일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졸렬한 행보였다.

2.2.2. 코코다 트랙 전투

파일:150818-740-3October1942-USGeneralMacArthur-SupremeCommanderBlamey-CommanderMJAllen_0.jpg

맥아더는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한 뒤 1942년 4월 18일 남서 태평양지역 연합군 최고 사령관에 부임했다. 그 후 그는 군을 재정비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다가 1942년 6월 일본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하자 태평양 지역에서의 제한된 공세를 고려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먼저 공세를 개시해 1942년 7월에 뉴기니섬 동남부 해안의 부나에 상륙한 후 90여km를 진군해 포트모르즈비를 공략하려 했다. 미군 입장에서는 포트모르즈비를 잃게 되면 일본에 맞설 반격 교두보인 뉴기니섬을 잃게 되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동해안이 일본 공군의 습격에 노출되기 때문에 반드시 막아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미군 측이 전투 병력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있는 병력은 과달카날 전투에 투입되었고 해, 공군 역시 그쪽으로 파견되었다. 그래서 호주군이 주축이 되어 막아야 했는데, 그들은 기본 훈련은 이수했지만 정글 전투에 필요한 훈련을 전혀 받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맥아더의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지형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고 현지 시찰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는 초기에 병력을 배치할 때 "해당 지역으로 가면 작은 구렁텅이가 있으니 그곳에서 방어하라."고 지시했으나, 그 작은 구렁텅이는 사실 7마일이 넘는 계곡으로 밝혀져 현장에 도착한 부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게다가 맥아더는 아군 병력이 적보다 훨씬 많아 전황이 유리함에도 병사들이 무능하고 용기가 없어서 진격하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져서 무리하게 진격을 독촉하기 일쑤였다. 급기야는 워싱턴에 무전을 보내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병사들을 투지가 없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을 아는 현지 지휘관들은 직접적인 공세만을 독촉하는 맥아더의 명령을 무시하고 게릴라 전술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여기에 일본군이 정글과 산악지대를 무리하게 돌파하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음으로서 전세는 미군에게 유리해졌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는 영 좋지 못했다. 맥아더는 미군 지휘관이 이끄는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 구성된 제32보병사단을 부나에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나 이 군대는 훈련이 잘 되지 않은 민병대였다. 이후 부나-고나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미군 지휘관들을 비판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고집을 꺾지 않고 호주군 지휘관 로버트 L. 이체베르거 중장에게 "부나를 되찾지 못하면 다시는 살아서 돌아오지 말라."는 살벌한 명령을 내렸다. 결국 1943년 1월 3일 부나를 되찾는데는 성공했지만, 미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사상자 수는 미군 사상자 1만 2291명(전사자 4684명), 호주군 사상자 2만여 명에 달했다.

2.2.3. 뉴기니 전역

1943년 3월, 맥아더는 '개구리 뜀뛰기 작전'을 함동참모본부에 제안해 승인을 얻어낸다. 이 작전의 요지는 적의 대군이 주둔하고 있는 섬은 회피하고 꼭 공략해야 하는 요충지만 골라 점령하면서 일본군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1943년 9월부터 반드시 공략해야 하는 뉴기니 섬 공략전에 착수했고 힌시 만과 웨와크에 주둔한 일본군을 우회하여 해안에서 600마일을 과감하게 진군해 자야푸라와 아이타페를 공략했다. 이러한 맥아더의 작전은 큰 성공을 거두어 뉴기니를 짧은 시일 내에 성공적으로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필샤폔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350명 뿐이라고 판단하여 제9사단에게 공격을 명했다가 사실 5,000명이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군에게 고전하게 만드는 등 소소한(?) 실책도 있었다.

2.2.4. 2차 필리핀 전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Douglas_MacArthur_lands_Leyte1.jpg

1944년 7월, 루즈벨트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일본에 대한 공세의 순서"를 결정하기 위해 맥아더를 불러들였다. 니미츠 제독은 대만을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맥아더는 필리핀을 해방시켜 미국의 도덕적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해 9월, 윌리엄 홀시 제독은 필리핀에 공중 포격을 가했다. 적의 반발은 미약했고, 홀시는 레이테 만이 "개방적이고 무방비한 상태"라고 결론을 내리고 레이테만에 대한 공격에 찬성했다. 이에 루즈벨트는 맥아더의 뜻대로 필리핀 탈환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맥아더는 1944년 10월 20일 40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해 필리핀을 대대적으로 침공했고 26만에 달하는 필리핀 게릴라들이 여기에 합세했다. 필리핀 전역은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며 양측에게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군 40만여 명 중 39만여 명이 전사, 실종, 병사, 아사, 또는 이탈했으며 최후까지 남은 만여 명만이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이 루손의 산악지대에서 내려와 항복할 때까지 항전했다. 반면 미군의 손실은 육군 1만 6천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었고 5만 5531명이 부상당했으며 해군 7270명이 전사 또는 부상당했다.

비판자들은 맥아더가 전쟁 후반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대만에 비해 상대적으로 군사, 지리적 가치가 떨어지는 필리핀에 해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상륙 계획을 감행하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개구리 뜀뛰기 작전'을 기획한 사람이 40만 대군이 주둔한 필리핀을 무리하게 공격하게 해 막심한 손해를 미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필리핀 공략을 결정한 건 맥아더가 아니라 루즈벨트 대통령이며 니미츠 제독 등 해군도 나중에 동의했다. 미국 입장에서 필리핀의 중요성은 매우 컸고 동남아시아에서 일본 본토로 연결되는 보급로를 끊기 위해서는 필리핀 공략이 필요했다.

2.3. 한국전쟁

2.3.1. 개전 ~ 인천 상륙 작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ncheonLandingMcArthur.jpg
맥아더 장군과 에드워드 M.알몬드 장군(오른쪽)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침략했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유엔군의 한국군 지원을 승인하는 결의안 82를 통과시켰다. 유엔은 미국정부가 지휘관을 선임하도록 권한을 부여했으며,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만장일치로 맥아더를 추천했다. 이로서 맥아더는 일본에서 USAFFE의 사령관을 지내는 동시에 유엔군 사령관이 되었다. 여기에 모든 한국군도 그의 지휘하에 배치되었다.

맥아더는 전쟁 초기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지원 병력을 파병해 낙동강 방어선을 유지하며 전세를 역전시킬 묘책을 궁리했다. 그는 전황을 확실히 뒤집기 위해서는 적 후방에서 상륙하여 북한군을 협공으로 섬멸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가 정한 상륙지점은 인천이었다. 이에 워싱턴의 미 국방부와 합참본부는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 상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상륙이 쉬운 군산에 작전을 수행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군산에 상륙할 경우 적의 보급선을 절단하지 못하고 적의 병력을 포위하지 못 해 비효율적이니 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단숨에 공략함으로서 적의 보급선을 완벽하게 틀어막고 적을 협공해 섬멸해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과 한국군은 인천에 성공적으로 상륙한 후 서울로 진군하여 9월 28일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이후 서울을 장악한 군대와 낙동강 전선의 군대가 그 사이에 놓인 북한군을 협공해 사실상 괴멸시켰고 만여 명에 달하는 북한군은 갈 곳을 잃고 지리산에서 빨치산이 되었다. 이 성공으로 맥아더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고 누구도 맥아더를 감히 비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만 '완전한 괴멸'에는 실패했다. 인천에 상륙한 부대는 다시 배를 타고 서해->남해->동해 뱃길로 원산에 다시 상륙했고, 인천 상륙군-원산 상륙군이 만났을 때는 (당연히) 잔존 북한군이 그 북쪽으로 빠져나간 후였다.

2.3.2. 38선 돌파

1950년 9월 27일, 맥아더는 국가안정보장 회의에 "38선 돌파로 소련이나 중국 공산주의 세력이 개입할 위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각서를 발송했다. 이에 조지 마셜 국방장관은 맥아더에게 "우리는 38선 이북으로 진군하기 위해 전술적 또는 전략적으로 방해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후 유엔군은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기로 결정하고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10월 2일, 한국군은 원산을 기습 폭격 후 상륙해 10월 9일 점령하였고 서부전선에서도 동부전선에서 공세가 개시된 뒤 10일 후에 북진을 개시했다. UN군과 한국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10월 19일 평양을 공략하고 11월 말에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이르렀다.

이미 중화인민공화국의 저우언라이 외교부장은 국군의 북진은 상관없으나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선다면 대대적으로 개입할 거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상태였다.[2] 그리고 유엔군이 중국과의 국경선인 압록강-두만강에 근접해오자 더이상 북진한다면 무조건 개입하겠다고 다시금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중공군이 감히 유엔군을 상대로 뛰어들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설령 온다고 해도 압도적인 공군과 포병을 앞세워 "역사상 가장 큰 도살"을 벌일 거라고 장담했다. 또한 그는 제8군이 연말까지 작전을 완수하고 일본으로 철수할 수 있으며 이듬해 1월엔 유럽으로 일부 병력을 파견할 수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는 최전선을 시찰했지만 중공군이 북한에 들어왔다는 걸 확인하지 못하고 크리스마스 전까지 압록강 일대를 평정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그의 중공군 경시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2.3.3. 1950년 겨울

파일:1110061501.jpg

1950년 11월 25일, 중공군 제13군단이 한국군 2군단을 청천강에서 요격하면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청천강 전투에서 대패한 유엔군은 12월 동안 중공군에게 밀려난 끝에 38선 이남으로 퇴각했고 1951년 1월 4일엔 서울에서 후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맥아더는 갑작스런 중공군의 기습으로 군대가 와해 지경에 이르자 경악한 나머지 며칠 동안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다가 1950년 11월 28일 "전투 상황은 우리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났다.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그는 중공군의 진격속도를 늦추기 위해 압록강 건너편 다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트루먼은 고문들과 긴밀히 의논한 뒤 이를 승인하지 않을 것라고 선언했다. 이에 맥아더가 항의하자, 대통령과 합참의장은 중국의 공역을 침해하지 않는 조건 하에 다리를 폭격할 수 있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이지 않은 작전이었고, 중공군에게 완벽하게 압도당한 유엔군과 한국군이 12월 말에 전면 철수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만약 연합군이 청천강에서의 패배 이후 평양을 사수하며 제대로 된 방어선을 펼쳤다면 중공군의 보병 기동전을 차단하며 전세를 유리하게 펼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도쿄 사령부는 별다른 대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했으며, 그 결과 미군이 지휘 체계도 회복하지 못한 채 대공황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중공군 보병들은 이미 한반도의 백두대산에 스며들어 연이은 공세를 퍼부었고 미군은 자랑하는 화력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며 피해가 누적되었다. 결국, 1950년 12월 29일 미국 합참에서 맥아더에게 철수를 지시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새로 부임한 8군 사령관 리지웨이를 설득하여 한국전쟁에서의 미국이 계속 전투를 지속하도록 한다. 그럼에도 계속 전선이 후퇴하자 맥아더는 지평리 전투에서 패할 경우 아예 한반도에서 유엔군을 철수시키고 한국 정부를 일본으로 이전시키는 계획까지 세웠다. 만약 이게 이뤄졌다면 한반도 전체는 적화통일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태가 온전히 맥아더'만'의 실책으로 벌어진 것인지는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1950년 10월~11월 당시 미 중앙정보부와 합참본부의 상황 파악은 맥아더보다 낫다고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맥아더의 낙관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고 소련과 중공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맥아더의 견해에 적극 동조했다. 실제로 기밀 해제된 미 중앙정보부와 합참본부의 1950년 10월과 11월자 비밀문서 중 맥아더의 결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내용이 담긴 것은 거의 없다.

그리고 맥아더 휘하 참모들도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고 보기 어렵다. 가령 제10군단장 에드먼드 알몬드 소장은 중공군의 전면 개입으로 혼란이 극에 달했던 11월 말에도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공세를 강요했다가 막심한 피해를 초래하고 현지 장교들의 강력한 항의를 못이기고 철수를 허락했다. 그리고 맥아더의 오랜 부관인 찰스 윌러비도 상관의 뜻에 동조해 중공군이 적극 개입할 리 없다는 낙관론을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또한 맥아더의 참모들은 현지 지휘관들의 의견을 맥아더에게 전달하지 않고 자기들 선에서 커트하기 일쑤였고 맥아더가 상황 수습을 어려워하는 시기에 자신들이 대신 맡기는 커녕 같이 당황해했다. [3]

트루먼 대통령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가 맥아더의 말을 믿었다가 뒤통수 얻어맞았다고 하지만, 그가 상황을 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기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9월 30일 저우언라이가 유엔군이 38선을 도하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위협했고 이후에도 마오쩌둥 등이 미군이 압록강까지 진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경고를 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맥아더가 낙관론을 제기하는 걸 별 의심없이 받아들였고 맥아더의 압록강 진군 요청을 수락했다. 유엔군이 압록강 근처까지 진군할 경우 중공이 심각한 위협을 느낄 것은 자명했지만, 그는 맥아더만 믿고 별다른 고민 없이 수락했다. 그는 훗날 자신은 맥아더가 유능한 군사 전문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믿었다고 밝혔지만, 이는 구차한 변명일 뿐 그 역시 1950년 겨울의 파멸을 초래한 장본인이다.

2.3.4. 핵무기 사용 및 확전 주장

파일:Truman_and_MacArthur_on_Wake_Island_1950-1.jpg

한국전쟁이 갈수록 악화되자, 맥아더는 핵무기 사용을 주장했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 핵무기 사용은 그 혼자서만 고려한 게 아니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11월 30일 기자회견에서 핵공격을 암시하는 발언을 했고 미국 원자력위원회의 고든 딘 위원장과 만나 핵폭탄 9개를 군사 통제로 이전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미 합동참모부도 중공군이 만주와 산동반도에서 공군을 출격시켜 공습을 감행할 경우 그곳에 핵을 투하해도 좋다는 명령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우방국들이 핵무기 사용을 적극 만류하는데다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소련이 개입해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위험이 컸기 때문에,[4] 트루먼과 미 합동참모부는 핵무기 사용을 주저하다가 1951년 3월 무렵 서울을 되찾고 전선이 38선 방면으로 이전되면서 핵무기 사용 계획을 백지화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정부의 지침에 따르지 않고 핵무기 사용 주장을 고집하여 트루먼과 마찰을 빚었다.

또한 맥아더는 한국전쟁에서의 핵무기 사용 뿐만 아니라 대만을 끌여들어 중국 해안 지대를 공격하게 함으로서 한반도에 개입한 중공군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 또한 맥아더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합동참모부는 1951년 1월 12일 각서에서 "대만군의 작전에 대한 제반 제한 사항을 일소하여 효율적인 대공 작전에 기여하게 될 군수 지원을 대만군에 제공한다."고 밝혔다. 맥아더는 후에 청문회에서 자신은 이 문서에 기초하여 대 중국 확전을 주장했다고 주장했지만 조지 마샬 합참의장은 그 문서는 유엔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게 될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 아래서 작성된 것으로 잠정조치에 지나지 않으며, 1월 중순에 한국의 군사적 상황이 호전되면서 이 제안이 무효화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핵무기 사용과 확전은 맥아더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었고 미 정부와 합동참모부도 고려하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상황이 호전되면서 가능한 평화적으로 전쟁을 빨리 종결시키고 싶어하는 정부의 의사를 무시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핵무기를 사용하고 전쟁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럽에서의 공산주의 투쟁과 아시아의 투쟁을 분리할 수 없다고 믿었다(훗날 공개된 소련의 비밀 문서에서 소련이 불가리아 등 동유럽의 공산 정권을 안정시킬 때까지 동북아시아에 미국의 시선을 잡아두라는 내용이 나왔으니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또한 그는 중공이 소련의 위성국이 되기 위해 소련과 동맹을 맺었으며, 미국이 중국과 전쟁을 확대한다고 해도 소련이 미국과 적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의견은 트루먼 행정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공화당원들조차도 맥아더의 주장을 거의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트루먼은 분노했고 정부의 지침에 자꾸만 어긋나는 맥아더를 해임하고 트루먼 행정부의 의견에 협조적이고 그나마 온건했던 매튜 리지웨이 장군을 유엔군 신임 사령관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한다.[5]

다만 2020년에 공개된 논문에 따르면 오히려 맥아더는 핵 사용에 대해 소극적이으며 맥아더의 해임에 핵 사용 찬성 여부는 결정적이지 않았다는 반론이 있다. 기사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사학위 논문인 〈중국의 한국전 참전과 미국의 핵무기 사용검토에 관한 연구〉가 이러한 주장을 담고 있다. 이 논문은 기밀 해제된 국무부 일급비밀 문서 등을 근거로 워싱턴 군부가 핵무기를 사용을 먼저 주도했던 정황이 보이며, 그런 반면 극동사령관을 겸직한 맥아더는 핵무기 사용에 신중하게 접근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상황이 아니라면 핵무기 사용이 필요하지 않다는 전략도 고려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워싱턴에서 이뤄진 핵무기 사용 논의를 바탕으로 실무적인 사용 계획은 준비했는데, 1950년 12월 22일에 작성된 미군 문서에 구체적인 논의 과정과 내용이 담겨있다. 이 논문의 저자는 맥아더 해임 나흘 전인 4월 7일 트루먼이 브래들리 합참의장의 건의에 따라 “핵무기를 괌으로 전진 배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점을 근거로, 트루먼이 핵무기 사용을 반대했기 때문에 맥아더를 해임했다는 주장은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맥아더의 핵무기 사용 검토는 트루먼과 워싱턴의 군부가 결정한 핵무기 사용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검토였을 뿐”이라며 “그동안 맥아더가 핵무기 사용을 주도했다는 논의는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3. 행정 및 정치 방면

3.1. 사상

아무래도 군인인 만큼 보수적이고 완고한 성향이 강했는데, 그는 모든 나라의 모델은 미국이라고 믿었다. 참모장이[6] 파시즘을 찬양하자 민주주의는 인류가 진화시켜 온 것 중 최고의 통치 형태이며, 전쟁에서 파시즘을 압도할 수 있다고 일장연설을 쏟아냈다.[7] 실제로 맥아더는 이론적으로는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 잘 알고 깊게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보너스 군대 사건이나 한국전쟁에서 보여준 것처럼 실제 맥아더의 행적은 문민통제를 혐오하는 군국주의 파시스트의 그것과 유사했다. 맥아더의 바탄 갱 중 한 명이었던 정보참모 윌러비는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의 지지자였다고도 한다.[8] 또한 맥아더는 공산주의를 혐오했고 그들이 미국을 좀먹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강건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3.2. 웨스트 포인트의 개혁을 주도하다

1919년, 맥아더 준장은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점령지를 통치하던 미 군사정부의 웨스트포인트 졸업생들이 군사학 외의 분야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알지 못하는 문제점을 발견하고 사관생도들에게 군사학 외에도 다양한 교양 과목과 정치학 및 경제 과정을 추가로 이수하게 했다. 군사학 수업도 구닥다리 남북전쟁사 교육에서 탈피해 최신 현장 경험을 반영하는 제1차 세계대전사 전술 교육으로 갈음했으며, 역사 수업에서는 극동아시아사에도 중점을 뒀고 스포츠 프로그램을 확대하여 교내 스포츠 클럽의 수를 늘리고 모든 사관생도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1922년에는 생도 명예규정을 제정했다. 명예규정을 위반하면 사관생도들에 의해 선출된 생도 명예협의회가 판결이 없는 일종의 대배심으로 작동하여 지휘관에게 규정 위반 사실을 보고하도록 했다. 고학년생도가 담당하던 임시입교[9] 훈련이 신입생 괴롭히기로 변질되었다고 보아 임시입교 훈련을 현역장교들이 담당하도록 했다(이 임시입교 와중 맥아더 기수 생도 중에서 폭행 사망자가 나왔을 정도로 막장이었다). 전통적으로 포트 클린턴에서 하던 하기군사훈련을 현역부대인 포트 딕스에서 현역 훈련부사관들에게 현실적인 훈련을 받도록 개선했다.

맥아더의 이러한 급진적인 교육 개혁은 교수진과 동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맥아더의 임기 만료 이후 그의 개혁의 대부분은 곧바로 폐기되었지만, 그후 몇 년 동안 그의 정책이 공감을 받아 웨스트포인트는 결국 맥아더의 개혁을 받아들였다. 이렇듯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가 과거의 잔재에서 벗어나 새 시대에 걸맞는 교육 시스템을 갖출 수 있도록 상당히 기여했다.

3.3. 보너스 군대 유혈진압 사건

1932년 대공황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있던 1차대전 참전 용사 25,000여 명이 연금 보너스 조기 지급을 요구하며 워싱턴으로 상경했다. 정부는 이들에게 기차표를 주며 돌아가라고 했지만 약 6,000명만 돌아가고 나머지는 남아서 시위를 계속했다. 맥아더는 이 시위가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고 확신했고, 수도를 무질서로부터 지키기 위해 비상 계획을 검토했다. 그러던 1932년 7월 28일, 경찰이 진압을 시도했다가 대규모 폭력 사태가 벌어졌고 경찰관 두 명이 건물에 감금되었다. 그 중 한 경찰관이 겁먹은 나머지 발포해 시위대 두 명을 살해했다. 이로 인해 사태가 악화되자,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연방군을 동원하기로 결정하고 육군참모총장인 맥아더 대장에게 시위대를 가능한 평화적으로 진압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자기 소신대로 공산주의자들에게 선동당하고 있는 시위대를 상대하는 작전을 수립했다. 부관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소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6대의 탱크와 조지 S. 패튼 소령이 지휘하는 3기병대를 선두로 1개 보병연대를 투입해 강경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총 기병 4개 중대, 보병 4개 중대, 기관총 대대, 탱크 6대가 시위 진압에 투입된 셈.

진압군은 총만 안 쐈지 총검과 세이버를 앞세워 시위대를 공격했다. 최루탄이 보너스 군대 캠프에 마구 뿌려졌고 진압군은 시위대를 마구 밀어붙여서 캠프를 아주 박살냈다. 진압 병사들은 오두막 몇 채에 총을 쏘았고 곧 천막촌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그 와중에 가스통이 폭발해 화재가 발생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아기 두 명이 최루가스에 질식사했고 임산부 한명은 유산하는 등 5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1,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진압군에서도 6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후 조사 결과 배후에 공산당이 있었다는 맥아더의 확신과 다르게 시위대의 95% 이상이 진짜 퇴역병[10]과 그 가족들이었고, 5%는 신원 확인 불가 또는 퇴역 군인들을 도우러 나온 사회운동가들로 밝혀졌다.

이 사태는 그의 심각한 공산주의 혐오가 초래한 것이었다. 맥아더는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자들을 단순한 불만 세력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에게 선동당한 폭도라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확신했기 때문에 이런 무분별한 강경진압을 조국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밀어붙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맹신이 결국 대형사고를 초래하고 말았다.

맥아더의 다른 일화들은 기행 내지는 정상참작이 되는 정도에 그친 반면, 보너스 군대 유혈 진압은 실드가 불가능한 명백한 삽질이기 때문에 미국의 맥아더빠들도 이 사건은 비호하지 않고 쉬쉬한다. 맥아더의 평가가 깎인 데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사건.

3.4. 미국 기갑전력 약체화의 책임

맥아더는 전쟁이 임박한 35년까지 참모총장으로써 재직하면서 미국 기갑전략을 약체화 시키는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2차대전 미육군은 셔먼으로 대표되는 약체 기갑의 이미지가 강한데, 당시 미국의 산업 역량을 생각하면 사실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된 책임자를 한 명만 꼽자면 그게 바로 맥아더다. 20년대 미육군은 신규 병종의 대두로 인해 군내 파벌 문제로 홍역을 앓은 적이 있었다. 시작은 항공병과로 인한 갈등이었는데, 이쪽이 어느 정도 진정되는 상황에 기갑이 새로 대두하기 시작했다. 항공에게 잔뜩 데인 보병이나 기병등은 기갑같은 신규 병종이 또 등장하는데 민감하게 반응했다. 맥아더는 기갑의 발전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한다. 물론 이 해결법은 몇년 후에 피로써 댓가를 치른다.

다만 당시 행정부가 국방 예산을 삭감하려고 하자 유능한 장교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신 기갑군단등을 해체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 군에 남은 장교들이 2차대전에서 활약한 것을 보면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전차 1대 유지비면 보병 수십 명 유지비인데, 평시의 미군은 루마니아군보다도 숫자가 적었다. 병사 숫자가 적으면 장교 숫자도 적고 장성 숫자도 적으니 밥그릇 문제였던 것이다.

또한 의회에서 '전쟁나면 돈주고 사면 되는데 왜 우리가 만들어야 하지?' 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1차대전기 미군은 몸뚱이만 가면 프랑스제 소총, 야포, 전차 등을 사서 무장했을 정도였다.

과거 버전의 묘사나 하단의 평가도 그렇고, 맥아더는 1차대전에서는 최고의 장군이었지만, 2차대전의 장군으로서는 똥별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맥아더의 전쟁운영과 군단 구성능력이 딱 1차대전의 수준에 머물러있었기 때문이다. 1차대전 유럽 서부전선의 참호전 양상처럼 보병이 중심이 되고, 탱크나 공군이 보병을 호위하고 지원하는 수준의 전장과 달리, 2차대전기 그의 전쟁이었던 태평양전쟁은 드넓은 바다와 수많은 섬을 헤집고 나가야하는 해군의 전장이고,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도 보병이나 전함도 아닌 항모와 함재기들의 몫이었다. 그런 입체적인 전장의 변화로 인해, 1차대전때 보병의 보조였던 기갑,공군이 주력이 되고 보병 또는 해병이 지원하는 완전히 뒤집힌 1940년대의 전장을 전혀 따라가지 못했던 맥아더 참모총장은 그당시 미군의 구식화와 그로 인해 2차 대전 초기 졸전에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

3.5. 필리핀군 육성의 실패

1935년에 맥아더가 필리핀에 초빙된 이유는 새로 건설되는 필리핀군의 양성을 맡아달라는 의도였다. 2차대전 발발까지 5~6년의 시간이 있었는데 결국 맥아더는 필리핀 육군 건설에 실패한다. 맥아더는 징집병을 한번에 1만명씩 6개월간 입소시켜, 전쟁 발발할 무렵까지 10만 이상의 병력을 훈련시킨다. 그러나 이 맥아더가 양성한 병력은 실전에서 전혀 쓸모없는 전력으로 드러난다. 군사훈련 6개월이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닌데도, 이 병력을 지휘하게 된 미군 장교들은 입을 모아 이들이 전혀 훈련되지 않은 군대라고 평가했다. 전투에 나가기만 하면 패주하는 주제에 금쪽같은 식량은 또 먹여줘야하는, 없느니만 못한 짐덩이가 되어버렸다.

필리핀 패전시에 맥아더에게 일본군 못지 않은 규모의 병력이 있었음에도 간단히 패배한 이유는 이렇게 필리핀 군이 약체였던 데 있다. 미군은 초전에서는 방어적 전투를 치르는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맥아더는 자기에게 대규모의 병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일본군과 정면 승부를 벌이려 했고, 대패한 후에 본래의 방어 계획으로 돌아간다. 결국에는 방어에 필요한 엄청난 물자를 무모한 반격전 때문에 잃은 불리한 상태에서 싸우게 된다.

필리핀에는 이와 별도로 수천명 규모의 필리핀 척후대(필리핀 스카우트)가 있었는데, 이들은 맥아더가 육성한 육군과는 다르게 일본군과 맞서 대등한 전투를 벌여 제대로 싸웠다. 약한 필리핀 육군의 문제가 필리핀인들 탓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필리핀 육군 건설 실패와 그에 따른 패전의 책임은 맥아더에게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시대적 배경을 봐야 한다. 필리핀은 병사들이 쓰는 언어가 96개(!)로 유일한 공용어 비스무리한 건 스페인어와 영어였을(당연히 구사자는 적었다) 정도니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해군 군축조약의 일환으로 필리핀 등 도서지역의 요새화(해안포, 해안요새) 등도 제한되었고, 미국은 대공황으로 허우적거리는 상황에서 필리핀에 돈을 쓸 리가 절대로 없으니... 그리고 미국이 애초에 필리핀을 끝까지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가 맥아더를 포함한 현지 지휘관들의 주장으로 필리핀 사수로 변경된 것도 감안해야 한다.[11] 다시 말해서 필리핀의 패전은 충분한 대비를 하지 않은 미국 행정부의 실책도 있다.

참고로 전 참모총장이 필리핀 원수가 된 것은 사실상 좌천으로 보는 이들이 많았고, 자신의 개인 영지 취급하던 필리핀에서 '보너스 아미로 데이더니 뒷골목 대장 놀이하러 갔다' 정도로 인식되기도 했다.

3.6. 시대를 앞서간 이미지 관리

파일:General-Douglas-MacArthur.jpg

맥아더의 '쇼맨쉽'은 시대를 앞서갔다 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는 항상 자수가 화려하게 들어간 필리핀 육군 원수 정모를 착용했고 비행사용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다. 또한 그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수제 콘파이프는 원래 그다지 애용하는 물건은 아니었으나, 언제 한번 콘파이프를 물고 있다가 찍힌 사진이 유명해지자,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거나 대중들 앞에 나설 때면 항상 콘파이프를 지니고 등장하였다. 이 당시 정치인들조차 이러한 이미지 관리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걸 고려해 볼 때, 그는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의 이미지 관리는 지나친 면이 많았다. 그는 언제나 언론 플레이를 선보이며 자신을 화제의 중심에 있게 만들려 했고 부하들이 자신을 제치고 유명세를 타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자기 관할의 모든 보도 자료에 공식적인 oo군 사령부가 아닌 개인 이름의 '맥아더 사령부'라고 표시하도록 했다. 그 바람에 대통령과 참모본부, 해군, 해병대 등이 들러리가 되었고 이에 따라 그의 적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트루먼 대통령은 특유의 패션(빳빳하게 각을 세운 바지와 썬글라스, 담배 파이프)을 두고 "70대의 원수가 20대 소위처럼 하고 다닌다."며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또한 "저 인간이 대통령이야, 내가 대통령이야? 자기가 마치 대통령이나 되는 듯이 행세하고 다니잖아!"라는 말도 남겼다고 한다.

아이젠하워 역시도 "나는 7년 동안 그의 아래에서 "연극적 과장"을 배웠다."고 비꼬았으며,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책상 위에 맥아더 사진 액자가 왜 있냐고 묻는 정보 참모 에드윈 레이튼의 질문에 "그건 나에게 제우스처럼 벼락까지 쳐가며 요란하게 떠드는 얼간이(horse's ass)가 되지 말라는 점을 상기시켜 주거든."이라고 답하기도 했다.[12]

2차대전 초기 지고 지고 또 지던 미국의 참담한 현실(진주만 참사, 필리핀-괌-사이판 등의 연이은 함락)에서 국민들에게 쥐여줄 국뽕꺼리가 하나쯤은 필요했던 정부의 사정으로 맥아더는 '영웅'으로 포장되었으며(바탄에서 후퇴한 걸 성과랍시고 내세웠다) 이것이 맥아더의 여론 관리와 맞물리며 정치적인 위상이 급성장했다. 그가 한국전쟁에서 죽을 쑤기 전까지 문민정부가 터치하지 못한 건 어느정도 자업자득.

3.7. 푸른 눈의 쇼군

1945년 8월 29일, 맥아더는 워싱턴으로부터 쇼와 덴노를 포함해 일본 정부 기관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도록 명령받았다. 맥아더는 GHQ 막부 본부를 도쿄의 다이치 생명보험 빌딩에 두고 덴노를 명목상 일본의 군주로 남기면서도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그는 덴노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못 하도록 막았고 미국 정부의 덴노에 대한 어떠한 조사도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맥아더는 전쟁 범죄자들에 대한 형을 집행하면서도 이시이 시로와 다른 세균 학자들에게 인간의 실험에 근거한 세균전 데이터를 제출하는 대가로 형사 기소에서 제외시켰다.

맥아더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자로서 일본의 재건, 군국주의의 근절과 민주주의의 도입, 정치 시민의 자유 증진, 민주 정부의 운영을 위한 정책을 수행했다. 1946년 맥아더가 이끄는 GHQ는 덴노의 정치적 권한을 완전히 박탈하는 새로운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1947년 5월 3일에 효력이 발생된 이 헌법은 의회의 제정 제도를 확정했으며, 덴노는 장관들의 정책에 간섭할 수 없었다. 또한 헌법 제9조엔 전쟁행위 자체를 불법화했으며, 여성의 인권 보장, 기본권 보장, 인종 차별 금지, 의회와 내각의 권한 강화, 경찰과 지방 정부의 분권화 등을 명시했다.

GHQ는 울프 라데진스키의 토지개혁도 실시했다. 1947년에서 1949년 사이, 정부의 개혁 계획에 따라 집주인으로부터 약 약 4,700,000ac(19,000,000ha), 즉 일본 토지의 38%가 구입되었으며 4,600,000ac(18,600,000ha)가 농장 주인에게 재판매되었다. 1950년까지 모든 농지의 89%가 소유자에게 운영되었고 11%만이 임차인에게 운영되었다. 이 성과로 부재지주-소작농 체제의 고질적인 저생산성, 극도의 빈부격차에 시달리던 일본 농업이 살아난다. 이는 에도막부 시절부터 이어지던 농촌의 비참함을 개선한 사실상 첫 개혁이었다. 메이지 유신-제2차 세계대전기까지 일본의 농촌지대는 수탈지역이었다. 그리고 맥아더의 노동 조합 가입 장려는 큰 성공을 거두어 1947년까지 비농업 인력의 48%가 노조에 가입했다. GHQ는 점령 기간 동안 일본의 침공 전쟁을 지원한 재벌 해체를 단행했으나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고, 이후 과거의 재벌들은 좀 더 느슨한 기업 연합체로 탈바꿈했다. 이 성과로 일본 기업들은 총수 일가가 지분으로 회사를 지배하는 체제에서 벗어났다. 회사와 가문이 분리된 것.

이러한 맥아더의 정책은 일본인들에게 지극히 관대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많은 일본인들은 맥아더를 존경하다 못해 숭배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시이 시로 같은 악질 범죄자를 사면하고 일본의 침탈에 협조한 재벌 인사들이 좀 더 느슨한 기업 연합체로나마 영향력을 행사하게끔 내버려두는 등, 사회 정의를 묵살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3.8. 해방 직후 한반도 정세에 대한 책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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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하고 한반도는 광복을 맞았다. 여운형 등은 건국동맹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8월 말까지 건국준비위원회는 지방 세력의 호응을 받으며 전국에 145개 지부를 두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행정권 등을 제대로 이양하지 않아 마찰이 벌어졌는데, 이는 일본 본국에서 행정권을 미국에게 이양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국내에서도 김성수, 송진우 등은 '임시정부 봉대'를 주장하며 건국준비위원회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러던 중 9월 초에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건국준비위원회 측은 마음이 급해졌다. 때문에 9월 3일 내각 개편이 이루어지고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비중이 좌익측으로 기울자 안재홍 등 중도 우파 세력이 건국준비위원회 / 조선인민공화국에서 탈퇴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를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는 다음 포고령을 통해 드러난다.
조선인민에게 고함.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포고함.

일본 국 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은 우 제국(諸國) 군대간에 오랫동안 속행되어온 무력투쟁을 끝냈다.

일본천황과 일본국 정부의 명령과 이를 돕기 위해 그리고 일본 대본영의 명령과 이를 돕기위해 조인된 항복문서 내용에 따라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

조선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리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인민은 점령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자기들의 인권 및 종교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는것을 보장받는다. 이러한 목적들을 실시함과 동시에 조선인민의 적극적인 지원과 법령준수가 필요하다.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으로 나는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그곳의 조선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조항을 발표한다.

제1조 -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정부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나의 관할을 받는다.
제2조 - 정부의 전 공공 및 명예직원과 사용인 및 공공복지와 공공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의 유급 혹은 무급 직원 및 사용인과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기타의 모든 사람은 추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기능 및 의무 수행을 계속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해야 한다.
제3조 - 모든 사람은 급속히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의 안녕을 방해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제4조 - 제군의 재산권을 존중하겠다. 제군은 내가 명령할 때까지 제군의 정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라.
제5조 - 군사적 관리를 하는 동안에는 모든 목적을 위하여서 영어가 공식언어이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혹은 일본어 원문 간에 해석 혹은 정의에 관하여 어떤 애매한 점이 있거나 부동한 점이 있을 시에는 영어 원문에 따른다.
제6조 - 추후 포고, 포고규정 공고, 지령 및 법령은 나 혹은 나의 권한하에서 발표되어 제군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구체화할 것이다.

1945년 9월 7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겸 미국 극동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이 포고문을 통해 미군이 직접 한반도를 통치하는 미 군정을 선포하였으며, 건국준비위원회는 물론 인민위원회, 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은 부정되었고, 심지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그후 맥아더는 포고령 제2호를 통해 일제강점기 시절 때 일제에 부역행위를 한 인사들을 미 군정에 고용했다. 그러나 맥아더의 부관 존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 군정은 현지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해 무리한 정책을 펼치다가 심각한 식량 수급난을 초래해 대구 10.1 사건을 야기하는 등 많은 실책을 저질렀다. 그러나 맥아더는 오로지 일본의 통치에 집중할 뿐 한국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하지가 자기 뜻대로 한국을 통치하도록 내버려뒀다. 이러한 그의 방관 정책은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한반도의 정세를 더욱 악화시켜 남북분단을 초래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게다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를 악의적으로 편집하여 한반도에서 반탁 정서를 일으킨 여론전을 벌이기도 했다.

3.9. 이승만의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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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인사하는 이승만과 더글러스 맥아더
맥아더는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다. 맥아더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에 참석했다. 그후 그해 초가을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맥아더의 초청을 받고 일본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맥아더는 이승만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해 함께 축배를 들었다. 이 방문은 맥아더의 방한에 대한 답방의 형식이었으나,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한국 방위에 대한 확실한 지원을 얻어내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후 맥아더는 이승만에게 자신의 전용기를 내주어 편히 귀국하게 해줬다. 그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맥아더는 유엔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이끄는 한편 이승만으로부터 한국군의 지휘권도 맡았다.

한국전쟁 당시 육군 총참모장이었던 정일권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승만은 1950년 10월 무렵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본직은 소련은 몰라도 중공이 (한반도에) 개입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보는 바입니다. 이번에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이 가능성을 긍정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귀하가 긍정함으로써 북진을 방해하는 작전상의 제한이 가중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민은 거족적으로 북진 통일만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귀하의 영매(英邁)하신 지도가 아니고서는 이 열망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으니 이 간절한 심정을 살펴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이에 맥아더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본직은 믿을 만한 정보통의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중공군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 이 가능성을 겉으로는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압록강을 넘을 것입니다. 조금도 모르는 것으로 할 것입니다. 중공은 그 방대한 군사력을 배경 삼아 가까운 장래에 아시아에 있어서 데모크라시의 최대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소련이 있습니다.

중공의 잠재적인 군사력을 때릴 만한 기회는 지금 아니고서는 없을 것입니다. 전략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워싱턴이 언제까지 본직의 전략을 뒷받침해 주느냐가 문제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센 반대에 부딪힐 것입니다. 하지만 본직의 불퇴전의 결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필요하다면 원폭(原爆)도 불사(不辭)할 것입니다.

이 편지는 정일권의 회고록에서만 언급되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맥아더와 이승만이 매우 친밀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사실 당시 미 대통령 트루먼이랑 맥아더 사이가 아무리 어색했다고는 해도, 자기 나라 대통령한테 군사적 정황을 숨기려 하면서까지 신생 약소국 대통령과 같은 편이었다는 건 다소 의심스럽다. 실제 역사에서는 중공군을 꽤 얕봤던 맥아더가 위 편지에서는 중국의 위험성을 미리 간파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 역시 의구심이 들기는 마찬가지. 회고록이라는 물건의 특성상 윤색과 과장이 들어갈 수 있는 데다, 교차검증도 안 되는 이야기이므로 그냥 서로 죽이 잘 맞았다는 정황을 드러내기 위한 비유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온당할 듯하다.

위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맥아더와 이승만은 공통점이 많았다. 두 사람은 공산주의를 혐오했고 기독교 신앙이 두터웠으며, 북진 통일을 다른 어느 대안보다 우선시했다. 또한 맥아더는 이승만을 대할 때 나이 어린 사람이 웃어른을 대할 때처럼 공손하게 대했고[13] 같이 식사를 할 때도 이승만의 식기를 먼저 챙겨주었으며 얘기도 잘 들어줬다. 이에 이승만은 맥아더가 있는 곳을 일부러 찾아갈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맥아더가 해임되자, 이승만은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4. 성격 및 인간성

4.1. 자부심

맥아더는 장교 경력을 시작한 이래 최고속으로 승진하여 최연소 대장에 오르고 수많은 훈장을 챙기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실제로 그는 1차 세계대전 참전 당시에 철모도 쓰지 않은 채 적지로 돌격하려는 걸 부하들이 만류하자 "독일군이 만든 어떤 폭탄도 나를 죽이진 못할 것이다."라고 일갈 했으며, 리처드 B. 프랭크의 책 "맥아더"에 따르면 마치 관중들을 앞에선 무대 위의 배우처럼 과장되게 말하며 통성기도를 하는 것 같은 격렬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스스로를 3인칭화 시켜서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14]

4.2. 독선

맥아더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지나친 나머지 타인의 의견을 귀담아듣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뜻을 밀어붙이기 일쑤였다. 전사연구가 마이클 샬러 교수는 자신의 저서 《더글러스 맥아더》를 통해 맥아더의 인간됨과 그로 인한 마찰, 불합리한 작전 입안 및 실행, 사령관으로서 부적절했던 점을 신랄히 지적하였다. 뛰어난 재능 이상으로 자기 중심적인 탓에 너무도 쉽게 비합리적인 방향을 택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샬러의 평가이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에서도 맥아더의 지나친 독선을 비판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주위에 예스맨들이 모여 일을 그르쳤다고 지적했다. 특히 맥아더의 참모장 리처드 서덜랜드는 중간에서 정보를 가로막고 독단적 전횡을 많이 저질러 맥아더 휘하의 육군항공대, 해군뿐만 아니라 육군에게도 공분을 샀다.[15]

여타 성격적 성향과 일화를 종합해 보면 자기애적 성향이 거의 병적 수준로 강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으며, 실제로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졌다고 평가하는 논문도 존재한다.

4.3. 확증편향

맥아더는 작전을 한번 정한 뒤엔 작전과 어긋나는 정보가 들어와도 묵살하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불도저형 인간이었다. 현지 장교들이 어려운 상황을 설명해도, 그는 자신의 뜻을 고집하며 공세를 펼치라고 요구하기 일쑤였다. 가령 코코다 트랙 전투에서는 공세를 펼치는 게 어려운 상황임에도 반드시 부나를 공략하라며 몰아붙였고, 필리핀 전역 때도 적의 전력을 실제보다 과소평가하고 적극 공세를 지시했다가 큰 피해를 보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게 하기도 했으나 장진호 전투라는 대참사를 초래하기도 했다. 1950년 10월 무렵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어 한국전쟁에서 유리한 고점에 있다는 이유로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에 대한 정보를 여러 번 받았음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정보만 받고 부정적인 정보는 무시했으며 당시 대통령 트루먼에게도 지나치게 낙관적인 보고를 했는데 그로 인해 중국군이 대규모로 참전을 준비하고 밀고 내려오는데도 초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 역시 이런 성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4.4. 유연성과 관대함

맥아더는 보너스 군대 진압과 같이 적이라고 생각한 이들에게 가혹한 처분을 했던 것과 달리 피정복자 및 아군에게 베푸는 관용과 친절, 자비의 힘을 믿었으며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고 선물로 줄 만큼 호의를 베풀었다. 아주 고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적인 장군의 모습 그 자체이다. 또한 독선적인 성격과는 별도로 정치적인 감각이 상당히 뛰어나서 덴노의 필요성을 인식해 그대로 남겨둠으로서 일본 통치를 수월하게 하고 이승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한국군 통솔을 수월하게 이끄는 발판으로 삼았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필리핀, 일본, 인도 등을 돌아다녔기 때문인지 동양의 문화를 아주 잘 이해해 동양인들을 만날 때 일반적인 서양인과는 달리 고자세로 대하지 않고 그들의 예법대로 대해 상대의 호감을 샀다.

5.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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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례하는 더글러스 맥아더
"MacArthur is our greatest general and our poorest politician."
맥아더는 우리 미국 최고의 장군이자 최악의 정치인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Chicago Tribune, August 19,1945[16]
더글러스 맥아더는 전술적인 면에서 탁월한 인물이 분명했으며 미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1명이었다. 하지만 과도한 야망, 외통수적 성격, 전략적 아집 등으로 말년의 평가를 깎아먹었다. 아메리카의 카이사르라는 별명답게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대단히 비슷한 특성을 여럿 보였다. 친화력과 솔선수범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수많은 사람과 부대끼며 부하들의 신뢰를 받았고 일선 지휘관 시절에는 늘 앞장서 진격했고, 고급 지휘관이 되어서도 번뜩이는 재치로 대승리를 거두는 데 탁월했다. 거기에 이미지메이킹에 대한 재능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육사 교장, 참모총장, 필리핀 군사고문[17], 일본 주둔군 사령관 등을 맡아 보인 군정 능력 또한 대단히 뛰어났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여러 덕목을 가졌던 맥아더는 카이사르의 단점도 빼닮았다. 카이사르처럼 전투 전에 이미 이길 환경을 만드는 능력은 부족했고, 이는 정보의 중요성이 커진 현대전에서 큰 약점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전철을 밟기라도 하듯 말년 들어 강해진 경청하되 자기 주장은 고집하는(...) 성격이 이 약점을 더욱 치명적으로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보인 독단적 결정이나 정치적 스탠스는 위태로운 공화정과 군주정의 사이에 있던 로마와 달리 견고한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허용될 수 있던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동시기에 프로이센 기병대장이 더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았던 조지 S. 패튼처럼 그에게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나 카이사르의 시대가 더 어울렸던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평가를 할 때는 이러한 점들을 상기하고 보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게릴라들을 상대로 총격전을 벌여 적을 모조리 사살할 정도로 뛰어난 사격술을 갖췄고 특유의 카리스마와 용기로 병사들을 이끌고 적지로 돌격해 승리를 쟁취하는 솜씨가 탁월했다. 또한 머리가 비상해 웨스트포인트에서 역대 세 번째 순위에 해당하는 졸업 성적을 기록했으며(당연히 본인 기수의 수석이다)[18] 이따금 번뜩이는 작전을 고안해 전쟁의 판도를 뒤바꾸는 솜씨도 좋았다. 그리고 행정 능력도 준수해 옛날 방식을 고수하던 웨스트포인트가 새 시대에 맞는 교육 시스템을 받아들이게 하였고 전후 일본을 큰 혼란 없이 잘 이끌어 많은 일본인들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또한 정치적 감각도 준수해 필리핀 총독 시절 현지인들과 별 마찰 없이 잘 지냈다. 덴노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눈치채 그를 전범 재판에 세우지 않고 명목상 일본의 군주로 남겨둬 GHQ의 일본 통치가 수월하게 했으며 이승만과 좋은 관계를 맺어 한국군을 무난하게 통솔하는 발판으로 삼았다.[19]

그러나 그의 이러한 능력은 출세를 거듭하며 전략적 안목이 필요한 자리로 올라가면서 빛을 잃어가고 자신만의 오만한 자세와 독선으로 무너져 갔다. 결국 문민통제를 거스르는 정치군인이 되어 트루먼 행정부에게 찍힌 끝에 불명예스러운 은퇴를 하게 된다. 이른 나이에 남들은 감히 넘보지도 못할 자리를 차지한 그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한없이 부풀어올랐고 젊을 때부터 유명했던 고집스런 성격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심해졌다. 또한 이렇다 할 역경을 겪지 않은 채 이른 나이에 성공을 거뒀기 때문인지 1941~42년 필리핀 전투와 1950년 겨울의 참극 등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안전한 후방에 숨어서 사태를 방치하곤 했다. 그리고 타인의 의견을 귀담아듣기보다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는 걸 선호했고 부하들이 자신보다 각광받는 것을 죽는 것보다 싫어해 부하들의 전공을 자신의 공으로 바꿔치기하곤 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무수한 적을 양산시켰고 그의 주변에 예스맨들이 가득 채우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때쯤 되면 1차대전기의 갓별이 아니라 2차대전기의 똥별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

그리고 맥아더의 이런 행적은 본인 뿐만 아니라 조국인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능력과 자만, 독선에 빠져서 민간 정부와의 관계는 대단히 껄끄러워졌고,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말 중요한 원칙인 문민통제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 맥아더가 한창 독선에 빠졌던 시기에 미군 군부와 민간 정부의 관계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수준이라는 평가도 있을 정도이다. 미국이 이 갈등을 해소하는데엔 맥아더가 은퇴하고 사망한 뒤에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사실 그의 전반적인 능력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이미 한계가 드러났다. 적군의 예상되는 공격에 대비하지 않고 방치했다가 사태를 악화시키는가 하면, 자신의 작전이나 사고에 위배되는 정보는 무시하고 오로지 듣고 싶은 정보만 쫓다가 일을 그르치기 일쑤였고 현지 사정을 귀담아 듣지 않고 직접 가서 상황을 확인하지 않은 채 안전한 후방에서 '닥치고 공격' 명령만 내려 부하들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곤 했다. 그런데도 그는 미국인들로부터 명장이라는 칭송을 받고 전후 영웅으로 떠받들어졌는데, 이는 그의 시대를 앞서가는 이미지 마케팅 능력과 이따금 번뜩이는 작전으로 승리를 쟁취하곤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않고 스스로를 포장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자신이 꾸민 이미지에 깊이 빠지는 바람에 한국 전쟁에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말았다. 만약 그가 좀 더 겸손했다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처럼 대통령 자리도 노려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패배가 온전히 그의 실책 때문이라고 몰아세우는 것도 옳지 않다. 1차 필리핀 전역의 패배는 필리핀군을 진작에 정예화시키지 않고 방어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미국 정부의 책임이 있고 1950년 겨울의 참극은 그 뿐만 아니라 미국 국방부와 정부 모두가 오판해서 야기된 사태였다. 그러나 그 모두가 그의 실책을 덮어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책임이 가장 막중한 이는 바로 그 자신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가 진작부터 스스로의 실책을 돌이켜보고 반성했다면 한국 전쟁은 물론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의 함정에 스스로 빠져버렸고 스스로의 명예에 큰 손상을 입고 말았다.

참고로 미국 정부에서 선정한 한국전쟁 4대 영웅 중 한 명으로 꼽혔다.#

여담으로 미국 보수성향 국제 전문지 ‘더 내셔널 인터레스트(TNI·THE NATIONAL INTEREST)’ 11월호는 ‘혼돈의 지휘관들(Commanders of Chaos) ‘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맥아더를 미국 역사상 최악의 장군 5인 중 하나로 선정했다.#

2024년에 들어 대만을 잃으면 미국은 아시아를 전체를 잃게 된다는 맥아더의 예측이 재조명받고 있다.#

[1] 일명 '무지개 사단'[2] 그러나 실제로 유엔군 없이 국군만의 단독북진이 가능했을 것인지, 그리고 설사 국군만 단독 북진했다 하더라도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았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3] 에드먼드 알몬드 소장과 정보참모 찰스 윌러비는 대표적인 맥아더의 YES맨 이였다. 그 들을 그 자리에 앉힌 것은 맥아더의 판단이였고, 이 부분에서 맥아더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훗날 찰스 윌러비는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시스코 프랑코의 고문이 된다.[4] 게다가 이미 소련도 핵 개발에 성공한 시점이다.[5] 리지웨이는 한국 전쟁 시절 유엔군의 작전/전략 전술을 두고 맥아더와도 마찰을 빚을 정도로 앙숙이었으며, 핵무기를 사용하자는 맥아더의 주장에 대해서도 트루먼 대통령과 함께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6] 이 말을 했던 사람이 후일 맥아더의 참모장을 맡게 되는 리처드 서덜랜드였다고 한다.[7] 윌리엄 R. 맨체스터 저, 박광호 역, 『맥아더 1』 (서울: 미래사, 2016), 294.[8] 출처: 매튜 에이드, 비밀의 보초(Secret Sentry).[9] 가입교 순화어[10]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참전용사들이었다.[11] 나중에 일본을 점령한 주일 미군의 사단들이 삼각 편제가 아닌 2각 편제로 축소된 것도 유럽우선정책을 지향하던 미국정부가 일방적으로 정한 예산 안에서 사단 수를 유지하기 위한 맥아더의 고육지책이었고 그 대가로 한국전쟁 초기 미 육군은 병력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12] Edwin T. Layton, Rear Admiral, USN (Ret.) interviewed by E. B. Poter, U.S. Naval Institude, DVD, March 19, 1970[13] 맥아더쪽이 5살 연하이긴 하다.[14] 참고로 서구권의 군주들은 스스로를 3인칭하여 말한다.[15] 그런데 원래 이런 성향은 사람은 주위에 예스맨만을 두기 마련이다.[16] 루즈벨트는 맥아더와 사적으로 친분이 있어, 이 말을 그에게 직접 하기도 했다.[17] 당시 보여준 행적 덕에 필리핀인들의 맥아더에 대한 감정은 아직도 꽤 좋아서, 우리나라의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처럼 필리핀 탈환전 당시 맥아더의 레이테 섬 상륙작전 모습을 재현한 동상이 상륙 포인트에 세워져 있다.[18] 참고로 역대 차석은 남북전쟁 시기 남군 총사령관인 로버트 E. 리, 수석은 리의 동기인 찰스 메이슨이다.[19] 다만 히로히토를 살려준 것은 그가 눈치있게 납작 엎드렸기 때문이지, 처음부터 천황을 살려둘 생각은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