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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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74ba3><colcolor=#ece5b6> 고양강왕(高陽康王) 모용륭 | 慕容隆 | |
시호 | 강(康) |
작위 | 고양왕(高陽王) |
성 | 모용(慕容) |
휘 | 륭(隆) |
자 | 도흥(道興) |
생몰 | ? ~ 397년 5월 18일 |
출신 | 창려군(昌黎郡) 극성현(棘城縣) |
부황 | 세조 성무황제 |
아들 | 모용숭(慕容崇), 모용징(慕容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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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연의 황족. 세조 성무제 모용수의 아들들 중 하나. 후연의 명장으로 숱한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밖으로는 북위의 침공과 안으로는 분란으로 망해가는 나라를 끝내 살리지 못하고 암살당했다.2. 생애
건희 10년(369년) 11월, 아버지 모용수를 따라서 전진으로 망명하였다.건원 19년(383년) 12월,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패망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업(鄴)의 장락공 부비는 모용수를 경계하여 그를 내보내 정령족 적빈을 토벌케 하고, 광무장군 부비룡(苻飛龍)에게 모용수가 수상한 짓을 하면 곧장 베라 당부하며 감시역으로 붙였다. 모용수가 안양(安陽)의 탕지(湯池)에 이르렀을 때, 장수 민량(閔亮)과 이비(李毗)가 부비와 부비룡이 모의한 내용을 모용수에게 고하였다. 모용수는 이에 격노하여 군중을 선동하며 말했다.
"나는 부씨(苻氏)에게 충성을 다했건만, 그들은 우리 부자를 도모하려 한다. 내 이를 어찌 멈출 수 있겠는가!"
그런 뒤에 병력이 적다고 핑계로 하내(河內)에 머무르면서 병사를 모집하니, 열흘 만에 병력 8,000명이 모였다. 한편, 낙양에서 적빈과 싸우던 평원공 부휘(苻暉)는 오기로했던 모용수의 군대가 오지 않자, 사람을 보내 모용수에게 속히 진군하라고 독촉하였다. 모용수가 부비룡에게 말했다."지금 적이 멀리 있지 않으니, 낮에는 멈추고 밤에는 행군하여 그들이 방심한 틈을 노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비룡이 이를 옳게 여겼다.12월 27일[1], 밤이 되자 모용수는 먼저 세자 모용보에게 군사를 이끌고 선봉에 서게 하고, 젊은 모용륭에게는 병력을 거느리고 자신의 뒤를 잇게 하였다. 모용수는 저족 병사 5명을 오(伍)로 묶고, 몰래 모용보와 약속하여 북소리가 들리면 앞뒤에서 합쳐 부비룡과 저족 병사들을 공격하자 하였다. 이후 모용수와 모용보는 부비룡과 저족 병사들을 전부 공격해 죽이고, 참좌(參佐) 중 고향이 서쪽에 있는 자들을 돌려보내 천왕 부견에게 부비룡을 죽인 이유를 서신으로 설명하였다.
연원 원년(384년) 정월, 모용수가 스스로 연왕(燕王)을 칭하며 후연을 건국하자, 모용륭은 관군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연원 원년(384년) 4월, 업을 공략하던 모용수는 성이 여전히 견고하다 여겨 신하들과 함께 이를 논의하였다. 이때 우사마 봉형(封衡)이 '장수(漳水)를 끌어와 성을 물에 잠기게 하자' 청하니, 모용수는 그 제안을 따랐다. 모용수는 포위를 계속 유지하면서 맹하(孟河)를 따라 내려가 화림원(華林園)에서 잠시 술을 마셨는데, 그때 전진군이 몰래 출병하여 모용수를 기습하였고,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모용수는 갇혀서 빠져나올 수 없었으나, 모용륭이 기병을 거느리고 돌진하여 모용수를 구출해주어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
연원 원년(384년) 8월, 하남왕 적빈이 반란을 꾸미다 주살당하면서 한단(邯鄲)으로 도망친 그 조카 적진(翟真)이 한단에서 군사를 모아 부비와 안팎으로 후연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모용보와 모용륭의 협공을 받고 패해 다시 한단으로 도주하였다.
연원 원년(384년) 10월, 조군(趙郡) 사람 조속(趙粟) 등이 거병하여 백향(柏鄉)에서 전진의 양평(陽平) 태수 소흥(邵興)에게 호응하자, 연왕 모용수는 관군대장군 모용륭과 용양장군 장숭(張崇)을 보내 적들을 진압케 하고, 모용농에게도 청하의 병력을 인솔해 모용륭과 장숭의 군대를 돕게 하였다. 모용륭은 양국(襄國)에서 소흥을 대파하였고, 소흥은 도망치다가 광아(廣阿)에서 모용농과 조우하여 사로잡혔다. 소흥의 패배 소식을 들은 전진의 용종복야 광조는 서쪽 산을 따라 업으로 도망쳤으며, 모용륭과 모용농은 조속 등을 공격하여 기주(冀州)의 전진 세력을 모두 진압하였다. 이로써 전진과 후연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기주의 군현들이 전부 연나라에 다시 복종하였다.
연원 2년(385년) 11월, 역막(繹幕) 사람 채광(蔡匡)이 거병하여 보루를 점령하자, 모용륭은 무군대장군 모용린과 함께 채광을 토벌하였다. 동진의 태산(太山) 태수 임태(任泰)는 채광을 돕기 위해 군사들을 거느리고 몰래 채광의 보루와 8리 가까이에 이르렀는데, 이를 알아차린 모용륭이 잠시 보루의 포위를 풀어 임태를 대파하고 동진군 1,000명을 참살하였다. 채광은 머지않아 투항하였지만, 모용수는 그를 용서치 않아 참수하고 보루 안의 사람들도 모조리 도륙하였다.
건흥 원년(386년) 4월, 성무제 모용수가 모용륭을 고양왕(高陽王)에 봉하였다.
건흥 원년(386년) 8월, 성무제 모용수가 범양왕 모용덕 등과 함께 남쪽 땅을 정벌하러 가면서 모용륭으로 하여금 동쪽으로 가 평원(平原)을 순행토록 하였다.
건흥 2년(387년) 정월, 후연에서 태자선마를 지내던 온상(温詳)이 동진으로 도망쳐 제북(齊北) 태수에 임명되고 동아(東阿)에 주둔하였다. 성무제 모용수가 모용륭과 모용덕을 보내 온상을 토벌케 하니, 온상은 사촌동생 온반(溫攀)에게 황하 남안을 지키게 하고, 아들 온해(溫楷)를 확오(碻磝)로 보내 후연군을 막았다. 모용수가 황하가로 내려가 친히 토벌군을 열병할 때, 모용륭이 모용수에게 말했다.
"온상 등의 무리는 모두 백면서생으로, 무리지어 오직 긴 강만을 믿고 스스로를 지킬 뿐입니다. 만약 우리 군대가 강을 도하하면 그들은 깃발만 봐도 놀라 무너질 것이므로, 싸울 필요조차 없습니다."
모용수가 그의 말을 따랐다.정월 21일[2], 성무제 모용수가 진북장군 난한과 호군장군 평유(平幼)를 택교(碻磝) 서쪽 40리 지점에서 강을 건너게 했다. 모용륭이 대군을 이끌고 황하 북안에 진을 치니, 온반과 온해는 과연 달아나 동아로 향하였고, 평유가 이들의 뒤를 추격해 대파하였다. 온상은 그날 밤에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팽성(彭城)으로 도망갔으며, 그의 무리 30,000여 호는 모두 연나라에 항복하였다.
건흥 2년(387년) 2월, 성무제 모용수가 제섭(濟涉)을 위군(魏郡) 태수로 임명했으나, 제섭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동진의 태산태수였던 군벌 장원(張願)과 연합하였다. 장원은 직접 10,000여 명을 이끌고 축아(祝阿)의 옹구(瓮口)에 주둔하면서 적요(翟遼)에게도 호응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모용륭이 모용수에게 진언하였다.
"새로 쌓은 성채는 견고하여 쉽게 함락할 수 없습니다. 만약 오래 군대를 그 성 아래에 주둔시키면, 장원은 유민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정령족과 연합하여 심각한 위협이 될 것입니다. 장원의 무리가 많다 해도, 그들은 모두 새로 투항한 자들로, 아직 전투력이 없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도착할 때를 이용하여 먼저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용수는 모용륭의 계책을 채택하였다. 장원과 그의 아들 장귀(張龜)가 그들의 용맹함만을 믿고, 보•기 20,000명을 이끌고 와서 후연군을 먼저 공격하였다. 후연군이 두성(斗城)에서 옹구까지 20여 리 떨어진 곳에 도착하여 쉬고 있을 때, 장원이 군대를 이끌고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니, 병사들은 모두 크게 놀랐다. 범양왕 모용덕은 황급히 철수하였으나, 모용륭은 자리를 지키며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장원이 아들 장귀를 보내 모용륭을 공격하자, 모용륭은 침착히 부장 왕말(王末)을 보내 반격함으로써 적을 격파하고 장귀를 참수하였다. 모용륭은 천천히 전진하여 싸웠고, 장원은 당해내지 못하여 옹구로 물러갔다. 모용덕은 몇 리를 도망치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다시 군대를 정비한 뒤 모용륭과 합류하여 말했다.
"적의 기세가 아직 강하니 천천히 대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용륭이 말했다."장원은 사람들을 준비 없이 기습하는 것으로 큰 승리를 거두려 하였으나, 우리 병사들은 강을 등지고 있어 스스로 싸우려 했기에 이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적이 이익을 얻지 못하고 기세가 꺾여 힘이 약해졌으니, 모두 전진할 마음만 있을 뿐, 천천히 싸울 수는 없습니다. 속히 공격해야 합니다."
모용덕이 말했다."저는 오직 그대의 말을 따를 뿐입니다."
그러고 나서 전진하여 옹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적병 7,800명의 목을 베었고, 장원은 몸을 피하여 삼포구(三布口)로 도망갔다. 후연군이 역성(厯城)으로 진군하자, 청주(青州), 연주(兖州), 서주(徐州)의 여러 군현과 성채가 많이 항복하였다.건흥 3년(388년) 9월, 고성(高城)의 반란군 장신(張申)이 광평(廣平)을 공격하고, 장무(章武)의 반란군 왕조(王祖)가 낙릉(樂陵)을 공격하자, 모용륭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진하였다.
건흥 3년(388년) 12월, 태원왕 모용해와 조왕 모용린이 합구(合口)로 나아가 장신, 왕조의 반란을 진압 중인 모용륭과 합세하였다. 후연군이 장신부터 공격하자 왕조는 장신을 구원하기 위해 여러 보루의 병력을 이끌고 밤에 후연군을 공격하였으나, 모용린 등은 이를 간파하여 역으로 왕조를 쳐 패주시켰다. 모용륭은 모용해와 모용린을 남겨둔 뒤, 왕조를 추격해 날이 밝을 때 즈음에 다시 한번 격파하고 적병의 수급을 많이 노획하여 돌아왔다. 그리고 전날 전투에서 얻은 수급들을 보루에서도 볼 수 있도록 매달아 놓으니, 겁을 먹은 장신이 보루에서 나와 항복하였고, 왕조도 죄값을 받기를 청하며 귀순하였다.
건흥 4년(389년) 정월, 도독유평2주제군사(都督幽平二州諸軍事)•정북대장군•유주목(幽州牧)•녹유대상서사(録留臺尚書事)에 임명되어, 증앙으로 소환받은 모용농을 대신해 용성(龍城)을 다스렸다. 모용륭이 모용농이 세워둔 법률과 제도에 의거해 지역을 다스리니, 요(遼)와 갈(碣) 일대가 매우 안정되었다.
건흥 5년(390년) 9월, 북평(北平) 사람 오주(吴柱)가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승려 법장(灋長)을 천자(天子)로 옹립하고, 북평군을 공격해 광도(廣都)를 유린한 후, 백랑성(白狼城)으로 들어가 점거하였다. 당시 모용륭은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있었고, 여러 군현의 수령들이 모두 모용륭의 부인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오주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모용륭에게 나아가 대군을 보내어 반란을 진압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모용륭이 말했다.
"지금 백성들이 평안하게 생활하며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소. 비록 오주 등이 잔꾀를 부려 어리석은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협박하여 모았지만, 그들은 큰 위협이 되지 못하오."
그리고는 장례를 끝까지 마친 후에 북평태수와 광도현령에게 먼저 돌아가게 하고, 이어서 안창후 모용진(慕容進)에게 100여 기병을 주어 백랑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오주의 무리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흩어졌고, 모용진은 오주를 추격하여 붙잡아 참수하였다.건흥 10년(395년) 12월, 참합피 전투에서 북위의 위왕 탁발규에게 참패를 당하고 돌아온 태자 모용보가 설욕하고자 성무제 모용수에게 다시 공격하기를 청하였다. 모용수는 마침내 북위를 멸하기로 결심하여 청하공 모용회를 용성으로 보내 모용륭을 대신해 지역을 다스리게 하고, 모용륭은 용성의 정예병들을 거느려 수도 중산(中山)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건흥 11년(396년) 정월, 모용륭이 중갑병들을 인솔해 중산으로 입성하니, 그 군대의 위용이 우수하고 가지런하여 후연 사람들의 기세가 다시 되살아났다.
건흥 11년(396년) 3월, 성무제 모용수가 모용덕을 중산에 남겨 지키게 하고, 대군을 휘몰아 운중(雲中)으로 진군하였다. 후연군이 엽령(獵嶺)에 이르렀을 때, 모용수가 모용륭과 모용농을 선봉으로 삼아 평성(平城)을 습격하였다. 이때 후연군은 참합피에서 패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모두 북위군을 두려워하였으나, 모용륭이 이끄는 용성의 갑병들만은 용감하게 앞장서서 북위군과 싸웠다. 평성을 수비하던 북위의 진류공 탁발건은 출전하여 싸웠다가 결국 후연군에게 패하고 전사하였다.
건흥 11년(396년) 4월, 평성을 접수한 성무제 모용수는 평성에서 10일간 머물다가 갑자기 병세가 위독해져 연창성(燕昌城)만 쌓고 귀환하는 길에 저양(沮陽)에서 붕어하였다. 후연군은 곧바로 발상하지 않다가 군대가 중산에 이르러서야 발상하였고, 태자 모용보가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영강 원년(396년) 5월, 상서우복야를 겸하게 되었다.
영강 원년(396년) 6월, 반란하였다가 패하여 황하 너머로 달아났던 정동장군 평규(平規)가 잔당을 취합하여 고당(高唐)을 점거하였다. 이에 혜민제 모용보가 모용륭을 파견해 평규를 토벌케 하니, 과거 모용륭의 은혜를 입은 바 있던 동토(東土)의 백성들이 무리지어 모용륭이 보낸 척후병을 맞이하였다.
영강 원년(396년) 7월, 모용륭의 본대가 황하 인근까지 진군하자, 평규는 고당을 버리고 달아났다. 모용륭은 건위장군 모용진 등을 보내 황하를 넘게 하고, 평규를 추격하여 제북에서 그를 붙잡아 참수하였다. 평규의 조카 평희(平喜)는 동진의 영역인 팽성(彭城)으로 도망쳤다.
영강 원년(396년) 9월, 혜민제 모용보가 청하공 모용회에게 조서를 내려 아직 용성에 남아있던 모용륭의 참좌, 부곡, 가속들을 모두 중산으로 보내게 하였다. 그러나 청하왕 모용회가 이를 훼방하여 조서를 거스르고, 모용륭의 부곡을 용성에 억류하여 중산으로 보내지 않았다.
영강 원년(396년) 11월, 탁발규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중산을 공격하자, 모용륭은 남쪽 성곽에서 분전하여 탁발규의 공세를 막아냈다. 탁발규는 중산이 견고한 것을 보고, 업과 신도(信都)부터 빼앗은 후에 중산을 공격해도 늦지 않는다며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영강 2년(397년) 3월, 신도를 떨어뜨린 탁발규가 다시 중산을 포위한지 2개월이 지났을 무렵, 성 안의 연나라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출전하여 싸우기를 원하였다. 모용륭이 혜민제 모용보에게 진언하였다.
"탁발규가 비록 여러 번 작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병사들을 오래 주둔시켜서 흉한 기운이 꺾이고 병사들과 말들이 절반 이상 죽거나 다쳤습니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고 여러 부대는 흩어지려 하고 있으니, 지금이 바로 그들을 격파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성 안의 병사들도 싸우고 싶어합니다. 우리의 기세를 이용하여 적의 쇠약함을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만약 신중하게 행동하려다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장병들의 사기는 꺾이고, 날이 갈수록 어려움에 처해 결국 변고가 생길 것입니다. 그때 가서 다시 출전하려고 해도 그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모용보는 이에 동의했지만, 조왕 모용린이 계속해서 이를 반대하였다. 모용륭은 여러 차례 이 계획을 제안했지만 번번이 무산되었고, 이러기를 너덧 차례나 반복하였다. 결국 모용보는 탁발규에게 사신을 보내, 이전에 모용수가 억류한 탁발규의 동생 탁발고(拓跋觚)를 돌려주고, 상산(常山) 이서의 땅을 할양하겠다는 조건으로 화의를 청하였다. 탁발규가 받아들이고 군대를 거두어 돌아가자, 모용보는 조건을 행하자마자 곧바로 후회하였다.3월 11일[3], 탁발규가 노노(盧奴)로 갔다가 이틀 뒤인 13일에 또다시 중산을 포위하였다. 모용륭이 연나라의 장수와 병사 수천 명과 함께 혜민제 모용보에게 나아가 말했다.
"지금 궁지에 몰린 성을 지키기만 한다면 결국 피폐해질 것입니다. 신들은 출전하여 싸우고 싶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항상 이를 막으십니다. 이는 곧 스스로 패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오랜 포위 속에서도 기적 같은 변화가 없고, 단지 시간이 지나 적이 물러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안팎의 세력 차이가 현저하여 적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 명확합니다. 따라서 병사들의 의견을 따라 결전을 벌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용보가 이를 허하였다. 황제의 허락을 받은 모용륭은 물러나 병사들을 정비하고, 참모들을 소집한 후에 장렬히 선언하였다."황실의 위엄이 떨어지고, 적이 우리를 능멸하니, 이는 신하로서 모두 부끄러워할 일이다. 오늘 우리가 적을 격파하여 승리하게 된다면 당연히 좋겠지만, 설령 불행히 패배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충절을 펼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대들 중에 북쪽으로 가서 나의 어머니를 뵙게 되는 자가 있다면 이 마음을 꼭 전해주어라."
이후 갑주를 입고 말에 올라 성문으로 나아가서 모용보의 출진 명령을 기다리는데, 모용린이 다시 나타나 강력히 이를 저지하였다. 병사들은 크게 분노하였으나, 모용보로부터 군사(軍事)를 일임받은 것은 모용린이었기에, 모용륭은 하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그날 밤, 모용린이 혜민제 모용보를 시해하려다 실패하여 도망쳤다. 모용린이 도망가고 나서야 변고를 전해들은 모용보는 행여나 모용린이 모용회와 합세하여 반란이라도 일으킬 것을 걱정하여, 모용농과 모용륭을 불러 도읍을 용성으로 옮기는 일에 관해 의논하였다. 이때 모용륭이 권하였다.
"선제께서 풍파를 무릅쓰고 중흥의 업을 이루셨는데, 돌아가신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으니, 어찌 이것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외부의 적은 기세가 날카롭고, 내부의 혼란은 다시 일어나 형제간의 불화가 심해져 백성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적을 막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북쪽으로 옛 도읍으로 옮기는 것도 하나의 방책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용천(龍川)은 땅이 좁고 백성이 가난하니, 중원의 풍요로움을 기대하며 그곳에 정착해 큰 성과를 내기란 불가능합니다. 대신,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농업과 병력을 훈련시켜 수 년 안에 공사(公私)가 충실해지면 조(趙)•위(魏) 일대의 백성들이 도적의 폭정을 싫어하고 연나라의 덕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깃발을 들고 돌아가도 고토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험지를 의지해 자립해도 충분히 여유롭게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모용보가 답했다."경의 말이 옳소. 짐은 경의 의견을 따르겠소."
점을 잘 쳐 평소 모용륭으로부터 신뢰를 받던 요동 사람 고무(高撫)가 모용륭에게 사사로이 말했다.
"전하께서 북쪽으로 가시면 결국 도달하지 못할 것이며, 태비 마마 역시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주상께서 홀로 가시고 전하께서 이곳에 남으신다면 반드시 큰 공을 세우실 것입니다."
모용륭이 답했다."나라에 큰 어려움이 닥쳐 주상께서 곤욕을 치르고 계시오. 더군다나 어머니께서 북쪽에 계신데, 내가 북쪽으로 가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이오. 그대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이후 모용륭은 부하들을 소집해 용성으로 떠날 것인지, 중산에 남을 것인지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오직 사마 노공(魯恭)과 참군 성급(成岌)만이 따르기를 원했고, 나머지 모두는 남기를 원하여 모용륭이 남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대로 남을 수 있도록 하였다.혜민제 모용보는 태자 모용책(慕容策), 요서왕 모용농, 고양왕 모용륭 등과 함께 10,000 기병을 거느리고 중산성을 탈출하여 청하왕 모용회가 있는 계(薊)로 향하였다. 이때 모용보의 동생인 하간왕 모용희(慕容熈), 발해왕 모용랑(慕容朗), 박릉왕 모용감(慕容鑒) 모두 나이가 어리다보니, 말에 오르지 못해 성을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이에 모용륭은 긴박한 와중에도 다시 성으로 들어가 그들을 모두 자신의 말에 태우고 모용보의 뒤를 따라갔다. 황제가 성을 비우고 도망치자, 후연의 장수 왕침(王沈) 등은 성을 빠져나와 인근에 주둔해있는 북위군 진영으로 가서 투항하였고, 낙랑왕 모용혜(慕容惠), 중서시랑 한범(韓範), 원외랑 단굉(段宏), 태사령 유기(劉起) 등은 업으로 도망쳐 범양왕 모용덕에게로 갔다.
3월 16일[4], 혜민제 모용보가 계에 도착했을 때, 함께하던 궁내의 측근들은 거의 다 흩어졌고, 오직 모용륭이 이끄는 몇백 기병만이 좌우를 호위하고 있었다. 청하왕 모용회가 기병 20,000명을 이끌고 성에서 나와 계 남쪽에서 모용보를 맞이하였는데, 모용보는 모용회의 태도가 불만스럽고 원망스러운 듯해 모용륭과 요서왕 모용농에게 비밀리에 이에 대해 물었다. 이에 모용농과 모용륭이 답했다.
"모용회는 아직 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다 보니 교만해진 것입니다. 어찌 다른 의도가 있겠습니까? 신들이 마땅히 예로써 꾸짖으면 됩니다."
모용보는 일단 수긍하였으나, 여전히 모용회를 믿지 못하여 그의 군대를 해체하고 모용륭에게 맡기려 하였다. 모용륭은 이를 굳게 사양하였지만, 모용보는 모용회의 병력을 나누어 모용농과 모용륭에게 주었다.3월 18일[5], 혜민제 모용보가 계성 안의 부고(府庫)를 모두 용성으로 옮기고 북쪽 용성으로 향하였다. 이때 북위의 장수 석하두(石河頭)가 추격하여 20일에 그 하겸택(夏謙澤)에서 그 후미를 따라잡으니, 청하왕 모용회가 모용보에게 말했다.
"신은 병사들을 훈련시켜 적과 싸우기만을 원합니다. 지금 폐하께서 수모를 당하시어 사람들은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려 합니다. 이런 때에 마침 적이 감히 스스로 찾아왔으니, 모두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병법에 따르면 '귀환하는 군사를 막지 말라'고 했고, 또 '사지(死地)에 놓여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이러하니, 어찌 승리에 대한 걱정을 하겠습니까? 만약 지금 물러난다면 적은 사람들을 잡아갈 것이고, 또다시 변고가 생길 것입니다."
모용보는 전투를 최대한 피하고 싶었으나, 하는 수 없이 모용회의 청을 들어주어 전투를 허하였다. 모용회는 군대를 정비해 북위군과 전투를 벌였고, 모용농과 모용륭 등은 남쪽에서 기병을 이끌고 돌격하였다. 석하두는 크게 패하고 100여 리를 추격당하면서 병력 수천 명을 상실하였다. 모용륭 또한 몇십 리를 홀로 추격하고 돌아와, 눈물을 흘리며 옛 부하인 유대치서 양구(陽璆)에게 말했다."중산성 안에 수만 명의 병력이 있었음에도 모용린이 나의 뜻을 펴지 못하게 하였소. 오늘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를 생각할 때면 아쉬움이 더욱 크구려."
그러나 모용회는 북위군을 격퇴시킨 이후로 점점 교만해졌고, 모용륭은 여러 차례 그를 훈계했지만 그럴수록 모용회는 더욱 분개하는 마음을 품었다. 또, 모용회는 모용농과 모용륭이 모두 용성을 한때 다스렸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지지기반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였고, 이미 태자가 되기는 글렀다는 것을 알아 반란을 모의하기 시작하였다.유주와 평주의 군사들은 모두 청하왕 모용회의 은혜를 입었기에, 모용농과 모용륭에게 속하기를 기뻐하지 않아 혜민제 모용보에게 청하였다.
"청하왕의 용맹과 지략은 이 세상을 뛰어넘었습니다. 신들은 청하왕과 맹세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하였으니, 폐하께서는 황태자와 여러 왕자들을 계궁(薊宫)에 머물게 하십시오. 신들이 청하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경사(京師)의 포위를 풀고, 다시 폐하를 맞이하러 돌아오겠습니다."
하지만 모용보를 따라온 좌우의 신하들은 모용회를 싫어하여 모두 반대하며 모용보에게 말했다."청하왕이 안그래도 황태자가 되지 못하여 심기가 매우 불편한 마당에, 그의 재주와 무용이 뛰어나 사람들의 마음도 잘 얻습니다. 폐하께서 만약 저들의 청을 따르신다면, 저들이 포위가 푼 후에 반드시 위걸(衞輒)의 일이 벌일까 두렵습니다."
이에 모용보가 모용회의 무리에게 말했다."도통(道通: 모용회의 字)은 나이가 젊고 재주가 두 왕들에게 미치지 못하니, 어찌 그에게 전쟁의 임무를 맡길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 짐 스스로 6사(六師)를 통솔하고 있으니, 모용회는 마땅히 우익(羽翼)이 되어야 한다. 어찌 그를 좌우에서 떨어뜨릴 수 있겠는가?"
그러자 모용회의 무리는 불쾌해하며 물러갔고, 좌우의 신하들은 모용보에게 모용회를 죽이라 권하였다. 시어사 구니귀(仇尼歸)가 이를 듣고 모용회에게 알렸다."대왕께서 의지할 것은 아버지인데, 그 아버지가 이미 다른 꾀를 품고 계시고, 의지할 군사들은 이미 손에서 떠났습니다. 이제 어디에 몸을 의지하시겠습니까? 차라리 두 왕을 죽이시고 태자를 폐하신 후에, 대왕께서 스스로 동궁(東宮)에 머무르며 장상(將相)의 임무를 겸하여 사직을 바로잡는 것이 최상의 계책입니다."
하지만 모용회는 망설이며 따르지 않았다.이러한 와중에 혜민제 모용보가 모용륭과 모용농을 불러 말했다.
"짐이 보건대 모용회가 반란 일으킬 마음을 품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의당 그를 제거해야만 하오."
모용륭과 모용농이 반대하며 말했다."지금 외적의 침입과 내부의 분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워 위험이 누란(累卵)과도 같으니, 옛 도읍을 진무(鎭撫)하고 국가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용회의 위세와 명망은 사방을 진동시키기에 충분하므로, 반역의 징조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마당에 갑자기 그를 죽이신다면 부자간의 은혜를 해칠 뿐만 아니라, 더욱 큰 손실을 초래할까 두렵습니다."
모용보가 다시 말했다."모용회는 이미 반역의 뜻을 품었으나, 경들은 인자하게도 일찍 죽이지 않으려 하고 있소. 만약 언젠가 변고가 생기면 먼저 여러 종친들을 해치고 나서 짐에게 이를 것이오. 그때가 되어서야 뉘우치지나 마시오."
이를 전해들은 모용회는 더욱 불안해하였다.영강 2년(397년) 4월 6일[6], 혜민제 모용보가 광도(廣都)의 황유곡(黄榆谷)에 유숙하게 되었다. 모용회는 이 때를 노려 구니귀와 오제염간(吳提染干)에게 장사(壯士) 20여 명을 나누어주어 모용농과 모용륭 암살을 시도하였다. 오제염간은 야밤에 모용륭의 장막을 침범하여 그를 죽여버렸다. 시호는 '강(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