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2:18:55

몽고메리 클리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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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f,#000> 이름 몽고메리 클리프트
Montgomery Clift
분야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6104 Hollywood Blvd. }}}}}}}}}

<colbgcolor=#4a4b4a><colcolor=#fff> 몽고메리 클리프트
Montgomery Clift
파일:MontgggomeryClift.jpg
본명 에드워드 몬거머리 클리프트
Edward Montgomery Clift
별명 먼티
Monty
출생 1920년 10월 17일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
사망 1966년 7월 23일 (향년 45세)
미국 뉴욕주 뉴욕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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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배우
활동 1935년 ~ 1966년
신장 177cm
링크 파일:IMDb 로고.svg

1. 개요2. 위상3. 생애 및 활동
3.1. 브로드웨이 아역 스타 시절3.2. 성공적인 영화 활동3.3. 비극의 시작3.4. 몰락
4. 사망5. 사생활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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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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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배우.

2. 위상

지적이고 우수에 찬 눈빛의 미남 배우로 1940년대와 5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이에 걸맞게 예민한 이미지의 남성 연기를 많이 하였다. 할리우드 최초의 메소드 연기 배우들 중 하나로 분류된다. 말런 브랜도제임스 딘처럼 대놓고 '나쁜 남자' 역할을 한 적은 없고, 고통에 시달리며 어딘가 냉담한 인물들을 페르소나로 삼았는데, 차갑고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캐릭터들이 주라서 냉담한 인물들로 보일 뿐이지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연기한 이 인물들 역시 '나쁜 남자' 캐릭터들이다. 브랜도-딘이 연기한 캐릭터들은 계획적이고 교활한 면은 없다. 클리프트가 연기한 '나쁜 남자' 캐릭터들이 따지고 보면 더 악질이다(...). <젊은이의 양지> 등 총 17편의 영화를 찍었고, <지상에서 영원으로> 등을 통해 아카데미에 네 번이나 후보로 지명됐다. BAFTA골든 글로브의 후보 목록에도 한 번씩 올랐지만 수상엔 실패했다.

폴 뉴먼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는데, 뉴먼은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무리가 선택한 길이 잘못됐단 걸 알아도 끝까지 처음의 신념을 밀어붙이는 의리파를, 클리프트는 출세를 위해 사랑하는 여인을 버리거나 자신에게 진심인 여인일지라도 본인은 진심이 아닌 경우 그대로 냉정하게 떠나버리는 차가운 인물을 주로 연기했다는 차이가 있다. 다만 뉴먼은 <상처 뿐인 영광>(1956)과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1958), <길고 긴 여름날>(1958)[1]로 스타덤에 오르긴 했지만 전성기는 60년대부터로, 50년대는 엄연히 클리프트-브랜도- 이 세 사람의 시대였다.

3. 생애 및 활동

3.1. 브로드웨이 아역 스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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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던 월스트리트 증권 중개인 아버지 윌리엄 브룩스 클리프트[2]와 소위 남부 귀족 태생의 어머니 에설 파그[3] 사이에서 태어났다. 쌍둥이로 태어났으며, 쌍둥이 남매 러버터 "에설" 클리프트[4]는 클리프트의 사후 48년을 더 살았다. 그밖에 형제론 형인 윌리엄 브룩스 클리프트 주니어(1919~1986)가 있었다. 학교에 다니는 대신 가정교사들에게서 귀족식 교육을 받았고, 유럽으로 자주 유람을 다녔다. 그러나 1929년 주식 시장이 대폭락하면서 플로리다로 이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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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남매 에설과. 1930년대.

13살 때 지역 극단의 공연에 오른 아들의 재능을 발견한 어머니는 계속 연기를 하도록 격려해주었다. 1935년에 다시 뉴잉글랜드로 이사를 갔고, 그해 "Fly Away Home(집 떠나 비행길)"[5]에 출연하게 되면서 14살의 나이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처음 오르게 된다. 그리고 1938년 "Dame Nature(대자연)"[6]에 나오면서 브로드웨이 스타가 되었다. 자연스레 여러 차례 영화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1939년 노엘 카워드의 희극이 원작인 "Hay Fever(고초열)"[7] TV판에만 한 번 나왔을뿐 10여 년간 영상 작업에 대해선 계속 거절만 했다.

1947년 뉴욕에 '엑터스 스쿨'이 설립된 후 엘리아 카잔리 스트라스버그는 몬티(Monty)를 초빙해 메소드 연기에 대한 교류를 나누었다.# 즉,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엄밀히 말해 메소드 연기를 브로드웨이에서 Mira Rostova[8] 같은 사람에게서 이미 배웠고, '액터스 스쿨'에서 갈고 가다듬었단 게 정확한 표현이다. 그리고 정작 몬티(Monty)는 메소드 연기와 항상 일정한 거리를 뒀다고 한다.

3.2. 성공적인 영화 활동

그러다가 1948년 프레드 진네만(Fred Zinnemann) 연출의 <수색>에 나오면서 바로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전후 독일에서 미아가 된 소년을 만나 어머니와 재회하도록 도와주는 미군 연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9]

실은 존 웨인과 함께 주연한 하워드 혹스의 <붉은 강>이 데뷔작이었지만, 개봉이 늦어졌다. <레드 리버>는 텍사스에서 미주리까지 소떼를 이동시키는 험난한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었다. 클리프트는 가장과 갈등을 빚는 양자 역할 연기로 역시 찬사를 받았다. "클리프트의 연기에 실린 감정엔 기존 배우들과 다른 어떤 진실성이 있었다." 영화는 1948년 전체 흥행 3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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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리버>

이 당시 문제가 하나 있었다면, 22살 때 실험연극 "Mexican Mural(멕시코풍 벽화)"[10] 무대에서 만난 러시아 태생의 연극 코치 미라 로스토바[11]에 대한 지나친 의지였다. 윌리엄 와일러의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The Heiress)>(1949)에서 상대역이었던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애정 장면에서조차 클리프트가 자기 대신 카메라 밖에서 지켜보고 있는 로스토바를 쳐다본다며 불평했다. 빌리 와일더의 차기작이며 고전 명작이 된 <선셋 대로>(1950)도 로스토바가 대본이 클리프트의 실제 삶과 비슷하다고 반대하자 이를 클리프트가 그대로 수용해 거절하며 기회를 놓쳐버렸다. 대신 역을 낚아챈 윌리엄 홀든은 이 작품으로 스타가 되었다. <선셋 대로> 대신 클리프트가 고른 건 베를린 공수작전을 소재로 한 <The Big Lift>(1950)였는데, 평이 그리 좋지 않았다.

클리프트는 첫 출연작이 개봉한지 겨우 3년이 지난 1951년,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나온 <젊은이의 양지>로 확고부동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클리프트는 두 번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이 당시엔 업계에 클리프트가 게이라는 사실이 거의 알려져있지 않아 "할리우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쌍"이라고 불리기도 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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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의 양지> 촬영 중 쉬는 시간에 장난 치는 두 사람 1954년 테일러의 <내가 마지막 본 파리(The Last Time I Saw Paris)> 초연 행사에 동행한 클리프트

2년 뒤에 나온 진주만 공습 소재의 <지상에서 영원으로>(1953)는 그의 스타성을 재확인 해주었다. 예전에 권투를 했으나 모종의 사고로 트라우마가 생겨 중단하고 직업군인이 되어 나팔수로 복무 중인 이등병 역이었다. 이 이등병에게 양가적인 태도를 보이는 선임하사관 역의 버트 랭카스터는 이때 클리프트의 재능에 자신감을 상실해 같이 나오는 장면을 촬영할 때마다 떨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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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에서 "배우들의 배우"라 불리기 시작했다. 비평가들은 이제 그에게 견줘질 사람은 똑같이 메소드 연기를 하며 똑같이 네브래스카 출신인 말런 브랜도 뿐이라고들 했다. 클리프트의 연기는 전부 즉흥으로 보일만큼 매우 자연스럽지만, 실제로는 대본을 철저히 연구하고 꼼꼼히 적은 내용을 기술적으로 완벽히 숙달한 뒤에 이를 촬영장에서 그대로 구현해내는 유형으로, 연기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여담이지만 <지상에서 영원으로>를 촬영할 때 브랜도가 촬영장을 방문해 둘이 함께 찍힌 사진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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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작품들이 흠 잡을 데 없이 성공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고백한다(I Confess)>(1953)에서 클리프트는 자신에게 살인을 고해성사한 독일 출신 성당 관리자에 의해 누명이 씌워져 고통 받는 퀘벡시 신부를 연기해 평단에서 호평 받았지만,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은 제작 노트에 '클리프트의 모호한 메소드 연기가 영화의 집중력을 방해한다'고 썼다. 또한 비토리오 데 시카의 신파극 <종착역>(1954)[14]은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에 의해 1년 동안이나 편집됐는데도 흥행에 실패했다. 셀즈닉의 아내 제니퍼 존스는 클리프트를 짝사랑하다가 나중에 그가 게이라는 걸 알고 분노하기도 했다. 클리프트는 이 영화를 싫어했다.

3.3. 비극의 시작

30대 중반이 된 1956년, 클리프트는 엘리자베스 테일러남북 전쟁 시대 배경의 <애정이 꽃피는 나무(Raintree County)>(1957)를 찍던 중에 할리우드 힐스에 위치한 테일러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다. 들떠있던 클리프트는 귀가길에 진정제 두 알을 먹었는데 이게 하필 졸음을 유발해 전신주에 차를 박았다. 치아 여러 개가 부러져 몇 개는 혀를 뚫고 일부는 목 뒤로 넘어가 기도를 막았는데 급히 사건현장으로 달려온 테일러가 질식 직전에 구조해주었다.그 와중에 테일러는 순식간에 몰려든 파파라치들이 클리프트의 끔찍한 모습을 찍지 못하도록 자신의 몸을 이용해 클리프트의 몸을 가려야 했다. 사고 현장 사진을 배포하는 기자는 끝장을 내주겠다는 엄포도 서슴치 않았다. 이때 테일러가 기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호명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 덕에 사고 관련 사진은 현재 단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

턱뼈를 철사로 고정하고 성형을 했지만 이전의 미모는 되찾을 수 없었다.[15] 후유증으로 얻은 극심한 통증을 해결하기 위해 약에 의존하게 됐다. <애정이 꽃피는 나무>에서도 쫓겨날뻔 했지만 테일러의 비호로 살아남았다. 촬영은 사고로부터 두 달 후 재개되었다. 작품평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사고 전후 얼굴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비교해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다행히 클리프트와 테일러의 연기만큼은 찬사를 받았다.

이후 테일러는 어떻게든 클리프트의 경력을 살려내기 위해 자신의 출연작에 클리프트를 추천하기 시작했다. 테일러가 자신의 스타파워를 이용해 다른 배우를 기용하게 만든 건 클리프트가 유일했다. 클리프트는 그렇게 테일러의 배려로 테네시 윌리엄스 원작의 상업 남부 고딕극 <지난 여름, 갑자기>의 배역을 차지했다. 그러나 조셉 L. 맨키위즈는 친절한 감독이 아니었고, 함께 출연한 캐서린 헵번은 아직 다 회복이 되지 않은 클리프트에게 감독이 너무 심하게 대한다고 생각해 촬영 내내 싸우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맨키위즈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당시 옆에서 뜯어말리던 제작자 샘 스피글(Sam Spiegel)은 <워터프론트>, <콰이 강의 다리>,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3번이나 수상한 거물 제작자다. 침을 뱉은 헵번과 맨키위즈를 보고 일단 뜯어말린 후 자신의 사무실로 따로 불러 둘 다 꾸짖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젠장!"라고 하며 사무실을 나간 맨키위즈 다음 헵번에게 사과할 맘 없냐고 묻자 헵번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고. 여담으로 Sam Spiegel도 산전수전 다 겪어본 강심장으로 유명한 제작자임에도 캐서린 헵번과 조셉 L. 맨키위즈가 둘 다 한 성깔 하는지라 진심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3.4. 몰락

퍼트리셔 보스워스[16]가 1978년에 낸 전기[17]에 따르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 삶도 술과 마약 중독을 부추겼다. 그러나 클리프트의 조수이자 절친이었던 러렌조 제임스[18]는 클리프트가 자신의 성 정체성 문제로는 딱히 심각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클리프트는 각종 건강 문제에 시달리게 됐다. 성격은 괴팍해졌고 연기는 둔해졌다. 야심 찬 언론인으로 나온 <론리하트(Lonelyhearts)>(1958)에서 클리프트는 떨고 있었다. <젊은 사자들(The Young Lions)>(1958)에선 드디어 말런 브랜도와 같은 영화에 나오게 됐는데도 초췌한 모습만 부각됐다. 여기서 클리프트는 반유대주의 때문에 고통 받는 젊은 유대계 징집병 역으로, 신체검사장에서 만난 딘 마틴 분의 동료 병사 역과 우정을 나눈다. 브랜도는 나치를 찬양하며 전쟁에 참여하지만 곧 환멸을 느끼는 독일인 스키 강사 역이었는데, 우연찮게도 딘 마틴 분의 현 애인이 전에 사귄 남자친구라는 설정이었다. 클리프트와 마틴은 영화의 종반부가 되어서야 브랜도와 마주친다.

리 레믹[19]과 공동 주연으로 나온 엘리아 카잔의 <와일드 리버(Wild River)>(1960)에서 클리프트는 뉴딜 정책의 일환이었지만 수많은 이주민을 낳았던 테네시강 유역 개발 공사[20]의 직원을 연기하며 잠깐 준수한 모습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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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리버>

하지만 아서 밀러 원작의 존 휴스턴 감독작 서부극 <기인들(The Misfits)>(1961)은 함께 출연한 클라크 게이블, 마릴린 먼로 모두의 유작이 된 일종의 장송곡이었다. 지금에 와선 모든 주요 출연진에게 있어 중요한 작품들 중 하나로 재평가 받고 있지만, 당대 평론가들은 당혹스러워하며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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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들>

그래도 스탠리 크레이머홀로코스트 법정극 <뉘른베르크의 재판(Judgment at Nuremberg)>(1962)에 조연으로 나오면서 네 번째 아카데미 후보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무상출연이었고 클리프트의 실제 몸 상태가 나치에 의해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 된 뒤 제정신이 아니게 된 유대인 강제수용소 생존자 연기에 신빙성을 더했다는 평론가들의 관측이 있다.

이제 클리프트를 쓰겠다고 나서는 감독은 같은 알코올 의존증존 휴스턴 정도였다. 그렇게 나오게 된 게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전기영화 <프로이드(Freud)>(1962)였다. 작품은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클리프트는 몸과 정신이 망가질대로 망가져 촬영 현장에서 배우로서 거의 기능하지 못했다. 유니버설은 제작 지연과 제작비 증대를 초래했다며 고소를 하려고 했다.

한편 엘리자베스 테일러존 휴스턴의 <황금눈에 비친 모습(Reflections in a Golden Eye)>(1967) 출연 제의가 왔을 때 다시 한 번 클리프트를 위해 자신의 스타 파워를 이용했다. 자신을 기용하고 싶다면 클리프트도 반드시 함께 뽑아야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제작사의 승낙을 받아냈다. 그러나 클리프트는 그 전에 먼저 계약돼있던 냉전시대 첩보 스릴러 <The Defector>(1966) 촬영부터 끝내야 했다.

4. 사망

<The Defector>의 촬영을 마친 클리프트는 60년대부터 살고 있던 뉴욕 이스트 61번가 주택으로 돌아와 방문을 닫고 홀로 있었다. 조수 러렌조 제임스가 <기인들>(1961)이 TV에서 나오는데 보겠냐고 문 앞에서 묻자 클리프트는 "절대로 싫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몇 시간 뒤 클리프트는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웃통을 벗고 독서용 안경을 쓴 채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그렇게 클리프트는 1966년 45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를 두고 흔히들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린 자살[21]"이라 한다.

클리프트의 사망으로 비게 된 <황금눈에 비친 모습>의 남자주인공 역은 말론 브란도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개봉하자마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5. 사생활

  •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서 테일러와 역시 절친이었던 게이 배우 로디 맥다월을 소개 받아 2년 넘게 교제했다. 클리프트에게 차인 이후에도 맥다월은 친구로 남아 곁에서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고 클리프트는 이를 감사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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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포티와도 한때 사귄 것으로 알려져있다.
  •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최초 발상을 당시 남자친구였던 연출가 저로움 라번즈에게 제공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6. 여담

  • <셰인>(1953)의 앨런 래드 배역과 <리오 브라보>(1959)의 딘 마틴 배역을 거절했다. <셰인>의 경우 각본이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해서[23], <리오 브라보>는 그전 <붉은 강>(1948) 촬영과 영화 홍보 과정에서 하워드 혹스+존 웨인이 보여준 갑질과 꼬장에 질려서 거절했다. 현재 두 작품 모두 서부극의 고전 반열에 올랐고, 두 배역 모두 '사연 있는 과거를 가진 우수에 찬 인물'이란 점에서 클리프트가 적역이기에 아쉬운 부분.
  •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숙취(The Big Hangover)>(1950) 남자주인공 후보에 오른 적이 있다. 이 출연이 성사됐다면 테일러와 더 일찍 만날 뻔 했지만 밴 존슨이 최종 낙점되었다.
  • 사망 전에 카슨 머컬러즈[24]의 소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25]"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얘기가 오가고 있었으나 해당 영화 제작은 클리프트 사망 후 흐지부지 되었다. 이후 다시 제작이 진행돼 1968년 앨런 아킨 주연으로 만들어졌다.
  • 업계에선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향이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 말런 브랜도는 클리프트가 알코올 의존증 환자 모임에 참석하는 데 동행하는 등 클리프트가 의존증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지원해주었다.
  • 제임스 딘은 그를 흠모하여 밤늦게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떨곤 했다고 한다.
  • 톰 크루즈가 신인 시절에 닮은 외모로 주목받기도 했다.
  • 형 브룩스 클리프트[26]의 자식인 조카 로버트 클리프트[27]가 문자로 주고 받은 얘기, 녹음된 통화 등 집안에서 간직해온 자료들을 발굴해 만든 다큐멘터리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유럽에서 육군성 방첩대 선발대원으로 복무했던 브룩스 클리프트가 첩보원 시절 버릇을 버리지 못해 종종 사적인 통화를 녹음하곤 했다고 한다.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알려져있는 것과 달리 유쾌한 성격이었으며, 게이 정체성을 그리 힘들게 여기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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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king Montgomery Clift>(2018)
  • 형 브룩스 클리프트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매우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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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C의 드라마 감독으로 350여편을 연출했고 광고감독이기도 했다.
  • 맷 보머가 클리프트의 전기영화에 출연하기로 한 적이 있으나 도중 제작이 취소되었다.

[1] 오슨 웰스도 출연했다. 비평에선 성공했지만 흥행엔 실패했다. 웰스의 모든 감독, 출연작 중 흥행에 성공한 건 <이방인(The Stranger)>(1946) 딱 한 편 뿐이다.[2] William Brooks Clift. 1886~1964.[3] Ethel Fogg. 1888~1988. 100살 장수를 누리다보니 남편과 두 아들이 죽은 걸 보고 세상을 떠났다.[4] Roberta "Ethel" Clift. 1920~2014, 94세[5] 어머니가 지나치게 보수적인 아버지와 이혼하고 이웃의 너그러운 교수와 재혼하려고 하자 아버지보다 교수 쪽을 더 좋아하는 네 자녀들도 찬성한다. 그러나 자녀들은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가 화해하도록 돕고, 아버지도 자신의 과거 행동을 반성하고 태도를 바꾸면서 부부가 재결합한다. 클리프트는 자녀 중 하나로 나왔다.[6] 프랑스 작가 앙드레 비라보의 희곡 원작. 한 소녀와 사랑에 빠진 청소년을 그린 희극이다.[7] 복귀를 앞둔 여배우, 소설가인 남편, 자녀인 남매가 각자 집으로 손님들을 초대한 뒤 평소처럼 오로지 여배우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손님들과 가볍게 시시덕대고 이를 연극적으로 과장하며 무례하게 굴어 손님들을 괴롭힌다. 클리프트는 여배우의 아들 역으로 나왔다.[8] Mira Rostova. 1909-2009.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몽고메리 클리프트 외에 제시카 랭, 알렉 볼드윈 등이 그녀에게서 메소드 연기를 배웠다. '엑터스 스쿨'과는 아무 관계없는 제3자다.[9] 수상은 <햄릿>(1948)의 로런스 올리비에에게 돌아갔다.[10] 베라크루즈에서 열린 팬케이크 데이(Shrove Tuesday) 축제에 참석한 여러 사람들의 사연을 담아냈다.[11] Mira Rostova. 클리프트의 인기가 한창 절정이었던 1954년에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함께 안톤 체호프갈매기에 나오기도 했다. 한때 연인 사이로 의심 받았다.[12] 물론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촬영 때부터 클리프트가 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13] 랭카스터는 이후 '스타가 아닌 연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이후 자신이 연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화들 위주로 출연하게 된다. 그로 인해 배우로서 재평가를 얻는 대신 박스오피스 스타로서의 위상은 잃어버렸다. 랭카스터가 클리프트의 연기력을 존경한 반면, 클리프트는 랭카스터가 자기보다 출연료를 많이 받는 것에 분노했다.[14] 미국 개봉 제목은 "Indiscretion of an American Wife(미국인 아내의 경솔한 행동)".[15] 화면상으론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망가졌다고 느끼기 어렵다. 그러나 당시 업계인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실물로 보면 전후 차이가 충격적으로 컸던 모양이다. 역시 화면상으론 잘 보이지 않지만 육안으론 얼굴에 남은 상처 자국들이 뚜렷하게 두드러졌다고 한다.[16] Patricia Bosworth. 1933 - 2020. 배우로 활동한 적이 있으며, 말런 브랜도(2001), 제인 폰다(2011), 존 웨인(2012)의 전기도 저술했다.[17] Montgomery Clift: A Biography.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18] Lorenzo James.[19] Lee Remick. 1935 - 1991. <살인의 해부(Anatomy of a Murder)>(1959)와 <술과 장미의 나날(Days of Wine and Roses)>(1962)이 대표작.[20] Tennessee Valley Authority.[21] "the longest suicide in Hollywood history."[22] Kevin McCarthy. 1914 - 2010.[23] 다만 <셰인>의 각본가 A. B. 거스리 주니어와 잭 셔는 처음부터 클리프트를 주연으로 염두에 두고 원작 소설을 각색했다 한다. 이미 <젊은이의 양지>(1951)에서 클리프트와 한 번 협업했던 조지 스티븐스 감독도 무척 아쉬워했다는 후문.[24] Carson McCullers. 1917 - 1967.[25] The Heart Is a Lonely Hunter. 1940년 발표.[26] William "Brooks" Clift, Jr.. 1919 - 1986.[27] Robert Cli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