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03:45:03

미즈타니 유타카

미즈타니 유타카의 주요 수상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역대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파일:키네마준보.png
남우주연상
제49회
(1976년)
제50회
(1977년)
제51회
(1978년)
사부리 신
(화석)
미즈타니 유타카
(청춘의 살인자)
타카쿠라 켄
(행복의 노란 손수건 / 핫코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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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타니 유타카
[ruby(水谷, ruby=みずたに)][ruby(豊, ruby=ゆたか)] | Yutaka Mizutani
파일:3889209.jpg
출생 1952년 7월 14일 ([age(1952-07-14)]세)
홋카이도 아시베츠시
출신 도쿄도 타치카와시[1]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신체 168cm, 60kg, A형
가족 배우자 이토 란(1989년 결혼 ~ 현재)[2]
장녀 슈리
학력 타이세이고등학교 (졸업)
직업 배우, 가수, 영화감독
소속사 트라이섬[3]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
2.1. 데뷔와 은퇴2.2. 인기 배우가 되다2.3. 제2의 전성기
3. 출연 작품
3.1. 드라마3.2. 영화
4. 수상5. 여담6. 관련 문서7.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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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배우, 가수, 영화감독.

2. 생애

2.1. 데뷔와 은퇴

미즈타니 유타카는 4남매 중 막내홋카이도 소라치군 아시베츠정(현재의 아시베츠시)에서 태어났다. 눈이 쌓여있는 시골에서 느긋하게 살았으며, 8살 때 아버지가 전근하면서 도쿄도 타치카와시로 이사갔다. 초등학교 당시 처음 TV가 집에 오면서 "왜 이렇게 작은 상자 안에 영상이 비춰지지?"라고 생각하며 그 현장이나 무대 뒤에 관심을 가지고 정신없이 TV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이윽고, "저 상자 안에 나도 들어가 보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미즈타니는 초등학교 6학년(12세) 때 동네의 자신을 매우 귀여워해 주는 카야마라는 아주머니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다. 이후 아주머니는 미즈타니에게 아동 극단 '극단 해바라기'의 팜플렛을 주었다. 미즈타니는 극단 오디션에 즉시 응모해 '극단 해바라기'에 입단했으며, 주로 엑스트라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래서 1966년 13세 때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으로 '극단운'의 오디션을 보게 됐고, 조역으로 합격해 연극 '동쥐앙'으로 연극 배우로 데뷔했다.[4] 이때부터 연극 무대에서 경험을 쌓고 연기력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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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출연 당시의 미즈타니 유타카

1968년 16세 때에는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의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특촬물 드라마 '뱀파이어'의 오디션을 보게 됐다. 미즈타니는 800: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게 된다. 갑자기 달을 보면 늑대로 변신해 버리는 주인공 '타치바나 토페이' 역으로 발탁되어 염원하던 TV 드라마 데뷔를 하고 '작은 상자' 안에 들어간다는 목적을 달성했다.[5] 이 작품이 미즈타니의 사실상 데뷔작으로 꼽히고 있다. 데뷔작으로 주역이라는 이례적인 대발탁을 받은 것이다.

드라마 '뱀파이어'의 주연을 맡은 이후, 인기가 많아져서 많은 작품에 아역으로 출연했지만, 자신의 일에 회의감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연예계의 활동하는 어른들이 싫어져서 인간 불신이 생겼으며, 연예계를 "여기는 내가 있어야 할 세계가 아니야"라고 느꼈다. 또한 학교에서는 성적은 좋았지만, 연예계 활동으로 인해 친구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는 후일 인터뷰에서 "일찍부터 일자리를 얻었기 때문에 버텼다. 각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어서 종이비행기로 만들어 날리는 듯한 반항도 했다."라고 말했다.

결국 미즈타니는 연예계에 염증을 느껴 18세의 연예계를 은퇴한다. 같은 해 다이세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연예계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영화 캐스팅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미즈타니는 영화는 출연하되 그 후 연예계를 은퇴하기로 결심했다. 1970년, 18세 때의 영화 '그 사람은 여교사'(이와시타 시마 주연)로 마지막 영화를 찍게 된다. 그리고 결심한 대로 '극단 해바라기'를 탈퇴하고 연예계를 은퇴했다. 연예계 은퇴 후에는 미국 대학 진학을 목표로 진지하게 준비에 임했지만, 그 무렵 아버지의 회사가 파산했으며 미국 유학은 고사하게 된다. 이 때문에 방향을 바꿔 일본의 대학인 도쿄상선대학(현 도쿄해양대학)에 응시했지만 불합격했다. 그 후에는 재수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틀어박히는 자신이 싫어져 집을 뛰쳐 나갔다고 한다.

미즈타니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잠시 도쿄 다치카와시내 스와신사 옆 공원에서 노숙을 했으며, 이윽고 야마나카 호수의 레스트하우스에서 생활하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2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의, 문득 정신을 차리고 집에 전화를 했더니 어머니가 그를 타일렀고, 미즈타니는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2.2. 인기 배우가 되다

약 2개월간의 가출 끝에 집으로 돌아온 미즈타니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구하다 아역 시절 알게 된 TV 프로듀서로부터 "한가하다면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으로 또 드라마에 나가보지 않을래?"라고 전화가 오게 된다. 결국 1972년 20세에 연예계에 다시 복귀했다.

아르바이트 느낌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복귀 직후부터 연달아 출연 의뢰가 날아들었다. 당시 일본은 학원 드라마가 전성기였고, 수많은 학원 드라마가 제작되고 있었다. 미즈타니 역시 다양한 학원 드라마에 출연하게 된다. '뛰어나라! 청춘'에서 커닝에 빠져 들게 되는 학생 역을, '울지 마라 청춘'에서는 불량 리더 역을 맡았다. 학원 드라마 이외에는 형사 드라마 '태양을 향해 외쳐라'(1972년)의 제1화에서의 범인역도 맡았다. 이 작품을 다룬 니혼 테레비 프로듀서 오카다 신키치는 그를 발탁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알기 쉬운 악인이 아니라 복잡한 배경이나 인물상을 연기할 수 있는 젊은 배우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예전부터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미즈타니 군을 기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젊지만 연기 솜씨는 뛰어났으니까요. #

'태양을 향해 외쳐라'에는 그 후에도 자주 범인역으로서 게스트로 출연해, 형사역의 하기와라 켄이치(萩原健一)[6]마츠다 유사쿠와도 공동 출연했다. 이때부터 마츠타 유사쿠와 절친해졌으며, 마츠다 유사쿠와는 첫 연기부터 의기투합해 틈만 나면 덩달아 놀러다녔다고 한다. 그럼에도 스타 배우로서 눈부신 빛을 발한 하기와라 켄이치나 마츠다 유사쿠와 달리 미즈타니는 당시 전혀 각광을 받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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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투성이의 천사' '열중시대'

커리어의 반전을 만들어낸 작품은 1974년 하기와라 켄이치 주연의 드라마 '상처 투성이의 천사'다. 하기와라가 연기하는 아웃로의 탐정 키구레 오사무의 조사원 토오루 역으로 발탁됐다.[7] 이 역할로 미즈타니는 인기가 급상승하게 됐다. 미즈타니는 한심함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 이미 시대에 뒤떨어져 촌스럽고 멋없는 리젠트를 트레이드마크로 삼아 오사무를 형처럼 흠모하는 한심한 깡패 같은 역할을 맡았다. 독특한 억양으로 "아니키(형님)~"이라고 말하며 하기와라를 따라다니는 불량배를 연기하며 코믹하면서도 고독을 느끼게 하는 연기로 화제를 모았다. 회를 거듭할수록 주연 하기와라와 비등할 정도의 인기를 얻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미즈타니의 스타일을 따라 했다고 한다. 미즈타니는 2021년 인터뷰에서 "이 작품이 없으면 지금의 나도 없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미즈타니는 영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나게 된다. 1975년에는 이시다 카츠무네(石田勝心) 감독의 영화 '도쿄만 화재'에서 테러리스트 역을 열연했으며, 1976년에는 깊은 이유 없이 우연히 부모를 죽여버린 청년의 당혹감과 고뇌를 그린 '청춘의 살인자'(하세가와 가즈히코 감독[8], ATG 제작)에서 주인공 사이키 준의 불안한 내면을 훌륭하게 표현해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남우주연상을 24세에 최연소로 수상했다. 미즈타니의 연기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도 1970년대 일본 영화계의 명작 중 하나로 꼽힌다. 또 1977년 드라마 '붉은 격류'에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피아니스트 역을 맡으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9] 이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37.2%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붉은 격류' 이후에는 1978년 7월, 닛폰 테레비 드라마 '나의 애처 이야기'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무려 10년만의 드라마 주연작이었다.[10]

기세를 이어 1978년 10월에는 닛폰 테레비 드라마 '열중시대'의 단독 주연으로 출연했다. 초등학교를 무대로 당시 사회문제가 되기 시작한 교육현장에서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 교사들의 모습을 담은 드라마였다. 미즈타니가 맡은 역할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인 성실하고 강직한 초등학교 신입교사였다. 열혈한으로 턱없이 밝은 교사를 연기해 아이부터 어른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시청률은 방송 시작 3일 만에 20%를 넘었고 13회의 30%를 넘었으며, 최고 시청률은 40.0%[11]를 기록했다. 미즈타니가 맡은 교사 키타노는 '이상의 교사'로서 사회 현상이 됐으며[12], 그의 홋카이도 사투리가 섞인 말투가 유행하는 등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으로 미즈타니 유타카는 지금까지 많이 연기해 온 아웃사이더나 어딘가 모르게 그늘진 이미지를 불식시켜 전국적인 스타가 됐다.

이후 활동의 폭을 넓혀 1979년 방영된 형사 드라마 '열중시대 형사편'에서는 주연을 맡을 뿐만 아니라 주제가도 불러 가수로서도 성공을 거뒀다. 미즈타니가 부른 노래인 '캘리포니아 커넥션(カリフォルニア・コネクション)'이 더 베스트 텐에서 4주 연속 1위를 거뒀으며[13], 판매량도 65만장의 히트를 기록한다.[14] 드라마도 최고 시청률 32%를 기록하며 인기를 이어갔다. 이후 영화보다는 드라마 위주로 출연했는데, 1982년 '안짱'[15], 1983년 '사건기자 차보!', 1987년부터는 '아사미 미츠히코 미스터리'(모두 니혼 테레비 계열) 같은 작품에 주연을 맡았다. 세 작품 모두 높은 시청률을 획득해 인기 배우 지위를 확고히 했다.

1981년에는 이치카와 곤 감독[16]의 영화 '행복'의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5년만의 영화계의 복귀했으며,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우수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17]

2.3. 제2의 전성기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에는 트렌디 드라마의 전성기가 시작되어, 많은 배우들이 트렌디 드라마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의 미즈타니 유타카는 정직한 인물이 등장하는 수사물이나 미스터리 작품에 원톱으로 계속 출연해 나간다. 특히 미즈타니는 1980년대 중후반부터 이전같은 인기를 누리지 못했고, 이러한 상황속에서 장르물의 출연하면서 이미지 변신을 꾀하게 된다. 이 당시의 대표작으로는 1990년부터 시리즈로 제작된 '형사 귀족', 1993년부터 시리즈로 제작된 '지방 기자 타치바나 요스케', 1999년부터 시리즈로 제작된 '탐정 사몬지 스스무'가 있다. 이 작품들은 이전처럼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으나, 침체에 빠져 있었던 당시의 미즈타니의 커리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작품들이다.

'형사 귀족' 시리즈는 코미디를 섞은 스피디하고 재치있는 모험 활극 시리즈 노선이었다. 이 작품에서 '파트너'에서 콤비로 만나게 될 테라야키 야스후미와 합을 맞추게 된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만들어질 '파트너'의 원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최고 시청률은 18.5%가 나왔으며, 이후 3편도 제작됐다.[18] '지방 기자 타치바나 요스케' 시리즈는 기자인 타치바나가 결혼 후 전국 각지에 놓여 있는 지방통신국을 아내와 함께 전전하다가 새로운 부임지에서 사건을 만난다는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다. 기자를 주인공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물이다. 시청률은 최고 21.9%를 기록했으며, 평균 17~18%를 유지하는 준수한 시청률을 기록했다. '탐정 사몬지 스스무' 시리즈 역시 탐정을 주인공으로 하는 수사물로, 시청률은 이 작품들 중 가장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했으나 일정하게 시청률을 꾸준히 유지해 2013년까지 방송되는 장기 시리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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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너 프리 시즌(2000년) 파트너 시즌 21(2022년)

미즈타니가 다시 대중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계기가 된 작품은 2000년 47세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된 형사드라마 '파트너'다. 이 작품은 토요와이드 극장 틀에서 미즈타니 유타카가 주연하고 있던 '탐정 사무소' 시리즈의 원작이 남은 하나가 된 시점에서, 같은 작품의 프로듀서 마츠모토 모토히로가 미즈타니 주연의 신시리즈라고 하는 컨셉으로 기획을 만들게 됐다. 그 시점에서 마츠모토에게 명확한 아이디어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지만, 우연히 본 드라마[19]의 감명을 받아 그 드라마의 각본을 맡은 코시미즈 야스히로에게 컨택을 취해 코시미즈도 승낙한다. 그러나 코시미즈의 스케줄이 1년 앞까지 꽉 차 있어 미즈타니도 수락한 후 촬영 개시까지 1년 반을 기다리며 2000년 6월 방영됐다.

미즈타니는 이 작품에서 우수하지만 어딘가 괴짜인 경시청 특명계 스기시타 우쿄 역을 연기했다. '파트너'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1화 완결형 스토리 구성으로 스기시타 우쿄와 그 파트너가 협력자들과 협력하면서 사건의 수사를 전개해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미스터리 드라마다. 형사들과의 인간상, 경찰 조직과의 마찰, 사회적인 문제, 그것들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관료들과 정치인의 음모 등이 전개되고 있다.[20] 드라마의 높은 작품성과 인기, 그리고 미즈타니가 연기한 스기시타의 지적이고 위트있는 캐릭터성으로 인해, 미즈타니는 40대 후반에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파트너는 원래 2000년 6월 '토요와이드 극장' 프레임의 단발드라마 였는데, 3회 방영해 호평을 받아 2002년 10월부터 연속 드라마화가 됐다. 미즈타니는 인터뷰에서 드라마 방영 초창기 당초부터 장기작이 될 예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워낙 각본이 재미있어서 그때 '5년은 더 하게 될 것 같아요'라고 말했죠. 메인 라이터인 야스히로 씨에게도 당시 이야기를 한 것이군요. 그랬더니 '네!? 5년이요?아직 시작도 안했는데'(웃음) 그래도 시작하면 역시 재밌어요. 프로듀서, 각본, 감독, 스태프, 그리고 현장에 있는 우리 배우들. 이건 좋은 사람들이 다 모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즈타니는 예측한 5년 뒤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숫자로 좋은 7을 다음 목표로 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TV 드라마로 히트하면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얘기가 나왔죠. 영화를 찍고 여러 가지 생각하면 여기서 그만두는 것도 말이죠. 그럼 끝이 좋은 '10'까지로 스태프끼리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다가 '15'가 지나서요. 이 파트너 월드는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고 나서는 이제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5년을 목표로 한 드라마 '파트너'는 22년이 지난 현재까지 방영중인 장수 프로그램이자 2000년대 이후 일본의 대표적인 형사 드라마가 됐다. 2000년부터 장기 방영한 '파트너'는 9번째 시즌에서 최고 시청률 23.7%를 기록, 극장판 영화 흥행 수입이 44억엔을 넘기는 대박을 터뜨렸으며, 2023년 1월 현재까지 21시즌의 400화 이상이 방영되는 테레비 아사히를 대표하는 간판 인기 시리즈가 됐다. 미즈타니 유타카는 1977년 '열중시대'로 인기 스타가 됐고, 2000년대 이후 '파트너'로 '인기 배우'에서 '국민적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1970년대 쇼와 시대에 활약한 배우가 여전히 드라마 업계 최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는것은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2016년까지 파트너 시리즈의 연출을 맡은 영화감독 이즈미 세이지는 인터뷰에서 미즈타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쿄 캐릭터도 있지만 긴장감을 주지 않는 거물은 이 업계에서는 드물어요. 무투파 하기와라 겐이치 씨, 무뢰파 마츠다 유사쿠 씨와 쇼와 시대의 스타들은 모두 주위에 위압감과 긴장감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근데 유타카씨는 달라요. 팽팽한 것을 일절 느끼게 하지 않습니다. 저 공기감은 유일무이해요. 하기와라씨와 마츠다씨를 가까이서 보고, 2명이 사망한 지금도 일선에서 하고 있는 동년대의 배우는 유타카씨 뿐이죠.

미즈타니 유타카는 파트너 이외의 활동으로 2008년 22년만의 음악 활동을 재개했다.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해 자신의 히트곡 '캘리포니아 커넥션'을 열창했으며, 2009년에는 가수로서 투어를 개최했다. 또 2005년 '미카미 유타 시리즈', 2006년 '법률 사무소 시리즈', 2009년 '다마시에 우타마로' 시리즈, 2011년 '이자카야 모헤지' 시리즈 등의 주연으로 출연했다. 2017년부터는 영화감독으로도 데뷔했으며, 2023년에는 23년만에 연극 활동을 재개하는 등 여러가지 도전을 하고 있다.

3. 출연 작품

3.1. 드라마

연도 방송사 제목 배역 비고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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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뱀파이어
(バンパイヤ)
톳페이 <colcolor=#000> 주연
19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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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의 청춘
(炎の青春)
나카모토 조연
19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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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나라! 청춘 제4화
(飛び出せ!青春 第4話)
하야시 유조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사촌끼리
(いとこ同士)
후루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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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마라 청춘
(泣くな青春)
모리야 치카시츠쿠리
1972년 ~ 1974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태양을 향해 외쳐라
(太陽にほえろ!)
나카모토 이사무
19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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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로 웃고
(顔で笑って)
이와사키 아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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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마 포물장
(銭形平次)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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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객장사 제20화
(剣客商売 第20話)
츠네요시
파일:테레비 아사히 로고.svg
낯선 다리
(見知らぬ橋)
우오즈미 유키오
파일:테레비 아사히 로고.svg
황야의 경호원 제39화
(荒野の用心棒 第39話)
세키네 분고
1974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천하의 아버지
(天下のおやじ)
미상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상처 투성이의 천사
(傷だらけの天使)
이누이 토오루
파일:후지 테레비 로고.svg
노방초
(みちくさ)
미상
파일:테레비 도쿄 로고.svg
고교교사 제12화
(高校教師 第12話)
하야사카
1975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호오즈키의 노래
(ほおずきの唄)
아오야기 칸베에
파일:TBS 테레비 로고.svg
새벽의 형사
(夜明けの刑事)
야마모토 히로시 형사
파일:TBS 테레비 로고.svg
메밀소바집 켄짱
(おそば屋ケンちゃん)
카미나리 선생
파일:TBS 테레비 로고.svg
그림자 동심 2
(影同心II)
토메키치
파일:후지 테레비 로고.svg
태양과 두더지
(太陽ともぐら)
미상
1976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베르사유의 트럭언니 제1화
(ベルサイユのトラック姐ちゃん 第1話)
미상
1976년 ~ 1979년 파일:NHK G 로고.svg 남자들의 여정 시리즈
(男たちの旅路シリーズ)
스기모토 요헤이
1977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대도회 PARTII 제5화
(大都会 PARTII 第5話)
요시나리 키요시
파일:TBS 테레비 로고.svg
버스 디 카드
(バースディ・カード)
미상
파일:TBS 테레비 로고.svg
붉은 격류
(赤い激流)
타시로 토시오
1978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나의 애처 이야기
(オレの愛妻物語)
하나와 타케시[21] 주연
1978년 ~ 1981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열중시대·교사편 시리즈[22]
(熱中時代・教師編シリーズ)
키타노 히로시
1979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열중시대·형사편[23]
(熱中時代・刑事編)
하야노 타케시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탐정이야기 제5화
(探偵物語 第5話)
타무라이치로 조연[24]
1982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안짱
(あんちゃん)
타노나카 잇테츠 주연
1983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사건기사 차보!
(事件記者チャボ!)
나카야마 카즈타
1984년 ~ 1985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기분은 명탐정
(気分は名探偵)
유메노 케이스케
1986년 파일:NHK G 로고.svg 좋은 이야기가 있다
(うまい話あり)
츠아키
1987년 ~ 1990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아사미 미츠히코 미스터리
(浅見光彦ミステリー)
아사미 미츠히코
1988년
파일:후지 테레비 로고.svg
잠재광경
(潜在光景)
하마시마 카츠히코
파일:후지 테레비 로고.svg
그들의 가장 위험한 밤
(彼らのいちばん危険な夜)
테츠오
파일:테레비 아사히 로고.svg
비키니 라인 살인사건
(ビキニライン殺人事件)
타니 쇼이치
1989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헬로! 굿바이
(ハロー!グッバイ)
다테 신사쿠 형사
1990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사랑의 미치코
(愛のミチコ)
파일:테레비 아사히 로고.svg
더 형사
(ザ・刑事)
야지마 신고 형사
1991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아침 안개 속에 거리가 사라지다
(朝もやの中に街が消える)
1991년 ~ 1992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아사히나 슈헤이 미스터리 시리즈
(朝比奈周平ミステリーシリーズ)
아사히나 슈헤이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형사 귀족 시리즈
(刑事貴族シリーズ)
혼조 신타로 형사
1993년
파일:테레비 아사히 로고.svg
쇼난여자 기숙사 이야기
(湘南女子寮物語)
요시노 쇼이치
1993년 ~ 2003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지방 기자·타치바나 요스케 시리즈
(地方記者・立花陽介シリーズ)
타치바나 요스케
1994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헤이세이 육년의 대불행
(平成六年の大不幸)
1995년
파일:테레비 아사히 로고.svg
성야의 도망자
(聖夜の逃亡者)
이와노 타츠오
1996년 파일:NHK G 로고.svg 시대의 왕
(時の王様)
마츠무라 키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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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요리사 시리즈
(葬儀料理人シリーズ)
에비나 쇼헤이
1996년 ~ 1997년
파일:TBS 테레비 로고.svg
엔카·쇼오타로의 인정 사건 일지 시리즈
(演歌・唱太郎の人情事件日誌シリーズ)
아카기 쇼타로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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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판 칠인
(流れ板七人)
리도 류지
1997년
파일:후지 테레비 로고.svg
온센데카 슈젠지 온천 주재 일기
(おんせんデカ 修善寺温泉駐在日記)
이즈미 하루오
1999년 ~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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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사몬지 스스무 시리즈
(探偵 左文字進シリーズ)
사몬지 스스무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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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거리
(行きずりの街)
하타노 카즈로
2000년 ~ 방영중
파일:테레비 아사히 로고.svg
파트너
(相棒)
스기시타 우쿄
2001년 파일:NHK G 로고.svg 점유 가족
(占有家族)
모리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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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 도우미 살인 사건부
(介護ヘルパー殺人事件簿)
모로이 헤이타로
2003년 ~ 2004년
파일:후지 테레비 로고.svg
행복 선물 배달인
(しあわせギフトお届け人)
아오노 타이요
2004년 ~ 2005년
파일:테레비 아사히 로고.svg
신부 쿠사바 잇페이의 추리
(神父・草場一平の推理)
쿠사바 잇페이
파일:후지 테레비 로고.svg
사건 기자·미카미 유타 시리즈
(事件記者・三上雄太シリーズ)
미카미 유타
2005년
파일:TBS 테레비 로고.svg
파트타임 판사
(パートタイム裁判官)
나리타 노조무
2006년 ~ 2007년
파일:테레비 아사히 로고.svg
법률 사무소 시리즈
(法律事務所シリーズ)
레몬카도 아키라
2008년
파일:후지 테레비 로고.svg
바닷바람 진료소~곶의 닥터 분전기~
(潮風の診療所〜岬のドクター奮戦記〜)
미치시타 슌이치
2009년
파일:후지 테레비 로고.svg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誰かが嘘をついている)
사토 토시아키
2009년 ~ 2014년
파일:테레비 아사히 로고.svg
다마시에 우타마로
(だましゑ歌麿)
기타가와 우타마로
2010년
파일:테레비 아사히 로고.svg
외과의사 스마 히사요시
(外科医 須磨久善)
스마 히사요시
2011년 ~ 2017년
파일:TBS 테레비 로고.svg
이자카야 모헤지
(居酒屋もへじ)
요네모토 모헤지
2017년 ~ 방영중
파일:테레비 아사히 로고.svg
무요안 은거수행
(無用庵隠居修行)
히나타 반베에

3.2. 영화

연도 제목 배역 비고
1968년 <colcolor=#000> 청춘의 바다
(青春の海)
중학생 아가와 요시유키 <colcolor=#000> 조연
1970년 바쯔군 여고생
(バツグン女子高生)
타치카와
그 사람은 여교사
(その人は女教師)
타구치 노보루
신·고등학생 블루스
(新・高校生ブルース)
오카다 마사키
1973년 한 방울의 눈물
(ひとつぶの涙)
이와이 미노루
1974년 귀륜번
(鬼輪番)
1975년 추억의 구석구석에
(想い出のかたすみに)
사카모토
도쿄만염상
(東京湾炎上)
뭉크
1976년 청춘의 살인자
(青春の殺人者)
사이키 순 주연
1979년 태양을 훔친 사나이
(太陽を盗んだ男)
파출소의 경관 조연
1981년 행복[25]
(幸福)
무라카미 주연
2008년 파트너 - 극장판
(相棒 -劇場版- 絶体絶命! 42.195km 東京ビッグシティマラソン)
스기시타 우쿄
2009년 감식 요네자와 마모루의 사건부
(相棒シリーズ 鑑識・米沢守の事件簿)
스기시타 우쿄 조연
2010년 파트너 - 극장판 2
(相棒シリーズ 鑑識・米沢守の事件簿)
스기시타 우쿄 주연
야지마 미용실 더 무비 : 꿈을 이루는 네바다
(矢島美容室 THE MOVIE 〜夢をつかまネバダ〜)
소프트볼 심판 카메오
2012년 홈 사랑의 다다미방 카와 나고
(HOME 愛しの座敷わらし)
타카하시 코이치 주연
2013년 파트너 시리즈 X DAY
(相棒シリーズ X DAY)
스기시타 우쿄 조연
소년H
(少年H)
세오 모리오 주연
2014년 파트너 - 극장판 3
(相棒 -劇場版III- 巨大密室! 特命係 絶海の孤島へ)
스기시타 우쿄
2015년 왕비의 관
(王妃の館)
키타시라카와 우쿄
2017년 파트너 극장판 IV : 수도위기 인질은 50만명! 특명계 최후의 결단
(相棒 -劇場版IV- 首都クライシス 人質は50万人! 特命係 最後の決断)
스기시타 우쿄
TAP THE LAST SHOW[26] 와타 신지로 연출
주연
2019년 뺑소니: 최고의, 최악의 날
(轢き逃げ 最高の最悪な日)
토키야마 미츠오 연출
조연
2022년 태양과 볼레로
(太陽とボレロ)
토도 켄

4. 수상

<rowcolor=#FFFFFF> 날짜 시상식명 수상 부문 작품
1977년
2월 제50회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남우주연상 청춘의 살인자
1982년
2월 18일 제5회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남우주연상 행복
2008년
5월 11일 제5회 하시다상 하시다상 파트너
12월 30일 제50회 일본 레코드 대상 기획상 TIME CAPSULE
미상 제37회 베스트 드레서상 특별상
2009년
2월 20일 제32회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남우주연상[27] 파트너 - 극장판
2011년
1분기 제68회 더 텔레비전 드라마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파트너
2012년
7월 11일 제20회 하시다상 하시다상 파트너
2013년
3월 28일 제30회 아사쿠사 예능대상 대상

5. 여담

  • 1979년 드라마 '열중시대- 형사편'에서 함께 연기한 미국인 모델 미키 맥켄지(Miki McKenzie)와 1982년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반년 후 별거했으며, 1986년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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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타니 유타카 & 이토 란 부부(2013년)
1970년대의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던 아이돌 걸그룹 '캔디즈'의 멤버였던 이토 란(伊藤蘭)과 1989년 1월에 재혼했다. 미즈타니는 1970년대부터 아이돌 '캔디스'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1982년에는 드라마 '안짱'에서 이토 란과 함께 연기했다. 미즈타니-이토 부부는 금슬이 좋아 연예계 잉꼬 부부라고 불린다. 참고로 미즈타니는 결혼 전부터 결혼 후인 지금까지도 아내를 지칭할 때 란 씨[28]라고 경칭으로 지칭한다. 애칭(란 쨩)으로는 얘기하지 않는다고. 결혼 전 서로 연애 할 때에도 계속 경칭으로 란 상이라고 얘기했던 게 결혼 후에도 습관이 되어서 애칭으로 쨩을 붙여서 얘기한다고 해도 부끄럽다고 표현했다. 물론 아내사랑은 극진하다.
  • 재혼 이후 1990년에 장녀 슈리(본명 미즈타니 슈리)가 태어났다. 슈리는 현재 배우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미즈타니는 2022년 인터뷰에서 딸에 대해 "계속 이쪽 세계(연예계)에는 오지 말라고 했거든요. 딸이 어렸을 때부터요. 저도 란 씨도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은 우연이었고 우연히 이렇게 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아이가 좀 더 확실한 길을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거에요. 이 세상은 천국과 지옥을 봐야 하잖아요. 일부러 그곳에 가 주었으면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아요."라고 말했다.
  • 미즈타니의 친구인 영상 디렉터 이케자와 타츠야는 미즈타니가 '배우 일은 아르바이트니까'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한다고 밝혔다.# 2012년 미즈타니는 인터뷰에서 "어쩔 수 없이 대학을 갔지만 실패하고 재수생이 되었죠. 그런데 집이 파산 상태니까 아르바이트를 해야 해요. 그럴 때 저를 알고 있던 방송국 PD가 '딱 19살 역할을 찾고 있구나'라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냥 알바하는 것보다 훨씬 돈도 좋고 그러니깐 배우로 돌아간 거예요. 그 드라마가 방영되자 그걸 보신 분이 '이런 역할을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해주셔서 그 반복으로 일이 이어졌죠. 지금 생각하면 계속 그 아르바이트가 계속되어 온 상태입니다."라고 말했다.
  • 긴 커리어동안 탑스타 자리에 있었고, 거기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고 한다. 현장에 들어올 때는 아무리 각본이 늦어져도 대사는 완벽하게 머릿속에 들어 있고, 식사 모임에서도 술은 일절 입에 담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극한까지 역할 만들기에 몰입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
    '파트너'는 미즈타니 유타카 씨와 만든 작품이지만, 그의 대단함은 15쪽이 넘는 긴 대사를 한 마디 한 마디 틀리지 않고 다 외워옵니다. 제 연출은 긴장감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15분, 20분이라는 긴 장면이 있는데 한번 유타카 씨한테 어떻게 대사를 외우느냐고 물었더니 '쓱 한 번 읽은 뒤 욕실에서 되새기는 정도일까'라고 합니다. 천재죠. 현장에서도 대본을 손에 들고 있는 걸 본 적이 없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요.



    이즈미 세이지 (파트너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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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타니 유타카 & 마츠다 유사쿠(1979년)[29]
마츠다 유사쿠의 절친이었다. 미즈타니는 마츠다 유사쿠를 '평생의 친구'라고 말한다. 드라마 '태양을 향해 외쳐라'에서 공동 출연한 이후 친해지게 된다. 당시 마츠다 유사쿠는 경력을 시작한 신인이었고, 미즈타니 유타카는 3살 어리기는 하지만 경력상 선배였기 때문에 마츠다 유사쿠에게 연예계가 어떤 곳인지 알려주기 위한 이른바 교육도 해줬다고 한다. 이후 '유타카짱', '유사쿠짱'이라고 서로 불러, 둘이서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절친이 된다. 마츠다 유사쿠가 방광 검사로 입원했을 때부터 마지막 입원까지 몇 번이나 병문안을 갔다고 한다. # 미즈타니는 2021년에 열린 마츠다 유사쿠의 33회 법요에도 참석했다. #
  • 더 타이거스의 베이시스트이자 현재는 배우로 왕성하게 활동중인 원로배우 키시베 잇토쿠(岸部一徳)와도 절친하다. 이 둘은 파트너와 다른 작품에서도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
  • 톤네루즈의 멤버 키나시 노리타케와 절친한 사이이며, 이들의 예능 프로그램에 많이 출연했다.
  • 미즈타니는 드라마 '열중시대'로 스타가 됐지만, 과거 non-no(1981년 10월 20일호) 인터뷰에서 이 작품이 소화불량이었다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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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80년대 미즈타니 유타카 CM 모음
1977년 CM에서 미즈타니 유타카가 말한 '알랭 들롱인가~'라는 대사가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이 CM은 짓소지 아키오가 연출했다.
  • 과거는 되돌아보지 않는 타입으로, 인터뷰에서 "매년 파트너의 새 시즌에 들어갈 때 이전에 비해서 뭔가를 바꾸자, 이렇게 하자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자, 이제부터 먼저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고 기대가 되고, 먼저 향해 가자 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 파트너를 오랜 시간동안 찍다보니 사람들이 자신을 '미즈타니씨'가 아닌 '우쿄씨'라고 말을 걸어온다고 한다. #[30]
  • 심각한 길치라고 한다. 운전을 굉장히 잘하는데 길을 전혀 모른다고 한다. #
  • 요리도 거의 못할 정도로 집안일은 거의 못한다고. 아내인 란과 딸인 슈리가 장기간 집을 비운 상태에서 본인이 가장 놀랐던 게 혼자 집에서 생활하는 동안 한번도 집안 냉장고를 열어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고.[31]
  • 2022년 인터뷰에서 자신의 경력이 파트너가 시작된 40대 후반에서야 균형이 잡혔다고 밝혔다.
    '파트너'가 시작된 건 제가 47세 때였어요. 그래서 20대 때는 빨리 40대가 되고 싶었어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어쩔 줄 모르는 것이 많았죠. 이 역할을 하면 빨리 다음으로 가고 싶었어요. 이뿐만 아니라 자신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죠. 하지만 40대가 되어도 전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마침 파트너가 시작할 때였는데 아, 뭔가 균형이 잡혀가는 순간이 있었어요. 제 안에서 수습이 잘 돼서 이게 원하는 거구나 싶어서요. 그래서 50대는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이제 60대가 끝나는데 60이 되니까 또 재미있었네요.


    젊었을 때 인기를 얻었다면 그건 바로 젊으니까 인기를 얻은 거죠. 하지만 젊다고 말할 수 없게 되면 밑에는 젊은 사람들이 있고 위에는 괜찮은 선배들도 있는 굉장히 어중간한 시기를 한번 보내야 해요. 그래서 그것을 보낸 후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거기서 끝나는 사람이 많거든요. 그런데 앞서갈 수 있는 사람이란 그만큼의 에너지와 세계를 가지고 제대로 걸어가야 해요. 아까 얘기했던 균형이 잡힌 시기라는 건 밑에 있든 위에 있든 자신의 세계는 확실히 가질 수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던 때였던 것 같아요.
  • 휴일에는 새벽까지, 때로는 아침까지 어질어질한 것을 좋아해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는 건 대개 새벽이고 일어나는 건 점심 무렵이며 수면시간은 5시간 정도라고 한다. #
  • 파트너에서 미즈타니와 함께 연기한 소리마치 타카시는 미즈타니를 존경한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소리마치: 저는 미즈타니 유타카씨를 존경합니다. 배우로서는 물론 사람으로서 그릇이 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즈타니 씨는 막 들어간 젊은 스태프에 대해서도 스스로 말을 걸러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의 나쁜 점을 일절 말하지 않습니다. 다 칭찬을 해주는 거예요. 제가 파트너 출연을 시작했을 때도 그랬어요. 미즈타니 씨의 말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 2022년 '이 사람이라면 체포되어도 좋다'라고 생각하는 형사역을 연기한 배우 랭킹,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난 사건의 해결을 부탁하고 싶은 형사를 연기한 적이 있는 배우 랭킹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
  • 신도라에몽에서도 소라마치 타카시와 함께 등장한다. 일드 파트너를 시청하다가 '나도 파트너를 가지고 싶어.'라고 도라에몽한테 조르는 노비타의 모습이 나온다. 특명계의 사무실과 스기시타-카부라기 콤비, 그들을 엿보는 조대 제5과 형사들(오오키-코마츠 순사부장 듀오)까지도 애니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해당 장면에서 카부라기는 드라마에서처럼 휴대폰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스기시타는 특유의 멜빵 차림으로 등장한다. 참고로 신도라에몽 제작진에게 대본을 받아 직접 녹음했다고 한다.
  • 2023년 7월 자서전 '水谷豊自伝'을 출판했다.

6. 관련 문서

7. 외부 링크



[1] 실질적인 출신지는 도쿄도 타치카와시라고 한다. 미즈타니는 워낙 어린 시절이라 홋카이도 시절의 기억이 없다고 밝혔다.[2] 1970년대의 국민 아이돌 그룹 캔디즈의 멤버이자 배우다. 이토 란은 만화 명탐정 코난의 히로인 모리 란의 이름 모델이 되었다. 아오야마 고쇼가 미즈타니 부부의 팬이라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3] 1995년 미즈타니 유타카의 개인 소속사로서 설립됐다. 아내 이토 란도 이 소속사에 소속중이다.[4] 이 연극 '동쥐앙'은, 거물 배우 야마자키 츠토무(山崎努)의 첫 주연 무대로, 키시다 쿄코나 하시즈메 이사오 등 쟁쟁한 멤버가 출연하고 있었다고 한다.[5] 뱀파이어 1화에 데즈카 오사무가 직접 등장한다.[6] 1960~70년대를 풍미한 당대 일본 연예계의 스타 중 한 명. 쇼켄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7] 원래는 히노 쇼헤이가 이 역을 맡으려고 했으나 하기와라가 미즈타니를 추천해 발탁됐다.[8] 태양을 훔친 사나이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연출작은 2개밖에 안된다.[9] 당시 피아노를 직접 연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10] 오오타케 시노부와 공동 주연.[11] 역대 민방 최고 시청률 5위. 닐슨 기준으로 46.7%라는 고시청률.[12] 이 작품의 성공으로 '3학년 B반 킨파치 선생님' 등 교사를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학원 드라마가 만들어졌다.[13] 1979년 오리콘 연간 차트에서는 12위, 더 베스트 텐 연간 차트에서는 4위를 기록.[14] 발매 이후 29년 후인, 2008년에는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해서 이 노래를 열창하기도 했다.[15] 이 작품에서 현재의 배우자 이토 란과 공동 출연한다.[16] 1976년판 이누가미 일족으로 유명하다. 쇼와 시대의 거장 감독 중 한 명.[17] 이 작품 출연 이후 27년동안 영화를 찍지 않았다.[18] 1편의 주연은 타치 히로시(16화 이후 하차)와 고 히로미. 2편, 3편의 주연이 미즈타니다.[19] 후일 이 드라마가 게닌 아카시야 산마 주연의 달콤한 삶이라고 밝혔다.[20] 미즈타니는 인터뷰에서 이러한 다양한 장르 덕분에 파트너가 인기 시리즈가 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21] 오오타케 시노부와 공동 주연[22]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스페셜이 방송.[23] 교사편과 제목만 같을뿐, 세계관과 등장인물 전혀 다른 내용이다.[24] 절친 마츠다 유사쿠의 드라마의 게스트로 출연[25] 쇼와 시대 일본 영화계 거장 중 한 명인 이치카와 곤의 작품.[26] 영화 감독 데뷔작[27] 후보에서 사퇴했기 때문에 상을 수상하지 않았다.[28] 란 상[29] 마츠다 유사쿠 주연의 드라마 탐정이야기 5화 장면이다.[30] 미즈타니 유타카의 광팬인 아오야마 고쇼는 아예 애칭인 '우키'로 부른다.[31] 우타방에 출연했을 때의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