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08:20:10

짓소지 아키오

짓소지 아키오
[ruby(実相寺 昭雄, ruby=じっそうじ あきお)]|Akio Jissoji
파일:짓소지 아키오.jpg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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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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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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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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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37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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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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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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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도쿄부 도쿄시 요츠야구
(現 도쿄도 신주쿠구)
사망 2006년 11월 29일 (향년 69세)
도쿄도 분쿄구
직업 영화감독, 드라마 감독, 각본가, 연출가, 소설가
활동 기간 1959년 – 2006년
학력 와세다대학 제2문학부[1] (불어불문학 / 학사)
배우자 하라 치사코 (1963년 결혼)
묘소 도시마구 소메이영원(染井霊園)
경력 도쿄예술대학 명예교수
일본영화감독협회 회원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 신인 시절2.2. 연출가 활동2.3. 말년
3. 작품의 특징
3.1. 연출 스타일3.2. 울트라 시리즈 관련 에피소드
4. 필모그래피
4.1. 드라마4.2. 영화4.3. 방송
5. 기타6. 관련 문서7.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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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영화감독, 드라마 감독, 각본가, 연출가.

일본 특촬계의 거장 중 한 명으로 주로 울트라 시리즈나 실험적인 독립 영화를 중심으로 남다른 독창적인 영상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유년기, 신인 시절

파일:Jissouji_Akio.jpg
1962년의 짓소지 아키오

1937년(쇼와 12년) 3월 29일 도쿄 요츠야에서[2] 태어났다. 외동아들로 형제는 없었으며, 외할아버지는 대만 총독을 지낸 해군 대장 하세가와 키요시(長谷川清)다. 세 살 때 일본은행에 근무한 아버지 짓소지 스우분의 전근으로 중국 칭다오에서 자란다. 이곳에서 무대미술가 가네모리 가오루(金森馨)와 만나 큰 영향을 받는다. 1943년 칭다오시의 국민제일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다시 도쿄로 돌아와 교세이 초등학교로 전입한다. 1944년 아버지가 다시 만주로 전근을 가 일본의 패전을 만주에서 경험하고, 다시 일본으로 귀국해서 오늘날의 도쿄도 기타구에서 성장하였다. 다시 도쿄의 교세이 초등학교로 전입해,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이곳에서 배운다.

1959년 와세다대학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3] 재학 중에는 영화연구회에 소속돼 시나리오연구회에 있던 나미키 아키라(並木章)와 함께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 대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져 집안일을 돕기 위해 국가공무원 시험(외무성 1등 서기관)을 치르고 합격해 외무성에서도 근무했다. 주간에는 연수가 있었기 때문에 야간 제2문학부로 학부를 옮긴다. 그 후 후지테레비의 입사 시험에서 떨어지고 라디오 도쿄(현 TBS)에 합격해 입사한다. 연출부에 배속되어 연출가의 첫걸음을 걷기 시작한다. 당시 짓소지의 목표는 프랑스의 누벨바그와 시네마베리테였다. 짓소지는 프랑스 영화, 특히 누벨바그 영화의 엄청난 매니아였다.

시대극 등의 AD를 거쳐 1961년, '노래하는 사가와 미츠오 쇼'의 중계로 연출가로 데뷔한다. 25세에 오시마 나기사를 각본으로 맞이한 드라마 '엄마'의 연출을 담당해 첫 TV 드라마 연출을 담당한다. 데뷔 당시, 음악 프로그램이나 TV 드라마 연출을 맡았지만 누벨바그 스틸을 사용하거나, 당돌한 거리 인터뷰 삽입, 지나치게 업이나 당기기, 라스트 씬에 갑자기 암전시켜 눈을 내리게 하는 등 기발한 연출을 많이 했다. 또 섣달 그믐 가요쇼에서는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를 초미니멈 사이즈로 찍거나 화면이 가득하게 찍는 등[4] 참신한 연출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적인 연출로 인해 TBS 상층부에 단단히 찍혔고, 시청자들의 항의와 민원이 자주 쏟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발한 연출을 특촬의 신이라고 불린 츠부라야 에이지는 긍정적으로 평가했고[5], 짓소지를 울트라 시리즈에 연출가로 발탁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러다가 1964년의 스튜디오 드라마 '크게 살아라!'의 전위적 연출이 불평을 받아 제6화에 도중 강제로 하차당한다.

2.2. 연출가 활동

이후 의욕없이 백수로 지내다가 특촬의 신이라고 불리는 츠부라야 에이지의 아들이자 당시 TBS에서 근무하던 연출가 츠부라야 하지메가 짓소지에게 '영화부에 와. 그 전에 한가할 테니 특촬의 각본이라도 쓰지 않겠나'라고 제안해 TBS의 텔레비전 영화제작 섹션이었던 영화부로 이동하게 된다. 짓소지는 츠부라야 하지메 감독의 드라마 '스파이 평행선의 세계'의 치프 조감독을 맡았다. 1966년에는 울트라 Q의 각본을 쓰기도 했으나 사용되지 않았다. 울트라 Q 종영 후 짓소지 본인이 직접 연출을 담당한 츠부라야 하지메를 취재한 다큐멘터리 '현대의 주역 울트라 Q의 아버지'가 호평을 받는다. 이때부터 용역업체 파견 형태로 츠부라야 프로덕션의 작품에도 연출가로서 관여하게 된다.

방송국의 제약으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뽑내지 못했던 짓소지는 츠부라야 프로덕션에서 자신의 연출 스타일을 마음껏 선보인다. 당시 울트라 시리즈에서의 짓소지의 독특한 연출은 영상작가로서의 미의식을 필름에 담아 선보여, 자신만의 고유한 연출 스타일로 울트라 시리즈의 세계관을 넓혔다고 평가받고 있다. 1960년대 울트라 시리즈 이후 영화 감독으로도 작품성 있는 작품을 다수 연출하기도 했고 오페라 연출가로도 성공했지만, 지금까지도 울트라 시리즈를 대표하는 명감독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6] TV 특촬물계 최초의 스타 감독이라 할만한 인물이다. 1960년대 짓소지가 츠부라야에서 연출한 울트라맨, 울트라 세븐, 괴기 대작전[7]의 에피소드는 지금까지도 시리즈를 대표하는 걸작 에피소드라고 받고 있다. 대표적으로 울트라맨의 23화, 울트라 세븐의 8화, 괴기 대작전의 25화가 그러하다. 짓소지가 연출한 에피소드들은 독특한 영상 표현과 촬영 기법으로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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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 세븐 연출 당시의 모습

또한 이야기의 내용이 현실성을 담은 몽환과 환상 같은 현실인지 잘 모르는 세계를 무대로 한 이야기가 많고[8], 영상 효과도 매치된 것이 많기 때문에 그 연출 스타일은 나중에 '짓소지 매직'이라 불렸다. 다만, '짓소지 매직'이라고 불리는 짓소지 특유의 전위적인 연출은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하는 스태프가 많이 있는 반면, 당시의 상층부 특수 촬영 팀과 방침을 둘러싼 일 때문에 싸운 일화도 남아있다. 이러한 짓소지의 작품이 마니아 서적이 간행되기 시작한 1978년경의 제3차 울트라 붐 때부터 재평가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1979년에는 짓소지 감독 작품을 재구성한 "짓소지 아키오 감독 작품 울트라맨"이 개봉되기도 했다. 이러한 재평가를 거치면서 짓소지가 연출한 에피소드들은 울트라 시리즈 굴지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또한 짓소지의 연출 스타일은 후대의 영상 크리에이터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줬다. 짓소지에게서 영향을 받은 인물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안노 히데아키다.

울트라 시리즈의 감독으로 성공한 이후 1969년, 단편 영화 '초저녁이 다가오면'[9]을 자체 제작해,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 1970년에는 TBS에서 퇴사해서 영화 감독으로서 독립한다. 친구인 미술 감독 이케타니 센카츠(池谷仙克)[10]를 사장으로 하는 영상 제작 회사 코다이 그룹[11]을 설립했다. 오시마 나기사마츠모토 토시오 같은 동료들과 함께 아트 시어터 길드(ATG) 계열 아방가르드 인디 감독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서 인정받은 케이스다. 영화로는 불교도 3부작(무상, 만다라, 시)이 가장 유명하고 해외에도 인지도가 있다.[12] 짓소지의 장편 영화 데뷔작 '무상'은 남매의 근친상간을 주제로 사랑과 에로스를 그린 작품으로 그의 최고작으로 꼽히기도 하며, 로카르노 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표범상을 수상했다. 일본에서는 데뷔작으로 유명 영화제 최고상을 수상한 유일한 케이스라고 한다.[13]

이후 '만다라(1971년)', '시(1972년)', '아사키유메미시(1974년)', '우타마로 꿈이라라고 알면(1977)'과 같은 일본적 정신풍토를 에로티시즘으로 파헤치는 실험적인 작품들을 발표했다. 1971년에는 TBS의 프로듀서였던 하시모토 요지(橋本洋二)[14]로부터 제안을 받아 각본가 사사키 마모루와 특촬 드라마를 제작하는데 이 작품이 바로 '실버 가면'이다. 작품이 상당히 어두워 흥행에는 실패했으며, 짓소지 역시 이 작품을 '실패작'이라고 생각하며 부정적으로 평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어른들이 보는 특촬물'로 후대에 나름 재평가를 받기도 했다. 프로듀서 하시모토는 이후의 재평가를 받은 이유는 "짓소지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78년에는 당시 14세의 배우 야쿠시마루 히로코를 기용한 시세이도CM을 연출해 칸 국제 광고제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역사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멀리 가고싶다', '나는 여행을 한다', '아 프로야구' 같은 교양 프로그램의 연출을 담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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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아사히나 다카시(왼쪽)와 짓소지 아키오

클래식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서[15] 1977년에는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 '오케스트라가 왔다'를 연출하기도 했으며, 1980년대부터는 오페라 '피델리오', '피가로의 결혼', '마술피리', '카르멘' 등을 연출하기도 했다. 영화, 드라마 감독이 오페라 연출가로도 성공한 이례적인 케이스다. 오페라 연출가로서 도쿄예술대학 연주예술센터 교수로서 교단에도 섰으며[16], 이후에 명예교수로도 임명됐다. 거장 지휘자아사히나 다카시의 친구였고, 아사히나의 공연을 연출하기도 했다.[17] 또 다른 거장 지휘자인 오자와 세이지의 공연도 연출했다. 오페라 연출가로서는 특유의 전위적인 연출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하며, 정석적인 연출을 보여줬다고 한다. 다만, 2005년에는 짓소지답게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짓소지가 연출한 오페라 마술피리가 의상 디자인에 만화가(카토 레이지로)를 기용하거나 울트라 괴수가 등장하는 등, 대담한 연출은 찬반 양론을 일으키기도 했다. 평소 오페라와는 거리가 먼 관람객을 발굴하는 데는 성공했고, 짓소지 사후에도 반복적으로 재연됐다.

1980년대에는 영화나 드라마보다는 본격적으로 클래식 음악 방송이나 오페라의 연출가로서 활동했기 때문에 영화, 드라마를 적게 연출했다. 또한 NHK 외부 제작의 선구자라고 불렸을정도로 NHK 작품을 많이 담당했다. 1981년에는 소설 '괴도 루팡팡'을 저술해 소설가로도 활동했으며, 1983년에는 니혼 테레비 드라마 '파도의 쟁반'으로 문화청 예술제 대상을 수상했다.[18] 1987년에는 소설 '별 숲에 달의 배 괴수로 꿈꾼 남자들'을 저술한다. 과거 츠부라야 프로덕션 시대를 뜨겁게 엮은 이 작품은 화제가 되며 짓소지의 TV 시대의 연출이 다시 재평가되면서 전설적인 존재로 짓소지는 주목받게 된다. 1986년에는 '화요일 서스펜스 극장'과 'THE 레이프만'을 연출했다.

1988년에는 '제도물어'라는 대작 영화를 연출해 흥행시키기도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악덕의 번영(1988년)', 과거 울트라 시리즈의 리메이크 극장판 '울트라 Q 더 무비 별의 전설(1990년)', 에도가와 란포 원작의 '다락방의 산책자(1994)'등의 작품을 연달아 연출한다.

2.3. 말년

말년에는 30년 만에 TV 울트라 시리즈의 연출 감독으로 돌아와 울트라맨 티가, 울트라맨 다이나, 울트라 Q 다크 판타지, 울트라맨 맥스의 연출을 담당해 명작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또한 로망 포르노 영화를 연출해 새로운 에로스의 표현에 도전했다. 대표적으로 '아리에타(1989년)', '라바르스(1990년)'가 그렇다. 로망 포르노치고는 호화 캐스팅과 파격적인 예산 작품이었다. 이 작품들은 난해하고 몽환적인 연출을 시도해 전혀 야하지 않고, 오히려 팬들에겐 예술 영화로 여겨지고 있다. 강렬한 성 묘사와 이를 아찔한 색조와 카메라 워크로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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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짓소지 아키오

1998년에는 에도가와 란포 원작의 영화 'D 언덕의 살인사건(1998)'을 연출했으며, 마찬가지로 2005년 에도가와 란포 원작의 영화 '란포지옥'의 거울지옥편의 연출을 담당했다. 또 같은 해에 교고쿠도 시리즈의 제1작 우부메의 여름을 영화화[19]했다. 2006년에는 1971년 자신이 연출했던 실버 가면을 다시 리메이크 하는 극장판을 연출하는 등 노년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2006년 11월 29일, 위암으로 향년 6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20]

3. 작품의 특징

3.1. 연출 스타일

짓소지 아키오의 연출 스타일을 설명하자면 '익센트릭(eccentric)', '전위적', '몽환적' 등 그 작풍을 나타내는 말은 다양하다.

짓소지를 대표하는 작품은 츠부라야 프로덕션에서 연출한 특촬물들과 실험적인 연출을 보여준 인디 영화들이다. 자신만의 특유의 연출 스타일로 인해 천재라고도 불리기도 했으며, 괴짜 혹은 문제아라고도 불리기도 했다.[21] 1960년대 울트라 시리즈라는 전연령 시청용인 대중적인 메이저 작품을 찍으면서도 그 정신은 누벨바그에서 영향을 받은 실험적인 예술가로서의 미의식과 기존의 것에 대한 반골을 가지고 있었던 드문 이단아였다. 영화 문법을 조금씩 무너뜨리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역량으로 스토리와 매치시켜 작용하면서 울트라 시리즈의 세계관을 넓혔다. 한마디로 자신만의 개성을 담아내는 독창적인 연출가였다.

광각렌즈로 만들어내는 클로즈업 촬영이나 어두컴컴한 방이나 모노톤 계열의 방 연출 등 공들인 촬영 수법이 많은 감독으로 유명하다. 카메라를 촬영할 때는 특히 아리플렉스 등의 16mm 카메라의 가벼움을 살려 주로 대각선 위나 아래에서 피사체를 잡는 구도를 즐겨쓰는데 이를 '짓소지 앵글'이라고 한다.[22] '짓소지 앵글'이라는 단어에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특징으로 자주 들 수 있는 것이 차폐물 너머로 인물을 찍는 것이나 화면을 기울인 극단적인 구도, 인물의 표정은 물론 배우의 피부와 근육의 움직임까지를 보여주는 기묘한 업샷과 그와는 완전히 반대의 롱샷으로 연출되는 심리극 등을 나타낼때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이 앵글은 일본의 영화, TV, 애니메이션 등 후대의 영상 작품들, 서브컬처에 영향을 줬다.

짓소지의 연출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기법은 독특한 카메라 워크, 그리고 ''의 표현이 특징적이다. 이 연출은 인물의 감정, 건축, 그리고 그 모든 양상을 구성한 작품세계를 하나하나의 빛으로 기호 변환하고 엄격한 태도로 감상자를 세계관에 끌어들이는 눈으로 작용하게 한다. 또한 이런 광각 렌즈가 만들어내는 원근감은 극중 인물들의 주관적인 거리감을 만들어냈다. 인물들을 정면에서 곧바로 안 비춰주거나 얼굴을 의도적으로 안 보여줌으로서 불안한 느낌, 긴장감을 만들어내며, 카메라와 인물 사이에 장애물을 놓음으로서 시청자들이 저 상황을 숨어서 훔쳐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연출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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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소지 앵글의 예시

어안 렌즈를 즐겨 쓰고 렌즈 플레어를 고의로 발생시켜 신비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경우도 많다. 어안 렌즈는 광각 렌즈보다 좀 더 과장되게 사용하며 초점 거리는 일반적으로 16mm 미만이다. 또한 일본의 토속적인 요소를 상당히 좋아했으며, 기모노를 매우 좋아해서 여배우에게 기모노를 입히는 경우가 많다. 연출로 유명하지만 각본에도 직접 관여했으며 주로 같이 작업하는 각본가는 사사키 마모루가 있는데 의견이 일치해서 사적으로도 친했으며 아이디어를 같이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완성시켰다고 한다. 사사키 마모루는 오시마 나기사하고도 같이 작업한 적이 있고 오시마 나기사가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고 한다. 직접 각본을 쓰기도 하는데 장난기있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사회를 풍자하는 에피소드를 주로 연출했으나 자미라, 메트론 성인 등 충격적이고 우울한 에피소드를 담당하기도 했다. 안노 히데아키는 이러한 짓소지의 성향을 "어른의 우화라고 생각하네요. 그다지 어린이를 위한 인상은 없어요. 울트라맨 중에서도 이질적이었던 게 분명해요."라고 말했다.#

본편에서는 소품과 대도구 너머로 등장인물을 비추는 구도가 유명하다. 특히 새장과 식기를 매우 좋아한다. 또 배우를 정면이나 바로 옆에서 잡기 싫어하는지 오로지 비스듬히 비친다. 이러한 특징만으로 짓소지 작품을 구분하는 사람이 있을정도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리고 때로는 어안렌즈를 이용해 무시무시한 접사를 해 상당히 왜곡된 영상을 만들어낸다. 또 조명 사용법도 상당히 독특하다. 특히 후기에 있어서 상황에 따른 것인지는 둘째로서 이미지 풍경과 같은 강렬한 빛을 만들어내는 것을 우선시하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아파트의 한 방에서 초록색과 빨간색의 조명을 서슴없이 이용하기도 하며, 때로는 엄청난 역광 속에서 촬영을 하기도 한다. 또한 아이러니호접몽이란 테마에 심취해서 그가 감독한 작품은 현실과 몽상, 가상, 꿈의 경계가 애매모호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검은색을 굉장히 고집했던 사람으로, 화면도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좋다고 말했다고 한다.

배우의 연기에 관해서는 기본적으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고 연기보다는 그림 만드는 데 오로지 집중했다는 후문이다. 짓소지 작품의 자주 출연한 배우 테라다 미노리는 "마지막까지 배우의 연기를 믿지 않았다.", "영상에 관해서는 스스로의 영상 세계의 구축을 배우에게까지 밀어붙였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짓소지의 성향 때문에 배우를 도구로 취급해서 출연하기 싫다고 말한 배우도 있었다고 한다.

짓소지는 자신의 저서 '어둠에의 동경', '짓소지 이렇게 말하다'에서 영향을 받고 좋아한 영화, 드라마, 소설들을 적기도 했다. 프랑스 영화(누벨바그 영화) 덕후답게 많은 프랑스 영화들이 적혀 있다. 히구치 나오후미(樋口尚文)가 저술한 짓소지의 평전에는 '사랑과 희망의 거리', '히로시마 내 사랑', '위대한 전략'의 영향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짓소지 아키오가 뽑은 좋아하는 작품 리스트 [ 펼치기 · 접기 ]
뽀빠이 (1921, 플라이셔 스튜디오)
북극의 나누크 (1922, 로버트 플래허티)
순례자 (1923, 찰리 채플린)
무서운 아이들 (1929, 장 콕토)
특성없는 남자 (1930, 로베르트 무질) ※ 소설
시인의 피 (1932, 장 콕토) ※ 소설
아란의 사람들 (1934, 로버트 플래허티)
망향 (1937, 줄리앙 뒤비비에)
오케스트라의 소녀 (1937, 헨리 코스터)
환상교향곡 (1943, 크리스티앙 자크)
죄악의 천사들 (1943, 로베르 브레송)
무호오 마츠의 일생 (1943, 이나가키 히로시)
그늘진 곳 (1945, 장 들라누와)
제리코 (1946, 앙리 칼레프)
제3의 사나이 (1949, 캐롤 리드)
어느 시골 본당 신부의 일기 (1951, 로베르 브레송)
이상한 정열 (1953, 루이스 부뉴엘)
주홍색의 커튼 (1953, 알렉산드르 아스트뤼크)
고지라 (혼다 이시로 & 츠부라야 에이지, 1954)
위대한 전략 (1955, 르네 클레르)
밤과 안개 (1956, 알랭 레네)
침묵의 세계 (1956, 자크 쿠스토 & 루이 말)
사형수 탈출하다 (1956, 로베르 브레송)
제4간 빙기 (1958, 아베 코보) ※ 소설
히로시마 내 사랑 (1959, 알랭 레네)
사랑과 희망의 거리 (1959, 오시마 나기사
소매치기 (1956, 로베르 브레송)
달콤한 인생 (1960, 페데리코 펠리니)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 (1961, 알랭 레네)
은밀 검사 (1962~1965) ※ 드라마
붉은 사막 (1964,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태양이 비치지 않는 세계 (1964, 자크 쿠스토)
부드러운 살결 (1963, 프랑수아 트뤼포)
8과 1/2 (1963, 페데리코 펠리니)
쥴 앤 짐 (1964, 프랑수아 트뤼포)
암살 (1964, 시노다 마사히로)
결혼한 여자 (1964, 장 뤽 고다르)
미치광이 삐에로 (1965, 장 뤽 고다르)
알파빌 (1965, 장 뤽 고다르)
수집가 (1965, 윌리엄 와일러)
아름다움과 슬픔과 (1965, 시노다 마사히로)
욕망 (1965,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남성/여성 (1966, 장 뤽 고다르)
전쟁은 끝났다 (1966, 알랭 레네)
중국 여인 (1967, 장 뤽 고다르)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1971, 루키노 비스콘티)
인생극장 (1972, 카토 타이)

3.2. 울트라 시리즈 관련 에피소드

  • 초대 울트라맨 촬영 당시에는 광선기를 쓰는 걸 극도로 싫어해서 짓소지가 담당한 에피소드에서는 광선기는 별로 안 쓰고 격투기와 레슬링으로 괴수를 제압하는 연출이 많다. 특히 초대 울트라맨에서는 그가 연출 각본을 맡은 에피소드가 꽤 되어서 이런 에피소드가 많은데 오히려 이 덕분에 초대 울트라맨은 격투기의 달인이라는 설정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도 울트라 세븐부터는 광선기도 쓰기 시작했다.
  • 세트 내의 특촬보다는 야외 촬영과 카메라 기법으로 승부를 보려는 경향이 강했다. 덕분에 돈을 별로 안 들여도 영상이 좋게 나와서 츠부라야 측에서 좋아했다는 후문이 있다. 반면 경영진 측의 말은 죽어도 안 듣고 자신의 스타일만 고수해서 몇 번 씩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오길 반복하였다. 특촬 팀에서도 짓소지가 오면 자신들이 할 일이 없다고 싫어했다고 한다.
  • 여배우들은 짓소지가 최대한 근접시켜서 찍는 연출을 좋아해서 곤혹스러워했다고 한다. 유리 안느 역의 히시미 유리코는 여드름까지 찍혀서 곤혹스러워했다고 한다.[23] 한 번은 여배우의 귓구멍을 촬영하려고 해서 여배우가 매우 불쾌히 여겨서 그 장면은 사용하지 않았다는 헤프닝도 있었다. 후지 아키코 대원을 연기했던 사쿠라이 히로코는 "아마 그런 취향이지 않으셨을까" 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 울트라맨 제 34화 '하늘이 보낸 선물'에서는 그 유명한 스푼 변신을 연출했다. 식사 중에 비상사태가 발생하여 작전실을 뛰쳐나간 하야타[24]가 베타캡슐 대신 스푼을 하늘 높이 들고 변신하려 했지만, 이윽고 실수했음을 알아차리고 스푼을 집어던진 뒤 베타 캡슐을 꺼내는 장면. 이는 그때까지 진지한 이미지였던 하야타가 제대로 망가지는 대단히 희귀한 개그 씬이었다. 그 때문에 하야타의 이미지를 망쳤다며 츠부라야 프로덕션 내부가 발칵 뒤집어졌지만, 츠부라야 에이지 본인이 "TV 쇼인데 뭐 어떠냐"라며 이를 옹호하여 조용히 넘어갔다고 한다.

    또한 비록 내부적으로 질타를 받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린이들에게 굉장한 인기를 끌어 당시 스푼 변신을 따라하는 것이 유행이 될 정도였다고 하며, 동시에 하야타라는 캐릭터에 약간의 허당끼를 불어넣어 인간적인 매력을 더해주게 되었다. 이 장면은 이후 케로로 중사 등 수많은 매체에서 패러디 되었으며, 하야타 역의 쿠로베 스스무가 훗날 울트라맨 맥스에 출연했을 시 스푼을 지켜드는 장면으로 셀프 패러디를 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이 에피소드는 정자체 텍스트로 쓰여진 작전 기획서 표지를 화면 가득 잡는다든가, 한가롭게 잠든 괴수와 주변 경관을 롱샷으로 잡으면서 잔잔한 음악을 깐다든가, 주인공 하야타가 위기에 빠지자 “하야타씨!”를 외치는 후지 아키코 대원의 얼굴을 급격히 클로즈한다든가, 훗날 에반게리온에서 보게 되는 특유의 연출들의 프로토타입을 볼 수 있어서 현대 관객들의 흥미를 더하는 에피소드이다.
  • 전설의 에피소드로 이름높은 울트라 세븐 제 8화 '노려진 거리'는 그야말로 짓소지 연출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울트라 시리즈 굴지의 명 에피소드이다. 특히 모로보시 단메트론 성인이 다다미방에 앉아서 밥상을 가운데 놓고 논하는 장면이 매우 유명한데, 이 장면이 큰 문제가 되었다. 이유인 즉슨 당초 울트라 세븐은 해외 진출도 염두에 두고 제작된 작품이기 때문에, 작중 일본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소품이나 장소는 되도록 등장시키지 않는 방침이었다. 이는 당시 모든 관계자가 엄수하도록 지시가 내려졌었다.

    그 와중에 짓소지는 대놓고 일본스러운 다다미 단칸방에 일본스러운 나무밥상을 놓고 심지어 굉장히 상징적으로 촬영한 것. 당시 촬영현장은 그 슈르한 광경에 스탭들이 모두 대폭소를 했으며, 짓소지 본인도 "레디 액션!"의 큐 사인조차 못할 정도로 웃음보가 터져서 조감독이 대신 큐사인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후 프로듀서에게 엄청나게 혼났다고 한다. 이 밥상 사건으로 인해 제대로 찍혔는지, 이후 '한 에피소드'를 감독한 후, 43화 전까지 30여화동안 짓소지는 울트라 세븐의 현장에서 좌천되고 만다. 덧붙여서 8화의 나레이션으로 나오는 마지막 대사[25]는 원래 각본에는 없고, 짓소지 아키오 감독의 지시로 삽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8화 뒤에 찍었다는 그 '한 에피소드'는 다른 의미로 전설이 되었는데, 그 에피소드는 훗날 환상의 12화로 불리게 된다. 항목 참조.

    이 회차의 밥상 장면은 후대의 울트라 시리즈에서도 계속해서 오마주되고 있다.#
  • 울트라맨 다이나 38화에서 울트라맨이 땅에 착지할 때 흙먼지가 튀는[26] 연출이 처음 등장하며, 이는 후속작 울트라맨 가이아에서 더욱 업그레이드되어 이후의 울트라맨 시리즈에서 굉장히 많이 이용되었다. 다만 이 연출을 고안한 것은 짓소지가 아니라 특수효과 감독인 사가와 카즈오였다.
  • 짓소지의 저서 '울트라 시리즈의 괴수들'의 글을 보면 괴수의 이미지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흡혈우주인 스펠 성인의 디자인에 관해서 짓소지가 제안을 했는데, 당시 울트라 시리즈의 디자이너였던 나리타 토오루[27]는 이것이 상당히 마음에 안들어 상당히 분개했다고 한다.
    사실은 이런 것을 쓰고 싶지 않지만 꽤 대충 그런 기분으로 괴수를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울트라 시리즈"를 하고 있을 무렵, 괴수의 형태를 생각하는 것은 즐거움이었다.(울트라 시리즈의 괴수들)#
  • 이렇게 다른 감독하고 완전히 차별화된 박력있는 영상을 뽑아내기 때문에, 아예 짓소지 감독의 에피소드만 뽑아서 감상하는 울트라 시리즈 팬이 있기도하며 츠부라야 프로덕션에서는 1979년 짓소지 감독이 초대 울트라맨에서 담당한 에피소드만 재편집해서 극장 개봉을 했고 훗날 DVD를 출시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츠부라야에서 짓소지의 이름을 붙인 비디오 '괴기대작전 짓소지 아키오 감독 작품집'이나 '괴기대작전 짓소지 아키오 스페셜'이 발매되는 등 특별 취급되고 있다. 스토리에 대한 평가도 뛰어나지만 상업 영화와 같은 관점에서 기본에 충실한 카메라 미장센과 레이아웃을 추구했기 때문에, 짓소지 감독이 연출한 울트라 시리즈의 영상은 지금도 어린이 특촬히어로방송의 한계를 초월한 영상미로 팬들을 감탄시킨다.
  • 울트라 시리즈의 애착이 깊어 말년에 울트라맨 관련 소설을 쓰기도 했고, 자신을 키워준 특촬물에 대한 자부심도 있어서 "눈물을 받는 난치병이나 범죄의 심리 드라마보다 장인성이 발휘되는 특촬 픽션이 격하라고 보여지기 쉽다"라고 말하며 텔레비전계의 풍조를 안타까워했으며 "나는 다이닝 키친이 나오면 보지 않으려고 한다" "바보스럽지만 재미있다, 그것이 픽션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4. 필모그래피

4.1. 드라마

  • 《레몬같은 여자》 (1967) - 키시다 쿄코 주연작 3편 연출. 단편 옴니버스 1화 연출
  • 괴기 대작전》 (1968)
    • 4화 공포의 전화
    • 5화 사신의 자장가
    • 23화 저주의 항아리
    • 25화 교토를 삽니다
  • 《Oh! 그거 봐요》 (1968): 7화, 8화 연출
  • 실버 가면》 (1971)
    • 1화 고향은 지구
    • 2화 지구인은 우주의 적
  • 《나가사키범과장》 (1975) - 오프닝·엔딩 타이틀 백 연출
  • 《24의 눈동자》 (1980) - 오프닝, 실사 부분 연출
  • 《파도의 쟁반》 (1983)[32]
  • 《화요일 서스펜스 극장 '푸른 늪의 여자'》 (1986)
  • 《도쿄환몽》 (1986)[33]

4.2. 영화

4.3. 방송

  • 《현대의 주역 울트라 Q의 아버지》 (1966)
  • 《울트라맨 전야제》 (1966) - 중계 연출
  • 《역사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1975)
  • 《멀리 가고 싶다》 (1977)
  • 《아 프로야구》 (1977)
  • 《놀라운 친구》 (1977)
  • 《나는 여행을 한다》 (1977)
  • 《오케스트라가 왔다》 (1977 ~ 1983) - 극장 중계 연출
  • 카라얀베를린 필의 모든 것》 (1981)
  • 《전설의 피아니스트 호로비츠의 콘서트》 (1982)
  • 《지휘자와 오자와 세이지의 세계》 (1983)
  • 《교향곡 우주전함 야마토》 (1984)
  • 《콘서트 오페라 보체크》 (1985)
  • 《괴수의 여명》 (2005)[37] - 총감수, 연출

5. 기타

  • 그를 대표하는 별명으로는 귀재(鬼才)가 있다.
  • 안노 히데아키는 짓소지빠라고 불릴정도로 짓소지를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짓소지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아 짓소지의 연출을 많이 따라하기로 유명하다. 이 사람이 만든 울트라맨 에피소드를 다 보고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다시보면 황당할 정도로 비슷한 장면이 많다. 안노는 '짓소지 작품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다'라고 말하며 존경을 보냈으며#, '짓소지 아키오 감독 작품 울트라맨'을 인터뷰에서 인생을 바꾼 한편으로 꼽기도 했다. 2021년 안노는 짓소지가 타고 다니던 애차를 '신 가면라이더' 촬영장에 투입했다.# 짓소지도 안노를 "짓소지를 보고 공부해서 성공한 연출가." 정도로 알고 있었으며 에반게리온의 캐릭터 아야나미 레이를 매우 좋아해 상품을 수집했다고 한다.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 피규어도 샀는데 레이만큼 좋아하진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에반게리온 본편은 보지 않았고 지인에게 어떤 작품인지 물어본 정도라고 한다.
  • 오시이 마모루도 짓소지를 좋아하는 감독으로 꼽았다. 『울트라맨』과 『울트라 세븐』에서 특히 짓소지 아키오 감독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며 괴기 대작전을 지탱한 작가가 짓소지 감독이었다고 평했다. # 저서 '감독 직업 난도질 - 이기기 위해 싸워라'에서 짓소지가 연출한 영화 '만다라', 드라마 '울트라 세븐', '괴기 대작전'(특히 교토를 삽니다)을 좋아하는 작품으로 언급했다. #

    오시이: 그러니까 울트라 시리즈의 에피소드 감독님을 알 수 있는 건 오프닝 크레딧의 마지막이거든요. 거기에 '짓소지 아키오'가 등장하면 '아싸-! 오늘은 굉장해 반드시'가 됐죠. 실제로 그가 직접 만든 작품은 다른 에피소드와는 사뭇 달랐어요. 발상도 뛰어나고 연출도 재미있고 카메라 워크에도 집착이 있었죠. 매번 그가 작업한 작품에는 뭔가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는 도전 정신이 있었습니다. 어린이용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 미츠시마 히카리가 아이돌로서 인기가 안 나와서 은퇴할까 고민하던 중[40] 울트라맨 맥스에서 함께했던 짓소지 감독이 "넌 연기에 재능이 있다." 라고 해서 아예 배우로 전업하였고 결과는 대박. 지금은 대배우가 되었다. 지금도 미츠시마 히카리는 짓소지 감독을 은인으로 여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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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특촬 방과 후 SP 짓소지 아키오 특집' 짓소지 아키오 감독 미공개 인터뷰 영상.
  • 배우자인 하라 치사코(原知佐子)는 배우로 활동했으며,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그가 연출한 작품의 자주 출연하기도 했다. 딸인 짓소지 아코(実相寺吾子)도 배우이며, 울트라맨 티가 34화에 출연했다.
  • 짓소지의 촬영 현장은 상당히 독특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스태프와 친구 같은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였다고 한다. 이를 우에하라 쇼조는 이른바 짓소지라는 궁사를 중심으로 한 신사나 축제 같은 현장이었다고 표현하며 '짓소지교의 의식적인 분위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 스태프들에게는 본인 특유의 연출을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어떠한 영화를 참고하라고도 하지 않았으며, 몰라도 너희들이 알아서 찾으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 짓소지 감독과 많은 영화를 같이 한 촬영 감독 나카호리 마사오[41]는 "사람은 나이가 들면 둥글게 된다고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대로 했다."라고 말하며 회고했다.#
  • 1989년 TBS에서 방송되었던 단편 드라마로 울트라맨의 탄생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울트라맨을 만든 남자들 ~별의 숲에 달의 배~'는 짓소지 아키오의 자서전 '별의 숲에 달의 배'를 원작으로 만든 것으로, 주인공 키라 헤이지는 짓소지 본인을 모델로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 철도 동호인이다. 잡지 '도쿄인'에서 도쿄 전철이나 지하철 등 철도 관련 특집이 편성되었을 때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기고했다. 그것을 정리한 저서가 '쇼와 전차 소년'이다. 본인이 제작한 철도 모형인 쇼와정경박물관(昭和情景博物館)이라는 식완 시리즈를 내놓기도 했다.
  • 짓소지와 친했던 영화 제작자 스즈키 마사노부는 짓소지를 "천재적 두뇌의 소유자"라고 평했으며, 그에 성격에 대해서는 "쑥스러운지 자신을 숨기는 편으로, 속마음은 좀처럼 말하지 않고, 모두가 있으면 '이거 싫다'라고 말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 집필 활동도 상당히 많이 했다. 1990년 짓소지는 울트라 시리즈의 촬영장에 사는 스태프들의 실패와 성공을 숱하게 더듬는 제작 과정을 그린 에세이 '울트라맨 탄생(ウルトラマン誕生)'을 출판하기도 했다.
  • 1993년에는 자신이 연출했던 울트라 시리즈 에피소드나 실현되지 않은 에피소드를 소설로 쓰기도 했다. 제목은 '울트라맨 골드 러시 작전(ウルトラマン・ゴールドラッシュ作戦)'[42], '울트라 세븐 노려진 별(ウルトラセブン・狙われた星)'.[43]
  • 2017년 짓소지가 처음으로 연출한 TV 드라마가 극장에서 상영됐다.#
  • 츠부야라 프로덕션이 사옥을 옮길 때 강하게 반대했다. 츠부라야를 자신의 고향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다고 한다.#
  • 본인이 직접 울트라 시리즈의 괴수들을 그려 화집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 짓소지 아키오 탄생 80주년을 맞아 유명 영화 평론가이자 영화 감독 히구치 나오후미(樋口尚文)가 짓소지의 경력을 총망라한 평전 "짓소지 아키오 재기의 가람: 귀재 영화감독의 생애와 작품총서"를 발매했다.#
  • 2021년 사후 15주기를 맞아 짓소지를 기리는 메모리얼 콘서트가 열렸다.#
  • 장난감 수집이 취미였으며 케로케로케로피의 팬이어서 온갖 케로케로케로피 수집품들을 모았다고 한다. 케로케로케로피의 수집품을 실생활에 사용하기도 해서 지인들에게 신기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에반게리온, 포켓몬스터, 성인 애니메이션 피규어까지 모았다. 철도 모형과 미니카, 봉제 인형도 수집했다. 해당 작품에 대해 잘 몰라도 상품의 완성도가 높으면 구입했다고 한다. 이러한 수집품은 짓소지의 아내가 카와사키시에 기증해 전시전에서 짓소지가 수집한 피규어가 일부 공개되기도 했다. 일부는 권리 문제나 수위의 문제로 공개되지 못했다고 한다.
  • 종종 자신의 작품에 '치나보'라고 이름을 붙인 너구리 인형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 짓소지 아키오의 연출 스타일을 패러디한 기사도 있다.
  • 2008년 짓소지 아키오의 제작팀 스태프와 제자, 그를 존경하는 스태프를 중심으로 설립된 제작사 '짓소지구미(実相寺組)'가 설립됐다.
  • 돌아온 울트라맨의 감독 중 한 명인 오오키 준(大木淳)은 짓소지 아키오의 제자이자 파트너였다. 오오키 준의 특촬감독 데뷔작이 바로 짓소지 연출의 울트라 세븐 '8화 노려진 거리'다. 오오키는 이후에도 짓소지가 연출한 작품인 '무상', '실버가면', '만다라', '제도물어' 등에서 조감독 혹은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오오키의 유작은 짓소지가 연출한 'D 언덕의 살인 사건(1998)'이다.

6. 관련 문서

7. 외부 링크



[1] 제1문학부에서 학부를 옮겼다.[2] 현재의 도쿄도 신주쿠구 일대[3] 그래서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4] 노래하지 않을 때의 미소리 히바리를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했고(콧구멍까지 찍었다는 설도 있다), 노래하고 있을 때의 히바리를 극단적인 롱 쇼트를 했다.[5] 어느 드라마에서 라스트 씬에 뜬금없이 암전시켜 눈을 내리게 했더니 '왜 갑자기 눈을 내리냐'라고 크게 꾸짖음을 당했다. 이때 츠부라야 에이지 감독만이 '꽤 좋은 연출이었네, 하지만 눈이 더 많이 내렸다면 더 좋았을걸세.'라며 칭찬해주었다고 한다.[6] 특촬물은 애니메이션과 달리 할 게 많아서 보통 감독을 2~3인 기용한다. 울트라맨이 전부 이 사람의 작품인 것은 아니다.[7] 이 작품에서 연출한 에피소드는 짓소지 아키오 최고 걸작이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짓소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듯 한데 저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울트라맨'에서 시작된 내 특촬물 속에서 몸에 밴 지혜를 특수 기술인 오오키 준키치와 상의하여 어떻게든 자기 나름대로의 것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968년의 '괴기 대작전'이었을 것이다."#[8] 본인은 다른 각본가(킨조 테츠오)가 왕도적인 작품을 써주니까 나는 저런 변화구를 던질 수 있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있다.[9] 오시마 나기사 각본[10] 울트라맨의 특수 미술 조수, 울트라 세븐의 특수 미술 디자이너였다.[11] 현재는 주식회사 코다이로 이름이 바뀌었다.[12] 2019년 북미에서 이 삼부작이 블루레이로 출시됐다.#[13] 한국에서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데뷔작으로 로카르노 황금표범상을 수상한 적이 있다.[14] 울트라 세븐, 괴기 대작전, 돌아온 울트라맨, 울트라맨 에이스, 울트라맨 타로의 프로듀서.[15] 짓소지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스페셜 프로그램을 담당했는데, 이 작품을 계기로 카라얀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16] 영화 감독이나 TV 연출가가 아닌, 오페라 연출가로서 교수직에 임명된것이다.[17] 1980년대에는 아사히나 다카시 지휘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의 영상 수록을 연출했지만, 이것이 2009년에 DVD 박스로서 발매됐다. 이런 종류의 영상물에서는 영상 감독의 이름은 크레딧 노트의 구석에 실리는 정도가 보통인데 짓소지는 인지도 있었기때문에 "아사히나 다카시 지휘, 짓소지 아키오 감독"이라고 곡명이나 작곡자명보다 훨씬 크게 박스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다.[18] 류 치슈가 주연으로 출연했다. 이 작품의 각본가는 북쪽 고향에서로 유명한 쿠라모토 소우다.[19] 교고쿠도 시리즈의 작가 교고쿠 나츠히코가 짓소지 아키오의 팬이다.[20] 짓소지의 친구이자 파트너로 활동했던 각본가 사사키 마모루도 이 해에 사망했다.[21] 오늘날까지도 짓소지가 연출한 울트라 시리즈 작품들은 시리즈 최고의 명 에피소드들 중 하나로 꼽히고 있고, 그에게 감명받는 시청자들이 많다. 다만, 그 특유의 연출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짓소지의 작품은 좋든 나쁘든 생각할 수 있는 우화같은 이야기가 많았고, 기묘하고 미스터리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래서 '히어로물로서의 상쾌함은 떨어진다' '사람을 가르치려고 한다'고 불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22] 짓소지 아키오를 모르는 사람도 이 용어는 쓸 정도로 유명한 용어다.#[23] 다만 초반부엔 딱히 클로즈업 안 해도 여드름이 똑똑히 보인다.[24] 여기서부터가 이미 개그인데, 입안의 카레를 씹다 말고 웅얼거리며 "큰일이다!"를 외치는 모습이 일품이다.[25] "메트론 성인의 지구 침략 계획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인간들의 신뢰감을 이용하다니, 정말 무서운 우주인이군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이 이야기는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네? 왜냐구요? 우리 인류는 지금, 우주인들의 표적이 될 만큼 서로를 신뢰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울트라 시리즈 최고의 명대사 중 하나로 꼽히는 대사다.[26] 착지 타이밍에 맞춰 지면에 셋팅한 폭약을 폭발시키는 방식.[27] 울트라 시리즈 디자인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28] 2022년 '팬들이 뽑은 최고의 초대 울트라맨 에피소드'에서 1위를 차지했다. 짓소지가 연출한 또 다른 에피소드인 34화, 35화는 6위, 7위를 차지했다.#[29] 2016년 NHK에서 주최한 팬들이 뽑은 최고의 울트라맨 에피소드 중 하나로 뽑혔다. #[30] 환상의 12화라 불리며 소재에 문제가 있어서 영구 결번처리 되었다.[31] 시나리오만 작성했고 감독은 안 했다.[32] 문화청 예술제 대상 수상작[33] 단편 드라마. 짓소지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작품은 내 색깔이 가장 나온 것일 수도 있다."라고 적었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난해하다.[34] 마지막 울트라 시리즈 연출작[35] 2화도 연출 할 예정이었지만, 짓소지의 사망으로 키타우라 츠구미가 대타로 연출했다.[36] 장편 영화 데뷔작,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표범상 수상작.[37] 울트라 Q, 울트라맨, 울트라 세븐 등의 괴수 조형가로 활약해 괴수의 아버지로 불렸던 타카야모 료사쿠(高山良策)의 창조 과정을 당시 관계자의 증언과 작품으로 더듬으며 울트라 시리즈의 탄생 비화를 그린 총 12부작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다.[38] 히구치 신지가 말하는 짓소지 아키오#[39] 나츠메와 아메미야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광팬을 공언하므로 에반게리온을 통해 짓소지 아키오 연출에 물든 것으로 보인다. 고쇼조노는 완전히 불명.[40] 당시 미츠시마가 속해있던 Folder5는 아이돌 빙하기 여파로 인기가 없었다. 미츠시마 본인 역시 비인기 멤버였고 해산 당시를 회고하면서 자연 소멸, 뭐야 끝난거야?라고 말했을 정도.[41] 환상의 빛으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 촬영상을 수상했다.[42] 방영 당시 실현되지 않았던 원안을 바탕으로 소설로 썼다.[43] '노려진 거리'의 자매편이라고도 할 만한 환상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써내려간 완전 오리지널 스토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