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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oreagate1976년 재미 한국인 사업가 박동선을 위시한 일단의 로비스트들이 미국 의회에 불법 로비[1]를 했다는 사실이 미국 워싱턴 포스트를 통해 보도된 후 대한민국과 미국 간의 외교적 마찰이 일어난 정치 스캔들. 해당 사건의 로비스트 이름을 따 '박동선 사건'이라고도 부르며 박정희 정부와 카터 행정부 간 관계 악화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통일교 교단 자체와 박보희 등 통일교 신도들의 미국 내 정치공작 활동에도 이용되었다.
2. 배경
당시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냉전의 최전방에 놓인 후진국이었고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는 북한의 전성기이기도 했다.[2] 하지만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경제·외교 방침을 부분적으로 거부하며 독자노선을 추구했고 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인권 탄압과 반민주적 움직임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특히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리처드 닉슨부터 제럴드 포드를 거쳐 지미 카터 시기까지 연이어 제기된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은 1970년대의 한미관계를 불신의 격랑으로 빠트리고 있었다.사실 미국에서 제기된 주한미군 철수 공약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예컨대 리처드 닉슨은 이미 여러 차례 주한미군 철수 의사를 발표한 적이 있었고, 1970년에는 실제로 미 7사단을 철수시켰다.[3] 이러한 미군 재배치는 냉전의 거시적 변화에 따른 전략적 판단이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의 베트남 전쟁 한국군 파병조차도 주한미군 철수 시도를 일시적으로 지연시키는 것이 한계였다. 게다가 미국은 데탕트를 명분으로 중국에 접근하며 한국과 일본을 위시한 미국의 아시아 동맹국들의 불신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북한에 대한 안보우위를 담보할 수 없었고 한일수교와 한국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얻어낸 초기 자본을 한강의 기적 대신 비생산적인 군사 분야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을 지탱하는 동력이었던 경제·외교 분야에서의 총체적 실패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즉, 주한미군 철수는 당대 한국의 입장에서든 박정희 정권의 입장에서든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1970년 즈음 이미 워싱턴 내에 로비스트들을 조직하여 (1)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시도를 막고 (2) 미국의 대 공산권 접근 시도를 억제하며 (3) 한국 내 인권 문제 제기를 방해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결과적으로 닉슨의 뒤를 이은 포드 행정부는 박정희 정권의 안보 불안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다. 제럴드 포드는 비록 자신의 결정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정치적인 지지로 보이기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동남아시아가 이미 공산화된 상황에 북한에게 의도적으로든 비의도적으로든 잘못된 신호를 주기를 원치 않았다.[4] 1974년 3월 20일, 미국의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한국의 김동조 외무부장관을 만나 미군의 전략적 재배치를 담은 슐레징어 안의 철폐를 발표하고 더 이상의 주한미군 철수는 없을 것임을 약속했다.
대신 미 의회는 포드 행정부 시기였던 1974년과 1975년에 걸쳐 이미 박정희의 유신정권의 인권 문제에 대한 청문회를 여는 등 다른 방면에서 대한민국 제4공화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다. 1975년 청문회에서 전직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던 이재현은 한국 중앙정보부의 조직적인 로비 활동을 증언했고 이로 인해 당시 국제동향 관련 소위원회의 대표자이던 도널드 M. 프레이저는 당시에 이미 미국 내 한인들의 불법 로비 정황에 대해 파악하고 조사에 착수하였다. 또한 청문회는 "한국과 필리핀에서 발생하는 인권 탄압이 미 대외 정책의 중대한 도전"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3. 사건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 포스트는 10면에 걸쳐 "박정희의 지시로 박동선과 중앙정보부 등이 미국 상·하원 및 유관 공직자들에게 매년 50만 달러에서 1백만 달러에 이르는 현금을 포함한 불법 로비를 통해 친한적 관점을 전파했다"고 보도했다. 뉴욕 타임스는 최대 115명의 상·하원의원들이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하워드 베이커 상원의원은 최소 50여 명이 직접적인 뇌물 수수와 연관되어 있다고 추정했다. 보도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미국 전체를 휘감는 거대한 스캔들로 발전했다. CIA, FBI, NSA와 국무부, 미국 법무부 등이 총동원되어 코리아게이트 관련자들을 수사하기 시작했으며, 미국 하원에서도 국제관계소위원회, 이른바 '프레이저 위원회'가 구성돼서 청문회가 열렸다.한편, 1977년 6월, 3선 개헌 당시 박정희에게 토사구팽 당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하여 박정희 정권을 고발하였다. 김형욱은 1973년 이후 미국으로 망명해있던 상황이었고, 코리아게이트가 터지자 미국 내에서 한국의 불법 로비현황과 박정희 정권의 인권 범죄들을 증언했다. 뉴욕 타임스와의 1977년 6월 5일 인터뷰, 프레이저 청문회 출석, 심지어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정리한 회고록 등은 이러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박정희는 이러한 "배신 행위"에 몇 번이나 미국에 사람을 보내서 한국과 정권의 치부가 폭로되지 않도록 입막음하려 했으며 결국 김형욱은 1979년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을 만나기 위해서 프랑스 파리로 떠난 뒤 행방불명되었다.[5]
미 의회와 국무부는 당연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핵심 인물인 박동선 로비스트와 김동조 전 외교부 장관의 송환을 한국 정부에 요구했으나 한국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미국은 "군사 원조를 끊겠다", "식량 차관을 삭감하겠다",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 등의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 특히 1977년 6월 뉴욕 타임스가 "CIA가 도청을 통해 박정희가 박동선에게 미국 내 로비 활동을 지시한 정황이 포착됐다"고 보도하자 미 정보기관의 청와대 도청 의혹까지 불거지며 한미관계는 악화됐다. 한미 양국은 박동선의 송환 여부를 놓고 줄다리기 끝에 박동선이 미국으로부터 '전적인 사면권'을 받는 조건으로 송환에 응했다. 1978년 2월 박동선은 미국 상하원 윤리위원회에 출석해 "32명의 미 의원에게 85만 달러라는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밝혔으나 이외 검사가 제시하는 증거들은 부정했다.
미국 프레이저 위원회는 김형욱의 폭로를 바탕으로 1978년 10월 프레이저 보고서를 미국 의회에 제출했다.[6] 미 상하원 모두 1978년 말에 조사를 끝냈으며 한미 양국은 1978년 12월 31일 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미 법원은 박동선에 대한 기소를 철회했으며 박동선에게 돈을 받은 현직 의원 1명이 유죄 판결을 받고 7명이 의회 차원에서 징계를 받는 것으로 코리아게이트는 마무리됐다.
4. 평가
코리아게이트 로비가 진행되던 시기에 재임한 미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제럴드 포드·지미 카터 등 총 3인이었다. 세 대통령들은 모두 대한민국 유신정권의 인권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지만 실질적인 대응전략 측면에서는 다소 다른 방식을 취하였다. 먼저 닉슨은 현실주의자[7]로, 인권 문제를 한국에서 미국의 국익을 관철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을 뿐 정면 충돌은 회피했다. 닉슨의 주한미군 철수 시도 역시 베트남 전쟁의 실패로 인한 전략적 관점이었을 뿐 한국에 대한 압박과는 거리가 멀었다. 포드의 경우 유신 체제가 본격화되면서 날로 악화되는 인권 상황을 더 이상 회피할 수 없었지만 대신 주한미군을 유지하고 한국의 경제적 발전에 대한 지원의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정권과 국가를 분리하겠다는 인식을 분명히 했다.반면 인권 외교를 표방하던 지미 카터는 줄곧 유신체제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왔고 1976년 선거 캠페인에서 1977년 내에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공약까지 한 상태였다. 당연히 박정희 정부는 이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취했다. 카터는 심지어 한미정상회담 대신 남북미 3자회담을 개최하려고 시도했으나 윌리엄 글라이스틴[8] 당시 미 대사가 그러한 선택이 "한국의 걱정, 분노, 배신감을 촉진할 수 있다"[9]며 강력히 반발한 끝에 취소되었다. 1979년 6월 30일의 한미정상회담에서 평소에 주한미군 철수 문제, 인권 문제 비판 등으로 내정 간섭에 불만이 쌓였던 박정희는 45분 간 카터 행정부의 전략적 실패를 비판했으며 카터 역시 노발대발했다. 카터는 방위비 분담금 인상과 한국 내 인권상황 개선을 요구했지만 박정희는 회담 직후 긴급조치 9호로 응답했다. 그러한 점에서 코리아게이트를 위시한 1970년대의 각급 충돌을 거치며 한미동맹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점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의도와는 달리 박정희는 미국으로부터 가해진 일련의 압박들을 오히려 한국의 독재 체제를 강화하는 명분으로 활용했다. 예컨대 1970년과 1971년에 걸친 닉슨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시도는 한국의 안보 위기를 강조하며 유신 체제를 선포하는 명분이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코리아게이트를 둘러싼 미 의회의 청문회는 박정희의 정치적 반대파들의 예상과는 달리 대한민국 사회 내부의 국가주의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과적으로 유신 체제를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10] 즉, 박정희 정권은 내부적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국의 비판을 내정간섭으로 치부하였고 미국은 이러한 의도에 끌려다녔던 것이다.[11]
한편 코리아게이트가 대한민국에 얼마만큼의 전략적 이익을 가져다 주었는지에 대한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먼저 프레이저 보고서는 박동선의 로비 활동이 효과적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예컨대 1971년에서 1975년 사이 미 의회가 대한민국에 대한 15억 달러 규모의 군수 원조를 승인했던 것이 로비 활동의 결과였음이 밝혀졌다.[12] 또한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여론을 막아세우고, 포드 행정부 시기 미국 외교의 대중 유화책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이와 분리하여 분명한 적성국으로 인지하도록 한 것 역시 부분적으로는 한국 정부에서 주도한 정치적 로비의 결과물이었다.[13]
그러나 이러한 "효과"는 한국의 국익과 박정희 정권의 이익을 구분하지 않고 혼재하여 평가한 것이었다. 예컨대 코리아게이트의 청문회에서는 미국 내 중앙정보부가 유신정권에 저항하던 한국계 미국인 민주화 운동가들을 위협하고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던 사례들 역시 공개되었다. 불법 로비의 상당수는 민주 국가인 미국의 정계나 시민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불신 및 혐오감을 완화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심지어 일부는 관련자들의 사적인 착복·유용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이러한 "정보공작"이 들키지 않았다면 모를까 일단 들통난 이상 한국은 불법 로비로 얻은 외교적 이익에 상응하는 상당한 리스크를 감당해야 했다.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당시 미국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미국 사회에 한국에 대한 불신감을 심어준 것은 당연했다.
한편 한국에서는 이 사건의 여파로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신직수가 해임되고 김재규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중정부장에 취임한 김재규가 제일 먼저 나선 것이 청문회에서 증언을 한 전 중정부장인 김형욱을 귀국시키는 것이었다.
5. 관련 문서
- 프레이저 보고서
- 김형욱 실종 사건
- Yong-Jick Kim, <The Security, Political, and Human Rights Conundrum, 1974-1979>, International Relations (2011), Ch.16
- Joe Wood, <Persuading a President: Jimmy Carter and American Troops in Korea>, Studies In Intels (1996)
- William H. Gleysteen, <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 Carter and Korea in Crisis> [14]
[1] 당시나 지금이나 미국에서 로비 자체는 합법이지만 규정된 절차를 밟아야 하고 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한다는 조건이 따라붙는다. 즉 이전이나 지금이나 불법 행위를 저지른 것.[2] 현재에 와서는 탈북자들의 증언이나 여러 자료들로 북한이 실제로는 남한보다 잘 살지 못했다는 것이 드러났다.[3] Ten thousand U.S. troops were withdrawn from South Korea by 1970 and the Seventh Infantry division departed in 1971, although the military threat from North Korea remained unchanged.[4] Ford made sure not to inadvertently encourage North Korea into military ventures by hurting the credibility of the U.S. military commitment to South Korea.[5] 때문에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김형욱 암살을 지시했다는 설이 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김재규가 같은 해 10.26 사건으로 박정희를 살해했다는 점에서 의문을 표하는 경우도 있다. 김형욱의 행방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김형욱 문서 참고.[6] 김형욱의 미국 의회 출석 목적 중 청와대 도청 사건으로 인해서 약화된 미국 정부의 입지를 만회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게 먹혀들어서 협상이 타결됐다.[7] 직전 시대에 비해 인권 문제에서 딱히 개선된 것이 없었던 중국을 상대로도 실리적인 관점에서 데탕트를 진행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8] 5.18 민주화운동 당시 미 본국에 관련 정보들을 보냈던 대사다.[9] 한국이 북한에 확고한 우위를 점하지 못한 상황에서 미국이 북한에 접근한다면 당연히 한국은 외교적으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다. 북한이 한소수교와 한중수교 당시 강하게 반발한 것과 같은 이유.[10] To the surprise of Park’s political opponents in South Korea, the U.S. congressional hearings and investigations triggered nationalistic reactions, making South Korean society rally around the head of the yushin regime. Some student activists and political dissidents demanded that Park completely disclose the details of the Koreagate scandal, but the public mood was hardly “anti-Park.”[11] 이러한 분위기는 2021년 미국 의회의 대북전단금지법을 둘러싼 청문회에서 재현되었다.[12] The Fraser report concluded that Pak Tong-sôn’s lobbying efforts had proved effective, getting Congress to approve a $1.5 billion military aid program to South Korea for fiscal years 1971–1975. (...) Moreover, the Fraser committee found that the KCIA had been threatening and intimidating anti-yushin Korean Americans prior to the outbreak of Koreagate.[13] 나머지 '부분'은 미국 내의 정치현실주의 자문위원들의 덕이었다. 그 헨리 키신저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같은 인물들이 활동했던 시기가 이 때였고 이들은 하나같이 소위 "인권 외교"를 비판하며 소련이라는 현실정치의 초강대국에 맞서려면 실리를 쫓아야 한다고 역설했다.[14] 주한미국대사를 역임한 윌리엄 H. 글라이스틴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