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0:31:31

성서무오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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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완전축자영감설3. 유기적 영감설4. 성경의 오류
4.1. 성서에 오류가 없다는 명제 자체의 맹점4.2. 과학 및 일반상식과의 충돌4.3. 성경 구절들 간의 충돌4.4. 극단적인 문자주의
5.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6. 성서무오설에 대한 기독교 내의 비판7. 관련 문서

1. 개요

/ Biblical inerrancy

성서는 하나님께 영감을 받아 기록된 책이므로 문자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신학적 주장이다.

기독교식 원리주의의 일종이다. 성서무오설 안에도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모든 원리주의 분파가 그렇듯 경전에 모든 내용이 적혀있지는 않기 때문에 적용에 있어 논란이 많다. 경전제일주의 특성상 누구나 경전을 해석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성서무오설과 같은 주장은 초기 그리스도교부터 있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 성서무오설의 역사는 100년도 되지 않았다. 즉, 근현대에나 발호된 근본없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신약 정경을 결정한 신학자들이 서로 오류되는 내용인 줄 알면서도 고치지 않고 다 성경에 그대로 실었던 것에서 보듯이, 과거에는 성경에 오류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오류 없는 완벽한 성경을 만들 생각이었다면, 당장 예수의 족보부터 토론을 하든 칼을 들고 싸우든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서 딱 한 족보만 성경에 실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신학자들은 복음서마다 다른 예수의 족보를 그대로 성경에 실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진화론을 대표로 새로운 과학 이론이 쏟아지고, 역사학이 발전하면서 성경 속 사건들이 시기가 맞지 않다는 것이 하나둘 밝혀졌다. 이런 위협 속에서 성경의 권위를 방어하기 위해, 1970년대에 미국프린스턴 대학교 신학과를 중심으로 성서무오설이 정립되었다.

성서무오설이라는 단어는 상세히 따져 보면 매우 복합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오류를 무시해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글자 하나하나가 역사적, 과학적 사실을 담고 있다'는 뜻(완전축자영감설)으로 쓰일 수도 있고, '인간의 오류를 감안하여 비록 과학적 엄밀함이나 역사적 정확성을 완벽하게 기대할 수는 없지만, 맥락적이고 유기적으로는 구원의 진리를 오류 없이 주장한다'[1](유기적 영감설)는 의미로도 쓰인다.

후술할 완전축자영감설이라는 성서무오설이 '성경은 모든 문자 하나하나가 사실이다'라는 전자의 입장이다. 이 문서뿐만 아니라 나무위키 내에서 말하는 성서무오설은 다수가 전자의 의미이다. 그러나 성서무오설에는 성경의 문자적 오류를 인정하는 유기적 영감설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아우구스티누스장 칼뱅이 주장한 성서무오설은 완전축자영감설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2] Biblical inerrancy를 그대로 번역하자면 '성경의 무오류'라는 뜻이며, 국립국어원이나 국어사전 등에서 공식적으로 이걸 번역한 명칭은 없다. 일단 한국 인터넷 상에서는 임의적으로 '성서무오설'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일본어 위키백과의 경우는 '성경의 무오성'이라고 번역되어있다.[3]

실제 교회 현장에서는 축자영감설과 유기적 영감설 중 어느 하나만을 인정하고 엄밀히 구분하며 강조하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더라도 목회자마자 완전축자영감설과 유기적 영감설을 재량대로 혼용할 때가 많다.​[4] 다만 교파마다 경향성은 있는데, 일단 국내의 주류 교단인 장로회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쪽이 다수다.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더라도 부분축자영감설의 경우 성경의 문자적 오류를 인정하므로 성서무오설에 속하지 않음에 유의할 것.[5] 그래도 상당수 교회가 과학적, 역사적, 문화인류학적 증거들을 부정하고 자의적으로 평가하면서까지 완전축자영감설을 설파하는 것이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2. 완전축자영감설

  • Bible Literalism

성령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여 성경을 저술했다는 축자영감설의 주장을 성경 전문에 적용한 사상이다. 즉 성경의 종교적, 도덕적 메세지만 성령이 개입하여 집필했다는 부분축자영감설과 달리, 성경의 내용은 완벽에 한없이 가까우며, 과학 및 역사적 오류들도 현재 소실된 성경 원본에는 없다라고 주장하는 학설이다.

이 학설을 극단적으로 적용하는 계파의 경우 성서비평학 비판을 너머 신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성서해석학 모두를 거부한다. 심지어 남녀차별, 노예제 등 각종 악습도 '성경에 나와있으니 옳다, 안 나와있으니까 상관없다'는 주장을 펼칠 정도로 극단적인 근본주의로 치닫기도 한다.[6]

그러나 현재 전문적인 신학계는 완전축자영감설을 가치 있는 신학 이론으로 여기지 않는다. 성서의 원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며 성서의 기적을 재현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완전축자영감설[7]에 대한 논의가 각 교단 안에서 활발해졌고, 현재 진보적 성향의 개신교 언론기관들을 필두로 하여 완전축자영감설을 퇴치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국내의 많은 기독교 신자와 목사들은[8] 여전히 완전축자영감설을 지지하고 있으며, 일부는 오히려 완전축자영감설에 반대하는 신학자나 목사를 이단으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이들은 '성경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에 그렇다.

현대에 완전축자영감설은 미국 남부, 중남미, 아프리카의 개신교 성장세로 새로운 세력권을 확보했으며, 기독교 근본주의와 우파 반지성주의를 퍼트리는데 일조하고 있다.

3. 유기적 영감설

  • Bible Systematic

주류 기독교에서는 이 뜻으로 쓰이는 것이 훨씬 흔하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불러주는대로 받아적었다."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마음에 하나님이 감동을 주었다." 정도가 되는 의미이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오류 없이 가르쳐주는 책이다"는 의미로, 위에서 설명한 후자의 성서무오설이다. 비록 인간의 무지와 오류 때문에 성서에 과학적 엄밀함이나 역사적 정확성을 완벽하게는 기대할 순 없지만, 맥락적이고 유기적으로는 구원의 진리를 오류 없이 주장한다는 것.

그래서 가톨릭성공회뿐 아니라 성서해석학을 가르치는 주류 개신교 교단들에서도 이 무오설을 지지한다.[9]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성당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스티븐 호킹이 묻혀 있다는 점에서, 이들 교파의 입장을 가늠해볼 수 있다.[10] 기독교 역사나 전통의 측면에서 봐도, 아우구스티누스장 칼뱅이 주장했던 성서무오설도 이쪽이었다. 그들은 성경 구절 하나하나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철저히 경계했었다.

그리고 현대 성서무오설의 근본을 제공했다는 평을 받고 근본주의자들이 여전히 잘 써먹고 있는 미국 개신교 복음주의 목사 120명이 내놓은 "시카고 성명서"(Chicago Statement on Biblical Inerrancy)#에도 12번 아티클에 성경의 무오함은 하나님이 서명한 부분에 한정된다는 언급이 있다.

다만 같은 유기적 영감설이더라도 진화생물학·고생물학·지질학·천문학·천체물리학 등 일부 자연과학에서 밝혀 놓은 사실들에 대해서는 각 교단마다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다. 가톨릭과 성공회는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앞서 언급한 진화생물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의 분야들과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는 입장에 있다. 이들 교단에서는 과학계와 충돌해온 역사가 워낙 길고 이게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만 키운다는 걸 깨달은 경험도 많아서, 현재는 교리에 정면으로 충돌하지만 않으면 과학에 의해 조금씩 더 진리가 밝혀지는 것은 신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환영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반면 성서가 좀 틀리더라도 전통에 의지하면 되는 가톨릭과 성공회와 달리 성서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는 개신교의 경우, 보수적인 계파일수록 받아들이기 힘든 자연과학의 영역들이 많아지고, 이에 따라 자연과학과 신앙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카톨릭의 입장과 반대로 자연과학과 신학이 긴밀히 연계될수록 오히려 종교계가 자연과학계에 가르침을 월권하려는 시도가 더욱 많아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수성이 강하면 자유주의 신학신정통주의를 배척하기도 한다.

국내에서도 대개 학문적으로 진지한 기독교 진영은 완전축자영감설이 아니라 유기적 영감설을 지지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성경이 참이라는 부분만을 강조하다 보니, 성경이 참이 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여 일반 신도들은 이를 완전축자영감설로 이해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게다가 한국 기독교는 완전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교회가 사실상 주류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많고, 한국 복음주의 교단 특유의 근본주의반지성주의 분위기가 그런 불필요한 오해를 부추기는 측면도 있다.

현실적으로 유기적 영감설을 지지하는 교회라도, 교파를 떠나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인정을 하는 것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닌 것도 교회가 신자들에게 유기적 영감설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이유다. 진지한 학문적 고찰을 할 여유나 의지가 없는 일반 신도들에게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은 큰 혼란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령 성경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책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목사 혹은 신학자라 할지라도 설교 현장에서는 웬만하면 성경에 도덕적 오류가 없다 정도로 간단하게 말하고 넘어간다.

개혁신학 중에서도 정통주의 교회의 경우 성서무오설을 적극적으로 수호하고자 하며, 축자영감설과 유기적 영감설 중 하나를 지지하는 게 흔하다. 반면 신정통주의 교회의 경우 성서무오설을 견지하는 교회라면 유기적 영감설을 지지하고 성서무오설을 포기한 교회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한다.[11]

4. 성경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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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보기) 성경 내 상호모순을 나타낸 시각화 자료. 일반 상식과의 충돌이 아니라 성경 내에서 충돌되는 내용들만 적은 것이다.

아래의 비판들은 성서무오론 중에서도 주로 완전축자영감설에 대한 비판을 중점으로 다룬다.

4.1. 성서에 오류가 없다는 명제 자체의 맹점

성경무오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는 성경, 즉 원본이 될 성경은 불행하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발견된 것들은 성경의 사본들일 뿐이다. 신약성경의 경우 5600개가 넘는 그리스어 성경 사본들(전체 혹은 부분)과 1만개가 넘는 라틴어 사본, 그리고 500개 이상의 타 언어 성경 사본들이 존재한다. 가장 오래된 완성본 신약성경은 'Codex Sinaiticus'인데 여기에는 4세기에 경전에 포함된 두 권의 책이 빠져 있다. 신약성경의 가장 초기의 파편은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소장중인 'Rylands Library Papyrus P52'인데 2세기 중반의 것으로 추정된다. 사본을 비교해 보면 다양한 사본들 사이의 차이점이 약 20만개로 추정된다.

즉, 성서의 문자 하나하나가 완전히 무오하다는 주장을 하려면 그 기반이 되는 완벽한 성경이 존재해야 하는데, 그게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성서가 무오하다는 주장 자체가 첫걸음부터 허공에 붕 뜨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런 사실은, 백번 양보해서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성경에 대한 해석 방식을 인정한다 해도 여전히 큰 문제를 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자 한 획 한 획에 생명을 걸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보는 성경과 조금이라도 다른 단어나 문구를 쓰고 있는 더 앞선 시기의 사본이 발견된다면 그들의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허물어져 버릴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성서무오설의 맹점이다. 쉽게 말하면 이들은 삼위일체 하느님이 아닌, 그냥 "성경"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곳 자신의 성경 해석성경 그 자체에 대한 우상숭배로 변질된다는 것.[12] 다시 말해, 결국 이런 근본주의적인 태도(특히 완전축자영감설) 자체가 그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성경과 충돌하는 아이러니인 셈이다.[13]

설사 성경의 원본이 발견되었다 쳐도, 그것을 쓴 주체 역시 '사람'이라는 근본적인 오류를 벗어날 수 없다. 이는 곧 근본주의자들의 주장 자체가 휴먼 에러를 일절 감안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다시 성서무오설 자체가 오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경의 원본이 발견되든 말든, 근본주의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갖고 있는 '사본'만을 믿을 것이 뻔하다. 정말로 성경의 말씀을 신이 내려줬다 쳐도, 이를 옮기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성서무오설은 그 자체로 근본주의자들이 교만에 빠져 있음을 의미한다 볼 수 있다.

4.2. 과학 및 일반상식과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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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완전축자영감설을 주장하기에는 성경은 과학적,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사반(또는 오소리)도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토끼도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레위기 11장 5-6절
네 발로 걸으며 날개가 돋은 곤충은 다 너희에게 더러운 것이다.
레위기 11장 20, 23절[14]

토끼는 새김질을 하지 않는다.[15] 맹장에서 발효시킨 무른 똥을 다시 먹는 것이 새김질이라고 우기는 경우도 있지만 그걸 새김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반이나 오소리도 새김질을 하지 않는다. 항시 입을 오물거리는 습성을 자칫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곤충의 다리는 여섯 개이므로 네 발로 걷는 곤충은 거의 없다. 네 발로 걷고 날개가 달려 있다는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라면 네발나비[16] 정도가 있겠다. 설령 네 발을 이족이 아닌 모든 것으로 쳐도 날개가 없는 곤충, 곤충이 아닌 절지류(거미, 전갈, 등)라는 맹점이 생겨버린다.

또한 성서에 아예 없는 존재가 복잡한 문제에 얽히면 어떻게 따져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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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이 우리 8살 짜리 애한테 공룡 장난감을 줬습니다.

사실 좀 충격받았어요. 그 분은 자기가 기독교(개신교) 신자라고 말했는데, 성경은 공룡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잖아요. 우리 애를 공룡이 사실은 없었다고 알아챌 때까지 가만 놔 두어야 될까요? 심지어 우리 애가 보는 PBS[17]에서도 공룡과 진화, 그리고 과학자들이 어떻게 "화석들"을 찾았는지에 대해서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하느님이 그것들을 만들었다고 말하지도 않고, 지구는 6000년 밖에 안 되었는데 화석의 나이가 수백만 살이라고 말하고 있더라구요! 저는 사탄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고, 그 중 한 방법이 사람들에게 세상을 만든 하느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화석(石)인데 그게 뼈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18][19] 저는 아들에게 공룡은 사탄이 사람을 속이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고, 그래서 그 공룡 장난감을 갖고 놀기 전에는 하느님께 먼저 기도드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잘 하고 있는 건가요? 첫째, 둘째, 셋째가 전부 딸이어서 아들을 입양했는데, 많은 어머니들이 저에게 말하기를 남자애들은 공룡에 끌리는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하더군요. 그래서 전 이제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공룡을 갖고 노는 게 그냥 아무 상관 없는 일인가요, 아니면 이게 아들이 진화론을 믿게 하는 것이라고 걱정을 해야 할까요?

위의 예시에서처럼 대표적인 것이 진화생물학, 지질학, 고생물학과 관련된 공룡이다. 이런 경우 아예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골수파도 있고, 유사한 예시와 대응시키는 경우, 있다는 경우 등이 있다.

하지만 근본주의 기독교인 중에서도 공룡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존재하기는 한다. 욥기에 공룡으로 추정되는 동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공룡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대홍수 때 다 화석화 되었다고 믿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다. 이 두 종류의 사람 모두 미국 기준으로 시골이 많은 중부 지방, 특히 소규모 사립 기독교 학교에서 아주 많이 볼 수 있다. 전자는 그렇다 치고, 후자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과 공룡의 공생을 주장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베헤모스레비아탄(리바이어던)을 중점으로 하나, 성서무오설에 따른다면 이들은 인간과 공존하고 있어야 하므로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20] 통상적인 생명체라 생각할 수 없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 설령 억지로 공룡에 끼워맞춘다 쳐도, 베헤모스와 레비아탄은 각각 한 마리라고 써놨으므로 공룡 화석이 두 개를 넘는 순간 논파되어 버린다. 가톨릭에서도 이건 무의미하다고 사실상 단정지은 상태.
문: 공룡의 리바이어던 설이 맞다면 에서 을 토하는 수장룡이나 어룡이 과연 있었을까?
답: 만약 관측된 사실을 근거했다면 구전되는 중에 상상력이 더해졌겠죠.
문: 그럼 오류가 있는 거잖아?
답: (...)

참고로, 성경에는 고양이가 등장하지 않는다. # 고양이 말고도 너구리, 호랑이, 팬더 등의 동물들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공룡의 존재를 어거지로 끼워 맞추기 전에, 성경에 나오지 않는 이 동물들은 어떻게 현실에 존재하는지부터 고민해 보도록 하자.

물론, 동물 백과사전에 장미나 국화가 나오지 않는 것처럼 신의 연대기와 종교적인 문서를 다룬 성경에 특정 동물들이 굳이 등장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반박하는 의견은 충분히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 공룡이 나오질 않는데 화석만 보고서 공룡의 존재를 어떻게 믿어야 하냐고 먼저 선빵을 친 쪽은 성서무오설을 믿던 사람들이였고, 과거 지구상에 공룡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성경에 공룡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부정하거나 베헤모스와 레비아탄을 이용하여 어떻게든 성경에 공룡의 존재를 끼워넣으려고 시도했던 사람들 또한 성서무오설을 믿던 사람들이였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실제 역사와 상충되는 부분도 있다. 그 예가 바로 열왕기와 역대기에 묘사된 길르앗 라못 전투.

역대하의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남쪽 유대왕 예호샤팟은 직속 친위대만 116만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다른 성에도 군사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오리엔트 최강이었던 이집트가 전군을 동원해도 20만을 넘지 못했다. 고대 전쟁에서 100만이란 숫자가 언급될 경우 작게 잡아도 자릿수 하나 이상을 까곤 한다. 어느 문화권이든, 중세까지는 세력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수사학적 과장을 자주 사용해 기록했기 때문이다.

성서무오설이 대두되기 전까지만 해도 교회는 타 학문과의 모순을 인정하고, '과학과 역사는 창조된 세상의 비밀을 밝혀가는 것'이라는 관점 하에서 보았다. 물론 계몽주의 역사학이나 해부학 논쟁같은 진통이 있었지만, 유전의 비밀을 밝힌 신부나, 아인슈타인의 장 방정식을 연구해 우주의 급격한 팽창을 예견한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4.3. 성경 구절들 간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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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성경에 쓰여진 내용끼리 서로 충돌하는 부분만 분석했을 때도 439가지나 존재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아카이브/번역본

구약 성서의 열왕기와 역대기도 서로 간에 상충되는 내용을 쓰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요아스 왕을 옹립한 주체는 열왕기의 경우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회유에 넘어간 크레타와 필리스티아 용병들로 되어 있는 반면, 역대기는 레위인들로 구성된 성전 경비 병력으로 되어 있다. 둘 중 어느 한 쪽이 틀린 것이다.[21]

예수족보복음서마다 다르다는 모순도 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의 계보가 다른 족보라는 것은 웬만한 성서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성경 왜곡의 저자 바트 어만이 저술한 예수 왜곡의 역사 63쪽을 보면 루카 자신이 예수의 족보라고 밝히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3대를 빼버리는 등 무리하게 조작해서 어거지로 14대로 맞춘 마태오 복음의 족보를 가지고 이런 방식이 유대인들의 정통 족보 방식 운운하는 것은 무리이고 또한 여자를 가축취급했던[22] 전근대였던 만큼 그 시대에 살았던 저자가 여자의 족보를 적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이러한 모순들은 역사적인 측면에서는 과거 고대인들이 숫자를 중요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란 주장도 존재한다. 알다시피, 의무 교육이 부재했던 고대 일반인들은 산수를 더럽게 못해서 처음부터든, 아니면 필사 과정 중이던 오류가 생길 법도 하다.
1. "하느님은 사랑이다"(요한1서 4:8)
2.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고린도전서 13:4)
3. "너희들의 주인인 나는 시기하는 하느님이다."(탈출기(출애굽기) 20:5)
결론) 고로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하나하나 살펴보자면 위와 같은(...) 논리오류가 제시될 수도 있는 셈이다. 이런 식의 논리오류를 우스개로만 볼 수 없는 것이, 넓게 보자면 신천지에서 무슨무슨 비유라면서 성경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단어들을 짜집기해서 결국에는 이만희를 구원자로 만들어 놓은 것도 이런 류이다. 한 사람의 믿음과 삶이 송두리채 망가질 수도 있는 일이니 우습게만 볼 건 아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도 하나의 일화를 복음서 저자들이 각자 전해 들은 대로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그러면 루가의 복음서 저자가 이 일을 잘못 알고 복음서를 썼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때문에 현재 신학계에서는 어느 여인이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은 일이 두 번 이상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4.4. 극단적인 문자주의

성서무오설을 신봉하는 기독교 신자들 중에는 축자영감설을 뛰어넘어서 아예 "성경 속에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이미 예언되어 있다! 그러니 다른 책들은 볼 필요가 없고 오직 성경만 읽으면 세상의 모든 일들을 미리 알 수 있다![23]"라는 극단적인 문자주의(혹은 신비주의)를 신봉하는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어느 정도냐 하면 반도체,[24] 체르노빌 원전 사고, 기후변화, 환경 파괴, 걸프 전쟁까지 전부 성경 속에 예언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 1991년 걸프 전쟁이 일어나자, 수많은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 신자들이 "소련이 곧바로 이스라엘을 공격해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라고 난리법석을 떨었다.[25][26]

성경은 모든 진리가 다 들어 있는 책이라고 보는 이런 해석은 실제로는 성경은 '오늘날'의 진리만 다 들어 있는 책일 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성경이 이미 2천년 후의 일을 모두 미리 계시했다고 하면, 천년 전에 성경은 기독교도들에게 아무 메시지도 전해주지 않는 책이 되고 만다.

5.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

(영감설을 배제했을 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성경은 한 명의 저자가 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기술한 것을 하나의 책으로 묶어놓은 것이니, 서로 충돌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그 책을 수십 가지 언어로 번역하면서 생기는 문제도 적지 않다.쿠란이 번역을 금지한 것도 이런 경우를 경계했던 것이다.[27]

다른 예를 보자면 모세의 십계명은 '이것은 하느님이 하신 말씀이다'라고 매우 간략히 써놓아서 오류가 생기기 어렵다고 여겨졌지만, 예리코의 전투에서의 학살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율을 한순간에 깨먹었다. 사실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못한다.'에서의 '살인'은 'Murder'을 말하는데 'Murder'와 'Kill'은 처음 십계명이 작성되어진 히브리어로는 그 의미가 확연히 구분된다. 이것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마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반론] 사실 히브리어에서 의미하는 'Murder'은 아주 비도덕적인 이유로, 정당하지 못한 살인을 말하며 이는 반대로 말하면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 부분적으로 살인을 허용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즉, 가족과 민족, 국가, 또는 정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손에 피를 묻힌 자들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29] 허나, 살인에 대한 이런 해석은 위에서 말하는 '신의 뜻에 의한 학살'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어 십자군 전쟁의 명분으로 악용되었고 시오니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심지어는 같은 종교를 믿지 않으면 아니면 인간도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성서무오설에서는 성서 내부에서 "이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써진 것이며 한 점의 오류도 없다"라는 문구들을 발견해서 근거로 삼기도 한다. 순환논리라는 것을 넘어가더라도, 저 주장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이런 문장들이 말하는 '성경'의 범위가 지극히 애매하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말하는 '성경'은 대부분 구약(히브리성경)을 말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히브리어 성경은 서기 1000년경에나 성립한 마소라 텍스트이고, 그 전까지는 별의별 사본들이 난립해 있었다. 게다가 신약이 인용하는 구약은 보통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이었는데, 정통파 유대교인들은 이러한 번역본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또한 알아두어야 할 것은, 현재 발견된 가장 오래된 성서는 원본도 아니고 원본의 사본도 아닌, 원본이 작성된 지 수백 년 이후에 손으로 만들어진 사본이다.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았을 당시 성경의 사본을 만드는 방법은 일일이 손으로 베껴 쓰는 방법이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필사자의 미숙이나 실수로 인한 오탈자를 포함, 사본마다 서로 다른 점이 수없이 많다. 이 다른 점을 '이문(異文)'이라고 하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필사 과정에서 성서의 내용을 변화시키는, '이문을 만들어내는' 것을 '변개(變改)'라고 한다. 변개는 고의적 변개와 우연한 변개로 나뉘는데 '그럴 의도가 없음에도' 필사 과정에서 이문이 생기는 걸 우연한 변개라 하고, 본문 내용의 사실관계가 맞지 않거나[30] 문법의 어색함, 교리상의 문제로 수용 불가능한 구절이 존재할 때, 본문 내용만으로는 문장의 이해가 어려워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는 등의 이유로 변개하는 것이 고의적 변개이다. 이런 변개의 과정과 이문을 연구하는 학계에서 유명한 말이 바로 성서의 모든 낱말의 개수보다 이문의 개수가 훨씬 더 많다는 것.[31]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어떤 성경 사본도 100% 일치하는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성서의 원문을 복원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여기서 성서 말씀에 오류가 있다 없다를 따지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성서의 기초가 되는 문서가 생겨나기 시작했던 1~2세기엔 아직 세력이 미약하여 전문적인 필사 훈련을 받은 필사자가 아닌 글 좀 안다는 신자들이 만들었다. 그런데 문맹율이 90% 가까이 되었던 고대 사회였던 만큼 글을 좀 안다는 사람들도 그 수준이 높지 못하여 음절을 겨우겨우 구분하던 사람이 수두룩했던 만큼 애시당초 자질부터가 문제였고, 여기에 더하여 현재 같은 문장법도 없던 시대여서 지금처럼 물음표느낌표 같은 문장부호도 없었고, 띄어쓰기를 하지 않던 시대였던 만큼 이런 아마추어 필사자들이 남겼던 글이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더욱이 모음을 표기하지 않는 히브리어는 해석 과정에서 자잘한 오류를 빚기 쉬운 구조이다.[32]

거기에 초기 기독교 시대는 교리를 가르치는 성경 자체도 아직 확립이 안 된 시기였던 만큼 지금의 기독교 종파의 다양성을 뺨치게 수많은 종파가 있었고, 자연히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 많이 등장하는 '거짓 예언자' 식으로 서로간에 주도권 다툼이 심각했다. 이에 따라 자신이 믿는 종파에 맞추어 문서를 왜곡하고 변경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 후세에 이들이 남긴 문서로 '원본문' 좀 재구성해 보려는 학자가 애를 먹을 수밖에. 오죽하면 '성경 왜곡의 역사'의 저자 바트 어만이 자신의 저서에 현재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 공공연하게 '이제 원본문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접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돌고 있다는 말을 적을 정도.[33]

더욱이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성서본문연구에서 학자들은 후대에 첨가된 구절들을 밝혀냈는데, 요한의 콤마, 간음한 여인과 예수 마르코 복음서 16장 9절부터 끝까지의 부분이 대표적인 후대에 첨가된 구절들이다. 성서가 성령으로 쓰여졌으며 쓰여진 이후에도 성령의 힘으로 글자 하나하나까지 보존되었다는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자들의 말대로라면 도대체 왜 '인간의 숨결'이 들어가 있으며, 그들이 믿는 성령은 왜 처음의 원본이 변경되지 않도록 지켜주지 않았는지 정말 의문점이 생긴다. 즉 성서는 성서무오설 주창자들의 말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숨결'이 들어있는 문서라는 소리이다. 성서비평학에서 이런 문제들을 다루고 많은 신학교에서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추세이다. 그러나 일부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답이 없다.

유대교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있는데 토라라고 불리는 모세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은 모세가 신들려서 썼던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경전의 문자를 수비학적으로 조합하거나 치환하여 메세지를 만들어내려는 카발라 같은 비의도 유대교 내부에서 성행했던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상기 5권은 각각 서로 다른 계통의 전승을 가진 서로 다른 집단의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작성했던 문서들이 취합된 것임이 본문비평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34] 심지어 창세기는 그 본문 자체가 서로 다른 여러 전승의 짬뽕으로,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서로 전혀 다른 창조설화가 수록되어 있고 심지어 하느님을 일컬어 부르는 단어조차 다르다.

성서에 한 점의 오류가 없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같은 텍스트를 해석하는 사람들의 견해 차이 때문에 기독교 교파가 갈라진 것 아닌가 싶다. 극단적인 예로 레위기에 '피를 먹지 말라'는 율법이 있는데 여호와의 증인 등 일부 종파는 이를 확대해석해서 수혈도 안 받는다. 이들의 논리는 "알코올을 마시지 말라고 해서 그걸 수혈팩에 담아서 혈관에 꽂는 건 되는 건가?"라는 것. 물론 단백질, 철분 등으로 구성된 가 소화계로 흡수될 때와 순환계에 유입될 때의 결과물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며, 소화계에서 분해되지 않고 흡수되어 혈류를 타므로 순환계에 직접 유입시킬 경우 소화계를 통한 흡수와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알코올과 혈액의 경우도 무척 다르다. 게다가 누가 피를 섭식하자고 수혈을 하던가? 이러한 율법은 당시 타 종교들에서 피를 마시는 의식이 있었고 당시의 위생적으로 꽤 위험한 행위였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개신교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교회만이 성서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풍토였기 때문에 교리가 하나밖에 없었지만, 그 시절엔 정교유착이 심해서 더 문제였다.

율법들은 특히 이런 것이 심하다. 현대 관점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규칙이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35] 물론 그런 걸 일일이 다 지키고 사는 골수파 하레디도 없지는 않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정상적으로 살 수가 없다. 결국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성서 말씀을 대부분 실천하진 않는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여호와의 증인이건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취사선택하여 실천한다. 애초에 현대 사회에서는 지킬 수 없는 율법이 태반이라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가 없으며 상호 모순인 부분도 존재한다.

성서를 기반으로 참고해 보자면,[36] 율법은 처음부터 지켜질 수가 없었다.[37] 그래서 율법으로 인한 의인은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죽음으로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38]

히브리어, 그리스어로 쓰여진 원어 사본 뿐만 아니라 한국어, 영어 등 번역본에 대해서도 토씨 하나 하나까지 따져가며 극단적인 성서무오설 입장을 보이는 과격파도 존재한다. 한 가지 예로, 개역한글판에서 개역개정판으로 바뀔때, 여기에 극단적으로 빠진 몇몇 사람들은 "신의 말씀은 단 한 글자도 틀릴 것이 없는데 왜 (변개된) 개역개정판을 쓰냐?"며 반발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과거 한글판 성경들의 절대 다수는 히브리어 - 그리스어 - 라틴어 - 영어 - 중국어 - 한국어의 몇 단계나 되는 중역을 거쳤고, 이 과정에서 사람들 이해하기 쉬우라고 한국에는 없는 생물의 경우는 현지화까지 시켰기 때문에[39] 한국어 표기의 발음은 차치하고 대상 자체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다못해서 무오설 주장을 하고 싶다라면 이슬람교의 쿠란처럼 원전 경전을 원어로 읽으면서 무오설 주장을 해야 그나마 이해를 해줄 것[40]인데, 킹 제임스 성경환장하는 미국 근본주의자나 개역한글 성경만 물고 늘어지는 신천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익숙한 책만 진리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소설 원래는(How it happened) 역시 구조적으로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성경의 체계를 풍자하고 있다.

6. 성서무오설에 대한 기독교 내의 비판

10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묻자
11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12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사야가 일찍이,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하고 말하지 않았더냐?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나는 분명히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마태오 복음서 13:13-17
꾸며낸 이야기나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이 더러 있으니 그런 일을 못하게 하시오. 그런 것들은 쓸데없는 논쟁이나 일으킬 뿐이고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계획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내가 그런 일을 금하는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맑은 양심과 순수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목적에서 벗어나 길을 잃고 쓸데없는 토론만 일삼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교사로 자처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주장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장 4~7절 (공동번역)
하느님께서는 성경에서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방식으로 말씀하셨기에 성경 해석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성경 저자들이 정말로 뜻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며, 하느님께서 그들의 말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 깊게 연구해야 한다.

성경 저자들의 진술 의도를 알아 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문학 유형’들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본문에서 역사적, 예언적, 시적 양식 또는 다른 화법 등 여러 양식으로 각각 다르게 제시되고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자들은 성경 저자가 제한된 상황에서 그 시대와 문화의 여러 조건들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인 문학 유형들을 이용하여 표현하려 하였고 또 표현한 그 뜻을 연구해야 한다. 성경 저자가 글로써 주장하고자 한 것을 옳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널리 쓰이던 그 지방 고유의 사고방식, 언어 방식, 설명 방식 그리고 사람들이 상호 교류에서 관습적으로 사용하던 방식들을 면밀히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 쓰여진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성경 본문들의 뜻을 올바로 알아내기 위해서는 전체 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과 신앙의 유비뿐만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성경 전체의 내용과 일체성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 성경 해석자들의 임무는 이러한 규범에 따라 성경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하고 해석하도록 노력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어떤 의미에서 준비의 역할을 하는 연구로써 교회의 판단은 성숙하게 된다. 성경 해석에 관한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해석하라는 하느님의 명령과 그 직무를 수행하는 교회의 판단에 속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계시헌장12
대개의 경우, 지구와 하늘과 이 세상의 구성요소, 천체의 움직임과 궤도 그리고 크기와 상대적 위치, 일식과 월식의 예측, 일년과 계절의 순환, 동물과 식물 광물 등의 종류 등에 대해서는 기독교 비신자들도 많이 알고 있으며, 이러한 지식은 이성과 경험에 의한 명확한 것이다.

그런데, 비신자에게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의미를 앞세우며 그러한 주제에 관해 사리에 맞지 않는 허튼소리를 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위험한 일이다. 이는 기독교 신자의 엄청난 무식함을 드러내어 비신자들의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므로, 우리는 어떻게든 그런 창피한 상황은 막아야 한다.

그 수치는 단지 무지한 개인이 조롱받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믿음의 울타리 밖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신성한 성경 저자들 역시 그렇게 무식하다고 생각하게 하며,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힘들게 일한 것도 소용없이, 우리의 성경 저자들이 배움이 없는 이라 여겨져 그들에게 비판받고 거부당하게 될 것이다.

만약 비신자들이 자신들이 매우 잘 알고 있는 분야에서 기독교인들이 실수를 하고 우리의 성경에 대한 그런 멍청한 해석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경우, 비신자들에게 기독교인들의 경전이 자신들이 경험과 이성으로 습득한 것들에 대해 오류로 가득하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어떻게 죽은 자의 부활, 영생의 희망, 하늘의 왕국을 믿게 할 수 있겠는가?

경솔하고 서툰 성경 해설자들이 유해한 오류에 빠져 우리의 신성한 성경의 권위 밖의 이들에게 비판을 받는 것은 보다 현명한 그들의 형제들에게 전에 없는 곤란과 슬픔을 가져다 준다.

그럴 경우, 그들의 멍청하고 명백히 틀린 주장을 변호하기 위해, 그 증거로써 성경을 내세우고 심지어 그들이 기억하는 많은 문장들이 그들의 입장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하지만, "자기들이 말하는 것도, 자기들이 그토록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장 7절)"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 (A.D. 408)
"모세는 학문적으로 훈련이나 교육을 받지 않은, 평범한 상식을 지닌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방식으로 설명했다. 반면 천문학자들은 인간 지성의 예리함이 파헤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큰 노력을 들여 연구한다. 그러한 연구에 반감을 가져선 안 되며, 과학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이라면 생각 없이 거부하는 일부 광신도들의 오만으로 비난받을 존재가 아니다.

(중략)

모세가 과학적인 세부사항들을 생략했던 것은, 우리가 그러한 연구를 하지 않기를 바라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지성인이 아니라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인도하라는 소명을 받았기에, 그들의 수준으로 내려오지 않고서는 자신의 소명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만일 그가 군중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했더라면,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을 것이다. 사실 성령께서 모든 이를 위한 학교를 여실 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가르치신다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장 칼뱅, "창세기 주석" (A.D. 1540).
천문학을 배우려거든 성경 말고 딴 데 가서 알아보라.
장 칼뱅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대부분 이러한 제각기 속한 종교의 경전무오설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러한 경전의 내용은 문자 그대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쓰여진 사회와 문화, 그리고 그 시대 사람들의 사상 등의 맥락적인 부분을 이해해야만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음을 알자. 성서무오설이건, 유기적 영감설이건 최종적으로는 과학이 아닌 신앙의 영역에 있기에 무엇이 진리라고 할 수는 없지만,[41] 현실적으로 신자들 자신에게 있어서 바람직한 해석 방법은 자구 하나하나에 얽매이고 매달려 현재 처한 교회 혹은 개인의 상황에 맹목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담겨진 신의 교훈과 상징을 폭넓게 이해하고 아는 일이다.

이러한 관점을 기독교에서 유기적 영감설이라고 하는데, 성경 전체의 맥락과 논리 체계 안에서 성경이 참이라는 것이다.[42] 성경에는 당대인의 현상학이나 세계 인식이 있고 성경은 그것에 바탕을 두거나 그것을 깨면서 교류해 왔다. 그래서 성경이 당대인에게 이야기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것을 현상황에 비추어 나에게는 어떤 메시지가 되는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은 석의(釋義) 즉 그 말씀이 본래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찾는 행위라고 한다. 성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잘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서가 어떤 책이며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인지를 아는 일이 보다 중요한 것이다. 즉 결론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원래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을 파악하는 독해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제대로 하려면 언어 능력을 갖추고 외국어도 다 알아야 한다는 것. 다시말하지만 성경은 기독교(그리스도교)라고 불리는 종교의 경전이지 결코 역사책도 아니고 과학책도 아니다. 물론 축자영감설 지지자는 그런 거 없지만(...).[43]

쉬운 예로, 다윗의 고백이 담긴 유명한 시편 구절을 보자.
나의 힘이신 야훼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야훼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구원하시는 이, 나의 하느님 (공동번역)
시편 18편 1-2절 중
이를 문자대로만 해석하자면, 야훼는 암석의 한 종류가 되고 기독교는 바위 같은 것을 섬기는 종교가 된다. 또한 야훼는 요새라는 장소가 되고, 기독교는 특정 장소를 신으로 섬기는 이상한 종교가 되는 것이다. 성경 모든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이렇게 쉽게 설명된다.

물론, 아무리 성경을 문자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런 우스꽝스러운 해석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기준으로 어떤 구절은 문자대로 해석하고, 어떤 구절은 은유와 상징으로 보는가? 성경을 문자대로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자의(자신의 이익이나 성향)에 의해 선택된 구절에 대해서만 문자적 해석을 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성경을 그들이 그렇게 경계하고자 했던, "자기 맘대로 해석"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문자적 해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누구든지 글을 읽을 때에는 문자적 해석을 제일 먼저 하게 된다.[44] 다만,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뛰어 넘어 성서 저자의 의도,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되는 부분에서 문자적 의미만을 고집하는 것이 문제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고 싶은 특정 구절에 대해 다른 해석은 전혀 들으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주장만을 펴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또한, 이렇게 극단적인 문자적 해석을 주장하는 부류들에서 흔히 보이는 "나는 성경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으니 다른 불순한 것을 들이대지 말라"는 식의 자세는 지양해야 한다. 상대방 의견의 불순/순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자신의 성경 해석을 성경 자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큰 교만이다. 자신의 성경을 읽는 방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항상 겸손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성경무오설의 근거를 제공했다는 평을 받는 칼뱅조차도 성경의 무오성은 신앙적인 관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뱅 문서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사회적, 과학적, 문화적으로 담고 있는 성경의 수많은 내용에 대한 사실 여부를 믿느냐 안 믿느냐보다는 성경이 담고 있는 신학적인 진리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역시 유기적 영감설과 연결지어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 내에서도 비판 받고 있지만, 정작 국내 기독교에서는 주류다.
WCC와 국내 개신교 분열에 핵심적이었던 키워드였지만, 현재는 완전축자영감설까지 지지하는 교단이 더 덩치가 크고 교인이 많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침례회은 성경무오설과 완전축자영감설을 강력히 지지한다.
가톨릭, 성공회, 감리교,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은 성경무오설은 인정하되 완전축자영감설은 거부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존중은 하지만 성경비평학을 따르고 있다.

7. 관련 문서



[1] 이런 의미의 성서무오설에 의하면, 진화론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신앙과 모순되지는 않는다고 해석된다. 카톨릭, 성공회, 침례회를 비롯해 세계의 주류 기독교 교단들은 성서무오설을 지지한다고 해도 주로 이런 입장이다. 물론 대다수의 장로회 소속 교회들처럼 주류 교단 중에서도 완전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게 일반적인 교단이 있기는 하다. 문제는 한국 주류 개신교 교단이 장로회이기에 많은 논쟁이 벌어진다는 것.[2] 다만, 이들의 교리를 계승한 교단들은 축자영감설을 지지할 수도 있다.[3] 위키백과가 번역어를 멋대로 정해버리고 그게 널리 퍼지게 되는 사례는 의외로 흔한데, 가령 한국어 위키백과에서 어떤 유저가 Micronation 를 '초소형국민체'라고 번역한 게 언론을 통해 퍼진 사례가 대표적이다.[4] 이러는 이유는 사실 목회자들 입장에서도 어느 쪽이 진실인지 모르고 알 수도 없기 때문이며심하면 아예 관심을 껐거나, 결국 각 주차 설교의 테마마다 신도들이 이해하기 가장 쉬운 방향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논리를 중시하는 신도들이 혼란을 겪을 때도 자주 있으나, 애초에 고대에 쓰여진 종교 경전에 대해 모든 것에 확신을 갖고 말하기란 불가능하다.[5] 한국기독교장로회처럼 신정통주의를 받아들인 쪽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유기적 영감설의 방향으로 설교를 하기도 한다. 신정통주의는 성서무오설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보수적이더라도 완전히 유기적 영감설로 돌아섰으므로, 이는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국내 장로회 중에서도 가장 예외적인 축에 속한다.[6] 물론 이건 해외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입장이고, 국내에도 완전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교회가 많기는 하나 이단 수준이 아니면 이정도까지 수구적인 주장을 펼치는 경우는 없음을 유의할 것.[7] 성서문자주의[8] 신학자가 아니다.[9] 감리회, 성결교회, 오순절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루터교회, 구세군, 복음교회, 초교파. 애초에 완전축자영감설과 개신교 정통 교리문답서는 양립할 수 없다. 의외로 천주교와 개신교와 정교회의 중요 교리들도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누구보다도 성경을 자주 사용하기에 성경의 형이하학적인 오류를 가장 많이 체감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다루고 있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이 기독교 신앙과 충돌하지 않거나, 최소한 형이하학의 관점에서 신앙적 관점을 온전히 해석할 수 없다고 보는 것.[10] 신이 창조한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려고 했기에 비록 신앙은 없었지만 존경할만한 사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11] 애초에 자유주의 신학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신정통주의이므로, 편견과 달리 자유주의 신학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신정통주의 교단은 없다. 다만 자유주의 신학의 장점을 받아들여 성서비평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12] 물론 만약 그게 원본과 100% 동일하다면 모르겠으나 이전에도 언급했듯 원본이 없다는 게 문제이다.[13] 성경의 사본들만 있는 상황에서도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이 저렇게 강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보면, 성경의 원본이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를 일이다.[14] 비슷한 구절이 반복되어 있으나 강조하기 위하여 한 번 더 언급한 것에 불과하다.[15] 과거에 토끼가 되새김질을 한다는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는 내용이 추가되었지만 내용의 출처가 전문 학술지가 아닌 창조단체의 사이트임이 밝혀졌었다. 뭔가 있어 보이게 하려고 전문용어를 끌어다 썼지만 결국 자기 똥 먹으니 되새김질이라고 우기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16] 그런데 네발나비는 다리가 6개인 나비가 앞의 2개의 다리가 효율이 낮다고 퇴화시키고 있는 과정에 있다. 다른 2쌍보다 짧은 앞다리 2개가 아주 특수한 용도로만 사용되기 때문이다.[17] 우리 나라로 치면 KBS+EBS쯤 되겠다. 공영방송으로 KBS와 비슷하면서 기초적인 상식 정도의 교육적인 내용을 다룬다는 점에선 EBS와 닮았다.[18] 그러니까 쉽게 설명하면, 돌 들고 와서 뼈라고 우긴다(...) 이 말이다.[19] 사실 돌이 맞기는 하다. 화석이란 게 생물의 몸 중 잘 썩지 않는 부분(그러니까 주로 뼈. 하지만 가끔 그 외의 조직도 화석이 된다.)에 광물이 자리바꿈하여 생긴 것이다. 생물의 골격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돌멩이가 맞다. 그렇다고 저 주장이 맞는 건 아니지만(...).[20] 이런 증거를 무시하고, '있는데 발견을 못한 거임!'이라는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21] 역대기는 포로기 이후 다분히 유대 민족주의적인 입장으로 다시 쓰인 사서기 때문에, 대체로는 열왕기가 더 사실에 가깝다고 본다.[22]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사람의 수를 셀 때, 여자는 넣지 않았다. 한 마디로 여자를 사람 취급도 안 했던 것이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문화였다(...)[23]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성경의 구절에 현재의 시대 모습을 억지로 꿰어 맞추어서 "성경에서 이미 2천년 후의 일을 모두 미리 예언을 했구나!"라며 엉터리 해석을 하는 것에 가깝다. 미리 결론부터 정해 놓고 답을 끼워 맞추는 꼴.[24] 성경 속에 나오는 "그들은 돌에 금과 은을 입힌 것에 절을 하고 숭배한다."라는 구절을 가리켜 "이건 반도체다!"라고 요란을 떠는 것인데, 그러나 성경 속에 언급된 그 내용은 고대 중동에서 신봉되던 신들의 우상을 가리키는 것이지 무슨 20세기에 와서 생겨난 반도체가 아니다. 구약성경을 집필하던 저자들이 과연 자신들의 시대로부터 수천 년 후의 반도체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도대체 타당하기나 한가?[25] 하지만 이런 주장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억측에 불과했는데, 1991년 당시 소련은 경제가 완전히 파탄난 상태라서 도저히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군사 작전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이는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 신자들이 국제 정세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26] 한국 개신교의 주류가 성서무오설을 따르다 보니, 이런 문자주의를 신봉하는 신자들도 상당히 많다.[27] 쿠란 또한 '의미의 번역'이라는 식으로 사실상의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번역의 금지는 아랍어 원본의 절대적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렇게 하면 번역으로 인한 와전은 좀 더 줄일 수 있겠지만 쿠란 역시 역시 오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반론] 영어에서도 murder와 kill의 의미 차이는 구별된다. murder는 '고의적인 살인'을 의미하고, kill은 좀 포괄적인 의미로서의 '죽임'이다. 연쇄살인범이 부녀자들을 죽인 것은 murder이지만, 특수부대원이 테러범을 사살하는 것은 murder가 아니다.[29] 그래서 참전용사, 독립투사 분들은 전쟁범죄 같은 게 아니라면 이런 이유로 그 죄를 짓지 않았거나 죄를 사함받았다고 여겨진다. 성경에서도 사사기의 사사들은 직접 계시를 받아 외적들을 깨뜨린 영웅들이 대부분이고 가장 마음에 합한 자라는 평을 받은 다윗도 그렇다.[30] 예를 들어 마가복음 1장 2-3절에 언급된 예언자 이사야의 글은 이사야서에 기록돼 있지 않고 실제로는 말라기 3장 1절을 인용한 것이다.[31] 단순한 필기 오류는 어지간히 엉망으로 적지 않는 한 금방 발견할 수 있고 독자 역시 쉽게 걸러낼 수 있지만 이념의 차이로 벌어지는 이문은 특성상 아주 교묘하기 때문에 쉽게 잡아낼 수 없다.[32] 모음표기가 없다는 것은 셈족 계열 언어의 특성을 이해해야 될 필요가 있다. 셈족 계열 언어는 근대까지도 모음 표기 규칙이 없었을 정도로 모음 배치에는 규칙성이 있다. 여기에 더해 모음은 동일 어근에 대해서 소소한 의미 변화를 일으키는 정도에 그친다. (아랍 문자 참고) 일례로 현재 아랍어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모음 표기를 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직관은 어디까지나 현대어에 대한 것으로, 역사적 시간이 지나면 모음 발음 규칙도 변화하므로 내용의 이해가 좀 더 어려워진다.[33] 하지만 그럼에도 원본문 재구성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는 데 주의하라. 진담이 아니라 원본문 재구성 연구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원본문 재구성은 그럼에도 여전히 의미는 깊다.[34] 모세가 썼다는 이른바 '모세 5경'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비판점 중의 하나는 신명기 34:1~12에 모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걸 모세가 썼다는 것이 경전에 나오지는 않기 때문에 간단한 땜질만 하면 해결되는(대표적으로 '그 부분만 다른 사람이 썼다'는 식으로), 비교적 쉬운 문제에 속하기도 하지만, 성경에 대한 인식과 관념이 얼마나 쉽게 왜곡되는 것인지 - 그런 것이 없었다면 '모세 5경은 모세가 썼다'는 널리 퍼진 상식의 오류 자체가 생겨나지 않았을 테니까 - 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35] 〈미친 척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본 1년〉이라는 책에 잘 정리되어 있다. (리뷰)[36] 개역개정판 기준[37] 갈라디아서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38]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39] 예를 들어서 당시 동아시아에 들어온 적도 없는 피스타치오의 경우는 유향나무나 (일본과 제주도 원산인) 비자나무 열매로 기록되어 있다.[40] 위에서는 도진개진, 50보 100보라고 하겠지만, 엄밀하게 50보 도망간 놈과 100보 도망간 놈은 중역의 문제 같은 것까지 고려하면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다.[41] 성서무오설이 상식적으로 아무리 비합리적이고 현대 신학에서 배척받는다 하더라도 '신은 항상 옳다.'는 주장은 이성이 아닌 믿음의 문제다.[42] 대개 학문적으로 진지한 기독교 진영은 문자적 영감설이 아니라 유기적 영감설을 지지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성경이 참이라는 부분만을 강조하다 보니 성경이 참이 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여 일반 신도들은 실제로 유기적 영감설을 배워 놓고 문자적 영감설을 주장하다가 키배에 말리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특히 이러면 배워서 믿는 것과 주장하는 것이 달라서 논쟁이 감정적으로 격해지거나 난타당하기 쉽다. 한국 기독교 현장에서 주장하기 쉬운 반지성주의가 그런 경향을 부추기는 경우도 많다.[43] 단 성경이 역사적으로 조금도 가치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 왕국 연구에서는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위에서 수준이 낮다고 하지만 엄연히 당시의 지식인들이 서술했고 종교적인 내용이 깃들어 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당시 지배자들을 사정없이 까서 약간의 공정성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즉, 신뢰성은 크게 많진않으나 아예 역사적 사료의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좀더 부언하자면, 성서 내의 열왕기나 역대기같은 이스라엘, 유다 왕국의 역사를 다루는 책들은, 각 왕국의 실록을 원사료로 하여 그것을 종교적, 신학적으로 해석한 텍스트들이다.(성서 본문에 '실록'을 참조했음을 밝히고 있다.) 원래 역사 연구 방법론에 따르자면 1차사료가 되어야 할 이 실록들은 지금 완전히 소실되었으니, 고대 이스라엘사 연구에서 남은 방법은 그것을 재해석한 성서 본문을 보면서 발굴된 고대 비문 등과 최대한 대조하여 재구성하는것뿐이다. 그리고 다소 과장이 들어간 부분이 있으나 이스라엘 왕조 중반기쯤 되면 성서 기록과 주변국의 비문 등에서 발견된 기록이 그럭저럭 일치하는 경우도 제법 많다.[44] 은유나 상징도 문자적 의미를 토대로 쌓아지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문자적 해석을 한 후 들어가게 된다. 글을 읽으면서 문자적 해석을 거치는 과정을 의식할 수도 있고,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