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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르메트르


<colbgcolor=#000><colcolor=#fff> The Reverend Monsignor
조르주 르메트르
Georges Lemaître
RAS
파일:Georges_Lemaître_1930s.jpg
본명 조르주 앙리 조제프 에두아르 르메트르
Georges Henri Joseph Édouard Lemaître
출생 1894년 7월 17일
벨기에 샤를루아
사망 1966년 6월 20일 (향년 71세)
벨기에 뢰번
직업 사제, 천문학자, 교수
학력 뢰번 가톨릭 대학교 (수학 / 박사)(1920)[1]
Maison Saint Rombaut 신학교 (신학 / 학사)(1923)[2]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 에드먼즈 컬리지 (천문학 / 석사)[3]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물리학 / 박사)(1927)[4]
수상 프랑키 상 (1934)[5]
에딩턴 상 (1953)[6]
종교 가톨릭
명예 직위 몬시뇰 (1960 임명)
교황청 과학원 원장 (1960-1966)
복무 제1차 세계 대전 벨기에군 포병 상사 (1914-1918)[7]
주요 전투 안트베르펀 방어전[8]
이제르 강 전투[9]
이프르 전투
주요 서훈 La croix de guerre(벨기에 무공 훈장) (1918)
with Palms (1921)
서명 파일:Georges_Lemaitre_signature.jpg
1. 개요2. 생애3. 아인슈타인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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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기에가톨릭 사제이자 천문학자다. 에드윈 허블 이전에 먼저 우주의 팽창과 빅뱅 우주론을 최초로 발표하였다.

2. 생애

벨기에 샤를루아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성공한 직물공 아버지를 둔 가정에서 4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예수회가 운영하는 칼리지 졸업 이후 뢰번 가톨릭 대학교토목공학 전공으로 1911년 17세의 나이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곧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조르주 르메트르도 1914년 동생 자끄 르메트르와 함께 자진 입대하여 벨기에군 포병 상사로 복무, 안트베르펀 방어전과 이제르 강 전투 등에 참전하여 벨기에 십자 무공 훈장까지 수훈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상사로 복무 중 이프르 전투에서 혹독한 참호전과 독일군의 독가스 살포를 겪고 전쟁 중 목격한 인간의 고통과 잔혹한 세태를 보며 자신의 신앙을 다시 굳게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입대 이전부터 종교 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사제의 길에 헌신을 할 것인지, 또 예수회 수도 사제가 될지 교구 사제가 될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 결국 교구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다. 전쟁 중 친구 요리스 반 세베렌에게 1916년에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종교에 더 헌신해야 한다는 부름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또한 과학에 대한 관심도 절대 놓치 않아서 참호전 중에도 휴식할 기회만 있으면 앙리 푸앵카레의 수학 및 물리 서적을 틈틈이 탐독하였다. 이 와중에 순수과학에 대한 관심이 생겨 전후 전공을 물리학수학으로 바꾸어 졸업한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세계 대전 때 다짐한 바와 같이 교구 사제 과정에 진학하여 1923년 어린 시절 다녔던 예수회가 아닌 교구 사제가 되었다.

물리학/수학 학사 학위 취득 및 가톨릭 사제가 된 이후 조르주 르메트르는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 당 대학 천문학 교수였던 아서 스탠리 에딩턴의 연구 조교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한다. 이 시기부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천문학에 적용하려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MIT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할로 섀플리 지도 하에 학위를 마친다. 일련의 과정에서 아인슈타인의 장 방정식을 천문학에 적용할 아이디어와, 우주가 팽창한다는 실질적인 증거들을 확신하게 된다(은하간의 거리 등).

벨기에뢰번 가톨릭 대학교에서 천체물리학을 가르치던 르메트르는 1927년 즈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장 방정식의 해(다양체의 계량)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주의 팽창이 수학적으로 가능함을 보였고, 허블의 법칙을 유도했다.(소련알렉산드르 프리드만도 비슷한 시기에 독립적으로 오늘날 르메트르-프리드만-로버트슨-워커 계량으로 알려진 해를 연구했다.) 관측을 통해 팽창의 증거를 실제로 확인하고 허블 상수를 계산한 것이 2년 뒤의 허블이며, 후에 르메트르는 이를 발전시켜 빅뱅 이론(더 나아가 우주의 가속 팽창)을 제안한다. 조지 가모프 역시 비슷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르메트르의 회상에 따르면, 허블의 관측 전 열린 학회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나 이야기했을 때 그는 "수학적으로는 가능하나, 물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프리드만이 비슷한 계량을 얻었다는 소식도 르메트르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허블의 발견이 알려진 후에 아인슈타인은 르메트르의 결과를 공개적으로 인정했고, 에딩턴과 함께 미국에 그의 연구가 알려지도록 힘을 썼다.

그러나 당시 우주론의 주류는 정적 우주론이었고, 그가 주창한 빅뱅 이론이 창세기천지창조 곧 ‘빛이 있으라’를 연상케 하는데다 하필 르메트르가 가톨릭 사제였기에, 빅뱅 우주론은 당시 과학계의 심정적 저항을 크게 받았다.[10] 이에 르메트르는 성직자였지만 "과학으로서의 우주론과 신앙으로서의 창조는 전혀 연관이 없으니 선입견을 갖지 말아 달라."라고 과학계를 설득했고, 교황 비오 12세가 자신을 밀어주는 것도 난감해 하면서 "빅뱅 우주론과 신앙을 연관짓지 말아달라."라고 교황청에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 허블이 우주팽창의 발견으로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되었고, 르메트르의 논문[11]도 1931년에 영어로 번역됐다. 그런데 르메트르는 이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우주 팽창과 관련된 부분을 빠트렸다. 여기에 대해서는 르메트르가 논문 편집자에게 보낸 코멘트가 있는데, 허블 법칙과 관련된 부분은 본인이 생각하기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번역하지 않았다는 것. 영어 번역본은 '허블이 이미 인기 스타가 된 뒤인 1931년에 나왔기 때문에 이미 널리 밝혀진 사실을 다시 쓸 필요가 없다'고 본인이 판단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과학적 발견을 하는 데 첫 번째 발견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의 발견은 비교적 덜 알려진 채, 허블만이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뒷사정으로 인해 현대에도 몇몇 학자들은 "허블 법칙을 허블-르메트르 법칙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2018년 10월 26일 국제천문연맹(IAU)은 모든 회원들의 전자 투표 결과 78%의 찬성을 얻어 허블의 법칙을 '허블-르메트르 법칙'으로 바꿔 부르기로 결정하였다.[12]

르메트르는 후에 교황청 과학원장까지 역임하였으며, 1960년에는 요한 23세 교황으로부터 몬시뇰로 임명된다. 20세기의 가톨릭 교회가 자연과학계를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전향적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
La science est belle, elle mérite d’être aimée pour elle-même puisqu’elle est un reflet de la pensée créatrice de Dieu.
과학은 아름답습니다. 과학은 하느님의 창조적인 생각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사랑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조르주 르메트르의 평소 생각이자 장례식 문구 중 일부##

3. 아인슈타인과의 관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정적인 우주를 열렬히 지지한 대표적인 학자이다. 때문에 그는 동적 우주론을 주장한 학자들을 정말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그 대상에는 르메트르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동적 우주론을 최초로 주장한 소련수학자알렉산드르 프리드만의 저서를 읽고 비판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르메트르가 6차 솔베이 회의를 끝내고 학회장을 나서는 아인슈타인을 붙잡고 동적 우주를 주장한다. 위에 상술한 바와 같이 아인슈타인은 르메트르의 이론이 계산적으로는 맞지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비판했는데, 이때 끔찍하다는 표현을 곁들이며 르메르트를 정말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나중에 허블에 의해 동적우주론이 옳았음이 확립되고 르메트르가 UCLA에서 강연을 할 때, 강연이 끝나고 그 자리에 있던 아인슈타인은 벌떡 일어서서 "내가 우주의 탄생과 관련해서 들었던 이론 중 가장 완벽한 이론"이라며 극찬을 했다고 한다. 이후 아인슈타인과는 다소간 불편하지만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고 알려진다.
[1] 원래 토목공학을 전공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복무 후 이론물리학으로 전과했다. 수학자 샤를장 드 발레푸생# 지도 하에 '여러 실변수 함수의 근사'라는 논문으로 Doctorate degree를 받았다.[2] 추기경 Désiré-Joseph Mercier에 의해 수품되었다.[3] 당교 천문학과(Institute of Astronomy)의 전신 중 하나인 태양물리학 천문대(Solar Physics Observatory)에서 아서 스탠리 에딩턴 산하로 공부했다.[4] 이 때 하버드-스미소니언 천체물리학 센터(Harvard-Smithsonian Center for Astrophysics, CFA)의 전신 중 하나인 하버드 대학교 천문대(Harvard College Observatory)에서도 일했다. MIT, CFA, 하버드 셋 모두 보스턴 근교 케임브리지 시에 옹기종기 몰려있어서 가능한 일. 할로 섀플리가 지도교수였다.[5] 추천자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뢰번 가톨릭 대학교 지도교수였던 수학자 샤를장 드 라 발레푸생 등 이었다. 참고로 심사위원은 통계 역학으로 유명한 폴 랑주뱅과 케임브리지 지도교수 아서 스탠리 에딩턴 등이었다.[6] 영국왕립천문학회에서 수여하는 영국 내 천문학 최고의 상으로 초대 수상자였다.[7] 미군 Master Sergeant 대응#[8] #[9] #[10] 당시 주류였던 정적 우주론은 "우주는 예전부터 그 상대 그대로 변함없이 그대로일 것"이라는 이론이기 때문에,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개념은 창조론자들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현대의 편견과는 반대로 "우주가 만들어진 시점이 있다"는 이론인 빅뱅은 사람들에게 성경천지창조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주의 팽창이 발견된 이후에도 우주에 '시작'이 있다는 생각이 탐탁찮았던 일부 학자들은, 대안으로 정상우주론을 주장하게 된다.[11] 참고로 그의 논문은 《일정한 질량을 갖지만 팽창하는 균등한 우주를 통한 우리 은하 밖의 성운들의 시선 속도의 설명(프랑스어 원문:Un Univers homogène de masse constante et de rayon croissant rendant compte de la vitesse radiale des nébuleuses extragalactiques)》이라는 상당히 아스트랄한 제목을 가지고 있다.[12]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냥 무시하고 '허블의 법칙'이라고 계속 부르고 있다. 명왕성 퇴출 이후 미국은 국제천문연맹과 사이가 좋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