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3 16:49:08

오스트리아-세르비아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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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세르비아

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근세2.2. 19세기2.3. 20세기2.4. 21세기
2.4.1. 2010년대
3. 문화 교류
3.1. 스포츠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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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세르비아의 관계에 관한 문서.

2. 역사적 관계

2.1. 근세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역사적 관계는 합스부르크 가문오스만 제국과의 대 튀르크 전쟁을 겪은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한때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세르비아를 점령하였던 바 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1683년 이후 유럽을 침공한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제2차 빈 전투를 통해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빼앗겼던 헝가리의 영토를 회복시키기는 했지만, 결국 헝가리 영토는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넘어갔으며 1699년에 있었던 스렘스키 까를로브찌(Sremski Karlovci) 조약을 통해 이전에 헝가리가 지배하고 있던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지역 역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만다. 스렘스키 까를로브찌는 다뉴브 강 인근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1699년 이후 ‘보이나 크라이나(Vojna krajina, ‘군사접경지역’이라는 의미)’라는 이름으로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이어주는 군사적·상업적 요충지로써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보이보디나 지역에서 세르비아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문화적 정체성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갖게 되었으며, 현재 세르비아의 제 2의 도시인 노비 사드 또한 19세기 세르비아 문화의 활동중심지로써 커다란 역할을 맡게 된다.

1699년 합스부르크와 오스만제국이 체결한 스렘스키 까를로브찌 조약은 전체 유럽의 세력균형에 중대한 변화를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이 양대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일부 남슬라브 민족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조약에 따라 과거 오스만제국 지배지역이었던 헝가리, 트란실바니아슬라보니아 그리고크로아티아 일부지역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이 증대되었고, 발칸지역에서 많은 영토를 상실한 오스만제국은 서서히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여간다. 1718년 포쟈레바쯔(Požarevac)조약에서 오스만제국은 합스부르크에 베오그라드를 포함하여 일부 세르비아 지역을 더 양보하여야했다. 비록 1739년 베오그라드 조약에 의해 사바-다뉴브 강의 남부지방에 속해있던 지역이 다시 오스만제국에 양도되긴 하였으나 합스부르크는 계속해서 보이보디나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고 이후 오스만제국은 다시는 사바-다뉴브강을 넘어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였다.

과거 오스만제국의 압제를 피해 스렘스키 까를로브찌를 포함한 이 지역으로 이동해 온 세르비아의 후손들은 고유한 세르비아 문화를 이곳에서 다시 발전시킬 수 있었다. 특히 프루슈카 고라(Fruška Gora) 지역의 정교회 사원들은 19세기 초에 벌어진 세르비아 혁명의 시발점이자 근대 세르비아 르네상스의 발원지였고, 결과적으로 근대 세르비아 독립국가 수립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791년 스렘스키 까를로브찌에 최초의 세르비아 김나지움이 설립되었으며 이곳에서 배출된 다수의 세르비아 지식인들은 훗날 근대 세르비아 국가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스렘스키 까를로브찌는 16세기 이래로 세르비아 민족의 종교문화를 상징하는 곳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1690년 세르비아 민족이 오스만-투르크 제국 군대의 공격을 피해 북쪽으로 피난을 떠났을 때, 이곳은 세르비아 주교구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기도 했다.
합스부르크 제국과 세르비아의 민족문화 정체성 형성

2.2. 19세기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동시대적인 지배 상황은 의식 있는 세르비아 지식인 계층으로 하여금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해야만 한다는 절대적인 사명을 부여하는 동인(動因)으로 작용했다. 4백 여 년 동안 피지배의 상황속에 있으면서 ‘민족’이란 개념에 무지했던 세르비아 민중들을 교화하기 위해 세르비아의 계몽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은 독일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민족’과 ‘민족주의’ 개념을 받아들였고, 민중들에 대한 교화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언어의 개혁과 세르비아 민속 문화에 대한 관심을 선택했다. 제 1차 세르비아 혁명이 실패하고 난 이후 세르비아를 탈출해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새로운 사상을 접한 부끄 스테파노비치 까라지치(Vuk Stefanović Karadžić, 1787-1864)는 지배세력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무지한 민중들을 계몽할 수 있는 방법으로 언어 개혁을 선택한 것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중심지였던 오스트리아의 에서 슬로베니아의 학자 예르네이 꼬삐따르(Jernej Kopitar, 1780-1844)를 만나면서부터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적인 사상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부끄 까라지치는 민중어와 민중들이 영위하는 삶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민족문화가 지니고 있는 중요성을 깨우치게 되었으며, 세르비아로 돌아온 이후에는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지역을 중심으로 계몽주의와 고전주의를 이끌었던 쥬라 다니취치(Đura Daničić,1825-1882)와 함께 세르비아의 언어개혁에 앞장서게 된다. 그는 1818년에 세르비아어 문법이 포함되어 있으며 하층민들이 사용하는 어휘들에 기반하고 있는 『세르비아어 사전(српкси рјечник)』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구비문학의 각 갈래들에 걸쳐 수많은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채록하고 이를 발간하기에 이른다.
Ibid

그러나 대타협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와 대치 관계에 놓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대신 가까운 남동유럽을 식민화하려 하였다. 헤르체고비나 일대의 가톨릭교도들이 오스만 제국 관리들의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해 몬테네그로 공국, 그리고 오헝제국의 달마티아 왕국으로 난민이 되어 흩어지자, 오헝제국은 해당 사태를 방치할 경우 세르비아 왕국 측이 보스니아를 차지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한다. 한편으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세르비아 나머지 지역에서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결과 세르비아 왕국(1882년~1918년)이 독립하고, 양국은 서로 수교하였으나, 범슬라브주의대독일주의의 충돌이 연장선상에서 서로 갈등을 지속하였다.

2.3. 20세기

발칸 전쟁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알바니아의 독립을 지원하였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놓고 서로 대립하였고, 1908년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면서 양국의 긴장관계는 더욱 고조되었다. 결국 세르비아 출신의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헝제국의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암살한 사건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거대한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세르비아 왕국은 1914년 7월 26일부로 동원령을 선포하였으며, 이틀 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한 후 침공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전포고를 한 당일, 세르비아의 총사령관 라도미르 푸트니크 장군은 부다페스트에 머물고 있었고 합스부르크 총참모부는 그의 즉각적인 체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단기간 승전에 자신감이 있었던데다가 당일 체포가 신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여 특별 열차를 동원하여 그를 베오그라드로 데려다주었다. 라도미르 푸트니크는 세르비아 귀국 이후 바로 전쟁을 준비하였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장기화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양국 간 국력 차이 때문에 당시 노령의 세르비아 국왕이 직접 최전선에서 전투를 지휘해야 할 만큼 상황이 급박하였고, 수도인 베오그라드가 함락당하기도 했다. 한 편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 사이의 전선 상황이 격화되자 오스트리아 측은 군대 상당부분을 대러시아 전선으로 돌렸고,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 전선은 한동안 소강상태에 접어들기도 했다. 이듬해 191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프로이센 군 참모들의 도움을 받고 불가리아 왕국의 협조를 얻어 세르비아를 분할 점령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생제르맹 조약을 계기로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국이 독립하였다.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국은 세르비아 왕국과 통일하고, 세르비아 왕국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거듭났다.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에 합병되고, 유고슬라비아 왕국 역시 나치독일군의 침략을 받아 티토를 중심으로 한 파르티잔들이 봉기하였다.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승리한 것을 계기로 유고슬라비아에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들어섰다. 반면 오스트리아의 경우 소련군이 진주하지 않았고 냉전 시대 제1세계 진영에 속하게 되었다. 90년대 들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세르비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으로 분할되었다. 이를 계기로 21세기에 들어서 모두 내륙국이 되었다.

2.4. 21세기

양국은 역사적으로 갈등이 존재한다. 오늘날 오스트리아는 유럽 연합 가입 국가인 반면, 세르비아는 친러 외교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2.4.1. 2010년대

2013년 8월 23일,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전 총리를 자문역으로 영입할 것으로 보였다.#

12월 26일,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의 이름을 놀린 세르비아 정치인이 파면됐다.#

2016년 7월 13일, 오스트리아 법원은 세르비아 출신 IS요원 모집책에게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

3. 문화 교류

양국간 문화교류가 일부 존재한다. 독일어는 세르비아에서 주요 외국어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내에는 세르비아어 화자들이 존재한다.

3.1. 스포츠

2009년 6월 6일, 세르비아 축구팀이 오스트리아 축구팀과의 경기에서 승리했다.#

4.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