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대함대의 1차 잉글랜드 원정 영어: First Spanish Armanda 스페인어: Grande y Felicísima Armad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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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
1588년 5월~8월 | ||
장소 | ||
영국 해협과 북해 | ||
원인 | ||
사략선을 후원해 누에바에스파냐 습격을 조장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지원하는 엘리자베스 1세를 폐위하고 잉글랜드 왕국을 가톨릭 국가로 전환하려는 펠리페 2세의 야망. |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병력 | ||
전함 28척 무장상선 44척 보조선박 38척 대포 2,431문 선원 8,050명 군인 18,973명 스페인령 네덜란드 주둔 스페인군: 군인 31,800명, 바지선 170척. | 전함 34척 무장상선 163척[1] 플리부트 30척 선원 및 군인 16,000명. | |
피해 | ||
영국 해협 해전: 갤리온 2척 나포, 397명 포로 그라블린 해전: 5척 침몰 또는 나포, 600명 이상 전사, 800명 부상 44~51척 침몰 또는 실종, 11,000명 이상 사망 | 영국 해협 해전: 피해 없음. 그라블린 해전: 화공선 8척 소실, 50~100명 사망, 400명 부상 3,000여 명 병사. | |
결과 | ||
잉글랜드군의 대승. | ||
영향 | ||
엘리자베스 1세의 입지 공고화, 잉글랜드 대함대의 스페인 원정 계획 추진. |
1. 개요
1585~1604년 영국-스페인 전쟁 시기인 1588년 5월~8월,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엘리자베스 1세를 폐위하고 잉글랜드를 가톨릭 국가로 되돌려서 네덜란드 공화국을 지원하지 못하게 하려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의지로 결성된 스페인 대함대가 잉글랜드를 상대로 벌인 1차 원정. 공격측인 스페인과 방어측인 잉글랜드 왕국 모두 100척이 넘는 함선을 동원한, 당대 최대 규모의 해상 원정이다.
2. 배경
16세기 중반, 압스부르고 왕조의 펠리페 2세 치하에서, 스페인 제국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군사 강국이었다. 그들은 유럽 내에서 스페인 본토를 비롯해 시칠리아, 사르데냐, 남이탈리아, 밀라노 공국, 스페인령 네덜란드 등 여러 영토를 점유했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래 멕시코,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페루, 에콰도르, 칠레, 콜롬비아, 파나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뉴멕시코, 텍사스, 애리조나, 그리고 카리브해의 여러 섬 등 광활한 식민지를 개척하고 누에바에스파냐라고 칭했다. 이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하고 막대한 부의 원천을 마련한 스페인은 가톨릭의 수호자로서 유럽 전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반면에, 잉글랜드 왕국은 유럽에서 변두리 섬나라로 취급받았고, 잉글랜드 영토 밖에서는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프랑스 왕국을 상대로 백년전쟁을 치른 바 있는 등 저력을 갖춘 국가임은 분명했고, 스페인에서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항해하려면 영국해협을 반드시 지나야 했기에, 스페인 당국은 잉글랜드를 자기편으로 포섭하고 최대 라이벌인 프랑스 왕국을 공동으로 견제할 필요성을 인지했다. 이에 따라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결혼이 이뤄졌고, 잉글랜드 왕국은 헨리 8세 재위 동안 스페인과 손잡고 프랑스와 3차례 전쟁을 치렀다.
헨리 8세가 아들을 얻기 위해 아라곤의 카탈리나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종교 개혁을 감행하고 잉글랜드 국교회를 성립하면서 양국 간의 결혼 동맹이 깨졌지만, 스페인 당국은 헨리 8세와 카탈리나 왕비의 외동딸인 메리 1세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잉글랜드 정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 재위 기간에 잉글랜드가 개신교에 점점 더 동조하면서 메리의 입지가 약해지자, 스페인 정부는 잉글랜드 정부에 메리가 신앙을 지키는 걸 보장해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하는 등 그녀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고 메리 1세가 여왕에 올랐다. 그녀는 어머니의 조국이며 자신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스페인 왕실에 강한 애착을 품었고, 1556년 펠리페 2세와 결혼했다. 이후 그녀는 잉글랜드를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기 위해 강력한 종교 정책을 추진했고, 이 때문에 280여 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처형당하고 800명이 해외로 망명했다. 여기에 메리는 펠리페 2세의 설득에 따라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하기로 하고, 저지대 국가에 군대를 파견해 스페인과 연합하여 생캉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1558년 1월, 프랑스군이 잉글랜드 측이 병력을 저지대 국가로 보내느라 경계가 소홀해진 칼레를 기습 공략했다. 유럽 대륙의 유일한 잉글랜드 영토이자 중요한 무역 거점이었던 칼레의 손실은 메리 1세의 위신에 큰 타격을 가했다.
1558년 11월 메리 1세가 병사한 뒤,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펠리페 2세는 잉글랜드에 대한 스페인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후 엘리자베스는 1559년 4월 헨리 8세가 종교 개혁을 단행할 때 공표했으나 메리 1세가 폐지했던 수장령을 부활했고, 뒤이어 통일령을 반포해 잉글랜드 국교회를 부활했다. 비록 그녀가 반포한 통일령에서는 가톨릭 진영의 입장을 고려해 전통 교리를 상당 부분 존중하고 국교회를 따르겠다고 맹세한다면 개인적인 신앙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그녀를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사생아이자 찬탈자로 간주하고,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삼으려 했다.
1569~1570년 메리 여왕을 옹립하려는 잉글랜드 북부 반란이 발발했지만 진압당했다. 교황 비오 5세는 1570년 2월 칙서 '레그난스 인 엑셀시스(Regnans in Excelsis)'를 반포해, 엘리자베스 1세를 "잉글랜드의 거짓 여왕이자 범죄의 하수인"이라고 지칭하며 파문하고, 엘리자베스 1세의 모든 신하가 그녀에게 충성할 의무에서 해방되었으며, 엘리자베스의 명령에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파문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엘리자베스 1세를 축출하거나 암살하려는 음모가 연이어 계획되었지만, 윌리엄 세실과 프랜시스 월싱엄 등 여왕의 유능한 측근들에 의해 모조리 발각되었고, 엘리자베스 1세는 왕위를 지키기 위해 국교회에 복종하지 않는 가톨릭 신봉자들을 잠재적 반역자로 간주하고 박해를 가했다.
교황청은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한 뒤 펠리페 2세에게 조속히 잉글랜드를 공격해서 엘리자베스 1세를 폐위하라고 독촉했다. 하지만 펠리페 2세는 잉글랜드와 가급적 평화를 유지하고 싶었다. 오스만 제국과 힘겨운 전쟁을 오래도록 치러야 했고, 1568년부터 발발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진압하려고 애쓰느라 잉글랜드를 칠 엄두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개신교 세력은 여왕에게 네덜란드 반란군을 대대적으로 지원해 스페인군이 잉글랜드와 가까운 저지대 국가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걸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과 정면충돌을 피하고 싶어서 반란군이 간신히 버틸 수 있는 수준의 병력과 물자 지원만 해줬다. 또한 프랑스에서 위그노 전쟁이 격화되고 있었는데, 스페인과 잉글랜드는 각각 가톨릭과 위그노 진영을 후원했지만 역시 직접적인 충돌을 피했다.
1568년 9월, 존 호킨스와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이끄는 노예무역 원정대가 뉴스페인의 베라크루스 근처 산 후안 데 울루아에서 스페인 함대의 기습 공격을 받아 여러 척의 배가 나포되거나 침몰했다.(산 후안 데 울루아 해전) 이에 두 사람은 보복을 결심하고, 이듬해 스페인이 보낸 여러 보물선을 나포했다. 그 후 사략선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1577년과 1580년 사이에 지구를 일주하면서 스페인 식민지 항구들을 대거 약탈하고 누에스트라 세뇨 라 데 라 콘셉시온 호를 비롯한 스페인 보물선들을 나포해 막대한 수익을 챙겼다. 그는 이 막대한 재물을 왕실에 헌납했고, 엘리자베스 1세는 이에 크게 기뻐하며 드레이크를 기사에 선임했다. 스페인 당국은 해적 활동을 자행하는 드레이크를 처벌하라고 요구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스페인 왕실의 여왕에 대한 적대감은 더 강해졌다.
1580년 아비스 왕조가 단절된 뒤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차지하자, 이에 반발한 안토니우가 포르투갈 민중의 열띤 호응에 힘입어 펠리페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스페인군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밀어붙여서 반란을 진압하자, 안토니우는 잉글랜드로 망명해 여왕의 보호를 받았다. 이에 펠리페 2세는 제2차 데스몬드 반란을 일으킨 아일랜드 반군을 지원했지만, 스머윅 공방전에서 아일랜드 현지로 파견된 스페인군이 몰살당하자 지원을 중단했다.
1584년, 펠리페 2세는 프랑스 가톨릭 동맹과 조인빌 조약을 체결해, 가톨릭 동맹이 위그노를 상대로 승리하고 부르봉 추기경 샤를 드 부르봉이 프랑스 국왕 앙리 3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했다. 조인빌 조약 체결 소식을 접한 엘리자베스 1세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장차 잉글랜드에 맞서 동맹을 맺고 합동으로 잉글랜드를 침공하려 들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 불안감은 1584년 네덜란드 공화국의 스타트하우더 빌럼 1세가 암살 당하고 1585년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안트베르펀을 공략해 네덜란드 공화국의 입지가 급격히 약해지면서 심화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지원 요청을 받은 엘리자베스 1세는 이대로 스페인이 네덜란드를 재정복하면 여세를 몰아 잉글랜드를 침공하리라고 여기고 네덜란드를 돕기로 했다.
1585년 8월 10일,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대표단은 잉글랜드의 논서치 궁전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잉글랜드는 보병 6,400명과 기병 1,000명을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의 지휘하에 네덜란드로 파견하고 연간 60만 플로린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원해,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맞서는 걸 돕기로 했다. 네덜란드는 그 대가로 브리엘과 플리싱겐을 잉글랜드에 넘기기로 했고, 잉글랜드는 그 도시들에 수비대를 주둔하기로 했다. 또한 엘리자베스 1세는 네덜란드 국가평의회에 의원 2명을 임명하는 권리를 누렸다. 다만 여왕은 조약에서 자신에게 제안된 총독 칭호를 거부했고, 더들리가 여왕의 동의를 따로 받지 않은 채 네덜란드 총독에 취임했다. 펠리페 2세는 이 조약을 엘리자베스 1세의 선전포고라고 여겼고, 이때부터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엘리자베스 1세를 폐위하고 잉글랜드를 가톨릭 국가로 전환하기로 마음먹었다.
3. 경과
3.1. 스페인의 원정 계획
대함대를 결성해 잉글랜드를 침공하기로 결심한 펠리페 2세는 측근들에게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1586년, 산타크루스 후작 알바로 데 바잔은 국왕에게 침공 계획서를 제출했는데, 거기에 적힌 요구 조건은 엄청났다. 함선은 556척이 필요했고, 병사는 94,222명에 달했으며, 이 병사들이 8개월간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준비해야 했다. 이 모든 요구 조건을 들어줄 때 들어갈 비용은 15억 마라베디(Maravedí. 이베리아반도에서 주조된 동전의 명칭.)를 넘었는데, 이는 스페인이 보유한 자원과 부를 총동원해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액수였다.펠리페 2세는 산타크루스 후작의 계획은 터무니없다고 여기고, 좀 더 현실적인 방안을 구상했다. 얼마 후, 참모들은 스페인에서 수송 함대를 출항한 뒤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치르고 있는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휘하의 스페인군을 실어서 잉글랜드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펠리페 2세는 이 계획이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기고, 파르마 공작과 협의했다. 파르마 공작은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절대적인 비밀 유지, 네덜란드 지방의 안전한 점유와 방어, 그리고 프랑스가 평화 협정에 간섭하거나 프랑스 가톨릭 연맹과 위그노 사이에 분열이 조장되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1586년 말,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었다. 처음에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기만 습격을 벌여서 잉글랜드 해군의 시선을 그쪽으로 쏠리게 한 뒤, 주력 함대는 솔렌트에 안전한 정박지를 확보하기 위해 와이트 섬이나 사우샘프턴을 접수하기로 했다. 그리고 파르마 공작은 저지대 국가에서 동원한 병력을 수송 함대에 싣고 영국 해협을 건너서 잉글랜드의 수도인 런던으로 진군하기로 했다. 또한 사전에 밀정을 보내 잉글랜드 내 가톨릭 귀족과 사제들을 부추겨서 스페인군이 상륙했을 때 호응할 준비를 하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함대 총사령관은 레판토 해전에서 활약해 스페인 해군 제독들에게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산타크루스 후작이 선임되었다. 펠리페 2세는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자신의 계획을 알렸고, 교황 식스토 5세는 이를 환영하며 펠리페 2세의 원정을 십자군으로 인정하고 교회에 세금을 거두는 걸 허용했으며, 그의 부하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했다. 1588년 4월, 펠리페 2세는 파르마 공작에게 서신을 보내 아래의 지시를 내렸다.
우리 함대가 우리가 바랐던 것만큼 성공적이지는 않지만, 완전히 패배하지도 않았다면, 그대는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잉글랜드에 평화를 제안하라.
첫째, 잉글랜드에서 모든 가톨릭 신자, 즉 토착민과 외국인에게 우리의 거룩한 가톨릭 신앙을 자유롭게 믿고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망명 중인 자들이 귀환하는 것을 허용하라.
둘째, 잉글랜드가 점유하는 네덜란드 내 모든 지역을 우리에게 반환하라.
셋째, 짐과 짐의 영토, 그리고 짐의 신민들에게 가한 피해에 대해 배상하라.
가톨릭 신앙의 자유로운 행사와 관련하여, 프랑스의 위그노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으므로 잉글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동일한 특권을 허용하더라도 존엄성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라.
첫째, 잉글랜드에서 모든 가톨릭 신자, 즉 토착민과 외국인에게 우리의 거룩한 가톨릭 신앙을 자유롭게 믿고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망명 중인 자들이 귀환하는 것을 허용하라.
둘째, 잉글랜드가 점유하는 네덜란드 내 모든 지역을 우리에게 반환하라.
셋째, 짐과 짐의 영토, 그리고 짐의 신민들에게 가한 피해에 대해 배상하라.
가톨릭 신앙의 자유로운 행사와 관련하여, 프랑스의 위그노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으므로 잉글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동일한 특권을 허용하더라도 존엄성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라.
3.2. 시작부터 꼬이는 원정
잉글랜드 수석 고문이자 첩보 관리자인 프랜시스 월싱엄은 1587년 초, 로마에 있던 요원 중 한 명으로부터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 해안 상륙을 계획하고 있다는 확실한 정보를 전달받고, 스페인에 첩자들을 대거 투입해 침략군의 규모를 확인하게 했다. 그의 유능한 첩자들은 몇 달 만에 스페인 대함대의 규모와 작전 계획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그에게 전달했다. 이에 월싱엄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스페인 함대가 집결 중인 항구들을 잉글랜드 해군이 선제공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엘리자베스 1세는 월싱엄의 건의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누에바에스파냐 습격을 성공적으로 이끈 잉글랜드 사략선 해적인 프랜시스 드레이크에게 스페인의 군사적 준비를 검사하고, 보급품을 가로채고, 함대를 공격하고, 가능하다면 스페인 항구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은 함대 지휘권을 줬다. 1587년 4월 12~7월 16일,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스페인 대함대가 집결한 카디스를 습격했다.(드레이크의 카디스 습격) 그 결과 식량, 식수, 장비를 실은 100척 이상의 선박이 파괴되었고, 사그레스 인근에서 식량과 식수를 담는 데 쓰이던 1,600톤에 달하는 참나무 판자가 파괴되었다. 드레이크는 이 판자에 25,000~30,000톤에 달하는 식수와 식량을 저장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이 판자들이 파괴되자, 스페인군은 품질이 좋지 않은 나무로 통을 급하게 만들어야 했고, 이 통에 담긴 식량과 식수는 금세 썩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장교, 병사, 선원들은 1588년 원정을 시작한 지 첫 몇 주 동안 갈증과 이질에 시달려야 했다.
프랜시스 월싱엄은 여기에 더해 스페인의 침략을 약화하기 위해 런던 금융가들을 시켜 주요 이탈리아 은행들이 스페인에 대한 대출을 거부하도록 설득하게 했다. 이탈리아 사채업자들은 이에 동의했고, 그 결과 무적함대는 절실히 필요했던 군자금이 바닥나자 1587년 대부분을 항구에 가만히 정박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동시에, 월싱엄은 유럽 대륙에 더 많은 요원을 파견하여 펠리페 2세의 작전 준비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심지어 자기 요원 한 명을 무적함 대 초대 사령관인 산타크루스 후작의 집으로 보내서 그의 원정 계획을 파고들게 했다. 또한 월싱엄은 자신이 고용한 요원들을 통해 적에게 스페인 군대를 상륙시키기에 적합한 잉글랜드 항구부터 잉글랜드 해안의 조수와 기상 조건 등에 관한 허위 정보를 유포했다.
잉글랜드의 이러한 훼방으로 원정 준비에 차질이 생기던 1588년 2월 9일, 함대 총사령관 산타크루스 후작이 급사했다.[2] 펠리페 2세는 메디나 사도니아 공작 알론스 페레스 데 구스만을 새 총사령관으로 선임했다. 메디나 사도니아 공작은 탁월한 행정관이자 뛰어난 군인이며, 성격도 온화해 많은 신망을 받는 사람이었지만, 해전 경험은 없었고 제독들에게 은근히 무시당했다. 본인도 자기가 대규모 함대를 이끌 깜냥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취임을 고사하고 다른 사람을 추천했지만, 펠리페 2세는 고위 명문 출신만이 총사령관에 어울린다고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펠리페 2세는 유능한 해군 장성인 디에고 플로레스 데 발데스를 보좌역으로 선임했다.
메디나 사도니아 공작은 뛰어난 행정가답게 강력한 함대를 건조하고, 보급품을 모으고 필요한 모든 장비를 모았으며, 다국적군을 하나로 통합하는 신호, 명령, 그리고 전투 대형 체계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원정 준비에 차질이 여러 번 생기자, 메디나 사도니아 공작은 펠리페 2세에게 원정 성공 가능성이 회의적이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궁정 신하들이 하느님이 함대의 성공을 보장할 것이라며 서신을 국왕에게 전달하길 거부했고, 결국 당대 최대 규모의 해상 원정이 감행되었다.
3.3. 대함대의 출진과 잉글랜드의 대응
1588년 5월 9일, 스페인 대함대는 리스본 항에서 출항하여 영국해협으로 진격했다. 무적함대의 출항식은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의 의식과 같은 방식으로 이뤄졌다. 리스본에서 출진한 함선 수는 130척에 달했는데, 그중 정규 군함은 28척(겔리온 20척, 갤리선 4척, 나폴리제 갈레아스 4척)이었고, 무장상선은 44척이었는데, 소형선은 34척이었고, 대형선 10척은 캐럭선과 헐크 선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보조 선박 38척도 동반했고, 나머지는 식량과 무기를 비롯한 물자 수송선이었다. 함대를 이끌 선원은 8,050명이었고, 군인은 18,973명이었다. 여기에 노예 노잡이 2,088명, 장교, 귀족, 성직자, 의사 총합 1,389명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는 파르마 공작이 지휘하는 31,800명에 달하는 군인이 대기했고, 바지선 170척도 동원되었다. 따라서 이 작전에 투입된 스페인군은 총합 5만 5,000여 명에 달했다.함대의 주력은 메디나 사도니아 공작, 디에고 플로레스 데 발데스, 후안 마르티네스 데 레칼데, 미겔 데 오켄도, 페드로 데 발데스, 마르틴 데 베르텐도나 등이 지휘하는 6개 편대로 나누어졌다. 여기에 나폴리 갈레아스 4척은 우고 데 몬카다가 지휘했고, 정찰 및 메신저 임무를 위한 여러 척의 경선은 안토니오 데 멘도사가 지휘했으며, 보급선은 후안 고메스 데 메디나가 지휘했다. 식량으로는 수백만 개의 비스킷, 60만 파운드의 소금에 절인 생선과 소금에 절인 소고기, 40만 파운드의 밀, 30만 파운드의 치즈, 4만 갤런의 올리브 기름, 14,000통의 와인, 6,000통의 콩이 있었으며, 탄약은 50만 발, 대포알은 12,400발에 달했다.
스페인 함대는 2,431문에 달하는 대포를 함선에 실었다. 이 대포에는 위력이 센 포탄을 쏠 수 있지만 사거리는 짧은 이캐논포와 카르발린 포가 여럿 있었으며, 접근전 시 인명 살상을 노리기 위해 페리에르 포 등 경포가 전체 대포의 2/3를 차지했다. 이 다수의 경포를 탑재하기 위해 주력 전투함인 갤리온에는 대규모의 선수, 선미가 설치되었지만, 선체가 이 때문에 불안정해져서 명중률 저하의 원인이 되었다. 이에 맞서는 잉글랜드 측 대포의 95%는 경량 탄을 장거리에 걸쳐 쏠 수 있는 반카르바린포였다. 잉글랜드 함대는 큰 선수, 선미를 없앴고, 그 때문에 명중률이 스페인군보다 훨씬 좋았다. 그렇지만 반카르발린포의 사정거리가 길다고 해도 장거리에서는 명중률이 낮고, 명중해도 경량 탄으로는 선체에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다. 스페인 측은 잉글랜드 함대가 장거리에서 대포를 쏘는 방식을 택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무릅쓰고 전속력으로 달려들어서 근거리에서 경량 탄을 쏴서 적군을 대거 사살한 뒤, 배를 붙인 후 등선하는 전법을 쓰기로 했다.
스페인 함대가 출진하는 날짜를 진작부터 첩보원들을 통해 확인한 잉글랜드 측도 국력을 총동원해 왕실 소속 함선 34척, 임시로 긁어모은 무장상선 163척으로 구성된 대함대를 구축했다. 함대 사령관으로는 노팅엄 백작 찰스 하워드가 맡았고, 해상 전투 경험이 풍부한 사략선 해적 출신의 존 호킨스와 프랜시스 드레이크이 각 부대를 이끌었다. 잉글랜드 함대는 플리머스항에서 요격 준비를 하면서 스페인군의 접근을 기다렸다. 함선 수는 잉글랜드 선박 197척, 스페인 선박 130척으로 잉글랜드 측이 우세했지만, 스페인군의 대포와 포병 수가 잉글랜드보다 훨씬 많았고, 화력은 50% 이상 높았다. 다만 스페인 화포의 3분의 2가 인원 살상용의 단거리 소형포로, 중형 포 이상의 화포 수는 잉글랜드 측이 2배 이상 앞섰다.
스페인 함대가 출항할 무렵,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 해군 고등법원 판사 발렌타인 데일, 제4대 더비 백작 헨리 스탠리, 제10대 코브햄 남작 윌리엄 브룩, 제임스 크로프트 경, 존 로저스를 파르마 공작에게 파견해 양국 간의 평화 협상을 논의했다. 그러나 이 논의는 스페인 함대가 출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단되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스페인 함대에 대한 선제공격을 계획하고 비스케만까지 남하했지만, 강한 남풍을 받자 플리머스 항으로 도로 돌아가야 했다.
스페인 대함대는 악천후로 인해 항해가 지연되었고, 갤리선 4척과 갤리온 1척이 함대에서 이탈했다. 그러다가 2달여 만에 영국 해협에 접근했다. 이때 스페인의 여러 제독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에게 현재 가지고 있는 군대만으로도 잉글랜드를 제압하는 게 충분하니 굳이 네덜란드까지 가지 말고 조수를 타고 항구를 습격한 뒤, 하륙 후 런던으로 진격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펠리페 2세가 반드시 파르마 공작과 합류한 뒤 그의 군대를 잉글랜드로 수송하라고 엄격하게 지시했다며 거부했다. 7월 29일, 콘월의 세인트 마이클 산에 있던 감시원이 스페인 함대가 영국해협에 접근하는 걸 확인했다. 이 소식은 남부 해안을 따라 구축된 연락망에 의해 런던에 전해졌다. 그날 저녁, 찰스 하워드는 함선 55척을 이끌고 플리머스항에서 출격해 적군과 교전해서 그들의 전투력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하워드는 드레이크를 부사령관으로 삼으면서도 그의 전투 경험을 인정해 권한 일부를 양보했고, 존 호킨스가 후위대 사령관을 맡았다.
3.4. 전초전
7월 31일 오후, 스페인과 잉글랜드 함대는 플리머스 자오선 부근에서 마주쳤다. 드레이크는 스페인 함대의 중앙으로 개인 피나스를 보내 스페인 기함과 교전했다. 이 기함은 알론소 데 레이바의 갤리온인 '라 라타 산타 마리아 엔코로나다'였다. 잉글랜드 함대가 장거리에서 포격을 가하자, 메디나 사도니아 공작은 기함 산 마르틴에서 전투 개시 깃발을 올렸다. 그는 잉글랜드 함대의 뛰어난 기동성과 장거리 사격을 고려해, 함대를 초승달 대형으로 배치해 적의 포격으로부터 방어를 수월하게 할 수 있게 했고, 가장 튼튼하고 무장을 잘 갖춘 전함들을 가장자리에 두고 장거리 포대를 배치했다. 또한 후안 마르티네스 데 레칼데의 지휘 아래 최정예 함선들로 구성된 선봉대를 적군 가까이에 배치했다. 적이 어느 방향에서 접근하든, 선봉대는 방향을 돌려 공격을 격퇴하는 임무를 맡았다. 나머지 함대는 대형을 유지하고 서로 도우면서 예정된 진로에 따라 이동하게 했다.잉글랜드 함대는 기동성을 활용하여 서풍을 타고 항해했다. 리벤지 호에 탑승한 드레이크가 11척의 함선을 이끌고 북쪽에서 공격했고, 아크 로열호에 탑승한 찰스 하워드가 남쪽에서 나머지 함대를 이끌고 공격했다. 그들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뒤 마음대로 공격하고 스페인 함대의 근접전 시도를 회피했다. 그러나 스페인 함대의 방어선이 워낙 굳건해 좀처럼 뚫지 못했다. 이후에도 8월 1일 스타트 포인트, 8월 2일 포틀랜드 빌, 8월 3~4일 와이트 섬에서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다. 스페인 함대가 취한 방어 태세는 성공적이었다. 잉글랜드군은 장거리 함포를 사격했지만, 단 한 척도 침몰시키지 못했다.
다만 스페인 함대의 피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8월 1일,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 로사리오' 호는 심하게 손상되어 기동 불능 상태가 된 채 8월 1일 드레이크에게 나포되었고, 그 배에 탑승했던 페드로 데 발데스 제독은 전체 선원과 함께 항복했다. 잉글랜드군은 이 선박에서 절실히 필요한 화약과 50,000개의 금화 두카트를 압수했다. 그 후 드레이크는 적의 추격을 회피하기 위해 랜턴을 꺼버린 채 후퇴했고, 그의 나머지 함대는 지휘관이 갑자기 사라지자 새벽 내내 이리저리 헤매야 했다. 그 후 8월 2일 전투가 소강상태일 때 산 살바도르 호의 화약고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스페인 함대는 함선을 침몰시키려 했지만, 존 호킨스가 이끄는 골든 하인드 호가 급습해 이 선박을 나포했다.
이렇듯 잉글랜드 함대에 공격당하면서도 큰 피해를 보지 않고 영국 해협을 돌파하는 동안,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자신의 위치와 이동 경로를 자세히 설명하는 서신을 파르마 공작에게 보냈다. 그는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조만간 도착할 예정이니 근처 육지로 이동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메디나 사도니아 공작이 보낸 전령의 도착이 지연되어서, 파르마 공작에게 메시지가 전달되었을 때는 이미 칼레 해전이 벌어진 뒤였다.
3.5. 칼레 해전
필리프 자크 드 루테르부르 작, <스페인 함대의 패배, 1588년 8월 8일.>, 1796년.
8월 7일, 스페인 함대는 칼레 앞바다에 초승달 대형 형태로 뺵뺵하게 정박했다. 메디나 사도니아 공작은 파르마 공작이 인근에서 함대에 합류할 준비를 하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당시 됭케르크에 있던 파르마 공작의 진로를 잉글랜드 함대와 유스티누스 반 나소 중장이 지휘하는 네덜란드의 플리부트 30척이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대함대의 도착 예정지로 이동하는 게 불가능했다. 네덜란드의 플리부트(vlieboot)는스페인과 잉글랜드의 갤리온처럼 흘수가 깊은 대형 군함이 안전하게 진입할 수 없는 제일란트와 플랑드르 앞바다의 얕은 물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유격전을 전개했다. 파르마 공작은 스페인 대함대가 네덜란드군을 몰아내기 위해 가벼운 선박인 파타치(patach)를 대거 파견해 줄 거라고 예상했지만, 메디나 사도니아 공작은 혹시라도 적이 기습하는 걸 막기 위해 이들이 꼭 필요하다고 여겨서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
8월 7일 밤, 찰스 하워드는 칼레에 정박한 적 함대를 향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이 작전엔 파르마 공작이 단독으로 잉글랜드 상륙을 시도하는 걸 저지하기 위해 다운스에 주둔했던 에드워드 시모어와 윌리엄 윈터의 함대도 가세했고, 그 결과 찰스 하워드는 총 140척의 함선을 보유했다. 여기에 제4대 서식스 백작 헨리 래드클리프가 남부 해안의 요새와 수비대에서 모은 소량의 화약과 산탄, 그리고 약간의 식량을 받았고, 프랜시스 월싱엄은 화공선을 제작하기 위해 도버에 어획용 낚싯대, 장작, 그리고 피치(Pitch, 석유, 타르, 또는 식물에서 추출한 천연 또는 인공 점탄성 중합체)를 수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잉글랜드군 사령관들은 제대로 된 화공선을 갖추기엔 시간이 촉박하다고 여기고, 자군 전함 8척을 화공선으로 써먹기로 했다. 드레이크는 자신의 함선인 200톤급 '토머스' 호를 제공했고, 존 호킨스도 150톤급 '바크 본드' 호 한 척을 제공했다. 90톤에서 200톤급 사이의 다른 함선 여섯 척도 자원했다. 이 함선들에는 즉시 구할 수 있는 피치, 유황, 타르가 가득 채워졌으며, 장전된 대포와 보급품은 함선에 남겨뒀다. 8월 7~8일 한밤중, 잉글랜드군은 이 화공선들에 불을 붙인 뒤 적 함대 함선들 사이로 바람을 타고 흘려보냈다. 이 화공선 중 3척이 스페인 감시정에 발각되어 도중에 끌려갔지만, 나머지 5척은 스페인 함대를 향해 돌진했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기함 및 주요 전함들은 위치를 고수했지만, 나머지 함대는 공포에 질려 닻줄을 끊고 흩어졌다. 스페인 함선들은 화공선을 피할 수 있었지만, 피신하는 과정에서 초승달 대형이 무너졌고, 마침 불어온 남서풍에 너무 멀리 등지고 있었기에 제 위치를 회복할 수 없었다. 여기에 거의 모든 닻을 도주하는 과정에서 끊어버렸기 때문에, 도로 돌아와서 정박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3.6. 그라블린 해전
화가 미상, <그라블린 해전>, 17세기 초.
8월 8일 새벽, 메디나 사도니아 공작은 화공선을 피하느라 흩어진 함대를 재집결하려 애썼지만, 함대가 워낙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도로 모으는 데 막대한 시간을 잡아먹었다. 여기에 네덜란드군이 바다 표식을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플랑드르 앞바다로 항해했다가 암초에 걸려 좌초될 위험이 컸다. 그래서 일단 프랑스 국경과 가까운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항구 도시 그라블린에 임시로 정박하기로 했다. 한편, 잉글랜드 함대는 스페인 군함의 오크 선체를 관통하기 위해 100야드(90m) 이내로 접근하기로 했다. 그들은 영국 해협에서 벌인 전투를 치르면서 화약 대부분을 소진해서, 다가오는 전투에선 중포탄과 화약을 아껴야 했다. 또한 스페인 중포는 잉글랜드군과 교전할 때 좁은 간격과 갑판 사이에 저장된 보급품 때문에 쉽사리 재장전할 수 없었고, 선원들은 번거로운 재장전 대신에 적선에 등선하는 걸 선호했다. 이러한 스페인군의 성향을 전투를 통해 확인한 잉글랜드군은 적에 바짝 접근하되 등선을 시도하기엔 먼 거리를 두고 집중타를 가하기로 했다.
메디나 사도니아 공작이 함대를 수습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잉글랜드 함대가 들이닥쳤고, 메디나 사도니아 공작의 기함과 다른 4척의 함선이 대규모 잉글랜드 함대와 대적하게 되었다. 잉글랜드군은 사정거리 밖에 머물면서 스페인의 포격을 유발했다. 그 후 바짝 접근해 일제 사격을 가하여 적 함선에 손상을 줬다. 많은 스페인 포병이 잉글랜드군의 일제 사격에 죽거나 다쳤고, 대포를 다루는 임무는 종종 그걸 할 줄 모르는 보병에게 떠맡겨졌다. 전투가 시작된 지 몇 시간 후, 몇 척의 스페인 함대가 적군에게 공격받는 자국 함선 5척의 양쪽에 날개를 형성하기 위해 접근했다. 8시간 후, 잉글랜드 함선들은 탄약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일부 포수들은 대포에 사슬과 같은 물체를 장전해 발사했다. 오후 4시경, 잉글랜드군은 마지막 총격을 가한 뒤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5척의 스페인 함선이 무력화되었다. 605톤급 캐럭선 '마리아 후안' 호는 디에고 플로레스 데 발데스 제독과 선원 275명과 함께 블랑켄베르크에서 침몰했다. 스페인 함대는 불과 한 명만 구조할 수 있었다. 수위 아래에 구멍이 난 갈레아스 '산 로렌소' 호는 침몰을 피하고자 칼레에서 좌초되었다. 찰스 하워드는 이 광경을 보고 보트로 구성된 소함대에 탑승하여 산 로렌소 호에 접근했다. 함선 지휘관인 위고 드 몬카다는 이에 맞서 싸우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전사했고, 함선은 격렬한 격투 끝에 공략당했다. 다음 날, 심하게 손상된 갤리온 '산 마테오' 호는 슬로이스와 오스텐드 사이에서 좌초되었고, 프랜시스 베레가 이끄는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함대가 곧장 달려들어 나포했다. 선장 디에고 피멜탈은 생존한 선원들과 함께 항복했다. 그날 늦게,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가 지휘하는 '산 펠리페' 호가 심한 손상을 입고 표류하다가 발케렌 섬에 좌초되었다. 네덜란드 함대 사령관 유스티누스 반 나소가 이끄는 플리부트 부대가 이 배를 접수하고 선원들을 생포했다. 다른 함선 상당수도 심하게 손상되었다.
한편, 잉글랜드 본토에서는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가 템스강 어귀의 틸버리에서 4,500명의 민병대를 집결해, 런던으로 향하는 적군의 침략을 막을 준비를 했다. 당시엔 그라블린 해전 결과가 아직 전해지지 않았기에, 다들 언제라도 적군이 상륙할 수 있다고 여겼다. 8월 18일, 엘리자베스 1세는 틸버리로 가서 군대를 점검하기로 하고, 의식용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도착해 민병대에게 이어지는 전투에서 그들을 이끌 준비가 되었다고 밝혔다. 그녀는 그들에게 연설했는데, 그 내용은 두 가지 버전으로 전해진다. 자세한 내용은 틸버리 연설 참조.
3.7. 재앙적인 철수
호세 가트너 작, <무적함대의 파괴>, 1892년.
그라블린 전투 다음 날, 무질서하고 기동성이 없는 스페인 함대는 바람 때문에 제일란트의 모래사장으로 돌진할 위험에 처했지만, 나중에 바람이 남풍으로 바뀌면서 북쪽으로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찰스 하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 함대는 적군이 잉글랜드에 상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추격했지만, 스페인 함대는 바람을 타고 빠르게 북상했다. 8월 12일, 찰스 하워드는 스코틀랜드 앞바다의 포스만 부근에서 추격을 중단했다.
이제 모든 것이 틀어진 상황에서, 스페인 함대에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스코틀랜드 북쪽을 돌아서 대서양이나 아일랜드 해를 거쳐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8월 20일 스페인 함대가 스코틀랜드를 돌 때 110척이 있었다. 대부분이 무사히 돌아갔지만, 그라블린 해전에서 심하게 손상된 산 '후안 데 시킬라' 호는 힘겹게 나아가던 중 9월 23일 물 섬의 토버모리 만으로 들어섰다가 파괴되었다. 그 후 스페인 함선들은 긴 항해로 인해 마모가 급격하게 생겨났다. 선원들은 손상된 선체를 케이블로 강화해 어떻게든 유지하려 애썼다. 여기에 식량과 물이 심각하게 부족했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해안에 상륙한 뒤 물과 식량을 구하려 했지만, 서쪽으로 이동할 때 맥시코 만에서 발원한 걸프 스트림이 그들을 북쪽과 동쪽으로 몰고 가는 걸 인지하지 못했고, 결국 생각보다 해안에 훨씬 더 가까운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스코틀랜드 서쪽 바다와 아일랜드에서, 함대는 일련의 강력한 서풍을 만났고, 이 때문에 손상된 함선 중 다수가 바람이 없는 해안으로 더 멀리 밀려났다. 칼레 해전 당시 닻이 대부분 버려졌기 때문에, 함대가 아일랜드 해안에 도달했을 때 많은 함선이 멈춰 설 수 없었고, 이내 암초에 충돌해 난파되었다. 스페인에겐 불행하게도, 1588년은 북대서양에서 비정상적으로 강한 폭풍이 몰아쳤던 해였다. 과학자들은 소빙하기에 그린란드 해안에서 극지방의 얼음이 많이 쌓인 것과 관련 있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때 폭풍으로 실종된 선박 28척 대부분은 아일랜드 서해안의 험준하고 가파른 바위에 충돌한 것으로 보인다. 약 5천 명이 아일랜드 서해안에 밀려간 후 익사, 굶주림, 지역 주민들에 의한 학살로 사망했다. 현지 주민들은 파괴된 함선들에 달려가서 약탈을 자행하고, 사망한 선원들의 몸을 뒤져서 귀중품을 가져갔다. 이는 아일랜드 총독 윌리엄 피츠윌리엄이 스페인 포로들을 처단하라고 명령한 데서 비롯되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난파선은 10월 26일 밤엔트림주의 라카다 항구로 밀려간 갈레아스 '라 지로나'였다. 탑승객은 약 1,300명이었지만, 생존자는 9명이었으며, 시신 260구가 해안에 떠밀려왔다. 그중에는 산티아고 기사단 13인 위원회 회원이자 기사인 알론소 마르티네스 데 레이바도 있었다.
한편, 유럽 대륙의 정치인과 외교관들은 스페인 대함대의 소식을 여름 내내 애타게 기다렸다. 로마에 주재한 스페인 대리인들은 교황 식스토 5세가 잉글랜드에 스페인군이 상륙할 때 100만 두카트를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스페인이 잉글랜드 함대를 격파하고 잉글랜드에 상륙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프랑스에서는 스페인과 잉글랜드 대사들이 대중에 상반된 내용을 알렸고, 스페인의 승리는 파리, 프라하, 베네치아에서 축하 되었다. 그러나 8월 말에 이르러 주요 도시에 믿을 만한 소식이 전해졌고, 사람들은 초대강국이었던 스페인의 완패에 경악했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자국 함대가 완패했다는 소문을 처음 접했을 때 "신께서 이토록 많은 악행을 허락하지 않으셨기를 바란다."라며 믿지 않았다. 그러나 9월 21일,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기함 산 마르틴 호를 비롯한 함선 8척이 코루나에 입항한 뒤 패전 소식을 전하자, 펠리페 2세는 그제야 원대한 작전이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후 디에고 플로레스가 22척을 이끌고 라레도 항구에 도착했고, 미겔 데 오켄도가 5척을 이끌고 기푸스코아 항구에 도착했다. 메디나 사도니아 공작이 중병에 걸려 코루나에서 몸져눕고, 미겔 데 오켄도가 사망한 후, 디에고 데 메드라노 대위가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나머지 함대를 지휘할 임시 제독으로 임명되었다.
파르마 공작은 스페인 대함대가 더 이상 자신들을 호위할 수 없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자 잉글랜드 침공 계획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는 9월 말에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눴다. 한 부대는 라인강으로 보내졌고, 한 부대는 해안 지역에 남았으며, 나머지 한 부대는 파르마 공작이 직접 이끌고 베르헌옵줌 공략전에 착수했지만, 11월에 잉글랜드-네덜란드 수비대에 의해 큰 손실을 보고 패퇴했다. 뒤이어 네덜란드군이 접수한 톨렌 섬을 점령하려 시도했지만, 이 역시 격퇴되었다. 파르마 공작은 이 일련의 전투에서 약 10,000명에 달하는 병사를 잃었는데, 대부분이 전염병에 의한 병사였다.
영국 해협 전투가 있은 지 3개월 후인 11월에도, 몇몇 스페인 함선은 여전히 귀환하려고 애썼다. 스페인 병원선 '산 페드로 엘 마요르' 호는 부상병 200명을 태운 채 11월 7일 데번의 호프 코브에 입항해 상륙을 시도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이 곧 현장에 들이닥쳐 체포되었고, 병자들은 보드민과 플림턴에서 치료받았다.
4. 결과
1588년 잉글랜드를 향한 원정에서 실종된 스페인 선박 수는 분명하지 않다. 1880년대 중반 스페인 해군 장성이자 역사가 세사레오 페르난데스 두로(Cesáreo Fernández Duro, 1830~1908)에 따르면, 총 63척에 달하는 함선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현대 역사가 호세 루이스 카사도 소토(José Luis Casado Soto, 1945~2014)는 각 선박의 운명을 조사한 뒤 35척의 선박이 실종되었다고 주장했다. 다른 역사가들도 추가 연구를 수행했는데, 대체로 44~51척이 실종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이는 스페인 대함대의 1/3이 침몰, 포획, 난파되었음을 암시한다.겨우 돌아온 선박들 역시 폭풍이나 잉글랜드군의 포격으로 심하게 손상입었다. 돈첼라 호는 산탄데르에 정박한 직후 침몰했고, 산타 안나 호는 산 세바스찬에 입항한 지 며칠 만에 우발적으로 불에 타 소실되었다. 심하게 손상된 갤리온 산 마르코스와 산 프란치스코는 분해되었고, 총과 목재는 팔렸다. 전체 함대의 절반가량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고, 상당수가 침몰되거나, 분해되거나, 썩어 버리도록 방치되었다.
한편, 많은 학자는 스페인 국립 기록 보관소와 엘 에스코리알에 소장된 급여 지급자 명단을 연구한 끝에 25,696명이 출진했다가 13,399명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이를 토대로 사망자는 11,000명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겨우 돌아온 사람들도 식량과 물이 바닥난 채 좁은 배에 갇혀 지내는 동안 걸린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많은 생존자가 나중에 스페인이나 항구의 병원선에서 병사했다. 많은 저명한 스페인 지휘관들도 항구에 도착한 직후 죽었다. 함대 부제독 미겔 데 오켄도는 전투에서 입은 상처와 열병으로 고통받다가 도착한 지 이틀 만에 코루냐에서 죽었다. 후안 마르티네스 데 레칼데도 같은 방식으로 죽었다. 총사령관인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도 돌아오는 길에 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고, 집으로 돌아가서 요양 생활을 해야 했다. 펠리페 2세는 공작을 차마 비난하지 못하고 그가 병마에서 회복하도록 지원했다.
펠리페 2세는 이 충격적인 결과에 마음의 상처를 심하게 받았다. 그는 며칠간 문을 닫고 홀로 지냈고, 업무에 손을 대길 거부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나는 신의 바람과 파도가 아니라 인간을 상대로 함대를 보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스페인 국민 역시 검은 옷을 입고 스페인 장병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애도했다.
반면에, 잉글랜드인들은 스페인군이 언제라도 본토에 상륙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고, 선원들은 함선에 올라탄 채 항시 경계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티푸스, 괴혈병, 이질이 창궐했고, 많은 사람이 마게이트에 상륙한 후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었다. '보나벤처' 호의 선원 500명 중 200명 이상이 사망했고, '엘리자베스 조나스' 호는 단 한 명만 살아남았다. 찰스 하워드는 이에 대해 재무장관인 윌리엄 세실에게 서신을 보내 "그토록 용감하게 복무했던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보는 것은 누구든 가슴 아픈 일이다."라고 한탄했다. 존 호킨스는 "죽음으로 병든 사람을 퇴역시키는 등의 행위로 일반 급여에서 뭔가를 아끼려 든다."라며, 윌리엄 세실이 잉글랜드 함대에 적절한 지원을 해주지 못해 이런 결과가 초래했다고 비난했다. 병사들은 장교들의 자선에 의지했고, 찰스 하워드는 재산을 털어서 선원들을 돕는 모범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0명 이상의 선원이 병사했다. 그 후 장애가 있는 선원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기 위한 기금인 채텀 체스트(Chatham Chest)가 설립되었다.
8월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승리의 규모가 정확히 전해졌다. 잉글랜드 전역의 성당과 교회에서 감사 예배가 여러 차례 열렸고,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은 8월 30일과 9월 18일에 감사 예배가 열렸다. 이후 베르헌옵줌에서 파르마 공작의 침공을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군이 막아냈다는 소식이 추가로 전해지자, 11월 29일에 더 큰 규모의 감사 예배가 열렸다. 마지막 감사 예배는 닷새 후에 열렸는데, 이날 엘리자베스 1세가 전차를 타고 런던 거리를 행진했다. 스페인 함대에서 노획한 스페인 깃발 12개와 기타 전리품이 이 감사 예배 기간에 세인프 폴 대성당의 합창단을 장식했다. 네덜란드인들도 승리를 축하했고, 네덜란드 예술가들은 기념 메달과 그림을 재빨리 만들어 그해 안에 출품했다.
5. 이후
잉글랜드 왕국은 전투 승리를 기념해 전단과 팸플릿을 배포하고 승전 매달을 주조했다. 또한 민간에서는 성경의 유명한 에피소드인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 재현되었다는 글이 쏟아졌고, 하느님이 엘리자베스 1세와 잉글랜드 국교회 신자들 편에 있다고 확신했다. 이때 주조된 함대 메달에는 "Flavit et Dissipati Sunt"(그분이 바람을 불자, 그들이 흩어졌다.)라는 문구가 새겨졌고, 스페인 함대를 흩뜨린 바람에 "프로테스탄트의 바람"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고무된 엘리자베스 1세와 잉글랜드 당국은 이참에 스페인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혀 전쟁을 끝내기로 작정하고, 1589년 스페인을 향한 대규모 원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 원정은 지난해 스페인 함대와 유사한 재앙으로 끝났고,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스페인 대함대에 대한 승리의 기억은 나폴레옹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이 외세의 침략 위험에 직면했을 때 되살아 났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영국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은 "새로운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플리머스에 있는 기념비는 스페인 대함대 격파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888년에 건립되었다.
1968년, 벨기에 잠수부 팀이 포트볼린트레해안에서 라 지로나 난파선의 잔해를 발견해 육지로 인양했다. 그 배에는 금화와 은화, 보석, 무기 및 수많은 물건이 있었고, 벨파스트의 스트란밀리스에 있는 얼스터 박물관에 영구 전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