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8:28

에릭 클랩튼/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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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 Clap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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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 Clapton
1970
461 Ocean Boulevard
1974
There's One in Every Crowd
1975
No Reason to Cry
1976
Slowhand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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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less
1978
Another Ticket
1981
Money and Cigarettes
1983
Behind the Sun
1985
August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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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eyman
1989
From the Cradle
1994
Pilgrim
1998
Reptile
2001
Me and Mr. Johnson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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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s for Robert J
2004
Back Home
2005
Clapton
2010
Old Sock
2013
I Still Do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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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Xma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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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어린 시절3. 초기: 야드버즈, 블루스 브레이커스4. 크림: 최초의 록 슈퍼밴드5. 블라인드 페이스: 또다른 슈퍼밴드6. 데릭 앤 더 도미노스: 그의 마지막 슈퍼밴드7. 솔로 활동과 슬럼프, 알코올 중독8. 노년기에 다시 찾아온 전성기9. 근황

1. 개요

영국블루스 록 음악가 에릭 클랩튼의 일생을 서술한 문서이다.

2. 어린 시절

런던 근교의 한적한 시골 마을인 서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캐나다에서 복무한 군인 출신이었다. 그러나 9살때 누나로 알고 있던 사람이 알고보니 어머니였고, 자신이 어머니가 캐나다의 군인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몇년 후 어머니는 독일로 이사했고 에릭 클랩튼은 조부모 아래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13살때 에릭은 생일 선물로 어쿠스틱 기타를 받았지만 한동안 쓰지 않다가, 15살때 흥미를 붙여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1] 어렸을때부터 그는 블루스의 영향을 받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킹스턴 대학교[2]의 미술학과에 진학했지만, 미술보다 음악에 더 흥미를 보여 결국 대학교를 자퇴하고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3. 초기: 야드버즈, 블루스 브레이커스

파일:1960년대 후반 영국 런던 음악계 정리.png
에릭 클랩튼을 비롯한 영국 음악가들의 소속 밴드들을 정리한 표. 잘 안보이면 링크 참조.

그는 어린 시절 시카고 블루스와 비비킹, 머디 워터스 등등의 블루스 기타리스트의 연주에 영향을 받아 기타를 시작했으며 1963년 전설적인 밴드 야드버즈에 가입한다[3].

이때 블루스 밴드였던 야드버즈가 본격적으로 팝 밴드로 노선을 바꾸기 위해 투입 되었던 곡이 For Your Love였는데 블루스 음악인으로의 자각이 컸던 에릭 클랩튼은 밴드의 방향 전환에 크게 갈등하게 되고 야드버즈에서 탈퇴 당하게 된다[4]. 이후 후임으로 들어오는 기타리스트가 바로 제프 벡. 야드버즈는 For Your Love[5]의 성공과 제프 벡의 뛰어난 음악적 능력으로 나름대로 인기를 구가하는 밴드[6]가 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클랩튼은 청중으로부터 'Slow Handclap'이라는 말을 듣기 시작한다. 에릭 클랩튼이 빠른 속도의 격렬한 연주를 할 때 줄이 끊어지는 일이 많아지자 줄 교체시간에 관객들이 그에게 느린 박수를 쳐주었는데 이에서 착안된 별명이 슬로우핸드. 다분히 미국적인 뉘앙스 때문에 인기를 얻은 것인지 이후 그의 별명이 되었다. 이 표현은 곧 슬로우핸드가 된다.

야드버즈를 지미 페이지와 제프 벡에게 맡기고 그는 영국 블루스의 거장 존 메이올과 함께 '존 메이올 앤 더 블루스브레이커스'를 결성하고「Blues Breakers with Eric Clapton」을 발표한다. 잠시동안 야드버즈의 팝적인 사운드가 아닌 매우 기본적이고 지금들으면 좀 답답하기도 한 정통 블루스를 연주하며 블루스적 필링을 다진다.[7]

이 시기가 에릭 클랩튼의 경력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데, 이때부터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깁슨 레스 폴 스탠더드 기타와 마샬 앰프의 조합을 선보이기 시작했으며, 런던 거리에 '클랩튼은 신이다'(Clapton is God)라는 문구가 나붙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의 나이 만19세 전성기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1966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밴드 중 하나인 크림을 조직한다.

4. 크림: 최초의 록 슈퍼밴드

파일:에릭 클랩튼 크림.jpg
크림 시절의 클랩튼.

크림은 에릭 이외에도 최고의 연주실력을 가진 잭 브루스(베이스), 진저 베이커(드럼)가 멤버로 있던 밴드로 락 역사상 최초의 슈퍼밴드로 언급되며 3명의 멤버가 기타 - 베이스 - 드럼(이중 한 멤버가 보컬 겸업)을 연주하는 트리오 밴드로서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이후 이를 본뜬 수많은 락 트리오들이 나타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크림에선 잭 브루스와 에릭 클랩튼이 번갈아 보컬을 맡았지만 주로 잭 브루스가 중요한 보컬을 맡았다.
이 시절 크림은 당시의 락의 조류였던 사이키델릭 락을 선도하면서 몽롱하고 느릿하기만 한 사이키델릭이 아닌 꽉 짜여진 연주와 힘찬 기타 리프, 반복적이고 강렬한 리듬, 무거운 베이스를 깐 락 음악을 보여주었다. 이는 이후 탄생하는 1970년대 하드락과 헤비메탈의 연주측면에서의 방향성을 제시하게 된다. 또한 악기 연주에 관해서 자신들이 지상 최고라고 자부하는 슈퍼밴드답게 스튜디오가 아닌 무대에서 진가를 발휘했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빠르고 즉흥적인 연주실력을 뽐내며, 악기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게 된다.

크림의 주요 히트곡으로는 리프의 교과서 'Sunshine of Your Love'와 잭 브루스의 'White Room'이 있다.

크림하면 다들 현재 제일 성공한 인물인 에릭 클랩튼만 생각하지만 사실 다른 멤버들의 음악성도 무시할수 없었고 특히나 밴드에서 제일 리더격 인물이라고 볼 수 있었던[8] 잭 브루스는 에릭보다 더 전위적이고 정신적으로 심오한 음악세계[9]를 추구해 밴드는 계속 유지되기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결국 1968년 크림은 해체된다.

크림이 해체하게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는데 첫째로는 지나친 투어일정으로 인해 창작활동이 마비된 것, 두번째로 공연이 멤버들의 화려한 개인기 위주의 플레이를 강조하다보니 매너리즘에 빠진 것, 세번째로는 멤버 3명 모두 각 분야에서 정상급 실력자이다 보니, 사소한 음악적 견해도 큰 충돌로 이어졌다는 점이다.[10] 게다가 이 셋은 모두 주도적이고 지도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성격의 혈기왕성한 젊은 세명의 뮤지션들이 허구한 날 붙어다니니 싸움이 안날래야 안 날수도 없고 제일 주도권이 컸던, 잭 브루스의 프리재즈를 지향하는 방향성으로 인해 다른 두 멤버와의 음악적 충돌도 심각한 상태에 이른다. 물론 또 다른 이유로는 지미 헨드릭스[11]의 등장 때문에 좀 밀렸다는 얘기도 있었다.

한편, 에릭 클랩튼은 크림 당시엔 비틀즈(특히 조지 해리슨)와 친분이 있어 비틀즈의 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의 기타 연주를 해주기도 했다. 이는 조지의 다소 즉흥적인 제안이었는데, 다른 아티스트가 비틀즈의 곡에 연주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에릭은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꺼렸다고 한다.[12] 조지 해리슨이 회상하기를 당시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꼽히던 에릭 클랩튼이 녹음에 참여하자 다른 비틀즈 멤버들도 평소보다 더 진지하게 녹음에 임했다고 한다.

근데 조지 해리슨하고만 친하면 좋은데 에릭은 조지의 부인 패티 보이드와도 친밀해진다. 패티 보이드가 힌두교에만 빠져 가정을 등한시하는[13] 조지 해리슨에게 질투 작전을 펼친 덕분. 그런데 사실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조지 해리슨은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거기다 조지 해리슨은 이미 링고 스타의 아내 모린 콕스와 바람이 나있던 상황이었고, 에릭 클랩튼도 빈말로도 인간성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인물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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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블라인드 페이스: 또다른 슈퍼밴드

크림을 해체한뒤 또다른 슈퍼밴드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를 결성하는데 이 밴드는 크림시절의 진저 베이커와 트래픽의 보컬리스트이자 키보디스트 스티브 윈우드, 바이올린과 베이스 주자 릭 그레치가 참여해 이루어진 밴드였다. 이 밴드에서 에릭은 스티브 윈우드의 음악성에 경의를 표하고 밴드의 주도권과 보컬을 넘겨주게 된다.

이 시절의 음악은 스티브 윈우드의 영향으로 굉장히 단아하고 정돈되어 그야말로 고상하기 그지없는 사운드를 보여준다. 마치 스티브 윈우드의 전신 밴드였던 트래픽의 음악이 연주적으로 더 알차져서 연주되는 듯한 느낌으로 재즈와 민속음악, 프로그레시브 등등의 영향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 시기의 명곡으로는 현악협주곡처럼 단아한 어쿠스틱 기타연주가 돋보이는 곡 'Can't Find My Way Home', 장엄한 사이키델릭 블루스 'Presence Of The Lord' 등등이 있다.

하지만 에릭 클랩튼은 이런 지나치게 심오한 음악 세계에 진력이 났는지 앨범 한장만 발표한뒤 곧 밴드를 그만둔다.[14][15]

여담으로 이 시절 낸 셀프 타이틀 앨범 'Blind Faith'의 앨범 커버가 지금 기준으로 상당히 위험한 물건으로 유명하다.[16] 다름 아닌 11세(!) 소녀의 상반신 누드 사진을 앨범 커버로 쓴 것이다. 심지어 이마저도 원래는 14세 소녀를 커버로 쓸 예정이었다가 너무 나이 들었다고(...) 빠꾸를 먹이고 3살 어린 여동생을 대신 찍은 것이라고. 커버 속 소녀는 비행기 모형을 들고 있는데, 비행기 끝이 둥글고 묘하게 뭉툭한 것이 남근을 연상시킨다는 설까지 있었다. 그래서 미국 버전을 낼 때는 멤버들 사진과 밴드명을 대충 붙인 커버로 때워야 했다.

6. 데릭 앤 더 도미노스: 그의 마지막 슈퍼밴드

파일:에릭 클랩튼 젊을때.jpg
데렉 앤 더 도미노스 시절의 클랩튼. 누구세요[17]
블라인드 페이스 해체 후 1970년 에릭 클랩튼은 블라인드 페이스 시절 같이 투어를 다니던 '델라니 앤 보니와 친구들(Delaney & Bonnie and Friends)'라는 밴드의 일부 멤버들(짐 고든, 칼 래들, 바비 위트록)과 의기투합해 데릭 앤 더 도미노스(Derek and the Dominos)를 결성한다.[18] 이 시기에 밴드는 Layla and Other Assorted Love Songs라는 단 한장의 앨범을 발매하고 해체한다. 여기에 듀언 올맨도 객원 기타리스트로 참여한다.

이때의 음악은 블라인드 페이스 시절의 지나친 절제와 정돈을 벗어나 그야말로 푸근하고 따뜻한 블루스록 그 자체를 들려준다. 에릭 클랩튼과 듀언 올맨 두 사람의 협연 기타 연주는 그야말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시기 명곡으로는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 보이드에게 바치는 사랑의 찬가[19] Layla와 정말 슬프고 아름다운 Bell Bottom Blues와 어쿠스틱 곡 'Thorn Tree in the Garden', Billy Myles와 Big Bill Broonzy의 블루스 넘버를각각 리메이크 한 'Have You Ever Loved a Woman?', 'Key to Highway', 그리고 지미 헨드릭스의 곡을 리프를 새롭게 해석해 연주한 'Little Wing' 등이 있다.

그런데 이때 그의 연주 라이벌이자 동반자, 소울메이트같은 관계였던 또다른 위대한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가 사망하고, 밴드를 같이하던 듀언 올맨도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한다. 한때 자신과 최대 라이벌 관계라고 불렸던 피터 그린은 LSD에 손을 대다가 마약 폐인이 된데다가 조현병까지 발병해 정신병원을 오가는 처지가 되었다. 또 데릭 앤 더 도미노스의 드러머로 활동하며 Layla의 후반부 피아노 코다를 작곡한 짐 고든은 조현병에 시달리다가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20] 사적으로는 패티 보이드와 잠깐 헤어지는 일도 있었다. 이런 비극이 겹치자 에릭 클랩튼은 한동안 슬픔과 비탄에 잠겨 술과 마약에 빠져 폐인처럼 인생을 허비하며 괴로운 시간을 지냈다.

또한 당시 에릭과 패티는 꽤 깊은 사이로까지 발전했으나 조지를 사랑하는 패티가 결국 다시 조지에게 돌아가게 되면서 둘은 헤어졌다. 이후 조지의 바람기[21]로 조지와 패티가 이혼하고 뒤에 둘은 결혼한다.[22] 이런것만 보면 에릭이 패티를 엄청 사랑했던 것 같지만, 에릭은 결혼 전이나 후나 술과 마약을 해댔고[23] 패티가 아이를 못 낳는다는 걸 알자 밖에서 사생아를 둘이나 데려온다. 거기다 후에 에릭이 자서전에 밝히길 패티를 원한건 그저 조지 해리슨이 질투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후술하겠지만 이는 결국 그가 인간성으로 비판받는 계기가 된다.

7. 솔로 활동과 슬럼프, 알코올 중독

라이브 에이드에서 She's Waiting을 연주하는 에릭 클랩튼
이후 에릭 클랩튼은 밴드를 그만두고 계속 솔로로 활동하게 된다.

솔로 이후의 그의 음악은 비트는 많이 줄어들고 섬세한 기타연주를 강조하는 조용한 사운드를 추구하게 된다. 이 때 마약중독을 극복하고 재활을 거치며 461 Ocean Boulevard 앨범을 발매하게 된다. 1971년 인도에 심취했던 친구 조지 해리슨의 권유에 따라 태풍(사이클론)에 희생된 방글라데시 난민들을 돕는 자선콘서트에 참석하기도 했다. 1975년 더 후의 록 오페라를 영화화한 작품 'Tommy'에 참여하기도 했다.

솔로시절 명곡으로는 밥 말리의 레게 곡 리메이크인 'I Shot the Sheriff', 옛날 서울의 달이란 MBC 드라마로 유명해진 'Give Me Strength', 아름다운 발라드 'Let It Grow'[24], 레게풍의 가스펠 리메이크곡 'Swing Low Sweet Chariot', 마약 이름이라 논란이 있었던 'Cocaine'[25], 그리고 마침내 조지 해리슨과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한 부인 패티에게 바치는 찬가 'Wonderful Tonight'이 있다(근데 결국 이혼하지만...). 또한 1983년에는 본인의 절친들인 지미 페이지, 제프 벡, 찰리 와츠, 빌 와이먼과 세계 투어를 다니기도 했다.

1988년,[26] 에릭 클랩튼은 패티 보이드에게 조지 해리슨이 보여준 모습을 그대로 답습했고, 에릭 클랩튼의 바람기와 병크를 못 견디고 결국 둘은 이혼한다. 에릭 클랩튼은 조지 해리슨을 질투해서 패티 보이드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트로피 와이프 취급한 것이라고 대놓고 밝혔고, 이후 패티는 오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했다. 결국 패티만 피해받은 셈.

또한 이시기 에릭 클랩튼은 술과 마약에 찌들어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지게 된다. 가족들에게서조차 버림받고 음악 활동도 슬럼프에 빠졌으며, 전성기가 끝나가던 중년기의 클랩튼의 신보들은 전성기만큼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서서히 몰락하고 있었다. 1986년 발매한 앨범 August은 영국에서는 3위에 올랐지만 빌보드에서는 36위에 머무르는데 그치면서 에릭 클랩튼의 시대도 한물 갔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 시대는 에디 밴 헤일런슬래시로 대표되는 속주 메탈 기타리스트들의 전성기로 에릭 클랩튼과 같은 기타리스트들이 점점 뒤로 밀려나고 있던 때였다.

이 때문에 에릭 클랩튼은 술에 있어서 자제를 못하고 자발적으로 알콜 중독 센터에 들어가는 등 막장스러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 외에도 1970년대 후반의 인종주의 논란, 다시 시작된 마약 중독 등으로 인하여 에릭 클랩튼의 음악 커리어는 하락세를 탔다.

8. 노년기에 다시 찾아온 전성기

그러던 1991년, 슬럼프에 빠져있던 에릭 클랩튼의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탈리아의 방송인 로리 델 산토가 낳아준 4살 된 아들 코너가 무려 53층이나 되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추락해 사망한 것이다. 가정부가 청소하느라 창문을 열어뒀다고 한다. 가정부가 전화를 하여 "코너를 당신이 데려갔나요? 안 보이던데요?"라는 말을 듣고 불길함을 감추지 못했는데...결국 그 높은 곳에서 떨어져 끔찍한 모습이 된 시체를 보고 만다. 에릭 클랩튼은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려고 다짐해 아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는데, 아들이 에릭 클랩튼이 언제 오는지 보려고 베란다에 서있다가 그만 추락사하고 만 것이다. 더군다나 아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는 "아빠 사랑해요"라는 말까지 있었다고. 어떻게 보면 막장 사생활과 난잡했던 여성편력에 대한 대가가 사랑했던 어린 아들의 죽음이라는 잔인한 업보로 돌아온 셈이다.

정말 멀쩡하던 사람이 폐인으로 지내도 이상하지 않을 비극적인 사건이었고 에릭 클랩튼도 큰 실의에 빠져 지내게 된다. 하지만 아들이 천국에서 자신의 노래를 들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아들에게 바치는 곡 'Tears in Heaven'을 작곡한다. 사실 그전에 스티비 레이 본이 헬기 사고로 사망한 후 쓰던 곡인데 코너의 사망까지 겹쳐 더욱 애절한 곡이 되었다. 무슨 새옹지마 였는지 이 곡은 그가 음악을 맡게 된 영화 러쉬[27]의 사운드트랙으로 사용되어 엄청나게 크게 히트하고, 이를 계기로 에릭은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당시는 MTV 언플러그드의 돌풍이 음악계를 강타하고 있던 때라 커트 코베인을 비롯한 여러 음악가들이 수혜를 보곤 했다. 에릭 클랩튼도 마찬가지로 MTV 언플러그드 콘서트에 나가 'Tears in Heaven' 외에 데릭 앤 더 도미노즈 시절의 히트곡 'Layla'의 어쿠스틱 변주 곡 등등도 선보였고 이 공연은 크게 성공하였다. 동일 년도에 공연 실황 라이브앨범인 Unplugged가 발매됐는데, 언플러그드 라이브 앨범은 2,600만장이 팔렸으며, 이는 현재까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라이브 앨범이다. 이 앨범으로 에릭 클랩튼은 그래미 어워드에서 신인상을 제외한 Record of the Year, Album of the Year, Song of the Year의 주요 3부문 포함 6관왕을 달성하였다.(이 때의 경쟁곡이 다름아닌 너바나Smells Like Teen Spirit) 다시 말하지만 이거 라이브 앨범이다.[28][29]

9. 근황

이 이후로도 에릭 클랩튼은 여전히 계속 활동하고 있다. 최신 음반의 성적은 오히려 전성기였던 1970년대보다도 더 좋을 정도다. 언플러그드 이후로 발매한 정규 앨범은 단 두장을 제외하고 모두 빌보드 10위권 안에 들어갔으며, UK 차트에서는 1994년 발매한 앨범 From the Cradle이 에릭의 처음이자 마지막 UK 차트 1위 앨범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언플러그드 앨범이 히트치면서 뒤늦게 에릭 클랩튼이 가장 인기있는 기타리스트의 반열에 올랐다.

또한 영화 페노메논의 삽입곡이자 베이비페이스와의 협업곡인 'Change the World'도 히트시키고 블루스의 거장 비비킹과 협연한(비비킹을 선배로서 극히 예우한) 'Riding with the King' 등등의 정통 블루스로 회귀한 앨범도 내고 있으며, 블라인드 페이스나 크림 시절의 동료들과 만나 그 시절의 곡들을 협연하기도 한다. 또 라이브 투어도 계속하고 있으며, 폴 매카트니로저 워터스 같은 여러 음악가들과 협업도 한다. 최근에는 재즈 쪽으로도 취향이 발전했는지 재즈 성향의 앨범도 여럿 내고 있다.

자신도 마약에 중독된 경험이 있어서인지 마약치료시설에 상당한 기부금을 내고 있다고 한다. 기부금만 내는 정도가 아니고 Crossroads라고 아예 자기가 지은 마약 중독자들을 위한 재활 시설이 있다. 그리고 자선공연이나 여러 기부행사에도 자주 나가는 편이라고. 젊었을때는 걸어다니는 사건사고나 다름 없었지만, 이런 점을 보면 그래도 곱게 늙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2002년 31살 연하(...)의 미국인 멜리아 매케너리[30]와 결혼해 늦둥이 딸 셋을 본 이후론 사생활도 잠잠한 편이다.

에릭 클랩튼이 쓴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중국 등지에서 자신의 라이브 DVD가 불법복제되어서 헐값에 판매되고 있는 사실에 크게 분노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비단 에릭 클랩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영국 뮤지션들이 중국에 대해 큰 반감을 갖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31] 국내에서도 에릭 클랩튼 불법 DVD가 장당 3000원~4000원에 판매되고 있는데 에릭 클랩튼의 팬이라면 반드시 정품을 애용하자.

에릭 클랩튼이 첫 내한공연차 방한 했을 때 공연 다음날 가이드에게 서울 시내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해서 가이드가 호텔에서 가까운 압구정동을 안내했다고 한다. 한가한 평일 오후의 압구정 거리를 산책하던 에릭 클랩튼은 '1만원에 3켤레'란 가격에 양말을 파는 노점을 발견하곤 양말을 꼼꼼히 골라 샀는데 노점 주인이 '외국인이 참 곱게 늙었다'며 양말 1켤레를 덤으로 줘서 에릭 클랩튼이 기뻐하며 고마워 했다고 한다. 또 2011년 싱가포르 공연을 했는데 김정일의 차남인 김정철이 이 공연을 보러와서 국내에서도 화제가 된 바 있다.

2016년 음악 잡지인 Classic Rock의 인터뷰에서 2013년에 말초신경병증(peripheral neuropathy) 진단을 받았다고 밝혔다. 팔다리에 찌르는 통증 또는 작열감이 드는 질환이기에 많은 팬들이 걱정하였으나, 2018년 현재 투어 일정이 잡혀있는 것으로 볼 때 다행히 큰 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18년 1월에 영국 BBC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귀에 이명 증상이 있으며, 손도 간신히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하였다. 관련 기사근데 새 앨범인 Happy Xmas가 발매됐다?

2019년 진저 베이커가 사망하면서 에릭 클랩튼은 크림의 멤버중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멤버가 되었다. 2020년 2월, 진저 베이커 추모 공연이 열렸으며 에릭은 크림과 진저 베이커의 히트곡 몇곡을 연주했다. 이 콘서트에서는 핑크 플로이드의 전 리더로 유명한 로저 워터스를 비롯해 그와 친한 몇몇 음악가들이 게스트로 참여하였다. 진저 베이커 추모 공연 이후에는 코로나 19로 인해 제대로 공연을 해본적이 없어 집에서 쉬고 있지만, 밴 모리슨과의 협업으로 코로나19 방역을 비난하는 앨범에 참여하기도 해 논란을 빚고 있다.


2021년 6월에도 밴 모리슨과의 합작인 "The Rebels"라는 신곡을 발매하고, 곡의 수익을 모두 영국 정부의 봉쇄 조치로 인해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여러 음악가들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뮤비 속에는 60년대에 음악 활동을 함께했던 동료 지미 페이지, 지미 헨드릭스, 밥 딜런, 짐 모리슨, 롤링 스톤스, 존 레논 뿐만이 아니라 까마득한 선배인 엘비스 프레슬리, 척 베리, 로버트 존슨, 조니 캐시 그리고 후배인 데이비드 보위, 패티 스미스, 커트 코베인, 존 라이든, 액슬 로즈, 심지어는 레미 킬미스터 등도 애니메이션으로 등장하여 70대 음악가 답지 않게 꽤나 세련되었다면서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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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릭 클랩튼이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 반열에 들어감을 감안하면 상당히 늦게 시작한 것. 비슷한 전설 지미 헨드릭스, 지미 페이지도 각각 15세, 14세에 기타를 시작했다고 전해진다.[2] 영국 내 대학 순위 100위권으로 그렇게 좋은 대학교는 아니다.[3] 기타를 제대로 연주한지 3 ~ 4년 만에 이미 전설의 반열에 오른 것. 그의 천재성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4] 밴드 내부 분열보다는 매니저였던 고멜스키와의 대립이 더 컸다. 이 고멜스키란 인물은 롤링 스톤스, 애니멀스, 야드버즈에 모두 관여한 당대의 거물이었다.[5] 밴드를 나오기 전 클랩튼이 여기서 기타를 쳤다.[6] 제프 벡 투입전에도 전혀 인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7] 이 때 당시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같이 베이스를 치던 존 맥비는 훗날 플리트우드 맥을 결성하게 된다.[8] 음악적인 주도권이 다른 멤버들 대비해서 높은 편이었다고 한다.[9] 주로 프리재즈 성향.[10] 비슷하게 멤버 전원의 실력이 최정상급이었다고 여겨지는 레드 제플린이나 더 후보다 갈등이 더 심했다. 더 후는 고등학교 소꿉 친구들끼리 결성한 밴드였고, 레드 제플린은 가장 짬밥이 많고 프로듀싱 능력이 최정상급이었던 지미 페이지가 가장 큰 권한을 쥐었다. 또 지미 페이지로버트 플랜트가 사적으로도 동성애 오해를 받을 정도로 절친 사이이기도 했고 말이다. 무엇보다 두 밴드는 각각 베이스 파트에 존 엔트위슬존 폴 존스라는 이성적이고 모나지 않은 성격의 구성원이 한 명씩 존재했기에 과열된 분위기를 식혀줄 수 있었다.[11] 지미 헨드릭스도 크림과 같이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라는 3인조 밴드를 내세워서 성공을 거두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에릭 클랩튼과 지미 헨드릭스는 절친이었다.[12] 이 시점까지 비틀즈 곡에 다른 대중 음악 아티스트가 참여한 일은 1962년 'Love Me Do'/'PS I Love You' 녹음 당시 링고 스타 대신 드러머로 참여했던 앤디 화이트 정도가 전부였다. 이후로는 'Revolution'에 니키 홉킨스, Let It Be 앨범에 빌리 프레스턴이 참여했다.[13] 그러나 조지는 힌두교에 몰두하면서도 바람을 계속 피웠다. 즉 핑계(...)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14] 이 이후에도 에릭 클랩튼과 스티브 윈우드는 긴밀한 친밀관계를 유지하고 다시 같이 음악 할 것은 약속하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2009년에서야 그 결과물로서 메디슨 스퀘어 가든 라이브 실황 앨범을 발매하게 된다.[15] 자서전에 따르면, 본인은 서로 연습 형식의 즉흥연주를 할 때는 즐거웠다가, 하이드 파크 무료 공연 당시 회의감이 들었다고 한다. 공연 당일 진저 베이커의 눈이 살짝 풀린 것을 보고 '아, 또 마약에 손을 대는 버릇이 생겼구나.'(진저는 크림 시절에도 일이 안 풀리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헤로인을 했다고 에릭은 회상했다.)라는 생각이 들어 지금까지 밴드를 출범시키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에릭은 "진저가 마약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내 오해였을 수 있다."라고 일부분 오해였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해당 공연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는 뉘앙스의 회상을 했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블라인드 페이스 자체가 100%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16] 보통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선정적인 앨범 커버를 꼽을때 레드 제플린의 Houses of the Holy, 스콜피온즈의 Virgin Killer와 더불어 제일 많이 거론된다.[17] 1970년 조니 캐시의 TV쇼에 출연할 당시의 모습으로 보인다.참조[18] Derek은 에릭 클랩튼의 친구들이 그를 애칭으로 부르는 이름이고, Dominos가 나머지 멤버들을 의미한다.[19] 결국 패티 보이드는 조지 해리슨과 이혼하고 에릭 클랩튼과 재혼했다. 하지만 에릭 클랩튼의 바람기 때문에 이혼.[20] 후대에는 그와 친하게 지냈던 후배 스티비 레이 본도 헬기 사고로 요절했기 때문에 "에릭 클랩튼과 함께하는 사람은 오래 못산다"라는 농담이 있다. 그러나 단순한 우연의 일치고, 폴 매카트니, 제프 벡, 로저 워터스, 피트 타운젠드, 진저 베이커 마크 노플러, 비비킹, 지미 페이지 등 에릭 클랩튼과 사적으로 친했거나 밴드 활동을 같이 한 수많은 음악가들이 다들 백발, 대머리 노인이 될때까지 장수했으며, 조지 해리슨도 장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50대 초반까지는 꽤 정정했다.[21] 링고 스타의 아내 모린 콕스와 바람을 피웠다.[22] 이 당시 잠깐 에릭과 조지의 사이가 서먹해졌지만 패티 보이드와 에릭 클랩튼의 결혼식때 조지 해리슨이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와 함께 축사를 해주면서 다시 친해졌다. 에릭의 회상에 따르면 이 때 즈음 조지가 한 번 자신의 집 초인종을 누르길래 문을 열어줬더니 브랜디가 든 물총을 자신에게 발사했다고(...) 한다.[23] 애초에 패티가 조지와 이혼한 이유 중 하나도 마약 중독 때문이다. 그나마 조지 해리슨은 힌두교의 가르침대로 1970년대 들어 마약을 끊었지만, 에릭 클랩튼은 헤로인까지 손을 대면서 제 몸 가누기도 힘든 상태가 되었다.[24] 레드 제플린의 명곡 'Stairway to Heaven'의 영향을 받았다. 코드카피를 했다고 한다.[25] 원래 JJ Cale의 곡이지만 에릭클랩튼의 커버버젼이 워낙 유명해서 많은 사람들이 에릭 클랩튼의 곡으로 알고 있다. 에릭 클랩튼은 마약의 유해성을 알려주는 곡이라고 생각한다고. 공연할 때 코러스 가사에 'that dirty cocaine'을 추가하기도 한다.[26] 어떤 곳은 1989년이라고 한다.[27] 영화 내용은 노래처럼(?) 아름답지는 않다. 마약 수사를 위해서 비밀리에 마약 소굴에 잠입한 남녀 경찰이 실제로 마약에 중독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결국 마약 밀매단을 소탕하지만 남주인공은 죽고 여주인공은 중독 상태가 되어 보호소로 가야했다... 참고로 스타크래프트의 주인공 짐 레이너의 이름도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왔다.[28] 후일담으로 Tears in Heaven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탓으로 너무 많이 부른데다 시간도 많이 지났기 때문에 더 이상 그 때의 감정이 살지 않는다며 이제 부르고 싶지 않다고 말한 일도 있다.[29] 정확히 말하자면, 2004년 이래로 부르지 않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죽은 아들인 코너를 이제는 보내 줄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30] 매케너리는 영국계 아버지와 한국-아일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한백혼혈이라고 한다.[31] 비슷하게 폴 매카트니는 1990년대 막 소련이 해체된 상태였던 러시아에서 비틀즈 앨범들의 불법 빽판이 나뒹구는 것을 보고 러시아인들에게 불법 복제를 자제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도리어 러시아 팬들이 "어차피 우리가 돈을 벌어다주는것보다 비틀즈 음악을 더 좋아하는게 중요한거 아니냐"면서 폴 매카트니경을 벙찌게 한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