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2 00:50:42

오오무라 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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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시즌 코칭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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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cccccc,#323232> '''<1군>
21 요시이 마사토 [[감독#s-1.1|
]] · 70 후쿠우라 카즈야 · 71 무라타 슈이치 · 73 카나자와 타케시
80 오츠카 아키라 · 82 오노 신고 · 84 구로키 토모히로 · 87 네모토 슌이치
88 가네코 마코토 · 90 미츠야마 히데카즈'''
<2군>
72 미키 료 · 75 호리 코이치 · 76 에무라 나오야 · 77 구리하라 켄타
78 오토나리 켄지 · 81 이시미네 쇼타 · 83 모로즈미 켄지 · 86 사부로
<재활/잔류군>
79 마츠나가 타카히로 · 85 오타니 토모히사
<트레이닝>
1군 키쿠치 다이스케 · 네모토 준페이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육성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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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드래프트 제도 미시행 오츠카 야스오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소노다 요시노리 무라타 쵸지 아리토 미치요 마에다 고스케 히에이 다다오미(5)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이노우에 케이이치 다테 야스지 사토 히로마사 박덕용(키쿠무라 토쿠요) 다나카 요시오
1976년 1977년 1978년 1979년 1980년
모리 시게카즈(5) 하카마다 히데토시 후쿠마 오사무(4) 다케모토 유키오(5) 아이코 다케시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이베 야스지 이시카와 마사루(4) 히가 요시토모(4) 가사하라 에이이치 이시다 마사히코(4)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세키 기요카즈 이라부 히데키 마에다 유키나가(4) 코미야마 사토루(4) 고이케 히데오(5)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요시다 아츠시 타케무라 준이치로 가토 다카야스(3) 사부로 사와이 료스케(4)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시미즈 마사우미(3) 와타나베 마사토 고바야시 마사히데(3) 다카하시 카오루(3) 다나카 료헤이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키타 타카시 니시오카 츠요시 우치 타츠야 쿠보 야스토모(3)
테지마 사토시(3)
야나기타 마사토시(1)
네모토 슌이치(2)(6)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오미네 유타(1)
코베 타쿠미(2)(6)
카라카와 유키(1)
핫토리 야스타카(2)(4)
키무라 유타 오기노 타카시 이시미네 쇼타(4)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후지오카 타카히로 마츠나가 타카히로(4) 이시카와 아유무 나카무라 쇼고 히라사와 타이가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사사키 치하야(4) 야스다 히사노리(4) 후지와라 쿄타 사사키 로키 스즈키 쇼타(4)
2021년 2022년 2023년 2024년 2025년
마츠카와 코 키쿠치 리쿠(4) 우에다 큐토(4)
(1) 고교생 드래프트
(2)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3)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4) 하즈레 1라운더
(5) 지명 후 미입단
(6) 1순위가 아니지만 그 해 첫 번째로 지명된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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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무라 사부로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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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치바 롯데 마린즈 우승 엠블럼 V3.svg파일:치바 롯데 마린즈 우승 엠블럼 V4.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1]
2005 2010

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36번
사토미 유스케
(1988~1994)
<colbgcolor=#ccc><colcolor=#000> 사부로
(1995~1996)
아유카와 요시후미
(1997~2000)
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2번
히라이 미츠치카
(1994~1996)
사부로
(1997~2003)
바비 발렌타인
(2004~2009)
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3번
키타 타카시
(2002~2003)
사부로
(2004~2011.6.29.)
쿠도 타카히토
(2011.6.29.~2011)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0번
쿠도 타카히토
(2010~2011.6.29.)
오오무라 사부로
(2011.6.29.~2011)
후지무라 다이스케
(2012~2016)
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3번
쿠도 타카히토
(2011.6.29.~2011)
사부로
(2012~2016)
카쿠나카 카츠야
(2017~)
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86번
모리와키 히로시
(2021~2022)
사부로
(2023~)
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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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91919><colcolor=#ffffff> 치바 롯데 마린즈 No.86
사부로
サブロー / Saburo
본명 오오무라 사부로
(大村三郎 / Saburo Ohmura)[2]
생년월일 1976년 6월 1일 ([age(1976-06-01)]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키타구
학력 PL학원고등학교 (오사카)
신체 181cm, 90kg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4년 드래프트 1순위
소속팀 치바 롯데 마린즈 (1995~2011)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1)
치바 롯데 마린즈 (2012~2016)
지도자 치바 롯데 마린즈 2군 감독 (2023~)
등장곡 유즈 - 栄光の架橋[3]
응원가 롯데 1기 시절 : SNAIL RAMP - OFF WITH YOUR HAT![4][5][6]
요미우리 시절: 응원단 자작곡[7]
롯데 2기 시절 : ザ・コブラツイスターズ - 運命船サラバ号出発[8]

1. 개요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시절2.2. 프로 시절
3. 지도자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여담

[clearfix]

1. 개요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활약했던 일본의 전 프로야구 선수. 특출난 장점은 없었지만 타격, 수비, 주루 모두 평균 이상을 해내는 베태랑 외야수였다.

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시절

당시 오사카 최고의 야구명문으로 불리던 PL학원고등학교[9]에서 고교시절을 보냈으며. 1994년 봄 고시엔 대회때 1번타자로 활약하면서 팀을 4강까지 올려놓는데 이바지했다. 졸업 후엔 대형 내야수 자원으로 주목받으며 드래프트 1순위로 치바 롯데에 입단하였는데, 당시 롯데엔 그와 같은 성씨를 가진 오무라 이와오[10]가 있던 탓에 '사부로(サブロー)'라는 등록명을 사용하게 되었다.[11]

2.2. 프로 시절

팀의 기대와는 달리 사부로는 불성실한 성격 탓에 더딘 성장세를 보였고, 프로 5년차인 1999년이 되어서야 외야수로서 비로소 1군멤버로 자리잡는데 성공은 했지만 여전히 기대에 못미치는 활약을 보였다. 그렇게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 유망주 꼬리표를 떼지 못하다가 2002년에는 첫 규정타석을, 2003년에는 첫 두자리수 홈런을 기록하며 뒤늦게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2005년과 2010년에는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특히 2005년 시즌에는 클러치 히터로서의 모습에 주목한 바비 발렌타인 감독에 의해 이승엽, 베니 아그바야니, 맷 프랑코 등의 외국인 강타자들을 제치고 4번에 자주 기용되었는데, 이는 바비 발렌타인의 야구와 '마린건 타선'을 상징하는 '연결형 4번 타자'로 매스컴의 주목을 샀다. 2할 후반대의 타율에 두 자릿수 홈런, 안정적인 외야 수비를 기대할 수 있는 올라운드 외야수로서 롯데 전력의 기둥 역할을 했다.

하지만 2011년 중순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되어버리면서[12] 팬들과 선수단은 큰 충격에 빠졌었다.[13] 하지만 시즌 후 FA로 친정팀에 복귀, 이후로는 노쇠화로 인한 하락세를 보였지만 후쿠우라 카즈야 등과 함께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내고 깨소금 활약을 펼치며 치바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인정받았다.

2016년 9월에 은퇴 선언을 했다. 2016 시즌에는 은퇴경기 딱 1경기에만 1군에 올라왔다. 이날 4번 지명타자로 나와 4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마지막 2루타를 쳤을 때의 응원 영상을 보면 그야말로 감동.

3. 지도자 경력

은퇴 이후에는 롯데 구단에서 일하다가 2020년부터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팜 디렉터로 자리를 옮겼다.

2022년에는 라쿠텐 스카우터 자문역을 맡았다가 2023년부터 친정팀에 2군 감독으로 돌아왔다. 등록명은 현역 시절과 동일하게 '사부로(サブロー)'를 사용한다.

4. 플레이 스타일

20대 중반부터 주전으로 자리는 잡았으나, 본격적으로 포텐이 터진 것은 30즈음 부터였다. 20대 시절엔 야구센스는 있지만 컨택능력이 아쉽고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평가가 있었다. 하지만 이후 '연결형 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 본격적으로 진가를 드러냈고, 실패한 1라운더라는 오명도 씻어낼 수 있었다.

전성기 기준으로 공 수 주 모두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앞서 말했듯 천부적인 센스가 뛰어났다. 득점권 타율이 좋은 편임과 동시에 젊은 시절엔 희생 번트, 30대 이후에는 희생 플라이를 적지않게 기록해내면서 준수한 작전수행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 시즌 뿐이지만, 투수친화구장을 홈으로 쓰면서 시즌 20홈런을 넘긴 적이 있을 정도로 의외로 펀치력도 좋았다.

수비는 외야수비 한정으로 매우 능숙하고 뛰어나다. 어깨도 약하지 않아서 송구능력도 평균 이상. 내야수비는 2루수로 잠깐 기회를 받았던 2001년 기준으로 썩 좋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막상 그때도 2루 수비율 9할8푼대를 기록하는 등 수치상으론 생각만큼 나쁘진 않았다. 주력은 3루까지 11.66초에 도달할 정도로 나름 빠른 편이었지만 도루를 많이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후배 중에서 그와 전반적인 툴이나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한 선수를 꼽자면 기요타 이쿠히로가 있다.

5. 여담

  • 대한민국 게임 덕후들 사이에서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시리즈가 유명했을 때, 외국인 선수 숫자 제한이 당시에도 있었는데 카타가나식 등록명 때문에 이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 이 팀에 왜 용병이 한명 더 있지?' 라고 의문을 품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이 당시 일본 프로야구가 한국에 크게 알려져 있었던 것도 아니라 벌어진 혼동.[14] 물론 비슷한 케이스로 자신의 등록명을 가타가나로 이치로라고 등록한 스즈키 이치로의 예도 있지만 당시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로 일본야구를 접한 한국의 겜덕들은 이치로라고 하면 워낙 인지도도 높았고 이름 자체도 금방 일본인 이름인게 티가 나지만 사부로는 당시 게임에서 발음에 따라 샤브로 라고 들릴수도 있어서 외국인 선수라고 여긴 사람들이 많았다. 사부로가 한국 사람들에겐 크게 알려진 선수가 아닌 탓도 있었고. 여담으로 실제 NPB 최장수 외국인 선수는 세이부에서 12년, 오릭스에서 2년 해서 도합 14년간 활동한 쉬밍지에(허명걸)이고[15], 롯데 소속이었던 기간만 한정하면 1977년부터 1987년까지 11년간 팀의 중심타자로 활약한 강타자이자 일본프로야구 통산타율 1위(.320) 보유자인 레론 리다.[16]
  • 젊은 시절엔 나름 훈훈한 얼굴 덕에 여성 팬도 많았다. 사부로가 커리어 상으로는 후쿠우라 카즈야이구치 타다히토에게 한참 밀리지만 인기에서 밀리지 않았던 것은 팀 공헌도와 더불어 얼빠들 덕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이구치한텐 한참 밀려도 후쿠우라랑 비교하면 크게는...이라고 생각했는데 후쿠우라는 2000안타를 찍었다.[17][18][19]
  • 만 24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전직 가수이자 아이돌 나카지마 미치요와 결혼했으며, 슬하에는 딸 하나와 아들 둘이 있다. 참고로, 나카지마 미치요는 란마 1/2 애니메이션의 엔딩곡을 부르기도 했다.
  • 아직 2년차 신인이었던 1996년에 시즌 10할 타자가 되기도 했다.
  •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던 시절엔 계속 카타카나로 된 사부로를 등록명을 쓰고 싶어했으나 보수적인 빡센 규저 으로 소문 난 요미우리 구단이 절대 안 된다고 하는 바람에 본명인 오오무라 사부로를 등록명으로 쓸 수 밖에 없었다.[20] 그리고 이듬해 롯데로 돌아가자마자 등록명도 사부로로 돌아왔다.
  • 2012년 FA로 복귀하면서 '롯데 사랑'을 이야기했고, 이후 2012년에 새롭게 응원가가 만들어질 때 응원가에서 이를 감안해 '사부로, 자 일어나라. 지금이야말로 사랑하는 팀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어 그 싸우는 모습을, 빛나라 사부로'라는 가사를 붙였다.
  • 홈경기 때 장내 아나운서인 타니호 에미가 사부로를 소개하는 것 또한 하나의 명물이었다. 사부로오오오오오오오~ 하고 끝을 늘리면서 소개하는데 묘한 중독성이 있다고...[21]타니호 에미 아나운서 목소리가 앳된 것에 한번 놀라고, 사부로를 길게 안 늘리고 사부로! 하고 끝내는 것에서 또 한번 놀랐다.(2002년 라인업 발표 영상)~~]
  • 사토자키 토모야가 유튜브에서 SS급 선수로 꼽았다. 누적 커리어가 SS급이라고 보기 어려운 선수지만 사토자키가 본인(...)도 SS랭크를 줄 정도로 재미로 랭크를 매긴 거고[22] 200세 이브와 메이저리그 진출을 이뤄낸 코바야시 마사히데를 S로 매긴 걸 보면 그냥 웃고 넘기면 될 랭크.이시미네 쇼타를 A랭크로 꼽은 거부터 일단 신빙성이 떨어진다
  • 등번호 3번은 2004년부터 달았는데, 원래 사부로는 입단 3년 차인 1997년부터 오랫동안 2번을 달았으나, 2004년 발렌타인 감독이 2번을 달기를 원하면서 3번으로 바꾸었다. 이후 발렌타인 감독이 팀을 떠난 후에도 3번을 유지했다가, 요미우리로 트레이드되었을 때는 트레이드 맞상대의 번호인 0번을 달았다.[23] 롯데 복귀 후에는 다시 3번을 달았으며, 은퇴 후에는 카쿠나카 카츠야에게 3번을 물려줬다.[24]

[1] 사실 2010년의 경우는 말이 우승반지지 일본시리즈 우승을 엔트리에서 겪었다는 기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치바 롯데 마린즈는 2010년에 공식적인 우승반지를 만들지는 않았기 때문. 다만 2005년에는 만들었다.[2] 요미우리 시절 한정으로는 본명으로 등록되었다. 요미우리는 오직 본명으로만 등록을 허용했기 때문.[3] 2005년부터 쓴 등장곡으로, 롯데 시절은 물론이고 잠깐 몸을 담았던 요미우리 시절에도 사용했다. 사부로를 상징하는 등장곡.[4] オオ レッツゴー サブロー ラララ... (오오 렛츠고 사부로 라라라라라)[5] 2002년부터 2010년까지 쓰였던 응원가. 사부로의 은퇴 시즌 한정으로 부활.꼴랑 1경기 나온게 함정이지만 2010년에는 원래 응원가에 가사가 추가로 붙었지만 1년 만에 폐지되었고, 부활했을 때는 2009년까지의 응원가처럼 렛츠고 사부로를 제외하면 가사가 다 사라졌다.[6] 2011년에는 다른 응원가를 사용했다. 그러나 고작 몇 달 만에 요미우리로 트레이드되었고, 복귀 후에는 아래의 응원가로 바뀌면서 묻혀버린 응원가가 되었다.[7] 夢かける ホームラン 我らの願い 届けよ 熱い想い サブロー ともにゆこう (꿈을 건 홈런 우리의 소원을 전달하라 뜨거운 마음으로 사부로 함께 가자) 보통 템포보다 느리게 부르는 것이 특징인 곡이었다. 여담으로 시즌 도중 이적하여 반 시즌만에 다시 친정팀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매년마다 CD음원을 발매하는 요미우리 응원가 중 거의 몇 안되는 비 CD음원화 응원가가 되었다.[8] 롯데 복귀 이후 응원가. サブロー さあ立ち上がれ今こそ 愛するチームのため 待っていたんだ その戦う姿を 輝けサブロー(사부로, 자 일어나라. 지금이야말로 사랑하는 팀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어 그 싸우는 모습을, 빛나라 사부로)[9] 쿠와타 마스미, 키요하라 카즈히로, 타츠나미 카즈요시, 마쓰이 가즈오, 후쿠도메 고스케, 마에다 켄타와 사부로의 팀 동료이던 이마에 토시아키 등 대선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현재는 폭력 사태에 연루되는 등의 곡절을 거쳐 휴부 상태로, 2000년대를 거쳐 오사카 고교야구의 패권은 니시오카 츠요시, 나카무라 타케야, 이와타 미노루, 아사무라 히데토, 후지나미 신타로, 모리 토모야 등을 배출한 오사카 토인고교로 넘어갔다.[10] 1969년생으로 고졸 거포 유망주였으나 난청과 잦은 부상으로 인해 주전이 되지 못하고(커리어하이는 99경기 13홈런을 기록한 1999년.) 2003년 은퇴. 그 후 해설가로 일하다가 닛폰햄, 롯데, 요코하마에서 코치를 역임했으며, 닛폰햄 시절엔 이토이 요시오, 나카타 쇼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는 요코하마 2군 타격 코치를 역임 중. 여담으로 응원가가 Old Macdonald had a farm의 반주에 맞추어 '이와이와오!'를 외치는 것이었다.[11] 비슷한 예로 스즈키 이치로가 '이치로(イチロー)'라는 등록명을 사용했다.[12] 트레이드 상대는 쿠도 타카히토라는 1981년생 (빠른이라 80년생과 동기) 외야수로 사부로에 비하면 한참 일천한 경력을 가진 백업 전문 선수였다. 쿠도는 2013년 방출당했으나 바로 주니치가 주워가서 5년간 더 현역으로 뛰었다. 이후에는 주니치에서 코치를 역임했으며 2022년 현재는 한신의 2군 외야수비 겸 주루코치를 맡고 있다.[13] 그 해 치바 마린 스타디움롯데리아에서는 '사부로 멘치카츠 버거'를 팔고 있었으나 사부로가 트레이드된 뒤 판매를 중단했다고 한다.[14] 시리즈 몇몇 작품에서는 외국인을 선수명에 별도의 분류표시를 넣어서 분류하는 작품도 있다. 예를 들어 포터블 4나 2010 PSP판은 외국인 선수의 경우, 선수명 밑에 보라색 선을 그어 놓았다.[15] 단일 팀 소속이었던 기간만으로 한정하면 세이부에서 13년간 투수 생활을 한 궈타이위엔이다. 그 밖에 주니치에서 16년간 활동한 카쿠 겐지(곽원치/궈위엔치)도 있긴 한데 카쿠 겐지는 1988년에 일본으로 귀화를 해서 제외. 오 사다하루장훈, 빅토르 스타르핀 같은 경우는 국적만 일본이 아닐 뿐 일본에서 학교를 다녀서 외국인 선수로 취급하지 않아서 이쪽도 제외된다. NPB에서 총 13시즌을 뛰었던 알렉스 라미레즈 같은 경우에는 2010년부터 외국인 선수 제한에서 풀리면서 외국인 쿼터에서 제외됐고 은퇴 후에는 일본으로 귀화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스카웃되어 일본프로야구에서 활동했던 백인천의 경우에는 출생 당시에는 일본인이었다는 유권해석 때문에 외국인 쿼터를 먹지 않았다.[16] 투수 쪽이라면 대만 출신으로써 1985~1995년까지 11년간 뛴 소 카츠오도 있으나, 이쪽도 7년차인 1991년 사카모토 요시키로 개명하고 일본으로 귀화해서 제외.[17] 후쿠우라는 20대부터 탈모가 와서 얼빠가 거의 없었다(...)[18] 대신 커리어나 상징성으로 볼 때 이구치랑 후쿠우라에게 밀려서 감독 후보로는 언급도 안 됐다(...) 이구치는 은퇴 직후 감독이 됐으며 후쿠우라는 구단 수뇌부가 대놓고 이구치 다음 감독이라고 인터뷰했을 정도인데...[19] 사부로가 잠깐이나마 국가대표에 몸을 담기도 했고, 소속팀도 잘 나가던 2000년대 중후반엔 일본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야구선수 인기투표에서 10위권 안에 들기도 했다. 비인기팀 소속의 유부남임에도 꽤 선전한 편. 참고로 해당 투표는 그 다르빗슈 유조차 유부남이라는 이유로 고전하던 투표였다. 당시에 1위를 도맡던 선수들은 사카모토 하야토가와사키 무네노리, 니시오카 츠요시등 총각 선수들(...).[20] 같은 경우로 알렉스 라미레스 역시 라미짱이란 등록명으로 바꾸려다 역시 요미우리 구단이 절대 안 된다고 하면서 실패했다.[21] 단 사부로가 1군을 막 밟던 시기에는 그냥 짧게 사부로! 하고 끝냈다[22] 아무래도 동갑이고 원클럽맨이라 팀에서 계속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것도 랭크를 후하게 준 원인이 되었을 듯.[23] 사부로의 등번호 3번은 나가시마 시게오의 영구결번이라서 달 수가 없었다.[24] 카쿠나카는 이전까지 61번을 쭉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