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00:31

이순신/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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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율

어렸을 때부터 친근하게 지낸 류성룡을 통해 권율과 처음 만났으며 이후에도 계속 서신을 주고 받으며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순신이 빌려준 함포는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격파하는 데 큰 도움[1]이 되었고, 후에 권율은 이순신이 참수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정탁, 이원익과 함께 이순신을 구해내고 자신의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이 내려지자 이순신을 자신의 군사참모로 두며 보호했다.

또한 권율의 사위 이항복 (후에 93대, 95대 영의정)은 최측근인 무관 안위를 보내 이순신을 돕게 했는데, 안위는 이순신의 오른팔 격의 인물이 되어 명량 해전에 큰 공을 세워 승리에 기여하고 이때의 공으로 전라우수사로 승진하여 이순신과 함께 한다.

하지만 난중일기를 보면 1594년 ~ 1595년(선조 27년 ~ 28년)에는 공무 및 인원 차출 등의 여러 정황에 대해 충돌하여 잠시 권율에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재밌게도 1595년 8월 17일에 적은 일기(일미일기)를 보면 권율이 원균을 질책하자 원균이 고개도 들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우스워했다고 적혀 있다. 나중에 권율은 원균을 두들겨 팬다.[2]

행정 관계로는 조선군 내에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권율은 도원수였다. 삼도 수군 통제사는 오늘날의 해군참모총장에 상응하는 직위[3]이고 도원수는 합동참모의장에 상응하는 직위이다.

권율의 행주대첩은 권율과 육군만의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이순신의 휘하 장수 (참모격) "정걸"이 육군의 군수물자를 수군으로 운송하고 배급했기에 가능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권율도, 자신보다 지위가 아래인 이순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4]

2. 원균

인물에 대한 사적 평가를 꺼리고 철저히 성과 위주로 평가를 하는 이순신임에도 원균은 그의 기록에서 극도로 부정적으로 평가되며, 아예 자를 부르는 대신 이름을 그대로 쓰거나 아예 "원흉(元凶)"이라고 부를 만큼 극도로 싫어했다. 이는 난중일기에서 찾을 수 있는 원균에 대한 언급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와서 보았다. 그 음흉함을 이를 길이 없다.
《계사년 2월 23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왔다. 그 술주정이 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망령된 짓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계사년 5월 14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웅천의 적이 감동포로 들어갈지도 모른다'면서 들어가서 치자는 공문을 보내왔다. 그 흉계가 참으로 가소롭다.
《계사년 6월 5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정걸 충청수사와 함께 도착하여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하는데, 원 수사가 하는 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흉측한 속임수들이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일을 하고도 후환이 없을까?
《계사년 7월 21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와서 영등으로 출정을 나가자고 독촉하는 데 음흉하기 짝이 없다. 자기가 거느린 배 25척은 모두 보내고 오직 7, 8척만 가지고 와서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을 쓰고 일하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다.
《계사년 8월 30일》
이순신과 원균의 첫 번째 합동 작전이었던 옥포 해전때, 전공과 관련된 행동과 장계 문제로 갈등을 빚기 시작하다가 결국 전란 2년째인 1593년부터 난중일기에 그에 대한 악평이 나오기 시작한다. 허위 공문을 올리거나, 적의 수급을 탐내며 전투 중에도 아군의 피해는 아랑곳하지 않거나, 함대 요청을 했음에도 이순신을 은근히 무시하며 늦게 오거나 한두 척만 가지고 참여하는 등등... 별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이순신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이렇게 이순신과의 갈등이 지속되자 조정에서는 1595년에 원균을 형식상으로 승진시켜 충청 병사에 임명한다.[5] 이 틈을 이용하여 이순신과 정면 대결을 꺼린 일본은 계략을 사용한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전략적 정보유출 작전에 속은 선조는 이순신에게 부산진을 공격하라 명령한다. 이순신은 무리한 명령을 거부하여 명령 불복종으로 백의종군에 처해진다. 그리고 이후 원균이 이끈 정예 조선수군은 칠천량에서 깡그리 전멸한다.

칠천량 해전 이후론 난중일기에서의 언급은 없는데 당시 이순신이 명량 해전 같이 급박한 상황에 놓여있다보니 원균을 씹을 여유가 없기도 했거니와, 이 당시 원균을 알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균이 칠천량에서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언급하기를 꺼린 것으로 보인다.

3. 류성룡

명재상 류성룡과 이순신의 관계는 유명한 사실이다. 어린 시절 한양에서 친분을 다진 이후 평생의 절친이자 서로의 조력자가 된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일개 무명의 무관이었던 이순신을 선조에게 적극적으로 천거한 인물이 류성룡이었다.[6]

둘은 각자의 저작인 《난중일기》와 《징비록》에서도 서로에 관해 자주 언급한다. 《난중일기》에서 류성룡과 서신 교환을 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이순신의 꿈에서까지 류성룡이 자주 나타나는 사실을 보면 각별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성격이 대쪽같아 일기에서 지적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다. 권율마저도 지적한 이순신에게 지적되지 않은 두 인물이 선조와 류성룡이었으니 말 다했다.[7]

한 번은 충무공에게 류성룡이 사망했다는 오보가 전해진 일이 있다. 이때 이순신은 "이건 잘못된 소문이다. 그럴 리가 없다… 근데 만약 류 정승이 돌아가셨다면 어떡하지? 점을 쳐볼까?"로 요약할 수 있다. 실제로 이날 이순신은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급기야 점까지 쳐보며 류성룡의 안위를 걱정한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에게 《증손전수방략》이라는 병법서를 보내주었다. 그 책을 읽고 나서 이순신이 책을 높이 평가하는 장면도 있다.

하지만 류성룡은 선조가 이순신에게 대노하였을 때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류성룡이 적극적으로 이순신을 변호할 경우, 이순신과 친밀한 류성룡이 나설 경우 상황이 악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적으로는 친구이나 공적으로는 재상이기에, 자칫 선조가 오해해 두 사람 모두를 숙청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밑의 김완이나 이운룡 사례를 본다면, 위선이라 볼 지경이었다. 이순신이 좋게 본 것은 자기를 빼고서 공공적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 없으니,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기록은 상호 검증 및 많은 교차 검증이 필요하다는 예시로 들 수 있다.

한편 이 류성룡과의 관계 때문에 이순신 본인은 정치에서 중립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는 남인으로 평가받았다.

4. 선조

전라좌수사 시절까지만 해도 이순신과 조선군에게 선조는 은인이었다. 선조는 의외로 국방 및 군사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관련지식도 제법 갖춘 임금이었다. 우선 '북쪽 변방에서 오랑캐가 중요한 농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니 해당 책임자인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을 징계할 것을 요청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탄원서가 두 사람의 상관이었던 이일에 의해 올라온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 곤장)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ㅡ 선조실록, 20년 10월 16일자

이는 이전에 여진족 침입 당시 전장에서 도주한 죄목에 대해 현장에서 참수하라는 왕명이 내려졌고 그 사례의 예에 해당하지 않으니 사형은 안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이순신이경록은 삭직 및 백의종군 처분에 처해졌다. 이후 1589년에 하삼도 병사 및 수사 선발에 대해 비변사에서 올라온 목록에서도 확인된다.
"아뢴 대로 하라. 서득운을 전라 병사로, 이혼을 우수사로, 신할을 경상 좌수사로, 조경을 제주 목사로 삼고자 한다. 이옥과 이경은 본처(本處)를 고수해야 하고 이빈은 범한 죄가 가볍지 않으니 경솔히 수용(收用)할 수 없다. 또 이경록(李慶祿)·이순신(李舜臣)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議啓)하라."
ㅡ 선조실록, 22년 7월 28일자

전라좌수사 임명엔 당시 진급이 지나치게 빠르다는 이유로 사간원에서 체차(遞差)[8]를 청하자 감싸주기도 했다.

이순신은 선조의 신하로서 그에게 충성했다. 1591년 류성룡은 이순신을 천거하였다. 파격적인 내용에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선조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한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1년 전이었다.

선조는 평화 시기에 큰 실책을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되는 군주였다. 다만 그의 전란 대처능력은 그의 평가를 반박하기도 힘들게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선조가 임명한 장수들은 연이어 일본군에 패퇴한다. 급기야 조선 건국이래 최초로 수도를 함락당한다. 종묘사직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유교 국가에서 이러한 행동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선조가 계속해서 개성, 평양, 의주로 피난하는 모습에 민심은 요동쳤다.

선조는 처음 이순신의 승전소식을 듣고 굉장히 기뻐하였고 그의 공을 치하해 계속해서 품계를 올려주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명성이 크게 높아지자 상황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선조의 평가가 나락으로 떨어질 때, 이순신은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는 조선에게 희망이었지만, 선조의 권력에는 크나큰 위기였다. 선조는 이순신을 크게 의식하였고, 이는 이순신을 끌어내리는 원인이 된다. 결국 이는 현재 선조의 평가를 깎아내리는 가장 큰 원인이 되어 돌아온다.

이것은 비단 선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9], 고대나 지금이나 당장 국가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은 반정이 일어나기 가장 좋은 상황이다. 당장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조선이 이성계의 반정으로 우왕최영을 몰아내고 만든 국가란 점에서[10] 선조는 이순신을 보며 이성계를 투영했을 가능성도 높다. 문제는 그나마 최영이라도 있어 이성계를 견제할 수단이라도 있던 우왕과 다르게 이순신을 견제할 수 있을만한 해군 장수가 선조에겐 없었으니 그 당시 이성계를 두려워한 우왕보다 더 이순신을 두려워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마디로 선조에게 있어 이순신은 전쟁 종결에 반드시 필요한 신하이지만 그만큼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결국 선조는 장계보고에서 이순신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공적을 쌓은 데 비해 충성심이 높아 자기가 다루기 쉬울 것으로 판단한[11] 원균을 밀어주며 이순신을 견제하고 찍어눌렀으나, 원균의 전쟁에 임하는 자세와 군인정신, 군사적 능력은 이순신 장군의 정반대였고, 결국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게 졸전에 가까운 꼬라박을 시전해 조선 수군을 궤멸시켜버리며 끝내 자기자신도 해당 전투 이후 영영 실종됐고, 결국 선조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순신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요약하자면 옥사 이전까지의 이순신은 선조에 대한 충심은 물론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며, 선조도 최소한 통제사 자리를 내릴 때까지는 이순신에게 신뢰를 보냈지만, 선조의 지나찬 권력욕 탓에 이 좋았던 군신관계는 파탄나고 말았다. 실제 이순신은 옥사 전까지만 해도 선조를 깍듯이 모시는 듯 했으나[12] 옥사 이후에는 선조에게 실망한 듯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13]

다만 이순신이 끝내 선조에 대한 충심을 완전히 버렸는지는 의문이다. 일례로 난중일기에는 임금을 원망하는 구절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14] 물론 기껏 자신이 어마어마한 노력을 가해 강군으로 키운 수군을 의도하진 않았다지만 멸망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으니 옥사 이후론 좋은 감정을 가지진 못했을거라 짐작하는 사람이 많다.[15] 즉, 옥사 이전에는 선조라는 개인에게 충심을 보였다면, 옥사 이후에는 왕이라는 '지위'에만 충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5. 이광

생전에 그를 어머니 다음으로 아낀 사람은 같은 덕수 이씨 가문의 사람이자 먼 친척 형인 이광이었다. 이광은 가문에서도 촉망받는 인재였던 친척동생이 파직을 당하자 안타까워 했고[16] 마침 자신이 전라도 군대의 총사령관인 전라감사에 있었기 때문에 친척동생인 충무공을 종사관으로 삼거나 조방장으로 삼는 등 자신의 곁에 두었다.

그 후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해오자 매우 반가워했고 웬만하면 충무공이 부탁하는 것은 자신의 재량을 이용해 모조리 들어줬다. 그리고 선조가 충무공을 의심하자 선조에게 좌수사는 절대로 그럴 인물이 아니라며 열심히 친척동생의 변호를 해주었다.

6. 김완

현장에서 윤리적으로 좋지 못하나 법적으로는 용인될 일을 벌이는 일이 잦아 처음부터 처벌 대상으로 기록되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동일한 현장에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 않아 신용받는 수하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후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뒤, 이균으로부터 해동소무란 칭호를 받았고, 그와 연관되는 사마천이 고자가 된 이유처럼 역사에 기록된 잘못된 점인 원균 등용을 신랄하게 비판하다가 좌천되는 것을 감내했다.

후에 그 후손들은 김완이 남긴 기록을 1908년에 모아 해동소무를 줄인 해소실기를 평찬했는데, 김완이 진실을 위해서라면 기득권에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계승했다라 할 수 있다.

7. 이운룡

녹둔도에서 같이 백의종군을 하게 된 인물이며, 동시에 이순신과 비슷한 궤적을 거쳐갔다. 그래서 그런지, 이순신이 많은 신뢰를 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전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직할 때에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통영에 충렬사를 세운다.

8. 이억기

방계 왕족이자 21살에 무과에 장원급제한 유능한 귀공자였던 이억기는 종9품이었던 이순신과 달리 종3품이라는 높은 관직이었지만 이억기는 이순신을 높이 평가하여 이순신이 녹둔도 전투로 처형당할 뻔하자 이순신을 옹호하여 처형당하지 않게 하였다. 이순신이 보유한 23척의 함대보다 많은 40여 척의 함대를 살려둬서 100여 척을 다 불살라먹고 겨우 3척만 남긴 원균에 비해서는 비교불가 수준으로 이순신을 도왔다만 제찰사 이정형은 선조 앞에서 그는 원균만 못 합니다 라는 심히 충격적인 평가를 했다.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던 이순신과 병력 동원 문제로 싸워 그를 애송이 취급했지만 이후 술친구 사이가 되어 친하게 된다. 이후 가톨릭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의 불화로 기밀이 유출되자 이들을 공격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적의 속임수라며 씹어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되고 이순신을 살리려 갖은 노력을 했다만 칠천량 전투에서 최후까지 싸우다 다른 장병들과 함께 갈려버렸고 이걸 듣고 풀려난 이순신은 통곡한다.

9. 이일

녹둔도 둔전관 시절 상관이다. 녹둔도 전투 이후 패전 책임을 물어 심문할 때 이순신이 공개적으로 이일의 잘못을 지적한 것을 보면 사이가 좋지는 않았던 듯 하다.

다행이 이일이 이걸 가지고 뒤끝있게 행동한다거나 하지는 않았고 시전부락을 침공할 때 아래의 이경록과 함께 공을 세울 기회를 줘 백의종군을 끝내게 했다. 이후 집필한 제승방략에서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와 그 분전을 상세히 기록했다.

원래대로라면 일본의 침공이 임박했을 때 이순신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어야 했으나 여진족을 더 경계했던 병조판서 홍여순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0. 이경록

1576년 식년시 무과에서 나란히 병과 3, 4위로 급제한 임관 동기이다. 둘이 같이 이일의 부하로 있었으나 전술한 이일의 병력지원 거절과 모함으로 인해 이순신과 같이 삭탈관직을 당하고 백의종군했다. 이후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진급할 때 이경록은 제주목사로 진급했는데 둘은 그 이후에도 계속 서신을 주고 받았으며 이경록은 제주도에서 나오는 물자를 이순신에게 계속 조달해줬다.[17] 여러모로 이순신에게는 매우 든든한 아군인데 임관 동기인 데다가 이순신에게 계속 물자를 대줬으니 이순신과 친분이 깊을 수밖에 없다.

11. 허균

홍길동전의 저자로 유명한 허균이 이순신의 친구 류성룡의 제자였으며 이순신을 존경했다. 그리고 류성룡은 허균의 동복 형 허봉의 친구였으므로 허균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8]

허균의 친가이자 부친 허엽의 집이 있는 한성부 건천동에 이순신의 생가가 있었으므로 어렸을 때부터 이순신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스승 류성룡이 이순신을 등용했을 때 이순신을 "나라를 중흥시킨 큰 기틀"이라고 불렀다. # 그리고 1605년 음력 7월 실지 이춘영(李春英)을 대신해서 이순신의 공신록권(功臣錄券)을 쓴 적이 있다. #

12. 무의공 이순신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공적으로는 상관과 부하의 관계였으나 사적으로는 허물없이 가까운 친구였다. 그래서 2명의 이순신은 전투가 없는 날은 같이 승경도를 하거나 활쏘기를 하면서 놀았다. 기록에 따르면 거의 사나흘이 멀다하고 어울렸다고 한다. 특히 충무공이 백의종군을 하게 되자 무의공이 제일 먼저 술을 들고 찾아와 밤새 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적힐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각별한지는 말 더 안해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충무공 사후에는 명나라의 장군이었던 진린의 추천을 받아 충무공의 후임 통제사로 천거받았을 정도로 능력도 있었다.

그러나 충무공 사후에는 흑화했는지 뇌물 수수건으로 파직했을 정도로 타락한 모습도 보여 빛이 바랜 감이 좀 있지만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서 전사했을때 유지를 받들고 진두 지휘하여 전투를 결국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이순신이라는 이름 자체에 무언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착각이 들게할 만큼 나름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되고 있다.


[1] 망루를 세워 공격에 임했는데 이걸 함포로 박살을 내버렸다.[2] 위에 보면 알 수 있지만 윤두수 등의 서인들이 선조를 꼬셔 (선조는 깐깐한 이순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순신을 쫓아내게 하고 낙하산으로 원균이 해군 참모 총장격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그런 후 합동참모의장인 권율은 어이가 없어하다가 부산진 출정 명령을 피하자 결국 분노가 터져 곤장 40대를 친다. 당시 부산진 출정 명령은 무모한 작전으로 판단되었으므로 백의종군 직전 이순신 또한 이러한 상황에 큰 부담을 내비쳤다. 원균은 이순신을 아니꼬워했지만 그의 안목은 인정했으므로, 패배를 두려워해 출정하지 않았다.[3] 당시는 군령권과 군정권을 구분하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해군참모총장과 해군 작전사령관을 합친 직위에 가깝다.[4] 사실 최고위 장교들 간에는 한 쪽이 직위가 높더라도 낮은 쪽을 함부로 대하는 경우는 원래 드물다. 그렇기에 권율이 바로 아래에 나오는 모 졸장을 곤장으로 팬게 특이사례인것.[5] 경상우수사는 정3품이고, 충청병사는 종2품이다. 이순신이 아군의 내분을 피하기 위해 통제사 자리를 원균에게 양보하겠다고 상소를 올렸지만 조정에서 거절하고 원균을 충청병사로 임명했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신빙성이 낮다.[6] 이때 류성룡이 천거한 세 인물이 이순신, 권율, 원균이다. 이순신은 잭팟 수준의 대박이었고 권율 역시 대성공이었지만 원균 천거는 류성룡 일생의 큰 실수로 평가받는다.[7] 선조는 이순신 입장에서야 원수같을 때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유교 국가에서 신하가 임금을 까는 것은 통념을 벗어난 일이었다. 신하로서 함부로 자신의 군주를 지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8] 동사, 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다.[9] 물론 자기 후계자인 광해군의 위신을 깎겠다고 양위쇼를 하던 모습을 보면 궁극적으론 선조 개인의 권력욕이 가장 큰 원인이긴 하다. 아무리 서자라지만 자기 자식조차 견제하는 인간인데 일개 장수를 견제하는 것에 무슨 고민을 했겠는가.[10] 심지어 당시 이성계도 외세를 몰아낸 국민 영웅의 지위를 가진 장수였다는 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이순신과 유사함을 보이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육성한 정예병들을 거느렸던 것조차도. 차이점이라면 이성계는 육전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이순신은 해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는 것과 이성계는 지방 군벌에 가까웠던 존재인 반면, 이순신은 국가에서 내려보낸 장수라는 차이 정도이다.[11] 물론 난중일기 등의 사례를 보면 어디까지나 보이는 장소에서나 충성이 갸륵한 모습을 보였지, 실제 충심이 이순신보다 높았을 가능성은 미지수이다.[12] 물론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 직접적으로 모시진 않았지만, 관아에 종이가 모자르자 종이를 바치거나, 어마어마한 전공을 세워 국가를 수호하며, 장계에 거짓을 고하지 않는 등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론 보답한 것이 맞다. 당장 지도자에게 허위보고를 올린 탓에 전황 말아먹는 상황은 세계사에서 드물지 않고, 동시기에 원균이라는 매우 명확한 반례까지 존재하고 있다.[13] 애초에 이 파직이 원인이 되어 이순신은 어머니를 여의었다. 물론 조선시대 기준으로 80대라면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진 않을 수 있으나, 실상 원인은 파직으로 잡혀간 이순신을 보러 한양까지 노구의 몸을 이끌고 가려고 한 것이 원인인 만큼 효심이 지극한 이순신 입장에선 단순한 배신감 이상으로 선조에게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14] 있다면 어머니의 상중에 임금으로부터 고기 반찬을 하사받은 날에 '비통하다.'고 적은 것 정도인데, 임금을 원망하건 아니건 상중에 고기 먹는 심정이 좋을 리는 없는지라 애매한 부분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전근대에서 왕을 욕하는건 걸리면 목숨을 장담 못하는 중죄다.[15] 당장 책잡히면 군복을 벗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망궐례를 거부하였으니, 옥사 이후에는 선조에게 크게 실망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후에는 아예 본인이 능동적으로 외국의 인물과 사적인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등 선조를 신뢰하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16] 다만 이전에 이광이 탄원서를 제출해 백의종군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기술이 있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순신은 녹둔도 전투의 결과로 "다시 공을 세워 속죄하라"는 선조의 뜻에 의해 백의종군 처분을 받은 뒤, 3개월 만에 여진족 토벌전에 종군해 우두머리를 생포하고 공을 세워 사면되었기 때문이다.[17] 원래는 본토에 병력도 증원하려고 했지만 조정에서는 제주도의 방어도 중요하다며 물자 지원만 하게 했다.[18] 친구의 동생이니만큼 자연스레 교류도 꽤 있었을 것이고, 이순신 얘기도 해 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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