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00:34

이순철/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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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2. LG 트윈스 코치 시절3. LG 트윈스 감독 시절
3.1. 감독으로서의 평가
4. 우리 히어로즈 코치 시절5. KIA 타이거즈 코치 시절
5.1. 2011년5.2. 2012년5.3.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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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삼성 라이온즈 No.81
이순철(李順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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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1998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1년간 선수 생활 후 은퇴한[1] 이순철은 이듬해인 1999년부터 곧바로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로 선임되면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2000년까지 삼성에서 주루 및 작전코치로 활동하였다.

1999년 8월 2일 이승엽이 한국프로야구 홈런 신기록이었던 43호 홈런을 쳤을 당시 3루 주루 코치로 이승엽과 포옹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삼성 코치 시절에는 별로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2000년 6월 25일 대전 한화전에서 김용희 감독 및 삼성 코칭스태프가 심판 판정에 항의하던 중 몸싸움이 발생했을 당시 이순철 코치 역시 10경기 출장 정지+벌금 200만 원이라는 징계 처분을 받았다.[2]

2. LG 트윈스 코치 시절

LG 트윈스 No.81
이순철(李順喆)

2000년 시즌 후 악감정이 남아있던 김응용[3]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취임하게 되면서 이순철은 삼성을 떠났고, 2001년 LG 트윈스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LG 트윈스 이광은 감독이 학연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있는지라 배재고, 연세대 후배의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영입했다는 추측도 있었다.[4]

이때까지만 해도 평가는 상당히 좋았다. 선수들도 '편하면서 잘 가르쳐주는 코치'라면서 좋아했고 주루코치나 작전코치로서의 능력 또한 최상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1년 올스타전 이벤트인 '올드스타전'에 출전해서 장호연을 상대로 잠실구장 좌측 펜스를 넘기는 홈런도 때려냈다. 아주 살짝 넘어가긴 했지만, 은퇴하고 몇 년이 지난 코치가 잠실 담장[5]을 넘기는 모습을 보여주는것 자체가 볼거리였다.

3. LG 트윈스 감독 시절

LG 트윈스 No.81
이순철(李順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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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22일, LG 트윈스 감독 취임식[6]

코치 시절의 호평을 바탕으로, 2003 시즌 종료 후 이광환의 뒤를 이어서 LG 트윈스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계약 기간은 3년. 이 과정이 조금 재미있는데, 당시 KBO 홍보대사로 있다가 코치 연수를 마치고 온 선동열을 2003년 하위권으로 쳐진 서울특별시 연고 구단들이었던 LG 트윈스두산 베어스 등이 감독으로 영입하려고 하였고, 각각 LG와 두산의 사령탑을 맡고 있었던 이광환과 김인식 등은 구단의 선동열 영입설에 따라 모두 팀을 떠났다. 그러나 막상 선동열은 스승 김응용 감독이 있는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로 부임하였고, 엄한 감독을 사퇴하게 만든 두 팀은 결국 기존 팀의 코치였던 이순철과 김경문을 감독으로 승격시키게 된 것.

이순철 감독의 부임 후 1군 코칭스태프도 젊게 구성되었고, 구단에서는 제2창단이라는 언론 플레이를 했다.

그러나 감독 취임 이후 이순철은 최종적으로 LG 팬들로부터 감독 취급은커녕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암군으로 굴러떨어졌다. 이 시기로 인하여 이순철은 여러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LG 골수팬들에게는 영원한 금지어로 취급받고 있다.[7]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 이순철이 재임한 3년간 LG의 성적은 6 - 6 - 7이었고, 7위를 기록하다 중도에 자진사퇴한 2006년에는 양승호 감독 대행 체제에서 최하위로 굴러떨어지는 굴욕을 맛봤다. LG가 황금기 멤버들이 어느 정도 노쇠하면서 리빌딩이나 리툴링의 필요성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러한 내용은 후술할 내용에서 반박된다.
  • 이순철 감독 체제에서 영입된 선수들은 모조리 부진했다. 물론 이건 감독의 잘못이라기보다는 하락세가 완연한 선수들을 돈 주고 들여온 프런트가 잘못이 더 크기도 하다.
    • 진필중은 두산 시절 리그 최고의 클로저로 군림했으나, 김인식 감독의 혹사 수준의 기용으로 퍼지고 있었고, 영입 직전이던 2003년에는 이미 기아에서 눈에 띄게 하락세를 타고 있었다. 그런 선수를 4년 30억이나 주고 데려왔더니 LG에 있던 3년간 sWAR 0.96이 나올 정도로 극심한 부진 끝에 계약 끝나기도 전에 방출당했다.
    • 마해영은 2004년 FA 첫 해부터 에이징 커브를 제대로 맞고 장타력이 급감하며 하락세가 완연했고, 2005년에도 기대 이하의 모습을 이어갔고 서정환 감독과 갈등을 빚는 등 좋지 않은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4년 28억 계약이 2년 남아있던 마해영을 LG는 장문석을 포함한 3대3 트레이드로 영입했으나, 2006년 OPS 0.719로 살아나지 못하고 2007년에는 1군 11경기 28타수 2안타 타율 0.071을 기록하며 커리어로우 시즌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필중과 마해영 둘 다 KIA에서 넘어온지라 KIA에 좋은 일 시키기 위해 영입한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
  • 팀의 구심점이 되었던 대표 선수들을 박대하고 내쫓았다. LG의 프랜차이즈 스타 이상훈과 1994년 신인 3인방 류지현, 김재현, 서용빈 등은 모두 이순철 재임기에 FA 혹은 트레이드로 타 팀에 이적하거나 등 떠밀리듯 은퇴하게 된다. 이상훈은 "친정팀인 LG를 상대로 더 이상 공을 못 던지겠다."라면서 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보장되는 그 6억[8]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은퇴했고, 류지현은 1군에서 배팅볼을 던지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LG 외의 다른 팀으로 가는 건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며 내야가 부실했던 SK한화 등 타 팀에서 잘 대해 줄 테니 와 달라는 오퍼를 뿌리치고 은퇴했다. 김재현은 이전부터 각서 사건으로 인해 구단과의 갈등이 있었고 결국 2004년 말 팀을 떠났으며, 서용빈 또한 2005년 복귀 이후 대부분 2군에 박아놓았고 결국 1년 뒤 은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셋의 이적과 은퇴로 LG는 팀의 구심점이 될 선수를 잃었고, 이는 10년간의 암흑기에 일조하게 된다.

    다만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1994년 신인 3인방 중 하나인 류지현은 2002년 구단과의 연봉조정 신청에서 이긴 것을 계기로 구단과의 사이가 틀어진 점을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고, 서용빈의 경우는 군 복무+노쇠화가 겹쳤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어보이는 부분도 있다. 김재현 역시 각서 파동 사건으로 인해 구단과 사이가 틀어진 점도 있었고, 오히려 당시 이순철은 "FA가 된 김재현을 꼭 잡아달라."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김재현의 인터뷰로도 프런트와의 갈등만 나오지 이순철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김재현을 보내고 다른 팀 전력을 약화시키겠다는 주제로 데려온 보상 선수를 보면 욕을 쳐먹어도 싼 수준이다.

하지만 이 역시 반론이 존재하는데, 류지현의 경우 연봉 조정 신청과 관련해서 구단과 사이가 틀어지긴 했지만, 슬럼프이긴 했어도 공수주에서 쓸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쓸모없는 선수로 판단되어 류지현의 은퇴 시기를 앞당긴 이순철의 역할도 한 몫 하긴 했다. 서용빈과 비슷하게 늦은 나이에 군복무를 마치고 온 이영우는 전성기 시절의 기량은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어깨 부상이 도지며 수비도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늦은 나이에도 7할대 중반의 OPS를 기록하며 좌타 대타감으로 준수한 활약을 보였고 충분히 1군에 붙어있을 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용빈에게 경기 감각을 익힐 기회도 주지 않고 2군에 박아둔 건 명백한 실책인 셈. 다만 서용빈은 신인 시즌의 커리어 하이를 다시 보여주지 못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리그 최하 수준의 공격력을 가진 1루수였으며, 서용빈이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박병호라는 특급 유망주를 1차지명으로 영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서용빈을 기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었다. 물론 그럼에도 일말의 여지 없이 홀대하고 내팽개쳤으며, 특히나 2006 시즌을 앞두고 서용빈을 배제하면서 데려온 마해영도 실패한 영입으로 남으며 비판을 받았다.

이들의 은퇴는 대부분 구단 보드진의 주도 하에 일어난 일이었으나, 이상훈의 경우에는 부임 당시 감독과의 불화가 언론에서 부각되다가 이상훈이 SK로 이적하는 등 실제 비판의 화살은 그 프런트가 내세운 감독인 이순철에게 갔다고 일부는 주장하기도 했다.

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신바람 야구의 대명사 이광환은 2003년 LG 감독을 맡던 시절 시즌 중 구단 수뇌부로부터 이상훈, 유지현, 김재현을 다음 시즌 구상에서 제외하라는 지령을 받았지만 '기둥 3개가 한꺼번에 빠지면 집이 무너진다. 내가 감독으로 있는 동안에는 안 된다'고 하며 결사 반대를 외쳤으나 날 자르고 이순철을 감독으로 앉힌 뒤 뒤에서 그 세 명을 정리했다고 밝히고 있다. (손윤 칼럼,스포츠2.0)[9][10].

다만, 나중에 일어난 이종범의 은퇴 권유나 위 선수들을 은퇴시킨 후에 한 언플을 볼 때 그가 해당 선수들의 은퇴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건 납득하기 힘들다. 일례로 은퇴할 당시에도 어느 정도 기량이 있어서 타 팀에서도 영입하려고 했던 유지현[11]을 공수주 전부 안 돼서 쓸모없는 선수로 매도했었다. 게다가 2004 시즌 중에는 팀의 영구결번 레전드이자 2군 투수코치인 김용수가 껄끄럽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인터뷰 중에서 했고[12] 2004 시즌 끝나자마자 김용수 코치를 쳐내고 찌질하게도 잠실구장에 걸린 영구결번 현수막까지 내려버리는 찌질함의 극치를 보였다.

사실 이 세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팀에 큰 해악이 되는데, 앞서 언급한 단점들에 방점을 콕 찍는 가장 큰 문제가 따로 있으니... 그렇게 프랜차이즈 선수들을 내친 주제에 대체 전력 육성에는 완벽히 실패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후임 감독인 김재박은 없는 자원 속에서도 이대형, 우규민, 최동수, 김정민 등을 중용해서 성공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13] 이는 감독으로서 엄청난 차이다.

이순철은 신인 육성에서 계속된 실패를 거듭했다.
  • 살이 안 찌는 체질인 추승우거포로 육성한답시고 억지로 살을 찌우게 해서 공수능력의 잠재력을 말아먹음. 이후 2007년 방출당해서 선수 인생 자체가 끝나기 직전까지 내몰렸다.[14]
  • 이순철 체제 당시 지명한 투수들인 장진용, 김기표, 신창호 등은 볼 것도 없이 갈려나갔다.[15] 당시 스카우트였던 이효봉지명 삽질로 팜을 박살내고 있었는데도 그냥 눈 뜨고 지켜만 봤다.

    이 때문에 LG는 2010년대 초반까지 특히 타자 쪽에서 중간층(1981 ~ 빠른 1988년) 선수들의 부재에 시달렸고, 염경엽김진철, 그리고 김진철 이후 2013년에 부임한 전 두산 스카우터 출신 김현홍이 적절한 스카우팅으로 팜을 재건할 때까지 LG의 팜은 암흑기에 빠져있었다.[16]

LG 팬이 그에 대해 치를 떨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원인은 바로 이동현. 이동현은 2001년과 2002년에 맹활약하면서 LG 마운드의 샛별로 떠올랐지만, 이미 경기고등학교 때부터 지나치게 혹사당한 데다가[17] 신인 시절에도 순수 불펜으로만 120이닝 이상을 던지는 등 김성근의 지나친 혹사로 인해 고생하다가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 재활중이었는데 이순철은 그런 이동현을 재활이 미처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당겨 쓰려다가[18] 수술한 부위의 인대가 탈이 나서 얼마 못 가 재수술을 받게 되었고 결국 이동현은 5년 여에 걸쳐 세 차례의 수술을 받으며 기나긴 시간을 재활에 매진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이순철이 남긴 유명한 한 마디가 있었으니, "재활은 마운드 위에서 하면 된다."[19]

이후 이동현은 무려 5년 만에 눈물겨운 복귀를 하였고 그 뒤로 LG 불펜에서 2019년까지 활약하다 은퇴했지만 그 재활 기간동안 그를 바라보는 팬들과 선수 본인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동현은 김성근 감독의 심한 혹사로 보는 의견도 있고 이동현 본인이 혹사 이후 수술+재활을 하며 쉬어야 했을 때 어거지로 등판시켜서 부상기간을 더 연장한 이순철이 까이는 비중이 많았다가, 2015년 이후 김성근이 한화 이글스에서 혹사 논란이 벌어지자 2002년 이동현의 투혼 역시 김성근의 미칠 듯한 혹사였다는 게 알려지며 김성근이 까이는 비중이 높아졌다. 결론적으로는 고교 시절부터 혹사를 당해 관리가 필요했던 선수를 신인 때부터 김성근이 무리하게 굴려서 부상이 찾아왔고 이를 이순철이 당겨 쓰며 부상을 악화시켰다는 게 중론.

이순철이 LG 감독 시절 저지른 또 하나의 대표적인 최악의 실책 중 하나가 2004년에 김재현이 FA로 SK에 이적했을 당시 보상 선수 사건이다. 당시 정우람, 윤길현, 고효준, 신승현 등의 젊고 싱싱한 투수들 중 적어도 하나는 보호 선수 명단에 끼지 못할 거라는 전망이 우세하였다. 이는 김재현을 잃은 대신 팀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허약한 마운드를 보강할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이순철은 "안재만의 영입은 SK의 내야진에 큰 구멍을 가져올 것이다."랍시고 보상 선수로 전 LG 선수였던 내야수 안재만을 지명했다. 정작 안재만은 SK, LG 어디서나 주전감은 아니었고 보상선수를 통한 소중한 전력보강 기회만 날려먹은 셈이었다.[20]

덕분에 SK는 롯데에서 FA로 풀린 만능 내야수 김태균사인 앤드 트레이드로 영입하면서 3루 자리를 메꿨고, 이후 1차 지명을 받은 최정이 주전 3루수로 성장했으며, SK에 남은 투수들도 팀의 주축 투수로 성장해 구멍은 커녕 오히려 득이 되어버렸고, 안재만은 갑상선 질환과 잦은 부상 등으로 인해 LG에서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다가 방출당하고 KIA로 이적했다가 웨이버 공시된 후 은퇴했다. 이 또한 뒤의 감독인 김기태와 비교되는 것이, 주력선수 3명을 FA로 날렸지만 보상선수 지명에서 팀의 미래를 위해 유망주들을 지명해[21] 철저히 실리를 추구하면서 이득을 봤다.
그리고 그의 비인격적인 면을 잘 드러낸 일이 바로 우규민 사건이다. 2006년 5월 11일, 삼성과의 경기 도중 김창희의 강습 타구에 머리를 직격당하고 쓰러진 일이 있었다. 당연히 모두들 부상을 우려했고 '당장 후송해서 검사받아야하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지만, 이순철은 이를 수수방관만 한 채 지켜보기만 하다가, 우규민이 다시 일어나자 그대로 계속 공을 던지게 했다. 다행히 우규민은 큰 부상을 입지는 않은 것으로 드러났지만, 감독의 선수에 대한 배려가 어느 수준인지 잘 보여주는 일화지만 참작의 여지가 없는 수준이다. 저런 응급처치가 제대로 일어나지 않아 임수혁 사건이 잠실 야구장에서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더욱 모골이 송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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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철아 우리는 네가 정말 창피하다"

결국 2006년 6월 3일, 격분한 LG 팬덤들이 얼굴을 가리고 위와 같은 플래카드를 내걸게 되었다.[22][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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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다음 날 경기에서 심판의 오심에 항의하다 퇴장 명령을 받게 되자 덕아웃에서 야구방망이 하나를 뽑아오더니 그 방망이를 집어던졌다.[25]

경기 이후, 이틀 뒤인 6월 5일 자진 사퇴했다. 잔여 경기는 수석 코치 양승호가 대행을 맡았다.

전지훈련에서의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순철 최악의 시기였으며, "이순철은 감독이 될 그릇이 절대로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26]

3.1. 감독으로서의 평가

이순철은 감독으로써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크게 실패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다른 자리에서는 모두 크게 성공했음에도 감독 시절은 이견이 없이 비판받는다.[27]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남았다.

성적 자체는 이후의 시즌들에 비해 승률이 나았으나, 운영적 문제와 도의적 문제가 있었고 덕아웃 분위기까지 경직시키며 상당히 많은 분야에서 팀에 악영향을 끼쳤다. 더불어 부임 이후 가면 갈수록 승률이 떨어졌다는 점에서 팀을 재건했다는 평가도 받기 힘들고 실제로 그가 떠난 뒤 몇 년간의 LG는 프랜차이즈 최악의 시기를 겪었다. 그 이후 LG가 그나마 팀 구실이라도 할 정도로 팀을 재건하는 데에는 5년 정도가 걸렸고 가을야구에 가는 데에는 7년이 걸렸으며, 그 이후로도 10년간 방황하다 드디어 우승을 차지했다.

우선 경기 운용의 경우, 중간계투 운용에 대한 체계적인 계획 없이 매 경기마다 5~6명 이상의 투수가 마구잡이로 등판하기 일쑤였고 이런 운용은 결국 계투진에 엄청난 부하를 일으키면서 팀 성적이 바닥을 치는 원인이 됐다. 2005년 LG의 전체 투수 등판횟수는 606회로 8개구단 최다, 2006년에는 535회로 전체 2위다. 이마저도 2006년 후반기는 양승호 대행이 팀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면서 이러한 현상이 줄어든 덕이다. 2004년 시즌에는 제구력이 개판인 서승화만 죽어라 기용했다 피를 많이 봤다. 어쨌거나 이런 운용 문제로 출첵야구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부여받았다.

후임 감독이었던 김재박과 성적을 비교해보면 이순철 305경기 129승 170패 6무 승률 0.431, 김재박 385경기 158승 217패 10무 승률 0.421으로 이순철이 근소한 차이로 승률이 더 높았다. 하지만 이순철은 휘청이던 팀에서 부임하자마자 이상훈을 내쫓는 등 팀을 만신창이로 만들었고, 대체전력 발굴은 제로에 가까웠지만 김재박은 그가 바닥까지 말아먹은 팀 추스려서 '5위'까진 해 봤다. 이병규가 임기 3년 내내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 있었고, 기껏 1년 잘 써먹은 박명환이나 옥스프링이 2~3년차에 나가떨어지는 등 차라리 성적에 관해선 김재박쪽에 실드쳐줄 건덕지가 많다.[28]

현재까지도 김재박은 DTD로 조롱받을 뿐 감독 역량 자체는 나쁘지 않았고 프런트랑 이순철이 작살낸 팀을 수습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지금은 평가가 그리 심하게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이순철은 진짜로 LG의 암흑기 장기화에 큰 역할을 했으며, 그것과는 별개로 감독 자리에서 여러 악행을 저지른 것도 사실이기에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LG 팬덤은 이순철이 관련된 모든 야구 컨텐츠는 아예 쳐다도 보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여론이 좋지 않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영구결번감인 여러 레전드들을 대책없이, 특히 이상훈을 감독이 직접 내쫓은 것 때문에 이순철하면 아직도 대다수의 LG팬이 아직도 이를 갈 정도다.[29] 선술했듯 베테랑들을 전부 퇴출시켰으나 대체 자원 육성에 완벽히 실패해서 LG는 2006시즌 들어 팀 자체가 역대급으로 황폐화된 상황이었다. 덕아웃 분위기를 경직시켜 2020년대까지 그 여파를 미치게 한 것은 덤. 단순히 성적 부진을 넘어서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팀에 피해를 주었고 그게 LG팬덤에게 큰 상처로 다가왔기에 올드 LG 팬덤에게는 아직까지도 큰 비판을 받고 있다.

훗날 해설자 활동을 하면서 견해적 차이겠지만 홈구장 더그아웃에 기타를 치는 건 좋지 않다는 건 동료나 상대팀 선수들에게 피해를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전 감독의 생각이었다고. 그만큼 아직도 LG 팬들은 현재까지 '쥐순철'만 생각하면 이를 갈 정도.

대표적인 노력파에 코치시절 보여준 능력도 나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으로서는 부진했던 이유로는 사실 LG 선수들이 막장이라서 그렇다는 '순페명장론'이 대두된 일이 있었다. 다만, 이는 현 시점 기준으로 보았을때 원균옹호론과 다를 바 없는 완전한 비정설로, 그의 선수보는 안목[30]이나 경기운용능력, 그리고 통솔력 면에서 감독을 맡는 동안 능력을 보였다고 여겨지는 분야는 사실상 없다. 특히 선수들을 자주 비판하는 특성 탓에 반감을 사기 쉬웠던데다, (LG 프런트측의 압력이 있기도 했지만) 선수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할 고참 선수들을 마땅한 대안도 없으면서 전부 내치기까지 했다. 이런 실책들은 고스란히 김재박, 박종훈 감독 시기에 일어난 팀 내 분란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31]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분명 야구지식은 많은데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자세 때문에 선수들과 융화하기 어려운 타입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본인의 능력 자체는 있지만, 본인의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커뮤니케이션에 악영향을 끼쳤고 결국 이게 본인의 나쁜 운영 능력과 겹쳐 3년간 완전히 폭망해버리고 말았다. 특히 LG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이런 타입의 감독은 상극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주루, 작전 등 제한된 분야에서 코치로서 능력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없다고 해도 좋을 선수를 보는 안목, 선수단 통솔 실패, 과도한 혹사로 인한 선수들 부상 등은 감독으로써 그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지표이다. 코치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감독으로서는 그릇이 안 되는 대표적인 경우.[32] 이순철 본인이 상당한 독설가라 선수들에게 좋은 소리를 잘 하지 않고 쓴소리가 많은 편인 것은 덤. 이후 LG가 상당히 덕아웃 분위기가 경직되는 데에는 그의 영향이 없지는 않았으리라고 여겨진다.

제 아무리 한화 시절 이후의 김성근SK의 영광의 왕조 시절 호성적에 묻혀 있던 뒷면의 좋지 않은 점이 들춰져 간혹 "그 감독은 인성은 좋거나 육성 같은 데에서 신경이라도 썼는데..." 등 재평가를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LG 시절 이순철의 경우 성적과 더불어 이러한 구설수도 상당히 많았기에 좋게 쳐줘도 한화 시절 김성근, KIA 시절 김종국 등 악명높은 종신감독들과 동급으로 취급된다.

결론적으로 이순철은 KBO 리그 역사상 손에 꼽히는 최악의 감독 중 하나로 평가된다. 확실히 그 이상으로 여겨지는 인물은 백인천이 끝이고, 그도 삼성/LG 시절은 잘했기에 순수 역량상으로는 아마도 역대 최악일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33][34] 그가 LG 트윈스에 남긴 피해는 정재공/서정환이 KIA 타이거즈에 남긴 피해와 안현호/김한수/홍준학/정현욱이 삼성 라이온즈에 남긴 피해, 김성근이 한화 이글스에 남긴 피해와 대등할 정도로 막대하다. 이로 인해 이순철은 한국 야구 최고의 레전드 중 한 명이지만 LG 트윈스 팬들에게는 영원한 금지어로 남아, 부임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의 해설이 있는 경기에서 팬들이 소리를 끄고 볼 정도로 크게 멸시받는다.

4. 우리 히어로즈 코치 시절

우리 히어로즈 No.81
이순철(李順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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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우리 히어로즈의 수석 코치로 부임했지만 당시 감독이었던 이광환의 자리를 노린다는 소문 때문에 불화가 생겼고, 김시진을 다시 감독으로 임명하면서 결국 시즌 후 둘 다 경질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LG에 있을 때 이광환의 후임이 이순철이었고, 사이가 좋을 리 없는 둘을 두었으니...

이후에는 2009 WBC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았고, WBC가 끝난 후 MBC의 해설가로 복귀하였다.

비록 이광환과 불화가 있었지만 선수들의 훈련 지도나 젊은 선수들의 태도 개선, 주루 플레이 개선에는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애당초 이 팀 자체가 선수들의 연봉 삭감으로부터 비롯된 태업과 선수들과의 친화 관계가 없던 것 때문에 수석 코치로서의 업적은 딱히 눈에 띄는 게 없다.

5. KIA 타이거즈 코치 시절

KIA 타이거즈 No.78
이순철(李順喆)

5.1. 2011년

2011년 10월 18일, KIA 타이거즈의 수석 코치로 임명되며 14년 만에 친정 팀 타이거즈로 복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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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위 짤방은 재평가 받기 시작했다.해당 영상 해당 영상은 MBC의 야구 해설프로인 '야구 읽어주는 남자'. 당시 팀에서 필요한 역할이 달랐다며 좋게 넘어간 것처럼 보이지만 이후에 이용규의 잠재력을 보지 못한, 선수 보는 눈이 하나도 없음을 증명한 것이 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현역시절 선동열 감독과는 언제고 한 번은 다시 같은 팀에서 팀을 이끌어보자며 약속을 한 모양이다. #

팬들은 최희섭양현종의 멘탈을 개조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본인도 같은 생각인지 부임 첫인사 때부터 최희섭 길들이기에 들어갔다. 상견례 때 선동열 감독의 인사 후 한마디 해달라고 하자 자기는 대화울렁증이 있다며 손사레를 치면서 "나는 최희섭과만 대화하면 된다.다른 선수들은 안해도 된다.(최)희섭이랑만 얘기하면 다 해결된다"라고 말하며 웃었다고.[35]#

5.2. 2012년

하지만 2012시즌을 앞두고 그에 대한 불안감도 높아졌다. 단적인 예가 발전 가능성이 거의 없어보이는 신종길에게 꽂혔다는 것.[36] 마무리 훈련 최고 성과라는 드립이 나왔으며 도루왕 할 것 같다는 말을 직접 할 정도라서 세간의 우려는 높아져만 갔다. 어차피 최희섭만 뻥뻥 터지게 하면 상관없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선수보는 눈이 과연 좋은지는 2012시즌이 시작되면 자명해질 듯. 선동열 감독이 사실상 타격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어서 이순철 수석 코치에게 타격을 다 맡기는 상황이라는 말이 있는 마당이니 그의 능력에 따라 김기아 타선이 될지 다이너마이트 타선이 될지 두고 볼 일.

2012년 3월 31일 이종범의 갑작스런 은퇴에 개입했다는 게 알려지자 KIA팬들에게 선동열과 함께 열심히 까였다. KIA에서도 금지어로 등극할 기세.

SK와의 개막 2연전에서 허접한 경기력으로 2연패 당하자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특히 공격야구 드립 쳐놓고 잔루만 잔뜩 적립하는 상황이라. 더구나 선동열이 타자들은 전적으로 이순철에게 맡겼기 때문에 타격코치 이건열과 함께 신나게 까였다. 야인인 선동열은 작년 KIA 야구 안 봤다고 해도 해설하며 계속해서 봐온 이순철이 과거 조범현이 했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하는 모양새라.

삼성전에서도 형편없는 경기력은 계속. 특히 팀 타율이 1할대라 그 호랑이 사랑방에서 조차 개새끼라며 이순철을 깠다. 특히 양아들 신종길이 8푼대의 맹타를 휘두르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까일 예정. 여기에 김원섭, 차일목, 홍재호 등 하위타선은 그야말로 길가의 돌멩이, 논가의 허수아비 수준이라 그냥 욕처먹었다. 수십억 들여 애리조나 간 선수들보다 겨우내 땡깡 부리고 국내서 홀로 훈련한 최희섭이 훨씬 잘하니 말 다한셈. LG시절 키운 선수 없는 무능한 코치[37]가 KIA 온다고 달라질리 없었다. KIA 팬들은 주둥이만 살았을 뿐이라고 씹었다.

6월이 되어도 KIA 타선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으며, 특히 SK와의 2연전에서 이틀 연속 영봉패를 당하기까지 하니 이순철과 이건열을 사람 취급하는 KIA팬은 깨끗하게 멸종하다시피 했다. 6월 7일 현재 KIA의 팀홈런 개수는 14개로 강정호보다 2개나 적다. 팀내 홈런 1위가 겨우 4개 친 최희섭이었다. 거기다 뜬금없이 공 줍다가 종아리 근육이 파열당해 가지가지 하는 새끼라고 욕을 처먹었다. 그나마 워낙 어그로갑인 이건열이 있어서 묻어가는 형세였지만 다들 경질되고 일본인 타코가 들어오길 바랄 지경이었다.

6월의 수석 코치로서의 모습과 해설자로서의 모습을 대조해서 보면 '말은 쉽다', '입만 살았다.'라는 관용어구가 연상될 지경. 해설자 시절 보여준 풍부한 야구이론들은 결국 현장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처절하게 인증시켜주고 있으니 실로 입야구의 아이콘이라 불러도 할 말 없게 되었다. 때문에 KIA팬들은 KIA에서 쫓겨나 다시 해설복귀한다면 이전처럼 모두까기 인형질을 못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건열이 결국 2군에 내려가면서 타격을 전담하게 되었다. 팬들은 오십보백보라며 답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 답답해했다. 그런데 2012년 6월 26일부터 KIA의 타선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것도 홈런 한방에 의한 득점이 아닌 안타를 비롯한 발야구에 의한 작전야구... 어? 근데 이건 이순철의 공이라고 보기는 무리다. 삼성에서 트레이드로 건너온 조영훈이 활력소가 된 것 + 전임 조범현 감독때 했던 특타를 부상을 이유로 그만두게 했다가 성적이 안 나오니 다시 시작하면서 타선이 불 붙은 것. 결국 2011년 조범현이 풀어놓은 숙제를 깽판치다가 답이 안 나오자 다시 원상복귀한 셈.

시즌이 지나면서 차일목이나 박기남 등 일부 선수들이 예상 밖의 활약을 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기복이 심한 타선을 붙들어놓지 못하고 있어서 욕을 먹었다. 어제는 맹타를 휘두르던 타선이 오늘은 침묵하는 등.

그러나 8월 들어 KIA 타선이 시즌 초, 즉 기복이고 뭐고 없이 그냥 꾸준히 못하는 개막장 타선으로 회귀하면서 다시 폭풍처럼 까였다.

결국 KIA가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하며 2012시즌을 마무리했다. 선감독이 타격코치로 김용달을 영입하게 되면서 이순철은 자연스레 수석 코치의 임무만 수행하게 되었다. KIA팬들은 제발 수석 코치 역할에만 충실하라는 의견을 표했다. 와중에 김응용 감독이 한화 이글스로 복귀하면서 스승을 따라 한화로 이적할 가능성이 있다는 카더라가 돌기도 했다.

선동열 감독 사임 이후 공개된 자료를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보인다. # 내용은 감독이 수석 코치와 각 부문 코치를 통해서 선수에게 오더를 전달하는 수직적 체계였다는 일화와 더불어, 2012년 대패한 사직 경기에서 [38] 수석 코치가 고참이자 간판급인 4타수 무안타인 모 선수[39] 를 공개적으로 질책하여 해당 선수가 부진에 빠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5.3. 2013년

4월까지 잘 나갔지만, 이후 팀이 급격히 무너지며 선동열 감독과 함께 까였다. 선동열 감독이 경질되면 이순철 코치가 그 자리를 이어받을 거라고 예상한 팬들도 있지만, 구단은 성적 부진을 이유로 그를 10월 5일 김평호, 조규제, 박철우 코치와 함께 재계약 포기 통보를 통해 그를 해임했다. 후임 수석 코치로는 2군 총괄코치(감독)인 한대화가 올라왔다.

대부분의 KIA 타이거즈 커뮤니티에서는 선동열과 함께 팀을 망친 원흉으로서 해임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박동희에 의하면 이순철 자신이 선동열 감독 대신 팀 부진의 책임을 진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런 측면도 없지 않고.

2013년 10월 6일 수석 코치에서 물러나기 전에 선동열 감독의 통보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그 아래이면서도 선 감독의 최측근인 수석 코치에게 책임을 물은 것 같다.

이후에는 해설가로 복귀했고, 국가대표팀 소집 때 간간히 코치를 맡았다. 2015 WBSC 프리미어 12 국가대표팀의 타격코치를 맡았으며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국가대표팀도 맡았다.


[1] 이순철 본인은 1999년까지 한 시즌 더 선수로 뛰기를 원했으나 당시 감독이던 서정환이 은퇴 및 코치 자리를 제안했다고 한다.[2] 항의 끝에 심판을 밀치고 멱살을 잡은 김용희 감독이 6경기 출장 정지+제재금 200만 원, 김용희 감독이 퇴장 당하자 허운 주심을 구타한 계형철 투수 코치는 18경기 출장 정지+벌금 300만 원 징계를 받았다. 김용희 감독이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아 경기를 지휘할 수 없게 되자 장효조 타격 코치가 6경기 동안 감독 대행을 맡았다.[3] 지금이야 시간이 오래 흘러서 이순철은 '영원한 나의 스승'이라고 김응용에게 존경심을 표하면서 화목한 사제지간의 관계를 회복했지만, 이 당시만 해도 1996년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 사건과 1997년의 방출건으로 인해서 양자간의 악감정이 서로 풀리지 않던 시기였다. 김응용 감독은 1996년 한국시리즈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성공하면서 하와이 항명 주동자들을 하나 둘 씩 정리했다.[4] 실제로 이광은이 자기 인맥이라고 쓴 인물은 오영일 투수코치, 노찬엽 타격코치, 박철영 배터리코치 세 명이다. 그나마 박철영 코치는 능력은 좋았다는 평이 있다.[5] 잠실 야구장은 현재까지도 야구장 크기가 넓어서 투수에게 매우 유리하다.[6] 옆에 있는 사람은 유성민 단장이다. 2007년 6월 지병으로 작고했다.[7] 실제로 LG 팬들 중에서는 아직도 이순철이 해설하는 경기는 아예 소리를 끄고 볼 정도로 극도로 이순철을 싫어하거나 증오하는 경우가 많다. 타 9개 구단 팬들의 경우 모두까기로 호불호가 갈리기는 해도 해설을 아예 듣기조차 거부할 정도로 이순철을 싫어하는 경우까지는 없음을 생각하면 이 LG 감독 시절이 이순철 본인은 물론 LG 팬들에게 얼마나 흑역사였는지 알 만하다.[8] 말이 6억이지 당시 물가가 지금보다 훨씬 낮았으므로 실질 금액은 훨씬 많다. 지금으로 치면 10억 정도.[9] 대부분의 라이트한 야빠들은 상당히 자극적이기로 악명높은 네이버 뉴스의 헤드라인과 그 댓글란을 중심으로 정보를 얻는 경우가 많고, 긴 분석 기사나 칼럼은 자세히 읽어보지 않거나 무관심하다. 3인방을 이순철이 퇴출시켰다고 믿고 있는 LG 팬 뿐 아니라, 프런트가 퇴출시켰다는 주장을 지지하며 이순철을 실드치던 KIA 팬 역시도 이 출처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결론은 그냥 감정적인 문제.[10] 물론 이러한 사실이 이순철의 무능한 운영, 프런트에 대한 과잉 충성 등을 덮을 수는 없으며, 얼마든지 팬으로서 깔 수 있다. 다만, 이렇게 감독으로써의 깜냥이 전혀 아니올시다인 인물을 감독으로 앉히고 입맛대로 팀을 주물러댔던 프런트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었다는 점만큼은 분명한 팩트다. 이후에도 LG 프런트는 팬들에게 비판받는 하는 행보를 꿋꿋이 밀고 나간다.[11] 실제로 은퇴 직전인 2004년 초에도 연봉 문제로 LG와 갈등을 빚던 유지현을 SK가 트레이드로 영입하기 위해 LG에 제의를 했던 적도 있고, 김인식한화 이글스 감독을 맡던 2005년 시즌 중 이미 은퇴하고 LG 코치를 하고 있던 유지현에게 우리 팀으로 와주면 잘 대우해줄테니 몸을 만들어놓으라고 한 적이 있다고 한다.[12] 김용수가 이순철보다 1살이 많은데다가 이순철은 1년을 꿇어서 실질적으로는 2학번이 차이가 나며, 학교도 각각 연세대학교(이순철), 중앙대학교(김용수)로 아예 엮이지도 않는다.[13] 단, 김정민의 경우는 은퇴 후 코치로 있던 선수를 복귀시킨 것이어서 애매하다. 그 때문에 졸지에 자리가 없어진 최승환은 결국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되었고, 홍성흔의 컨디션을 감안해서 이후 지명타자로 전향시킨 점도 있다. 물론 타격은 채상병이 더 나은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 두산에서 양의지가 성장하기 전까지 주전 포수로 활약하게 된다.[14] 다행히 당시 한화 감독이던 김인식 감독이 불러서 기회를 얻고, 한화에서 준 주전급으로 나섰다.[15] 다만 2004년 1차 지명을 받은 장진용의 경우 이미 2003년 6월에 1차 지명이 결정된 상황이었고 이순철은 당시 1군 주루코치였었다. 2006년 1차 지명자인 김기표는 특정 투수 혹사로 악명 높은 경성대학교에서 동기생 장원삼과 함께 상당히 혹사당한 상태였기에 위험성이 어느 정도 예견된 터였다.[16] 염경엽과 김진철 등이 비록 팀 내 파벌을 형성했다는 루머로 욕먹긴 하지만, 염경엽은 2009년 드랩에서 오지환, 정주현을 비롯한 선수들을 지명해 팀의 중심 유망주로 만들었고, 2010 ~ 12년에 온 김진철이 지명한 신정락, 임찬규, 유강남, 이천웅, 서상우, 최성훈, 그리고 2014년 이후 김현홍이 지명한 안익훈, 양석환 등은 곧 다가올 팀 내 세대교체에 대비할 선수들이라는 점에서 이순철 시대의 신인 발굴 실패는 독이 되고 만 셈이다.[17] 동기생으로 오승환이 있었지만 오승환은 이 당시 타자로 더 활약하고 있었으며 단국대 진학 후 대학야구 정상급 투수로 거듭났다.[18] 보통 토미 존 서저리의 경우 수술 후 공을 던지고 실전에 등판하기까지 재활기간 1년 ~ 1년 6개월 정도를 필요로 하는데 이순철은 이동현이 수술을 받은 후 8개월도 안 되어서 실전 투구를 지시했다.[19] 흔히들 이 말을 우규민에게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우규민이 아니라 이동현에게 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정작 우규민은 저 때 소화 이닝 수도 적었고 무엇보다 보여준 것도 많지 않았다. 후술하겠지만 우규민에게도 다른데도 아니고 무려 머리에 타구를 맞은 상태에서 마운드에는 코빼기도 안비치고는 연투를 시킨 정신 나간 소리를 들을 만한 일화가 있고, 사실 2003년 최다이닝 1위를 기록한 후 관리를 해주지 못하며 그 여파 때문에 어깨 부상에 시달렸던 이승호 역시 이 일화에 해당되기는 했다만, 이동현 혹사에 주목받지는 않았다.[20] 그리고 11년 뒤 양상문 감독 체제하에서 정상호를 데려온 것은 입으로만 약화를 외친 이순철의 망언과 대비된다. SK 포수 운용의 양대 축인 정상호를 데려오면서 '약점인 백업 포수의 경험 부족'을 노린 것이기 때문. 하지만 후에 정상호가 먹튀가 되면서 결과적으로 실패하긴 했지만. 두산으로 가서 박세혁 백업을 충분히 해주고 있고 SK에서 이성우 또한 데려와서 어느 정도 쓰린 속을 달랬다고 봐야한다.[21] LG가 데려온 보상선수들은 윤지웅, 나성용, 임정우인데, 이들은 2011년도 신인 지명에서 높은 순번(윤지웅이 1번, 나머지 둘은 3번)이었다.[22] 나이가 지긋한 유저가 굉장히 많은 엠엘비파크의 엘지 팬들은 거의 대부분이 입을 모아 저 문구조차도 엄청나게 많이 순화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23] 이는 5년 뒤 SK와, 18년 뒤 구단명이 바뀐 SSG에서 데자뷰가 되었다.[24] 그리고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규탄 촛불 집회에서도 현수막으로 나왔다.[25] 왼쪽의 사진은 마해영과 합성되어, 오른쪽과 같이 서로 방망이 집어던지고 싸우는 짤방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26] 실제로 감독직 사퇴 이후 코치직을 두 번 했으나 두 번 다 능력은 하나도 없음이 증명되었고, 이후 감독 제의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선수로써는 레전드이며 코치로써는 나름 성과가 있었고 해설위원으로써도 현재 가장 큰 위상을 보이는 인물 중 하나임을 감안하면 다른 건 괜찮은데 그냥 감독 일을 하는 능력만 비정상적으로 낮았다고 볼 수 있다.[27] 이 점이 백인천과의 결정적 차이점으로, 백인천은 LG 시절, 삼성 시절에서 볼 수 있듯 본인의 감독으로서의 능력이 꽤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롯데 시절 고의적인 태업으로 팀을 개박살냈다면 이순철은 감독으로서의 역량 자체가 상당히 아쉬웠다. 물론 이순철은 팀을 암흑기로 빠트린 것에 대한 고의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 중론.[28] 2002년 한국시리즈 진출팀에 2003년 팀 방어율 2위의 팀을 물려받은 이순철과 직전 3시즌 668의 성적을 낸 팀을 물려받은 김재박의 전력 차이는 분명하다. 이순철이 물려받은 팀에는 이병규와 김재현이 있었고 이승호가 에이스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장문석이 준수한 모습을 보였었다. 또한 이동현이 아직 수술대에 오르기 전이었다.[29] 이상훈이 두산 코치가 됐다고 비판하는 LG팬도 이순철에 의해 쫒겨난 것을 잘했다고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애당초 그가 현역일 때는 LG하면 이상훈!!, 이상훈하면 LG!!라는 말이 있었고 LG를 상대로 공을 던질 수 없다며 수억원대의 연봉을 포기할 정도로 LG를 사랑했던 이상훈이 더 이상 LG 트윈스에게 더 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겠다고 손을 놓아버린 것의 발단을 제공한 것 자체가 참작이 불가능하다.[30] 구체적으로 보면 추승우를 강제로 살찌워 거포로 만들려는 롯데 감독이었던 백인천와 비슷한 짓거리를 했었다. 하지만 살이 안 찌는 체질인 추승우는 빠른 발을 살려 똑딱질을 하는 쪽이 더 적합했다. 사실 백인천이 키우려 했던 김주찬은 실제로 파워 면에서도 툴이 있다 여겨졌었고 백인천 본인이 무리하게 스윙폭을 키우는 바람에 망한거지 실제로는 툴가이로 평가된다. 애초에 백인천은 리빌딩을 삼성에서 크게 성공시킨 적이 있기에 선수 보는 눈은 좋은 편이었으며 롯데 감독을 맡아서 트롤링에 가까운 짓을 저질러서 그렇지 이전에 성과는 있었다.[31] 다행히도, 이런 분란들은 김기태 체제에서 암흑기를 끊어내면서 불식되었다.[32] 이렇게 코치로선 괜찮지만, 감독감은 아니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만, 이순철의 경우는 LG 팀컬러와는 상성이 극단적으로 안 맞았던 게 더 욕을 먹는 원인이 되었다. 권위주의적인 해태에서 오랜 기간 몸담았던 레전드가 자유주의적인 LG에서 감독을 하니 전혀 맞을 수가 없었던 것.[33] 심지어 보통 자팀 감독을 최악의 감독으로 꼽는 경우가 많은데 이순철은 예외로 10개 구단 팬들이 역사상 최악의 감독 2위로 꼽는 경우가 잦으며, 이순철을 직접 겪고 백인천이 팀 내 최고 레전드 중 하나인 LG 팬들은 롯데 시절 백인천보다 더 밉다며 대등한 평가를 내릴 정도이다. 물론 LG의 레전드임에도 불구하고 LG에서 재임한 역대 최악급 감독과 LG 팬들에게 자웅을 겨룬다는 평가를 받는 롯데 시절 백인천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34] 첨언하자면 이순철은 많은 분야에서 팀에 피해를 주고 그 과정에서 LG 팬덤에게 큰 상처를 주는 바람에 비판받는다면 백인천은 감독직을 맡아놓고 대놓고 직무유기를 하는 바람에 까이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35] 그러나 이순철은 최희섭이 2012년 5월 19일 경기에서 패하고 최희섭을 공개적으로 질책했는데, 이 과정에서 최희섭은 완전히 삐딱선을 타고 망하고 만다.[36] 물론 신종길은 2013년부터 폭발하며 이순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걸 입증했다.[37] 그런데 이순철이 지금껏 맡았던 분야는 타격이 아니라, 수비, 주루였다. 타격부분은 애초에 맡아본 적이 없어서 문외한인 셈.[38] 5월 19일 경기로 추정된다[39] 이용규와 최희섭이 해당되었는데 이후 기록을 보면 최희섭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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