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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프로야구의 신인 드래프트 회의를 다룬 문서.2. 상세
정식 명칭은 신인선수 선택회의(新人選手選択会議). 드래프트 회의(ドラフト会議) 등으로도 불린다. 일본프로야구가 일본 최고의 인기 스포츠인 만큼 신인 드래프트 회의 또한 상당한 인기를 차지한다. 2013년에 열린 2014 신인 드래프트의 경우에는 1천명의 관람객과 22.6%의 시청률[1]을 기록하기도 했다.고등학교, 대학 졸업 예정 선수들이 전원 자동 지명 대상이 되었던 한국과는 달리[2] 일본은 고졸/대졸자에 한해서는[3] 신청한 선수에 한해서만 드래프트가 진행된다.[4][5] 또한 스카우터가 직접 선수 이름을 호명하는 한국과 달리 스카우터가 아나운서에게 지명 선수 이름을 전달하고 아나운서가 발표하는 식으로 드래프트를 진행하는 것도 차이점.[6]
일본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 방식은 정말 독특한데, 1965년 처음 도입된 후 여러 차례의 변경을 거쳐 현재와 같은 제도로 정착했다. 초창기에는 프로야구 입단의 메리트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한 아마추어 야구인들이 많아 입단 거부가 매우 흔했고[7] 두 자릿수 지명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드래프트로 재미를 못 본 팀들을 구제하기 위해 드래프트 번외 입단과 연습생 입단 제도도 존재했으나, 일부 팀들이 이 제도를 드래프트 경쟁을 우회해 우수한 유망주를 사전 확보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면서[8] 1990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9] 1993년부터 2006년까지는 대학/사회인 선수 한정으로 각 구단 당 2명까지 선수가 스스로 특정 구단 입단을 선택하고, 구단은 원하는 선수의 획득을 확정짓는 대신 지명권을 더 소모하는 방식으로 '역지명제도'(2001년부터 '희망 입단 범위'으로 명칭 변경)가 존재하기도 했다. 프로야구 선수의 직업 선택 자유를 존중하자는 주장[10]에서 도입되었지만 유망주들에 대한 뒷돈 제공이나 자금력이 풍부한 구단에 대형 유망주가 몰리는 등 전력 불균형 문제가 심해진다는 비판이 많았고 결정적으로 2004년 드래프트에서 메이지대학의 이치바 야스히로라는 투수에게 여러 구단이 '영양비'라는 명목으로 뒷돈을 제공한 것이 폭로되면서 범위가 1명으로 축소된 끝에 끝내 폐지되었다. 이후 1991년까지 있었던 연습생 제도와 유사한 육성선수 제도를 2005년에 도입, 2005~07년까지 따로 진행되던 대학·사회인 드래프트와 고교 드래프트가 2008년 다시 통합되는 등의 변화를 거친 끝에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착했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으로는 전 세계 어떤 종목에서도 보기 힘든 방식인 지명권 추첨제가 있다. 드래프트 원년인 1965~1966년부터 있었다가 폐지 후 1978년부터 재도입된 일본프로야구 드래프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제도로, 일본프로야구에서 구조적으로 전체 1번을 얻기 위한 고의 패배와 탱킹이 불가능한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다.[11] 12개 프로구단은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한 모든 참가자들 중에서 지역이나 성적, 연령에 상관없이 아무나 딱 1명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면 한 명의 선수가 둘 이상의 팀에 동시에 지명될 수 있다. 이 때 지명팀이 점찍은 선수를 다른 팀이 아무도 지명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해당 구단이 단독 지명권을 가져가게 되며, 2팀 이상이 1명의 선수를 지목했다면 이때부터 운에 모든 것을 맡기는 추첨식을 시작한다. 지명한 팀의 감독들이 나와서 제비뽑기를 하며, 이중 당첨된 구단이 해당 선수에 대한 지명권을 가지게 된다.[12] 이후 추첨에서 탈락한 구단들은 대체 1순위로 다른 선수를 지명할 수 있는데 이때도 중복 지명이 가능하기 때문에 또다시 2팀 이상 지명한 선수가 등장하면 또다시 지명한 팀들끼리 조 추첨을 하게 된다.
추첨제 도입 초기에는 모든 라운드에서 추첨제를 시행했으나 1991년 드래프트부터는 4순위로, 1993년 드래프트부터는 2순위로 추첨제 적용 범위가 줄어들었다. 현행 체제인 1순위 지명권 추첨제는 2001년 드래프트부터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1989년 드래프트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시오자키 테츠야 지명), 주니치 드래곤즈(요다 츠요시 지명), 히로시마 도요 카프(사사오카 신지 지명), 요미우리 자이언츠(오오모리 타케시[13] 지명)를 제외한 8개 구단이 모두 노모 히데오를 1라운드에 지명하였고 추첨 결과, 킨테츠 버팔로즈가 그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1989년 드래프트에서 나온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유이한[14] 8개 구단 동시 지명. |
이런 시스템 덕분에 매년 신인드래프트는 상당히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특히 여러 구단이 노릴만한 특출난 신인이 나오는 해는 그 선수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될지에 관심을 가지는 팬들이 많고, 최고의 신인을 우승팀이라고 무조건 하위팀에게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운만 좋으면 노려볼 수 있는 강렬한 도박성과 내심 원하던 팀이 아닌 엉뚱한 팀이 교섭권을 가져가는 경우 뭐라 표현하기 힘든 오묘한 표정을 짓는 선수의 모습, 그리고 그 선수가 자신의 진로에 대해 어떻게 결정을 내릴지 등등 화제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시청률이 본업인 야구경기보다 더 많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러한 방식은 모든 팀이 1라운드 지명을 마칠때까지만 적용되며 2라운드부터는 메이저리그나 한국프로야구와 마찬가지로 성적별 역순을 진행하게 된다.[15]
하지만 마냥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닌데, 막강한 인기와 (뒷돈 제공까지 가능한) 자본력을 갖춘 빅마켓 팀들이 대형 유망주들을 독점하는 일들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 "요미우리 아니면 프로야구 안한다!"라고 지명을 거부하는 상황도 벌어지는데, 대표적인 선수가 도하 참사 당시 오승환을 공략한 쵸노 히사요시[16]나 하라 타츠노리 감독의 조카인 스가노 토모유키[17]가 있다.[18] 때문에 드래프트 본연의 취지인 전력 균형 달성에 방해가 된다는 비판이 있다.
1라운드를 둘러싼 밀당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의 예로 2017년 드래프트의 키요미야 코타로라는 대형 신인의 케이스가 있다. 일본 럭비계의 레전드이자 대학, 실업팀 감독을 역임한 아버지를 둔 스포츠 엘리트 집안 출신으로 도쿄의 야구 명문고 와세다실업고(오 사다하루의 모교)를 나와서 1학년 때인 2015년 여름 고시엔에서도 팀의 4강 진출에 공헌하고 고교 3년 통산 111홈런을 기록하는 등 홈런타자 후보생으로서 야구팬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벌써 전구단 지명이니 최소 10구단 지명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는 상황. 다만 종목은 다르지만 스포츠계의 레전드 아버지를 둔 덕분에 아버지의 간섭이 여간 심한게 아닌데 "우리 아들을 믿고 맏길만한 시스템과 육성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구단의 지명은 거부하겠다.", "우리 아들은 메이저리그를 지망하고 있기 때문에 포스팅을 허용하지 않는 구단의 지명은 사양하겠다.", "만약 맘에 들지 않는 구단이 지명할 경우 프로 입단을 거부하고 아들은 와세다 대학에 보내겠다."[19] 등등 엄포를 넣어댔다. 아직 프로에 발도 들여놓지 않은 신인이 이렇게 고자세로 나오는 경우도 드문 일이고 웬만한 신인 같으면 이딴 소리를 하고 있으면 구단 측에서도 기존 선수들과의 팀워크를 고려해서 "그럼 지명 안해"하고 관심을 끌 상황인데 장타 포텐셜과 화제성, 풍부한 스타성에 이끌린 구단들이 키요미야 부자를 일부러 찾아와서 "그럼 저희 구단의 시스템과 육성 계획을 소개할 테니 한번 들어보시죠"하면서 무려 10개 구단이 고등학생과 학부모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벌써부터 팀 시스템이 망가진 주니치나 롯데, 훈련시설이 열악한 세이부, 신인들의 무덤이자 포스팅은 죽어도 허락하지 않는 요미우리 등이 지명하는 경우 입단을 거부할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는 등 여러가지로 화제몰이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10월 중순 들어와서는 거의 매일 어느 팀이 지명할까 가지고 스포츠 뉴스에 나오고 있는 중이다. 드래프트를 몇 시간 앞두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오가와 준지 감독은 키요미야 지명에 대한 추첨을 성공하게 해 달라고 메이지 신궁까지 참배했다고 한다(...)[20]
닛칸스포츠의 예상에 따르면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치바 롯데 마린즈,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21],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총 7개 팀이 키요미야를 1차지명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언급된 7개팀이 모두 1라운드 지명했고[22] 추첨을 통해 대어가 나오면 지명거부한다 해도 지명하는 홋카이도 닛폰햄이 제비뽑기에 성공해 교섭권을 획득! 이미 메이저로 가겠다는 오오타니를 설득해 일본을 대표하는 훌륭한 선수로 육성시킨 전례가 있으며 선수의 해외진출에 적극적인 닛폰햄 구단[23]이기에 무난하게 입단할 것으로 보인다.
2017년 드래프트 2라운드는 퍼시픽리그 꼴찌 롯데부터 지명을 시작하여 센트럴리그 1위 히로시마가 제일 마지막에 지명한다. 3라운드는 히로시마부터 시작하여 롯데까지 지명. [24]
그리고 각 팀별로도 드래프트에 따른 색깔이 존재하는데, 좀더 자세한 설명을 보고 싶은 야구 팬들은 관련 글을 참조.
위 좌표에 올라온 글은 닛폰햄 얘기밖에 없다(...) 그 외에 롯데같은 경우는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를 많이 날리는 수비력 좋고 주루센스가 좋은 똑딱이 타자[25]나 사회인 야구, 대학 야구를 경험한 베테랑 투수를 1라운드 지명자로 선호한다. 최근 지명 기록을 보면 2009년 오기노 타카시, 2010년 이시미네 쇼타, 2011년 후지오카 타카히로, 2012년 마츠나가 타카히로, 2013년 이시카와 아유무, 2014년 나카무라 쇼고, 2015년 히라사와 타이가, 2016년 사사키 치하야, 2017년 야스다 히사노리, 2018년 후지와라 쿄타인데 2011~2013년과 2016년에는 사회인 야구나 대학야구 출신의 베테랑 투수를 뽑았고, 2009, 2010, 2014, 2015년에는 수비력이 좋고 주루플레이가 능한 똑딱이/호타준족형[26] 선수를 뽑았다. 그러나 2017년에는 롯데답지 않게 정통 슬러거 스타일의 야스다 히사노리를 지명. 참고로 고교생/대학생 드래프트를 따로 하던 제도가 폐지된 이후 롯데는 단 한 번도 고졸 투수를 1라운드 지명한 적이 없다가 2019년 드래프트에서 처음 사사키 로키를 지명. 이후에 지명한 1라운더들도 스즈키 쇼타나 키쿠치 리쿠는 기존에 자주 지명하던 대졸 투수 스타일이었으나 발이 느린 거포형 포수인 마츠카와 코나 발이 느린 중장거리 3루수 우에다 큐토는 롯데에서 자주 지명하던 스타일은 아녔다.그리고 롯데도 닛폰햄만큼은 아니지만 유명한 선수를 선호하기 때문에 경합을 피하려고 좀 덜 유명한 선수를 선회지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외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육성선수 드래프트를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정식 선수보다 육성선수를 더 많이 지명하는[27] 해도 수두룩하다. 반대로 앞에서 언급한 치바 롯데 마린즈는 8명을 지명한 2008년 이후 육성선수 드래프트에서 거의 0~2명 수준밖에 지명하지 않았다.
돈지랄로 유명한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정식 선수랑 육성선수 모두 많이 뽑지만, 육성시스템이 안 좋아서 지명 거부하고 사회인야구에 가거나 취직하는 선수도 그만큼 많다. 그리고 닛폰햄은 특이하게 2017년까지 육성선수는 절대 뽑지 않았다. 팀 최초의 육성선수가 2018년에 등장했으니. 그리고 드래프트와는 상관없지만 요미우리와 주니치, 히로시마, 소프트뱅크는 외국인 육성선수를 많이 데려오는 편이다. 대체로 도미니카 공화국 등 카리브해 국가들에서 메이저 경험이 없는 젊은 선수들이 이런 경로로 들어오는데 특히 히로시마는 90년대에 이미 도미니카 공화국 현지에 야구 아카데미를 세워 싼 값에 외국인 선수를 자체 수급하고자 노력해왔다.
요코하마의 경우 DeNA시대, 엄밀히 말하자면 나카하타 키요시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대어급 선수가 있으면 일단 찍고 보는 스타일에 가까웠다. 다만 첫 추첨에서 교섭권을 얻은적이 거의 없었고 하즈레 추첨에선 그나마 조금 재미를 본 편. 알렉스 라미레스 감독 시대엔 초창기까지만 하더라도 대어급 선수를 지명했지만 2017년 드래프트부터는 추첨을 회피하기 위해 하즈레픽~2라운드픽 정도로 예상되는 선수 혹은 1라운드 지명감이면서도 상대적으로 화제성이 떨어지는 선수를 1라운드부터 단독으로 지명하는 노선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다.
한신 타이거스는 이름값과 지역 프리미엄을 중요시하는, 상당히 보수적인 픽을 한다. 저평가된 유망주보다는 주로 대학리그나 사회인에서 타이틀이 있는 검증된 선수를 선호하면서도, 특히 개중에서도 연고지인 칸사이 출신을 선호한다. 근데 그렇게 골라도 될 정도로 관서팜이 사기라서 드래프트에서 승승장구하는 팀이긴 한데, 2020년 드래프트에서는 오히려 나카노 타쿠무, 이토 마사시 등 동일본 쪽 드래프트 자원들도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외에도 주니치 드래곤즈 역시 연고지를 염두에 두고 나고야나 기타 주부 출신 선수들을 뽑고자 하는 성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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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프트 특성상 꼭 상위픽이라고 성공하고 하위픽이라고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치바 롯데 마린즈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 후쿠우라 카즈야는 1993년 드래프트에서 7라운드로 지명되었는데, 이 해에 7라운드 지명에 참여한 구단은 치바롯데 딱 한 곳이었다. 즉 전체 최하위 픽이었던 셈. 하지만 그 해에 뽑힌 입단 동기 7명 중 유일하게 2019년까지 프로 생활을 하면서 롯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28] 오릭스와 라쿠텐에서 뛰었던 고토 미츠타카 역시 2001년 드래프트에서 10라운드로 지명받은 최하위픽이었으나 개인 통산 1000안타 이상을 기록했고 2016년까지 현역으로 뛰며 나름대로 선수생활을 길게 이어나갔다. 가장 최근에는 2016년 드래프트 9라운드 지명자인 사노 케이타가 데뷔 4년만에 주장+주전 좌익수 자리를 동시에 꿰차면서 드래프트 순위가 전부는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투수 상위픽의 경우 고시엔 지역예선, 본선에서 선수가 투구수 제한이 없어서 혹사당한 경우가 많아 지명 후 1~2년 내에 수술대로 직행하는 경우가 많다. 사이토 유키, 츠지우치 타카노부[29], 안라쿠 토모히로[30] 등의 사례가 2000년대 들어 속출하고 있어서 아예 일본 프로야구 팬들도 고교, 대학 시절 혹사당한 투수는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2년 정도는 재활 및 조정기간으로 보는 중. 2018년 고시엔에서 돌풍을 일으킨 요시다 코세이도 고시엔 전경기-대표팀을 거친 혹사 때문에 2019년 6월 12일 1군 콜업을 앞두고 우려가 나오고 있다. 타자 상위픽의 경우도 알루미늄 배트로 인한 타격 인플레로 인해 나무배트에 적응하지 못하는 케이스가 늘어나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으며, 이에 따라 고교 야구부도 장타 양산을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 및 기술훈련 및 나무배트 병행 훈련 등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일본프로야구의 또 다른 차이로는 드래프트에 지명되지 못한 선수들 중에서 입단 테스트를 통해 구단이 눈여겨보지 않던 선수를 육성선수로 뽑는 KBO 리그와는 달리, 구단이 눈여겨보지 않던 선수들을 불러모아 드래프트 전에 지명권을 걸고 입단 테스트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구단이 이러는지는 미지수이나 종종 이런 일이 있다. 보통 프로 구단의 스카우터들이 지명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선수들 중에서 지원을 받아[31]서 테스트를 한다. 히로시마, 요미우리, 오릭스의 사례를 보면 타자 기준 1차로 50미터 달리기와 원투[32] 기록을 측정하여 여기서 합격한 사람들에게 직구와 변화구 등 배팅 테스트를 시킨다. 여기서 합격한 선수들 중에서 드래프트날 지명받게 된다면 입단 테스트 최종 합격(...) 육성선수도 자유계약이 불가능하고 드래프트 지명으로 뽑아야 하기 때문에 입단 테스트에 합격해도 드래프트날 지명을 받지 못하면 말짱 꽝이다. 이런 식으로 프로에 입단한 케이스로 신성현이 있다.[33]
일반적으로 드래프트에 참여하는 선수는 고졸, 대졸, 사회인, 독립리그, 해외파 정도로 나뉜다. 한국과 다른 점이라면 사회인야구의 존재, 그리고 독립리그 출신도 드래프트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34], 마지막으로 해외파가 드래프트에 참가하는 비율은 한국보다 훨씬 낮다는 것이다.[35] 그래서 사실상 고졸, 대졸, 사회인[36], 독립리그 정도. 이 중에서 한국과는 달리 대졸 출신이나 사회인야구[37] 출신을 더 선호한다. 군 문제가 없는 것도 있지만 아마야구의 육성능력도 좋아서 대학야구, 특히 6대학리그 등 수준이 높은 대학리그를 폭격한 선수는 데뷔 1년차부터 즉전감으로 씹어먹는 경우가 많기 때문. 반대로 고졸 유망주는 한국과는 달리 즉전감이 되주지 못하고, 엄청난 초고교급 선수도 보통 2년차 이후부터 활약한다. 따라서 리빌딩을 해야 하거나 하는 상황이 아니면 대졸, 대졸사회인을 더 선호한다.[38] 독립리그 출신의 경우는 99% 원석 취급이기 때문에 고졸이든 대졸이든 대부분 육성선수로 입단하며 정식으로 지명받는 선수도 보통은 최하위픽이다. 그리고 아주아주 드문 케이스로 준경식, 연식 야구부, 소프트볼부 출신의 선수나 아예 야구랑 비슷하지도 않은 다른 종목을 했던 선수[39], 야구부를 그만두고 일반 학생으로 학교를 다니다가 뒤늦게 도전한 선수 등의 사례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물론 이런 케이스는 하위픽이나 육성선수로 주로 지명되고, 지명 후에도 빠르게 정리당하는 경우가 대부분.
일반적으로 대졸의 경우는 한국이랑 똑같은 나이에 입단을 하며 대졸+사회인 테크를 거친 선수는 보통 한국 나이 26살에 입단을 한다. 사회인야구에 진출한 대졸 선수는 2년 후 드래프트부터 신청이 가능하다는 규정 때문.[40] 고졸+사회인 테크를 거친 선수는 사회인야구에서 3년을 뛰고 한국 나이 23살부터 입단할 수 있으나 보통 이 경우는 입단하는 시기가 천차만별이다. 또한 대졸+사회인 테크를 거친 선수 중에서도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물먹었다든지[41], 원래는 그냥 기업팀에 머무르며 야구를 그만두고 취직할 생각을 하다가 뒤늦게 두각을 보이면서 뒤늦게 프로팀을 꿈꾼다든지[42], 프로팀의 계약금 제의가 맘에 안들어서 지명 거부를 계속해왔다든지 하는 이유로 인해[43] 한국 나이 27, 28, 극단적으로는 30대가 넘어서 입단하는 경우도 있다.[44][45] 대신 이렇게 늦은 나이에 입단하는 선수들은 즉전감이 되지 못하면 그냥 말짱 꽝. 육성선수는 물론이고 지배 등록된 정식 지명자도 즉전으로 활약해주지 못하면 2~3년만에 잘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위픽도 얄짤없는 경우가 많다.
종종 막장 드래프트가 터지면 팬들 사이에서도 멸칭이 붙으면서 놀림감이 되곤 한다. 고졸 자포자기 지명(2011년 요코하마)[46], 즉시전력외(...) 지명(2014년 주니치)[47], 도호쿠부흥지명(2011년 야쿠르트)[48], 진짜 즉시전력외 지명(2014년 야쿠르트)[49]
의외로 고졸선수가 지명을 거부하고 대학에 갔다가 대졸로 프로에 입단하는 경우가 한국보다 적으며, 최후의 사례도 2009년 드래프트의 요카와 나오마사[50]로 한국보다 오래 전이다. 순수 입단거부 자체만 놓고 보면 2016년 드래프트에서 닛폰햄의 6라운드 지명을 받고 입단하지 않은 고졸 선수 야마구치 유지로가 마지막. 이 선수는 JR 히가시니혼 야구부에 입단한 후 사회인야구에서 뛰다가 프로에 가지 못한 채로 은퇴하고 현재는 역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3. 육성선수 드래프트
12구단 합쳐서 지명자가 120명이 안 될 시, 드래프트로 육성선수를 뽑을 수 있다. 별도의 지명 절차 없이 육성선수를 데려올 수 있는 한국과 다른 점이다. 다만 12구단 합쳐서 지명자가 120명이 되려면 평균 10라운드까지 지명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10라운드까지 내려가는 팀이 한 팀도 없는 경우가 많아서 매년 육성선수 드래프트까지 진행하게 되므로 육성선수 드래프트도 사실상 매년 진행된다고 봐야 한다.[51] 이것도 NPB가 KBO와 다른 것이, NPB에서는 지배 선수로 지명한 선수는 일단 무조건 지배 선수 엔트리에 집어넣는다. 정규 드래프트 지명자라고 해도 하위픽은 일단 육성선수로 넣어놓는 KBO와는 다르다. 그리고 육성선수로 뽑힌 선수도 소액이나마 계약금을 준다. 이것도 한국과의 차이점. 다만 지배 선수와 비교하면 계약금이 현저히 적다. NPB는 신인선수들의 계약금이 KBO에 비해서 어마어마하게 많다. 1차지명에 해당하는 1라운더는 거의 대부분 1억 엔을 안겨주고, 하위픽도 1천만엔은 안겨주는 편이라 어지간한 KBO 상위 지명자와 비슷하다. 그러나 육성선수에게는 200~300만 수준의 KBO 하위픽과 비슷한 계약금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 KBO와 다르게 계약금을 주기라도 하는것부터 더 좋은 대우긴 하지만.선술했지만 육성선수로 많이 선호되는 선수들은 주로 독립리그 선수들이나 당장의 실력은 부족하지만 싹수가 보이는 고졸/대졸 선수들이 많다. 그렇다보니 조금 써보고 답이 안 보인다 싶으면 빠르게 방출하는 경우가 많아서 육성선수 출신으로 대박난 케이스는 드물다.
실제 예시를 들자면 2017년 드래프트에는 9라운드에서 요코하마가 야마모토 유다이[52]를 지명한 것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육성선수 드래프트가 진행되었는데, 이 해의 육성선수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가 8라운드(!)까지 지명하면서 최고로 많이 지명했고, 닛폰햄과 야쿠르트는 한 명도 뽑지 않았다.[53] 소프트뱅크는 드래프트 5라운드까지만 지명하고 패스했는데 육성선수 드래프트에서는 6라운드까지 지명하며 육성선수를 더 많이 뽑았다. 육성선수 드래프트까지 포함한 최후의 지명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육성선수 8라운드 지명자 아라이 소타.[54]
정규 드래프트와 뽑는 순서는 똑같으며, 1라운드부터 지명 포기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래서 아예 안 뽑는 경우가 많고, 뽑는 구단도 1~2명만 뽑는 경우가 많다. 보통 소프트뱅크와 쿄진의 경우는 지배 선수마냥 5라운드고 6라운드고 뽑지만 타 구단은 일찍 끝내곤 한다. 다만 2019년 드래프트에서 오릭스가 8명을, 2008년 드래프트에서 롯데가 8명을 지명하는 등 평소에 육성선수를 조금 뽑던 구단이 무더기로 뽑는 경우도 있다.
KBO 리그처럼 지배 선수가 기량 부족이나 1시즌 이상의 긴 재활에 들어가서 육성선수로 전환되는 경우가 있다는건 공통점이고, 용병도 육성선수로 영입할 수 있다는 것은 차이점이다. 자세한 정보는 육성선수 문서를 참고.
육성선수 출신 최초의 신인왕은 2007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뛴 좌완 구원투수 야마구치 테츠야 였으며, 다음 해 같은 팀 소속의 외야수 마츠모토 테츠야가 육성선수 야수로는 최초로 신인왕을 차지했다. 야마구치는 2009년 홀드왕을 차지하며 육성선수 드래프티 최초의 타이틀 홀더도 되었다. 육성선수 출신으로 최초로 규정타석을 채운 선수는 2011년 치바 롯데 마린즈의 외야수 오카다 요시후미와 오릭스 버팔로즈의 내야수 아롬 발디리스 였으며 최초로 규정이닝을 채운 선수는 2012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뛴 좌완투수 야마다 히로키였다. 호크스는 2010년대 유난히 육성선수로 재미를 많이 봤는데 리반 모이넬로, 센가 코다이, 카이 타쿠야, 이시카와 슈타, 마키하라 타이세이, 슈토 우쿄 등 뛰어난 기량의 선수들을 다수 배출했다.
2020년 드래프트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무려 12라운드까지 육성선수를 뽑았고, 12구단 전원이 육성선수를 1명 이상 뽑았다. 12구단 전원이 육성선수 드래프트에 참여한 것도 사상 최초.
4. 역대 드래프트
역대 일본프로야구 신인선수 선택회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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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통 1라운드까지만 중계.[2] 한국도 2021년에 시행하는 2022년도 신인 드래프트부터 신청자에 한해 드래프트를 실시한다.[3] 사회인야구 선수는 예외다. 사회인야구 선수는 대졸 2년차, 고졸 3년차부터 전원 자동 지명 대상이 된다.[4] 대학 또는 사회인야구로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본올림픽위원회가 운동선수를 대상으로 한 취업사이트를 만들고 기업들도 운동선수들을 많이 채용하는 상황에서 굳이 프로야구 안 해도 먹고 살 길이 많기 때문. 오히려 명문대의 경우 일반 직장에 다니는 게 기대연봉이 훨씬 높다. 아울러 한국처럼 모든 선수가 엘리트 선수가 아니고 취미 활동으로 야구를 하는 선수들이 많으며 이들 절대 다수의 궁극적인 목표는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 본선 출전이지 프로 진출은 부차적인 문제다.[5] 그래서 정말 특이케이스로 야구부를 탈퇴했지만 대학은 중퇴하지 않고 일반 학생으로 대학을 다니다가 4학년 때나, 졸업한 이후에 뜬금없이 드래프트에 신청하는 케이스도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2017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 육성선수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된 카사이 타카마사. 이 선수는 와세다대학 스포츠과학부 출신이었는데 특기자가 아닌 일반 입시로 입학한 케이스였고, 입학 이후 야구부에 뒤늦게 들어갔다가 경직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틀만에 때려친 선수였다. 그리고 야구동아리에서만 뛰어오다가 4학년 때 학교를 다니면서 독립리그 생활을 시작하여 그 해 바로 프로 지명을 받았고, 심지어 2019년에는 개막 1군 로스터에도 들어갔다. 2021년 방출되어 구단 직원으로 취직할 때까지 프로 5년 간 통산 20시합 등판에 그치며 대부분의 육성선수처럼 크게 성공하진 못했으나 이런 케이스의 선수 중 가장 잘 풀린 케이스.[6] 대신 이 때문에 부정 선수를 지명하게 되면 알아서 그쪽에서 컷하기 때문에 발표되지 않는다. 2024년 드래프트에서 오릭스가 실제로 부정 선수를 지명했다가(졸업반 선수지만 드래프트에 신청을 안 했거나, 특정 팀에서 투수 2명 이상을 빼가려고 했거나 하는 등으로 지명할 수 없는 선수를 지명한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지명 불가 사유는 미공개.) 지명 불가 판정을 받고 10분이 넘는 장고 끝에 새로 지명을 해야했다.[7] 1967년 도쿄 오리온즈(치바 롯데의 전신)의 경우는 12명을 지명했는데 6명이 입단을 거부했다. 이들 중 몇 명은 그 후에 프로에 진출했으나, 1968년 드래프트로 주니치에 입단해 골든글러브 4회, 베스트나인 2회, 통산 200홈런을 기록했던 시마타니 킨지를 제외하곤 모두 프로에서 실패했다. 참고로 시마타니는 67년 드래프트 입단 거부가 3번째 입단 거부였으며, 67년 드래프트에서는 3라운드였으나 68년 드래프트에서는 9라운드까지 밀려나버렸다.[8] 1968년, 대형 투수 유망주이던 김일융과 장명부가 당시 일본 국적자만이 드래프트 대상이 된다는 제도상 헛점을 이용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의해 드래프트 번외로 입단한다던가 하는 사례가 있었다. 이외에도 번외 입단 출신의 유명 선수로 에모토 타케노리, 니시모토 타카시, 마츠나가 히로미, 아키야마 코지, 키무라 타쿠야, 이시이 타쿠로, 오노 유타카 등의 명선수들이 있었다.[9] 단 특별 예외사례로 미국에서 고등학교-대학 야구를 경험한 후루카와 유이치(조 후루카와)란 선수가 장기간 해외 체류 등의 사정을 이유로 사무국의 특별 승인을 얻어 1992년에 드래프트 번외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한 적이 있다.[10] 에가와 스구루 사건 참고.[11] 이 때문에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 특정 구단들만 득을 볼 수밖에 없는 제도라는 비판이 있었으나, 스가노 토모유키의 닛폰햄 입단거부 사태 이후 요미우리의 육성 실적이 처참해지고 타나카 세이기, 사사키 치하야 등 복수구단 경합지명 1순위 지명자들이 형편없는 활약을 보이면서 비판이 사그라들었다. 참고로 스가노를 놓친 것과는 별개로 닛폰햄은 2010년대 중후반까지 드래프트에서 마츠모토 고, 콘도 켄스케, 우와사와 나오유키, 오타니 쇼헤이 등을 뽑으며 제대로 대박을 쳤다.[12] 당첨된 구단의 종이에는 交渉権確定(교섭권확정)이라고 적혀있으며, 이 때 선수 교섭권을 획득한 팀들의 감독은 아주 별의 별 리액션이 다 나온다. 종이를 들고 좋아하는 건 물론 아라이 타카히로처럼 대놓고 요시를 외치기도 한다.(...)[13] AKB48의 오오모리 미유의 아버지. 프로에서는 2군 본즈에 그치며 성공하지 못한 채 은퇴했고, 이후 스카우터로 사카모토 하야토를 발굴한 바 있다.[14] 이듬해인 1990년 코이케 히데오가 8개팀 동시 지명을 받아 롯데 오리온즈에 지명되었으나 본인이 사전에 이미 롯데엔 절대 안 가겠다고 했음에도 당시 감독인 카네다 마사이치가 강행지명한 것이라 끝내 입단을 거부했다. 이것이 현재까지 마지막 8개 구단 동시 지명 사례로, 코이케는 사회인야구로 갔다가 2년 후 다시 드래프트에 참여해 킨테츠 버팔로즈의 단독 1위 지명을 받았으나 다승왕 1회를 제외하면 2005년 은퇴 때까지 평범한 성적에 그쳤다.[15] 리그 순서는 당해 교류전 성적 우세를 기록한 리그부터 지명한다. 즉 2라운드는 상위리그 6위=>하위리그 6위=>상위리그 5위=>하위리그 5위 순으로 진행되고 3라운드는 반대로 진행된다.[16] 니혼대학 출신으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1순위로 지명하여 교섭권을 따냈으나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외의 팀엔 절대 안 가겠다고 선언하고 사회인야구팀 Honda로 갔다가 2년 후 다시 드래프트에 참가했지만 이때도 치바 롯데 마린즈가 2순위에서 지명하자 이번에도 지명을 거부하고 Honda에 남아있었다가 결국 2009년 3번째 드래프트 때 1순위로 요미우리 입단에 성공했다. 물론 이렇게 지명거부 당하면 그 픽은 그냥 하늘로 날라가는 거다. 1순위에서 지명거부를 당하는 손해를 감당할 여력이 없어서 보통은 다들 요미우리 눈치를 보는 편. 하지만 간혹 용자가 되는 팀도 있긴 있으며, 최근에는 요미우리의 육성시스템이 안 좋은 것으로 유명하여 키요미야 코타로의 부친이 요미우리를 싫어한다는 루머가 퍼질 정도로 당당히 입단 기피팀이 되었다.[17] 2011년 드래프트에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지명했으나 입단을 거부하고 1년을 미국에서 쉰 뒤 기어코 요미우리에 단독 지명되어 프로에 입단했다.[18] 다만 특이케이스로 2008년 치바 롯데 마린즈의 1순위 지명을 받은 키무라 유타처럼 "롯데가 아니면 가지 않겠다"는 이유로 2006년 드래프트에서 요코하마에 3라운드에 지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입단을 거부한 사례가 있다(...) 이 선수는 고교 시절 세이부에게서 270만엔을 영양관리비라는 명목으로 받아먹었고, 고3때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도 1라운드로 지명해주겠다고 했으나 오매불망 롯데만을 바라왔기 때문에 사회인야구를 거쳐 2008년 롯데에 지명받고 입단하게 된다. 그러나 프로에서 8년간 47경기에 등판하여 통산 1승만 거두고 은퇴. 참고로 고향도 쿄진 팬들이 많은 아키타현이라서 치바랑 전혀 상관없는 선수였는데도 롯데 입단을 강력하게 원했다(...) 다만 롯데라는 팀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선수 본인이 도쿄에서 살고 싶다는 열망이 매우 강했고 무조건 퍼시픽리그 팀으로 가고 싶어했기 때문에 도쿄에서 가장 가까운 퍼시픽리그 팀인 롯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19] 키요미야 코타로의 아버지도 와세다 대학 출신으로 모교 감독까지 역임했다.[20] 정작 이 해 야쿠르트는 키요미야 지명엔 실패했지만 대체 1순위로 지명한 무라카미 무네타카가 키요미야보다 훨씬 대박이 나면서 해피엔딩을 맞았다.[21] 이 팀은 2020년 드래프트에서 이토 히로미를 뽑기 전까지 대어가 나오면 무조건 지명했다. 메이저 직행한다고 하든 대학을 간다고 하든 요미우리 아니면 안 된다고 하든...[22] 이 해 드래프트에서 요코하마 DeNA만이 아즈마 카츠키를 단독지명한 것이 유일한 단독지명이었다.[23] 사실 기요미야의 아버지가 제시한 조건을 100% 충족하는 곳이 닛폰햄이다.[24] 드래프트 2라운드의 시작리그는 당해 교류전성적이 우세한 리그에 우선권을 주는데 퍼시픽리그가 우위를 점해 롯데가 가장 먼저 지명을 하게 된 것이다.[25] 이 때문에 롯데의 타선은 거포가 실종되면서 죄다 똑딱이화가 진행되었다.[26] 사실 나카무라 쇼고와 히라사와 타이가는 순수 파워히터는 아녀도 홈런 파워를 겸비한 선수로 꼽혔다.[27] 부작용으로 2020년대 이후 선수풀이 비대해져서 선수들의 동기부여가 안 되고 있다.[28] 이 해 드래프트를 보면 오히려 1억 7천만엔이나 안긴 1차지명자가 제일 망했고, 후쿠우라를 제외하고 가장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해 온 선수는 마츠이 카즈오였고 6라운드 지명자였던 오노 신고 또한 2013년까지 가늘고 길게 선수생활을 이어갔다.[29] 츠지우치의 경우 이 중 선수 커리어가 가장 비참하게 끝났다. 1군 등판을 아예 해보지도 못하고 은퇴.[30] 이쪽은 결국 수술과 재활을 거쳐 1이닝 불펜 정도는 가능하게 되었고 그렇게 나름 1군 주축 불펜으로 몇 년 뛰었으나 후배들에게 똥군기를 잡은 것이 공론화되는 바람에 계약해지당하며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금지어로 전락하고 말았다.[31] 비선출도 지원 가능하다. 이 좌표에 나온 일본인은 비선출로 보이는데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입단 테스트에 참가했고, 요미우리의 테스트는 1차를 합격해서 2차 테스트까지 응시했다고 한다. 결과는 2차에서 광탈했지만.실제 비선출 일본인의 프로구단 입단 테스트 지원사례[32] 영어가 아니라 한자 遠投. 즉 롱토스.[33]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입단 테스트에 참가했는데 53명의 참가자 중 홀로 합격하여 최하위픽으로(지배 4라운드)지명받았다. 그러나 신성현은 1군 기록없이 4년만에 방출당했고 고양 원더스를 거쳐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으나 별다른 성적없이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되었다.[34] 한국의 경우는 지명이 안 돼서 독립리그로 진출한 선수는 자유계약으로 영입할수 있다.[35] 해외파 출신의 선수로는 맥 스즈키, 마이클 나카무라, 타다노 카즈히토, 타케오카 카즈히로, G.G.사토, 야마구치 테츠야 등이 있다. 이 중 스즈키, 나카무라, 타다노는 메이저리그 출신, 타케오카는 트리플 A 출신으로 흔히 한국에서 생각하는 즉전감 해외파는 저 4명이 전부이다. 그나마 2022년 드래프트에 참가하는 고스케 카토가 있어서 한 명 더 추가될 예정.(G.G. 사토와 야마구치 테츠야는 마이너리그 하위 단계를 잠깐 맛본 수준이었다.) 웃긴 건 맥 스즈키와 타케오카는 완전히 망했고, 타다노는 1군에서 자주 나왔지만 핵심 선수는 아니었다. 이들 중 유일하게 제대로 성공한 선수는 마무리 투수로 세이브왕과 통산 100세이브를 기록한 마이클 나카무라 한 명. 그나마도 30이 다 돼서 일본에 복귀한 거라 노쇠화로 인해 전성기는 3년 정도로 짧았다.[36] 사실 사회인도 고졸로 3년만 뛰고 바로 프로에 가는 선수와 고졸로 4년 이상 오래 뛰는 선수, 대졸로 사회인야구에서 뛰는 선수의 차이가 좀 난다. 그러나 독립리그는 어차피 주로 육성선수로 픽하다보니 대졸과 고졸의 차이가 적다.[37] 주로 기업팀에서 실업야구를 해 온 선수. 그러나 종종 클럽팀에서 야구를 한 선수도 있다. 단 한국의 사회인야구에 대응하는 쿠사야구(이쪽은 공도 연식공이지만) 출신은 일본에도 사실상 없다.[38] 고졸 자포자기 지명 소리를 듣는 2011년 요코하마, 스카우터가 코시엔에서 움직이지 않았냐(...)는 소리를 듣는 2019년 한신의 공통점은 KBO마냥 1명 빼고 다 고졸로 지명을 했다는 점이다.[39] 물론 이 경우는 정말 야구를 한 번도 안 해본 선수는 아니고 초등학교 시절 리틀야구를 했다가 접고 중, 고등학교 때는 다른 종목을 했던 선수인 경우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런 선수들도 대부분은 독립리그나 사회인야구 클럽팀 같은 곳을 거쳐서 프로에 지명을 받는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 시절 육상선수였고 야구는 어릴 때 하다 그만둔 것이 끝이었던 롯데의 와다 코시로가 있다.[40] 따라서 군 문제 때문에 나이가 많이 들어 서비스타임이 짧아져서 대졸을 한국이 기피한다는 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일본의 대졸사회인 선수는 한국의 대졸+상무 테크를 거친 선수랑 나이상으로 차이가 없기 때문. 물론 상무를 못 가고 현역, 공익으로 가는 선수도 있기에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상무나 예술체육요원이 아니면 일본과 달리 대졸 야구선수들은 큰 손해를 보는 게 맞다.[41] 이시카와 아유무 같은 케이스. 대졸+사회인이었는데 사회인 2년차 때 드래프트에서 미지명을 당해서 그 다음해에 입단했다.[42] 2016년 롯데 5라운드 지명자 아리요시 유키. 빠른년생이라 한국나이 28살에 프로에 입단했다.[43] 요즘은 야구선수들이 프로야구만큼 성공할 길이 없어서 이런 선수가 드물지만, 1980년대 초까지의 일본 경제의 전성기 시절에는 사회인야구 기업팀에 있다가 은퇴 후 모기업에서 근무하는 것을 포함하여 프로에 가지 않아도 진로가 상당히 많았기에 지명을 4번이나 거부한 선수도 있었다.[44] 한국 나이 30대에 프로에 입단한 선수로는 라쿠텐의 쿠사노 다이스케 등이 있다.[45] 당장 2020년에 열린 드래프트에서도 오릭스가 1992년생 투수 아베 쇼타를 6순위로 지명했다. 2021년에 입단하는 선수이니 한국 나이 30세로 프로에 진출한 것.[46] 9명 중 8명을 고졸로 채웠는데 2022년 기준 1명 빼고 다 방출당했다. 현재 생존한 선수는 외야수 쿠와하라 마사유키. 쿠와하라는 중견수로 전향한 뒤 준수한 리드오프로 뛰고 있다. 이외에 타카조 슈토도 2021년까지 트레이드로 나갔다가 도로 재입단하는 등 어찌어찌 버텼으나 2022년 시즌 후 결국 방출. 그 외의 선수들을 보자면 첫번째 방출의 아픔을 딛고 다시 구단의 부름을 받았던 코무라 토오루는 재입단 1년만에 다시 방출. 2021년까지 대타 자원으로 버티던 오토사카 토모는 훈련에 지각하거나 클럽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목격되며 구단의 신임을 잃어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고 이후 멕시코 리그로 진출하여 거기서는 탑급 리드오프가 되며 수준차이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2번의 추첨 실패끝에 지명한 1라운더 키타가타 유조는 심각한 제구 난조를 극복하지 못하고 1군 기록없이 칼방출을 당한 후 독립리그에서 ERA 7점대를 찍는가 하면 다저스 산하 마이너에서 뛰었다가 다시 독립리그를 전전하고 있는 실정이다.[47] 즉전감을 뽑겠다고 9명 전원을 대졸, 사회인, 독립리그 출신으로만 뽑았는데 5년만에 4명이 나가리. 심지어 1라운더 노무라 료스케는 3년만에 방출당했다. 2021년까지 팀에서 버티던 엔도 잇세이와 이료 마사타카조차도 21시즌 막바지 전력 외 통고를 받고 방출되면서 팀 내에서 14년 드래프티들이 모조리 전멸했다. 이들 중 5라운더에 지명된 포수 카토 타쿠마만이 롯데로 트레이드되어 현역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트레이드라는 점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카토 역시 2021년에는 사실상 전력외로 밀려있다가 포수난에 빠진 롯데가 데려가서 겨우 살아남은 것. 이대로 주니치에 남았다간 카토도 동기들의 뒤를 따라갔을 것이다.)[48] 드래프트 지명자 6명 중 4명을 도호쿠 쪽 팀 선수로 지명했다. 그리고 7년 만에 모두 방출당하면서 빠르게 전멸했다.[49] 주니치보다 한술 더 떴다. 즉전감이 필요하다고 7명 중 6명을 대졸, 사회인 선수로 지명한 후에 3년 만에 5명을 방출시켰다. 이 5명은 전부 즉전감으로 뽑은 선수였으며 유일하게 뽑은 고졸 선수도 5년만에 방출당하면서 2020년 현재는 2라운더 카자하리 렌 만이 남았다가 그 카자하리도 2020년 방출당하면서 6년 만에 죄다 방출당했다. 이들 중 카자하리는 요코하마에 입단하면서 2021년에도 NPB에서 뛰는 유일한 생존자로 남았었으나 결국 반등하지 못하고 다시 방출. 은퇴 수순을 밟으면서 14년 드래프티들이 완전히 전멸했다.[50] 고3인 2009년 요미우리의 육성선수 3라운드 지명을 받았으나 입단을 거부한 후 도쿄농업대학에 진학, 2013년 한신의 3라운드 지명을 받고 프로에 입단한다. 요미우리의 육성선수면 3군에서 뛰면서 기회를 노려야 했으니 대학 학위도 얻고 바로 지배등록도 된 셈이라 꽤 이득을 보았다.[51] 2019년까지 드래프트가 진행된 2020년 기준 마지막으로 지명된 10라운더는 2016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10라운드 지명을 받은 니시구치 나오토. 전체 역사로 따지면 1965년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의 18라운드 지명을 받은 시모무라 에이지가 최하위 라운드 지명자이다.(이 선수는 결국 위장 오더로 3경기에 이름을 올린 것 외에 경기 출전 없이 은퇴했다.)[52] 山本祐大. 전체 82위 지명.[53] 닛폰햄은 12구단 중 육성선수를 가장 터부시하는 구단이다. 2019년에야 처음으로 육성선수 제도를 이용했다.[54] 전체 114위, 육성선수 32위 지명.참고로 1군 기록 없이 4년 만에 방출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