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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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11><tablebgcolor=#a11> ||
}}}}}}}}}}}}}}} ||1. 개요
趙秋생몰연도 불명
후연의 인물. 자는 자무(子武). 사주(司州) 급군(汲郡) 조가현(朝歌縣) 출신.
2. 생애
젊은 시절에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나눠주기를 좋아하였다. 한번은 이웃인 이현도(李玄度)의 어머니가 사망하였는데, 집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이에 조추가 형에게 말했다."죽고 사는 일을 돕는 것이 곧 인(仁)의 근본입니다"
그리고는 집에 있던 두 마리 소 중 한 마리를 이현도에게 주었고, 이현도는 그 소로 어머니의 장례를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몇 년 후, 조추는 밤길을 걷다가 한 노모를 만났는데, 그녀는 조추에게 금덩이 하나를 주고 말했다. "네가 나를 묻어주어 그에 대한 보답으로 이걸 주겠다. 너는 50세 이후에 부귀할 것이니 이현도를 잊지 말아라"
그러고 나서 노모는 곧바로 사라졌다.모용수가 전진에서 관군장군을 지낼 때, 조추는 그의 참군이 되었다. 이후 천왕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하자, 조추는 1,000여 기병을 이끌고 모용수를 찾아가 말했다.
"명공(明公)께서는 연나라를 다시 세우셔야 합니다. 천시(天時)가 이미 도래하였으니 더는 기다리실 필요가 없습니다. 진왕(秦王: 부견)을 죽이고 업도(鄴都)를 점령한 후, 서쪽으로 진군한다면 삼진(三秦) 지역도 더이상 부씨(苻氏)의 것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용수는 이를 따르지 않고, 패주하여 온 부견을 낙양까지 안전하게 호위하였다.건원 19년(383년) 12월, 모용수가 업에 이르렀을 때, 장락공 부비는 그 소식을 듣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직접 나가 그를 맞이하였다. 조추는 모용수에게 좌중에서 부비를 사로잡고 업을 점거해 거병하라 권하였으나, 모용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원 20년(384년) 정월, 모용수는 정령족의 반란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황하 이남으로 내려갔다가, 오히려 정령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조추는 모용농과 함께 열인(列人)에서 거병하였고, 흉노족 도각부의 필총(畢聰)을 설득해 동이족과 오환족을 끌어들이는 공을 세웠다.
어느 정도 세력이 갖추어지자, 모용농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관도(館陶)를 공격하여 격파한 뒤, 그 군수물자와 병장기를 거두었다. 그리고 조추, 난한, 단찬(叚讃), 모여희(慕輿悕)를 보내 강대(康臺)의 목장을 공격하여 말 수천 필을 약탈하였다. 이에 보병과 기병이 구름처럼 모여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고, 장양 등은 합심하여 모용농을 사지절•도독하북제군사(都督河北諸軍事)•표기대장군으로 추대하였다. 모용농이 여러 장수들을 각기 감독하여 재능에 따라 알맞는 부서를 정하니 위아래가 숙연하였다. 모용농은 모용수가 아직 이르지 않아 감히 상을 내리지 못하였는데, 이때 조추가 모용농에게 권했다.
"군대에서 포상하지 않으면 병사들은 전쟁에 나서지 않는 법입니다. 지금 오는 자들은 모두 한때의 공을 세워 만세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자들이니, 의당 승제하여 봉배함으로써 중흥의 기틀을 넓혀야 합니다."
모용농이 이에 따라 상을 내리자, 더 많은 이들이 달려와 모용농의 군대에 합류하였고, 이를 들은 모용수는 오히려 모용농을 칭찬하며 기뻐하였다.같은 달 14일[1], 업성의 장락공 부비가 파견한 효기장군 석월이 보•기 10,000명을 이끌고 열인에 당도하자, 조추는 참군 기모등(綦母滕)과 함께 석월군의 선봉을 격파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1] 384년 정월 신묘일. 음력으로 1월 14일이고, 양력으로 2월 23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