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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토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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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E0026><colcolor=#dca600>
일본 제41대 천황
지토 천황
持統天皇
파일:지토 천황.png
출생 645년
사망 703년 1월 13일 (향년 58세)
일본 야마토국 후지와라쿄
(現 일본 나라현 가시하라시)
능묘 히노쿠마노오오치능가메야마릉([ruby(檜隈大內陵, ruby=회외대내릉)])
재위기간 황후
673년 3월 20일 ~ 686년 10월 1일
제41대 천황
690년 2월 14일 ~ 697년 8월 22일
상황
697년 8월 22일 ~ 703년 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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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왕 덴지 덴노
모후 소가노 오치노이라츠메
형제자매 7남 12녀 중 차녀
배우자 덴무 덴노
자녀 1남
관저 아스카노키요미하라노미야([ruby(飛鳥浄御原宮, ruby=비조정어원궁)])
후지와라쿄([ruby(藤原京, ruby=등원경)])
한풍 시호 지토 덴노([ruby(持統天皇, ruby=지통천황)])
화풍 시호 왜근자천지광야일여존
(倭根子天之廣野日女尊)[1]
고천원광야희천황
(高天原廣野姬天皇)[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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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진신(임신)의 난 이전까지2.2. 진신의 난2.3. 덴무 덴노의 황후2.4. 오오쓰 황자의 모반 사건2.5. 지토 덴노의 칭제와 즉위2.6. 양위2.7. 죽음과 능묘
3. 치세
3.1. 남편의 업적 계승3.2. 외교3.3. 후지와라쿄 건설3.4. 신격화
4. 가족관계5. 기타6. 백인일수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제41대 천황이자, 네 번째 여성 천황이다.

최초의 여성 천황은 스이코 덴노이며, 고교쿠 덴노가 두 번째인데 양위한 고토쿠 덴노 사후 사이메이 덴노로 다시 즉위하면서 두 번째이자 세 번째 천황이 되었기에 지토가 네 번째인 것이다. 휘는 우노노사라라(鸕野讚良)다.

아버지는 제38대 덴지 덴노이며, 어머니는 덴지 덴노의 후궁인 소가노 오치노이라쓰메(蘇我遠智娘)로, 소가씨 일족인 소가노 이시와카마로의 딸이다. 제40대 덴무 덴노의 조카 겸 황후이자, 제39대 고분 덴노의 이복누나이며, 여성 천황인 제43대 겐메이 덴노의 이복 언니이자 이종사촌[3]이며 시어머니이기도 했다.

2. 생애

2.1. 진신(임신)의 난 이전까지

나카노오오에 황자의 딸로 어머니는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石川麻呂)의 딸 오치노이라쓰메(遠智娘)였다. 친언니로 오오타노 히메미코(大田皇女)가 있었다.

외할아버지 이시카와마로가 무고로 인해 다이카 5년(649년) 아버지 나카노오오에에게 공격당해 자살하고, 이시카와마로의 딸로 나카노오오에의 아내(나아가 우노노사라라 히메미코의 이모)였던 미야쓰코히메(造媛)도 아버지의 죽음을 한탄하며 얼마 못 가 병사했다. 《일본서기》 <지토 덴노 즉위전기>(即位前紀)에 따르면 우노노사라라 황녀의 어머니 오치노이라쓰메는 미노쓰코노이라쓰메(美濃津子娘)로 되어있는데, 미노를 당시 미노(三野)로도 적었던 데서, 미노의 '미노'(みの)가 '미야'(みや)로 잘못 발음되어 미야쓰코히메(造媛)라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미노쓰코노이라쓰메와 오치노이라쓰메가 동일인물이라면 우노노사라라 황녀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것이 된다.

사이메이 천황 3년(657년), 13세의 나이로 숙부 오오아마노 미코(大海人皇子, 훗날의 덴무 천황)에게 시집갔다. 그녀뿐 아니라 친언니 오오타노 히메미코, 오오에노 히메미코(大江皇女), 니타베노 히메미코(新田部皇女) 등 나카노오오에 황자의 딸 네 명이 모두 오오아마 황자에게 시집갔는데 그것은 나카노오오에 황자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 사이메이 천황 7년(661년)에 우노노사라라 히메미코는 남편을 따라 천황을 수행하여 규슈까지 갔다. 그 땅에서 덴지 천황 원년(662년)에 구사카베 황자(草壁皇子)를 낳았는데, 친언니 오오타노 히메미코도 이듬해 오오쓰노 미코(大津皇子)를 낳았다. 덴지 천황 6년(667년) 이전에 오오타노 히메미코가 숨을 거두면서 우노노사라라 히메미코가 오오아마 황자의 다른 아내들 가운데서도 가장 신분이 높은 자, 즉 제1부인이 되었다.

2.2. 진신의 난

덴지 천황 10년(671년), 오오아마 황자는 정쟁을 피해 요시노에 은거했고, 우노노사라라 히메미코도 아들 구사카베 황자를 데리고 따랐다. 《일본서기》 등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오오아마 황자의 부인으로서 요시노까지 따라간 것은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

오오아마 황자는 이듬해 결기해 진신의 난을 일으켰고, 히메미코는 아들 구사카베 황자 및 오오아마 황자의 다른 아들로 자신의 소생이 아닌 오사카베 황자(忍壁皇子)를 데리고 남편을 따라 미노를 향한 탈출을 강행했다. 병들고 지쳐 오오아마 황자와도 헤어져 구와나(桑名)에 당도했는데, 《일본서기》에는 오오아마 황자와 "함께 모의를 정했다."고 기록하여 진신의 난에서 우노노사라라 히메미코가 오오아마 황자에게 반란의 계획에 관련된 의견을 냈음이 알려져 있다.

한편 진신의 난 때 현지의 호족 오와리노 오오스미(尾張大隅)가 '천황'에게 사택을 제공했음을 《속일본기》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한 '천황'이 덴무 천황(오오아마 황자)인지 아니면 우노노사라라 히메미코(지토 천황)인지는 설이 나뉜다.

2.3. 덴무 덴노의 황후

진신의 난에서 승리한 오오아마 황자는 덴무 2년 정월 천황으로 즉위했고, 우노노사라라 히메미코도 황후가 되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덴무 천황이 재위하던 중에 황후는 늘 천황을 도와 옆에서 정치에 관한 조언을 했다고 한다.

679년에 덴무 천황과 황후, 그리고 여섯 명의 황자는 요시노에서 맹약(盟約)을 맺었는데(요시노 맹약), 이 여섯 명의 황자란 구사카베 황자와 오오쓰노 미코(大津皇子), 다케치노 미코(高市皇子), 오사카베노 미코, 가와시마노 미코(川島皇子), 시키노 미코(芝基皇子, 志貴로도 표기)로서 선황 덴지 천황의 황자인 가와시마와 시키를 제외하면 모두 덴무 천황의 아들들이었다. 덴무 천황은 황자와 더불어 다투지 말고 협력할 것을 맹세하게 하고 그들을 한데 끌어안았으며, 이어서 황후도 황자들을 끌어안았다고 한다.

황후가 병을 얻었을 때 덴무 천황이 황후의 병 쾌유를 빌며 건립한 것이 야쿠시지였다. 681년, 천황은 황후와 함께 대극전(大極殿)에 나아가, 황자와 여러 황족, 신료들 앞에 율령의 편찬을 시작했고, 당시 19세였던 구사카베 황자를 황태자로 삼을 뜻을 밝혔다. 당시 실무능력이 없었던 어린 아이를 황태자로 세운 전례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황후의 강한 요망으로 이러한 태자 책봉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685년경부터 덴무 천황은 병세가 차츰 진행되어, 황후가 대신 통치권자로서 존재감이 높아졌고, 686년 7월에 천황이
"천하의 일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황후 및 황태자에게 보고하라."
는 칙을 내리면서 우노노사라라노 히메미코·구사카베 황자 모자가 공동으로 정무를 맡게 되었다.

2.4. 오오쓰 황자의 모반 사건

원래 덴무 천황의 후계자로는 오오타노 히메미코 소생의 오오쓰노 미코가 또 있었다. 오오쓰 황자는 구사카베 황자보다 한 살 어렸지만, 어머니쪽 신분은 구사카베 황자와 같았다. 두 황자에 대해 《일본서기》는
"언행이 뛰어나 덴무 천황이 아꼈으며 학문에 재능이 있었으니 시부(詩賦)의 흥성이 오오쓰에서 비롯되었다."
고 칭찬하고 있지만, 구사카베 황자에 대해서는 어떤 찬사 같은 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구사카베 황자의 혈통을 옹호하는 정권 아래서 《일본서기》가 편찬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두 황자의 능력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의심할 나위도 없는 것이었다. 둘의 어머니는 친자매였지만 오오쓰노 미코는 일찍 그 어머니를 여읜 것에 비해 구사카베 황자는 그 어머니가 실권자인 황후의 지위에 있어 강한 후견인이 되어주고 있었다는 것이 큰 차이였다. 구사카베 황자가 황태자가 된 뒤에도 오오쓰노 미코는 조정에에 출사하고 있었지만, 황태자로서의 구사카베 황자의 지위는 결정되어 있었다.

덴무 천황이 죽은 바로 다음 달인 10월 2일, 오오쓰 황자는 모반이 발각되어 자결했다. 이는 가와시마 황자의 밀고에 따른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반 계획이었는지조차 사서에는 남아있지 않다. 황위 계승을 실력으로 다투는 것은 이 시대까지는 흔한 일이었고, 오오쓰 황자에게 황위를 얻으려는 움직임이나 뭔가 불온한 언동이 있었기에 그것을 알게 된 황후가 재빨리 손을 써서 황자를 제거했거나, 모반 계획이라는 것도 구체적으로 기록에 밝혀지지 않은 점에서 구사카베 황자의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오오쓰 황자를 사전에 미리 역모 혐의를 씌워서 제거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는데, 우노노사라라 히메미코의 오오쓰 황자 모반 사건에 대한 신속한 반응에서 그러한 천황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2.5. 지토 덴노의 칭제와 즉위

덴무 천황의 시신은 2년 3개월에 걸쳐 황족, 신하들이 참석한 일련의 장례를 거쳐 능에 안치되었다. 이때 황태자가 관인들을 통솔하는 듯한 모습이 보였기에 구사카베 황자를 황위 계승자로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구사카베 황자는 689년 4월에 그만 병으로 급서하고 말았다. 우노노사라라 히메미코는 구사카베 황자의 아들 즉 손자인 가루노 미코(輕皇子, 훗날의 몬무 덴노)[4]에게 황위를 물려주고자 했지만, 7세라는 너무 어린 나이 때문에 황태자로 세우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기에 그녀가 천황으로 즉위하기로 했다.

즉위하기 전의 해에 황후는 전대 덴무 천황 때부터 편찬해온 《아스카 기요미하라령》(飛鳥浄御原令)을 제정, 시행했다. 지토 천황 즉위식의 개략은 덴무 천황의 장례식과 더불어 《일본서기》에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비록 이전의 의식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방패나 창을 줄지어 세워놓는 예는 전에도 있었던 것에 비해, 천신에 대해 축수하는 글을 읽는 것은 지토 천황의 즉위식에서 처음 보이는 것이었으며, 전대에 형식적으로나마 있었던 군신간의 협의나 추대도 없었다.[5] 즉위 이후, 천황은 대규모 인사 교체를 단행하여 다케치 황자를 태정대신(太政大臣), 다지히노 시마(多治比島)를 우대신(右大臣)에 임명했다. 한 사람의 대신(大臣)도 두지 않았던 덴무조의 황친정치(皇親政治)가 수정된 것이었다.

2.6. 양위

지토 천황의 치세 기간 대부분 다케치노 미코가 태정대신의 자리를 맡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쪽 신분은 낮았으나 진신의 난에서 세운 공적 덕분에 정무에 대해서도 신망을 모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공식 황태자였거나, 유력 후보로 지목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케치노 미코는 지토 천황 10년 7월 10일에 훙서했다. 《회풍조》(懷風藻)에는 이때, 지토 천황의 뒤를 누가 이을 것인지를 놓고 문제가 되어, 황족과 신하들이 모여 회의를 가졌고, 가도노노 오키미(葛野王)의 발언이 채택되어 697년 2월에 가루노 미코가 황태자가 되었다고 한다. 8월 1일, 지토 천황은 15세의 가루노 미코에게 양위했다(몬무 덴노). 일본 역사에서 생존 중에 양위한 천황은 고교쿠 천황(皇極天皇) 이래로 지토 천황이 두 번째였으며, 지토 천황은 이후 복위도 하지 않은 채 최초의 태상천황(太上天皇), 즉 상황이 되었다.

양위한 뒤에도 지토 상황은 몬무 천황과 함께 정무를 맡았는데, 몬무 조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다이호 율령》(大寶律令)의 제정과 시행조차도 지토 상황의 의사가 관여된 것으로 여겨진다(이러한 정치 성향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진신의 난의 공신들 중에서 후지와라노 후히토 등 중국 문화에 경도된 젊은 인재들이 대두하고, 지토조의 그림자가 옅은 오사카베 친왕이 재등장하는 등 변화를 주목한 학자도 있다. 지토 천황은 다이호 원년(701년)에 잠시 정무를 그만두고, 요시노 행차를 단행했는데, 이듬해에는 미카와(三河)까지 이르는 긴 여행을 거치면서 진신의 난에서 공을 세운 지방 호족들을 치하했다.

2.7. 죽음과 능묘

다이호 2년(702년) 12월 13일, 상황은 불예(不豫)했고, 22일에 붕어했다. 1년여의 기간을 거쳐 화장되어 덴무 천황의 능에 합장되었는데, 천황의 화장은 이것이 최초의 사례였다. 지토 천황의 능은 지금의 나라현 다케치 군(高市郡) 히나타무라(明日香村) 오사노구치(大字野口)에 있는 노구치 왕묘 고분{野口王墓古墳 혹은 히노구치노오우치노미사사기(檜隈大內陵)}이다. 이 능은 고대 천황의 능묘로서는 희귀하게 그 비정에 이설이나 오류가 없는 능이기도 하다. 남편인 덴무 천황과의 부부합장묘이기도 하다.

다이카 2년에 내려진 <박장령>에 따라 천황으로서는 최초로 화장된 지토 천황의 유골은 남편 덴무 천황의 관 가까이에 놓인 은으로 만든 뼈단지에 담겨져 있었는데, 분랴쿠 2년(1235년)에 능묘가 도굴당해 뼈는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은단지는 도난당했다고 한다. 이 도굴 사건의 전말은 당시의 공경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일기 《메이게쓰기》(明月記)에 기록되어 있으며,
"잿더미가 되었을 망정 다시 탐색해서 주워다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할 것을 심하도다."
라며 붕어하고 500년이 지나 남편 덴무 천황과 헤어지고, 그 유골마저 길거리에 내버려진 지토 천황의 비참한 운명을 한탄하고 있다. 도굴 당시 작성된 《아부키나이 산릉기》(阿不幾乃山陵記)에 석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3. 치세

3.1. 남편의 업적 계승

지토 천황의 치세에는 덴무 천황의 정책을 이어받아 완성시킨, 《아스카 기요미하라령》의 제정후지와라쿄의 조영이 중요한 2대 업적으로 꼽힌다.

또한 관인층에게 무기를 갖추고, 무예를 익힐 것을 장려하면서 남편 덴무 천황의 정책을 충실히 계승했다. 《묘기》(墓記)를 제출하게 한 것도 덴무 천황의 역사 편찬 사업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민정면에서는 《경인적》(庚寅籍)이라 불리는 호적이 작성되었다. 687년 7월에는 685년 이전의 빚에 대해서 그 이자를 면제했으며, 노비 신분을 나누고자 백성과 노비에게 지정된 색의 의복을 입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율령국가 건설, 정비 정책과 함께 지토 천황이 고심한 것은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한몸에 갖추어, 각 황족이나 신하를 회유하거나 지지할 필요가 없었던 남편 덴무 천황의 권위를 자신에게로 옮겨오는 것에 있었다. 지토 천황은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柿本人麻呂)를 시켜 천황을 찬양하는 노래를 짓게 했는데, 히토마로는 관직이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천황의 비호를 받아 그녀가 붕어할 때까지 궁정 시인으로서 천황과 그 힘을 찬양하는 노래를 계속해 지을 수 있었고, 이후로는 지방 관료로 내려갔다.

새로운 수도의 건설은 덴무 천황의 염원이었기 때문에, 이미 덴무 조에 공사가 착수되고 있었다고도 하고, 지토 천황이 처음 시작했다고도 한다. 덴무 천황 말기까지 착수되지 않고 있었다는 설에서는 그 이유를 '백성의 노역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데서, 이세 행차도 덴무 조의 치세와는 미묘하게 다른 점이 있음이 지적된다. 덴무 천황과의 중요한 차이점이기도 한 지토 천황의 잦은 요시노 행차는 남편과의 추억이 있는 땅임과 동시에 남편의 권위를 의식해 그 힘을 빌리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요시노 행차를 제외하면 이세로 한 번, 기이(紀伊)로 한 번 행차했고, 《만요슈》의 기술에 따르면 오미에도 한 번 행차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세 행차는 농사에 방해가 된다는 주나곤(中納言, 중납언) 미와노 다케치마로(三輪高市麻呂)의 간언도 듣지 않고 밀어붙였던 것이었는데, 이 행차는 새로운 수도가 될 후지와라쿄의 조영에 지방 호족층의 협력을 이끌어내려는 의도가 있었음이 지적된다.

생전 덴무 천황이 자신의 병 쾌유를 빌며 건립을 발원했던 야마토국의 야쿠시지를 완성시키고, 칙명에 따라 기원사로 삼았다.

3.2. 외교

덴무 조에 이어 계속해 신라와 통교하는 한편 당나라와는 공적인 관계를 가지지 못했다. 학문승을 비롯한 일본의 여러 유학생들이 신라로 파견되었다. 《일본서기》 지토 4년(690년)조에 보면, 지토 천황은 지쿠고국 상양미군(上陽咩郡, 아가쓰마군上妻郡) 주민 오토모베노 하카마(大伴部博麻)에게
"백제를 구원하는 전쟁에서 그대는 당에 억류되어 포로가 되었다. 그 뒤 하지노 무라지 호도(土師連富杼), 히노 무라지 오유(氷連老), 츠쿠시노 키미 사쓰야마(筑紫君薩夜麻), 유게노 무라지 간보(弓削連元寶)의 네 사람이 당나라에서 일본을 공격하려 한다는 계획을 듣고, 조정에 상주하려 해도 돌아갈 수 없음을 걱정했다. 그때 그대는 부저 등에게 '나를 노예로 팔아서 그 돈으로 귀국해 상주해 달라' 하였다. 그래서 츠쿠시노 키미 사쓰야마나 호도 등은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대는 혼자 30년 가까이 당나라에 머무른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그대가 조정을 받들고, 국가에 충성을 나타낸 것을 가상히 여긴다."
며 조칙으로 토지 등의 상을 주었다고 한다.

3.3. 후지와라쿄 건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지토 덴노 시절, 아스카 시대에서 나라 시대로 건너가기 전 후지와라 지역에 후지와라쿄(藤原京)라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소가씨와 마찬가지로, 원래 후지와라라는 우지가 여기서 따온 이름이었다.

이 수도는 겐메이 덴노 때 나라노 미야코(平城京, '미야코'는 수도를 의미한다.)로 천도해 나라 시대를 열면서 곧 묻히게 되었다. 하지만 후지와라쿄는 과거의 도읍과 달리 계획도시로서 중국과 당나라의 예를 본떠 바둑판처럼 동아시아 율령을 따라 건설된 최초의 도읍이었다. 그간의 발굴에서 출토된 목간들을 통해 그 규모와 형태가 상당했으며 나라 시대의 헤이조쿄와 나카오카쿄, 헤이안 시대의 헤이안쿄 건설 형태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즉 율령을 따른 최초의 수도이자, 후대 계획도시 수도들의 롤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다만 지토 덴노가 후지와라를 수도로 삼은 시절에는 당나라에 외교사절을 보내지 못해 장안성의 구체적인 형태를 몰랐던지라, 《주례》(周禮) <고공기>에 나오는 고대 중국의 도시구조를 재현해서 만들었다. 이후 지어진 수도인 헤이안쿄와 비교해보면 헤이안쿄는 나라 시대 때 당풍의 영향을 진하게 받아 장안성 스타일로 지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4. 신격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일본 신화에 지토 덴노의 정치적 입김이 매우 많이 들어갔으리라고 추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원래 남신이었던 아마테라스 오오카미가 여신이 된 것도 지토 덴노를 신격화했다는 것이다.

덴무 덴노 이전의 모든 대왕(오오키미)을 천황으로 추존했다.

4. 가족관계

  • 아버지: 덴지 덴노(天智天皇)
  • 어머니: 소가노 오치노이라쓰메(蘇我遠智娘)
  • 친형제자매: 오오타노 히메미코(大田皇女), 다케노 미코(建皇子)
지토 천황의 아들은 요절한 구사카베 황자 단 한 사람뿐이었지만, 여제의 손자는 덴무계 황족의 적류(嫡流)로서 나라 시대에 걸쳐 문화와 정치를 장악했다. 그러나 현손인 쇼토쿠 덴노 이후 그 계보는 끊어졌고, 황위는 다시 덴무계에서 덴지계의 고닌 덴노로 넘어가게 되면서 지토 천황의 계통은 종말을 고했다.

고닌 덴노의 황후로서 쇼토쿠 덴노의 여동생이었던 이노우에 내친왕(井上內親王) 소생의 오사베 친왕(他戶親王, 지토 천황의 외손)이 덴지·덴무계 황통의 융합의 상징으로서 황태자로 책봉되었지만, 모반죄로 인해 폐서인되었고, 어머니와 함께 일찍 요절하고 말았다.

이밖에 다케치 황자의 곤손(昆孫)으로 나가야 왕의 정변 이후, 조와(承和) 11년(844년)에 다카시나노 마히토(高階 眞人)의 우지와 가바네(姓)를 받고 신적강하한 미네오 왕(峯緖王)이 있는데, 그도 아들 다카시나노 모치노리(高階茂範)의 아들 다카시나노 모로나오(高階師尙)가 친아들이 아니라는 설이 있으므로 사실상 그를 마지막으로 덴무 천황의 혈통은 단절되었다. 히로나리(廣成), 히로요(廣世)가 신적강하한 손자로 알려져 있는데[6] 역사에서 이름이 지워지긴 했지만 그들을 통해 아직도 지토 덴노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이 살아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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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일본 역사속의 여성 천황 중 여러 모로 튀는 행적을 남기기도 했고, 정말로 '여성 정치인'이라고 부를 만한 인물이라서 그런지 여성 천황 중 소설이나 만화 등 미디어에서 가장 많이 조명된다.

지토 덴노를 다룬 가장 대표적인 매체는《천상의 무지개 - 지토 덴노 이야기》 로 일본의 만화가 사토나카 마치코가 그녀의 일대기를 만화로 그렸다. 1983년에 연재를 시작해 2015년에야 전23권으로 완결된 말 그대로 대작. 드라마CD로도 발매되었는데, 해당 배역의 성우는 나가사와 미키(長沢美樹).

2015년 6월 10일자 <역사비화 히스토리아>에서 지토 덴노를 다루었다. 전술한 사토나카 마치코의 만화 《천상의 무지개 - 지토 덴노 이야기》의 줄거리를 바탕으로 전개되며, 원작의 주요 장면을 캡처하고, 성우가 더빙하는 형식의 보이스 드라마 방식을 도입한 신선한 전개였다. 지토 덴노 역을 맡은 성우는 미즈키 나나. 다만 다큐멘터리 성격상 다소 미화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7]

후지와라 섭관가의 시조인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패왕 후히토》에도 나왔다.

6. 백인일수

百人一首
백인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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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번 지토 덴노(持統天皇)
[ruby(春,ruby=はる)][ruby(過,ruby=す)]ぎて [ruby(夏,ruby=なつ)][ruby(來,ruby=き)]にけらし [ruby(白妙,ruby=しろたへ)]の [ruby(衣,ruby=ころも)]ほすてふ [ruby(天,ruby=あま)]の[ruby(香具山,ruby=かぐやま)]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온 듯하다. 하늘의 가구야마에서 새하얀 빛깔 옷을 널어 말린다 하네

[1] 오호야마토네코아메노히로노히메노미코토[2] 타카마노하라히로노히메노스메라미코토[3] 지토 덴노의 어머니 소가노 오치노이라쓰메와 겐메이 덴노의 어머니 소가노 메이노이라쓰메는 자매간이었다.[4] 원래 황자가 아니라 황손이기 때문에 이름 뒤에 미코를 붙일 수 없었지만 지토 덴노가 후견을 봐주면서 특별히 붙였다.[5] 이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오래된 의례를 답습한 것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으나 새로운 형식을 통해 천황의 권위를 높이려 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6] 다만 《신찬성씨록》 등을 살펴보면 히로요는 있어도 히로나리는 없고, 히로요의 구체적인 세계(世系)는 확실하지 않다.[7] 특히 중간에 진신(임신)의 난이 나오는데 이세 진구(신궁)에서 아마테라스에게 기도하는 오오아마 황자와 그 옆에서 아마테라스가 자신의 몸에 빙의했다며 "내 가호로써 오오아마 군에게 승리를 드리도록 하죠"라고 하는 부분은 아무리 봐주려도 해도 빼도 박도 못하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