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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궁보

진공박에서 넘어옴
파일:왕징웨이 정권 국장.svg
중화민국 난징 국민정부 주석
제1대 제2대
왕징웨이 천궁보
<colcolor=#fff> 중화민국 난징 국민정부 2대 주석대행
천궁보
陳公博 / 陈公博 | Chen Gongbo
파일:천궁보.png
<colbgcolor=#000096> 이름 <colbgcolor=#ffffff,#191919>陳公博 | 陈公博
진공박 | Chen Gongbo
화부(華府)
출생 1892년 10월 16일
청나라 광둥성 남해현[1]
사망 1946년 6월 3일 (항년 53세)
중화민국 장쑤성 쑤저우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왕징웨이 정권 파일:왕징웨이 정권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베이징대학 철학과 학사
컬럼비아 대학교 경제학 석사
직업 관료, 정치인
주석
재임 기간
대행 1944년 3월 ~ 1944년 11월 10일
2대 1944년 11월 10일 ~ 1945년 8월 16일
행정원장
재임 기간
2대 1944년 11월 10일 ~ 1945년 8월 16일
1. 개요2. 생애
2.1. 어린 사회운동가2.2. 공산주의 입문과 전향2.3. 국민당 합류2.4. 국민혁명2.5. 반장전쟁2.6. 장왕합작 체제2.7. 중일전쟁2.8. 최후
3. 주요 경력4. 참고문헌
4.1. 저서4.2.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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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 국민정부왕징웨이 정권의 정치인. 원래는 중국공산당의 당원이었으나 탈당하여 중국국민당으로 전향했다. 중일전쟁일본 제국에 협력하여 왕징웨이의 뒤를 이어 난징 국민정부 왕징웨이 정권의 2대 국가주석이 되었으나 종전 이후 한간으로 처형되었다.

2. 생애

2.1. 어린 사회운동가

1892년 광동성의 관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7년 베이징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 신문화운동5.4운동을 접했다. 대학 재학 시절 1918년 파업과 철시를 요구하는 전단지를 뿌리며 사회운동에 참여했으며 1919년에는 철학과의 과대표로서 오사운동 준비를 위한 모임에 수차례 참석했고 1919년 5월 4일의 시위에도 참가했는데 도중에 대열을 이탈했다. 천궁보는 이에 대해서 한 시위 지도자가 "신화문에 가서 청원을 하되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무릎 꿇고 버틸 각오를 하자!"라고 외치자 유약한 태도에 반감을 가져 대열을 떠났다고 회고록을 통해 주장하는데 실제로는 베이징 대학 내부의 파벌 싸움이 원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학비 마련을 위해 4개 신문사에서 통신원으로 일했는데 5월 4일의 시위 대열에서 빠져나온 것도 스스로가 통신원이라는 자각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천궁보는 훗날 자신이 책벌레였다고 주장했지만 담평산과 함께 신간학회에 참석하는 등 대학 시절부터 매우 정력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졸업 이전 베이징 대학의 학생들을 모아 정론 잡지를 2호까지 간행했고 1920년 대학을 졸업했다.

2.2. 공산주의 입문과 전향

1920년 여름, 대학을 졸업한 천궁보는 광저우로 돌아와 법정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왕징웨이, 랴오중카이 등과 인맥을 쌓게 되었다. 당시 왕징웨이는 광둥성 교육회 회장이었고 랴오중카이는 평의(評議)로 있었다. 1921년 1월 천두슈가 군벌 천중밍의 요청으로 광저우에서 광동성 교육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교육사업을 할때 그의 밑에서 출판과장으로 일했다. 이때 천궁보는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담평산 등과 함께 사회주의청년단을 조직하였으며 1921년 3월 광저우에서 공산주의 소조를 결성, <군보(羣報)>의 편집장을 맡아 공산주의를 선전했다. 또한 반기독교운동 전개에 앞장섰으며 천궁보의 <신청년>에다 글을 기고하고 노동자 조직을 전담하였다. 또한 1921년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이 창당될 때 광동 대표로 참석했다.

하지만 여러가지 정치적 이유 때문에 천궁보와 공산당은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우선 천궁보의 광동 활동은 기본적으로 천중밍의 비호 아래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천궁보는 천중밍의 자금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천중밍을 비판하는 논조를 삼갔으며 천중밍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여 연성자치론을 지지, 임조함, 담평산 등과 함께 쑨원을 환상주의자로 비난하기도 했다. 또한 천중밍과의 합작이 가능한지 알아보고 있던 코민테른의 지시로 천중밍과의 합작을 적극 지지했다. 하지만 1922년 영풍함 사건 이후 천두슈는 천중밍을 격렬히 비판하면서 천중밍과의 관계를 단절하였고 1922년 7월의 2차 전국대표대회 이후 천중밍을 지지했던 임조함을 면직하고 천궁보에게 경고 처분을 내리며 상하이로 소환했다.[2]

징계 조치에 천궁보는 자신의 혐의를 전면부인하며 상하이 행을 거부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 광동성 지부의 간부들 중 담평산을 제외한 간부들도 천궁보에 동조하여 상하이 중앙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다. 또한 영어에 능통했던 천궁보는 마르크스주의를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경제학을 연구하고자 미국 유학을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는데 상하이 중앙은 천궁보에게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소련 유학을 갈 것을 지시했다. 이에 천궁보는 이미 천두슈가 광저우에서 교육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을 적에 동의를 얻은 것인데 새삼 반대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항변했다. 거기에 절대적 기율 복종을 강조하는 공산당의 기풍은 자존심 강하고 자유로운 성격의 천궁보와 상극으로 작용했다.

결국 천궁보는 광동지부의 한 모임에서 공산당과의 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했고 일본을 경유해서 미국으로 떠났다.[3] 여기에 중국공산당은 처음에 유당찰간(留黨察看) 조치를, 이어 1922년 말에 당적 제명 처분을 내렸다.

2.3. 국민당 합류

천궁보는 일본에서 소련 대표 요페와 회담하기 위해 체류하던 랴오중카이와 국공합작 문제를 논한 후 랴오중카이의 소개로 요페와 만나기도 했다. 이때 랴오중카이는 미국행을 포기하고 광저우에서 일할 것을 강력히 권유했으나 천궁보는 미국 유학을 강행했다. 1923년 2월 28일 천궁보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 등록하여 1924년 2월 22일, <중국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논문으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2학기를 더 공부하다가 1925년 2월 랴오중카이로부터 강력한 귀국 요청을 받아 광동대학 교수로 초빙된 후 선금을 받아 유럽 여행을 한후 1925년 봄에 귀국했다. 이때 천궁보는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며 많은 결함을 발견하여 계급투쟁을 부정하게 되었다.

천궁보가 귀국한 직후는 쑨원이 사망한 직후로 객군 양시민, 유진환 등이 1925년 객군 반란을 일으켜 광저우를 점거한 상황이었다. 이 반란이 진압된 후 1925년 7월 1일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수립, 왕징웨이가 국민정부 주석에 추대되었다. 이때 천궁보는 광동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대원수부에서 문고 2편을 작성하고 중앙당부에서 국민정부 조직에 관여했을 뿐인데 당적도 없음에도 랴오중카이의 강권으로 7월 3일 광동성 정부위원 겸 광동성 정부 농공청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왕징웨이의 추천으로 군사위원회 정치훈련부 주임에 임명되었다. 천궁보의 회고에 따르면, 이는 공산당원이 주요 자리를 차지할까 염려한 두 사람의 조치였다고 한다. 이어 랴오중카이가 국민당 농민부장을 사임하면서 천궁보가 그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국민당에 연고도 없는 신인을 왕징웨이와 랴오중카이 두 사람이 너무 총애하자 이를 두고 국민당 우파가 불만을 품는다는 신문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랴오중카이는 천궁보에게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할 것을 권했으나 천궁보는 국민당에 쓸만한 인재가 없어 신통치 않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랴오중카이는 쓸 만한 사람이 없으니 그대를 영입하려는 것이라고 대답했고 천궁보는 정치회의위원, 홍콩 파업 수습 교섭단, 광동대학교장을 역임하며 고속승진했다. 1925년 8월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이 일어난 후 검찰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26년 1월 국민당 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농민운동 경과보고, 청년운동 경과보고,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관련 보고를 올리는 역할을 맡았다. 이 2전대회에서 천궁보는 242표를 얻어 중앙집행위원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천궁보와 깊은 연줄이 있었던 랴오중카이가 죽자 천궁보는 "이제 왕징웨이만이 당 내에서 나의 유일한 친구"라고 할 정도로 상심해했으며, 왕징웨이에 대한 충성심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4]

1926년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자 서산회의파가 이에 호응, 4월 1일 대표를 광저우에 파견하겠다고 결의하자 천궁보는 18차 당무회의에서 서산회의파 대표가 오면 즉시 체포할 것을 제안했고 국민정부는 이를 수용하여 체포령을 내렸다. 이어 장제스가 공산당의 약진을 견제하기 위해 국민당 내부의 유능한 좌파 인물들을 포섭할 때 천궁보도 허샹닝, 덩옌다 등과 함께 포함되었다. 1926년 5월 15일 국민당 2기 2전대회에서 장제스, 탄옌카이, 쑨커, 주페이더, 쑹쯔원, 간나이광, 임조함, 우차오수 등이 <당무정리안>을 발표했을 때 천궁보도 제안에 참여했다. 이후 삼민주의의 체계화 작업에 전념하여 여러 논설과 논문을 발표했다.

2.4. 국민혁명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자 천궁보는 북벌 준비를 위한 전시공작협회를 위해 각군 정치부 대표를 소집하고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정무부장에 취임하여 <북벌군 제1기 정치대강>의 기초작업을 맡았다. 또한 우창 점령 직전인 1926년 9월 17일 덩옌다가 호북성 정무위원회 주임 겸 총사령부 행영주임에 임명되자 천궁보는 호북성 재정위원회 주임 겸 강서성 정무위원회 주임에 임명되었다. 이때 천궁보는 우한에 체류하며 군비 조달, 호북성립은행 설립, 광저우중앙은행이 발행한 대양화로의 화폐 통일 작업을 실시했다. 또한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교섭원에 임명되어 외교부장 천유런을 대행하여 열강과 교섭하였다.

11월 27일 강서성 정무위원회가 정식발족하면서 천궁보는 1927년 2월 강서성 성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재임하였으며 2월 11일 장제스에 의해 중앙당부 조직부장에 임명되었다. 이때는 장제스와 우한의 연석회의 사이의 천도논쟁이 시끄럽던 때인데 천궁보는 장제스를 지지하며 우한으로 파견되어 우한의 정세를 판단,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 1927년 3월 1일로 예정된 3중전회 소집을 앞두고 천궁보는 우한과 난창을 왕복하며 장제스가 주장하는 3중전회 연기론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듯 장제스를 지지했음에도 3월 7일에 개최된 3중전회는 천궁보를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했으며 중앙당부 공인부장 겸 정치위원회 위원에 임명했다.

공인부장으로써 천궁보는 과격해지는 농민과 노동자들의 사회운동을 제어하기 위해 노력했다. 1927년 5월 16일 왕징웨이가 점원조례를 발표하자 5월 18일 천궁보는 이를 기초로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훈령을 기초하여 중앙정치위원회에 통과시켰다. 5월 21일 마일사변이 발발하자 천궁보는 특별조사위원회의 일원으로 임명되어 장사에 파견되었으나 악주에 이르러 더 이상 접근하면 총살시키겠다는 허극상의 위협에 조사를 하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돌아온 이후 농공과 군인을 모두 징계하여 이들의 군사행동을 정지시키자는 조치를 건의했다.

5월 29일 강서성 주석 주페이더가 공산당원들을 추방하자 천궁보는 이를 중국공산당에 해명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7월 12일 총정치부 주임에서 사퇴한 덩옌다를 대신하여 총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불과 사흘 후인 7월 15일, 우한 국민정부마저 국공결렬을 선택하자 영한합작을 위한 협상을 맡았지만 이것이 우한 중앙의 정통성 말살로 이어지는 일이라고 지적하여 왕징웨이로 하여금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 참가를 거부하게 만들었다. 이후 천궁보는 탕성즈가 지배하는 우한으로 이동, 우한 정치분회 정무위원에 선출되었지만 당계전쟁으로 탕성즈가 몰락하면서 왕징웨이와 같이 상하이를 거쳐 리지선장파쿠이가 장악한 광저우로 이동하여 거기서 다시 중앙당부를 회복하기 위해 장황사변을 사주했다가 광저우 폭동이 겹치는 바람에 실패했다. 폭동 진압 이후 천궁보는 영국령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가서 잠시 언론활동에 종사했다.

장제스 계열의 리스쩡, 우징헝, 차이위안페이, 장런제 등의 감찰위원들과 더불어 황샤오훙을 건드리는 바람에 리쭝런의 미움을 샀기 때문에 1927년 12월 중앙감찰위원회 명의로 "천궁보는 덩옌다, 리리싼, 쉬첸과 더불어 모스크바가 인정한 순수 공산당원인데, 천궁보는 아직 믿을만한 결백증명을 한 바 없을 뿐 아니라 장파쿠이, 황기상과 더불어 모의하여 공화(共禍)를 선동하였으니 마땅히 찰간해야 한다."라고 고발했으나 왕징웨이가 장제스와 협력하고 있던 사이라서 어찌어찌 넘어갔다.

2.5. 반장전쟁

국민당의 2차 북벌이 한창 행해지는 동안 천궁보는 재정부장 쑹쯔원의 지원으로 주간정론지 <혁명평론>을 발행하며 국민당 개조를 주장, 1928년 5월에서 1928년 9월까지 18호까지 찍었고[5] 젊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1928년 8월 제5차 중앙집행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장제스의 권한이 강화되자 천궁보는 장제스의 지지자 우징헝과 혁명평론지에서 대판 싸움을 벌이는가 하면 장제스의 맹우인 외교부장 황부의 제남 사건 관련 처리를 두고 맹공을 퍼부었고 후한민을 가지고도 일을 시끄럽게 벌이다가 결국 참다 못한 정부에 의해 정간당했다.

1928년 장제스가 중국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겠다고 발표하자 왕징웨이 등 13명과 연명으로 상하이에서 3전 대회를 장제스가 독점한다고 비난했으며 1928년 중에는 국민당 좌파만의 조직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힘입어 부패한 당권을 개조하자는 이념의 중국국민당 개조동지회, 즉 개조파를 창설하고, 초기 개조동지회의 이념적 성격을 정립했으며 왕징웨이의 귀국 전까지 국민당 좌파를 실질적으로 영도했다. 하지만 개조동지회의 활동 자체는 꽤나 느슨해서 천궁보 스스로도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후 장제스의 개조운동 탄압, 왕징웨이의 프랑스행 권유 등을 받고 개조운동에 소극적이 된 나머지 1929년 1월 24일, 왕징웨이가 있는 프랑스 파리로 가서 잠시 지내다가 호남 사건, 1차 장계전쟁, 1차 장풍전쟁 등이 터지고 서산회의파가 반장을 위한 결집을 호소하는 것을 보고 1929년 6월 영국령 홍콩으로 돌아왔다.

계속되는 반장운동 때문에 제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간나이광과 함께 영구제명 처분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화남 지역에서 탕성즈, 주페이더, 장파쿠이를 회유하여 반장을 선동했으며 북방의 펑위샹과도 손을 잡으려 했다. 이 때문에 2차 장풍전쟁, 2차 장계전쟁, 장당전쟁이 잇달아 터지자 장제스는 구멍위와 천궁보를 정치적 투기꾼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1930년 3월, 왕징웨이의 지시를 받고 왕파친과 함께 타이위안에 파견되어 옌시산 설득에 나섰으며 마침내 1930년 중앙옹호를 유지하던 옌시산이 베이핑에서 확대회의를 개최함에 따라 천궁보는 서산회의파와 합작, 베이핑에서 새로운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중원대전에 참가했다. 1930년 7월 13일 중국국민당 중앙확대회의 소집을 알리는 당무연합선언을 30명과 연명으로 발표했으며 천궁보는 서무과(庶務科)의 책임을 맡았다.

8월 6일, 옌시산과의 회담 끝에 확대회의선언이 발표되고, 천궁보는 중앙당부 조직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9월 1일 베이핑 국민정부가 수립되면서 천궁보는 장쉐량의 반장 진영 참가 설득에 나섰으나 장쉐량은 중앙 옹호를 통전하며 장제스를 돕기 위해 관내로 진출하여 반장파가 크게 불리해졌다. 이에 천궁보는 왕징웨이, 쩌우루, 장지본 등과 함께 베이핑을 떠나 석가장으로, 다시 타이위안으로 피해 약법초안을 완성, 10월 27일 공표했지만 중원대전이 완전히 반장파의 패배로 끝남에 따라 톈진으로 도주하고 1931년 1월 1일 왕징웨이의 성명으로 개조동지회는 해산되었다. 확대회의의 해산 직후 왕징웨이가 "당내에서 반장활동을 용인해주면 개조파는 난징 중앙과 협력하겠다"는 투의 조건부 합작을 난징 중앙에 제시하지만 천궁보는 "난징이 반장활동을 용인해줄 리가 없으며 오히려 족쇄는 다는 일이다"며 격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왕징웨이가 듣지 않자 크게 빈정상한 나머지 홀로 유럽으로 떠나버린다. 물론 천궁보의 예상대로 장제스는 왕징웨이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2.6. 장왕합작 체제

1931년 탕산 사건으로 제1차 양광사변이 발생하자 광저우 국민정부에 합류하고자 했으나 광동파와 광서파에게 괄시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이 때문에 왕징웨이와 천궁보는 빈정상해서 반장 진영에서 이탈, 12월 3일 상하이에서 독자적인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존재감을 과시했으며 영월합작을 위해 하야한 장제스와 합작하여 장왕합작 체제를 도모하게 되었는데 1932년 왕징웨이가 행정원장, 장제스가 군사위원장에 취임하면서 천궁보도 복직하여 난징 국민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허나 장왕합작 체제는 합작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행정원장 왕징웨이의 힘이 거의 없는 체제였고 이에 대해서 왕징웨이는 불만을 천궁보에게 토로했다. 어쨌거나 행정원장 겸 외교부장으로 어느 정도 실권 자체는 누릴 수 있고 선안내 후양외 정책에 있어서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시야가 일치했기 때문에 장왕합작 체제는 1935년 왕징웨이가 총에 맞아 쓰러질 때까지 유지되었다.

1935년 왕징웨이 저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천비쥔과 함께 그를 부축하여 병원으로 옮겼다. 이후 개최된 5계 1중전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수장인 왕징웨이가 총에 맞아 독일로 실려간 상황에서 왕징웨이 파벌이 몰락하여 별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시안 사건이 발생하자 싱가포르까지 왕징웨이를 마중나가서 왕징웨이 권좌 복귀를 위해 뛰어다녔으나 장제스가 국공합작에 합의해서 풀려나면서 순 뻘짓이 되었다. 이후 왕징웨이가 1937년 국민당 상무위원회 주석에 추대되면서 장왕합작 체제는 외형적으로 복구되었으나 이번에는 중일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2.7. 중일전쟁

왕징웨이와 더불어 항전이 중국의 멸망만 앞당길 뿐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천궁보는 전쟁 시작 직후 후스, 천부레이, 저우포하이, 슝스후이, 타오시성, 가오중우 등과 함께 저조구락부를 조직하여 화평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저조구락부의 일원인 저우포하이는 장제스의 항전 정책 고수에 일본이 뭔가 고통을 느낄 때 쯤이면 중국은 이미 죽어 있을 것이라고 빈정거리는 등 항전정책에 반발했다. 이들은 트라우트만 공작이 실패한 이후 예문연구회를 발족하여 일본과의 독자적인 화평교섭에 들어갔다. 그러나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천궁보 자신은 화평교섭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교섭이 거의 끝나고 난 뒤에서야 참여하도록 권유받았다고 한다.

결국 1938년 왕징웨이 공작에 호응, 1938년 11월 29일 청두에 있다가 충칭으로 가서 왕징웨이와 마지막으로 의논한 다음, 왕징웨이와 같이 충칭을 탈출해 쿤밍과 하노이를 경유, 일본 점령지인 상하이로 들어가 왕징웨이 정권을 수립하여 입법원 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왕징웨이 정권은 왕징웨이 일파의 순진한 발상과 달리 괴뢰정부에 불과했으며 왕징웨이 일파에게는 아무런 실권도 없었다. 가오쭝우 등은 일본에게 배신당했다고 길길이 날뛰다가 다이리에게 포섭되어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버렸고 저우포하이는 항전파가 옳았다고 절망하다가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는 아예 충칭의 국민정부와 접촉해서 일본군 뒤통수를 깔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41년 2월 동아연맹중국총회가 설립된 이후에 상무이사에 추대되었다.

1944년 왕징웨이가 죽고 난 이후에 주석대행[6] 겸 행정원장을 맡게 되었지만 실권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일본의 패망이 다가오면서 1944년 9월 5일 최고전쟁지도회의는 충칭에 대해 정치공작을 실시하여 중국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 왕징웨이 정권을 포함한 중국에서 철병하는 대신에 만주국에 대해서는 현상 유지를 할 것을 충칭에 제시했다. 이때 천궁보는 일본 육군차관이자 왕징웨이 정부의 전 고문인 시바야마 켄시로에게 중국의 '호의적인 중립'을 얻기 위해 난징 정부를 해체할 수 있다는 통보나 받게 되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일본 제국원자탄 두방소련군 세례를 맞고 요단강 건너면서 그의 몰락도 같이 다가오게 된다.

2.8. 최후

태평양 전쟁 종결 이후 천궁보는 성명을 발표, "나는 국민정부군이 광복지구로 들어올 때까지 치안을 유지하여 국민정부군에게 광복지구를 물려주려고 한다. 그리고 처분에 따라 과거의 죄과를 속죄하고 싶다."라고 하였으나 8월 28일 독약을 먹고 중태에 빠졌다가 8월 29일에 끝내 죽었다거나 8월 25일 막국강, 란바이성, 하병헌, 진군혜, 잠덕광, 주륭상 등 9인과 함께 일본 오나구를 거쳐 도쿄로 도주했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정확한 행방을 알 수 없는 처지였다.

8월 12일, 주중 일본대사 다니가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음을 알리고 천궁보에게 일본 망명을 권유했으나 천궁보는 "주석으로서 정부관계자의 안전을 끝까지 지켜볼때까지 난징을 떠나지 않겠다."고 이를 거절했다. 8월 21일, 국민정부와 종전협상에 임한 지나파견군 총참모부 소장 이마이 다케오는 중국 측에 일본에 부역한 한간들이 민심을 살핀 공도 있으니 관대한 처분을 원한다는 요청을 전달했으나 국민정부는 이를 묵살하였다. 이를 보고받은 천궁보는 "나는 소년 시절 혁명에 투신한 이래 생사의 갈림길을 수도없이 들락거렸기 때문에 언제라도 각오는 되어 있다. 따라서 이번에도 어떤 특별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라고 답하였다. 하지만 해군부장 임원도의 권고로 자신이 난징에 있으면 충칭정부가 점령지를 접수하는 것에 방해가 될것이라는 이유로 일본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의사를 이마이 다케오에게 전했다. 이마이 다케오는 천궁보를 일본으로 빼내면 장제스가 격노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수락하였다.[7] 8월 25일, 국민혁명군의 난징 진주가 임박해오자 천궁보는 부인 이여장, 여비서 막국강, 정부요인 주륭상, 린바이성, 진군혜, 하병헌, 군사고문 오가와 대위를 대동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천궁보는 장제스의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서 자신은 일본으로 망명하는 것이 아니라 허잉친이 난징을 접수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답시 떠나는 것에 불과하며 자신을 부른다면 언제든지 중국으로 돌아오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려 했으나 편지를 맡았던 일본군 참모의 실수로(...) 편지가 전달되지 않았다.

원래 천궁보는 칭다오를 경유하여 연료를 보급받고 일본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연합군이 8월 25일부로 일본 비행기의 비행을 금지한다고 선포하자 연합군에게 격추되지 않기 위해 연료 보급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직항하였다. 25일 오후 1시, 천궁보는 일본 해군의 미호 기지에 착륙했으며 오나고 시장 사이토의 보호를 받았다. 오나고 시민들이 지나인 스파이들이 나타났다면서 죽창으로 무장하고 천궁보 일행을 죽이려 했으나 시장의 보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9월 1일, 천궁보 일행은 교토로 거처를 옮겼는데 일본 외무성이 호텔을 마련해주었으나 눈에 띤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별장에 숨어들었다. 9월 8일에는 금각사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천궁보는 권총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부인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9월 9일, 허잉친이 오카무라 야스지에게 천궁보를 즉각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 측의 요구가 계속되자 9월 20일, 오카무라는 허잉친의 요구를 상부에 전달했고 9월 25일, 천궁보는 중국비행기를 보내준다면 제발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10월 1일, 고노에 후미마로 전 수상과 회담을 가진 천궁보는 숨겨주겠다는 일본인 지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병을 앓고 있던 부인 이여장을 일본에 두고 중국으로 돌아갔다.[8] 원래 린바이성을 비롯한 일행들도 모두 일본에 숨기려 했으나 이들이 모두 잔류를 거절하여 다 같이 귀국을 결정하게 된다.

천궁보는 후쿠오카를 경유하여 다음날 난징 대교기지에 도착한 후 난징 시민들과 중국 헌병들의 욕설, 침세례를 받으면서 죄수로 전락하였다. 1946년 초, 천궁보는 저민의, 천비쥔과 함께 쑤저우 사자구에 위치한 강소성 제3교도소로 이감되었다. 4월 5일, 천궁보의 재판이 시작되었고 괴뢰정부 수립, 괴뢰군 조직, 아편 매매, 영미에 대한 전쟁선포, 매관매직, 적에 대한 물자 공급, 가짜 화폐의 발행, 적을 위해 장정을 징집, 국민에 대한 노예화 교육, 항일애국자 살해 등 10가지 매국을 저지른 죄로 기소되었다. 천궁보는 자신의 죄를 열렬히 변호했으나 4월 12일, 10개 죄목에 대해 모두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 공권 몰수, 가족들의 생계를 제외한 최소한의 자산을 제외한 나머지 재산 몰수가 선언되었다. 천궁보는 항소 의사가 없다고 했으나 이여장이 대신 항소하였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여장의 항소를 기각하고 5월 14일, 사형을 확정하였다. 이에 대해 상하이와 난징의 시민들은 "죽일 필요는 없다", "죽이긴 아까운 인물이다"라고 동정을 표했다.

6월 3일 오전 8시, 검찰관이 천궁보를 호출하였고 천궁보는 죽음을 직감하고 푸른 장삼에 흑색 비단바지, 검은 구두로 갈아입었다. 옆방에 구금된 저민의와 여죄수동에 수감된 천비쥔과 악수하고 작별인사를 하였는데 이때 천비쥔은 "뜻밖에도 우리 세 사람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이리로 옮겨와 당신이 먼저 죽음을 맞게 되었다. 더구나 당신의 죄보다 나의 죄가 중대한데... 당신은 희생된 것이다. 당신 집안의 앞으로의 문제는 내가 전력을 다하여 뒤처라하겠다"고 울부짖으며 배웅했다. 형장에 선 천궁보는 유언이 없냐는 질문에 자신이 유언장을 반밖에 작성하지 못했으나 굳이 더 작성할 필요는 없다고 답변했다. 가족에 대해 검찰관이 더 묻자 어서 형을 집행하달라고 하면서 다만 손은 묶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검찰관, 서기관, 교도관 등과 모두 악수한 후 자신의 형을 집행할 형리 주굉범과 마지막으로 악수한 후 후두부에 총알이 맞아 오른쪽 뺨을 뚫고 나간 후 절명했다. 검찰처 검시관 왕춘영이 사망진단서를 끊어주었고 시신은 그날 저녁 유족에게 인도되었다.

3. 주요 경력

중화민국(왕징웨이 정권) 주석
초대 2대 왕징웨이 정권 멸망
왕징웨이 천궁보
중화민국(왕징웨이 정권) 행정원장
초대 2대 왕징웨이 정권 멸망
왕징웨이 천궁보

4. 참고문헌

4.1. 저서

  • 중국국민혁명 지도자의 사상과 행동, 민두기 등 공저, 지식산업사.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중국, 대만의 친일파재판사, 마스이 야스이치, 한울.

4.2. 논문

  • 蔣介石의 '第1次 下野'와 復職, 김영신, 중국학보 44권, 한국중국학회.
  • 中央特別委員會의 役割과 活動, 김영신, 동국사학 36권, 동국역사문화연구소.
  • 광주국민정부의 北伐과 蔣介石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55권 55호, 중국학연구회.
  • 9·18 사변 전후의 정국과 南京政府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61권 61호, 중국학연구회.
  • 중일전쟁 전후 대일 협력자 '汪精衛集團'의 형성(1928~1938), 박상수, 사총 65권 65호,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 중일전쟁기 周佛海를 통해본 친일협력, 김정현, 아시아문화연구 11집,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 조우 포하이(周佛海)의 일기를 중심으로 본 항일전쟁시기 대일합작(對日合作) 문제에 대한 한 검토, 황동연, 코키토 62집,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 唐生智와 武漢國民政府, 나현수, 중국근현대사연구 29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國民革命時期 汪精衛와 反帝問題, 배경한, 중국근현대사연구 47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제 1 차 국공합작기 왕정위의 (汪精衛) 정치적 역할과 혁명전략의 변화 - 무한국민정부 시기를 중심으로 -, 이재령, 사학지 25권, 단국대학교사학회.
  • 무한 국민정부 성립기 '천도논쟁', 황동연, 학림 13권, 연세사학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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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광저우.[2] 상하이 중앙의 주장에 따르면, 천궁보는 쑨원을 지지하라는 중앙의 지시에 불복하고 천중밍을 지지하고 중국국민당과의 연합전선을 반대했다고 한다.[3] 왕징웨이와 랴오중카이도 미국 유학 대신에 법학전문학교 교장직을 제안했으나 천궁보는 거부했다. 그러자 왕징웨이는 대신에 유학비를 주선해주고자 했으나 성공하진 못했다.[4] 천궁보는 자신의 이런 충성심을 '헌신적인 우정'이라고 표현하였다.[5] 이때 구멍위도 쑹쯔원의 지원을 받아 <전진> 잡지를 발간했다.[6] 본래는 주석직을 이어받았으나, 천궁보가 주석대행이라는 직함을 고집했다는 말이 있다.[7] 여기서 한가지 재밌는 것은 임원도는 일본이 패망하고 제일 먼저 국민혁명군 전진지휘소를 선언하고 장제스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천궁보는 일본으로 가라는 임원도의 개인적인 제안을 장제스의 의사로 착각했을 수 있다는 분석이 있다.[8] 마침 실수인지 국민정부는 이여장의 송환만은 요구하지 않았다. 이여장도 11월에 중국 귀국을 결정하였으나 장강에 도착하였을때 한무리의 중국 헌병들에게 연행되었고 재판에 회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