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000000><colcolor=#ffffff> 안톤 체호프 Антон Че́хов|Anton Chekhov | |||
본명 | 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 ||
국적 | [[러시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
출생 | 1860년 1월 29일 | ||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노슬라프 현[1] | |||
사망 | 1904년 7월 15일 (향년 44세) | ||
독일 제국 바덴바일러 | |||
직업 | 극작가, 소설가, 의사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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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의학 / 학사) | ||
사조 | 리얼리즘 | ||
활동 기간 | 1878년 – 1904년 | ||
신체 | 185cm | ||
종교 | 무종교[2] | ||
부모 | 아버지 파벨 예고로비치 체호프 어머니 예브게니야 체호바 | ||
배우자 | 올가 크닙페르 (1901년 결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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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Не говори мне про свет луны; покажи мне лучше мерцание света на треснутом стекле.
내게 달빛에 대하여 말하는 대신, 깨진 유리창에 비치는 한 줄기 빛을 보여 줘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활동했던 러시아의 극작가, 소설가, 의사.[3]내게 달빛에 대하여 말하는 대신, 깨진 유리창에 비치는 한 줄기 빛을 보여 줘라.
알렉산드르 푸시킨에서 시작되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레프 톨스토이로 절정을 이루었던 러시아 문학 황금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대문호로 꼽힌다. 러시아에서는 체호프를 "황혼의 작가"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2. 생애
1860년 러시아 제국의 타간로크(Таганро́г)에서 태어났다.[4]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노였다. 할아버지 대에 자수성가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고 어느 정도 먹고 살 정도의 규모의 잡화상을 운영하였으나 아버지 대에 가게가 파산하여 집안이 몰락하였다. 맏이인 체호프는 일찍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는데, 당시 의대생이었던 체호프는[5] 푼돈이라도 벌 목적으로 취미로 쓰고 있었던 단편소설들을 시험삼아 여러 출판사에 보내 보았다. 그런데 이 원고가 호평을 받으면서 그도 자신의 문학적 재능에 크게 고무되었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전업작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당시 유럽의 관점에서 보면 하층민이 그냥 대학도 아닌 의대를 나온 것도 상당히 의외인 일인데 심지어 귀족들의 직업으로 여겨진 문학가의 길을 택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케이스였다. 냉전 시절까지는 러시아 제국 시대의 역사가 외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서방의 문학가와 사학자들은 당연히 그가 귀족 출신일 것이라고 확신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알려져 있었지만 소련 붕괴 후 러시아 혁명 이전의 역사가 대대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후에야 비로소 체호프가 하층민 출신의 문학가였다는 것이 알려졌다.
엄청난 수의 단편 소설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다. 1886년 한 해에만 무려 116편의 단편을 썼고 1887년엔 69편을 썼다. 작가 생활 초기에는 정말 취미 정도의 이야기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글을 많이 쓰게 되면서 점점 작가로서 성장하며 진지하고 철학적인 주제를 내세우게 되었다.
당시 유럽 출판계에서는 원고료를 단어 수와 비례하게 매겼기 때문에 이 시기의 유럽 소설들은 대부분 분량이 매우 방대했다. 도박으로 빚을 많이 졌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이 유별나게 긴 것도 이 때문이다.[6] 반면 체호프는 반대로 간결하면서도 재미있는 글을 쓰는 경향을 보였다.
이후 1890년 체호프는 작가로서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계기가 된 시베리아 횡단 및 사할린 여행을 떠났다. 이전까지 체호프는 레프 톨스토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이 여행에서 얻은 경험을 계기로 체호프 본인의 독자적인 사상을 갖게 되었으며 더불어 여행 경험을 토대로 체호프는 여행기 <시베리아에서>와 사할린 관찰 보고서인 <사할린 섬>을 집필, 출판하였다. 사회 고발적인 성격이 강한 수필이다. 당시의 시베리아나 사할린은 유배지이자 러시아 제국에서도 가장 변방이었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대다수가 가난은 물론이며 정부의 탄압과 무관심에 시달렸던 지옥같은 곳이었다. 의사이기도 한 체호프는 학부생 때 그랬던 것처럼 여행 중에 무상으로 주민들을 진료해 주기도 했는데 이 덕분에 소련에서도 인민을 위하여 봉사한 작가라고 존경받았다.
불행히도 체호프는 이 여행 이후 결핵에 걸려 자주 앓아눕기 시작했다. 그를 걱정하던 형과 아버지도 결핵으로 죽어서 그도 전염되었다는 설도 있고 시베리아 여행에서 환자들을 진료해 주면서 전염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그는 결핵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자 자신이 언제든 곧 죽을 수 있음을 각오하며 살았다고 한다.
1900년에는 러시아 문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천되어 회원이 되었지만 2년 뒤에 아끼던 후배인 막심 고리키가 반체제 혐의로 아카데미에서 제명 처리되자 그는 이를 반대하였다. 아카데미에서는 저명 인사였던 그를 설득했지만 스스로 아카데미에서 탈퇴하였다.
1901년 5월 25일에 자신보다 8살 연하인 33세의 배우 올가 크닙페르(Olga Knipper,1868~1959)와 결혼했다. 하지만 점차 결핵 증세가 심해지기 시작한다.
1904년 1월 17일 자신의 새 연극 <벚꽃 동산>이 초연될 때 그도 무대에 나와서 인사를 했는데 그야말로 곧 죽을 사람을 연상시킬 정도로 쇠약해진 얼굴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관객들이 "보내시오! 제발! 안톤 파블로비치를 제발 병원에 보내시오!" 라고 소리를 질렀고 결국 체호프는 연극이 끝나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병원에서 치료도 받고 독일 바덴바일러에서 요양도 하면서 조금 건강이 괜찮아진 체호프는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여섯 달도 못 가서 1904년 7월 15일 밤에 갑자기 고열과 여러 증세를 보였으며 벌떡 일어나서 독일어로 "나 죽네(Ich sterbe/이히 슈테르베)!"라고 소리쳤다. 독일인 의사가 와서 진료했으나 얼마 안 가 의사는 조용히 청진기를 내리고 고개를 돌리며 말하길 "마지막 가는 길에 샴페인을 주도록 하세요." 이 말에 아내인 올가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샴페인을 따랐고 결국 마지막으로 샴페인을 입에 머금은 그는 미소를 지으며 유언을 남겼다.
"Давно я не пил шампанского."
"얼마만에 마셔 보는 샴페인인지."
그리고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렇게 희곡 쪽에서 구태의연한 러시아 사회를 향해 의미있는 사회적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는 그의 작품세계가 점점 원숙미를 더해가던 중 한창 젊은 나이인 44세로 요양하던 독일 바덴바일러에서 요절했다."얼마만에 마셔 보는 샴페인인지."
러시아 정부는 그의 시신을 특별히 냉동열차로 운반해 조국에 묻힐 수 있도록 배려했다. 비슷한 시기에 병으로 죽은 러시아 제국 장군인 표도르 켈러(1850~1904)의 장례식이 열렸는데 체호프의 죽음을 애도하러 온 사람들이 착각하여 켈러의 장례식에 참석한 일도 있었다. 체호프는 노보데비치 무덤에 묻혔는데 니콜라이 고골 등 러시아의 여러 유명 예술가들도 묻힌 곳이다.
레프 톨스토이가 무척 아끼던 후배였기에 톨스토이와도 여러 번 만났고 체호프도 톨스토이를 존경하였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다 보니 체호프가 죽었다는 소식에 톨스토이는 매우 슬퍼했으며 당연히 장례식에 참석했다.
아내 올가와의 결혼 생활은 불과 3년뿐이었고[7] 둘 사이에서 자식은 없었다. 올가는 남편과 사별한 후에도 배우로 꾸준히 활동하며 장수를 누리다가 55년 만인 1959년에 만 90세로 사망했다. 그녀는 소련 시절에도 '인민을 위하여 봉사한 작가'라고 호평받으며 더 많이 출판되던 체호프의 책과 연극, 영화에 대하여 일부 판권을 인정받아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게 지낼 수 있었으며 체호프를 그리워하는 회고록도 썼다.
고향인 타간로크에는 그를 기념하는 문학 박물관과 오페라 발레극장이 있다.
3. 작품 세계
수많은 후대의 소설가들이 체호프의 단편 소설과 문체에 영향을 받았는데, 레이먼드 카버, 어니스트 헤밍웨이, 버지니아 울프, 서머싯 몸[8], 캐서린 맨스필드, 네이딘 고디머[9] 등 그 이름을 나열하기도 버거울 정도다. 작품의 소재도 러시아 농민들의 삶이나 공무원들의 고생부터 말도둑, 심지어 탐정물까지 쓴 적이 있을 정도로 그 범위가 매우 다채롭다.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단편소설 중 하나라고 극찬하기도 했다.[10]글의 길이가 대체적으로 짧은 편이며 개중엔 단 몇 페이지에 불과한 작품[11]도 있다.
아무튼 이런 단편을 한 해에 100편 넘게 쏟아냈다. 이렇다 보니 아직까지 그의 단편들이 전집 수준으로 번역되지는 못하고 있으며 그나마 나온 것들도 출판사별로 제각기 중복되어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2020년을 기준으로 대표작들을 두루 포함하여 가능한 한 중복을 피해서 읽고 싶다면 민음사, 열린책들, 펭귄, 문예 역본을 차례로 읽으면 된다. 범우사에서도 덜 알려진 단편 위주로 선집을 낸 바 있다. 체호프 단편 수록 작품 정리
이처럼 소설가로서의 위상도 독보적이지만 극작가로서의 명성이 더 높다. 노르웨이의 헨리크 입센, 스웨덴의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와 함께 현대 희곡의 아버지로 꼽힌다. 전 세계 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함께 가장 많이 공연되는 극작가이다. 러시아 근대문학을 배울 때도 소설가로서보다는 극작가로서 더 쳐주는 경향이 짙고 러시아인들은 체호프를 소설가라기보다는 극작가로 생각하는 편이다. 그 자신도 문단보다는 연극계 쪽으로의 인연이 더 깊었다. 부인 올가도 잘나가는 모스크바 예술극단의 스타급 배우였다.[12] 러시아의 연극배우 지망생들에게는 셰익스피어 작품 이상으로 파고들어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특히 연기와 연출의 방법론을 두고 19세기 러시아의 스타니슬랍스키와 메이어홀드가 논쟁을 벌였을 때 그 대상이 체호프의 걸작 벚꽃 동산을 어떻게 무대에 올릴 것인가가 주제였기 때문에, 배우와 연출가들에게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작가이다. 서브텍스트라는 개념이 바로 체호프의 연극의 극화 과정에서 심도 깊게 연구된 개념이다.
4대 장막극으로 불리는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 동산 등이 있다. 체호프가 4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다.
체호프의 총이라는 클리셰 법칙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1막에서 벽난로의 총이 공들여 묘사되었다면 그 총은 극이 끝나기 전에 적어도 한 번은 발사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복거일이 이영도의 작품을 비평하면서 체호프의 총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체호프의 총과 반대되는 개념이 바로 맥거핀인데 중요한 소재인 것처럼 초반부에 등장하였다가 서사를 진행시키는 기능만 수행하고 그 떡밥은 슬며시 사라지게 하는 서사 기법으로 영화감독 앨프리드 히치콕에 의해 유명해진 서사 기법이다.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을 쓴다는 인상이 있는데 관리의 죽음, 드라마 같은 유머러스한 작품도 많이 썼다.
당연히 모국 러시아에서는 위대한 대문호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러시아 언론매체에서 늘 열 손가락에 드는 작가로 나올 정도.
체호프의 소설 중 하나인 6호 병동을 읽고 '나 자신이 '6호 병동'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두려워진 나는 창 밖으로 뛰쳐나갔다'는 평을 남긴 뒤 큰 충격을 받아 혁명가가 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블라디미르 레닌이다. 본인이 자기 입으로 밝힌 이야기이다.
4. 기타
- 고려대학교의 교호에 들어 있는 '체이홉'이란 단어는 안톤 체호프를 뜻한다.
- 체호프의 작품들은 연극영화과 연기입시에서 엄청 자주 나온다. 일단 체호프의 작품이 셰익스피어에 비해서는 엄청 근현대적이고[13] 캐릭터도 다양하고 각 캐릭마다 독백이 많기 때문에 연기입시에서 단골로 준비해 간다.
- 상술되어 있듯이 세계 문학사에서 단편 소설, 희곡 2개 부문에서 동시에 최고 작가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20세기 최고의 문학비평가인 해럴드 블룸은 자신의 저서 '세계 문학의 천재 100명'에서 핵심적인 유럽 극작가 5인 중 하나로 꼽을 정도. 세계 역사상 최고의 소설가로 불리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희곡에서 소설만큼 평가받지 못했고 근대 수필의 효시이자 최고의 수필가인 미셸 드 몽테뉴는 다른 문학 장르에 영향을 주긴 했어도 본인이 직접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만큼 단편 소설, 희곡 등 2개 이상의 여러 분야에서 세계 문학사에 모두 자신의 발자취를 남긴 체호프는 굉장히 드문 사례인 것. 이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극소수의 인물만 세운 업적이다.[14]
[1] 러시아 로스토프주 타간로크[2]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해선 꽤나 말을 아꼈기에 추정하기 쉽지 않지만 대체로 유신론적 불가지론자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본다. 일견 무신론자보다 더 회의적인 것 같지만 어쨌든 본인의 편지에선 "무신론자가 아니"며 "주님을 찬양한다"고 하기는 했다.[3] "의학은 나의 아내요, 문학은 나의 애인이다." --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4] 현재 러시아 남서부 로스토프주에 위치한 도시로, 아조프 해와 접한다.[5] 이때는 아직 학부생 신분이긴 했지만 가난한 사람이 병원 갈 돈이 없어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환자의 집까지 찾아가서 기초적인 치료를 무료로 해 준 적이 많았다고 한다.[6] 다른 동네 이야기긴 하지만 프랑스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나 빅토르 위고의 작품들이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주제의식에서 벗어나지는 않는 러시아 소설에 비해 프랑스 소설은 소설의 주된 서사 진행에서 이탈해서 딴소리를 늘어놓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노골적인 분량 늘리기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편.[7] 또한 올가가 연극배우 활동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적지 않았고 때문에 3년 동안에도 부부가 함께했던 시기는 길지 못했다. 대신 두 사람은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400편이 넘는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으며 이들 내용은 체호프의 만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8] "인물 간의 대화를 체호프만큼 생생하게 전달하는 작가는 지금껏 없었다."고 평했다.[9] 199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남아공의 소설가로 "체호프가 없었다면 우리 작가들 가운데 누가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평했다.[10] 한국 번역본에서는 가장 위대한 단편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one of 가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이 작품은 클리셰 파괴로도 유명한데 특히 결말에서 두 연인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게 아니라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 고민하며 끝나서 '끝나지 않는 이야기'란 인상을 주었다고. 한편으론 이런 결말에 익숙하지 않던 독자들을 당황시키기도 했다.[11] Flash Fiction(엽편)이라 불리는 종류의 소설들로 약 300자 내외의 분량으로 이루어진 단편들이다. 이런 쪽을 주로 다루는 작가도 있는데 이 장르의 시초는 이솝 우화로 유명한 이솝이나 일본의 SF 작가 호시 신이치가 대표적이다.[12] 올가는 체호프의 희곡 대표작인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자매 등에 출연한 바 있었고, 이를 계기로 체호프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13] 셰익스피어는 1564년, 체호프는 1860년생이다.[14] 셰익스피어의 경우 시는 소네트 집을 남겨 역대 최고의 시인 중 하나로 평가받았고 희곡은 햄릿을 비롯한 대작들을 수십 편 남겼다. 게다가 이들 희곡은 운문 형태로 대단히 시적인 작품으로 만들었다.